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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끊어질 지라도 (롬 9: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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끊어질 지라도 (롬 9:1~5)

책에서 읽은 내용인데 정말로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하는 글이어서 소개하며 설교를 시작하려고 합니다.

이스라엘 국민들은 예루살렘 신시가지에 ‘유대인 학살 기념 박물관’을 만들었는데 그 박물관을 철저하게 이스라엘이 독일에게 당한 치욕을 기억하도록 하기 위하여 만들어졌다는 것입니다.

‘유대인 학살 기념 박물관’에 들어가면 처형된 유대인들을 나라별로 분류하여 한 나라에 한 기둥 씩 수많은 기둥들을 세워놓고 그 곳에서 희생된 유대인들을 추모하도록 해놓았습니다.

뿐만 아니라 어린이 희생관에 들어가면 실내를 어둡게 하고 수많은 대형유리들을 설치해 촛불이 방 전체를 빛나게 해 놓고 하루 24시간, 일 년 365일 내내 나치에 의해 처형된 120만 명의 유대인 어린이들의 이름을 틀어주면서 그 때의 참상을 잊지 않으려고 애를 쓰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박물관의 가장 중요한 압권은 수많은 참혹한 처형기구, 잔혹한 처형 장면, 학살 현장을 담은 사진이나 증거물들은 수집해 놓아 당시에 유대인들이 당한 수치를 고스란히 볼 수 있도록 전시를 해 놓은 것과 더불어 전시관 2층에 쓰여 있는 글귀라는 점입니다.

이렇게 쓰여 있습니다.
"Forgetfulness leads to exile, while rememberance is to secret of redemption."

해석을 하면 이런 뜻입니다.
‘망각은 포로상태로 이끌지만, 기억은 구원의 비밀이다.’

무슨 의미인지 아십니까?

이스라엘이 기억하고 싶지 않은 치욕의 역사를 몸부림을 치듯 다시 기억하는 이유는 다시는 나라를 빼앗기거나 외세에 의해서 수모를 당하지 않기 위하여 역사의 아픔을 잊지 않겠다는 민족적인 결의라는 것입니다.

왜 우리는 이스라엘이 그토록 무서운 저력으로 주변 나라들의 공격에도 굴복하지 않는 강력한 나라가 되었는지를 이 글을 통하여 알게 되었는데 그것은 한 나라의 힘은 결코 군사력이나, 경제력에 있지 않고 국민의 정신력에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는 좋은 간접의 경험이었습니다.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앞에서 전술한 말씀은 오늘을 사는 우리들에게 너무나도 절실한 내용이 아닌가 싶습니다.

강해설교의 유익은 순서에 따라 본문이 정해지기 때문에 의도적으로 누구를 표적삼아 설교를 한다는 시비를 걸 수 없다는 장점이 있는 반면에, 반대로 부담스러운 본문을 설교자가 피할 수 없다는 단점도 있습니다.

우리가 함께 기도하는 것처럼 6월은 나라와 민족을 위하여 기도하는 달입니다.
오늘은 로마서 34번째의 강해 시간인데 공교롭게 6월 둘째 주일의 본문으로 순서가 로마서 9장이 되었습니다.
공교롭게도 오늘은 설교의 내용이 바울이 갖고 있었던 민족주의에 대하여 설교를 해야 합니다.
조금 더 친숙한 단어로 표현하면 바울의 애국심을 이야기해야 하는 주일입니다.

설교자로 다른 때면 모르겠지만 지금의 국가적인 상황에서 이 설교를 해야 하는 것이 참으로 부담스럽습니다.
왜냐하면 설교자는 대중적인 설교를 행할 때 좌우로 치우치지 말아야 하기 때문입니다.
더군다나 우리 지역처럼 여당적인 색채가 강한 도시에서 목사가 설교를 치우침 없이 설교를 한다는 것은 보통 부담스러운 일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목사는 하나님의 말씀에 의지하여 성경적인 말씀은 목에 칼이 들어와도 외쳐야 하기 때문에 바울의 고백에 의지하여 오늘 설교를 아주 객관적으로 성령에 의지하여 선포하려고 합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의지하면서 말입니다.  


본문을 소개합니다.
로마서는 총 16장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로마서를 3등분하여 설명하기를 좋아하고 또 그렇게 그 동안 각종 성경공부를 통하여 가르쳤고 또 앞으로도 그렇게 가르칠 것입니다.

1단락은 로마서 1-8장입니다. 
이 단락은 하나님의 보편적인 구원의 방법론을 설명하는 단락입니다.

2단락이 있습니다.
9장부터 11장까지입니다.
이 부분은 1단락과 구별되게 유대인들의 구원의 방법론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다시 말하면 1단락이 이방인들을 포함한 하나님의 구원론을 소개하고 있다면 2단락은 유대인들만의 구원론을 말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마지막 3단락이 있습니다.
12장부터 16장까지입니다.
이 부분은 누차 말한 것처럼 구원을 받은 백성들의 삶에 대하여 강조하는 부분입니다.

장황하게 로마서의 3단락을 설명한 이유가 있습니다.
그것은 오늘부터 살펴보는 단락은 특별히 유대인들을 위한 구원론의 기록임을 전제하고 싶었기 때문입니다.
이 전 이해를 하셔야 본문의 이해가 수월합니다. 

이제 본문으로 들어가 봅니다.

바울은 8장까지 이방인들을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구원의 사랑을 선포하다가 갑자기 9장에서는 시선을 바꾸었습니다.
유대인들에게로 말입니다.
그리고 유대인에게로 시선을 돌리자 갑자기 8장의 분위기와는 달리 무거운 분위기가 연출됩니다.

본문 1-2절을 보겠습니다.
“내가 그리스도 안에서 참말을 하고 거짓말을 아니하노라 나에게 큰 근심이 있는 것과 마음에 그치지 않는 고통이 있는 것을 내 양심이 성령 안에서 나와 더불어 증언하노니”

바울이 자신이 갖고 있는 영적인 부담감이 있음을 토로하고 있습니다.
바울에게 있어서 이 부담감은 엄청난 부담이요 고통이었습니다.
그래서 1-2절에서 바울은 두 가지의 단어를 연하여 쓰고 있습니다.
‘근심’과‘고통’이라는 단어입니다.

도대체 무엇이길 래 바울을 이토록 괴롭히고 있는 것입니까?
바울을 괴롭히고 있는 대상을 본문 3절은 알려줍니다.
“나의 형제 곧 골육의 친척을 위하여 내 자신이 저주를 받아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질지라도 원하는 바로라”

그렇습니다.
바울의 고민은 자신의 조국이요 같은 민족이었던 유대인들이 예수를 믿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자신은 이방의 빛으로 사도로 전도 여행을 통하여 수많은 영혼을 예수님에게로 돌이켰는데 실상 자신의 동족들은 도리어 예수를 거부하고 있음에 대한 괴로움을 토로하고 있는 것입니다.

바울의 이 고백은 우리가 이미 로마서 2,3장을 강해하면서 전 이해를 가진 적이 있습니다.
주님은 유대인을 하나님의 선민으로 택하셨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하나님이 구원을 하시는 백성들은 자신들 이외에는 존재하지 않는다고 확신했습니다.

동시에 우리들처럼 할례를 받지 않는 백성들은 하나님의 구원을 도저히 받을 수 없는 존재임을 선언하면서 예수 그리스도를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구원하기 위해 이방을 먼저 택하셨고 이방인들이 구원을 받게 하심을 유대인들을 시기 나게 하셨음을 이미 살펴보았습니다.

동시에 바울을 통하여 그러므로 구원을 받은 백성(영적인 유대인)들은 표면적으로 육신의 할례를 받은 자가 아니라 이면적으로 마음에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할례를 받은 이면적 그리스도인임을 선포하였음을 우리는 이미 공부했습니다.

롬 2:28-29절입니다.
“무릇 표면적 유대인이 유대인이 아니요 표면적 육신의 할례가 할례가 아니니라 오직 이면적 유대인이 유대인이며 할례는 마음에 할지니 영에 있고 율법 조문에 있지 아니한 것이라 그 칭찬이 사람에게서가 아니요 다만 하나님에게서니라”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이렇게 예수를 믿어야 이면적인 유대인이 됨으로 구원을 받게 된다는 것을 알게 된 바울은 아주 쓰라린 마음으로 자신의 동족인 유대인들을 향하여 심한 근심과 고통의 심정으로 본문에서 비장의 선언을 하고 있습니다.

본문 3절을 다시 봅니다.
“나의 형제 곧 골육의 친척을 위하여 내 자신이 저주를 받아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질지라도 원하는 바로라”

바울의 이 고백은 정말로 귀한 고백이 아닐 수 없습니다.
바울에게 있어서 예수님은 누구이십니까?
한 마디로 바울의 전부였습니다.

그러기에 바울이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빌 1:20-21절입니다.
“나의 간절한 기대와 소망을 따라 아무 일에든지 부끄러워하지 아니하고 지금도 전과 같이 온전히 담대하여 살든지 죽든지 내 몸에서 그리스도가 존귀하게 되게 하려 하나니 이는 내게 사는 것이 그리스도니 죽는 것도 유익함이라”

바울이 예수님을 사랑한 것은 인간이 표현할 수 있는 모든 표현으로 성경에서 이미 알려주고 있습니다.
이렇게 바울이 삶의 전 인생을 걸었던 예수였는데 오늘 본문에서 무엇이라고 고백합니까?
아주 쉬운 말로 표현합니다.

‘만약에 내 민족인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믿기만 한다면 나는 예수님에게서 떨어져 구원을 받지 못하는 존재라고 해도 그것을 받아들이겠다.’

이런 고백입니다.
어떻게 이럴 수가 있습니까?
도대체 어떻게 이럴 수가 있단 말입니까?

결론은 한 가지입니다.
바울의 나라사랑 때문입니다.
바울의 민족을 사랑하는 애국심 때문입니다.

지난 금요일에 김 전도사님의 남동생이 결혼을 할 여자 친구를 데리고 누나에게 인사를 왔습니다.
장차 시누이 될 누나에게 인사를 시킬 요량으로 왔다가 저에게도 인사를 와서 잠시 만나 기도해 주고 교제를 했습니다.
제 방에 들어와 차를 한 잔 나누고 이런 이야기 저런 이야기를 나누며 신앙적인 격려를 해 주었습니다.

결혼할 자매를 보니까 인상도 좋고 맏며느리 감 같고 해서 이다음에 며느리 심사하는 셈 치고 푸근하게 대해주었는데 그런데 옆에 앉아 있는 김 전도사의 얼굴은 막상 별로 얼굴이 좋아 보이지를 않았습니다.
도리어 찬바람이 쌩쌩 불었습니다.

누나를 제쳐두고 먼저 장가를 가는 남동생이 미워서 그런 것 같지는 않고 아직 결혼식도 올리지 않았는데 장차 시누이의 진면목을 보여주는 것 같이 쌩하고 앉아 이었습니다.

두 사람을 보내고 김전도사에게 말해 주었습니다.
시누이 시집살이를 벌써부터 한다고 지청구를 주었습니다.
올케 될 자매에게 잘 해주라고 당부했습니다.

이렇게 말했더니 김전도사가 한 마디를 했습니다.
‘마음은 그렇게 해야 하는데 이상하게 약 오르고 속상해요.’

제가 너무 잘 압니다.
누나, 동생의 사이가 너무나 좋은 것을 말입니다.
그토록 좋은 사이에 남동생에게 여자 친구가 생겼고 아직 결혼도 안 했는데 은근히 남동생을 빼앗기는 것 같은 심정을 왜 이해하지 못하겠습니까?

그런데 역으로 생각하면 이것이 정상이 아니겠습니까?
사랑하는 형제애, 남매애가 바로 이런 것이 아니겠습니까?
내 남동생이나 형제가 잘 되는 것을 보면 정말로 눈물이 날 정도로 행복하고 내 누이나 여동생이 불행해 지는 것을 볼 때 또 눈물이 날 정도로 안타까운 것이 바로 가족 사랑이 아니겠습니까?

오늘 본문에서 바울은 자신의 형제 즉 골육 친척들이 예수님에게로 돌아만 올 수 있다면 자신은 예수님에게 끊어져도 상관이 없다는 말이 어떻게 들리십니까?
정말로 바울이 예수님에게서 저주를 받아 끊어져도 괜찮다는 말입니까?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율법에 매여 예수 그리스도를 거부하고 있는 유대인들이 율법 위에 계신 예수님에게로 돌아와 구원을 받기를 그렇게도 강력하게 소망한다는 강력한 고백이 아니겠습니까?

본문 4-5절에 보면 유대인들은 그들이 가지고 있는 모순 된 율법주의 때문에 예수님을 보는 안목이 닫혀져 있었습니다.

무슨 뜻입니까?
바울은 이스라엘의 특권을 본문 4절에서 여섯 가지로 나누어 열거합니다. 

① 하나님의 양자됨
② 영광
③ 언약들
④ 율법
⑤ 예배
⑥ 여러 가지 약속들입니다.   

이 중에서 주목할 것은 6 번째의 약속입니다.
왜냐하면 이 약속은 메시아의 탄생이 들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실상 메시아가 왔지만 이상의 율법들로 인하여 정작 예수님은 거부하기에 이른 것입니다.
바울의 고민은 바로 이것이었습니다.
바로의 큰 근심과 고통은 바로 이것이었습니다.

다시 말하면 유대인들이 예수님의 진리로 인도되는 것을 방해하는 것이 바로 그들이 믿고 있는 율법이라는 것이었기 때문입니다.

본문 4-5절입니다.
“그들은 이스라엘 사람이라 그들에게는 양자됨과 영광과 언약들과 율법을 세우신 것과 예배와 약속들이 있고 조상들도 그들의 것이요 육신으로 하면 그리스도가 그들에게서 나셨으니 그는 만물 위에 계셔서 세세에 찬양을 받으실 하나님이시니라 아멘”
  
바울은 진정으로 자신의 골육 친척들이 주님에게로 돌아오기를 기대했습니다.
그런데 실상은 유대인들이 예수님께로 돌아오는 것은 그리 쉬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그래서는 그는 자신의 민족애를 이렇게 고통 가운데 표현한 것입니다.
“나의 형제 곧 골육의 친척을 위하여 내 자신이 저주를 받아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질지라도 원하는 바로라”  

자신이 희생되는 일이 일이 있다고 하더라도 민족이 구원을 받는다면 그것을 기꺼이 수용하겠다는 바울의 고백을 들으면서 오늘 우리들의 나라를 조명해 보았습니다.

저는 정치에 대하여 왈가왈부하기를 싫어합니다.
세 가지 이유 때문입니다.

① 목사는 정치에 대한 이야기를 하면 잘해야 본전이기 때문입니다.
② 정치는 정치인들이 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③ 사실은 정치를 잘 모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오늘은 한 마디를 해야 하겠습니다.
그것도 말 그대로 정치적인 측면이 아니라 영적인 측면에서 말입니다.

나는 지금의 한국이라는 큰 배가 좌초의 위기를 만난 어려운 형편에서 한국교회가 할 일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것은 반드시 해야 하는 일이라고 믿는 것이 하나 있습니다.
그것은 보수층에 있는 한기총은 정부를 향하여 말을 줄이는 것이고, 
진보에 있는 한국기독교 교회협의회는 진보 측을 향하여 말을 줄이는 것입니다.
그리고 타협이 힘든 상황이기에 그냥 한국교회는 이 나라의 안정을 위하여 하나님 앞에 입을 여는 것입니다.

정치권을 향하여 교회가 입을 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향하여 입을 열어 엎드리는 것입니다.
지금 한국교회는 말을 줄일 때입니다.
아니 더 솔직히 말하며 정치권을 향하여 침묵할 때입니다.
그리고 그 침묵의 입을 주님께로 열어 마음을 합하여 기도할 때입니다.
동시에 하나님께 기도할 때 이 기도를 함께 합창 했으면 합니다.

‘하나님, 이명박 장로에게 롬 9:3절의 바울이 되게 하옵소서.’
나는 이 기도위에 이 땅을 향한 하나님의 치료가 임할 것을 확신합니다.  

결론)

말씀을 맺겠습니다.  

로마서 9:3절이 오늘 이 시대에 가슴에 박힙니다.
“나의 형제 곧 골육의 친척을 위하여 내 자신이 저주를 받아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질지라도 원하는 바로라”

바울의 고백 중에 한 단어가 메아리처럼 계속하여 되돌아옵니다.
‘끊어질지라도’
‘끊어질지라도’
‘끊어질지라도’   

한 치 앞은 내다 볼 수 없는 극도의 혼미함에 있는 이 나라 대한민국을 위한 영적인 바울들이 일어나기를 기도해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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