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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거저 받은 사람들 (마 9:35 ~ 마 1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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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저 받은 사람들 (마 9:35 ~ 마 10:8)

우리 한국장로교회의 최초의 선교사는 언더우드 선교사입니다. 언더우드 선교사의 유해는 서울 마포구 합정동에 위치한 양화진 외국인 묘지공원에 안장되어 있습니다. 원래 언더우드 선교사는 말년에 미국에 들어가 고향 교회인 라피엘교회 교회당 묘지에 잠들어 있었는데, 그의 유언에 따라 1995. 5. 20일 서울 양화진의 먼저 세상 떠난 부인 호른 선교사 곁에 이장되었습니다. 양화진 외국인 묘지는 선교사로 이 땅에 와서 돌아가신 분들이 묻혀 있는 곳으로 양화진 정문에 있는 안내판을 읽어가다 보면 450명의 선교사들의 이름만 보아도 가슴이 뭉클하고 눈물이 앞을 가리는 것이었습니다. 한국 기독교의 복음화를 위하여, 고국을 떠나고 일가친척 형제와 친구들을 떠나 어둡고, 질병도 많고, 낯선 땅에 와서 복음을 전하다가 끝내 고국에 가보지도 못하고 이 땅에서 죽어 묻혀 있습니다. 

작가 정연희 권사의 한 편의 시가 안내판 곁에 자리잡고 있습니다. 

양화진(楊花津), “영혼의 고향 하늘나라로 가는/ 길목/ 백 년 전에 이 땅을 예수께서/지적하신/ 땅 끝으로 믿고/ 아비의 집을 떠난 젊은이들이/ 그 생애를 기꺼이 바치고/ 주 안에서 잠든 곳// 가난과 질병과 무지와 억압 속에서/ 신음하던 이 땅 사람들을/ 그리스도 예수께로 인도하고/ 우리들의 가난, 우리들의 질병을/ 함께 지고 가다가/ 한 알의 밀알로 땅에 떨어져/ 죽은 이들이/ 그 육신을 묻은 언덕// 강물은 세월의 매듭을 풀어/ 끝없이 흐르는데/ 이 땅의 역사와 개화의 진통은/ 뭇 형제의 목숨을 이 언덕에/ 심었으니/ 그 사랑의 텃밭에서 열매 맺은 / 믿음/ 이 땅을 하나님의 나라로 만든/ 사랑의 승리어라”

언더우드 목사님과 사모님, 그의 아들 원한경박사 부부, 그리고 손자까지 3대의 묘가 모여 있습니다. 

저는 이만열교수와 현재 UCLA 대학의 교수이신 옥성득박사가 편역한 언더우드 자료집1권을 가지고 있습니다. 언더우드목사님은 원명은 Horace G. Underwood(1859-1916)이시며, 그가 한국선교사로 임명을 받고 목사로 안수받을 때가 1884. 7. 28일로 그의 나이 25세였습니다. 

언더우드 자료집은 1885-1892년에 해당하는 자료입니다. 미국에 있는 옥성득교수가 미국선교본부와 장로교회 역사관, 프린스턴신학교, 예일대학교, 드루대학교 도서관과 문서보관소에 보관 되어 있는 모든 자료를 복사하여 번역한 것으로 정말 대단한 자료들입니다. 이것이 계속하여 4권이 나올 예정으로 있습니다. 

미국북장로교회로부터 파송을 받은 언더우드는 일본 요코하마에 머물며 한국인 이수정 대감을 만났고, 이수정이 번역한 최초의 신약 마가복음을 들고 한국으로 오게 되었습니다. 일본 나가사키에서 출발한 기선이 4월 3일 잠시 부산항에 들렀습니다. 언더우드는 선장 옆에 앉아 한국 땅을 바라보았는데, 부산시내는 정돈되지 아니한 초라한 초가집들이 옹기종기 모여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아침을 배 안에서 간단히 먹고 배에 탄 사람들이 부산항으로 내려가 잠시 주변을 둘러보았는데, 어른이며 아이들 할 것 없이 맨발로 다니는 것을 보고 놀라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오후 3시까지 돌아와 인천 제물포항을 향하여 출발하였습니다. 비바람이 불어 항해가 늦어지고, 4월 5일에 제물포항에 들어오기가 쉽지 않았습니다. 언더우드는 선장에게 재촉하였습니다. “선장님 부활절 아침에 인천 제물포항에 도착할 수 있도록 도와주세요.” 언더우드는 한국선교를 생각하고 있을 때에 월미도가 눈에 들어오고, 제물포항에 정박하게 되었습니다. 언더우드는 감리교회 선교사인 아펜셀러의 부인과 아펜셀러목사님이 내린 후에 세 번째로 내렸습니다. 

목사님이 미국선교 잡지에 이런 편지를 보냈습니다. “우리는 부활절에 이곳에 도착했습니다. 이 날 죽음의 빗장을 산산이 부순 그 분께서 조선 사람들을 묶은 줄을 끊으시고, 그들을 하나님의 자녀로서의 빛과 자유를 누리도록 이끌어주시기 바랍니다.”라고 쓰고 있습니다. 

언더우드목사님은 본래 인도에 선교하려고 준비하시던 분이었습니다. 그는 미국 뉴욕대학을 졸업하고, 뉴저지주에 있는 뉴-부런스위크의 미국개혁교회 신학교를 졸업하고, 1년간 의학을 수학하였습니다. 그가 1883년 10월 하트포드에서 열린 신학교선교연맹에 참석하였는데, 그 세미나에 참석한 두 사람이 하나는 언더우드였고, 하나는 감리교회의 아펜셀러였습니다. 선교지원자들을 모아놓고 일본에서 선교하던 알버트 올트만스가 한국에 대하여 설명하였습니다. 그는 외쳤습니다. 1882년 한미조약에서 의하여 한국에 선교사가 들어갈 수 있는데, 미국교회가 무관심하여 1년의 기회를 놓치고 있다고 열변을 토하였습니다. 그 때까지도 언더우드는 인도에 선교사로 가려는 마음이 있었습니다. 

하나님은 아마도 다른 사람을 택하여 한국에 보내실 것이라고 생각하였습니다. 그동안 한국을 생각하면서 자기의 모 교회에 두 번이나 자기를 한국에 보내달라고 간청하였지만, 선교 자금이 없다는 이유로 거절하였고, 교단의 선교본부에 가서 두 번이나 한국에 파송하여달라고 했지만, 아직은 선교비도 없고, 시기상조라고 거절한 바 있었습니다. 그래서 한국에 가는 것을 포기하고, 인도로 가려고 하였는데, 선교세미나에서 한국은 지금 선교사를 부른다는 말씀을 들었습니다. 그 순간 분명한 음성이 들려왔습니다. “너는 왜 못 가느냐?”(Why not go yourself?)라는 음성이었습니다. 그는 세미나에서 돌아와 뉴욕에 있는 한 교회로부터 목사 청빙이 와서 그 청빙을 수락하는 편지를 썼습니다. 편지를 우체통에 넣으려고 하는 순간이었는데, “한국에 갈 사람은 없느냐”(No one for Korea) “한국은 어찌할 셈이냐?” (How about Korea?)라는 소리가 언더우드의 귓가에 쟁쟁하게 들렸습니다. 목사님은 그도 모르게 손에 쥐었던 편지를 호주머니에 넣고 센터스트리트에 있는 장로회 본부를 한번 더 찾아갔습니다. 그 때에 언더우드는 해외선교부 총무이신 엘린우드 박사를 만났습니다. 그는 며칠만 기다려보라고 했습니다. 그로부터 받은 기별은 다음 회의에서 언더우드가 한국의 선교사로 임명받을 것이라는 내용이었습니다. 1884. 7. 28일 드디어 언더우드는 미국북장로교회로부터 한국선교사로 임명을 받고, 내한하게 된 것입니다. 그 때의 나이가 25세였습니다. 그리고 한국에 들어올 때에 26살이었습니다. 그는 마지막 형제들에게 작별을 고하고 비장한 각오로 한국을 향하게 되었습니다.

이 어둡고 캄캄하던 나라, 미신 숭배와 조상숭배에 절어 있었던 나라, 외세에 의하여 제대로 주권을 행사하지도 못한 나라, 무지와 흑암이 지배하던 우리나라에 복음을 들고, 진리의 복음을 가지고 들어오신 것입니다. 우리는 미국에서 복음을 들고 들어오신 선교사들을 잊을 수 없습니다. 

우리 예수님은 당신의 공생애 3년 동안 힘써 행하신 일이 있다면 12명 제자를 양육하신 것입니다. 그것은 소그룹 사역의 효시를 이루었습니다. 소그룹은 예수님에게서 출발한 것입니다. 12제자는 기독교회의 초석이 되신 분들입니다. 예수님은 12제자를 누구보다도 소중한 사람으로 여겼습니다. 예수님은 많은 무리에게 말씀을 선포하시는 일과 제자들을 지도하시고 가르치시는 일을 구별하셨습니다. 무리에게 가르치신 날에도 다시금 제자들을 모아놓고 따로 자세히 풀어 가르치셨습니다. 예수님이 공생애의 3년 동안 가장 심혈을 기울여 하신 사역이 있다면 소그룹 하나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12명의 제자를 양육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의 3대 사역이라고 하면 마9:35에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마9:35입니다. “예수께서 모든 도시와 마을에 두루 다니사 그들의 회당에서 가르치시며 천국 복음을 전파하시며 모든 병과 모든 약한 것을 고치시니라”고 했습니다. 

여기서 3대 사역은 1) 가르치시며(teaching), 2) 전파하시며(Preaching), 3) 고치시니라(Healing)고 했습니다. 우리 예수님의 마음에는 한 영혼에 대한 불쌍히 여기는 마음이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무리를 보실 때에 불쌍히 여기셨습니다. 당시의 수많은 사람들은 마치 목자 없는 양과 같이 고생하며 기진하고 있었습니다. 9:36절입니다. “무리를 보시고 불쌍히 여기시니 이는 그들이 목자 없는 양과 같이 고생하며 기진함이라”

예수님은 사람들을 보실 때에 불쌍히 여기셨습니다. 이 말씀은 민망히 여겼다는 말인데, 동정심을 가지는 것, 연민으로 가득 차 있는 마음이었습니다. 당시의 사람들은 마치 목자 없는 양과 같이 고생하며, 유리방황하고 있었습니다. 영적으로 가난하였습니다. 당시의 제사장이나 서기관, 바리새인들은 백성의 지도자라고 했지만, 영적인 필요를 몰랐습니다. 백성들을 억압하고 진리가 아닌 규례만 외쳤습니다. 백성들은 하나님의 아들 메시아가 오시기를 기다렸습니다. 우리도 사랑하는 마음, 불쌍히 여기는 마음이 먼저인 것입니다. 사람을 사랑하는 마음을 달라고 기도해야 합니다. 

우리 주님은 추수할 것은 많은데, 일꾼이 심히 적은 것을 보셨습니다. 그러므로 추수하는 주인이신 하나님 아버지에게 추수할 일꾼들을 보내어달라고 기도하라고 하셨습니다. 지금은 추수할 때입니다. 요4:35에는 “너희 눈을 들어 밭을 보라 희어져 추수하게 되었도다”라고 하셨습니다. 사랑하시는 여러분, 주님이 말씀하시기를 “추수할 것이 많다”고 하셨습니다. 

사도바울이 선교하러 나갔을 때에 사실 두렵고 떨리는 것이 한두 가지가 아니었습니다. 그는 안식일마다 유대인의 회당에 들어가서 담대하게 말씀을 외쳤습니다. 행13:48에 보면 “이방인들이 듣고 기뻐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찬송하며 영생을 주시기로 작정된 자는 다 믿더라”고 했습니다. 외치는 것은 내가 할 일이지만, 듣고 안 듣고, 믿고, 안 믿는 것은 내 책임이 아닙니다. “영생을 주시기로 작정된 자는 다 믿더라.”고 했습니다. 사도바울이 고린도에서 말씀을 증거할 때에는 정말 두렵고 떨렸습니다. 그 때에 주님이 나타나셔서 위로해주시고 격려하셨습니다. 행18:10입니다. “내가 너와 함께 있으매 어떤 사람도 너를 대적하여 해롭게 할 자가 없을 것이니 이는 이 성중에 내 백성이 많음이라 하시더라” 고 했습니다. 

오늘 우리는 말씀을 증거해야 합니다. 구체적인 사람을 놓고 기도해야 하지만, 우선 그를 찾아가 만나야 하고, 만났으면 내가 받은 큰 은혜를 증거해야 합니다. 일생 한 사람에게도 말씀을 전해보지 않으면 누가 제 발로 찾아와 예수를 믿을 것입니까? 물건을 만들어 파는 사업가도 선전하고 광고해야 물건을 팔 수 있습니다. 세상 사람들은 지혜를 발휘하는데, 우리 믿는 사람들은 구체적인 전략이 없습니다. 우리는 선택된 사람을 만나게 해주시고, 가서 이제 추수하듯이 열매를 거둘 수 있게 해달라고 기도해야 합니다. 지금도 구원받을 사람이 많습니다. 희어져 추수하게 되어 있습니다. 지금도 전도가 됩니다. 이 성중에는 하나님의 택하신 백성이 많습니다. “영생을 주시기로 작정된 자는 다 믿더라”고 했습니다. 

오늘 우리는 13번째, 14번째 제자들이라는 정신으로 살아가야 합니다. 오늘 우리 주님이 이 땅에 계신다고 하면 누구를 제자로 삼을 것인가 기도하실 때에 한국에 있는 아무개를 생각하실 수 있도록 우리는 최선을 다하여 봉사하고, 전파하여야겠습니다. 

예수님은 12제자를 선택하시고는 주의 말씀을 맡아 선포하고 가르치고 헌신하는 제자들에게 덤으로 능력을 주셨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더러운 귀신을 쫓아내며, 모든 병과 모든 약한 고치는 권능을 주셨습니다. 우리 주님의 일을 감당하는 성도들에게 능력을 주십니다. 지금도 우리 주님은 말씀을 맡아 선포하고, 복음을 전파하는 자리에서 이러한 능력을 주시고 있습니다. 예수를 믿는 것이 얼마나 큰 능력이요, 위대한 역사인지를 알게 됩니다. 

교회는 12사도를 잊을 수 없습니다. 물론 우리 주님이 구원의 역사를 완성하시고, 죽음의 권세를 이기셨지만, 주의 말씀을 전파하고 교회를 세운 이들은 12사도들이었습니다. 교회는 우리 주님을 터전삼고, 기둥과 같이 여기는 사도들로 인하여 교회라는 집을 세울 수 있었습니다. 

저는 바클레이 목사님이 연구하신 “예수의 열두 제자”라는 책을 가지고 있습니다. 12사도는 정말 위대한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들의 이름은 천국에 기록되어 있는데, 거룩한 성, 성벽의 12주춧돌 위에 예수님의 12사도의 이름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들은 교회의 주춧돌이 되었습니다. 계21:14에 보시면 “그 성의 성곽에는 열두 기초석이 있고 그 위에는 어린 양의 열두 사도의 열두 이름이 있더라”고 했습니다. 
12사도의 이름이 성경 마태복음, 마가복음, 누가복음, 사도행전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12제자들의 이름을 비교해보면 항상 베드로는 가장 첫 번째로 나오고, 가룟유다는 가장 마지막에 나오고 있습니다. A 그룹에는 베드로, 안드레, 세배대의 아들 야고보와 요한 이렇게 4명은 성경에도 자주 나오고, 언제나 앞장서서 일하는 제자들이었습니다. B그룹의 사람은 빌립, 바돌로매, 도마, 마태입니다. 이들은 자주 등장하지는 않지만, 보통으로 활동하였고, 처음 4제자들 다음으로 제자로 선택된 분들입니다. C 그룹의 사람은 알패오의 아들 야고보, 다대오, 열심당원 시몬, 가룟유다가 있습니다. 이들이 활동은 미미한 것으로 보입니다. 이들 모든 사도들이 전세계에 복음을 전하다가 순교하시고, 사도요한은 자연사하였지만, 그도 끓는 물에 들어가기도 하고, 옥에 갇히기도 했습니다. 

시몬 베드로는 엄청난 박해를 피하여 로마를 빠져나갈 때에, 주님이 그에게 나타셨습니다. 베드로는 주님을 발견하고, “주여, 어디로 가시나이까?”(Domine quo vadis?) 그 때에 주님은 “십자가에 달리려고 로마로 가노라”고 하셨습니다. “주여 또 다시 십자가에 죽으시려 하시나이까?” “그렇다 나는 다시 십자가에 달리련다.”고 주님은 대답하셨습니다. 그래서 베드로는 십자가를 피하려고 하였는데, 주님은 다시금 십자가를 지려고 로마로 가시는 것을 깨닫고, 발길을 돌이켜 로마로 가서 순교하게 됩니다. 이런 사실을 미리 아는 베드로의 아내는 베드로 보다 먼저 나아가 십자가에 죽었습니다. 그 때에 베드로는 아내를 격려하였습니다. “주님을 기억하십시오” 이러한 순교의 모습을 지켜보던 많은 사람들이 감동받았습니다. 베드로는 십자가에 달릴 때에, 집행하는 사람에게 말했습니다. “나는 주님과 같이 똑바로 십자가를 질 수 없습니다. 나의 머리를 아래로 하여 거꾸로 십자가에 달아주시오”라고 하여 믿음의 영웅이 되었습니다. 베드로가 담대하게 십자가에 달리므로, 많은 성도들이 힘을 얻어 순교할 수 있었고, 사도의 죽음을 헛되지 않게 하려고 로마에는 큰 부흥이 일어나게 되었습니다. 여러 사도들의 최후에 대한 많은 감동적인 이야기가 내려오고 있지만, 다 말씀드릴 수가 없습니다. 

예수님은 12제자들에게 우선 처음에는 이스라엘 집의 잃어버린 양에게로 가라고 하셨습니다. 마 10:5-6입니다. “예수께서 이 열둘을 내보내시며 명하여 이르시되 이방인의 길로도 가지 말고 사마리아인의 고을에도 들어가지 말고 오히려 이스라엘 집의 잃어버린 양에게로 가라”고 했습니다. 나중에는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라고 하셨습니다. 주님은 무엇을 해야 하는지 말씀하셨습니다. 7절입니다. “가면서 전파하여 말하되 천국이 가까이 왔다 하고 병든 자를 고치며 죽은 자를 살리며 나병환자를 깨끗하게 하며 귀신을 쫓아내되 너희가 거저 받았으니 거저 주라“고 했습니다. 

저는 거저 받은 것이 너무나 많습니다. 저는 죽을 수밖에 없는 죄인이었는데, 구원받았습니다. 우리 주님이 나를 위하여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심으로 구원받았는데, 거저 받았습니다. 그냥, 값없이 받은 것이기에 거저 주어야 합니다. 

전라도 전주지방에 선교하러 오신 최의덕 선교사가 있습니다. 우리 말로 최의덕이라고 하고, 전주최씨라고 했습니다. 이 분의 본 이름은 데이트인데, 금산 두정리에서 두 젊은 청년들을 만났습니다. 한 사람은 양반이요 부자인 조덕삼이라는 사람이고, 한 사람은 그의 집에 일하며 사는 마부 이자익이란 사람입니다. “조 선생님, 예수를 믿으면 복을 받을 수 있습니다. 예수 믿어보세요” 조덕삼은 최의덕 선교사의 정확한 한국어 구사에 감동이 되어 그 자리에서 예수를 믿겠다고 고백하였습니다. 조덕삼의 사랑채에서 교회가 시작이 되었습니다. 조덕삼이 예수 믿으므로 인하여 부자요, 금광을 가지고 있고, 큰 상회를 가지고 있는 사람이 믿으므로 많은 주민들이 믿게 되었습니다. 이자익이란 사람은 경상도 남해에서 단신으로 올라온 사람으로 너무나 가난하여 먹을 것이 없어 굶어죽게 되자, 넓은 농토를 가지고 있는 전라도에 와서 부자집의 마부가 되었습니다. 이자익은 한글을 배울 기회가 없었지만, 조덕삼이 아들 조영호를 가르치면서 독선생을 불러서 특별 수업을 받을 때에 공부방에 흘러나오는 소리를 창문 밖에 들으며, 글을 배워 천자문을 공부하고 한글을 배웠습니다. 그 당시에 한글을 모르면 학습을 주지 않고, 세례를 받을 수가 없었습니다. 이자익은 글을 배우면서 성경을 읽어 세례를 받았습니다. 교회가 어느 정도 자리 잡히자 조덕삼, 이자익 왕칠순에게 집사를 주었습니다. 1904년에 두정리교회는 기억자 예배당을 잘 지었습니다. 예배당은 기억자 예배당으로 유일하게 남은 문화재가 되었습니다. 선교사는 공동의회를 소집하고 장로 1인을 선출하였습니다. 그런데 마부인 이자익이 장로로 피선되었습니다. 사실은 누구나 조덕삼이 선출될 줄 알았는데, 그 집 마부가 장로가 되었습니다. 당장 사임한다고 하고, 도망치려고 하는데, 조덕삼이 나서서 “당회장님, 이자익 집사의 피택장로 사퇴는 있을 수 없습니다.” 그는 자기가 피택된 것보다 자기 집 마부가 피택된 것을 더 기뻐하였습니다. 이자익은 평양 신학교에 들어갑니다. 후에 장로된 조덕삼장로의 후원으로 이자익은 평양신학교에 들어가고, 후에 두정리 교회의 2대 담임목사가 되었습니다. 자기집 마부를 공부시켜 담임목사님으로 모셨는데, 그의 손자가 주일대사를 지내고 국회의원을 지낸 조세형장로님이십니다. 

이자익목사님은 우리 장로교회 역사상 세 번이나 총회장을 지낸 분이며, 대전신학교를 설립하고 초대 교장이 되셨습니다. 

이자익목사님은 전라도지방의 3.1운동을 주도합니다. 교회는 유광학교를 설립합니다. 그러나 일본 당국은 학교를 폐쇄하였습니다. 그래도 야학은 계속되었습니다. 이자익목사는 전북노회장이 되시고, 마부출신의 목사님이 13대 총회장에 올랐습니다. 당시에 김제군 금산면에 위치한 200명 정도 모이는 적은 교회였지만, 총회장이 되셨고, 후에 신사참배를 결정할 때에는 결의에 불참하였습니다. 87명의 목사 총대 중에 불참한 사람은 단 1명 이자익목사였습니다. 해방이 되고, 남부 총회에서 33회 총회장으로, 그리고 이어 교단 분열의 아픔 속에 이것을 해결할 수 있는 사람은 이자익목사라고 하여 다시 한번 34회 총회장이 되셨습니다. 대전신학교를 설립하시고, 대전선교부를 책임지고 나가는 귀한 목사님이 되셨습니다. 복음은 참으로 위대한 역사를 일으킵니다. 사람을 변화시키고, 동리를 변화시키고, 한 나라를 변화시키고 있습니다. 우리는 거저 받은 사람들입니다. 구원받은 것이 값없이 받은 것입니다. 하나님 아버지의 사랑과 은혜 중에 오늘에 이르렀습니다. 받은 은혜를 이제는 되돌려 드려야 하고, 받은 사랑을 나누어주어야 합니다. 이제부터 전도의 계절이라고 결단하시고, 사람을 만나고, 복음을 전하고 영혼을 살리시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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