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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왜 예수님이 생명의 떡인가? (요 6:26~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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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예수님이 생명의 떡인가? (요 6:26~36)

옛날 우리 민족은 일제 시대와 해방후 전쟁을 거치면서 춥고 배고픈 시절이 많았습니다. 저는 어릴 적에 시골 산골에서 자랐지만 농사를 지으신 부모님 덕에 배를 골치는 않고 자랐습니다. 그런데도 그 시절은 많은 사람들에게는 먹는 문제가 심각했습니다. 

지금도 먹는 문제를 생각하면 아련한 추억으로 떠올리는 것 몇 가지가 있습니다. 

저 어릴 적에는 안방 웃목에 고구마 광이 있었습니다. 옥수수 대공으로 광을 만들어 그 안에 고구마를 잔뜩 저장하여 겨울 내내 먹었습니다. 그 고구마 광은 어린 저희들에게는 간식창고요. 숨바꼭질 장소였습니다. 그 속에 들어가 숨었으니 고구마가 어떻게 되었겠습니까? 밑에 고구마는 썩어서 겨울내내 냄새를 맡으며 살았습니다. 화롯불에 고구마를 구워먹던 추억, 그 고구마로 끼니를 대신하는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또 하나는 초등학교 시절 학교에서 나누어 주었던 옥수수 빵입니다. 도시 학교는 옥수수 죽을 먹기도 했고 연유나 우유가루를 먹었다고 하는데 저희는 산골짝이 시골학교라 그런지 옥수수 빵만 나누어 주었습니다. 

그 시절에는 그 빵이 최고로 맛이 있었습니다. 그런데도 어떤 친구들은 그 반쪽짜리 빵을 다 먹지도 않고 남겨 보자기 가방에 싸두었다가 집에서 기다리는 동생들 가져다주는 것을 본적이 있습니다. 아마도 여기 이 자리에도 그 주인공들이 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때 그 옥수수 빵 먹었던 분들, 그때 그 옥수수 빵의 출처를 아시나요? 

당시 정부는 미국이 잉여 농산물을 한국에 보내주었다고 했지만 실상은 그것은 미국교회와 성도들, 그리고 자선기관의 구제품이었습니다. 마치 우리가 북한에 먹을 것 가져다주듯 한 것입니다. 

그것이라도 먹었기에 여러분의 건강이 오늘까지 살도록 기초체력이 만들었졌는지도 모릅니다. 그때는 먹을 것이 변변치 못한 시절입니다. 보리밥 한 그릇만 있으면 만족한 시절 영양가를 생각할 수없는 시절입니다. 그러니 그 옥수수 빵은 대단한 것입니다. 그러니 그 빚을 갚으시길 바랍니다. 

제가 그 빵이 얼마나 될까 계산을 해봤습니다. 초등학교 6년 동안 먹었습니다. 한 달에 약 15개를 먹었다 치고 한 개에 천 원씩 한 달에 15,000원, 일 년에 10달이면 15만원, 6년이니 90만원어치 먹었습니다. 그러나 그것 때문에 지금까지 건강 얻어 살았으니 최소 30배를 갚으려면 얼마를 갚아야 할지를 계산해 보세요. 2,700만원어치를 선교사역에 갚아야 합니다. 아멘? 

오늘 봉독한 본문 앞 절을 보면 예수님이 어느 꼬마가 가져온 도시락, 떡 5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가지고 5천명을 먹이시는 모습을 봅니다. 

여러분 한 번 그 장면을 상상해 보셨나요? 

얼마나 놀라운 광경일까요? 백성들은 다 배불리 먹었습니다. 그들은 그 떡이 어떻게 만들어졌는지 다 알고 있습니다. 이제는 먹고사는 문제가 다 해결되었다고 소리치며 난리가 났을 것입니다. 예수님 당시도 과거 우리 시대처럼 로마의 식민통치를 받고 이던 시절이라 백성들은 춥고 배고픈 시절이었습니다. 그런데 주님이 먹는 문제를 해결하셨습니다. 얼마나 신났을까요? 얼마나 즐거웠을까요? 

그런데 생각해보세요. 주님도 기쁘셨을까요?  

주님은 그들의 그 기뻐하는 모습을 보고 어떤 표정이셨을까요? 정확하게 알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몇 가지 사건으로 짐작해 볼 수 있습니다. 

주님은 그 모습을 별로 기뻐하지 않으셨습니다. 왜냐하면 먹을 양식 해결되었다고 기뻐하던 그들은 자기들에게 먹을 것을 제공한 분이 누군지도 모르고 있습니다. 

진짜 생명의 떡은 예수님인데 그분은 안중에도 없고 잠시 잠깐 생명을 유지시키는 떡을 받아먹고는 좋아하는 그들, 그 사건 때문에 이제는 먹고 사는 문제는 다 해결되었다고 흥분한 제자들, 그들을 바라보는 예수님은 얼마나 찹찹했겠습니까? 

당신이 진짜 떡이고 진짜 생명의 주인이신데 그분에게는 아무런 관심도 없는 백성들, 그리고는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그것만을 걱정하면서 사는 당신의 철없는 제자들과 백성들을 보시면서 주님은 얼마나 외로우셨겠습니까? 


그러면 왜 예수님이 오병이어의 기적을 행하셨을까요? 

단순히 그들의 배고픔을 해결해 주시기 위해서 일까요? 그들이 먹을 것이 없어 기진맥진하고 돌아갈까 걱정해서 하셨을까요? 물론 그런 것도 이유가 될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의 오병이어 기적의 진정한 목적은 제자들이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인 것을 믿게 하려고 하신 것입니다. 

“생명의 주인은 바로 나다” “내가 생명의 참 떡이다” 라는 사실을 믿게 하기 위해서 하셨던 것입니다. 그런데도 사람들의 관심사는 전혀 그렇지 못했습니다. 

심지어 제자들도 그랬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제자들을 서둘러 배를 태워 건너편으로 보내시고 산에 올라가셨던 것입니다. 당신 혼자 산으로 올라가셨습니다. 거기서 기도하셨습니다. 

그랬더니 하나님이 제자들의 배가 풍랑으로 꼼작 못하는 상황을 만드신 것입니다. 

제자들은 저물 때 출발했는데 풍랑을 만납니다. 밤 4경쯤까지 고생 고생합니다. 제자들이 전문분야라고 자신만만하게 여긴 바다위에서 꼼짝 못하게 만드신 것입니다. 주님은 산위에서 기도하시고 제자들은 풍랑만나 고생하고 ……. 

여러분은 전문분야가 뭡니까? 그 분야에서 겸손하셔야 하고 주님을 의지하시기를 바랍니다. 

여기 하나님이 뭔가를 우리에게 교훈하고 계십니다. 왜 주님은 제자들의 고난 광경을 보시고는 곧바로 그들을 구하러 가지 않았을까요? 왜 바다 가운데 적어도 6~8시간이상 고생하게 두셨던 것일까요? 자신들의 한계를 깨달으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메시야 됨을 깨달으라는 것입니다. 생명의 주인은 먹는 떡이 아니라 바로 예수님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제자들의 능력과 경험으로는 도저히 해결할 수없는 상황에 물위를 걸어 그들에게 다가 가십니다. 그리고는 “내니 두려워 말라”고 하시며 배에 오르십니다. 그러자 바다는 잔잔해지고 제자들은 예수님이 누군지에 대해 새롭게 발견하게 됩니다. 

그 이튿날 제자들에게 주님은 자신이 생명의 떡이라고 밝힙니다. 자기가 참 떡, 진짜 떡, 생명의 떡이라고 여러 번 강조하십니다. 

성도 여러분! 

성경이 말하는 떡은 실상 우리가 먹는 떡은 아닙니다. 성경이 말하는 떡은 우리나라 붙친개 형태로 일종의 전병입니다. 이것은 그들의 별식이 아닌 주식이었습니다. 그래서 서양 사람의 빵이 우리 성경에서는 떡으로 번역된 것입니다. 그러기에 성경에서 나오는 떡은 서양 사람들의 빵이나 우리나라 사람들이 주식으로 먹는 밥을 의미합니다. 그런데 놀라운 사실은 오늘 우리에게 주신 성경 말씀은 예수님이 자신을 생명의 떡, 생명의 밥이라고 말씀하신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왜 주님은 자신을 생명의 떡이라고 표현하셨을까요? 예수님이 자신을 먹을 수 있는 떡이라고 하신 이유가 무엇일까요? 예수님이 생명의 떡이라는 말은 깊은 뜻이 담긴 것입니다. 어떤 의미가 있는 것일까요? 

1. 예수님은 생명을 “주는” 떡이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우리 육신의 떡이 아닌 생명의 떡입니다. 그러기에 이 떡을 먹는 자는 생명을 얻게 됩니다. 생명을 주는 떡이기에 이 떡을 먹으면 생명을 얻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육신의 몸뚱이를 오래 살리기 위해 오신 분이 아니라 우리에게 생명을 주기위해 오신 것입니다. 그래서 이 예수님을 먹으면 하나님이 주신 생명을 얻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먹는다는 의미는 무엇을 말할까요? 먹는다. 믿는다. 는 말은 같은 의미로 사용됩니다. 

오늘 봉독한 성경 요한복음6장 47~51절을 보세요. 

47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믿는 자는 영생을 가졌나니 
48 내가 곧 생명의 떡이로라 
49 너희 조상들은 광야에서 만나를 먹었어도 죽었거니와 
50 이는 하늘로서 내려오는 떡이니 사람으로 하여금 먹고 죽지 아니하게 하는 것이니라 
51 나는 하늘로서 내려온 산 떡이니 사람이 이 떡을 먹으면 영생하리라 나의 줄 떡은 곧 세상의 생명을 위한 내 살이로라 하시니라 

이 말씀을 자세히 살펴보시면 믿는 것과 먹는 것을 같은 의미로 여깁니다. 

그래서 요한계시록 3장20절에서는 “볼찌어다 내가 문밖에 서서 두드리노니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 그로 더불어 먹고 그는 나로 더불어 먹으리라”하십니다. 

믿는 것을 식사 교제하는 것으로 표현합니다. 그러기에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생명의 떡이신 예수를 먹는 것입니다. 

예수를 믿으면 육신의 몸이 사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의 생명이 영생을 얻는 것입니다. 이 몸둥아리 육신은 흙으로 돌아갑니다. 그러나 우리의 생명은 영원히 살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주님만이 생명을 주는 떡이기에 주님은 주님께로 오는 모든 자에게 주리지 않게 하신다고 하셨고 누구든지 예수를 먹으면 생명이 산자라고 확실하고 분명하게 밝히고 계시는 것입니다. 

본문 뒤에 53~57을 보세요. 

53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인자의 살을 먹지 아니하고 인자의 피를 마시지 아니하면 너희 속에 생명이 없느니라 
54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자는 영생을 가졌고 마지막 날에 내가 그를 다시 살리리니 
55 내 살은 참된 양식이요 내 피는 참된 음료로다 
56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자는 내 안에 거하고 나도 그 안에 거하나니 
57 살아계신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시매 내가 아버지로 인하여 사는 것 같이 나를 먹는 그 사람도 나로 인하여 살리라 

많은 사람들이 이 먹는다는 의미와 믿는다는 의미를 동일시하지 못하기에 이 말씀의 뜻을 오해합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먹고 마시는 것은 주님을 믿고 영접하는 것임을 믿으시기를 축원합니다. 

그런 사람은 생명이 있고 영생을 가졌습니다. 그런 사람은 주님과 연합되어 있는 사람이기에 주님이 오시기 전에 죽어도 몸이 죽은 것이지 생명이 끝난 것은 아닙니다. 생명은 영원히 살기에 영으로 존재하다가 주님 다시 오실 때 새 몸을 입고  살게 되는 것입니다. 

정리하면 예수님은 생명을 주는 떡이기에 예수를 믿는 모든 사람은 생명을 얻은 백성이요. 영생하는 백성임을 믿으시기를 바랍니다. 저와 여러분에게 영생의 생명을 주신 주님께 감사하시기를 축원합니다. 이것이 그냥 값없이 주신 선물이요. 복인 것을 믿으시기를 축원합니다. 


2. 예수님은 생명을 “살리는” 떡입니다. 

요한복음 6장 63절을 보세요. 
“살리는 것은 영이니 육은 무익하니라. 내가 너희에게 이른 말이 영이요 생명이라” 

예수님이 우리에게 주신 말씀이 영이고 생명입니다. 이 영과 생명이 죽은 자도 살리는 것입니다. 그러니 예수님의 말씀은 영적으로 죽은 사람을 살리는 능력이 있는 떡인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 주변에 아직도 생명의 떡을 알지 못하여 육신의 떡만 먹고 사는 수많은 사람들을 보게 됩니다. 그러니 육신의 양식인 쇠고기가 이렇게 나라를 시끄럽게 하는 것입니다. 

저는 목회자로서 저들의 촛불 시위에 가슴이 아픕니다. 육의 양식이 생명의 위협을 받는다고 저렇게 난리인데 영의 양식이 기갈인 이 시대에 그 문제에 대해서는 아무도 데모를 하지 않고 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말씀인 이 생명의 떡이 그냥 소설책이나 종교서적인줄 알고 있습니다. 관심이 없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이고 곧 그것은 생명의 양식입니다. 

요한복음 1장에서는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하시면서 예수님이 곧 말씀이고 말씀이 곧 하나님이시라고 선언하십니다. 그러기에 예수님도 말씀으로 우리에게 양식을 주시는 하나님이신 것입니다. 

오늘 본문 27절을 보세요. 
“썩는 양식을 위하여 일하지 말고 영생하도록 있는 양식을 위하여 하라 이 양식은 인자가 너희에게 주리니 인자는 아버지 하나님의 인치신 자니라.” 

그렇습니다. 우리가 먹는 양식은 육의 양식입니다. 이것은 썩는 것입니다. 그러나 영생하도록 있는 양식이 있습니다. 그것을 주님이 주십니다.  그러기에 그 양식인 성경을 우리만 갖고 고이고이 간직하지 말고 전하시기를 축원합니다. 

중국에 제가 아는 분 한 분은 문서 선교사역을 하고 계십니다. 그분은 계속해서 중국에 성경을 보급하는 일을 합니다. 홍콩을 통해 그리고 대만을 통해 은밀히 보급을 받습니다. 그리고 그 성경을 전 중국에 보급합니다. 중국내에서는 성경을 인쇄하는 것이 허락된 곳에서만 허락된 양만큼만 인쇄를 합니다. 그러니 매일 3만 명의 크리스천이 생기는 그 나라에 성경을 보급하는 일은 아주 중요한 사역입니다. 

성도 여러분! 
여러분이 갖고 있는 복음, 여러분이 갖고 있는 말씀이 여러 사람을 살리는 양식임을 믿으시기를 축원합니다. 


3. 예수님은 생명을 “유지케 하는” 떡입니다.  

예수님이 하루는 수강성의 여인과 우물가에서 대화를 나누셨습니다. 제자들이 음식을 구하여 돌아왔을 때 주님이 아주 특이한 말씀을 하셨습니다. 

요한복음 4장 31~34절입니다. 
31 그 사이에 제자들이 청하여 가로되 랍비여 잡수소서. 
32 가라사대 내게는 너희가 알지 못하는 먹을 양식이 있느니라. 
33 제자들이 서로 말하되 누가 잡수실 것을 갖다 드렸는가 한대 
34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의 양식은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을 행하며 그의 일을 온전히 이루는 이것이니라. 

분명히 예수님은 그때 아무것도 잡수시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주님은 제자들이 알지 못하는 먹을 양식이 있다고 하십니다. 그것이 뭘까요? 

34절 “나의 양식은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을 행하며 그의 일을 온전히 이루는 이것이니라. 하신 것입니다. “나를 보내신 이의 뜻”, “그 일을 온전히 이루는 것” 그것이 주님의 양식이라 표현 하셨습니다. 

그렇다면 그것이 뭡니까? 그것은 사명입니다. 사명이 어떻게 양식입니까? 

그 사명은 어디서 나오나요? 사명은 내가 만드는 것이 아닙니다. 내속에서 나오는 것은 내 꿈이요. 내 야망입니다. 하나님이 주신 사명, 하나님이 주신 비전은 하나님의 말씀에서 나옵니다. 그러기에 말씀이 양식이기에 사명이 양식인 것입니다. 

양식은 우리를 살아가게 합니다. 그러나 먹는 양식만 있다고 사는 것이 아닙니다. 해야 할 일, 사명이 있어야 사람이 살게 됩니다. 사명이 없으면 그 사람은 살아야 할 이유가 없습니다. 그러기에 우리의 사명이 우리의 양식입니다. 그러기에 우리의 사명이 우리를 살리는 것입니다. 

텔레비전 드라마에 배우가 자기 배역을 다 마쳤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합니까? 

끝난 것입니다. 사라져야 합니다. 며칠 전 ‘이산’이라는 드라마에 보니 왕의 애인인 송연이가 병으로 죽더라고요. 그러니 그의 역을 맡았던 한지민이도 이제 그 드라마에서는 하차하는 것입니다. 죽었는데 그 드라마에 자꾸 나올 이유가 없는 것입니다. 자기 역할을 다했으면 내려와야 합니다.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도 하나님께로부터 부여받은 양식인 사명을 다 마쳤으면 가야 합니다. 

어제가 권재선 목사 소천 1주기였습니다. 그가 시무하던 교회에서 1주기 추모예배가 있어서 다녀왔습니다. 왜 그리 빨리 갔는가 하나님께 질문을 했습니다. 작년 이맘때 제가 울면서 물었습니다. 그런데 주님은 제게 아주 이상한 답을 주셨습니다. 세례요한은 몇 살에 데려갔냐? 나 예수는 몇 살에 죽었냐? 그런데 권목사는 몇 살이냐 그리고 너는 몇 살이냐? 뭐가 짧다고 난리냐? 하시더라고요. 저는 할 말이 없었습니다. 하나님이 사랑하신 자에게 사명이 마쳐지니까 육신은 죽고 영은 영생하기에 그냥 빨리 하늘나라에서 나와 함께 살자고 데려가신 것입니다. 

생명을 주신분도 하나님이시고 살리신 분도 하나님이십니다. 그런데 믿는 자는 생명이 영생하기에 하나님은 육신만 거두시고 생명은 데려가시는 것입니다. 

여러분 속에 이 생명의 떡이 있습니까? 
여러분을 살린 생명의 떡이 아직도 죽어 있는 영혼들을 살리는 생명의 떡임을 믿으시고 열심히 전하시기를 축원합니다. 

생명을 주시는 떡, 생명을 살리는 떡, 그리고 생명을 유지시키는 이 떡이 곧 예수님임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예수님은 생명의 떡이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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