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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하나님과 소통하라 (사 55:6~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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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과 소통하라 (사 55:6~7)

요즘 우리사회는 미국산 쇠고기 수입 문제로 몸살을 앓고 있습니다. 사태가 이토록 커진 데 대하여 대통령 자신이 국민들과의 소통이 원활하지 못했다고 시인했습니다. 국민의 건강과 직결되는 중요한 문제를 결정하면서 국민의 의견을 반영하지 않은 것이 갈등의 원인이 되었지 않나 생각합니다. 우리는 이번 사태가 원만하게 해결되도록 기도해야 하겠습니다. 

소통은 직장에서도 가정에서도 교회에서도 필수적입니다. 서로 이해하고 협력하는 관계를 이루려면 대화로써 소통해야 합니다. 화목한 가정을 이루려면 먼저 가족 간에 소통이 잘 되도록 해야 합니다. 우리는 바쁘다는 이유를 대지 말고 바쁠수록 가족 간에 대화하는 기회를 의도적으로 만들어야 합니다. 소통은 달리 말하면 친교를 의미합니다. 서로 간에 말이 통하고 교제가 이루어지는 것이 소통입니다. 

소통은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도 마찬가지로 중요합니다. 우리가 은혜로운 삶을 살려면 하나님과의 소통이 원만하게 이루어져야 합니다. 사람과의 소통도 막히면 어려움을 겪지만, 하나님과의 소통이 막히면 치명적입니다. 그 이유는 하나님은 우리의 생사화복을 주관하시는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창조주로서 우리에게 생명의 기운을 불어 넣어주신 분이십니다. 우리의 호흡을 주장하는 이는 우리 자신이 아니라 하나님이십니다. 시편 36편 9절에 이르기를 “대저 생명의 원천이 주께 있사오니 주의 광명중에 우리가 광명을 보리이다”라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과의 소통이 단절되는 것은 생명의 근원으로부터 단절되는 것을 의미합니다. 


첫 번째로, 죄는 하나님과의 소통을 단절시킵니다. 

하나님과의 소통에 문제가 생길 경우에 그 책임은 하나님께 있지 않고 전적으로 우리에게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진실무망하신 분이시므로 무슨 일에나 실수가 있을 수 없습니다. 더구나 하나님은 사랑이시므로 언제나 우리의 행복을 위해서 행동하십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 소통에 문제가 생긴다면 그 원인은 백 퍼센트 우리에게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과의 소통을 막는 첫째 원인은 죄입니다. 이사야서 59장에 보면 “1)여호와의 손이 짧아 구원치 못하심도 아니요 귀가 둔하여 듣지 못하심도 아니라 2)오직 너희 죄악이 너희와 너희 하나님 사이를 내었고 너희 죄가 그 얼굴을 가리워서 너희를 듣지 않으시게 함이니“라고 했습니다. 

이 말씀은, 유다 백성이 죄를 범해서 하나님과 사이가 벌어지게 되었다는 뜻입니다. 이는 아담의 경우도 마찬가지였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지상낙원인 에덴동산을 만드시고 아담과 하와를 거기서 살게 하셨습니다. 창세기 2장에 보면, 에덴동산에는 보기에 아름답고 먹기에 좋은 과목들이 즐비하고 동산 가운데에는 생명나무와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가 있었습니다. 강이 에덴에서 발원해서 동산을 적시고 거기서부터 갈라져 네 강의 근원이 되었습니다. 그곳은 해됨도 없고 상함도 없는 아름답고 풍요로운 낙원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담을 에덴동산에 살게 하시면서 한 가지 언약을 세우셨습니다. 그것은 “동산 각종 나무의 실과는 네가 임의로 먹되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는 먹지 말라 네가 먹는 날에는 정녕 죽으리라”는 것이었습니다. 세상에 이처럼 단순하고 지키기 쉬운 법이 어디 있겠습니까? 

우리민족의 황금시대라고 일컫는 고조선에는 8조로 된 법률이 있었다고 합니다. 현재 알려진 것은 3조목 뿐인데, ‘사람을 죽인 자는 즉시 사형에 처한다. 남에게 상해를 입힌 자는 곡물로써 배상한다. 남의 물건을 훔친 자는 데려다가 노비로 삼는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법전은 기원전 18세기 경에 고대 바벨론 왕국의 함무라비 왕이 반포한 것인데, 높이 2.5m, 둘레 1.8m의 돌비에 282조의 법조항이 설형문자로 기록되어 있다고 합니다. 함무라비 법전은 고조선의 팔조의 금법에 비하면 훨씬 복잡하지만, 현대 국가의 법률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닙니다. 

사실 우리는 대한민국의 법률이 몇 조항이나 되는지 알지 못합니다. 어느 자료를 보니까, 우리나라의 법전은 두께가 10센치쯤 되는 책으로 65권 정도나 된다고 합니다. 물론, 세월이 흐름에 따라서 법률이 더 늘어날 것입니다. 법 조항이 많다는 것은 그만큼 사회가 복잡하고 살기 어렵다는 것을 의미한다고 할 때, 하나님께서 아담에게 단 한 가지 그것도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를 따먹지 말라’는 법을 주셨다는 것은 얼마나 너그러운 처사인가를 알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인류의 조상 아담은 하나님의 금령을 범하고 말았습니다. 하루는 뱀이 하와에게 다가와서 말을 건넸습니다. “하나님이 참으로 너희더러 동산 모든 나무의 실과를 먹지 말라 하시더냐?” 여자가 뱀에게 말하기를 “동산 나무의 실과를 우리가 먹을 수 있으나 동산 중앙에 있는 나무의 실과는 하나님의 말씀에 너희는 먹지도 말고 만지지도 말라 너희가 죽을까 하노라 하셨느니라” 그러자 뱀이 여자에게 이르기를 “너희가 결코 죽지 아니하리라 너희가 그것을 먹는 날에는 너희 눈이 밝아 하나님과 같이 되어 선악을 알줄을 하나님이 아심이니라”고 했습니다. 

하와는 그만 하나님처럼 된다는 말에 넘어갔습니다. 욕심을 품고 그 나무를 보았더니 먹음직도 하고 보암직도 하고 지혜롭게 할 만큼 탐스럽게도 보이는지라, 그 실과를 따서 먹고 남편인 아담에게도 주니 그도 먹었습니다. 계시록 12장 9절에 보면, “큰 용이 내어 쫓기니 옛 뱀 곧 마귀라고도 하고 사단이라고도 하는 온 천하를 꾀는 자라”고 증언합니다. 하와를 꾄 뱀은 마귀의 화신이었던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죄의 본질이 무엇인지 알 수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불신하고 마귀의 말을 신뢰한 것입니다. 또한 하나님처럼 되려는 교만한 마음을 품은 것이 죄입니다. 하나님의 명령을 불순종하는 것이 죄입니다. 죄는 하나님을 거역하고 배신하는 것입니다. 

아담과 하와는 하나님처럼 될 줄 알고 선악과를 따먹었으나, 그 결과는 너무나 비참했습니다. 첫째로, 그들의 눈이 밝아져서 자기들이 벌거벗은 줄을 알고 무화과나무 잎을 엮어 치마를 하였습니다. 이처럼 죄는 수치심을 가져다줍니다. 둘째로, 그들은 하나님을 피하여 숨었습니다. 창세기 3장 8절에 “그들이 날이 서늘할 때에 동산에 거니시는 여호와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아담과 그 아내가 여호와 하나님의 낯을 피하여 동산 나무 사이에 숨은지라”고 했습니다. 이처럼 죄는 하나님과 우리 사이를 단절시킵니다. 

성경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지 않는 사람들을 일컬어 “허물과 죄로 죽은 자들”이라고 말합니다(엡 2:1). 그들은 영적으로 이미 죽어 있는 상태입니다. 영적 죽음은 곧 하나님과 완전히 단절된 상태를 의미합니다. 죽은 사람이 아무 것도 알지 못하듯이, 영적으로 죽은 사람은 하나님에 대하여, 신령한 세계에 대하여 아무것도 알지 못합니다. 이 세상 돌아가는 이야기를 할 때에는 관심을 갖고 열심히 말하다가도 하나님에 대하여 말을 꺼내면 흥미를 잃어버리고 벙어리가 되고 맙니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전혀 알아들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이런 사람이 하나님과 소통하려면 먼저 복음을 듣고 죄를 회개해야 합니다. 

그런가하면, 구원 받은 성도들도 범죄하여 하나님과의 소통이 단절될 수 있습니다. 다윗은 하나님을 어찌나 잘 섬겼던지 “내 마음에 합한 사람”이라는 하나님의 인정을 받았습니다. 그런데 그러한 그가 밧세바의 일로 범죄하자 그만 하나님과의 소통이 막혔습니다. 기도가 막히고 찬송이 그쳤습니다. 마음에 평안이 사라지고 불안이 엄습했습니다. 그처럼 신실하던 성도가 하나님과 단절되었으니 그 심령이 얼마나 곤비했을까요? 그래도 다윗은 회개하지 않고 버텼습니다. 그러나 나단 선지자가 찾아와서 그의 죄를 책망했을 때 다윗은 변명하지 않고 “내가 하나님 앞에 범죄했노라”고 자복했습니다. 시편 51편은 그가 회개한 후에 지은 것인데, 거기서 그는 이렇게 하나님께 간구했습니다. 

“10)하나님이여 내 속에 정한 마음을 창조하시고 내 안에 정직한 영을 새롭게 하소서 11)나를 주 앞에서 쫓아내지 마시며 주의 성신을 내게서 거두지 마소서 12)주의 구원의 즐거움을 내게 회복시키시고 자원하는 심령을 주사 나를 붙드소서” 

이 구절을 통해서, 우리는 하나님과 소통이 막혔을 때 다윗의 심령이 얼마나 곤고하고 비참했는가를 잘 알 수 있습니다. 에베소서 4장 30절에 이르기를 “하나님의 성령을 근심하게 하지 말라 그 안에서 너희가 구속의 날까지 인치심을 받았느니라”고 말씀합니다. 구원 받은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불순종하고 죄를 지으면 우리 안에 계신 성령께서 근심하십니다. 자연히 하나님과의 소통에 장애가 생겨서 기도의 문이 막히고 신앙생활의 열심이 식고 세상을 좇아 살게 됩니다. 그러나 성도 여러분께서는 항상 죄를 멀리하시고 성령의 인도하심에 순종함으로 하나님과 원활한 소통을 이루어 생명이 충만한 삶을 누리시기 바랍니다. 


두 번째로, 죄를 해결하고 소통을 회복하려면 회개하고 하나님께로 돌아가야 합니다. 

오늘 본문에 보니 “6)너희는 여호와를 만날만한 때에 찾으라 가까이 계실 때에 그를 부르라 7)악인은 그 길을, 불의한 자는 그 생각을 버리고 여호와께로 돌아오라 그리하면 그가 긍휼히 여기시리라 우리 하나님께로 나아오라 그가 널리 용서하시리라”고 하였습니다. 소통이 단절된 백성들을 향하여 와서 대화하자고 하시는 하나님의 요청입니다. 이처럼 하나님께서는 언제나 먼저 죄인들에게 화해의 손을 내어 미십니다. 

선악과를 따먹고 범죄한 아담과 하와는 하나님을 찾아가서 죄를 자복하고 용서를 구한 것이 아니라 무화과나무 잎으로 치마를 하고는 동산 나무 사이에 숨었습니다. 그들을 찾아가신 분은 하나님이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담을 부르시며 “네가 어디 있느냐?”고 물으셨습니다. 이는 나무 사이에 숨어 있는 것을 몰라서 물으신 것이 아닙니다. 물리적인 장소를 물어보신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떠난 그들의 실상을 확인시켜 주려고 그렇게 물으셨습니다. “아담아, 네가 어디 있느냐?” 지금 네가 하나님의 편에 서 있느냐, 아니면 마귀의 편에 서 있느냐, 생명의 길에 서 있는지, 사망의 길에 서 있는지를 물어보신 것입니다. 

그때 아담은 대답하기를 “내가 동산에서 하나님의 소리를 듣고 내가 벗었으므로 두려워하여 숨었나이다”라고 했습니다. 죄인은 감히 거룩하신 하나님을 뵈올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아담은 하나님을 뵙는 것을 두려워하여 숨었던 것입니다. 요한일서 4장 18절에 “사랑 안에 두려움이 없고 온전한 사랑이 두려움을 내어 쫓나니 두려움에는 형벌이 있음이라 두려워하는 자는 사랑 안에서 온전히 이루지 못하였느니라”고 했습니다. 

범죄하기 전에 아담은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았으며 하나님을 만나 대화하는 것을 즐거워했습니다. 그런데 범죄하고 나자 그의 심령 상태가 180도 바뀌어서 하나님을 두려워하게 되었습니다. 죄는 하나님과 우리 사이의 사랑의 관계를 파괴하여 원수가 되게 합니다. 죄가 무서운 까닭이 여기 있습니다. 만일 단절된 하나님과의 소통을 복원하는 책임을 우리 인생들에게 맡기셨다면 영원히 불가능할 것입니다. 그런데 감사하게도 하나님께서 친히 죄의 문제를 해결해 주시기를 원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아담과 하와를 찾아오신 이유가 무엇이었습니까? 그것은 범죄한 그들에게 구원의 약속을 주시기 위함이었습니다. 그 약속은  “내가 너로 여자와 원수가 되게하고 너의 후손도 여자의 후손과 원수가 되게 하리니 여자의 후손은 네 머리를 상하게 할 것이요 너는 그의 발꿈치를 상하게 할 것이니라”는 창세기 3장 15절 말씀이 그것입니다. 이 말씀은 뱀을 저주하신 말씀이지만 그 속에는 인류 구원을 위한 하나님의 약속이 나타나 있습니다. 

여자의 후손은 곧 동정녀 마리아의 몸에서 탄생하실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키며, 뱀은 마귀를 가리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려 고난 받으신 것은 뱀에게 발꿈치를 물린 것과 같습니다. 그러나 주님께서 십자가에 달리심으로 마귀는 치명적인 패배를 당했습니다. 

또 한 가지, 창세기 3장 21절에 보면 “여호와 하나님이 아담과 그 아내를 위하여 가죽옷을 지어 입히시니라”고 증언합니다. 무화과 나뭇잎으로 만든 옷은 임시방편에 불과해서 시간이 지남에 따라서 말라 오그라져서 더 이상 수치를 가릴 수 없습니다. 하지만, 가죽 옷은 그들의 수치를 완전히 가려주었습니다. 무화과 나뭇잎으로 만든 옷은 인간적인 의를 말하고, 가죽옷은 하나님의 의를 의미합니다. 도덕이나 윤리, 예의, 종교, 철학과 같은 것들은 비유컨대 무화과나무 잎으로 만든 치마와 같습니다. 윤리 도덕을 잘 지켰다고 하나님 앞에 의로운 사람이라고 인정받지는 못합니다. 예의범절이 우리를 의롭게 만들어주지 못합니다. 이 세상의 종교들도 마찬가지로 우리를 하나님 앞에 어엿하게 세워줄 수 없습니다. 하물며 끝없는 의문 속을 헤매게 하는 철학은 더 말할 나위가 없습니다. 이에 대하여 잠언 14장 12절에 “어떤 길은 사람의 보기에 바르나 필경은 사망의 길이니라”고 말씀합니다. 

하나님 앞에서는 인간적인 의로써는 인정받지 못합니다. 하나님의 인정을 받으려면 하나님의 의를 부여 받아야 하는데, 가죽옷이 바로 하나님의 의를 상징합니다. 하나님께서 아담과 하와에게 가죽옷을 지어 입히신 것은 장차 메시야의 희생을 통해서 그를 믿는 자들이 하나님의 의를 선물로 받게 될 것을 미리 보여주신 것입니다. 가죽옷을 지어 입히기 위해서 무고한 짐승이 죽임을 당한 것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대속의 죽음을 당하실 것을 상징한 것입니다. 단절된 소통을 회복하기 위해서 이처럼 커다란 희생이 필요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인생들의 죄를 사할 만반의 준비를 하신 후에 우리를 향하여 악한 길과 불의한 생각을 버리고 하나님께로 돌아와서 죄 용서를 받으라고 요청하십니다. 죄 사함 받는 방법은 단순합니다. 하나님 앞에서 자기 죄를 시인하고 회개하면 됩니다. 그리할 때 하나님께서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을 우리 심령에 뿌려서 죄를 사하시고 정결케 해 주십니다. 

“너희는 여호와를 만날만한 때에 찾으라 가까이 계실 때에 그를 부르라”고 하셨습니다. 이는 하나님께서 주시는 구원의 기회를 놓치지 말고 붙잡으라는 것입니다. 예수 믿고 구원받을 수 있는 기회는 언제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정신이 맑을 때 믿어야 하고, 눈이 잘 보이고 귀가 잘 들릴 때 믿어야지, 정신이 오락가락하고 눈이 잘 보이지 않아 성경도 읽지 못하고 귀가 어두워 설교도 제대로 듣지 못하면 어떻게 제대로 믿을 수 있겠습니까? 그러므로 우리는 좋은 시기를 놓치지 않도록 늦기 전에 불신 가족과 이웃에게 전도해야 하겠습니다. 


세 번째로,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과의 소통을 회복해야 합니다. 

요즘 종교다원주의자들은 말하기를 “모든 종교는 다 같은 것이다. 무슨 종교를 믿든지 진실하게 믿기만 하면 구원을 받는다”고 말합니다. 그들은 말하기를 “모로 가도 서울만 가면 될 것 아니냐”고 합니다. 그러나 그런 사람들은 길이 무엇인지 잘 모르기 때문에 그런 말을 하는 것입니다. 

지금이야 모든 고속도로와 국도가 서울로 통하지만 옛날에는 그렇지 않았습니다. 길이 아닌 곳으로는 절대로 서울에 갈 수 없었습니다. 험산준령을 넘다가 호랑이나 늑대의 밥이 되거나 숲속에서 길을 잃고 말 것입니다. 잘못하면 낭떠러지에 갇혀서 오도 가도 못하는 신세가 될 수도 있습니다. 그렇더라도 지상의 길은 정 필요하면 개척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로 가는 길은 아는 자가 없으므로 물어볼 수도, 인위적인 방법으로 만들 수도 없습니다. 

우리가 하나님과 소통하려면 하나님께서 정하신 방법을 따라야 합니다.  그것은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말씀하시기를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요 14:6)고 하셨습니다. 예수님 한 분만이 우리를 하나님 아버지께로 데려다 주실 수 있습니다. 그러기에 사도들은 “다른 이로서는 구원을 얻을 수 없나니 천하 인간에 구원을 얻을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니라“(행 4:12)고 선포했던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소통의 방편은 하나 같이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은 것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보혈을 의지해서 하나님의 은혜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아갈 수 있는 것입니다, 구약시대의 대제사장이 제물의 피를 그릇에 담아가지고 지성소에 들어갔듯이, 신약의 성도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을 힘입어 하나님의 보좌 앞에 나아갈 수 있게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의롭다고 인정하시는 근거는 우리의 의로운 행위 때문이 아니라 우리의 심령에 예수 그리스도의 보배로운 피가 뿌려졌기 때문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 앞에서 우리의 중보자가 되셔서 우리를 위해 변호하시며 간구하십니다. 따라서 우리는 예수님의 손에 이끌려서 하나님 아버지 앞에 나아가는 것입니다. 

우리가 기도할 때도 우리의 이름이 아닌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해야 하나님께서 들으십니다.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시기를 “13)너희가 내 이름으로 무엇을 구하든지 내가 시행하리니 이는 아버지로 하여금 아들을 인하여 영광을 얻으시게 하려 함이라 14)내 이름으로 무엇이든지 내게 구하면 내가 시행하리라”고 하셨습니다. 또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명한즉 귀신이 쫓겨나며,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병자에게 손을 얹은즉 병이 나을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사랑하는 성도님들, 이처럼 위대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이 믿는 우리에게 주어져 있음을 아시기 바랍니다. 우리는 언제라도 예수님의 이름을 힘입어 하나님 아버지와 소통할 수 있습니다. 


네 번째로, 우리는 성령 안에서 하나님과 소통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성령을 보내주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16)내가 아버지께 구하겠으니 그가 또 다른 보혜사를 너희에게 주사 영원토록 너희와 함께 있게 하시리니 17)저는 진리의 영이라 세상은 능히 저를 받지 못하나니 이는 저를 보지도 못하고 알지도 못함이라 그러나 너희는 저를 아나니 저는 너희와 함께 거하심이요 또 너희 속에 계시겠음이라” 

성령께서는 우리를 돕기 위해서 보혜사로 오셨습니다. 우리가 법정에서 재판을 받을 때 변호사의 도움을 받듯이, 성령께서는 우리를 위해 변호하시며 은혜로운 삶을 살아가도록 도와주십니다. 

성령께서는 우리를 위해 기도해 주십니다. 이에 대하여 로마서 8장에 보니 “26)이와 같이 성령도 우리 연약함을 도우시나니 우리가 마땅히 빌바를 알지 못하나 오직 성령이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하여 친히 간구하시느니라 27)마음을 감찰하시는 이가 성령의 생각을 아시나니 이는 성령이 하나님의 뜻대로 성도를 위하여 간구하심이니라”고 했습니다. 혹 우리가 하나님과 소통이 원활하지 못할 때라도 성령께서는 우리 속에서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대신하여 하나님 아버지께 기도해 주십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성령의 인도하심에 순종한다면 성령 안에서 하나님과 친밀한 소통을 나눌 수 있는 것입니다. 바로 그것이 ‘무시로 성령 안에서 기도하는 것’입니다(엡 6:10). 

이제 그리스도인들에게는 성령께서 임재해 계십니다. “19)너희 몸은 너희가 하나님께로부터 받은바 너희 가운데 계신 성령의 전인 줄을 알지 못하느냐 너희는 너희의 것이 아니라 20) 값으로 산 것이 되었으니 그런즉 너희 몸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 

성전은 하나님을 만나고 예배하는 처소입니다. 이제 성도들의 몸이 성령의 전이 되었으므로 성도들은 항상 성령 하나님을 모시고 사는 사람들이 된 것입니다. 성령께서 우리에게 원하시는 것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소통입니다. 예배를 마칠 때 하는 축도는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하나님의 사랑과 성령의 교통하심이 너희 무리와 함께 있을찌어다”(고후 13:13)라는 구절인데, 여기 나오는 “성령의 교통하심”이 곧 성령의 소통하심과 같은 뜻입니다. 은혜가 충만한 성도는 성령과 교통하기 때문에 언제나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생활을 합니다. 그뿐 아니라, 성령 안에서 기도하기 때문에 확실한 기도 응답을 받습니다. 


사랑하는 성도님들, 하나님과 친밀한 소통을 나누면서 살아가기를 원하십니까? 회개를 통해서 사죄의 은총을 받아 하나님과 화목한 관계를 지속해 나가시기 바랍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하나님의 보좌 앞에 나아가시며, 무시로 성령과 교통을 나누시기 바랍니다. 그리하여 하나님과의 끊임없는 소통을 통해서 성도님들의 심령에 기쁨이 충만하고 활력이 넘치는 삶을 살아가시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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