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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새 이름 새 인생(2) : 야곱에서 이스라엘로 (창 32:22~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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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 이름 새 인생(2) : 야곱에서 이스라엘로 (창 32:22~32)

  발목 잡는 자에서 축복의 이름으로 

요즘 신문을 보면 유난히 ‘발목 잡다’는 표현이 많이 나옵니다. 예를 들어 보면 “고유가((高油價)에 발목 잡힌 한국경제,” “대통령의 발목을 잡는 촛불 시위,” 제가 굳이 설명 안 해도 무슨 뜻인지 다 아실 겁니다. 이렇게 우리말에서 ‘발목 잡힌다’는 말은 어떤 것에게 꽉 잡혀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모양을 뜻합니다. 그런데 사람 중에도 남의 발목을 잡는 사람이 있습니다. 

이를테면 “너는 남의 발목이나 잡는 사람이다”라고 한다면 아무짝에도 쓸모없고 남이 잘되는 것이나 막고 있다는 뜻이 되기 때문에 큰 욕입니다. 또 한편으로는 내가 잘되기 위해, 내가 성공하기 위해 남의 발목을 잡는 사람도 있습니다. 내가 잘되고 성공하려면 남과 선의의 경쟁을 펼치면서 내가 최선을 다하기만 하면 되는데 꼭 내가 잘하기보다 남이 잘되는 것을 막고 발목을 잡는 그런 사람도 있습니다.

그런데 성경에 보면 이런 남의 발목을 잡는 사람이 등장합니다. 바로 오늘의 주인공인 야곱입니다. 야곱의 인생은 그야말로 그 이름 그대로 이름값을 하는 사람이었습니다. 창세기 25장 24절에 보면 이삭과 리브가 부부가 쌍둥이를 해산하게 되는데 먼저 태어난 형은 온몸이 붉고 털이 많이 나있어서 이름을 ‘털보’라는 뜻을 가진 ‘에서’라고 지었고 나중에 태어난 동생은 태어날 때 형의 발꿈치를 잡고 태어났기에 ‘야곱’이라고 지었습니다. 

이 ‘야곱’이라는 이름은 히브리말로 ‘발꿈치를 잡은 자, 속이는 자, 남의 것을 빼앗는 자’라는 뜻입니다. 야곱은 바로 이 이름의 이름값을 하는 인생을 삽니다. 한평생 자기가 잘되려고 남의 발목이나 잡고 남의 자리나 남의 좋은 것을 수단방법 안 가리고 차지하는 인생을 산 것이지요. 태어날 때는 쌍둥이 형의 발꿈치를 잡고 나옵니다. 우리 교회에도 쌍둥이가 있습니다만 보통 쌍둥이는 불과 몇 분 차이로 태어납니다. 그런데 그 몇 분 차이에 형과 아우가 갈리니 동생 입장에서는 억울할 수도 있지요. 그래서 보통 쌍둥이 형제는 아우가 형을 인정해주기보다 친구처럼 맞먹으려고 할 때가 많습니다. 몇 분 먼저 태어났다고 형은 무슨 형이냐는 것이지요. 게다가 과학적으로 쌍둥이는 엄마 뱃속에서 먼저 생겨난 아이가 나중에 태어난다고 합니다. 그래서 미국에서는 나중에 태어난 아이를 형으로 인정해주기도 합니다. 

아무튼 이렇게 불과 몇 분 차이로 형과 동생이 결정되는 것도 억울한데 더욱이 구약시대 이스라엘에서는 장자, 즉 맏아들이 부모의 축복권을 모두 차지하게 되어있으니 더 억울한 일 아니었겠습니까? 그래서 야곱도 늦게 태어나면서 형 발꿈치를 잡고 먼저 나오려 든 것입니다. 태어날 때부터 남의 발목을 잡고 태어나더니 자라면서도 번번이 형 에서의 발목을 잡고 급기야 어머니 리브가와 공모하여 늙은 아버지를 속이고 형이 받을 축복을 가로채기까지 합니다. 삼촌 라반의 집으로 도망가서도 삼촌이자 장인인 라반을 속이고 옳지 못한 꾀를 써서 좋은 양들을 다 차지합니다. 이렇게 야곱의 인생은 늘 자기의 이득을 위해 남을 속이거나 남의 자리를 차지하는, 한 마디로 남의 발목이나 잡는 인생이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남의 발목이나 잡던 인생이 하나님을 만나 그 이름이 바뀝니다. 축복의 이름인 ‘이스라엘’로 말입니다. 오늘은 바로 이 야곱에서 이스라엘로 이름이 바뀐 사건을 나누어보도록 하겠습니다. 우리는 이 사건을 통해 하나님의 복과 응답을 받는 법에 대해 잘 배울 수가 있습니다.


하나님과 씨름하라!

오늘의 이야기는 삼촌 라반의 집에서 많은 재산과 가족을 얻은 야곱이 고향으로 돌아오는 데서부터 시작됩니다. 형을 피해 혈혈단신 라반의 집으로 도망했던 초라한 야곱이 이렇게  출세하고 성공해서 금의환향하던 중 뜻밖의 소식을 듣게 됩니다. 형 에서가 사백 명이나 되는 부하를 거느리고 자기를 만나러 온다는 소식입니다. “동생을 만날 것이면 혼자 오거나 기껏해야 종 몇 명만 거느리고 오면 될 것이지 도대체 사백 명이라는 어마어마한 숫자를 거느리고 오는 의도가 뭐람? 틀림없이 나와 가족들을 해치고 재산을 빼앗아 옛날 당한 일의 복수를 하려는 속셈일 거야”라고 판단된 순간 야곱은 두려움에 떨게 됩니다. 이 많은 가족과 재산을 한꺼번에 잃게 될지도 모른다는 커다란 공포심이 야곱을 짓누르기 시작합니다. 

이런 위기의 때에 야곱이 선택한 방법은 두 가지였습니다. 먼저 지금까지 살아온 방식대로 대단히 인간적인 방법을 씁니다. 우선 야곱은 가족과 종들과 가축을 두 때로 나눕니다. 형 에서가 와서 자기를 치면 두 떼 중 적어도 한 떼는 건지지 않겠냐는 아주 약삭빠르고 계산적인 방법입니다. 뿐만 아니라 자기 소유 중에서 상당한 숫자의 가축을 뽑아 형 에서에게 보냅니다. 선물 치고는 지나치게 많은 숫자인 것을 보니 형에게 자기를 잘 봐달라고 보낸 선물 아닌 뇌물입니다. 아마 야곱은 이 뇌물을 보내면서 “내가 어떻게 모은 가축인데, 얼마나 귀한 재물인데...” 하며 너무 아까워 손을 떨면서 보냈을 것입니다. 하지만 아무리 아까워도 자기 생명을 구할 수만 있다면 과감하게 투자하자는 계산 하에 보냈을 것입니다. 야곱 같으면 충분히 그러고도 남을 사람입니다.

이렇게 인간적이고 계산적인 방법 말고도 야곱은 신앙적인 방법도 함께 씁니다. 먼저 자기를 형 에서의 손에서 구해달라고 하나님께 기도합니다. 그리고 마지막에는 얍복 강가에 홀로 남아 하나님과 씨름하는 방법도 씁니다. 자, 그렇다면 지금부터 이 두 번째 방법, 즉 야곱이 형 에서와의 만남을 앞두고 쓴 마지막 방법이자, 대단히 신앙적인 방법을 집중적으로 살펴보도록 합시다.

앞서 말한 대로 인간적인 방법과 신앙적인 방법 모두를 쓴 야곱은 이제 마지막으로 하나님과 담판을 짓기로 마음먹습니다. 그래서 본문 22절에 보면 밤중에 일어나 두 아내와 두 여종과 열한 아들과 모든 재산을 먼저 얍복 나루를 건너게 한 후 자기는 홀로 남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에게 아주 복잡한 문제가 생겼을 때 우리는 야곱처럼 홀로 남을 필요가 있습니다. 많은 사람과 복잡한 현실 속에 있다 보면 마음이 혼란하고 복잡해서 좀처럼 문제에 집중하기가 힘이 듭니다. 그래서 많은 경우, 문제가 복잡하고 어려우면 한 발짝 현실에서 물러나 조용히 혼자 남아 그 문제에 집중하면 해결의 방법을 찾을 때가 있습니다. 저도 복잡한 문제가 생기거나 아주 중요한 일을 앞두고 있을 때 혼자 한적한 기도원이나 조용한 곳을 찾아갑니다. 여러분도 한 번 이렇게 해보세요. 내가 조용히 혼자 남으면 하나님이 그 고요한 가운데 내게 해답을 일러 주실 때가 상당히 많습니다.

자, 아무튼 이렇게 조용히 얍복 강가에 혼자 남은 야곱에게 24절에 보면 어떤 일이 일어납니까? ‘어떤 사람’이 찾아와서 야곱과 날이 새도록 씨름을 합니다. 많은 사람들은 이 야곱과 씨름한 ‘어떤 사람’이 도대체 누구인지 궁금해 합니다. 어떤 분은 이 사람이 천사거나 천사장 미가엘이라고도 하고 또 예수 그리스도라고도 하는 분도 있습니다. 하지만 이 ‘어떤 사람’을 하나님으로 보는 것이 좋을 것입니다. “아니, 도대체 어떻게 하나님이 사람과 씨름을 할 수 있나?” 궁금한 분도 있겠지만 구약성경에는 실제로 하나님이 인간처럼 나타나실 때가 많습니다. 

대표적인 예가 하나님이 두 천사와 함께 소돔과 고모라를 멸망시키러 가다가 아브라함을 만난 일입니다. 자, 그래서 오늘 하나님이 얍복 강가에 홀로 남은 야곱이에게 찾아가 밤새도록 씨름을 하게 된 것입니다. 여기서 씨름이라면 우리나라 씨름처럼 샅바 매고 모래밭에서 한판 뒤집기를 하는 그런 씨름은 아닙니다. 당시 이스라엘 사람들은 어떤 씨름을 했는지 우리는 알 수 없습니다. 다만 히브리말로 ‘씨름’을 뜻하는 말 ‘아바크’가 “서로 맞붙어 싸우다”는 뜻이고 또한 오늘 본문에서 하나님과 야곱이 씨름한 내용을 미루어 볼 때 이스라엘의 씨름은 단순하게 두 사람이 서로 붙들고 힘겨루기를 하다가 먼저 상대방을 쓰러뜨리는 쪽이 이기는 경기였던 것 같습니다. 상당히 격렬한 싸움이었겠지요.

아무튼 인생에 닥쳐온 최고의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 홀로 남은 야곱이 첫 번째로 택한 방법은 바로 하나님과 씨름하는 것이었습니다. 사람들이 어려운 일이 생길 때 흔히 범하는 실수가 하나 있습니다. 바로 그 문제 자체와 씨름하는 것입니다. 오늘 야곱도 먼저 그 문제 자체와 씨름하는 실수를 범합니다. 바로 형 에서에게 잘 보이려고 막대한 뇌물을 바치는 일이었습니다. 하지만 그런다고 문제가 해결될까요? 절대 안 됩니다. 오히려 이런 방법을 쓰면 일이 더 꼬이고 문제가 어려워지기만 할 뿐입니다. 

오늘날 우리도 문제가 생기면 야곱처럼 그 문제 자체와 씨름해서 문제를 해결하려고 듭니다. 어떤 사람은 야곱처럼 자기가 하는 일을 빨리 진행시키려고 급행료라는 뇌물을 줍니다. 편법을 쓰거나 불법도 거침없이 행합니다. 하지만 그런 방법으로는 문제가 해결되지 않습니다. 해결되는 ‘것처럼’ 보일 뿐입니다. 어떤 분들은 남과의 관계가 어려워지면 그 사람하고 맞붙어 싸워서 직접 문제를 해결하려 듭니다. 소위 ‘정면 돌파’라는 방법입니다. 하지만 이렇게 정면 돌파하다가 오히려 그 사람과의 관계가 더 어려워 질 때가 훨씬 많습니다. 

그러나 오늘 말씀은 어려운 문제, 꼬인 문제를 해결하는 방법이 그 문제 자체와 씨름하는 것이 아님을 가르쳐 줍니다. 그 문제 자체와 씨름하지 말고 하나님과 씨름하는 것이야말로 문제를 해결하는 최상의 방법인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어려울 때 하나님과 씨름하여 이기면 하나님이 그 문제를 해결해주시는 방법인 것입니다. 참으로 놀라운 방법입니다. 그리고 최고의 최상의 문제 해결 방법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아플 때나 어떤 큰 병에 걸렸을 때도 그 병 자체와 싸우려 들면 안 됩니다. 병하고 요즘 아이들 쓰는 속된 말로 ‘맞짱’ 뜨려는 분들이 많은데 여러분, 이러면 안 됩니다. 우리는 병과 싸워 이길 수 없습니다. 병이 얼마나 무섭습니까? 멀쩡하게 건강하던 사람이 하루아침에 병자가 되고 죽어가게 만드는 것이 병입니다. 무슨 수로 우리가 병을 이깁니까? 아무리 훌륭한 의사, 명의라도 그 자신이 병에 걸리면 꼼짝 없이 죽게 마련인데요. 그러니 병과 직접 싸우고 맞짱 뜨려고 하지 말고 우리는 하나님과 씨름하면 됩니다. 

우리의 상대는 병이 아닙니다. 병과 상대하지 마세요. 우리는 하나님만 상대하면 됩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대신 그 병과 싸워주십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세상의 어떤 질병인들, 아니 심지어 죽음인들 천지의 창조자시며 인간의 생사화복을 주장하시는 하나님을 이길 수 있습니까? 그러니 병이 아닌 하나님과 씨름하는 것이 병을 이기는 최상의 방법이라는 말입니다. 질병뿐만 아니라 우리를 힘들게 하고 어렵게 만드는 모든 문제들, 모든 위기와 고통은 모두 그것들과 직접 씨름하는 것이 아니라 오늘 야곱처럼 하나님과 씨름함으로 이겨내고 극복할 수 있습니다. 여러분도 이 방법을 꼭 깨닫기 바랍니다.


하나님을 이겨라!

오늘 인생에 닥쳐온 최고의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 홀로 남은 야곱이 두 번째로 택한 방법은 바로 하나님을 이기는 것이었습니다. “하나님을 이긴다”고 하니까 무슨 말인지 이해하지 못하는 분들이 많습니다. “우리가 어떻게 하나님을 이기나? 말도 안 되지” 하고 말입니다. 하지만 여기서 하나님을 이긴다는 말은 하나님에게 이겨먹는다는 뜻이 아닙니다. 승부를 건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을 이기겠다는 각오로 응답과 축복을 따내라는 뜻입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하나님과 승부를 걸고 하나님을 이길 수 있는 방법은 무엇인가? 단 한 가지 방법밖에 없습니다. ‘기도로 씨름하는 방법’뿐입니다. 

오늘 본문 25절에 보면 ‘그 사람’ 즉 하나님이 “자기가 야곱을 이기지 못함을 보고”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이 야곱을 이기지 못한 것은 야곱이 목숨 걸고 이기려 들었기 때문입니다. 다른 말로 하면 야곱이 자신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목숨 걸고 기도로 매달렸다는 뜻입니다. 야곱이 얼마나 목숨 걸고 매달렸다 한 번 볼까요? 본문 24절에 보면 야곱은 날이 새도록 하나님과 씨름을 합니다. 그런데 이 밤새도록 한 씨름이 한판승으로 끝난 것은 아니었습니다. 말하자면 기권승입니다. 

25절에 보면 하나님은 밤새도록 씨름을 했는데도 야곱을 한판승으로 넘어뜨리지 못합니다. 그래서 야곱을 이겨보려고 야곱의 허벅지 관절을 치십니다. 참고로 우리가 전에 읽던 개역성경에는 ‘환도뼈’라고 나와 있습니다만 이 낱말은 ‘환도뼈’라기보다 허벅지 부분의 우묵하게 패인 부분을 뜻합니다. 그래서 개역개정판은 ‘허벅지 관절’이라고 번역한 것입니다. 아무튼 하나님은 야곱을 항복시키려고 허벅지 관절 부분을 세게 때려 탈구(脫臼)시킨 것입니다. 이렇게 하면 상대방은 힘을 전혀 못 쓰게 되어 항복할 수밖에 없게 됩니다. 그런데 이렇게까지 했는데도 야곱은 쩔뚝거리는 몸으로도 끝까지 하나님을 붙잡은 손을 놓지 않았습니다. 참 질긴 사람입니다. ‘야곱’이라는 이름에 걸맞게 움켜쥔 손을 끝까지, 정말 죽을 때까지 안 놓은 것이지요. 그랬더니 어떻게 됩니까? 

26절에 보면 하나님은 애원하다시피 야곱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날이 새려고 하는데 제발 좀 나를 놔주라.” 그런데 야곱은 끝까지 움켜쥐고 안 놓습니다. 그리곤 이를 악물고 이렇게 말합니다. “하나님, 당신이 내게 축복하지 않으시면 절대 이 손 못 놓습니다. 절대 못 가시게 할 겁니다.” 이만하면 하나님도 항복하시는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결국 야곱에게 손들고 그의 청을 들어주시게 되는 것입니다. 케이오승, 한판승은 아니지만 말하자면 야곱이 기권승을 받아내고 만 셈입니다.

이렇게 보면 야곱이 하나님에게 기권승을 받아낸 비결은 끈질기게 버티기입니다. 움켜 쥔 손을 절대 놓지 않고, 관절이 탈구되고 몸이 만신창이가 되어도 절대 안 놓고 끈질기게 버티니 하나님이 항복하신 것입니다. 우리의 기도가 응답받는 방법도 두 가지가 있을 것입니다. 하나는 기도하자마자 보란 듯이 멋지게 즉시 응답 받는 방법입니다. 한 마디로 케이오승, 한판승입니다. 하지만 이런 식으로 응답 받는 경우는 그리 많지 않습니다. 이런 경우보다는 두 번째 방법, 즉 판정승 내지 기권승이 더 많습니다. 즉 당장 응답받지는 못하지만 끝까지 기도의 손을 놓지 않고 끈질기게 매달리는 것입니다. “축복 안 해주시면, 응답 안 해주시면 끝까지 이 손 못 놓습니다. 죽을 때까지 안 놓을 겁니다.” 하고 매달리면 하나님을 항복하시게 해서라도 반드시 응답이 오게 마련입니다. 야곱은 오늘 이 방법으로 하나님의 응답과 축복을 받아냈습니다. 우리도 이런 자세를 배워야 합니다.

이름을 바꾸라! 축복의 이름으로!

여러분, 결국 지금까지 설명한 식으로 야곱이 하나님과 씨름하고 매달려서 하나님을 이겼지요? 그랬더니 어떤 일이 벌어집니까? 27절에 하나님이 야곱에게 물으십니다. “야, 내가 졌다. 너 정말 독하다. 네 이름이 도대체 뭐냐?” “야곱입니다.” “그럼 그렇지, 네가 한 번 움켜쥐면 절대 안 놓는다는 야곱이구나. 네 명성은 익히 들어 알고 있다. 내가 오늘 잘못 걸렸구나. 야곱이 네가 소원 안 들어주면 죽을 때까지 안 놓을 테니 하는 수 없이 축복해주마.” 이런 식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야곱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네 이름을 다시는 야곱이라 부르지 말고 이스라엘이라고 부를 것이다.”

‘야곱’이라는 이름은 앞서 설명한 대로 ‘움켜쥐는 자’입니다. ‘내가 잘되려고 남의 발목이나 잡는 자’입니다. ‘남을 속이는 자’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새로 주신 이름 ‘이스라엘’은 무슨 뜻일까요? “하나님을 이긴다”는 뜻이나 “하나님과 더불어 힘을 얻어 강하게 된 자”라는 뜻입니다. 즉 ‘야곱’의 이름이 ‘이스라엘’로 바뀐 것은 ‘남의 발목이나 잡던 자’가 기도로 씨름하여 하나님을 이김으로 하나님과 함께 다스리는 자가 된 것이요, 나아가 이스라엘 민족 전체의 조상이 되는 복을 얻은 것입니다. 

야곱은 형 에서와 만나는 문제를 해결하려고 하나님과 씨름했지만 하나님은 씨름에 이긴 야곱에게 단순히 그 문제만 해결해 주신 것이 아니라 야곱의 인생을 바꾸어 주시고 그의 미래를 바꾸어 주신 것입니다. 부자나 복 받은 자 정도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영원히 복을 받고 믿는 자들의 조상이 되는 은혜를 주신 것입니다. 기대를 훨씬 뛰어넘는 복과 응답입니다.

 우리도 기도로 승부하고 하나님과 씨름하면 우리가 원하는 정도의 응답과 복이 아니라 그것을 훨씬 더 뛰어넘는 놀라운 응답과 복을 받을 때가 많습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그저 잘 살고 출세한 사람 정도로 끝나기를 바라지 않고 위대한 하나님의 사람으로 위대한 일을 이루기를 원하시기 때문입니다. 우리도 그저 병이 낫고 내가 원하는 기도 응답 받는 수준을 넘어 하나님이 귀하게 쓰시는 위대한 이름을 받아야 합니다. 저와 여러분도 이러한 위대한 축복의 이름을 받아 주의 일들을 이루어 가시기를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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