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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신앙의 초점 (마 16:13~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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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앙의 초점 (마 16:13~20) 
 
2008년 오스 기니스(Os Guinness)는 그의 책 󰡔소명󰡕에서 미연방정부에서 많은 대통령들의 경제 자문관으로 활약했던 유대인 아더 번즈(Arthur Burns)의 기도를 소개합니다. 1970년대의 어느 날 백악관의 비공식 기도모임에서 번즈는 이렇게 기도했습니다. “주님, 유대인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알게 해주시기를 기도합니다. 회교도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알게 해주시길 기도합니다. 끝으로 주님, 그리스도인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알게 해주시길 기도합니다. 아멘.” 깊은 통찰력을 가진 번즈의 기도는 명목상의 그리스도인과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신앙을 가진 참 그리스도인을 구별하고 있습니다.

사실 이러한 구별은 이미 2천 년 전에 예수께서 하셨습니다.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천국에 다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7:21). ‘주여 주여’하는 명목상의 그리스도인들은 예수님 시대로부터 지금까지 줄기차게 성경적 신앙에 걸림돌이 되었습니다. 지난 2천년 동안 성경적 신앙을 훼파해 온 것은 언제나 교회밖에 있는 어떤 것이기보다는 교회 안에 있는 어떤 것이었습니다. 이 사실은 우리 신앙의 핵심이 무엇인지를 알고 그 초점에서 벗어나지 않도록 늘 점검할 필요가 있음을 말해줍니다. 우리는 무엇을 믿어야 하며, 무엇을 전해야 할까요?

본문에서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질문을 던지셨습니다. 시기적으로는 갈릴리 사역이 끝나고 예루살렘을 향하여 올라가는 때였습니다. 예수님은 3년 가까이 제자들과 함께 하시면서 많은 말씀들로 가르치셨고 많은 기적들을 보이셨습니다. 그리고 이제는 제자 교육이 제대로 되었는지 점검하셨습니다. 마치 졸업 시험과 비슷하다고 할 수 있겠지요. 이 질문의 의미는 ‘너희가 나의 제자라고 하려면 이것만큼은 분명히 알아야 한다. 이것이 제자 교육의 핵심이요 본질이다’는 것입니다. 

예수께서 제자들의 신앙 수준을 모르셔서 알아보려고 하신 것은 아닐 것입니다. 다만 이 질문을 통해서 제자들 스스로가 참으로 알아야 할 것을 올바로 알고 있는지 돌아볼 수 있는 기회를 주신 것이겠지요. 아무튼 예수님의 질문은 예수님을 따르는 삶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본질이 무엇인지, 기독교 신앙의 핵심이 무엇인지, 신앙생활의 초점을 어디에 두어야 하는지를 점검할 수 있게 합니다. 

먼저 예수께서 본문과는 다른 질문을 던졌다고 가정해봅시다. ‘너희는 나의 가르침 중에서 무엇을 가장 중요하게 여기느냐?’라고 질문하셨다면, 기독교 신앙은 예수님의 가르침에 초점을 두어야 했을 것입니다. 예수님의 가르침들 중에서 가장 중요한 가르침들을 찾고 또한 그 가르침을 핵심으로 해서 예수님의 가르침을 전파해야 했을 것입니다. ‘너희는 내가 행한 기적 중에 무엇을 가장 중요하게 여기느냐?’라고 질문하셨다면, 기독교 신앙은 예수께서 행하신 기적에 초점을 두어야 했을 것입니다. 예수께서 행하신 기적들을 체험하고 그 체험을 전수하는 일들을 핵심으로 삼아야 했겠지요. ‘너희가 나를 따르면서 받은 복중에 가장 큰 복이 무엇이냐?’라고 질문하셨다면, 기독교 신앙은 예수를 믿음으로서 받은 복에 초점을 두어야 했을 것입니다. 예수 믿고 무슨 복을 받았는지 어떤 복을 받을 수 있는지를 핵심으로 신앙이 전개되었겠지요. 그러나 예수님은 그렇게 질문하지 않으셨습니다. 

기독교 신앙에 있어서 예수님의 가르침들과 기적들, 그리고 그분으로 말미암는 복은 매우 중요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께서 그것들과 관련된 질문을 던지지 않으셨다는 사실은 그것이 본질과 핵심은 아니라는 점을 말해줍니다. 사실 기독교인이 아닐지라도 예수님의 가르침을 따르는 사람들은 많습니다. 기독교인이 아니지만 예수님께서 행하셨던 기적들을 추구하는 사람들 또한 많습니다. 대표적으로 간디는 예수님의 산상보훈을 늘 머리맡에 두고 읽으며 그 사상을 실천하려고 했던 인물이었으나 기독교인은 아니었습니다. 오늘날 기독교 이단들이나 타 종교에서 예수께서 행하셨던 기적과 동일한 기적들을 일으키는 예도 허다합니다. 예수님 믿지 않고서도 여러 종류의 복들을 누리는 사람들 또한 많습니다. 

이를 볼 때, 예수님의 가르침을 귀하게 여기며 그 가르침을 따라서 산다고 해서 참 기독교인이라고 단정할 수 없음을 알게 됩니다. 예수께서 행하신 기적들을 체험하며 엄청나게 기적들을 행할지라도 참 기독교인이 아닐 수 있음을 생각하게 됩니다. 또한 많은 복을 받았다고 해서 참 제자가 되었다고 말할 수 없음을 깨닫습니다. 가르침에 순종하는 것과 기적을 행하는 것과 복을 받은 사실들은 참 기독교인이 되었음을 점검하는 ‘기준’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초점이 되면 단지 ‘주여 주여’하는 사람이 될 수 있습니다.

배고픈 훈련병 시절에 초코파이를 먹고 싶어 교회에 다니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자대에 배치 받으면 고참들의 눈초리를 벗어나서 잠시나마 자유를 누리고 싶은 욕구 때문에, 혹은 못다 잔 잠을 자려고, 혹은 하기 싫은 일을 피하려고 교회에 나오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것이 군대 교회를 다니는 자들에게 주어지는 일종의 ‘복’이었습니다. 하지만 그 복을 중심으로 교회를 다닌 자들은 고참이 되면서 서서히 교회를 떠납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기적을 많이 체험하고 많은 가르침을 알고 있지만 결국 교회를 떠나는 경우가 있습니다. 왜 그런 일이 발생할까요? 그들이 참 그리스도인이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물론 초코파이를 먹으려는 동기로 교회에 왔다가, 혹은 위로 받으려는 마음에서 교회에 왔다가 참 그리스도인이 되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런 경우는 교회에 머무는 기간 중에 반드시 알아야 할 신앙의 핵심을 알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이와는 달리 그 핵심을 모르면서 계속 다른 동기로 교회에 머무르고 있는 사람들로 인해 기독교 신앙은 왜곡되고 변질됩니다. 그 핵심을 모르면서 열심히 기독교 종교적인 일들을 하기 때문에 기독교 신앙은 더욱 빨리 부패해버립니다.

그렇다면 참 그리스도인임을 점검할 수 있는 표지는 무엇일까요? 이제 예수께서 어떻게 질문하셨는지 본문을 살펴봅시다. “사람들이 인자를 누구라 하느냐?”(13).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15). 예수님은 사람들이든 제자들이든 ‘예수님을 누구로 알고 있는지?’ 점검하기 원하셨습니다. 이 질문은 우리의 신앙이 ‘예수님은 누구신가’를 아는데 초점을 두어야 함을 말해줍니다. 우리의 전도와 선교 역시 ‘예수님이 누구신지’를 전파하는 것에 초점이 있음을 알려줍니다. 기독교 신앙의 핵심은 ‘한 인격’에 대한 관심이지 ‘비인격적인 어떤 것’에 대한 관심에 있지 않습니다. 

예수님께서 가르치셨던 모든 가르침들과 행하셨던 모든 이적들은 ‘예수님이 누구신가’를 바르게 알도록 하기 위해 보조적인 역할을 합니다. 신구약 성경 역시 ‘예수 그리스도’라는 한 분의 ‘인격’에 대해 증언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너희가 성경에서 영생을 얻는 줄 생각하고 성경을 상고하거니와 이 성경이 곧 내게 대하여 증거하는 것이로다”(요 5:39)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성경은 본질적으로 ‘어떤 사상’에 대한 것이 아니라 ‘어떤 인격’에 대한 것입니다. 또한 예수님은 “영생은 곧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의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니이다”(요 17:3)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영생도 ‘어떤 인격’에 관련되어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기독교 신앙이 ‘한 인격’에 대한 초점에서 벗어나 일이나 가르침이나 기적이나 복과 같은 비 인격적인 어떤 것으로 옮겨질 때 변질 되었다고 평가할 수 있습니다. 변질되었기 때문에 그러한 신앙은 반드시 부패를 가져옵니다. 변질된 명목상의 기독교인들로 인해 괴로움을 당한 사람들은 ‘예수여, 저를 당신의 추종자들로부터 구원하소서’라는 티셔츠를 입을 수도 있겠지요. 반면에 한 인격을 분명히 알고 있었던 초대 교회는 믿지 않는 자들로부터도 칭송을 받았었습니다. 가르침과 기적이 풍성하면서도 “온 백성에게 칭송”을 받으며 “주께서 구원받는 사람을 날마다 더하게” 하셨던 예루살렘 교회 공동체의 모습은 오늘날 사회로부터 지탄을 받고 있는 교회의 모습과 너무 상반되어 보입니다.

기독교 신앙은 예수님의 가르침을 열심히 순종하고 있을 때나 기적을 체험했을 때나, 열심히 종교적인 일을 행하고 있을 때가 아니라, 그 모든 것을 통해서 ‘예수’라는 한 인격에 대한 깨달음이 있을 때 바르게 성장합니다. 예수님을 안다고 해서 반드시 바르게 사는 것은 아니지만, 예수님을 바르게 알지 못하고서는 바르게 살아낼 재주가 없습니다. 우리의 신앙에 변화와 성장이 있는 순간은 언제나 그분에 대한 새로운 깨달음이 있습니다. 머리로는 늘 그분이 사랑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을지라도 그것이 가슴으로 깨달아졌을 때, 그분께서 나와 함께 하신다는 사실을 머리로는 알고 있었을지라도 그것이 실질적으로 깨달아졌을 때, 그 때 사람은 변하고 성장합니다. 

예수님이 누구신지 진정으로 깨달아 졌을 때, 변화되지 않을 사람이 없습니다. 운명주의자도 변하고 허무주의자도 변합니다. 교만하고 완악한 자도 변합니다. 게으르고 한심한 자도 변합니다. 무기력한 자도 힘을 얻고, 무능한 자가 능력을 얻습니다. 그렇다면 교회의 전도와 선교에 있어서 핵심 역시 ‘예수님은 누구신가’에 있어야 할 것입니다. 우리 자녀들을 교육함에 있어서도 가장 중요한 것은 ‘예수님이 누구신가’를 바르게 알도록 돕는 일일 것입니다. 그것이 우리 신앙의 핵심이며 초점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본문에서 베드로는 예수님이 누구신지 바르게 알았습니다.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17). 베드로는 그분이 온전한 사람이시면서 동시에 온전한 하나님이심을 고백했습니다. 그분만이 성경에 기록된 ‘그 그리스도’이시며 유일한 구원자이심을 고백했습니다. 예수님은 베드로의 고백을 들으시고 말할 수 없는 축복으로 축복하셨습니다. 예수 믿고 복 받는 것은 아주 적은 복에 불과합니다. 그보다는 예수님을 바르게 알고 바르게 고백할 수 있는 것이 참된 복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복은 내가 노력으로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이를 네게 알게 한 이는 혈육이 아니요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시니라”(17)고 하셨습니다. 

항상 신앙의 초점을 점검하며 본질이 왜곡되지 않는 신앙이 되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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