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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과학과 신앙의 관계성 (요 20:24~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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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학과 신앙의 관계성 (요 20:24~31)


『[24] 열두 제자 중의 하나로서 디두모라 불리는 도마는 예수께서 오셨을 때에 함께 있지 아니한지라 [25] 다른 제자들이 그에게 이르되 우리가 주를 보았노라 하니 도마가 이르되 내가 그의 손의 못 자국을 보며 내 손가락을 그 못 자국에 넣으며 내 손을 그 옆구리에 넣어 보지 않고는 믿지 아니하겠노라 하니라 [26] 여드레를 지나서 제자들이 다시 집 안에 있을 때에 도마도 함께 있고 문들이 닫혔는데 예수께서 오사 가운데 서서 이르시되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하시고 [27] 도마에게 이르시되 네 손가락을 이리 내밀어 내 손을 보고 네 손을 내밀어 내 옆구리에 넣어 보라 그리하여 믿음 없는 자가 되지 말고 믿는 자가 되라 [28] 도마가 대답하여 이르되 나의 주님이시요 나의 하나님이시니이다 [29]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는 나를 본 고로 믿느냐 보지 못하고 믿는 자들은 복되도다 하시니라 [30] 예수께서 제자들 앞에서 이 책에 기록되지 아니한 다른 표적도 많이 행하셨으나 [31] 오직 이것을 기록함은 너희로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믿게 하려 함이요 또 너희로 믿고 그 이름을 힘입어 생명을 얻게 하려 함이니라』(요 20:24-31) 

말기암 환자가 의사로부터 살 수 없다는 진단을 받고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현대과학으로는 고칠 수 없다니 죽을 수밖에 없는 자신의 처지가 너무 억울하고 불쌍했습니다. 어느 날 아들내외가 외출을 하여 혼자 집을 지키고 있는데 강도가 흉기를 들고 침입했습니다. 목에 흉기를 들이대며 “돈만 내 놓으면 목숨은 살려준다. 소리 지르지 마라, 돈만 내 놓으면 목숨을 살려 주겠다.” 위협을 했습니다. 말기암 환자인 이 할머니가 강도를 향해 욕을 퍼붓습니다. “이놈아! 의사도 못 고친다는데 네깐놈이 어떻게 날 살려. 의사도 죽는다고 했는데 네 놈이 나를 어떻게 살려.” 강도는 말기암 할머니에게 따귀만 맞고 집을 나갔답니다. 농담입니다.

세상은 우리를 영원히 살게 하지 못합니다. 생로병사의 과정 속에서 누구나 죽을 수밖에 없습니다. 아무도 우리를 죽음에서 살릴 자가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를 살리십니다. 그 증거가 부활의 첫 열매인 예수님이십니다. 부활하신 주님을 바라볼 때 “하나님은 나를 살릴 수 있다”는 믿음을 갖게 됩니다. 성경은 그것을 우리에게 증거해 주고 있습니다. ① 하나님은 죽음에서 우리를 살리십니다. ② 하나님은 절망에서 소망으로 살리십니다. ③ 하나님은 죽음을 이기는 힘으로 할 수 없다(can't)는 것을 할 수 있다(can)로 살려주십니다. ④ 하나님은 실패를 성공으로 살려주십니다. 부활 후 첫 주일예배를 드리는 여러분 모두가 부활의 주님을 만나셔서 이 능력을 받으시기를 축원합니다. 

종교를 갖지 않은 몇 명의 과학도들이 모임을 가졌습니다. 하나님을 부인하는 무신론자들이었습니다. 인간은 더 이상 하나님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Humankind no longer needed God)는 결의를 하기 위해서였습니다. 그들은 대표자 한 사람을 하나님께 보내서 그들의 결정사항을 통보하도록 했습니다. 과학도는 하나님께 나아가서 “하나님, 우리는 더 이상 당신을 필요로 하지 않습니다”(We no longer need you)고 말했습니다. “우리는 이제 사람도 복사할 수 있고 여러 가지 기적적이고 불가사의한 일들을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왜 계속하려고 하십니까?” 하나님은 인내심을 갖고 친절하게 그의 얘기를 경청하였습니다. 

과학도의 이야기가 끝나자 하나님이 말씀하십니다. “좋다. 이건 어떠냐? 우리 사람 만드는 시합을 하자”(a man-making contest) 과학도가 대답합니다. “좋습니다. 대단한 시합이 될 겁니다.” 자신감을 드러내는 과학도에게 하나님은 한 가지 조건을 내세웁니다. “자, 내가 옛날에 아담을 만들던 방식으로 할 것이다.” 과학도가 말합니다. “좋습니다. 문제없습니다.” 그리고는 허리를 굽혀 한 움큼의 흙을 쥐었습니다. 진흙으로 사람의 형상을 만들려는 과학도를 바라보던 하나님이 말씀하셨습니다. “안되지. 안되지. 안되지, 너는 네 자신의 흙을 가져다가 만들어야 한다.”

우리 주변에는 과학과 종교 간의 갈등에 대해 몹시 불안해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과학과 종교의 갈등은 때때로 그리스도인들에게도 혼란을 주곤 합니다. 오늘 부활 후 첫 주일에 도마와 예수님과의 대화를 통해서 이런 갈등으로 혼란을 겪는 사람들에게 신앙의 길잡이를 발견했으면 좋겠습니다.

디두모라 하는 도마는 ‘의심 많은 도마’(famous doubter)라는 별명을 갖고 있을 만큼 실증주의자였습니다. 무엇이든지 눈으로 확인하고 검증되어야만 받아드리는 타입이었습니다. 그런 도마와 예수님과의 대화는 종교와 과학의 갈등을 해소하는 길을 발견하게 합니다. 하나님 없이도 얼마든지 살아갈 수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과 과학이 없이도 더 잘 살 수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에게 새로운 아이디어를 얻게 하는 대화입니다.

예수님은 부활하신 후 제자들에게 나타나셔서 손과 옆구리를 보이시면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 같이 나도 너희를 보내노라』(요 20:21) 

이 말씀을 하시고는 제자들을 향하여 큰 숨을 내쉬며 또 말씀하십니다.

『성령을 받으라. 너희가 누구의 죄든지 사하면 사하여질 것이요 누구의 죄든지 그대로 두면 그대로 있으리라 하시니라』(요 20:22-23) 

예수님의 제자들은 못 박힌 손과 창에 찔리신 옆구리의 상처를 보고 예수님의 부활을 몹시 기뻐했습니다. 그 자리에 없었던 도마를 만나자 부활하신 예수님을 보았다고 알려주었습니다. 그때 도마는 단호히 말합니다.

『내가 그의 손의 못 자국을 보며 내 손가락을 그 못 자국에 넣으며 내 손을 그 옆구리에 넣어 보지 않고는 믿지 아니하겠노라』(요 20:25) 

그로부터 여드레가 지난 후 제자들이 문을 닫고 집안에 있을 때 벽을 지나서 예수님께서 들어오셨습니다.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라고 인사를 건넨 예수님은 도마의 마음을 꿰뚫어 보시고는 말씀하십니다.

『네 손가락을 이리 내밀어 내 손을 보고 네 손을 내밀어 내 옆구리에 넣어 보라 그리하여 믿음 없는 자가 되지 말고 믿는 자가 되라』(요 20:27) 

예수님의 이 말씀에 도마는 직접 손으로 예수님의 손이나 옆구리를 만졌다는 기록은 없습니다. 즉시 그 앞에 무릎을 꿇고 두 손을 높이 들고 고백했을 것입니다. 

『나의 주님이시요 나의 하나님이시니이다』(My Lord and my God!)(요 20:28)

아마도 예수님은 도마의 손을 꼭 잡고 일으켜 세우며 말씀하셨을 것입니다.

『너는 나를 본 고로 믿느냐 보지 못하고 믿는 자들은 복되도다』
(Blessed are those who have not seen and yet have believed.)(요 20:29) 

참으로 아름다운 장면입니다. 더구나 의심 많은 도마, 그러나 예수님의 눈에는 그가 매우 정직하고 헌신적인 제자로 보였습니다. 이 이야기를 읽을 때마다 의심은 결코 잘못이 아니라는 것을 깨닫게 합니다. 예수님은 의심 많은 도마를 나무라지 않았습니다. 직접 도마의 눈으로 확인하게 해주셨습니다. ‘의심한다’는 것은 ‘생각한다’는 것이고 하나님이 우리 인간에게 “뇌”를 주신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삶과 신앙이 씨름하기를 바라십니다. 하나님이 우리의 영혼이 천국에서 주님과 함께 동거할 수 있도록 만드신 것도 바로 이런 씨름을 통해서 얻어지는 값진 것이기 때문입니다.

인도의 캘커타에서 빈민들을 보살피며 행려병으로 죽어가는 환자들을 바라보던 테레사 수녀가 수없이 하나님께 질문하며 의문에 휩싸였던 글들을 최근에 읽었습니다. 죄 없이 굶주리며 죽어가는 사람들을 바라보며 왜 그들이 그런 고통을 당해야 하는지 테레사수녀는 이해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테레사수녀는 하나님을 섬기는 것을 포기하지 않았습니다(She never gave up serving God). 그것이 중요합니다. 그녀는 결코 섬기는 삶을 멈추지 않았습니다. 

헨리 드루먼드(Henry Drummond)라는 사람은 “의심과 불신앙”(Doubt and Unbelief)을 분명하게 구별했습니다. “의심은 믿을 수 없는 것”(Doubt is can't believe)이고 불신앙은 믿지 않으려는 것(Unbelief is won't believe)이라고 정의했습니다. 비슷한 것 같지만 엄청난 차이가 있습니다. “의심은 정직한 것입니다”(Doubt is honesty). 그러나 불신앙은 강팍한 것입니다(Unbelief is Obstinacy). 의심은 빛을 추구하는 것이고(Doubt is looking for light), 불신앙은 어두움에 만족하는 것입니다(Unbelief is being content with darkness).

역사를 보면 위대한 신앙인일수록 의심을 갖고 씨름을 했던 사람들입니다. 따지고 보면 하나님을 섬기는 일에 더욱 헌신적인 사람들은 신앙을 갖기 위해 많은 씨름을 했던 사람들입니다. 보잘 것 없는 신앙을 가진 사람들은 신앙의 문제로 고민하거나 씨름하지 않습니다. 왜냐면 그들은 별로 관심이 없기 때문입니다. 도마는 정말로 예수님을 잘 섬기고 싶었기 때문에 그는 매사에 의심하고 확증을 얻으려고 애썼습니다.

복음서의 다른 곳에 보면 도마의 결연한 의지를 볼 수 있습니다. 죽은 나사로를 살리신 후에 예수님은 예루살렘으로 가겠다고 발표했습니다. 제자들은 불안했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의 원수들이 예루살렘에 집결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거기에는 엄청난 위험이 도사리고 있었습니다. 결국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지 않았습니까? 그때 도마는 동료들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도 주와 함께 죽으러 가자 하니라』(Let us also go, that we may die with him.)(요 11:16) 

도마는 결코 보잘 것 없는 믿음을 갖고 있지 않았습니다. 그는 진정으로 예수님을 믿고 있었습니다. 그러기에 그는 신앙을 갖기 위해 씨름하였습니다.

종종 우리는 “과학과 신앙”(Science and Faith)의 관계에서 나타나는 문제로 극단적인 갈등을 보이는 것을 목격합니다. 특히 창조론과 진화론(evolution)의 싸움 때문에 학교에서는 어떤 이론을 가르칠 것인가에 대해 많은 논쟁을 벌려왔습니다. 그런데 최근에 새로운 노력이 있습니다. “지적착상” 또는 “지적설계”(Intelligent Design)이라고 부르는데, 과학의 증거는 창조주 하나님의 사상을 지지하고 있다는 연구입니다. 많은 학교에서 이 연구를 받아드려 창조론과 진화론을 대립각으로 보는 시각에서 벗어나서, 서로 보완하고 지지하는 시각으로 연구의 방향을 돌리고 있다는 것입니다. 매우 좋은 시도라고 봅니다. 그들은 몇 가지 원리를 갖고 출발합니다.

첫째로 과학은 “어떻게”(How)라는 질문을 다루는 학문이고, 신앙은 “왜”(Why)의 해답을 찾으려는 것이기 때문에 과학과 신앙은 결코 갈등이 있을 수 없다는 원리입니다. 하나님은 진리의 하나님이십니다(God is a God of Truth). 만약 과학이 우주의 나이가 1400만년(14million years)이 되었다고 증명했다면 그것은 진실입니다. 또 만약 하나님이 진화를 통해서 그의 창조의 목적을 이루는 방법으로 택하셨다면 그것도 진실일 수 있습니다. 우리는 결코 하나만 아는 작은 하나님(small God)을 믿지 않습니다. 다만 과학은 “어떻게”(How) 만들었느냐에 초점을 맞추지만, 신앙은 “왜”(Why) 만들었느냐에 초점을 맞출 뿐입니다.

극단적인 진화론자들은 모든 것들이 다 우연에 의해 일어났다고 주장하지만 그것은 사실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우연에 의해서 진화된다면 ‘아름다움’(Beauty)은 어떻게 설명합니까? 음악에서 들려오는 네 파트의 아름다운 화음은 무엇으로 설명됩니까? 그것도 우연히 생긴 일입니까? 석양의 아름다움도 우연히 생긴 일인가요? 자연의 아름다움이 모두 우연히 생긴 일인가요? 그렇지 않습니다. 누군가 우주 전체를 섭리해가는 설계사가 있습니다. 과학은 “어떻게”라는 방법만을 말하고, “신앙”은 “왜”라는 목적을 말합니다. 과학자들은 늘 새로운 것을 발견하고 있습니다. 잘하는 일입니다. 하나님은 그들이 그런 것들을 잘 하기를 원하십니다. 그들에게 하나님의 창조의 신비 속에 깃들여져 있는 것들을 발견하고 발명하는 역할을 주셨습니다. 그렇다고 그들의 세계에 하나님이 없다고 주장하는 것은 너무 짧은 생각입니다. 한 발자국만 연구실에서 물러서서 더 넓은 우주를 바라보면 생각이 달라집니다. 결코 우리의 신앙을 뒤흔들어 놓을만한 새것은 이 세상에 없습니다. 예수님이 도마를 만나실 때 문이 닫혀 있는데도 예수님이 벽에 관계없이 방안으로 들어오셨습니다(요20:26). 부활의 신비입니다. 과학은 창조주이신 하나님을 떠나서는 아무 것도 발견할 수 없습니다. 

두 번째의 원리는 성경에는 두 종류의 진리가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는 역사적 진리(historical truth)요, 다른 하나는 영적진리(Spiritual truth)입니다. 창세기에 보면 우주만물은 6일 동안에 창조되었다고 기록했습니다. 이레째 되는 날 하나님은 쉬셨습니다. 하나님은 그때 역사적 연대기(historical chronology)를 주시지 않았습니다. 만약 그 연대기를 알고 싶으면 기술자나 과학자에게 물어야 합니다. 창세기는 다만 하나님이 모든 것을 창조하셨고 또 “빛이 있으라”는 말씀처럼 모든 것을 말씀으로 만드셨음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때문에 여기서 두 가지 중요한 진리를 발견합니다. 하나는 하나님이 말씀으로 모든 것을 만드셨다는 것과 다른 하나는 이레째 되는 날, 하나님이 쉬시면서 안식일로 삼았으니 하나님의 백성도 이 안식일을 쉬어야 한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므로 안식일 휴식은 히브리인들에게도 매우 중요하고, 하나님의 백성들에게도 매우 중요합니다. 이렇게 창세기에는 역사적 진리와 영적진리를 함께 포용하고 있음을 우리는 알아야 합니다.

1600년 경에 사람들은 태양이 지구둘레를 돈다고 믿었습니다. 해가 뜨고 해가 지는 것은 태양이 지구 둘레를 돌기 때문에 나타나는 현상이라고 믿었습니다. 그런데 갈릴레오(Galileo)라는 사람이 나타나서 지구가 태양의 둘레를 돈다고 주장했습니다. 청천벽력 같은 소리입니다. 종교인들은 놀랐습니다. 시931, 시96:10, 역대기16:30에 보면 “세계는 견고히 서서 흔들리지 않는도다”(the world is firmly established, it cannot be moved)고 말씀하셨습니다. 

시104:5에도 “(하나님께서)땅에 기초를 놓으사 영원히 흔들리지 아니하게 하셨도다”고 말씀하셨고, 전도서1:5에도 “해는 뜨고 해는 지되 그 떴던 곳으로 빨리 돌아가고”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갈릴레오는 자기의 주장이 결코 성경과 맞서는 것이 아니라고 했습니다. 그는 성서에 대한 어거스틴의 견해를 피력했습니다. 즉 우리는 결코 성경의 말씀을 문자적으로 해석하면 안 되며, 특히 시나 노래들은 결코 설명서(instruction)나 역사(history)서가 아니라고 주장했습니다. 

그의 말이 맞습니다. 사과와 오렌지를 비교하면 안 됩니다. 성경에는 역사적 진리가 있고 영적 진리가 있습니다. 성경에는 시도 있고, 노래도 있고, 비유도 있습니다. 이것을 역사적인 좁은 눈으로만 보려고 하면 크고 위대하신 하나님의 섭리를 우리는 깨닫지 못합니다. 성경에는 두 가지 진리, 즉 역사적 진리와 영적 진리가 서로 어우러져 있는 책이라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마지막 원리가 있습니다. 우리는 신앙, 즉 믿음생활을 하는 것이지 결코 지식생활을 하는 것이 아닙니다. 고전 13:12에서 바울 사도는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가 지금은 거울로 보는 것 같이 희미하나 그 때에는 얼굴과 얼굴을 대하여 볼 것이요 지금은 내가 부분적으로 아나 그 때에는 주께서 나를 아신 것 같이 내가 온전히 알리라』(고전 13:12)

사실입니다. 이 세상에서는 확실한 것이 별로 없습니다. 모든 것이 불완전할 뿐입니다. 우리는 도마에게 주시는 예수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여야 합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는 나를 본 고로 믿느냐 보지 못하고 믿는 자들은 복되도다 하시니라』(요 20:29)

이만큼 강력한 말씀도 없습니다. 보고 믿는 것도 중요하지만 신앙은 신비의 세계에서 일어나는 일이니 보지 못하고도 믿음을 갖게 된다면 그보다 더 복된 일은 없습니다. 

유명한 코미디언인 우디 알렌(Woody Allen)은 이런 질문을 했습니다. 왜 하나님은 당신이 존재한다는 분명한 싸인을 주실 수 없을까요? 예를 들면 내 이름으로 스위스 은행에 수 백 만불을 저금해 놓으시면 하나님이 계시다는 것을 내가 분명히 알 텐데 말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런 방법으로 역사하시지 않습니다. 답답한 것은 사랑하는 사람이 불치의 병에 걸려 병상에 누워 있을 때 그렇게도 애타게 하나님의 도움을 요청하는데도 하나님은 아무런 싸인을 주시지 않을 때입니다. 왜 하나님은 아무런 말씀도 하시지 않을까요? 우리는 모릅니다. 그런데 분명한 것은 그런 과정을 통해서 우리의 신앙과 영성이 성장한다는 사실입니다. 그들의 신앙과 씨름을 하지 않는 사람은 영원히 사춘기에 머물고 맙니다. 하나님의 위대한 일군들은 대부분이 의심의 과정을 통해서 하나님께 더 가까이 나아갔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세계가 여러분을 잘못된 길로 인도하지 않게 하십시오. 이 세계는 설계자가 있습니다. 누가 그것을 의심할 수 있겠습니까? 과학도는 방법(How)을 우리에게 말합니다. 그러나 신앙은 우리에게 목적(Why)을 말합니다. 성경 속에는 역사적 진리와 영적 진리가 한데 어우러져 있습니다. 우리는 신앙으로 살지, 지식으로 살지 않습니다. 지금도 우리에게 들려주시는 말씀에 귀를 기울입시다.

“너는 나를 본고로 믿느냐 보지 못하고 믿는 자들은 복되도다”

이때부터 도마는 “나는 할 수 없다”(I cannot)에서 “나는 할 수 있다”(I can)로 바뀌어졌습니다. 그것이 부활의 힘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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