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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덕을 세우라 (고전 8:1~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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덕을 세우라 (고전 8:1~13)
 
   이번 중국 쓰촨성 지진 피해는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엄청납니다. 사망자가 10만 명에 육박하고 이재민이 천만 명이 넘는다고 합니다. 그런데 특이한 것은 지진으로 가장 큰 피해를 본 곳이 학교라는 점입니다. 7000 채의 학교 건물이 무너졌답니다. 이것은 쓰촨성 내 전체 학교의 40%에 해당한답니다. 그리고 전체 사망자의 10%가 학교에 있던 교사와 학생들이랍니다.

   도대체 왜 이렇게 학교에 피해가 집중됐을까요? 쓰촨성 주위안 중학교는 3층 건물인데 수업 중에 지진이 발생해서 건물이 무너졌고, 건물 안에 있던 289명의 교사와 학생이 그대로 매몰됐습니다. 그런데 학교 주변 관공서 건물들은 멀쩡했고, 허름한 상가들도 일부 균열이 간 정도였습니다. 부모들이 분통을 터뜨리고 부실공사 책임을 물어 집단소송을 준비하고 있답니다.

   그렇습니다. 집을 잘 지어야 합니다. 잘못 지으면 한 순간에 와르르 무너져 버리고 맙니다. 좋은 자재를 써야하고, 원칙대로 지어야 하고, 또 정성을 다해서 지어야 합니다. 그러면 어떤 천재지변이 닥쳐도 요동치 않을 수 있습니다.

   바울은 신앙공동체인 교회를 집으로 비유하곤 했습니다. 엡 2:20-22를 보면 이렇게 되어있습니다. “너희는 사도들과 선지자들의 터 위에 세우심을 입은 자라 그리스도 예수께서 친히 모퉁잇돌이 되셨느니라 그의 안에서 건물마다 서로 연결하여 주 안에서 성전이 되어 가고 너희도 성령 안에서 하나님이 거하실 처소가 되기 위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함께 지어져 가느니라”

   교회가 하나의 영적인 건물이라고 본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 모퉁잇돌이 되셨고, 믿음의 선진들이 기초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이제 그 위에 성도들 하나하나가 기둥이 되고 벽돌이 되어 건물을 이루어 간다는 것입니다. 이 때 성령께서 그 하나하나를 이어서 건물이 되게 하신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을 보면 바울은 고린도 교회라는 영적 건물이 외부 충격으로 흔들리고 있다고 보았습니다. 마치 큰 지진이 와서 흔들리듯 무너지기 직전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건물을 발 보존하고 든든히 세우기 위해서 힘을 쓰고 있습니다.

   고린도 교회가 겪고 있는 외부 충격은 이것입니다. 당시 고린도에는 신전이 여럿 있었습니다. 이 신전 제단에 바쳐진 고기는 대개 세 부분으로 나뉘어집니다. 제단에서 불태워지고, 사제에게 주고, 나머지는 제주가 가져갔습니다. 사제들은 받은 고기를 일부 자기가 먹고 나머지는 시장에 싸게 팔았습니다. 그리고 제주는 집에 가져와 이웃들과 축제를 벌이며 함께 먹었습니다.

   고린도 교인들은 이 우상 제단에 바쳐졌던 음식으로부터 자유롭기가 쉽지 않았습니다. 이웃이 벌이는 잔치에 초대 받고 안 갈 수가 없었습니다. 가면 우상에 바쳐졌던 음식을 먹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그리고 시장에서 고기를 살 때 우상에 바쳐졌던 고기를 살 수 밖에 없는 형편이었습니다.

   교인들은 이 고기를 먹을 수도 안 먹을 수도 없는 처지에 놓이게 됐습니다. 고기를 먹자니 하나님의 백성들이 우상 제단에 바쳤던 고기를 먹는 것이니 꺼림칙합니다. 하나님 앞에 죄 짓는 것 같습니다. 먹지 않으려면 축제에 참석하지 말아야 했고 그러면 고린도도 사람들에게 따돌림을 받게 됩니다. 그리고 고기를 전혀 먹지 말아야 합니다.

   이 문제로 교회 안에서 격론이 벌어집니다. 먹을 수 밖에 없다는 사람들과 먹어서는 안 된다는 사람들이 대립합니다. 서로 정죄합니다. 자칫 교회가 분열될 위기에 처하게 됐습니다. 바울이 볼 때 영적 건물인 교회가 마치 지진에 흔들리듯 심각하게 붕괴 위기를 맞고 있는 것입니다.

   바울이 여러 문제와 함께 이 문제에 답하기 위해 편지를 썼습니다. 그것이 고린도 전서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바울은 명확하게 해결 방안을 제시합니다. “덕을 세우라”는 것입니다.

   덕을 세운다는 말은 원어로 “오이코도메”(oikodome)입니다. 이 말은 ‘집’이라는 뜻의 “오이코스”(oikos)와 ‘세운다’는 뜻의 “데모”(demo)가 합해져서 만들어진 말입니다. 그러니까 이 말은 건물을 세운다는 어원적인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바울이 이 말을 쓸 때는 물론 영적 건물을 세우는 것을 뜻합니다. 직접적으로는 개개인의 신앙을 세워가는 것입니다. 마치 기둥을 세우듯이 개개인의 신앙을 세워가는 것을 말합니다. 나아가 포괄적으로 신앙 공동체를 세워가는 것입니다. 마치 각 기둥들이 세워져 연합해서 하나의 건물이 세워져 가듯이 성도 하나하나의 신앙이 세워져 신앙공동체가 든든히 세워가는 것을 말합니다.

   바울은 지금 고린도 교회의 위기를 극복하기 위한 해결책으로 덕을 세우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고린도 교회 교인들 하나하나의 신앙을 세워가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신앙공동체인 교회 전체가 믿음 위에 굳건히 서게 하라는 것입니다.

   사실 고린도 교회는 우상 제물 문제로 많은 성도들이 믿음이 흔들리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누구도 그 흔들리는 믿음을 세워주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계속해서 우상 제물을 먹는 것이 옳으냐 그르냐를 놓고 싸우기만 했습니다. 그 싸움이 계속되고 격화될 수록 더 많은 성도들의 믿음이 흔들렸습니다. 그래서 결국 교회가 파국으로 치닫고 있었습니다.

   그렇습니다. 오늘 교회의 문제도 마찬가지입니다. 교회에 문제가 일어날 때 지켜보고 있는 성도들의 믿음이 흔들리게 됩니다. 관계된 많은 사람들의 믿음이 흔들립니다. 이 때 그 문제 해결에만 매달리다 보면 교회 전체가 흔들립니다. 

   많은 사람들이 자기 주장을 관철하기 위해서, 자기 체면을 지키기 위해서, 자기 감정에 충실하다가 계속 그 문제에 빠져듭니다. 교회 전체가 흔들린다는 사실을 까맣게 모릅니다. 아니 교회가 흔들리고 깨지는 것은 알바 아닙니다. 자기가 이 싸움에서 이겨야 합니다. 그래서 치열하게 싸움에 몰입합니다. 결국 교회가 무너집니다. 자기도 망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덕을 세우는 일이 중요합니다. 성도 한 사람 한 사람 믿음이 세워지고 나아가 교회가 믿음 위에 굳건히 서는 것이 중요합니다. 지엽적인 문제에 치중하다가 덕을 무너뜨리면 안 됩니다. 이것은 곧 부실공사하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그러면 덕을 세우기 위해 어떻게 해야 할까요?


1. 참 지식을 가져야 합니다.

   1절에서 “우상의 제물에 대하여는 우리가 다 지식이 있는 줄을 아나”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우상 제물 문제에 대해 나름대로 지식이 있어서 그 지식을 근거로 문제를 제기하고 있다는 뜻입니다.

   고린도 교회 안에 영적 지식이 상당한 수준에 이르렀던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고전 1:5에 보면 “이는 너희가 그 안에서 모든 일 곧 모든 언변과 모든 지식에 풍족하므로”라고 말할 정도였습니다. 이 사람들은 신전의 우상들은 사실 아무 것도 아님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 신들은 다 만들어진 신이요 거짓 신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실제로 존재하지 않는 신에게 바쳐진 제물들도 형식상만 제물이지 실제로는 제물이 아니라는 점도 알고 있었습니다. 다시 말하면 신이 그 제물을 받거나 더럽히지 못한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저들은 그 제물을 거리낌 없이 먹었습니다. 그리고 제물을 먹지 않는 사람들을 영적으로 무지하다고 공격했습니다. 우상 제물을 먹지 않는 사람들과 날카롭게 대립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저들의 영적 지식은 옳습니다. 분명히 우상은 거짓 신이고 우상 앞에 바쳐졌던 제물이라고 해도 다 형식일 뿐입니다. 그래서 먹는다고 문제될 것은 없습니다. 

   아이들은 밤을 무서워합니다. 혼자서 캄캄한 밤에 시골집 마당 뒷간 화장실을 못 갑니다. 귀신이나 도깨비라도 나올 것만 같습니다. 차근차근 설명해 줍니다. “빛이 없어서 다만 안 보이는 것뿐이라고... 귀신이나 도깨비 이런 것은 다 사람들이 만들어낸 이야기라고...” 아무리 설명을 해도 아이들은 머리로는 이해가 돼도 무서움을 떨쳐버릴 수 없습니다. 

   마찬가지입니다. 영적으로 성숙하지 못한 사람들은 아무리 설명을 들어도 꺼림칙합니다. 우상 제단 앞에 바쳐졌던 음식은 먹으려면 꺼림칙합니다. 설명을 듣고 문제가 없다는 것을 이해한다고 해도 먹고 싶지 않습니다. 먹을 수 없어서가 아닙니다. 

   결국 먹을 수 있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은 하나는 알고 둘은 모르는 것입니다. 먹을 수 있다는 것은 알지만 사람들이 먹고 싶어 하지 않는 것을 모릅니다. 지식은 지식이지만 참 지식은 아닙니다. 그것이 참 지식이 되려면 여러 가지 측면을 포괄적으로 종합적으로 이해할 수 있어야 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가 참 지식을 가져야 합니다. 무엇을 알아도 폭 넓게 알아야 합니다. 어떤 문제를 파악할 때도 그 문제 자체만 보지 말아야 합니다. 그 문제가 생기게 된 배경, 그 문제가 이렇게 불거지게 된 과정, 그리고 앞으로 그 문제가 어떤 결과를 낳을 것인가 까지 포괄적으로 볼 수 있어야 합니다. 자칫 빈대 잡으려다 초가삼간 다 태우는 꼴을 만들 수 있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2. 참 사랑을 해야 합니다.

   바울은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사랑으로 접근하라고 교훈하고 있습니다. 1절을 보면 “사랑은 덕을 세우나니”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우상 제물인 고기를 먹을 수 있고 없고를 따지는 것은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지식으로 접근하는 것입니다. 바울은 이렇게 지식으로 접근해서는 해결책이 없다고 보고 있습니다. 그리고 지식 대신 사랑으로 접근하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신학 논쟁 가운데 소위 “아디아포라 논쟁”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아디아포라"(adiaphora)라는 말은 헬라어로 “대수롭지 않은 것들”이란 뜻입니다. 신학에서는 “성경에서 명하지도 금하지도 않은 행동들”이란 뜻으로 사용합니다. 그러니까 아디아포라란 신앙의 본질에 속하지 않은 것으로 성도 각 개인이 양심에 따라 결정하고 판단할 문제라는 말입니다.

   교회사에서 한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루터와 칼빈은 함께 종교개혁을 이루었습니다. 그러나 카톨릭의 예배 형식을 계속 사용할 것인가 아니면 전혀 새로운 예배 형식을 만들어 사용할 것인가 때문에 다투었습니다. 루터는 문제는 신앙고백에 있지 예배 형식에 있지 않다고 하여 카톨릭 예배 형식을 그대로 따랐습니다. 그러나 칼빈은 그럴 수 없다고 하여 카톨릭 예배 형식을 버리고 전혀 새로운 개신교 예배 형식을 만들었습니다.

   바로 이 예배 형식에 관한 문제도 아디아포라입니다. 자기의 신앙 양심으로 판단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개신교이면서도 루터교의 예배 형식과 장로교의 예배 형식이 다릅니다. 그러면서 서로 존중하고 하나의 신앙고백으로 하나로 나아갑니다. 나와 다른 서로를 존중하고 인정합니다. 참 사랑입니다.

   그렇습니다. 본문에 나오는 무엇을 먹을 것인가 라는 문제는 바로 아디아포라 문제입니다. 그래서 옳고 그름으로 따질 문제가 아닙니다. 서로의 신앙양심을 존중하고 사랑으로 접근할 문제입니다.

   바울은 롬 14:6에서 이렇게 말씀했습니다. “먹는 자도 주를 위하여 먹으니 이는 하나님께 감사함이요 먹지 않는 자도 주를 위하여 먹지 아니하며 하나님께 감사하느니라” 서로 다름을 인정하고 존중하며 사랑으로 하나를 이루라는 뜻입니다. 참 사람으로 접근하라는 것입니다.


  세종조의 윤회라는 사람의 일화입니다. 젊은 시절 하루는 시골길을 지나다 날이 저물어 여관을 찾았습니다. 뜰에서 주인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여관집 주인 아이가 커다란 진주를 가지고 놀고 있었습니다. 아이가 놀다가 그만 진주를 떨어뜨리고 말았습니다. 마침 곁을 지나던 거위가 그 진주를 삼켜버렸습니다. 당연히 뜰에 혼자 기다리고 있던 윤회가 의심을 받게 되었습니다.

  주인은 윤회를 관가에 고발하기로 하고 밧줄로 묶어두었습니다. 그러나 윤회는 아무런 변명도 하지 않았습니다. 다만 “나를 묶어두려거든 저 거위도 내 곁에 매어 두라.”고 했을 뿐입니다. 아침이 되자 거위는 진주를 배설했습니다. 자초지종을 알게 된 주인은 부끄러웠습니다. 그리고 “도대체 왜 그렇다고 말하지 않았냐고 물었습니다. 윤회가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만일 어제 내가 말했다면 당신이 반드시 거위의 배를 째어 구슬을 찾을 것이므로 욕됨을 참으면서 기다렸소.” 윤회는 자기가 궁지에 몰려있으면서도 거위까지 생각했던 것입니다.

   이것이 사랑입니다. 우리가 어떤 문제에 접근할 때 사랑으로 접근해야 합니다. 


3. 참 자유를 누려야 합니다.

   본문 9절에서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런즉 너희의 자유가 믿음이 약한 자들에게 걸려 넘어지게 하는 것이 되지 않도록 조심하라” 바울은 우상 제물을 먹지 않을 자유가 있다는 것을 인정합니다. 그러나 그 자유가 다른 사람을 힘들게 할 수 있음을 지적합니다. 그러므로 그 자유는 다른 사람들을 위한 자유로 승화되어야 한다는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우상 제물은 먹을 자유도 있고 먹지 않을 자유도 있습니다. 우상 제물이 신앙 양심상 아무런 거리낌이 없어서 먹을 수 있습니다. 이것은 “...으로부터의 자유”입니다.(freedom from) 그러나 이것이 자칫 다른 사람들에게 피해를 끼칠 수 있습니다. 이럴 때 이것은 방종이 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상 제물을 먹을 수 있지만 다른 사람들에게 피해가 될 수 있어서 먹지 않을 수 있습니다. 이것은 “...을 위한 자유”입니다.(freedom for) 이것이야 말로 참 자유가 됩니다.

   본문 13절에서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만일 음식이 내 형제를 실족하게 한다면 나는 영원히 고기를 먹지 아니하여 내 형제를 실족하지 않게 하리라” 바로 이것이 참 자유입니다. 할 수 있지만 다른 사람들을 위해서 하지 않는 것입니다. 


  어느 구두쇠 집안에 며느리가 새로 들어왔습니다. 시아버지께 고깃국을 맛있게 끓여드렸습니다. 그런데 맛있게 먹고 난 시아버지가 자초지종을 듣더니 며느리를 친정으로 쫓아버렸습니다. 며느리가 울며 친정으로 쫓겨가는데 빨래터 아낙들이 그 이유를 물었습니다. 새댁이 이렇게 답했습니다.

  “어제 푸주간에서 남은 고기를 싸게 줄테니 떨이하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구두쇠 집안 내력도 있고 해서 한참 고기를 사는 것처럼 이리 저리 만지고 주무른 다음에 집으로 뛰어와서 냄비에 물을 받아 고기 만졌던 손을 씻은 물로 국을 끓여드렸지요. 그런데 아버님이 그 손을 가마솥에 씻었으면 온 식구들이 며칠간 고깃국을 먹을 텐데 냄비에 씻어서 한 끼 밖에 못 먹었다고 살림 더 배워오라고 친정으로 가라지 뭡니까?”

  이 말을 들은 동네 아낙들이 이렇게 말했답니다. “싸다 싸 그 손을 동네 우물에 씻었으면 온 동네 사람들이 다 고깃국을 먹었을 텐데 그래 냄비에 씻었어? 그러니 쫓겨나는 게 당연하지...”


   웃자고 만든 이야깁니다. 그러나 한 가지 중요한 교훈이 담겨있습니다. 나 외에 더 많은 사람들을 생각하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덕을 세우는 비결입니다.

   동물과과 사람이 다른 점이 있습니다. 어떤 문제가 터지면 동물은 “반응”(reaction)을 보입니다. 그 문제에 대해서 본능적으로 대응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사람은 “응답”(response)을 합니다. 그 문제를 넓게 생각하고 포괄적으로 성찰해 본 다음에 대응한다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어떤 사안에 대해 단순히 반응을 보여서는 안됩니다. 응답해야 합니다. 그럴 때 덕을 세울 수 있습니다. 나 때문에 다른 사람들의 믿음이 세워집니다. 우리 믿음의 공동체가 더욱 굳건하게 세워져 갈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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