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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위기 때 성도들의 합당한 태도 (행 4:18~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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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경 : 행 4 : 18 - 29 
제 목 : 위기 때 성도들의 합당한 태도

우리가 신앙생활 하면서 스텐다스로 삼고, 본받기를 원하는 교회의 모습이 있다면, 그 곳이 어디이겠습니까?  바로 성경에 나타난 초대교회라고 할 수가 있습니다. 초대교회 성도들의 신앙생활을 보면, 분명 오늘날 우리들의 신앙생활과는 다른 것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도대체 어떤 부분에서, 이런 차이가 나는 것일까?  그들과 동일하게 예수를 믿고, 따르는 모습에서는 별로 다를 것이 없습니다.  다시 말해, 신앙 면에서는 별 차이가 없다는 말입니다.  그러나 생활면에서는 분명한 차이가 있는 것을, 보게 된다는 것입니다.  

신앙은 같은데, 생활은 다르다.  무슨 말입니까?   마음 중심에 예수를 주로 고백하고 믿는 것은 같은데, 실생활 속에서 주를 따르고 섬기는 일에 대해서는 많은 차이를 발견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신앙과 생활의 일치 여부가, 오늘날 현대 교회 성도들과의, 분명한 차이라고 할 수가 있다는 것이지요.  

여러분 “익투스” 란 말을 아십니까? “예수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아들이시오, 구원자이십니다.” 라는 뜻입니다.  (예수스 : 예수)  (크리스투스 : 그리스도)
(떼오스 : 하나님)  (휘오스 : 아들)  (소조메테 : 구원자) 

그러면, 왜 이들이 이런 은어를 사용하고, 물고기 표시로서 자신은 예수 믿는 성도라는 사실을 표현했겠습니까?  자신의 신분을 숨기기 위함이었다는 겁니다.  부끄러워 숨긴 것 아니지요.  은밀한 중에 복음을 전파하기 위해, 그것이 더 효과적이었기 때문에, 숨긴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만약 드러나게 되었을 때도, 그들은 두려워하지 아니했고, 죽음의 자리에 끌려갈지언정, 복음을 부인하지  아니하고, 예수를 부인하지 아니하고, 담대히 죽음을 맞이할 수 있었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초대교회 성도들의 신앙이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그렇다면 우리의 실생활 중에서, 주를 따르고 섬긴다는 것은, 구체적으로 무엇을 의미하는 것입니까?   그것은 인생의 위기시에나,   신앙생활의 각종 어려움 속에서도, 주를 포기하지 않고, 초대교회 성도들과 같이 한결같은 믿음으로, 주를 따르는 것을 의미하는 줄 믿습니다.  

무엇이든지 변하는 것은 가치가 없지요.   유형이든, 무형이든, 모든 것이 마찬가집니다.  물건의 색깔이 변하거나, 음식의 맛이 변한다면, 그것이 무슨   가치가 있겠습니까?   눈에 보이지 않는, 우정이나 사랑도 마찬가지지요?  
어떤 경우에라도, 서로에 대한 감정이 변하지 않고, 끝까지 신뢰하며 사랑하며 함께 하는 것, 이것이 진정한 우정이고, 사랑 아니겠습니까?   
주님은 바로 이런 신앙을, 어떤 인생의 위기 가운데서도 변함없이 나타내 주기를, 원하고 계시는 줄 믿습니다.   이것이 진정한 신앙이다.  

오늘 본문에도 보면, 제자들을 비롯한 예루살렘에 속한 모든 성도들에게, 위기가 닥쳐왔던 것을 볼 수가 있습니다.   여러분, 17절 말씀을 보세요.  
“이것이 민간에 더 퍼지지 못하게 저희를 위협하여, 이 후에는 이 이름으로 아무 사람에게도 말하지 말게 하자 하고”  제자들을 향해 위협했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이 위협이라는 것이, 단순한 협박이 아닙니다.  어떤 위협입니까?  
예수를 계속해서 전하면, 당장 죽이겠다고 하는, 강력한 위협이었다는 겁니다.  그 당시 공회의 권세는, 날아가는 새도 떨어뜨릴 정도였습니다.  
생각해 보세요.  결국 예수님도 십자가에 못 박아 죽였던 그 사람들이, 제자들이나 성도들 하나 못 죽이겠습니까?   그러니 그들의 위협을 쉽게 물리치기가 어려웠을 줄 압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이러한 생명의 위협에도, 그들은 자신의 신앙을 결코 포기하지 않았다는 사실입니다.  믿습니까?  오히려 당당하게 그들과 맞섰던 것을 볼 수가 있습니다.   오늘 본문 19절, 20절 말씀을 보세요. 
“베드로와 요한이 대답하여 가로되, 하나님 앞에서 너희 말 듣는 것이, 하나님 말씀 듣는 것보다 옳은가 판단하라. 우리는 보고 들은 것을 말하지 아니할 수 없다 하니”   여러분, 얼마나 당당합니까?  이 말 어디에서 그들을 향한  두려움이나, 주눅 든 것을 발견할 수 있습니까?   전혀 발견할 수 없습니다.  
당당하게 자신의 신앙을 나타내었다는 겁니다.  

여러분, 그 결과가 어떻게 나타났습니까?   이어지는 21절 말씀을 보세요. 
“관원들이 백성을 인하여 저희를 어떻게 벌할 도리를 찾지 못하고, 다시 위협하여 놓아 주었으니, 이는 모든 사람이 그 된 일을 보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림이러라.”  할렐루야!!!!   그들이 죽지 않았다는 겁니다.  
오히려 모든 백성들에게 그 신앙이 인정받게 되었고, 또 그 담대한 신앙으로 인해 자신도 살고, 또 이것이 증거가 되어, 모든 백성들이 살아계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할렐루야!!  

바로 이런 초대교회 성도들의 신앙생활을, 우리는 본받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성경을 보세요.   어디 이들 뿐이겠습니까?  
구약에서도 이런 담대한 신앙을 가진 많은 사람들이 나오지 않습니까?  
우상 앞에 절하지 아니하고, 자신을 신앙을 지키기 위해 담대히 사자 굴속으로, 칠 배나 더 뜨거운 풀무불 속으로 들어갔던 다니엘과 그의 세 친구들, 그리고 죽으면 죽으리라고 외치며, 왕 앞으로 담대히 나아갔던 에스더, 
뭐 이 외에도, 수 없이 많은 신앙의 인물들이 있습니다.   
그런데 그들의 한결같은 공통점이 무엇입니까?   결코 그 인생의 위기에서 죽지 않았다는 사실입니다.   그리고 그들의 살아남을 통해, 오히려 자신을   대적하던 무리들이 다 죽고, 그 일을 바라보던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의 존재를 깨닫고,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역사가 나타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은 이런 귀한 신앙을 가진 성도들을 지켜 주시는데, 인생의 위기에서 한번만 지켜 주시는 것이 아니라, 그의 일생을 책임지고 지켜 주시는 줄 믿습니다.   이러한 하나님의 역사는, 구약에서나 신약에서 뿐만   아니라, 오늘날 현대에서도, 변함없이 동일하게 나타나는 줄 믿습니다.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변함없으신 분이십니다.  

그렇다면, 이런 하나님의 변함없는 축복의 은혜, 오늘날은 누가 받아야 하겠습니까?   저와 여러분들이, 바로 이런 축복의 주인공이 되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러나 이런 소망이, 우리를 이런 은혜와 축복의 주인공 되게 하는 것 아닙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바라는 대로, 우리 또한 하나님의 기대대로 삶 속에서 행하는 신앙의 모습이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 신앙이 무엇입니까?   바로 오늘 본문에 나타난, 초대 교회 성도들과 같은, 담대한 신앙의 모습인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 초대교회 성도들은, 자신들이 당한 그 극한 어려움들을 어떻게   극복하며 물리쳐 나갈 수 있었을까?   초대교회 성도들이 가졌던 그 신앙의  자세를, 오늘 본문을 통해 살펴보면서, 이 시간 함께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첫째로, 초대교회 성도들은, 인생의 위기를 당했을 때, 어떤 신앙의 모습을 나타내었는가?   개인의 신앙으로서가 아닌, 공동체적인 신앙으로서, 더욱 더 하나님을 의지하는 모습을, 나타내었다는 것입니다.  

왜 그들은 이렇게 인생의 위기에서, 개인으로서가 아닌, 공동체로서의 신앙의 모습을 나타내었던 것일까?   성도들 가운데 일어나는 여러 가지 인생의   문제들은, 사실 개인적인 문제로 그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교회가 무엇입니까?  성도들의 모임이지요.  에클레시아.  성도들의 모임입니다.  그런데 사단은 교회를 공격할 때에, 이 전체를 공격하겠습니까?   아닙니다.  일부를 공격합니다.  전체가 아닌, 개개인을 상대로 공격을 펼친다는 겁니다.  그 때, 우리가 당한 인생의 문제를 개인의 문제로만 인식하고, 혼자서만 해결해 나가려고 한다면, 자칫 사단의 계략에 말려 들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다 다니엘같이 믿음이 좋은 사람이면, 혼자서도 해결할 수 있겠지요.  능히 사단의 시험을 물리치고, 이길 수 있을 줄 압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렇지를 못하다는 겁니다.  에스더도 자기가 왕 앞에 나가갈 때, 모든 백성들이 자신을 위해, 기도해 달라고 요청하지 않았습니까?  
이는 초대 교회 성도들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들은 개인이 당한 인생의 문제에도, 이런 연합된 모습을 보였다는 것입니다.  

교회를 흔들려고 하는 사단과의 영적 전쟁이란 차원에서, 개인의 문제를, 개인의 문제로 처리하지 않고, 공회 앞에 그 문제를 내어 놓고, 함께 기도하기를 원했다는 것입니다.  롬 8 : 28절에서 말씀하지요?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 하는 자, 곧 그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  아멘!!!   어떻게 선을 이루기를 원하시느니라?   합력하여..

우리나라 초대 대통령이었던, 이승만 박사가 이런 말을 했지요? 
“뭉치면 살고, 흩어지면 죽는다.”   6, 25 전쟁 때, 수류탄이 떨어졌는데, 북한  군이 부하 병사들에게, 이렇게 외쳤다고 하지 않습니까?   “뭉쳐!!!”  
그러나 이것은 잘못 뭉친 것이지요.   우리가 위기를 맞이했을 때, 인간적인 생각으로 뭉치면, 이렇게 다 죽는 겁니다.   그러나 신앙적인 생각으로 뭉치게 되면,  자기도 살고, 다 살게 되는 줄 믿습니다.  

우리 성천교회 성도들은, 인생의 어려운 문제들을, 혼자 힘으로 해결해 나가려고 하지 말고, 함께 신앙생활 하는 기도의 동역자들에게 기도의 제목을 요청하고, 그들과 함께 기도하면서, 당면한 인생의 문제들을 해결해 나갈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 드립니다.   

우리 교회에 이제 좋은 기도의 시스템이 또 마련되었지 않습니까?  
중보 기도대가 발족되었습니다.   그들과 함께 인생의 문제를 해결해 나갈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러나 우리가, 기도에 대해 하나 더 생각해 볼 것은,  이런 개인의 문제만 아니라, 교회 전체의 문제에 대해서도, 이러한 연합된  공동체로서의 기도가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나라가 어려울수록 뭉쳐야 하는 것입니다.  나라가 큰 위기가 닥쳤는데, 그 나라 백성들이 자기 하나 살자고 다 흩어져 버린다면, 그 나라는 어찌 되겠습니까?   불을 보듯 뻔한 것 아닙니까?    그대로 망하고 마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런 위기 시에, 백성들이 더 단합하고 뭉쳐서, 일심 단결하여 위기를 대처해 나간다면, 그 나라는 반드시 살아나고 일어서게 되는 줄 믿습니다. 

그 좋은 예가, 베트남과 이스라엘 아닙니까?   베트남은 다 도망갔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외국에 나가 있던 사람들까지, 고국의 전쟁 소식을 듣고서는, 다 들어왔다는 겁니다.  그러니 베트남은 지금도 망한 채로 공산화되어 있지만, 이스라엘은 그 조그만 땅 덩어리를 가지고도, 세계를 지배하고 다스리고 있지 않습니까?  여러분, 이것이 곧 연합의 힘이요, 나아가 신앙의 힘인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초대교회 성도들은 인생의 위기 시나, 교회의 위기가  닥치면, 열일 제쳐놓고 기도부터 했습니다.  뭐 다른 방법을 찾지 아니했다는 겁니다.  다른 방법이 뭐가 있겠습니까?  자기 힘으로 해결될 문제가 아니라는 사실을 알았을 때, 그들은 억지로 인간적인 방법들을 동원하지 않고, 오직 전심으로 하나님께만 매달려 기도했다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 24절 말씀을 보세요. “저희가 듣고 일심으로 하나님께 소리를 높여 가로되, 대 주재여, 천지와 바다와 그 가운데 만유를 지은 이시오” 
어떻게 기도했다고 했습니까?   일심으로 기도했다.   일심이 뭡니까?  
하나 된 마음인 것입니다.   모든 성도들이 마음을 합한 기도였다는 거지요. 

그렇다고 그냥 기도했습니까?  하나님께 소리 높여 기도했다고 했어요.  간절한 마음으로 부르짖었다는 겁니다.   바로 이런 신앙의 자세를 가졌기에, 그들은 오늘 우리가 상상할 수도 없는 박해의 위기 시에도, 흔들림 없이 자신의 신앙을 지키며, 교회를 지켜 나갈 수 있었다는 것입니다.   믿습니까?   

그들은 하나님을 일컬어 “대 주재여” 라고 했습니다.  무슨 뜻입니까? 
하나님은 교회는 물론이거니와, 이 세상 모든 것들의 창조주요, 통치자라는 뜻입니다.  천지를 창조하신 분이 하나님이십니다.  바다를 가르고 길을 내시는 하나님이십니다.   몰아치는 풍랑도, 잠잠케 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심지어는 기울어가는 해도 멈추신 하나님이십니다.  인류역사를 주관하시고, 지금도 권능으로 이끌어 가시는 하나님이십니다.  누가 감히 하나님을 대적할 수 있겠으며, 누가 감히 하나님의 명을 거역할 수 있겠습니까?   
이 세상 어느 누구도, 하나님의 명을 거역할 수 없는 줄로 믿습니다.   

오늘 우리 인생에 가장 놀라운 일이 무엇입니까?  이런 능력의 하나님을,   우리가 믿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그 권능의 하나님을 우리가 의지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할렐루야!!!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의 인생에 위기가 닥쳤을 때, 하나님의 도우심을 구하지 못한다면, 그는 아마 이 세상에서 가장 미련하고, 어리석은 사람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얼마 전 아이스크림 선전에, 이런 말이 있었지요?   “줘도 못 먹나?”  
꼭 이와 같은 상황 아닙니까?   하나님을 믿고 있으면서도, 하나님을 향한   기도가 없는 신앙이라면, 그 신앙은 아무것도 아닌 것입니다.  

그러나 초대교회 성도들은 달랐습니다.  하나님만을 유일한 만유의 통치자로  믿었습니다.  교회와 자신들의 인생을, 그 어떤 위기로부터도 보호해 주실 것을 믿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렇게 일심으로 하나님을 찾으며, 부르짖어   기도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 저와 여러분의 신앙도 이와 같아야 할 줄로 믿습니다.  개인의 삶에 어려움이 닥쳐오면, 불평부터 할 것이 아니라, 기도부터 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혼자서 안 되는 일이라면, 주저 없이 기도의 동지들에게  부탁해서라도, 인생의 위기를 극복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기도가 능사입니다.  

특별히 교회가 힘들고 어려울 때 일수록, 합심해서 기도하는 것이 바른 성도의 신앙인 것입니다.  교회와 성도에게 닥치는 위기는, 하나님께서 교회를 더욱 더 든든히 세워가며, 성도들의 신앙과 삶을 발전시키기 위해 주시는, 하나님의  섭리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문제의 열쇠를 쥐고 계신 하나님을 먼저 의지하고, 하나님의 도우심을 구해야 하는 것입니다.  위기를 당했다고 인간적인 방법을 동원하고, 사람의 도움을 구하는데 동분서주하며 정신을 팔린다면, 진정으로 하나님을 믿는 성도라고 볼 수가 없는 것입니다. 

다윗은 인생의 위기 시에 기도하기를, “나의 영혼아 잠잠히 하나님만 바라라. 대저 나의 소망이 저로 좇아 나는 도다. 오직 저만 나의 반석이시요, 나의 구원이시요, 나의 산성이시니 내가 요동치 아니하리로다.” 라고 했습니다. 

오늘 저와 여러분도, 오늘 본문에 나타난 초대교회 성도들과 같이, 또 믿음의 사람 다윗과 같이, 언제나 하나님을 먼저 찾으며, 도우심을 구하고, 그 도우시는 능력으로, 인생의 모든 문제를 해결하고, 또 교회의 어려운 문제들도   해결할 수 있는, 귀한 신앙 소유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 드립니다.  두 번째로, 초대교회 성도들의 신앙의 자세는 어떠했는가?  
교회의 위기와 인생의 위기 시에, 그들은 그리스도의 고난을 기억하며 인내했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그들이 겪는 고통 속에서, 주님의 십자가의 고통을 연상했다는 것입니다.   초대교회 성도들이 고난을 대수롭지 않게 여길 수 있었던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었다는 겁니다.  

무슨 말입니까?  자신들이 아무리 고난과 시련을 당한다 할지라도, 그 고통이 주님이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신 고통과, 감히 비교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자신들은 지금 이런 조그만 고난의 시련 속에도, 이처럼 힘들어하고 아파  하는데, 주님이 감당하셨던 십자가의 고통은 얼마나 컸을까? 하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 27절, 28절 말씀을 보세요. “과연 헤롯과 본디오 빌라도는 이방인과 이스라엘 백성과 합동하여, 하나님의 기름 부으신 거룩한 종 예수를 거스려 하나님의 권능과 뜻대로 이루려고 예정하신 그것을 행하려고 이 성에 모였나이다.”  무슨 말입니까?    주님의 십자가의 고난은, 하나님의 섭리 가운데 예정되어진 일이었다는 것입니다.   주님은 이 하나님의 뜻을 이루시기 위해, 십자가의 고난을 피하지 않고 지셨다는 겁니다. 

바로 이와 같은 주님의 신앙을 본받아, 자신들도 교회 앞에 닥친 이 위기에   굴하지 아니하고, 오히려 당당히 맞섬으로, 주님의 고난에 동참하며, 하나님의 뜻을 자신들도 이루기를 소원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어지는 29절, 30절 말씀을 보세요. “주여 이제도 저희의 위협함을   하감 하옵시고, 또 종들로 하여금 담대히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게 하여 주옵시며, 손을 내밀어 병을 낫게 하옵시고, 표적과 기사가 거룩한 종 예수의   이름으로 이루어지게 하옵소서 하더라.”   주님이 십자가를 당당히 지심으로, 하늘보좌 영광 회복하셨듯이, 자신들도 주님과 같이 이 고난 믿음으로 이겨내며, 복음의 능력과 기적을, 온 세상에 나타내게 해 달라고 하는 말씀인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 우리의 인생에도 힘든 고난의 시련이 있습니다.  과거에도 있었고, 현재에도 있고, 또 미래에도 있을 것입니다.  
이러한 때에 여러분의 반응은 어떠합니까?  믿음 없는 사람들은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들이 모세와 하나님을 원망한 것과 같이, 하나님의 섭리를 깨닫지 못한 채 불평하고 원망할 것입니다.
그러나 믿음 있고, 지혜 있는 성도들은, 이 고난의 순간에 그리스도를 기억할 것입니다.  주님이 어떤 시련을 당하셨고, 그 시련이 그리스도를 어떻게 영광스럽게 만들어 주었는가를 기억할 것입니다.  주님이 고난당하시고 죽임 당하신 후에 어떻게 되셨습니까?   하나님 아버지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리사, 만왕의 왕, 만주의 주로 영화롭게 하셨습니다.   할렐루야!!!  

오늘 우리도 인생의 고난을 잘 극복하면 신앙이 성장되고, 더욱 그리스도를 닮은 성도가 되고, 의의 열매들을 맺는 고귀한 성도가 될 줄 믿습니다. 
그리스도는, 우리 성도가 당하는 모든 시련의 모델이요, 선구자이십니다.   그분의 고난을 생각하면, 오늘 우리의 고난은 참으로 아무것도 아닙니다. 

여러분 가운데, 누가 원수에게 침 뱉음을  당한 적이 있습니까?   
누가 사십에 하나 감한 채찍질을 당한 적이 있습니까?   여러분 가운데 누가 그 심한 고통의 십자가를 진 사람이 있습니까?   아무도 없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이 모든 고난의 고통을 다 감당하시고도, 절대 불평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을 원망하지도 않았습니다.  그리고 당신을 십자가에 못 박는 패역한 백성들을 원망하지도 않았습니다.   그냥 그대로 다 감당하셨습니다.  

그리고는 십자가 상에서 마지막으로 한 마디 하지시오?   다 이루었다.  
다 이루었다.  모든 것을 아낌없이 다 희생하고 주었다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의 인생과 사역에, 누가 이런 고백을 함으로 마지막을 장식할 수 있겠습니까?   주님과 같이 그 고난에 동참한 사람들만이, 종국에 이런 고백을 할 수 있는 줄로 믿습니다.   그 사람들이 누구입니까?   바로 초대교회 성도들이었다는 겁니다.  

바울도 이렇게 고백합니다. “나의 달려갈 길과, 주 예수께 받은 사명 곧,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 증거하는 일을 마치려 함에는, 나의 생명을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노라.”  특별히 복음 전하는 사명을 감당함에 있어 당하는 모든 고난과 수치는, 실로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입니다.  
자신을 구원하시기 위해 주님이 지신 그 십자가의 고통을 생각해 보면, 지금 자신이 당하는 이런 고통과 수치는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내가 인생에 있어 고난을 받을 때, 또한 사역을 감당할 때 고난을   당할 때, 하나님을 향해 원망하거나, 불평하지 말고, 오늘 본문의 초대교회 성도들과 같이, 그리스도의 고난과 그 결과를 기억하면서, 인내함으로 극복해 나가며, 우리가 섬기는 예수 그리스도와 같이 최후의 승리자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 드립니다. 
마지막 세 번째로, 초대교회 성도들의 신앙적 자세가 어떠했는가?  
고난을 당할 때, 그 고난을 제거해달라고 하지 않고, 극복할 힘을 달라고   간구했다는 것입니다.  어쩌면 이것이, 오늘날 현대교회 성도들의 신앙과의   분명한 차이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오늘 본문 29절 말씀을 다시 보세요. “주여 이제도 저희의 위협함을 하감   하옵시고, 또 종들로 하여금 담대히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게 하여 주옵시며” 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이 “하감” 이라는 말의 뜻이 무엇입니까? 
자신들이 당하는 고난을 감해 달라는 말이 아니라, 고난 받는 자신들을 하나님께서 돌봐 달라고 하는 요청이라는 것입니다.  

초대교회 성도들은 유대교로 인해 고난당하는 일을 없이하거나, 그 고통을 감해달라고 기도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 고난은 그리스도가 받은 축복으로 가는 통로임을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사실을 잘 아는 그들은, 그런 축복의 기회가 줄어들거나 없어지는 것을 더 두려워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이 어떻게 기도했습니까? 
“담대히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게 하여 주옵시며”  오히려 자신들의 사역이 위축되지 않고, 더 강력하게 이루어져 가게 해 달라고 기도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것이 바로 초대교회 성도들의 신앙의 위대함인 줄   믿습니다.  바로 이런 신앙이 있었기에, 그들 앞에 닥친 고난이나 위기는   아무것도 아닌 것이 될 수 있었다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고난의 위기가 닥쳐왔을 때, 그것을 피하고자 하고,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그저 인생의 평안만 바라고, 세상적인 물질과 명예를 누리기를 간구한다면, 다른 세상 종교인들의 요구와 다를 것이 무엇입니까?  
고난의 시련은 피할 것이 아니라, 뛰어 넘어야 할 것인 줄 믿습니다.  
인생의 위기 앞에, 고난의 시련 앞에 주저앉거나, 뒤를 향해 돌아가는 신앙이 아니라, 뛰어 넘어가고, 아니면 벽을 뚫고서 나아가고, 그도 아니면, 돌아서라도 건너편인 축복을 향해 나아갈 수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맥아더장군은 그 자녀들을 위해 이렇게 기도했습니다. “주여, 나의 자녀들을 평탄케만 마옵시고, 고난도 주시옵소서. 그리고 그 고난을 극복할 용기와   지혜도 주옵소서.”  여러분, 얼마나 멋진 기도입니까?  
오늘 우리도 이런 멋진 기도를 드릴 수 있어야 할 줄로 믿습니다. 
하나님이 초대교회 성도들의 이러한 간구를 들으시고 응답해 주시지 않았습니까?  가장 먼저 이루어진 응답은, 성령 충만의 응답이었습니다. 
여러분 31절 말씀을 보세요. “빌기를 다하매 모인 곳이 진동하더니, 무리가 다 성령이 충만하여 담대히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니라.”  할렐루야!!! 

성령 충만 받은 초대교회 성도들이 이후에 어떤 역사를 일으켰습니까?  
그들의 간구한 대로, 예수 이름으로 기도할 때마다 병이 낫는 기적이 일어났습니다.  그리고 나중에는 자신들을 핍박하던 제사장들을 기독교인으로 개종시키는 놀라운 역사를 일으키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행 6 : 7절에 보세요. “하나님의 말씀이 점점 왕성하여 예루살렘에 있는 제자의 수가 더 심히 많아지고 허다한 제사장의 무리도, 이 도에 복종 하니라.”  할렐루야!!!!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인생에 고난의 정도가 클수록, 그에 비례하여 하나님의 은혜와 권능도 풍성하게 나타난다는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이 큰 위기를 당하면, 오히려 하나님의 기적을 체험하는 계기라는 것을 믿고, 필요한 것을 간구하고 인내로 극복하는 성도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고전 10 : 13절에, “오직 하나님은 미쁘사 너희가 감당치 못할 시험 당함을 허락지 아니 하시고, 시험당할 즈음에 또한 피할 길을 내사, 너희로 능히   감당하게 하시느니라.” 고 했습니다.

오늘 저와 여러분은 초대교회 성도들과 같은 신앙의 자세로, 인생의 모든 위기들을 잘 극복하면서, 하나님이 예비하신 풍성한 축복으로 나아가며, 날마다 주님의 이름으로 능력을 나타낼 수 있는 복된 성도들 다 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 드립니다.    (전승빈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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