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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바울에게 본받을 점 (행 9: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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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울에게 본받을 점 (행 9:1~9)

성공한 사람들에게는 저마다 성공 비결이 있습니다. 어떤 이들은 남다른 능력이, 어떤 이들은 남다른 환경이, 어떤 이들은 남다른 노력이, 그리고 어떤 이들은 남다른 기회가 성공 비결이라 말합니다. 

   그러나 성공한 사람들 모두에게 공통된 성공 비결 하나가 있습니다. 바로 철저함입니다. 

   철저함이란 말은 한자로 “뚫을 철(徹) 바닥 저(底)”를 씁니다. 바닥까지 파헤친다는 것입니다. 무엇인가 행할 때 대충하는 것이 아니고 끝을 볼 때까지 최선을 다 하는 것을 말합니다. 그래서 사전에서는 이렇게 정의했습니다. “속속들이 꿰뚫거나 미치어 부족함이나 빈틈이 없음”

  작년에 타계한 판소리 명인 박동진 장로님은 국악계의 거목이었습니다. 이 분이 국악계에서 이렇게 큰 성공을 거둘 수 있었던 비결은 바로 그 철저함 때문이었습니다. 

  특히 이분은 판소리 인생 70년 동안 매일 새벽 3-4시에 일어나 2시간씩 새벽 소리 연습을 했다는 것입니다. 타계하기 얼마 전까지도 온 몸에 땀이 흥건하도록 새벽 소리연습을 빼놓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소리를 위해서라면 예수 믿기 전에도 술과 담배를 일체 하지 않았고, 여자도 가까이 하지 않았습니다. 

   그렇습니다. 성공한 사람들은 철저한 사람들입니다. 철저하게 훈련을 받습니다. 철저하게 준비합니다. 철저하게 추진합니다. 그리고 철저하게 관리합니다. 이런 철저함으로 끝내 성공을 이루어 냅니다.

   신앙생활도 마찬가지입니다. 신앙생활에 성공하려면 철저함이 필요합니다. 대충해서는 신앙생활에 성공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철저해야 합니다. 자신에게도 철저해야 합니다. 그리고 이웃과 세상을 행해서도 철저해야 합니다.

   사도 바울은 신앙생활에 가장 성공한 사람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의 신앙생활 성공의 결정적인 비결을 하나 꼽으라면 역시 철저함입니다. 

   사도 바울의 그 철저함을 살펴보고 우리의 본을 삼아보고자 합니다.


철저한 회개

   바울의 회개 사건은 행 9장에 자세하게 기록되어있습니다.       1-2에 보면 이렇게 되어있습니다. “사울이 주의 제자들에 대하여 여전히 위협과 살기가 등등하여 대제사장에게 가서 다메섹 여러 회당에 가져갈 공문을 청하니 이는 만일 그 도를 따르는 사람을 만나면 남녀를 막론하고 결박하여 예루살렘으로 잡아오려 함이라” 

   회개 이전 바울 즉 사울이 다메섹에 기독교인들이 활발하게 활동하고 있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아마도 유대인들이 기독교인들의 전도를 받고 개종하는 일들이 많이 일어난다는 소식을 들었을 것입니다. 누가 시킨 것도 아닌데 자청해서 대제사장을 찾아갑니다. 자기가 다메섹에 가서 이 사태를 해결할 수 있도록 허락해 달라는 것입니다. 심지어 기독교인들을 잡아서 예루살렘으로 끌고 오겠다는 것입니다.

   이처럼 회개 이전 바울은 기독교를 박해하는 데 앞 장 섰던 사람입니다. 이런 자신의 과거를 돌아보면서 훗날 바울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죄인 중에 내가 괴수니라”(딤전 1:15)

   이러던 바울이 달라집니다. 행 9:19-21보면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사울이 다메섹에 있는 제자들과 함께 며칠 있을새 즉시로 각 회당에서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전파하니 듣는 사람이 다 놀라 말하되 이 사람이 예루살렘에서 이 이름을 부르는 사람을 멸하려던 자가 아니냐 여기 온 것도 그들을 결박하여 대제사장들에게 끌어가고자 함이 아니냐 하더라” 

   회개 이후 바울은 철저하게 변화했습니다. 이제 예수를 전하는 사람이 된 것입니다. 그를 지켜보던 사람들이 모두 놀랐습니다. 유대인들이 예수 믿는 사람들을 박해하기 위해 온 사람이 예수를 전하니 도무지 이해할 수 없습니다. 이것은 당시 기독교인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자기들을 박해하기 위해 온 사람이 자기  편이 되어 그것도 앞 장 서서 예수를 전하니 도무지 이해할 수 없습니다.

   그렇습니다. 바울은 철저하게 돌아섰습니다. 죄인 중의 괴수였던 그가 철저하게 회개하고 하나님의 위대한 종이 되었습니다. 앞 장 서서 예수를 박해하던 사람이 철저하게 회개하고 앞 장 서서 예수를 전하게 되었습니다. 사울이 철저하게 변하여 바울이 되었습니다.

  자연현상은 가역적(可逆的) 현상과  불가역적(不可逆的) 현상으로 구분할 수 있습니다. 원래대로 돌이킬 수 있는 현상과 원래대로 돌이킬 수 없는 현상입니다. 예를 들어서 고무줄을 조금 늘였다 놓으면 다시 원래대로 돌아갑니다. 가역적 현상입니다. 그런데 고무줄을 길게 잡아 당겨서 늘여놓으면 이제 다시 원래대로 돌아가지 못하고 늘어져 있습니다. 불가역적 현상입니다.

  잡초는 겉에 들어난 잎만 자르면 얼마 안가서 다시 자랍니다. 가역적 현상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뿌리째 뽑으면 다시는 자라지 못합니다. 불가역적 현상이라 할 수 있습니다.

   회개에도 두 종류가 있습니다. 하나는 가역적 회개가 있고 다른 하나는 불가역적 회개가 있습니다. 잘못을 깨닫고 회개했습니다. 얼마 못가서 다시 그 잘못을 저지릅니다. 원래대로 되돌아간 것입니다. 가역적 회개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잘못을 깨닫고 결단했습니다. 다시는 그 잘못을 반복해서 짓지 않습니다. 불가역적 회개라 할 수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철저하게 회개했습니다. 다시는 원 상태로 돌아갈 수 없도록 철저하게 변했습니다. 불가역적 회개를 한 것입니다. 그는 이렇게 변화된 모습을 고후 5:17에서 설명했습니다. “그런즉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 완전히 새롭게 피조된 존재라는 것입니다. 아예 새 것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에게도 이런 변화가 필요합니다. 아예 다시 돌아갈 수 없도록 철저하게 회개해야 합니다. 어설프게 잡초 잎사귀만 자르지 말고 철저하게 그 뿌리까지 뽑아야 합니다. 한번 회개하고 돌아섰으면 다시는 되돌아가지 않아야 합니다. 


철저한 믿음

   바울은 이렇게 철저하게 회개하고 나서 자신이 앞으로 살아갈 삶의 기본 태도를 정했습니다. 갈 2:20에 이렇게 기록해 놓고 있습니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이제 후로는 철저하게 예수를 믿는 그 믿음으로 살겠다는 다짐입니다.

   이런 태도로 우선 바울은 자신의 주변을 정리했습니다. 빌 3:7-9을 보면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무엇이든지 내게 유익하던 것을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다 해로 여길 뿐더러 또한 모든 것을 해로 여김은 내 주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하기 때문이라 내가 그를 위하여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배설물로 여김은 그리스도를 얻고 그 안에서 발견되려 함이니” 한 마디로 믿음에 도움이 되지 않은 것은 다 버렸다는 것입니다. 

   바울은 그동안 자신이 그토록 열심히 연마해 왔던 학문도 믿음에 도움이 되지 않기 때문에 다 버렸습니다. 그동안 자신이 출세와 성공을 위해 공들여 쌓아왔던 모든 업적도 믿음에 도움이 되지 않기 때문에 다 버렸습니다. 그동안 정성을 다해 맺어왔던 모든 인간관계도 믿음에 도움이 되지 않기 때문에 다 버렸습니다. 미련 없이 오물처럼 다 버렸다는 것입니다. 철저하게 믿음만 앞세우게 된 것입니다.

   이제 오직 믿음 만 앞세우게 된 바울은 실제로 그 믿음으로 살았습니다. 행 16:23이하를 보면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많이 친 후에 옥에 가두고 간수에게 명하여 든든히 지키라 하니 그가 이러한 명령을 받아 그들을 깊은 옥에 가두고 그 발을 차꼬에 든든히 채웠더니 한밤중에 바울과 실라가 기도하고 하나님을 찬송하매 죄수들이 듣더라 이에 갑자기 큰 지진이 나서 옥터가 움직이고 문이 곧 다 열리며 모든 사람의 매인 것이 다 벗어진지라”

   바울이 빌립보에서 전도하다가 옥에 갇히게 되었습니다. 옷이 찢기고 수 없이 매도 맞고 발에는 차꼬를 채우고 지하 깊은 옥에 갇혔습니다. 온 몸이 매 맞은 상처로 극심한 고통을 겪고 있었을 것입니다. 언제 풀려날 수 있을 지 기약이 없습니다. 자칫 이 이름 모를 낯선 땅에서 죽게 될 지 모르는 상황입니다. 

   그런데 바울이 찬송을 했다는 것입니다. 옥에 갇힌 다른 죄수들이 다 들을 수 있을 정도로 크게 찬송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모든 것을 다 주께 맡기고 기도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친히 역사하셔서 옥문이 열리게 되고 그 안에서도 복음이 전파되는 역사가 나타났다는 것입니다. 철저한 믿음의 삶이 아닐 수 없습니다.

  작년 5월 3일 세계적인 언론사 AP통신은 사진 한 장을 각국 언론사에 타전했습니다. 바로 14살 된 러시아의 빅토리아 크초예바양의 손과 그 손에 들린 작은 십자가 사진입니다.

  러시아 북 오세티야 베슬란 학교에 3일간의 인질극이 벌어졌습니다. 인질범들이 학생들을 가두고 학교에 폭발물을 설치하고 인질극을 벌였습니다. 결국 경찰의 강제 진압으로 많은 사람들이 죽고 다쳤습니다. 이 크초예바 양도 폭발물에 머리를 다쳐 응급조치 후 머리에 붕대를 감은 채 병원으로 이송됐습니다. 

  병원에 도착했을 때 의식을 잃고 있었지만 끝까지 손에 무엇인가를 잡고 놓지 않은 것이 있었습니다. 간호사가 궁금해서 손을 펴보니까 작은 십자가를 쥐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 때 그 손을 찍은 사진이 바로 이 사진입니다. 

  깨어난 뒤 기자 인터뷰에서 크초예바 양은 인질극 내내 십자가를 꼭잡고 기도했다고 말했습니다. 하나님께서 그 기도를 들으셔서 그토록 위태로운 상황 가운데서 건져주셨던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오늘 우리에게도 이런 믿음이 필요합니다. 어떤 환란이 닥치고 고난이 찾아온다고 해도 오직 예수만 믿고 의지해야 합니다. 찬양하며 기도해야 합니다. 이런 철저한 믿음이 우리를 구원하고 우리를 지켜줍니다.


철저한 헌신

   바울은 이렇게 철저하게 믿음으로 살면서 자신을 주님께 다 드렸습니다. 

   바울은 행 13장에서 안디옥 교회의 파송을 받아 이방인 선교에 나선 후 순교할 때까지 약 20년 동안 선교여행에 헌신했습니다. 1차 전도 여행 때 약 2년 여 갈라디아 지역 2240키로나 되는 먼 거리를 다니며 복음을 전했습니다. 2차 전도 여행 때는 약 3년 여 기간 동안 약 5000키로의 먼 거리를 다니며 복음을 전했습니다. 3차 전도 여행 때는 약 6년여 기간 동안 5000키로나 되는 먼 거리를 여행하며 복음을 전했습니다. 그러다 로마로 가서 긴 투옥생활을 보내고 잠시 풀려났습니다. 그 후 서바나와 기타 여러 지역을 다니며 복음을 전했습니다. 그러다 다시 로마에서 체포되어 순교하게 되었습니다.

   바울은 이 여행 도중 자기가 겪었던 그 고초를 고후 12:23 이하에서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내가 수고를 넘치도록 하고 옥에 갇히기도 더 많이 하고 매도 수없이 맞고 여러 번 죽을 뻔하였으니 유대인들에게 사십에 하나 감한 매를 다섯 번 맞았으며 세 번 태장으로 맞고 한 번 돌로 맞고 세 번 파선하고 일주야를 깊은 바다에서 지냈으며 여러 번 여행하면서 강의 위험과 강도의 위험과 동족의 위험과 이방인의 위험과 시내의 위험과 광야의 위험과 바다의 위험과 거짓 형제 중의 위험을 당하고 또 수고하며 애쓰고 여러 번 자지 못하고 주리며 목마르고 여러 번 굶고 헐벗었노라”그야말로 바울은 예수를 위해 철저하게 헌신했던 사람입니다.

   헌신이라는 말은 한자로 “드릴 헌(獻)에 몸 신(身)”으로 표기합니다. 여기서 헌 자를 살펴보면 그 의미가 재미있습니다. 솥을 의미하는 “헌(鬳)”과 개 “견(犬)”이 합해서 만들어진 말입니다. 옛날에 개고기를 솥에 담아서 종묘에 바친 것에서 유래한 말입니다. 

   그러니까 헌신이라는 말은 마치 개를 잡아서 솥에 담아 드리듯이 나를 솥에 담아서 드린다는 뜻입니다. 바울은 철저하게 헌신했습니다. 자신의 모든 것 곧 생명까지 다 주님께 드렸습니다.

   그렇습니다. 헌신이란 하나님께 나를 드리는 것을 말합니다. 내 인생을 하나님께 드리는 것입니다. 내 건강을 하나님께 드리는 것입니다. 내 소중한 시간을 하나님께 드리는 것입니다. 내 귀한 재물을 하나님께 드리는 것입니다. 내가 쌓아놓은 명예, 권력, 지식 등을 하나님께 드리는 것입니다.

  앤드류 머레이는 [절대 헌신]이라는 책에서 헌신이란 우리 자신을 하나님께 드려서 하나님께서 사용하실 수 있게 하는 것이라고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자신을 헌신하는 사람들은 늘 이렇게 말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나는 하나님의 손에 나의 하나님이 나를 위해 역사하고 계신다”

   한 아이가 보리 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주님께 드렸습니다. 자기가 먹을 한 끼의 식사를 자기가 먹지 않고 주님께 드린 것입니다. 이것이 헌신의 시작입니다.

   예수님께서 그 보리 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가지고 역사하셨습니다. 그 위에 주님의 능력이 나타나 5000명이 먹고 12 광주리가 남았습니다. 이것이 헌신의 결과입니다.

   그렇습니다. 헌신이란 나를 하나님께 드리는 것입니다. 우리가 나 자신을 하나님께 드릴 때 하나님께서 그 위에 능력을 나타내 보이셔서 놀라운 역사를 이루시는 것입니다.

  앤드류 머레이는 절대 헌신이라는 말을 썼습니다. 철저한 헌신이라는 말입니다. 그러면서 옷을 비유로 들었습니다. 내가 입은 옷은 나를 위해 쓰임 받는 것입니다. 그 옷을 내가 누구와 지금 함께 입을 수 없습니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하나님께 나를 드려서 하나님께서 쓰시도록 한다면 이것은 온전히 하나님께서만 쓰시도록 해야 합니다. 전적으로 하나님께서만 쓰시도록 해야 합니다. 이럴 때 ‘절대 헌신’, ‘철저한 헌신’이라는 말을 씁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하나님께 무엇인가를 드린 것이 있습니까? 그것이 하나님께서 역사하셔서 소중하게 쓰임 받고 있습니까? 오직 하나님만을 위해 쓰임 받고 있습니까?

   바울은 철저한 사람이었습니다. 하나님께 철저했습니다. 자신에게 철저했습니다. 그리고 주께서 맡기신 일에 철저했습니다. 특별히 그는 신앙생활에 철저했습니다. 우선 철저한 회개를 했습니다. 다시 되돌이킬 수 없는 불가역적 회개를 했습니다. 다음으로 철저한 믿음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모든 것을 철저하게 주님께 맡겼습니다. 주님의 약속만 믿고 나아갔습니다. 그리고 철저한 헌신을 실천했습니다. 하나님께 자기 자신을 온전히 드렸습니다. 하나님을 위해 소중히 쓰임받았습니다. 

   이제 우리도 바울의 본을 받아서 하나님 앞에 철저하고, 내 자신에게 철저하고, 그리고 맡기신 일에 철저해야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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