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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약속의 땅을 향하여 (창 12: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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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세기 12:1-9 

하나님은 인류를 구원하시기 위하여 구체적인 한 사람을 부르시고, 그를 통하여 구원의 위대한 역사를 이루시고 있습니다.  역사상에 하나님으로부터 부르심을 받은 한 사람이 있었으니, 믿음의 조상이신 아브라함이었습니다.  하나님은 어느 날 아브라함에게 나타나서 명령하셨습니다.    

오늘의 본문 말씀은 너무나 귀한 명령입니다.  창12:1-3을 읽어봅니다.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이르시되 너는 너의 고향과 친척과 아버지의 집을 떠나 내가 네게 보여 줄 땅으로 가라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 네게 복을 주어 네 이름을 창대하게 하리니 너는 복이 될지라 너를 축복하는 자에게는 내가 복을 내리고 너를 저주하는 자에게는 내가 저주하리니 땅의 모든 족속이 너로 말미암아 복을 얻을 것이라 하신지라”  

“너는 너의 고향과 친척과 아버지의 집을 떠나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어디로 떠나느냐 하면 “내가 네게 보여 줄 땅으로 가라”고 하셨습니다.  좀 막연하기만 합니다. 하나님은 약속하시기를 아브라함으로 큰 민족을 이루고, 복을 주어 그의 이름을 창대하게 해주고, 복의 원천이 되라고 했습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먼저 고향과 친척과 아버지의 집을 떠나라고 하셨습니다.   현대적인 의미로 보면 지연이나 혈연을 떠나야 한다는 말씀이었습니다. 

오늘의 본문 말씀을 수없이 들어온 말씀이지만, 한번 따져보아야 하고, 질문할 것들이 아주 많은 본문입니다.  이 명령을 들은 것은 아브라함 혼자였느냐, 아버지 데라도 같이 들을 말씀이냐 하는 의문을 가질 수 있습니다.  그러면 아브라함이란 분이 다신교를 믿던 중에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았느냐,  아니면 아직은 완벽하지는 않지만, 초보단계의 유일신앙을 가지고 있던 중에 부르심을 받은 것이냐 하는 질문을 던질 수 있습니다.  

이스라엘에 내려오는 전설 중에 아브라함의 소년시절과 청년시절에 대한 이야기가 참으로 많습니다.  갈대아 우르라는 곳은 우상이 만연되어 있었고, 특별히 달의 신이라는 나나를 숭배하고 있었습니다.  사람들은 신이란 많이 섬길수록 좋은 것이지, 적게 섬기거나 또 하나만 섬긴다고 하면 여러 신들의 노여움을 살 수 있다고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교회사에서 골라난 신앙 이야기”라는 책에 보면 재미있는 사건이 소개되고 있습니다.  아브라함의 아버지 데라는 갈대아 우르에서 우상을 만들어 파는 직업을 갖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어린 아브람은 신이란 우주 만물을 창조하신 유일하신 하나님을 믿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어린 아브라함은 “우리 아버지가 하나님 앞에 죄짓는 우상장사를 하고 있는데 어떻게 해야 우상장사를 그만 두실까?”하면서 걱정하고 고민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하루는 아버지가 아브라함에게 “저 신상들이 상하지 않도록 잘 지켜라”고 당부하고는 출타하였습니다.  마침 그 때 이웃집에서 음식 한 그릇을 가져왔습니다.  아브라함은 아버지께서 출타하신 틈을 타서 작고 큰 여러 모양의 우상들이 진열되어 있는 신당에 들어가서 망치를 가지고 여러 우상들을 다 때려 부순 후 그 중에 제일 큰 우상의 손에 망치를 들게 하고, 끈으로 꽁꽁 묶어 놓았습니다.   그리고는 이웃집에서 가지고 온 음식그릇을 큰 우상의 앞에 갖다 놓았습니다.   외출했다가 돌아온 아버지 데라가 신당에 들어가 보니 신상들이 모두 목이 부러지고 팔, 다리, 허리가 꺾어져 있었습니다.   

데라는 놀라기도 하고 화가 나서 아브라함을 불러 야단쳤습니다.  아브람은 시치미를 뚝 떼고 대답하였습니다.  “아버지, 이웃집에서 떡을 가져왔기에 그 떡을 신당 앞에 두었더니 신상들이 서로 먹겠다고 소동을 부렸는데, 결국 제일 크고 힘센 저 신상이 망치를 들고 다른 신상들을 모두 때려 부수고 떡을 차지했습니다.”   그러자 아버지는 더욱 화가 나서 “사람이 만들어놓은 흙덩이 신상이 어떻게 다른 신상을 때려 부수고 떡을 먹는단 말이야?”라고 호통을 쳤습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은 겸손하게 아버지 앞에 무릎을 꿇고 간청하였습니다. “그래요. 아버지, 생명도 없는 우상이 어떻게 사람에게 명을 길게 해주고, 복을 준다고 하면서, 사람을 속이며 우상을 파십니까?  이제 이런 일은 그만 두세요.”라고 했답니다.  그러자 아버지는 깊이 깨달은 바가 있어 우상 만들어 파는 직업을 버리고, 가족을 이끌고 갈대아 우르를 떠나 하란으로 옮겨갔다고 합니다. 

“워킹 더 바이블”이란 책을 쓴 브루스 페일러가 있습니다.  “모세오경의 길을 따라 사막을 걷다”라는 부제를 붙이고 있습니다.    그는 모세오경의 역사적인 배경이 되는 중동의 여러 지역을 걸어서,  지프를 타고,  때로는 기차로, 여러 날 낙타를 타고, 유명한 고고학자 아브너박사를 따라 여행하고 그 여행담을 기록했습니다. 그는 3개 대륙 1만 마일이라는 대장정을 통하여 성경의 배경이 되는 수많은 장소를 돌아보았습니다.   워킹 더 바이블이란 책이 나온 후에 ‘National Geographic’ 방송에서 그 책의 내용을 다시 재현하면서 현지를 여행하면서 다큐멘타리 형식으로 촬영하여 방영하였습니다.  

저는 책도 보았고, 방송도 보았습니다.    성경에는 아브라함이 갈대아 우르에서 태어났다고 하는데, 이슬람교를 믿는 중동사회의 전승은 산리우르파에서 태어났다고 합니다.  브루스는 아브라함이 태어났다는 산리우르파를 방문하였는데, 그곳에는 아브라함을 기념하는 이슬람교 사원이 있고, 샘물이 나오는데 이 물을 거룩한 물이라고 수많은 사람들이 받아가고 있었습니다.  거기에서 들은 이야기를 기록하고 있습니다.   소년 아브라함은 해와 달과 별들은 신이 아니요, 창조주가 만든 것이라면서 우상장사를 하는 아버지와 사이에 나빠질 수밖에 없었습니다.  아브라함이 아버지의 우상들을 깨뜨려버리자, 아버지 데라는 아들을 왕에게 넘겨버렸답니다.    

높은 보좌에 앉아 있던 “림로드”라는 왕은 화가 났습니다. 어린 소년 아브라함이 왕의 보좌를 붙잡고 흔드는 바람에 방안의 모든 우상들이 바닥에 떨어져 깨어지고 말았습니다.  님로드 왕은 아브라함을 불타는 용광로에 집어넣으라고 명령하였습니다.  아브라함은 졸지에 알몸으로 밧줄에 묶이게 되었고, 엄청난 장작더미 불 속에 던져졌으나, 밧줄만 탔을 뿐이지 그는 불타지 않았답니다. 아브람은 어린 시절에도 유일하신 창조주 하나님을 믿던 사람이라고 보아야 합니다. 

아브람이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은 곳이 갈대아 우르라는 곳이냐, 아니면 아버지와 함께 살다가 아버지를 떠나온 하란이었느냐 하는 장소의 문제가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 “너는 너의 고향과”라고 했는데, 고향이란 말은 태어난 곳을 말합니다.   새번역에서는 “너는 네가 살고 있는 땅과, 네가 난 곳과”라고 했습니다.   갈대아 우르에서 하나님의 부르심을 들었다고 생각됩니다. 사도행전 7장에 보면 스데반이 설교하는 중에 그의 조상 아브라함을 언급하고 있습니다.  그는 이런 말을 합니다.  

행7:2에 “스데반이 이르되 여러분 부형들이여 들으소서 우리 조상 아브라함이 하란에 있기 전 메소보다미아에 있을 때에 영광의 하나님이 그에게 보여 이르시되 네 고향과 친척을 떠나 내가 네게 보일 땅으로 가라 하시니 아브라함이 갈대아 사람의 땅을 떠나 하란에 거하다가 그의 아버지가 죽으매 하나님이 그를 거기서 너희 지금 사는 이 땅으로 옮기셨느니라”고 했습니다. 아브람이 하란에 있기 전, 메소보다미아에 있을 때에 영광의 하나님이 그에게 보이셨으며, 말씀하셨다고 합니다.  

아브라함의 아버지 데라는 70세 때에 아브람과 나홀과 하란을 낳았습니다.   이 말은 70세가 되기 전에 차례대로 세 아들을 낳았다는 말도 되고, 세 사람의 쌍둥이를 낳았다는 말도 됩니다. 그러나 현실적으로 보면 70세가 되면서 2-3년 터울로 세 형제를 낳았다고 보는 것이 좋습니다.  

그리고 데라는 다른 부인을 통하여 사라를 낳았는데, 사라는 아브라함의 부인이 되었지만, 이복누이동생이었습니다.   데라의 아들 중에 하란은 롯이라는 아들과 밀가라는 딸을 낳고는 아버지 데라보다 먼저 갈대아 우르에서 죽었습니다.  형제 나홀의 아내는 밀가였는데, 바로 형제인 하란의 딸이었습니다.  나홀은 조카와 결혼하였고, 아브람은 이복누이와 결혼하였습니다. 

데라는 아브라함과 사라, 하란의 아들은 손자 롯을 데리고 갈대아 우르를 떠나 가나안 땅으로 가고자 하더니 하란에 이르러 거기에 거류하였는데, 데라는 나이가 이백오세가 되어 하란에서 죽었습니다.  여호수아24:2-3에 보면  “여호수아가  모든 백성에게 이르되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기를 옛적에 너희의 조상들 곧 아브라함의 아버지, 나홀의 아버지 데라가 강 저쪽에 거주하여 다른 신들을 섬겼으나 내가 너희의 조상 아브라함을 강 저쪽에서 이끌어 내어 가나안 온 땅에 두루 행하게 하고 그의 씨를 번성하게 하려고 그에게 이삭을 주었으며”라고 했습니다.  

옛적에 이스라엘의 조상인 아브라함의 아버지, 나홀의 아버지 데라는 강 저쪽에 거주하면서 다른 신들을 섬겼으나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조상인 아브라함을 강 저쪽에서 이끌어 내어 가나안 온 땅을 두루 행하게 하였다고 했습니다.  데라는 이스라엘의 조상이라고 말할 수 없고, 아브라함부터 이스라엘의 조상이라고 부르는 이유가 하나님의 선택이, 바로 그 선택이 아브라함으로부터 시작되었기 때문입니다. 

아브라함의 나이 75세가 되었을 때에 하나님의 부르심이 있었습니다.   그곳은 하란이었고, 아버지가 아직 145세였으니, 아버지가 살아 계실 때였습니다.  아버지 데라가 하란에 계속 머물고자 했으나 더 이상 하란에 머물고 싶지 않은 아브라함은 아버지의 집을 떠나서 가나안으로 오게 되었습니다.  데라는 믿음의 조상이 될 수 있었던 사람이었지만, 결단력의 부족으로 하란이란 도시를 벗어나지 못하였습니다.   하란이란 곳이 터키의 동부 지방에 있는데, 유적지를 살펴보면 아주 큰 도시였으며, 주거지역이 정착촌을 이룬 거대한 도시였음을 보게 됩니다. 

고대인들에게 있어 지연과 혈연은 곧 자기의 정체성을 확인할 수 있는 자리이며, 외부로부터 보호를 받을 수 있는 공동체였습니다.    그 옛날에 지역공동체로부터 추방을 당하거나 혈연공동체로부터 파문을 당하는 것은 죽음보다 더 두려운 것이었습니다.   따라서 고향을 떠나고 친척 사회를 떠나고 아버지의 집을 떠난다는 것은 죽음보다 더 받아들이기 어려운 결단이었습니다.  그 결단이 아브라함으로 하여금 믿음의 조상이 되게 했습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을 신뢰한 사람입니다.    하나님이 약속해주시기를 자기에게 한 민족의 조상이 되게 하셨는데, 그 약속에 감동한 사람입니다.  사실 아브람이 고향과 친척 사회, 그리고 아버지의 집을 떠난다고 하는 것은 그동안 보장받고 있었던 안정과 기득권을 내려놓아야 하고 포기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새롭게 출발하는 것은 어디까지나 위험부담이 큰 것이었습니다.  고대 사회에서 유프라테스 강과 티그리스 강 유역은 비옥한 반달 지역이었고, 고대 문명이 일어난 곳이며, 문자가 있었고, 국가 형태를 갖추어 안전하게 살아갈 수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가나안 땅으로 보내시는 것은 지리적인 성별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한 사람을 축복하시는 것은 성별된 신앙을 위한 것이지, 축복 자체가 목적은 아닙니다.  단순히 도식적으로 이스라엘 사람들이 아브라함의 자손이므로 반드시 축복하시는 것이 아니었고, 신앙의 후손, 믿음의 후손을 가지는 것을 원하시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하시려고 하시면 아브라함을 우르에서도 선민으로 축복하실 수 있고, 하란에서도 축복하실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상숭배하는 곳에서 떠나라고 하시는 것은 지리적으로 분리시키므로 한 민족이 형성될 때까지 성별하고 있습니다. 

영적으로 성숙하지 못하면 판단력이 모자라고, 결심이 견고하지 못합니다. 사물의 참 가치를 알아보지 못하고 비싼 것을 싼 것으로 취급하고 싸고 천한 것을 귀하고 값진 것으로 여길 수도 있습니다.  우상숭배자들과 함께 어울려 살다보면 유일신 여호와 하나님을 믿는 신앙은 성장할 수 없습니다. 창조주보다는 피조물을 섬기고, 참신이 아니라, 가공의 신을 섬길 수 있었습니다.  이스라엘의 미래는 너무나 장엄하고 소중한 존재이기에 지금은 조금 힘들고 어려운 길 같아 보여도 가나안으로 가라고 하십니다.  

오늘을 사는 우리에게는 성별의식이 아주 중요합니다.    우리를 신앙 안에 세우고 보존하기 원한다면 해야 할 것과 하지 않아야 할 것을 분명히 해야 합니다.  ‘예’와 ‘아니오’를 분명히 하지 못한다면 박쥐와 같은 처지로 전락할 것입니다. 박쥐가 조류입니까? 포유류입니까?  믿는 사람들이 모이면 믿는 사람으로,  안 믿는 사람들이 모인 곳에서는 안 믿는 사람처럼, 그런 식으로 신앙생활한다면 어려운 순간이 오면 믿음을 지키기가 어렵게 됩니다. 

지리적으로 성별해야 합니다.  갈 곳이 있고, 가면 안 되는 곳이 있습니다.    나는 아무 곳이든 가리지 않는다고 하면, 결코 좋은 신앙이 아니라, 나는 주님과 함께 갈 수 있는 곳이라면 마다하지 않지만, 우리 주님이 기뻐하지 않는 장소에는 갈 수 없다는 분명한 자기 철학이 있어야 합니다. 

2절의 말씀에서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 네게 복을 주어 네 이름을 창대하게 하리니 너는 복이 될지라”  이 말씀은 아직 한 명의 자식도 없는 아브람에게는 대단한 약속이었습니다.  아브람이 가나안 땅으로 올 때에는 하나님이 말씀하신 그 민족에 대한 약속을 믿고 떠날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100세가 되어 낳은 자식을 하나님이 번제로 드리라는 말씀을 하셨을 때에, 아브라함은 당신을 떠나지 않고 지금도 여전히 말씀하시고 자기를 알아주는 하나님, 그 하나님 한 분으로 만족하고는 하나님이 원하신다면 아들도 제물로 드릴 수 있다고 결단하였습니다.  나를 알아주시는 하나님, 나에게 말씀해주시는 하나님, 지금도 여전히 나의 하나님이 되신다는 사실 때문에 감사하고 헌신할 수 있는 신앙이 좋은 신앙입니다. 

우리도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가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아는 것으로, 들은 것으로 족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살아가는 삶이 복된 것입니다.  하나님은 어떤 사람에게 꼼짝 못하시는 것입니까?  하나님의 약속을 믿고, 나아가 하나님을 신뢰하면서 하나님 때문에 산다는 사람 앞에서는 물러설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이 너무나 기뻐서 밀어주시고, 함께 하시고 쓰실 수 있는 사람,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가는 사람이 되어야겠습니다. 

저는 “갇힘에서 돌파”라는 책을 본 적이 있습니다.   “프랭크 휴스톤” 목사님이 쓰신 “갇힘에서 돌파”라는 책을 감명 깊게 읽고 오늘 마지막으로 함께 나누려고 합니다. 프랭크 휴스톤 목사님은 뉴질랜드에서 나서 현재는 호주에서 사시면서 개신교회의 영적 부흥을 일으키며, 우리 시대의 거인의 삶을 살아간 목사님이십니다.  그는 침례교인으로 성장하여 18세 때에 구세군에서 구원의 확신을 얻었고, 그 후 12년 간 구세군 본부를 섬겼으며, 성령의 확고한 체험이 있은 후 하나님의 성회-오순절교회로 옮겼습니다.  그는 오순절 교회에서 18년 동안 목회하는 중에 14년 동안 교단총회장으로 봉사하셨습니다. 1977년 그의 나이 55세로, 뉴질랜드 수도 웰링턴 순복음교회의 행복한 목회자로 안주하고 있을 때에, 하나님은 그에게 다가오셨습니다.   

그는 항상 사역하던 대로 최선을 다한다고 하지만, 모든 일은 습관적으로 할 수밖에 없는 일이었고,  열정은 점점 식어만 가고 있었으며 새로운 도전이 필요한 순간이었습니다.   이 목사님은 혼자 밤을 보내는데, 이사야54장을 읽으라는 하나님의 음성이 들려왔으며, 밤 11시 30분부터 동이 틀 때까지 사54장의 본문 말씀을 읽고 묵상하게 되었습니다.  다음 날 새벽, 하나님께 물었습니다.  “하나님, 이렇게 하신 결론이 무엇입니까?”라고 여쭈었습니다.  그 때에 성령께서 “시드니에 가서 교회를 개척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는 “주님, 저는 55세나 되었습니다.”라고 말씀드렸습니다.    주님은 다시 그에게 말씀하시기를 “그것이 무슨 상관이지?”  그는 “ 아무런 상관이 없습니다.”라고 응답하며 “예, 주님, 제가 가겠습니다.”라고 대답하였을 때 말로 형용할 수 없는 평화를 경험하게 되었다고 합니다.     휴스톤목사는 뉴질랜드의 웰링턴에서 모든 사역을 정리하는데 여섯 달이나 걸렸습니다.  1977년 7월 시드니에서 교회를 개척하는데, 9명의 어른과 5명의 아이들과 첫 주일을 예배를 드렸는데, 현재는 2000명의 교인과 국내외에 70개 이상의 교회를 개척하였고, 많은 선교사를 보내는 대교회로 성장하였습니다. 

그는 이 책에서  ‘봉쇄’는  그리스도인에 대한 가장 강력하고 효과적인 사탄의 전략이라고 주장합니다.  “마귀는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에게서 후퇴하는 전략보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삶의 자리를 차지하지 못하도록 우리를 봉쇄하는 데 더 집중하고 계략을 짜고 있다.”고 합니다.  거짓된 안전감이란 겉보기에는 안전하고 평안해 보이지만  하나님이 원하시는 온전하고 깊고 풍성한 생명을 가진 도전과 성취의 흥분을 빼앗아버립니다.  그래서 봉쇄된 그리스도인은 성장이 멈추고, 봉쇄된 교회는 관계성이 없이 죽어가게 될 것입니다.  봉쇄와 갇힘은 잃어버린 영혼들에게 복음 전하는 것을 막아버리고, 사회, 문화적으로 긍정적인 영향을 미치지 못하게 합니다.    

사탄은 모든 교회로 하여금 방관자로 태만하게 만들려고 합니다.  하나님은 당신의 자녀들로 하여금 봉쇄된 삶과 제한된 사고방식을 돌파하기를 갈망하십니다.    그리고 순종의 삶을 살아 승리의 역사를 이루기를 원하십니다.  하나님은 돌파를 위해서 우리를 안주하게 하는 삶의 속박에서 떠나라고 하십니다.  

프랭크 휴스톤 목사님은 “당신의 운명을 성취하는 유일한 방법은 하나님께서 이끄시는 대로 첫 걸음을 내딛는 것이며, 다음 발걸음을 옮기는 것이다.”라고 외치고 있습니다.  

사랑하시는 여러분, 여러분, 자신을 돌아보십시오. 사탄이 주는 부정적인 사고와 파괴적인 생각으로 봉쇄되었고, 여러분의 영혼은 갇힌 것은 아닌가?  하나님의 말씀과 부르심에 대한 확신을 가지고 돌파해야 합니다.   우리를 억압하는 영적인 억압과 장애물을 격파하고 부정적인 지반을 돌파하여야 합니다.  

오늘 약속의 땅을 향하여 나가는 사람, 여호와의 말씀을 따라가는 사람, 비전과 꿈의 사람 아브라함과 같이 어느 곳에 이르든지 하나님을 예배하고, 하나님 한 분만으로 만족하고,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시는 성도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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