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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나귀 타고 입성하신 왕 (막 11:1~10) - 쓰임받는 삶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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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귀 타고 입성하신 왕 (막 11:1~10)

오늘 이 시대의 시대정신은 “모든 것은 시장”이라는 표어입니다. 
시장중심의 경영, 시장 중심 정치, 시장 중심 교육, 시장 중심 종교, 등 시장권력이 인간의 중심에 자리 잡았습니다. 소비자의 비위를 맞추지 않으면 어떤 분야든 살아남기 힘든 세상입니다. 시장에 자신을 팔기 위해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고 자신을 상품화 시킵니다. 인간의 욕망 속에 새로운 시장이 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지상 생애를 살 당시의 유대인의 시대 정신은 자주 독립입니다. 
이 당시 이스라엘은 로마 황제 티베리우스 통치하에 있었습니다. 유대와 사마리아 총독은 빌라도였습니다. 26년에서 36년까지 총독 자리에 있으면서 최고의 법적 권력을 행사하고 있었습니다. 로마는 세제 개혁을 통해 주민의 수와 재산 상태를 조사하여 2년 동안 소출의 1/4을 내게 했답니다. 세금이 수입의 25%입니다. 로마가 유다 지방에 책정한 농지 증세액이 600달란트였다고 합니다. 더욱이 낭비를 일삼은 헤롯 1세의 수입은 1,000달란트였다고 합니다. 1달란트는 1만 데나리온이고 1데나리온은 한 가족의 하루 생활비이니까 6백만 명의 금액입니다. 헤롯은 더욱 심했다는 것입니다. 

결국 과도한 세금 징수는 경제적 절대 빈곤을 초래하였습니다. 극심한 기근에 고통당해야 했습니다. 더욱이 수치스러운 것은 로마 황제에게 납세하는 것이었습니다. 극도의 반 로마 감정을 일으켰습니다. 세금 징수는 유대의 독립 주권을 빼앗은 것이기 때문에 로마에 대한 혐오감을 극에 달했고 세리들까지 경멸하였습니다. 로마의 앞잡이 헤롯대왕의 아들 헤롯 안티파스는 갈릴리에서 39년까지 통치하였는데 동생의 아내와 결혼하고 이것을 비난하는 세례 요한을 처형하였습니다. 예수님은 이 사람을 여우라고 불렀습니다. 정치적으로 긴장의 연속이었으며 민심은 쉽게 동요되었습니다. 로마의 식민 지배와 유대 사회 지배 계급의 착취와 억압으로 인해 이중적인 고통에 신음하고 극도의 빈곤에 시달려야 했습니다. 

당시 유대의 종교, 정치 지도자들의 모임인 산헤드린에서는 성전세를 거두웠는데 A.D 70년 티투스 장군에 의해 파괴되었을 때 성전에 얼마나 금이 많았는지 함락 이후에 시리아의 모든 지방의 금의 가치는 이전의 절반으로 평가절하 되었을 정도였다고 합니다. 산헤드린을 중심으로 한 지배 계급은 성전에 축적된 부를 독점하고 권력을 유지시키기 위해 로마의 식민 통치에 굴복하며 자신들의 기득권 체제를 유지한 것입니다. 

이럴 때 당시 사람들의 시대정신이 무엇이겠습니까? 사람들의 마음을 사로잡는 것이 무엇이겠습니까? 다윗같은 왕이 나타나 민족을 구원해 주길 원했습니다. 
언젠가는 불의한 로마를 무너뜨리고 사악한 헤롯 왕가와 로마의 앞잡이들을 제거하고 정의롭고 공평한 사회를 이룰 사람이 나타나기를 기대했습니다. 

일찍이 예레미야는 이렇게 예언하였습니다. 우리가 당시 사람들의 마음을 정확히 이해하기 위해서 예레미야서 23장 5절 이하를 찾아 보시기 바랍니다.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보라 때가 이르리니 내가 다윗에게 한 의로운 가지를 일으킬 것이라 그가 왕이 되어 지혜롭게 행사하며 세상에서 공평과 정의를 행할 것이며 그의 날에 유다는 구원을 얻겠고 이스라엘은 평안히 거할 것이며 그 이름은 여호와 우리의 의라 일컬음을 받으리라 (렘 23:5-6)”

유다인들은 자신들을 구원할 메시아가 나타날 것으로 기대했습니다. 세례 요한이 광야에서 회개의 세례를 주며 외칠 때 많은 사람들은 기대를 하였습니다. 그러나 결국 처형되고 말았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갈릴리 지방에서 병을 고치시며 기적을 일으킨다는 소문이 퍼졌습니다. 민중들은 어쩌면 예수님이 메시야 일 것이라는 기대를 하였습니다. 이곳 저곳에서 청년 예수님에 대한 소문을 들었습니다. 

“바다를 잠잠하게 했데.” “귀신을 쫓아 냈데.” “물고기 두 마리와 보리 떡 다섯 개로 5천명을 먹였데.” “죽은 자를 살리셨데.” “문둥병 환자를 고쳐 주었데.” “바리새인들을 묵사발 만들었데.” “로마인들인 수많은 사람들이 따라다녀도 그 집회를 해산시키지 못했데.” 등 각종 예수님에 대한 소문이 퍼졌을 것입니다. 
이 소문을 들은 사람들은 어쩌면 그분이 그들이 기대한 메시아일 것이라고 추측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런 시대 속에서 이제 예수님은 예루살렘을 향해 가는 길이었습니다. 유월절은 이스라엘의 최대 축제일입니다. 유월절이 바로 우리로 말하면 일제로부터 해방된 8.15처럼 애굽으로부터 해방된 날을 기념하는 절기입니다. 민족을 생각하는 절기이고 해방과 희망을 이야기 하는 절기입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예루살렘으로 모여 들었습니다. 당시 유대 인구가 100만 내지 125만이었다고 합니다. 예루살렘의 인구를 적게는 25,000명 정도에서 많게는 100,000명 정도였다고 합니다. 

그런데 유월절이 되면 세계 각국에 흩어져 있는 유대인들이 모이기 때문에 적어도 200,000명 정도의 인파가 예루살렘에 모였다고 합니다. 백성들은 기대를 했을 것입니다. 이번 유월절에는 대단한 사건이 벌어질 지도 모르겠다는 기대를 가졌을 것입니다. 제자들도 그런 기대를 하였습니다. 그래서 좌의정 우의정을 요구한 것입니다. 로마를 물리치고 불의한 정권에 철퇴를 가해 민족을 해방시킬 메시아 일 것으로 기대했던 것입니다. 드디어 이제 예수님께서 유월절 맞이하여 제자들과 함께 예루살렘에 입성을 하고 계십니다. 

1. 쓰시는 주님

예루살렘에 가까이 왔습니다. 감람 산 벳바게와 베다니에 이르렀습니다. 벳바게는 예루살렘 남쪽 1.6KM까지 온 것입니다. 감람산은 해발 800M로 예루살렘이 한 눈에 보이는 곳입니다. 유대인들에게는 메시야의 도래와 밀접한 관계가 있습니다(슥9:9; 14:4). 스가랴 선지자는 예언하기를 “그 날에 그의 발이 예루살렘 앞 곧 동편 감람 산에 서실 것이요(슥 14:4)”라고 하였습니다. 베다니는 예수님께서 유대에 계실 때 대체로 예수님의 숙소로 제공되었던 마리아, 마르다 그리고 나사로의 집이 있었습니다. 또한 베다니에는 문둥이 시몬의 집도 있었습니다. 이미 기적을 일으킨 곳입니다. 사람들이 예수님에 대하여 알고 있었습니다. 

이 때 예수님은 제자 중 둘을 불렀습니다. 제자들은 기대를 가졌을 것입니다. 선택받은 설레임이 있었을 것입니다. 개선 장군처럼 예루살렘에 입성하여 로마의 압제를 제거하고 왕이 될텐데 선발대로 뽑혔다는 생각을 할 수 있습니다. 정권 인수위가 되며 얼마나 사람들이 진압군으로 어깨에 힘을 주고 다닙니까? 대통령 독대만 해도 사람들이 “나 대통령 만났다” 우쭐 대지 않습니까? 이제 예루살렘에 입성하면 왕이 될텐데 “내가 측근 중의 측근으로 뽑혔구나”라는 생각을 가질 수 있었을 것입니다. 혁명을 위한 특별한 지침을 받을 것으로 생각했을 것입니다. 과거 그들은 마카비 혁명 때 어떤 일이 벌어졌는가를 알고 있는 사람들입니다. 

안티오쿠스 4세가 할례를 금지시켰고 이를 어긴 어머니는 아기와 함께 처형했습니다. 안식일도 지키지 못하게 했고 성경책(당시는 모세5경)을 소지하는 것조차 금지하였습니다. 더욱 그들을 분노하게 한 것은 예루살렘 성전 안에 희랍의 최고신 제우스를 위한 제단과 신상을 세우게 하고 제우스에게 제물을 바치도록 강요한 것입니다. 주전 167년 유다지역의 작은 마을 모디인(Modiin)에서 ‘마타디아’라는 제사장이 이방제사를 거부하고 그의 다섯 아들이 주동하여 혁명을 일으켰습니다. ‘마카비혁명’입니다. 게릴라식 기습공격으로 결국 3년간의 투쟁 끝에 ‘유다 마카비’가 예루살렘을 장악하고 성전 안의 제우스 신상과 제단을 제거하였습니다. 안티오쿠스 4세 권력을 물리친 것입니다. 
예수님에게도 이런 기대를 했었을 것입니다. 그 때는 다섯 아들과 시작했는데 지금 예수님에게는 12명의 제자가 있고 따르는 수많은 군중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제자들의 기대와는 달리 이상한 심부름을 시키셨습니다. 무슨 심부름을 시키십니까? 2절을 보십시오. 맞은 편 마을로 가라는 것입니다. 예루살렘에 올라가 대통령 인수 위원으로 활동하라는 것이 아니라 생각지도 않은 맞은 편 마을로 가라는 것입니다. 거기에 들어갔을 때 그들은 곧 아무도 타 보지 않은 어린 나귀를 발견할 것이라는 것입니다. 전쟁을 위해서는 말이 필요합니다. 개선장군이 탈 품위에 맞는 백말이 필요합니다. 대통령이 되었는데 청와대 들어가면서 티코를 타고 가는 격입니다. 격에 맞지 않은 대관식을 하는 것입니다. 제자들은 이해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미래에 되어 질 일을 훤히 알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그 나귀를 보면 풀어 끌고 오라는 것입니다. 

참으로 인간적으로 볼 때 황당한 지시입니다. 예수님이 절도 사주를 하시는 것입니다. 이제까지 보신 인격과 다른 것입니다. 이해할 수 없는 지시입니다. 절도죄로 걸리면 감옥에 가야 합니다. 변상을 해 주어야 합니다. 예수님이 예루살렘에 올라가 왕이 되면 출세할 것으로 생각했는데 출세는커녕 감옥에 가야 할 신세가 된 것입니다. 

예수님은 의문을 가진 그들의 마음을 아시고 다시 말씀하십니다. 
3절을 보십시오. 뭐라고 말씀하십니까? 누가 왜 이리 하느냐? 물어 보며 무엇이라고 말하라고 하십니까? “주가 쓰시겠다.”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마태 복음의 기록에 의하면 “주께서 쓸 것이며 곧(지체없이) 다시 여기로 돌려보내리라”라고 말해라는 것입니다. 절도 해오라는 것이 아닙니다. 주인의 허락을 받고 가져 오라는 것입니다. 

이 나귀를 쓰시는 분은 주라는 것입니다. 예수께서 자신은 “주”(쿠리오스)라는 칭호를 사용하시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세상 그 무엇이든지 쓰실 수 있는 만왕의 왕이라는 것입니다. 당시 한 국가의 왕도 얼마든지 자신의 마음대로 필요에 따라 사용하였습니다. 만왕의 왕, 만주의 주께서 쓰신다는데 누가 거절하겠냐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주인으로 인정하느냐 인정하지 않느냐의 문제이지 예수님을 주님으로 인정만 한다면 그 무엇이든 내어 주실 것이라는 것입니다. 

주님께 쓰임받는 것이 중요합니다. 제자들도 주님께 쓰임받고 나귀 주인도 나귀도 주님께 쓰임받는 것입니다. 왜 이렇게 쓰시는 지 이해가 되지 않은 수 있습니다. 상식에 맞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비이성적이고 비상식적이라고 항의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쓰시는 사람이 중요합니다. 물건의 가치는 쓰는 분에 따라 다른 것입니다. 똑같은 피아노지만 베토벤이 쓰는 것가 제가 쓰는 것은 천지 차이입니다. 똑같은 칼이지만 도둑이 쓰냐 의사가 쓰냐에 따라 엄청난 차이가 납니다. 같은 병이지만 그 속에 무엇이 담기느냐에 따라 가치가 달라집니다. 나귀 새끼가 주님께 쓰임받지 못했다면 성경에 기록되어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입에 오르내리며 교훈을 주겠습니까?

시골의 초라한 나귀새끼도 왕의 입성을 위해 쓰신 예수님, 오늘 우리 주님께서는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 우리를 쓰시길 원하십니다. 살인하고 도망간 모세, 목동으로 가지고 있던 지팡이 하나님이 쓰셨습니다. 우상 숭배의 가정에서 태어난 아브라함, 하나님이 쓰셨기 때문에 그가 믿음의 조상이 된 것입니다. 살인 방조자 바울, 하나님이 쓰셨기 때문에 1세기를 변화시키는 주인공이 된 것입니다. 다윗의 물맷돌 하나님이 쓰시니까 골리앗을 무너뜨렸습니다. 하나님이 오른손 불능자 왼손잡이 에훗도 쓰십니다. 당시 물건처럼 취급당하는 드보라도 사용하십니다. 겁쟁이 기드온, 사기꾼 야곱, 배반자 베드로도 하나님은 사용하셨습니다. 쓰시겠다고 할 때 주제권을 인정하고 순종하면 됩니다. 발명왕 에디슨은 어릴 적에는 "열등아"였습니다. 초등학교를 3개월 다니다가 그만 두었습니다. 집이 가난하여 12살 때는 기차간에서 신문팔이도 했습니다. `전쟁와 평화'의 저자인 톨스토이는 대학에서 계속 낙제점수를 받았습니다. 증기기관을 발명하여 산업혁명의 계기를 만든 J 와트도 "얼간이"로 낙인 찍혀 아이들로부터 놀림을 당했습니다. 사과나무에서 떨어지는 열매를 보고 만유인력의 법칙"을 발견, 근대 물리학을 개척한 영국의 대과학자 뉴턴도 초등 학교시절에는 "낙제생"이었습니다. 토마스 에디슨은 귀머거리가 되어서도 축음기를 만들었습니다. 존 밀턴은 완전히 실명된 상태에서'실낙원'이란 불후의 명작을 남겼습니다. 순종하면 됩니다. 맡기면 됩니다. 오늘도 우리 하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내가 너를 사용하겠다.” 

“야곱아 너를 창조하신 여호와께서 이제 말씀하시느니라 이스라엘아 너를 조성하신 자가 이제 말씀하시느니라 너는 두려워 말라 내가 너를 구속하였고 내가 너를 지명하여 불렀나니 너는 내 것이라 (사 43:1)”


2. 쓰임에 순종함

제자들은 이 말을 듣고 어떻게 합니까? 망설이지 않았습니다. 더 이상 이유를 묻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의 권위를 인정하고 예수님의 지시에 순종하였습니다. 자신들의 목적, 그 목적을 성취하는 방법이 전혀 다를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주님의 권위를 인정하고 순종하는 것입니다. 주님을 따르면서 그동안 수많은 경험을 하였습니다. 미래는 자신들의 계획이나 현제의 조건이 아니라 예수님의 권위를 인정하고 순종으로 보다 좋은 결과가 온다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오병이어를 체험한 사람들입니다. 주님이 쓰실 때 어떤 결과나 나타나는가를 똑똑히 본 사람들입니다. 가나 혼인 잔치를 통해 종들을 주님이 쓰실 때 주변 사람들에게 어떤 결과를 가져오게 한 것인가를 본 사람들입니다. 폭풍을 잔잔케 하신 예수님의 능력을 체험한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예수님 말씀에 무조건 따랐습니다. 예수님의 말씀대로 가 보니 예수님의 말씀대도 상황이 전개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미래를 원히 보고 있는 것입니다. 놀라지 않을 수 없습니다. 예수님의 신성을 이해했을 것입니다. 어디에 무엇이 존재한다는 것을 이미 알고 계신 예수님의 능력을 보고 놀랬을 것입니다. 

그러나 아직 흠이 없고 깨끗한 나귀처럼 예수님이 유월절 제물이 되기 위하여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시고 있다는 사실은 이해하지 못했습니다(민19:2; 신21:3). 하나님께서 처녀의 몸에서 태어나게 하시고 아무도 사용하지 않은 무덤에 장사하게 하신 것처럼 아무도 타지 않은 나귀를 타고 예루살렘에 입성하고자 하는 의도를 알 수 없었을 것입니다. 그들은 아직도 예수님의 예루살렘 입성이 우연이 아니라 구속사의 계획에 따라 처음부터 치밀하게 계획된 것을 질서 정연하게 수행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전지하시다는 한 가지만으로도 제자들은 순종할 수 밖에 없었을 것입니다. 우리가 만약 5분 전만 알고 있다면 세계를 지배할 수 있을 것입니다. 예수님은 전지하신 분이셨습니다. 제자들을 놀라지 않을 수가 없었을 것입니다. 

나귀 새끼가 문 앞 거리에 매여 있었습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신대로 그대로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어떻게 합니까? 4절 보십시오. 제자들이 그것을 풀었습니다. 이 때 한 사람이 말합니다. “나귀 새끼를 풀어 무엇하려느냐?”고 물어 봅니다. 점잖게 말하는 것을 보면 상당한 인격이 있으신 분 같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부자인 것 같습니다. 나귀가 많아 한 마리에 큰 비중은 두고 있지 않은 듯합니다. 제자들은 예수님께서 말씀하신대로 “주가 쓰시겠다”고 했습니다. 그말을 듣고 주인이 어떻게 반응합니까? 그 때 그가 가져가라고 허락을 합니다. 그 나귀 주인도 주님의 말씀 앞에 순종합니다. 

아마 이 나귀의 주인은 이미 예수님에 대하여 아셨을 것입니다. 이웃 동네에서 나사로를 살리시고 문둥병 환자를 고치신 일을 다 알고 있었을 것입니다. 주님에 대한 믿음이 있는 것입니다. 이름 없는 이 사람은 영광스럽게도 자신의 나귀를 내어 줌으로 주님의 영광스러운 예루살렘 입성에 참여한 사람이 되었습니다. 우리 하나님은 순종하는 자를 사용하십니다. 
하나님이 주신 축복의 땅, 미래의 축복은 순종함으로 차지하라는 것입니다.

성경은 말씀합니다.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지식의 근본이어늘 미련한 자는 지혜와 훈계를 멸시하느니라 (잠 1:7)" 진정 행복하려면 하나님의 말씀을 알아야 합니다. "내가 오늘날 네 행복을 위하여 네게 명하는 여호와의 명령과 규례를 지킬 것이 아니냐 (신10:13)" 우리가 약국에 가면 약 처방전을 줍니다. 그 약을 줄 때 왜 처방전을 주겠습니까? 병을 낳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그런데 그것을 무시하고 약을 먹으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효과가 없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 인생을 건강하게 하고 행복하게 하는 미래를 보장하는 처방전입니다. 어떤 상황에서도 말씀에 순종하면 그곳이 약속의 땅 축복의 땅 젓과 꿀이 흐르는 땅이 될 수 있습니다. 

로이드 존즈 목사님은 3종류의 가짜교인을 말하였습니다.
(1)말씀을 듣지않는 교인-교회에 와서 설교들 듣기는 듣지만 다른 생각을 하고 있는 교인
(2)말씀을 그대로 받아들이지 않는 교인-말씀을 자기의 필요에 따라 선택적으로 받아들이는 교인
(3)말씀을 듣고 인격과 생활이 변하지 않는 교인-말씀을 듣기는 듣지만 인격의 변화가 없는 교인.

예수님은 말씀합니다. "너희가 이것을 알고 행하면 복이 있으리라 (요 13:17)"
"예수께서 가라사대 오히려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지키는 자가 복이 있느니라 하시니라 (눅 11:28)" 

성경은 말씀합니다. "순종이 제사보다 낫고 듣는 것이 수양의 기름보다 나으니 이는 거역하는 것은 사술의 죄와 같고 완고한 것은 사신 우상에게 절하는 죄와 같음이라"(삼상15:22-23). 

우리가 쓰임받는 길은 다른 것이 없습니다. 주님이 쓰시겠다고 하면 그저 이성과 경험에 맞지 않다하더라도 순종하는 것입니다. 손해 보는 것같아내 내어 드리는 것입니다. 나의 재능, 나의 시간, 나의 소유 주님께 내어드리면 그것으로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 풍성한 삶이 더욱 넘치는 것입니다. 


3. 가치있는 쓰임

제자들이 나귀를 끌고 와서 나귀 안장이 없으니까 안장 대신에 자기들의 겉옷을 벗어 그 위에 걸쳐 두었습니다. 존경과 복종을 다짐하는 표현입니다. 개선 장군이 들어 올 때 경의를 표현하는 것입니다. 제자들을 메시아 왕국 건설에 대한 기대를 가지고 그렇게 했을 것입니다. 이 때 예수님께서 그 어린 나귀를 타셨습니다. 예루살렘에 입성하시기 위해 그 나귀를 타신 것입니다. 제자들은 생각했을 것입니다. 왕이라면 적어도 백마는 타야 하는 것입니다. 개선장군으로 입성할 때 얼마나 화려하게 입성합니까? 신분에 맞는 행사를 해야 합니다. 신분에 맞는 차를 타고 갈 때 사람들이 대우를 해 줍니다. 예수님이 나귀를 타고 입성하신다면 메시아로서 기대를 가졌던 사람들은 예수님에 대하여 비아냥거릴 것입니다. 어떤 사람처럼 속으로 “코미디, 코미디”하고 조소를 보낼 수도 있습니다. 쓰시는 방법에 대하여 불만을 가질 수 있습니다. 품위에 맞지 않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런대도 예수님은 왜 나귀 새끼를 타고 입성하십니까? 말이 없으면 그냥 걸어가도 될 텐데 말입니다.

성경을 보십시오. 그 이유를 말씀해 주시고 있습니다. 스가랴서 9장 9절을 보십시오.
예수님이 예루살렘에 입성하시기 520년 전에 메시아의 오심에 대하여 스가랴 선지자는 예언해 놓았습니다. 

"시온의 딸아 크게 기뻐할지어다 예루살렘의 딸아 즐거이 부를지어다. 보라 네 왕이 네게 임하나니 그는 공의로우며 구원을 베풀며 겸손하셔서 나귀를 타나니 나귀의 작은 것 곧 나귀 새끼니라."

왜 예수님이 나귀 새끼를 타야만 했는지를 정확하게 예언해 놓고 있습니다. 메시아로서 예언을 성취하시기 위해서입니다. 평화와 순결성을 상징하는 나귀를 통하여 메시아가 어떤 분일것이라는 것을 알려 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보내시는 메시아는 정치적 메시아가 아니라 인류를 죄와 죽음의 문제로부터 구속하시는 메시아로 오신 것입니다. 스가랴서를 통해 예언해 주신 왕이 바로 예수님이시라는 사실을 알려 주시기 위해서입니다. 

바로 밑의 10을 보십시오. 나귀 타시는 왕이 무엇을 합니까?
"내가 에브라임의 병거와 예루살렘의 말을 끊겠고 전쟁하는 활도 끊으리니 그가 이방 사람에게 화평을 전할 것이요 그의 정권은 바다에서 바다까지 이르고 유브라데 강에서 땅 끝까지 이르리라"

전쟁의 왕이 아니라 평화의 왕이시라는 말씀입니다. 이 땅에 평화를 주시기 위해 왔습니다. 

그래서 마태는 이 사실을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는 선지자로 하신 말씀을 이루려 하심이라 일렀으되 시온 딸에게 이르기를 네 왕이 네게 임하나니 그는 겸손하여 나귀, 곧 멍에 메는 짐승의 새끼를 탔도다 하라 하였느니라 (마 21:4-5)”

제자들과 사람들은 예수님께서 가장 강성했던 다윗의 나라를 재건할 정치적 메시아로 본 것입니다. 이스라엘을 정치적으로 해방하고 모든 불의한 권력을 제거시킬 의로운 왕으로 본 것입니다. 그래서 제자들이 서로 자리 싸움을 한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유월절 어린양이 되어 십자가를 지고 인류를 구속하실 공의의 왕, 평화의 왕, 겸손의 왕으로 오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왕이시지만 힘을 남용하는 불의와 왕이 아닙니다. 권세를 가졌지만 그 권세로 억압하는 것이 아니라 죄와 죽음을 물리치고 부활로 생명을 구원하는 왕이십니다. 능력의 왕이지만 그 능력으로 교만한 것이 아니라 섬김과 죽음으로 하나님의 뜻을 성취한 겸손의 왕이십니다. 

예수님을 나에게 있어서 누구라고 생각하십니까?
나귀 탄 초라한 왕입니까? 백마 타고 내 필요를 다 채워주는 정치적 왕입니까? 아니면 진정 메시아, 나의 주, 나의 하나님이십니까?

성경은 말씀합니다.
“오직 이것을 기록함은 너희로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믿게 하려 함이요 또 너희로 믿고 그 이름을 힘입어 생명을 얻게 하려 함이니라 (요 20:31)”

나귀 타신 예수님은 우리 성도님과 저의 주인이십니다. 메시아 이십니다. 그 분이 어떻게 쓰시든지 만왕의 왕 예수께서 쓰시는 것이 가장 가치 있는 쓰임입니다. 구속사를 위해 쓰임받는 것보다 가치 있는 인생이 어디 있겠습니까? 
“예수 우리 왕이여 이 곳에 오소서. 보좌로 주여 임하사 찬양을 받아주소서. 주님을 찬양하오니 주님을 경-배하오니. 왕이신 예수여 오셔서 좌정하사 다스리소서”


4. 변질된 것도 쓰시는 주님-주님의 재활용

나귀를 타고 입성하시는 예수님을 보고 사람들은 어떻게 반응하였습니까?
8절 이하를 같이 읽어 보겠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자기 겉옷을 카펫으로 깔았습니다. 예루살렘 성에서 나온 무리도 있었을 것입니다. 베다니에서부터 예수님을 따르던 많은 무리도 있었을 것입니다. 이들은 예수님께서 로마의 압제와 권력자들의 폭정에서 구해낼 메시아로 생각하고 최대의 경의를 표하는 것입니다. 왕의 행차를 위해서입니다. 밭에 벤 나뭇가지를 길에 깔았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종려 나무 가지를, 어떤 사람들은 밭에서 베어낸 잎사귀 많이 달리 나무 가지를, 어떤 사람들은 들에 있는 나무 순을 깔았습니다. 왕의 입성을 환영하는 카펫을 깔아 놓은 것입니다. 일부 군중들이 왕으로 맞이하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흥분하였습니다. 뒤에서 따르는 자들은 소리지르며 “호산나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여”라고 노래 불렀습니다. “호산나”라는 말은 “구하소서”라는 말입니다. 

10절 보십시오. “ 찬송하리로다 오는 우리 조상 다윗의 나라여 가장 높은 곳에 호산나”라고 외쳤습니다. 장차 다윗 가문에서 나타날 ‘메시아’를 기다리며 빨리 임하기를 기원하는 말입니다. 예수님께서 로마의 외세를 몰아내고 이스라엘의 영광을 회복할 제 2의 다윗 왕으로 환대하고 그 나라가 번영할 것을 기대하는 것입니다. “가장 높은 곳에 호산나”라고 외침으로 그들의 간절성을 표현합니다. “하나님이여 이 땅에 다윗 왕국을 회복하여 하나님의 구원과 영광의 축복이 나타나게 하소서.”라고 외치는 것입니다. 

누가복음에 보면 19장 38절에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왕이여 하늘에는 평화요 가장 높은 곳에는 영광이로다”라고 외칩니다. 이것이 예수님이 지상 생애에서 마지막 받는 환대입니다. 환호하는 이런 무리를 보고 예수님은 감정이 무척 상승될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이번 기회에 로마 정권을 물리쳐 버리고 헤롯 왕가를 제거하고 진정 민중을 위한 정치를 해 보겠다는 생각도 들 수 있습니다. 누가 이정도 환호해 주면 얼마나 살맛나게 신나게 일하겠습니까? 그런데 이 때 바린새인들이 예수님께 말합니다. “당신의 제자들을 책망하라”는 것입니다. 비유가 상한다는 것입니다. 꼴을 볼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 때 예수님은 “만일 이 사람들이 잠잠하면 돌들이 소리지를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예루살렘 성을 보시고 우시는 것입니다. 때가 되면 원수들이 예루살렘을 멸망시키고 돌 하나도 돌 위에 남지 않은 날이 올 것을 보고 슬퍼하시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세상에 이루어질 메시야 왕국을 보며 환호하지만 예수님은 멸망될 세상을 보며 눈물을 흘리신 것입니다. 사람들은 예수님이 예루살렘에서 왕이 되면 살기 좋은 새로운 세상이 올 것으로 기대했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앞으로 디도 장군에게 망해 버릴 예루살렘을 바라보고 애통해 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세상 나라의 회복을 기대하고 환호했던 이들은 자신들의 욕구가 충족되지 않으니까 어떻게 했습니까? 환호하던 입술이 바뀌어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막으라” 외쳤습니다(막15:13). 

인간이란 바로 이런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 예수님은 죽을 수 밖에 없은 인간을 불쌍히 여기며 눈물 흘리시는 분이십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 달리시면서까지 “아버지여 저희를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의 하는 것을 알지 못합니다.”라고 기도하신 분이십니다. 

옷을 벗어 정치적 메시아를 기대하며 환호했던 제자들은 어떻게 합니까? 다 배반하고 도망을 가버립니다. 베드로는 부인하고 저주까지 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어떻게 합니까? 그들을 찾아가 용서해 주시고 사명을 부여해 주십니다.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이 사람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

베드로가 말합니다. “주여 그러하외다 내가 주를 사랑하는 줄 주께서 아시나이다” 예수님 말씀합니다. “내 어린 양을 먹이라, 내 양을 치라. 내 양을 먹이라” 말씀합니다. 

제자들을 다 모아 놓고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내게 주셨으니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하시니라 (마 28:18-20)” 

이들이 변화되어 죽음의 순간에도 예수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부활을 증거하며 복음을 전하여 세상을 바꾸었습니다. 
사람의 감정이라는 것은 쉽게 변해 버립니다. 그러나 그리스도가 메시아라는 것은 감정의 문제가 아니고 역사적 사실입니다. 우리 예수님은 영원히 변치 않으시고 우리를 초청해주시고 용서해 주시고 위로해 주시고 사명을 주십니다. 

“이 세상의 친구들 나를 버려도 나를 사랑하는 이 예수뿐일세 예수 내 친구 날 버리쟎네 온 천지는 변해도 날 버리지 않네 (449장 1절)
검은 구름 덮이고 광풍 일어도 예수 나의 힘 되니 겁낼 것 없네 예수 내 친구 날 버리쟎네 온 천지는 변해도 날 버리지 않네 (449장 2절)
괴로운 일 당해도 낙심 말아라 영원한 주 능력이 붙드시겠네 예수 내 친구 날 버리쟎네 온 천지는 변해도 날 버리지 않네 (449장 3절)”

진정 주님이 원하시는 나라가 무엇일까요? 진정 주님이 원하시는 교회, 진정 주님이 원하시는 가정, 진정 주님이 원하시는 직장이 무엇일까요? 모든 부정 부패가 살아지고 힘으로 통치하여 정의와 공정한 분배가 실현되는 나라일까요? 아닙니다. 죄와 허물로 죽을 수 밖에 없는 인간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메시아로 모시고 죄 용서함받고 영원한 죽음에서 벗어나 천국 백성 되어 하나님의 통치를 받는 나라입니다. 

오늘도 우리를 부르십니다. 이일에 쓰시길 원하십니다. 주가 쓰시겠다고 말씀하십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진정 주님으로 모시고 하나님 나라를 이루는데 순종함으로 이루어드리는 신앙인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김필곤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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