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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시기와 질투에서 승리하려면 (삼상 18:6~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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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기와 질투에서 승리하려면 (삼상 18:6~17)

옛날 우화책에 재미있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한 농부가 염소와 나귀를 기르고 있었습니다. 주인은 무거운 짐을 묵묵히 잘 나르는 나귀를 매우 사랑했습니다. 염소는 주인의 이런 태도가 못마땅했습니다. 염소는 시기와 질투를 느껴 나귀를 해칠 계략을 꾸몄습니다. 

“나귀야, 너처럼 불쌍한 동물도 없을 거야. 주인은 네게 힘든 일만 시키니 이런 억울한 일이 어디 있겠니. 내가 한 가지 좋은 꾀를 가르쳐주지” 

염소는 나귀의 귀에 속삭였습니다. “짐을 싣고 개울을 건널 때 자꾸 넘어지렴. 그러면 주인은 네 몸이 쇠약한 줄 알고 다시는 힘든 일을 시키지 않을 거야” 순진한 나귀는 개울을 건널 때 일부러 계속 넘어졌습니다. 주인은 평소 건강하던 나귀가 넘어지는 것을 보고 깜짝 놀라서 수의사를 데려왔습니다. 검진을 한 의사 말했습니다. “나귀의 기력이 약해졌으니 염소의 간을 먹이면 금방 낫습니다.” 하고 일러주었습니다. 주인은 그 즉시 염소를 잡아 나귀에게 먹였답니다. 

성도 여러분! 

시기와 질투는 부메랑과 같은 것입니다. 결국 그 피해가 내게로 돌아오는 것이란 말입니다. 시기 질투의 최대의 피해자는 남이 아니라 항상 자신임을 알아야 합니다. 

이 시기질투는 어디서 나는 것일까요? 

이것은 죄로 말미암아 타락한 우리 속에 흔히 발견되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죄의 결과이기도 하지만 마귀의 선물이기도 합니다. 

예나 지금이나 교회 안에서 암처럼 자라고 있는 무서운 질병이 몇가지 있습니다. 

그중에 하나가 마귀가 가져다 준 “시기 질투”입니다. 이 시기질투의 영에 사로잡히면 대상이 누구든 상관없이 공격합니다. 그래서 다른 지체를 죽입니다. 

암세포는 어떤 세포인가요? 다른 세포가 영양분을 섭취하는 것을 두고 보지 못하여 모든 영양분을 다 빼앗아 먹고 비정상적으로 큽니다. 그러다가 결국은 자기가 붙어사는 모체를 죽입니다. 결국 자기도 죽는 것입니다. 

교회 안에 그런 무서운 사람들이 종종 있습니다. 우리교회는 없고요. 다른 교회에... 믿음 안에 있는 다른 지체를 사랑하고 섬기고 격려해야 하는데, 오히려 다른 지체의 선행과 봉사를 막습니다. 비판합니다. 그리고는 무차별 공격을 합니다. 

이유는 그럴듯합니다. “남들을 생각해야 한다.” “못하는 사람을 생각하라” 하며 말합니다. 그러나 실상은 자기가 못하기에 배가 아픕니다. 그리고는 남들이 열심히 하려는 것을 두고 보질 못합니다. 이런 것이 마귀의 계략에 결려 시기 질투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그 시기질투의 결과가 교회 성장을 막게 됩니다. 결과는 자기에게 복이 되지 못하는 것을 모르고 있습니다. 마치 암세포가 무한 성장하면 결국 자기 몸을 죽이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잠언14:30에 ‘마음의 화평은 육신의 생명이나 시기는 뼈의 썩음이니라’했습니다. 뼈가 썩으면 병드는 것입니다. 참으로 무서운 것입니다. 그러기에 이런 시기질투를 버려야 합니다. 마음 깊숙한 곳에서 순간순간 일어나는 시기와 질투, 이것이 얼마나 추악하고 무서운 것인지 깨닫기를 축원합니다. 

옛날에는 칠거지악이라는 것이 있었습니다. ① 시부모에게 순종하지 않는 것, ② 자식을 낳지 못하는 것 ③ 음탕한 것 ④ 질투하는 것 ⑤ 나쁜 질병이 있는 것 ⑥ 수다스러운 것 ⑦ 도둑질하는 것 등이 그 것입니다. 여자에게 이 7가지 중 하나로도 있으면 쫓아 낼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질투’라는 것이 포함됩니다. 과거 여인들은 참 모진 시대에 여인들이 살았습니다. 사랑하는 남편이 딴 여자를 사랑하는 것을 어찌 그냥 넘기란 말입니까? 

여성성도 여러분! 

참 좋은 세상에 태어난 것을 감사하시기 바랍니다. 하기야 ‘男尊女卑(남존여비)’라는 단어가 뜻이 바뀌었답니다. 남자를 존귀하게 여기고 여자를 천하게 여기는 것이 남존여비란 뜻이잖습니까? 이것을 새롭게 해석하면 이런 것이랍니다. 

남존여비란 “남자가 존재하는 한 여자는 비참하다.” 라는 뜻이랍니다. 

그런데 요즘은 바뀌었답니다. “남자가 존재하려면 여자에게 비벼야 산다.”는 뜻이랍니다. 하여간 여자의 사랑의 질투는 오뉴월에 서리가 내린다고 할 만큼 무서운 것인데 오늘 본문이 말하는 것은 그것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교회 공동체 안에서 성도에게 시기 질투는 독입니다. 이것이 저와 여러분 속에 들어오면 무서운 현상들이 나타납니다. 시기질투가 내속에 들어오면 어떤 현상이 벌어지나요? 

오늘 봉독한 하나님 말씀을 보세요. 그토록 멋있고 용감하고 겸손하고 훌륭한 왕이었던 사울 왕이 허물어지는 모습을 보게 됩니다. 그가 이토록 처참하게 무너졌던 것은 무엇 때문일까요? 바로 시기질투 때문입니다. 

시기질투에 사로잡힌 사울, 그에게서 어떤 현상이 보입니까?  


1. 하나님을 잊어버리고 사람을 의식하게 됩니다. 

사울이 왜 이토록 질투하게 된 것입니까? 그 원인이 무엇입니까? 
블레셋과의 전투에서 다윗이 골리앗을 이겼습니다. 사울은 두려워 벌벌 떨었는데 어린 소년 다윗은 당당하게 승리했습니다. 그가 전쟁터에서 돌아올 때 여인들이 길거리에서 춤을 추며 노래를 합니다. 

♬“사울의 죽인 자는 천천이요. 다윗은 만만이로다” 

그런데 문제는 그 소리를 사울이 들었습니다. 

8절과 9절을 다같이 봅시다. 

8 사울이 이 말에 불쾌하여 심히 노하여 가로되 다윗에게는 만만을 돌리고 내게는 천천만 돌리니 그의 더 얻을 것이 나라 밖에 무엇이냐 하고 9 그 날 후로 사울이 다윗을 주목하였더라 

이말을 들은 사울 왕은 불쾌했습니다. 심히 노했습니다. 단단히 화가 났습니다. 

그리고는 이제는 나라도 빼앗길 것이라는 불길한 마음이 들었습니다. 그날부터 사울은 다윗을 주목했다고 했습니다. 질투가 가득한 눈으로 의심스러운 눈치로 쳐다  보았다는 것입니다. 왜요? 사람들의 다윗칭찬, 사람들의 평가, 이것만 보았습니다. 

하나님은 잊어버리고 사람만 생각합니다. 무엇 때문일까요? 

1) 열등감입니다.  

이것이 문제입니다. 내가 남보다 낫거나 우월하면 절대로 이런 맘은 안 생깁니다. 그런데 내가 남보다 열등하다는 생각이 들면 나도 모르게 내속으로 파고드는 것이 시기 질투입니다. 그런데 사람이기에 시기 질투가 전혀 안 생길 수는 없지요. 그러나 내가 이 시기질투를 이기지 못하면 내가 무너집니다. 

그렇게 되지 않으려면 열등감을 벗어버려야 합니다. 오히려 훌륭한 신하를 둔 것을 기뻐하고 축하하고 격려하고 그를 중용하면 더 큰사람이 되는 것인데 그것이 안 된 것입니다. 왜요? 그 열등감을 사단이 노린 것입니다. 그 불쾌한 마음, 화가 난 그 마음속에 파고 든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남들이 여러분보다 훌륭한 일을 합니까? 기뻐하세요. 축하하세요. 그리고 진심으로 격려 해주세요. 그러면 하나님이 여러분의 마음을 받아 주시고 더 큰 사람으로 세워주십니다. 

저는 애굽왕 바로, 그리고 바벨론 왕 느브갓네살 왕, 그리고 다리오 왕이 참 훌륭해 보입니다. 하기야 그러기에 대 제국의 왕이 되었겠지요. 

애굽의 노예로 끌려간 요셉이 당대 최고의 권력자인 바로왕의 꿈을 다 해몽합니다. 그 꿈을 통해 장차 닥칠 환난을 해결할 지혜를 듣습니다. 그때 바로왕은 그를 총리로 삼습니다.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만약 오늘 사울처럼 시기 질투가 생겼다면 죽였을 것입니다. 바벨론 왕과 파사 왕 다리오도 마찬가집니다. 다니엘의 그 지혜와 능력을 높이 사서 중직에 중용합니다. 어떻게요? 시기 질투를 갖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여러분도 남들이 내가 못하는 믿음의 행위를 하고, 봉사를 하고, 하나님이 기뻐하는 일을 하면 진심으로 기뻐하고 축복해야 합니다. 그리고 그를 더 사랑하고 가까이 해야 합니다. 만약 그렇지 못하고 열등의식에 사로 잡혀 시기질투하게 되면 내영이 무너집니다. 내속에 평안이 사라지고 두려움이 임합니다. 그러면 나도 모르는 사이에 내가 무너져 내립니다.  


2) 은혜를 망각하기 때문입니다. 

사울이 이 지경이 된 이유는 하나님이 주신 은혜를 망각한 것입니다. 사울이 과거 어떻게 승리했습니까? 하나님의 은혜로 승리했습니다. 그런데 그 은혜를 잊고 자기 힘으로 승리한 것처럼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교만이 들어오기 시작한 것입니다. 

왜 골리앗과 전쟁에서 다윗을 보내 주었습니까? 

하나님의 은혜로 사울에게 승리를 주시기 위해서입니다. 그런데 그는 그 하나님의 은혜는 생각지 않습니다. 오로지 자기 이익과 명예만 생각합니다. 그러니 기분 나빴던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하나님이 여러분에게 베풀어 주신 은혜를 되새기시기를 축원합니다. 오로지 은혜입니다. 내가 잘나서 된 것이 없습니다. 감사할 것밖에 없습니다. 

사울이 왕이 된 것도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골리앗을 다윗을 통해 승리케 하신 것도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그러면 감사해야지요. 기뻐해야지요. 그런데 그 은혜를 잊고 내 명예, 내이익만 생각하니 질투가 쏙 들어온 것입니다. 그러니 기뻐해야 할 일을 불쾌하게 여기게 되고 즐거워해야 할 자리에서 화가 가득한 것입니다. 그러니 그 대단한 왕 사울이 무너지는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우리를 무너트리는 것은 크고 대단한 것이 아닙니다. 우리를 무너트리는 것은 내속에 살며시 들어오는 것입니다. 시기 질투가 그것입니다. 눈에 보이지도 않는 교만입니다. 그러니 깨어 있기를 축원합니다. 

시기질투가 들어오면 


2. 하나님이 붙여주신 동역자가 경쟁자로 여겨집니다. 

시기 질투의 특징이 있습니다. 그것은 먼데 있는 사람, 잘 모르는 사람과는 느끼지 못하는 감정입니다. 그런데 나와 가까운 사람, 동일업종의 사람, 그리고 사랑하는 사람, 나와 친하게 지내는 사람이 잘되면 생기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촌이 땅을 사면 배가 아픈 것입니다. 나보다 못한 친구가 부잣집에 시집가 떵떵거리는 모습을 보면 잠을 못자는 것입니다. 내가 모르는 남의 자식이 좋은 대학 들어가면 배가 안 아픈데 우리 교회 다른 집사 아들이 좋은 대학가면 그것도 대학이냐 하고 비판하게 되는 것입니다. 

저는 지금도 잊지 못합니다. 옛날 우리교회에 계셨던 어떤 성도가 제 처조카가 서울대 농대에 합격하여 들어갔는데 축하 하기는 커녕 “농대도 서울대입니까?” 하면서 비웃기에 충격을 받았습니다. 그래서 그분의 자식들은 공부를 엄청 잘하는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더라고요. 남의 잘됨을 기뻐할 줄 알아야 복이 임합니다. 

사실 저도 고백할 것이 있습니다. 주변의 교회들이 큰 교회 지으면서 부흥하면 은근히 불편합니다. 용서하세요. 기뻐해야 하는데, 축하해야 하는데, 그러지 못하니 그릇이 작은가 봅니다. 그런데 명심할 것은 그들이 하나님의 사람들이고 하나님이 기뻐하는 사람들이고 그리고 하나님의 은혜로 복을 누린 것이란 말입니다. 그러니 내가 기뻐해야 할 동역자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어떻습니까? 동역자로 여겨야 하고 같이 기뻐하고 같이 축하해야 할 우리가 비난하고 배 아파하고 시기질투에 빠져 있다면 그 모습이 오늘 본문의 사울과 다를 바가 무엇입니까? 

사울 왕을 보세요. 다윗이 승리하였으면 기뻐하고 축하하고 해야 할 것 아닙니까? 그런데 왜 화가 났죠? 다윗을 동역자가 아닌 경쟁자로 본 것입니다. 그러니 왕위까지 걱정하게 된 것입니다. 그러니 그때부터 늘 경계하고 두려워하게 되고 불안하게 된 것입니다. 

여러분 옆 사람을 보세요. 그들이 누굽니까? 경쟁자가 아닙니다. 가족입니다. 하나님의 자녀들입니다. 형제자매들입니다. 믿습니까? 

그러면 그들이 잘되고 하나님 앞에서 예쁜 짓하면 축하하고 격려하고 좋아해야 합니다. 정말 진심으로 축하해야 합니다. 왜요? 그가 내가 같은 공동체 식구기 때문입니다. 그와 내가 하나이기 때문입니다.  

옆 사람 손잡으세요. 고백하세요. 
“당신과 나는 동역자입니다. 당신과 나는 하나님 가족입니다. 사랑합니다.” 

아니 그런 일굴 말고요. 진정으로 사랑하는 얼굴로 말하세요. 여러분 자식이 공부 잘하여 좋은 성적 받아 왔습니다. 그러면 정말 기쁘지요? 정말 행복하지요? 왜요? 내 새끼니까... 남편이 승진했어요? 정말 기쁘지요? 왜요? 내 남편이니까. 그렇습니다. 내편입니다. 적이 아닙니다. 경쟁자가 아닙니다. 그러기 생각을 바꾸세요. 그러면 시기질투가 아닌 감사기쁨이 들어옵니다. 

그러나 시기질투가 들어오면 하나님이 복으로 주신 동역자가 경쟁자로 보이고 하나님이 나를 위해 붙여주신 사람이 원수로 보이게 됩니다. 그러면 내가 무너지는 것입니다. 이것을 바꾸세요. 사람을 바라보는 시각을 바꾸세요. 그리고 사랑하세요. 축복하세요. 그러면 복이 임합니다. 

그래서 성경은 원수를 미워하지 말고 축복하고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눅6:27~28을 보세요.  
“27 그러나 너희 듣는 자에게 내가 이르노니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미워하는 자를 선대하며 28 너희를 저주하는 자를 위하여 축복하며 너희를 모욕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 했습니다. 어떻게요? 시각을 바꾸면 그 원수가 복의 통로가 되고 그 원수가 동역자가 되기 때문입니다. 

다윗에게 사울은 원수입니다. 그러나 그는 사울을 죽일 기회가 여러 번 있었음에도 결코 죽이지 않습니다. 왜일까요? 다윗은 그를 원수로 여기질 않았습니다. 하나님이 기름 부어 세운 종입니다. 같은 편입니다. 그러니 대적 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니 그가 아무리 죽이려 해도 도망만 칩니다. 그것이 다윗의 위대한 점입니다. 결국 하나님이 문제를 해결하십니다.   

그래서 로마서12:19절에 
“내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친히 원수를 갚지 말고 진노하심에 맡기라 기록되었으되 원수 갚는 것이 내게 있으니 내가 갚으리라고 주께서 말씀하시니라” 하신 것입니다.  

시기질투가 내게 찾아오면 


3. 정상적인 판단을 못하게 합니다. 

사울은 왕입니다. 그리고 다윗은 아들벌입니다. 실제 자기 아들의 친구입니다. 그리고 왕을 위해, 국가를 위해 자기 목숨 걸고 전쟁이 뛰어 들어 대승을 거두게 한 충성스런 신하입니다. 그런데 그런 신하를 악신이 강하게 임하므로 죽이려 합니다. 시기질투가 가득하니 제정신이 아닌 것입니다. 그래서 다윗을 제거해야 한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딸과 결혼을 시켜서도 죽이려 합니다. 이 얼마나 무서운 일입니까? 

그렇습니다. 사단의 영이 임하면 사람이 자신도 모르게 온전한 판단을 못하게 됩니다. 정상적인 판단이 안 서게 됩니다. 그래서 모든 사람을 적으로 여기게 됩니다. 수단방법을 가리지 않고 죽이려 합니다. 

본문 10~11절을 보세요. 
10 그 이튿날 하나님의 부리신 악신이 사울에게 힘있게 내리매 그가 집 가운데서 야료하는 고로 다윗이 평일과 같이 손으로 수금을 타는데 때에 사울의 손에 창이 있는지라 
11 그가 스스로 이르기를 내가 다윗을 벽에 박으리라 하고 그 창을 던졌으나 다윗이 그 앞에서 두번 피하였더라 

사단의 특징이 이것입니다. 사단은 문제 해결을 죽이는 것으로 해결하려 합니다. 죽이면 다 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수많은 사람을 죽입니다.  

예수님도 당대의 대제사장, 바리새인, 서기관 종교지도자들이 하는 짓이 뭡니까? 예수를 죽일 방도를 찾고 있습니다. 

누가복음 22:2을 보세요.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이 예수를 무슨 방책으로 죽일꼬 연구하니 이는 저희가 백성을 두려워함이더라.”  

사람을 살려야 할 사람입니다. 오히려 사람들이 예수를 죽이려 할 때 보호하고 지켜야할 사람들인데 죽일 방책을 연구합니다. 이것이 사탄에게 넘어간 사람들의 모습니다. 

가롯 유다도 마찬가집니다. 
눅22:3~5절을 보세요. 

3. 열 둘 중에 하나인 가룟인이라 부르는 유다에게 사단이 들어가니 
4.이에 유다가 대제사장들과 군관들에게 가서 예수를 넘겨 줄 방책을 의논하매 
5.저희가 기뻐하여 돈을 주기로 언약하는지라   

사단이 들어가니 정상적인 판단이 어려워집니다. 그런 유다를 결국 돈으로 얽어맵니다. 그러니 인류최대의 비극인이 된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여러분 속에 자신도 모르게 들어와 자리 잡고 있는 시기질투를 주님이름으로 쫓아내시기를 축원합니다. 단순한 시기 질투가 아닙니다. 이 시기 질투가 나를 망하게 합니다. 이 시기 질투가 내게서 하나님을 떠나게 합니다. 결국 하나님이 다윗과 함께 하시게 되자 더욱 다윗을 두려워하게 됩니다. 

하나님만 떠나는 것이 아닙니다. 시기질투가 가득하면 사람들도 내게서 떠납니다. 

여러분 옆에 어떤 사람이 있나요? 시기 질투가 가득하면 서서히 사람들이 떠나게 됩니다. 그리고 지혜도 사라지고 능력도 사라집니다. 결국 자신이 파멸당합니다. 사랑스런 자녀도 망하게 됩니다.  

그러나 걱정 마세요. 성령은 우리 속에 거하십니다. 성령이 이 시기 질투를 억누를 힘이 있습니다. 하나님이 주시는 성령은 사랑으로 이 시기, 질투를 이기게 합니다. 그러면 평안이 임합니다. 이 시간, 주의 성령이 여러분 속에 자리 잡고 있는 모든 시기 질투를 추방하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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