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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기도할 수 있는데 왜 걱정하십니까? (요 16:23~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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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도할 수 있는데 왜 걱정하십니까? (요 16:23~33)

오늘 본문 요한복음 16장 33절은 요절 중의 요절이고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사랑하고, 세상을 살 때 이런 저런 어려운 일에 부디칠 때 마다 이 약속의 말씀에 위로받고 힘을 얻는 유명한 말씀입니다. 이 역사가 여러분의 삶에도 충만하기를 축원합니다.

(33절) “세상에서는 너희가 환란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 

실제로 그렇게 되었습니다. 예수님께서 부활 승천하신 후, 사도들과 성도들을 향하여 감옥에 가두고 죽이는 무서운 핍박이 있었지만, 주저하고 무너지지 않았고 로마가 복음으로 무너지고 전 세계로 복음이 전파되었습니다. 

어디서 그런 힘이 났을까요?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하신 두 가지 약속 때문입니다. 이것은 우리에게도 동일한 것이기 때문에 매우 중요합니다. 우리가 세상을 이길 힘이 어디서 오는가? 첫째는 모든 믿는 자에게 보혜사 성령을 보내 주신다는 것이고, 둘째는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할 때 하나님께서 반드시 그 기도에 응답하시겠다는 것입니다. 

(23절) “...너희가 무엇이든지 아버지께 구하는 것을 내 이름으로 주시리라”

이 두 가지 약속은 사실은 한 가지입니다. 제자들이 하나님 아버지와 직접 교제하며 살게 될 것이라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기도 응답의 약속도 단순히 무엇이든지 기도하면 다 들어주겠다는 말씀이 아닙니다. 그 점을 정확하게 이해해야 예수님이 오늘 말씀하신 것을 정학하게 이해하게 됩니다. 예수님은 그 보다 훨씬 엄청난 것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실제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한다고 다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여러분이 경험하셨지 않습니까?

  하나님께서 우리의 기도를 들어주시기를 원하시지만, 하나님으로서도 도저히 들어줄 수 없는 세 가지 기도가 있다는 말이 있습니다. 첫째는 과식하는 사람들의 위장을 지켜 주시지 못한다. 둘째는 과로하는 사람들의 건강을 지켜 주시지 못한다. 셋째는 과욕을 부리는 사람들의 지갑을 지켜 주시지를 못한다. 

그렇다면 무엇이든지 아버지께 구하는 것을 내 이름으로 주시리라는 약속이 거짓말인가?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기도의 약속은 하나님께서 아버지가 되어주실 것이다, 직접 하나님께 구할 수 있는 관계가 될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25절) 이것을 비유로 너희에게 일렀거니와 때가 이르면 다시는 비유로 너희에게 이르지 않고 아버지에 대한 것을 밝히 이르리라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려는 것은 하나님이 우리 아버지 되심이 얼마나 놀라운 복인가 하는 것입니다. 
이 복이 얼마나 큰 복인지 잘 이해가 안 되실 분이 계실 것입니다. 쉽게 표현하면 하나님께 직통 전화가 연결된 관계라는 말입니다. 

  제 방에는 제가 직접 받는 전화가 따로 한 대가 있습니다. 이 전화는 비서실을 거치지 않고 제가 직접 받는 소위 말하는 직통 전화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 전화 번호는 아무나 알고 있지 않습니다. 가족이나 몇 분만 알고 있습니다. 이 전화 번호로 전화하면 언제든지 저와 직접 통화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전화 번호를 모른다고 속상해 하실 분은 별로 없으실 것입니다. 그런 전화가 있다는 것이지요.

  그러나 이명박 대통령과 직통 전화가 되는 관계라고 하면 어떻겠습니까? 직통 전화가 된다고 대통령이 여러분이 구하는대로 다 들어주지는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대통령과 직통 전화가 되는 것만 가지고도 마음이 얼마나 든든하겠습니까? 
  그렇다면 하나님과 직통 전화가 된다면 어떻겠습니까? 이제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의 의미를 조금이라도 이해할 수 있겠습니까?

하나님께서 직접 들으시는 기도라는 것이 지금 우리에게는 별로 새로운 개념이 아니지만, 예수님께서 이 말씀을 하셨던 당시로서는 엄청난 일이었습니다. 그 때까지만 해도 사람들은 하나님께 직접 나아갈 수 있다고 믿지 못했습니다. 죄 때문입니다. 
하나님께 나아가려면 제사장이 있어야 했고, 하나님의 말씀을 들으려면 선지가가 필요하였습니다.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는 도무지 건널 수 없는 단절이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이제 제자들은 언제나 하나님께 직접 나아가 기도할 수 있게 될 것이라는 것입니다. 
이 약속은 십자가에서 이루어졌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숨을 거두실 때, 성전 지성소를 가려주던 휘장이 위에서 아래로 쫙 갈라졌습니다. 이 휘장은 죄로 인한 하나님과 우리 사이의 단절을 말해 주는 것이었습니다. 그 휘장이 찢어졌다는 말은 이제는 예수님의 이름으로 누구든지 하나님 앞에 나아갈 수 있도록 허락하셨다는 것입니다. 이 복을 이 자리에 있는 우리가 모두 받았습니다. 우리는 하나님께 아버지!하고 나갈 수 있는 담대한 믿음을 가지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때문입니다.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 더 이상 막힘이 없습니다. 주님의 십자가는 언제나 우리를 하나님 앞에 아들과 딸로 세워줍니다. 어떤 일이 있어도 더 이상 하나님과 우리 사이는 가로 막지 못합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아버지기 되시기 때문입니다. 바로 이것이 기도의 복입니다. 우리에게 주신 기도의 약속입니다. 아버지가 아들과 딸의 간구를 듣는 것 처럼 하나님께서 우리의 간구를 들으신다는 것입니다. 이제 직접 하나님께 나가도 됩니다. 이미 우리 안에 성령님으로 오셨고, 예수님의 십자가로 우리 죄가 사함을 받았고 이제 우리는 하나님께 담대히 나갈 수 있습니다. 
그 가장 큰 증거가 성령의 임하심이고 기도의 변화인 것입니다. 

(23절) “그날에는 너희가 아무것도 내게 묻지 아니하리라 너희가 무엇이든지 아버지께 구하는 것을 내 이름으로 주시리라”

(26절) “내가 너희를 위하여 아버지께 구하겠다는 말이 아니니”

예수님께서 제자들과 함께 계실 때만해도 제자들은 무슨 일이 있거나 궁금한 것이 있으면 예수님께 물었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달라졌습니다. 제자들은 누구나 직접 하나님께 기도를 드릴 수 있게 된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을 아버지로 믿고 직접 기도드릴 수 있는 것이야말로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믿는 자가 누리는 가장 큰 복입니다. 

우리가 오늘 본문에서 특별히 주목해야 할 단어는 ‘아버지’ 라는 단어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시는 아버지입니다. 

  경남 산청이 고향인 어떤 분이 집안이 너무나 가난하였는데도. 끼니를 제대로 잇지 못하는 소작농을 하면서도 아버지는 아들을 중학교에 보낼 생각을 하셨고, 결국 아들을 대구로 유학을 보냈습니다. 이 아들은 대구 중학을 다녔는데 공부가 하기 싫었다. 그 결과는 1학년 여름 방학 때 성적표로 나타났다. 1학년 8반. 석차 68/68. 꼴찌를 했다. 부끄러운 성적표를 갖고 고향으로 가는 어린 마음에도 아버지를 생각하면 성적표를 내밀 자신이 없었다. 그냥 있을 수 없었다. 성적표의 석차 기록난을  1/68로 고쳐 아버지에게 보여드렸다. 

아버지와 어머니는 보통학교도 다니지 않았으므로 내가 1등으로 고친 성적표를 알아차리지 못하였다. 참으로 다행한 일이었다. 친지들이 몰려와 ‘찬석이는 공부를 잘했더냐?’고 물었다. 아버지는 ‘앞으로 봐야제. 이번에는 1등을 했는가 배.’ 했다. ‘명순(아버지)이는 자식 하나는 잘 뒀어. 1등을 했으면 책거리를 해야제.’ 했다. 

당시 아버지는 처가살이를 했고, 우리 집은 동네에서 가장 가난한 살림이었다. 이튿날 강에서 멱을 감고 돌아오니, 아버지는 한 마리뿐인 돼지를 잡아 동네 사람을 모아 놓고 잔치를 하고 있었다. 그 돼지는 우리 집 재산 목록 1호였다. 기가 막힌 일이 벌어진 것이다. ‘아부지…’하고 불렀지만 다음 말을 할 수가 없었다. 그리고 달려 나갔다. 뒤에서 나를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겁이 난 나는 강으로 가 죽어 버리고 싶은 마음에서 물 속에서 숨을 안 쉬고 버티기도 했고, 주먹으로 내 머리를 내리치기도 했다. 

  충격적인 그 사건 이후 나는 달라졌다. 항상 그 일이 머리에 떠올랐기 때문이다. 그로부터 17년 후 나는 대학 교수가 되었다. 그리고 나의 아들이 중학교에 입학했을 때. 그러니까 내 나이 45살이 되던 날, 부모님 앞에 33년 전의 일을 뒤늦게 사과하기 위해 ‘어무이.저 중학교 1학년 때 1등은 요…’ 하고 시작하려는데, 옆에서 담배를 피우시던 아버지는 ‘알고 있었다. 그만 해라. 민우(손자)가 듣는다.’고 하셨다. 
자식의 위조한 성적을 알고도 돼지를 잡아 잔치를 하신 부모님 마음을. 박사이고 교수이고 대학 총장인 나는 아직도 감히 물을 수가 없다. 박찬석 전 경북대 총장의 이야기입니다. 

짧지만 얼마나 감동적인 글인지요. 몇 번 읽을 때마다 눈물이 납니다. 못난 자식들을 생각하시는 부모님 마음을 어떻게 다 알 수 있겠습니까? 

육신의 아버지 사랑도 이렇다면, 하나님이 아버지가 된 우리는 얼마나 행복합니까? 그러나 27절에서 우리가 더욱 주목해야 할 단어가 나옵니다. “친히”라는 단어입니다.
“아버지께서 친히 너희를 사랑하심이라”
아버지가 계셔도 아버지와 늘 함께 하는 관계가 아니라면 무슨 힘이 되겠습니까? 그러나 이제 우리는 하나님 아버지의 사랑을 직접 경험하며 살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살전 5:17) “쉬지 말고 기도하라”고 했습니다. 
쉬지 말고 기도하라는 말은 항상 하나님아버지의 손을 붙잡고 살라는 말과 같습니다. 이 기도가 세상을 이길 힘입니다. 하나님의 손을 붙잡고 사는 자에게 두려울 일은 없습니다. 어린 아이라도 아버지 손을 붙잡고 있으면 겁나는 것이 없는 것과 같습니다. 우리도 하나님 아버지의 손을 붙잡고 있는 동안에는 무서울 것이 없습니다. 하나님 아버지의 손을 붙잡고 있는 것만 분명하다면 세상은 더 이상 무섭지 않습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에게 주신 기도의 복입니다. 

그렇다면 여러분은 아버지이신 하나님의 직통 전화를 잘 사용하고 계십니까? 
하나님과의 직통 전화가 고장 난 성도들이 많이 있습니다. “목사님. 기도가 안돼요? 응답이 없어요.” 정말 그렇습니까? 오늘 다 고치시기를 축원합니다. 그러나 수리해 보면 잘 되는데, 기도의 약속을 잘못 이해하여 기도의 복을 누리지 못하는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기도의 약속은 구하는 대로 다 이루어주신다는 말이 아닙니다. 
자기가 원하는대로 안 해 준다고 떼를 쓰다가 화가 난 채 울면서 잠든 아이가 있다고 합시다. 그 아이는 화가 나서 잠이 들었지만 행복한 것입니다. 그렇게 떼를 쓸 수 있는 아버지와 함께 있기 때문입니다. 아버지는 그 아이 얼굴을 보면서 마음으로 ‘나는 네게 정말 소중한 것을 해 줄게.’ 할 것입니다. 
어린 아이가 아버지에게 “아빠, 이렇게 해 주세요. 저렇게 해 주세요.” 하면 다 응답 받습니다. “안된다.”는 말을 들어도, 응답은 받은 것입니다. 

응답이 없다는 것은 아버지 사진 앞에서 부탁하는 경우를 말하는 것입니다. 아버지 사진에 아무리 기도한들 무슨 소용이 있느냐 말입니다. 부탁한대로 되고 안 되고를 떠나서 응답 자체가 없습니다. 오늘 여기에 계신 분 중에 한 분도 그렇게 밖에는 기도할 수 없는 분이 없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로 인해서 담대하게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고 나갈 수 있고 그러면 아버지께서는 여러분이 하는 기도를 들으십니다.
물론 여러분이 구하는대로 다해 주지 않으실 때도 있지만 아버지께서 안된다고 하는 응답도 주십니다. 안된다는 응답도 큰 응답입니다. 정말 기도의 복은 내가 구한대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내 모든 삶의 문제 속에 나와 함께 계시는 것입니다. 

  한 번은 중국 천진에 있는 한인 교회에 부흥회를 인도하러 간 적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제 실수로 인하여 월요일 저녁부터 집회가 시작되어야 하는데, 이틀 뒤 수요일 저녁부터 시작할 수 있었습니다. 월요일 인천 공항에 가서야 제 비자가 문제가 있음을 알았던 것입니다. 저는 공항 청사에서 하나님께 정말 간절히 기도했습니다. “하나님, 어떻게 해서든지 오늘 저녁집회를 인도할 수 있도록 역사해 주시기 바랍니다.” 그러나 결국 가지 못하였습니다. 기도한대로 되지 못한 것을 보면 응답받지 못한 것이지요. 나중에 알고 보니 중국 현지 교회에서는 2개월 전부터 집회를 위하여 정말 간절히 기도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니 중국 현지 교회 성도들의 낙심은 어떠했겠습니까? 

  저는 중국에 전화를 해서 집회를 연기하고 공항에서 무거운 마음으로 기도하는데, 중국 집회를 위하여 진정한 기도 준비가 없었음을 깊이 깨달았습니다. 제가 외부 집회에 대하여 교회와 교인들에게 미안한 마음으로 부담스럽다고만 생각하였지, 정말 주님의 마음을 품고 준비하지 못하였음을 회개하였습니다. 
  그래서 화요일 금식을 했습니다. 그 날 기도하는데 하나님께서 부흥회에서 전할 말씀을 새로 준비하게 하셨습니다. 
  수요일 저녁부터 시작된 집회는 처음에는 냉랭하게 시작되었습니다. 그럴 수밖에 없겠지요. 그런데 너무나 큰 은혜의 역사가 있었습니다. 시간 시간 울음 바다가 되었습니다. 

  돌아오는 길에 비행기에서 깊이 중국 집회를 돌아보았습니다. 월요일 공항에서 하나님께 다급하게 드렸던 기도가 구한대로 이루어진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그 기도를 시작으로 하나님께서 친히 중국 집회 중에 역사하실 수 있었음을 깨달았습니다. 하나님을 계속하여 바라보게 하심으로 진정한 부흥회가 되게 하신 것입니다. 기도의 역사는 내가 구한대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늗데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내 삶의 그 문제 속에 함께 하심에 있는 것입니다.

기도는 하나님이 내 삶 속에 함께 하시게 하는 통로입니다. 그것으로 충분한 것입니다. 

요셉은 기도하는 것마다 다 응답받지 못했고 상황은 더 나빠만 갔습니다. 웅덩이에 빠져 죽을 지경이 되고 애굽에 종으로 팔려 가고 억울하게 감옥에 갇혔습니다. 
그러나 언제나 여호와께서 요셉과 함께 하셨다고 했습니다. 요셉은 억울하게 형들에 의해서 종으로 팔려갈 때도 또 억울하게 감옥에 갇혔을 때도 여호와께서 함께 하셨다고 성경은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것이 요셉의 복이었습니다. 그것으로 충분하였습니다. 내가 생각했던 것과 전혀 엉뚱한 방향으로 내 인생이 가는 것 같고 내가 구한것과는 전혀 다른 결과가 나왔다고 하더라도 예수님이 말씀하신 기도의 약속은 내가 구한대로 되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이 아버지로서 친히 나를 사랑하시므로 나와 함께 하시는 것입니다. 결국 요셉은 애굽 총리가 되어 온 가족을 기근에서 구원할 수 있었습니다. 하나님과 함께 하는 것이 가장 큰 응답이요, 복입니다. 요셉은 기도의 능력으로 살았던 사람입니다.

  어제 영화 배우 배용준씨가 일본을 방문하였는데, 일본 간사이 공항에 5.000명 일본 주부들이 나와서 열광하였다는 보도를 보았습니다. '이틀 전부터 기다렸어요. 저를 한 번만 보아 주세요.' ‘당신과 같은 시대에 살고 있어서 행복합니다!’ 좋아하는 영화 배우와 지구상에 함께 살고 있다는 생각만 해도 행복하다면, 하나님 아버지와 함께 있는 행복은 얼마나 클까요?  하나님 아버지가 나와 함께 있으시다는 것을 내가 정말 안다면 두렵고 걱정되고 무서울 것이 무엇이 있습니까?  

다윗이 이스라엘 왕이 되었을 때, 다윗은 사울 왕의 하나 밖에 없는 후손인 요나단의 아들인 므비보셋에게 자비를 베풀었습니다. 그를 왕자 처럼 거두어 주었습니다. 다윗이 므비보셋에게 말했습니다. 

(삼하 9:7) “...무서워하지 말라 내가 반드시 네 아버지 요나단으로 말미암아 네게 은총을 베풀리라 내가 네 할아버지 사울의 모든 밭을 다 네게 도로 주겠고 또 너는 항상 내 상에서 떡을 먹을지니라”

그 후에 다윗의 아들 압살롬이 반란을 일으켰을 때, 므비보셋의 시종 시바가 사울의 재산이 탐이 나서 다윗에게 나아가 므비보셋이 압살롬과 연계하여 반역자가 되려 한다고 거짓 보고를 했습니다. 다윗은 그의 말을 믿고 시바에게 유업을 넘겼는데, 압살롬이 죽자 시바의 거짓말이 들통 났습니다. 

다윗이 예루살렘 성으로 돌아오는 길에 므비보셋을 만나게 됩니다. 그리고 므비보셋이 왕의 부재 기간 동안 애통해 하며 자신의 발을 돌보지도 않았고 수염을 깎지도 않고 옷을 빨지도 않은 채 지냈던 것을 알게 됩니다. 사정을 알고 난 다윗은 므비보셋에게 빼앗긴 재산을 돌려주겠다고 했습니다. 그 때 므비보셋이 다윗 왕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삼하 19:30) “므비보셋이 왕께 아뢰되 내 주 왕께서 평안히 왕궁에 돌아오시게 되었으니 그로 그 전부를 차지하게 하옵소서 하니라”

므비보셋은 너무나 귀한 태도를 가졌습니다. “왕이여, 오로지 나의 관심은 왕이 돌아온 것입니다! 왕이 여기 계신다면 나머지 것들은 어찌 되어도 다 좋습니다." 이러한 고백 속에 그는 모든 것을 다 소유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우리도 이런 복을 받았습니다. 성찬의 복입니다. 
주님과 함께 먹고 마시는 자리에 나아갈 수 있는 것 자체가 모든 응답이요 큰 복입니다. 
어떤 어려움 중에도 승리하는 이유는 예수님께서 함께 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예수님 한 분이면 충분한 것입니다. 

예수님을 제자들이 다 떠나고 예수님께서 혼자 남았을 때 예수님은 두렵지 않았다고 했습니다. 오늘 본문 32절 말씀을 보십시오. 

“보라 너희가 다 각각 제 곳으로 흩어지고 나를 혼자 둘 때가 오나니 벌써 왔도라 그러나 내가 혼자 있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께서 나와 함께 계시느니라”

예수님께서 십자가의 길을 그렇게 당당히 걸어가실 수 있었던 힘이 어디서 왔을까? 십자가의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해 달라는 기도를 하나님이 들어주시지 않았습니다. 그래도 예수님과 함께 문제가 되지 않았습니다. 왜? 하나님이 함께 계시는 것이 분명하다면 문제가 될 것이 없습니다. 이 시간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가 왜 귀한 것이지요? 우리가 성찬을 받을 수 있는 사람으로 세워주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하나님과 가로막힌 것이 있습니까? 두려운 것이 있습니까? 담대함을 잃어버렸습니까? 하나님께 기도할 자신이 없습니까? 오늘 주님의 십자가를 붙잡으시기 바랍니다. 

오늘 우리가 이 성찬을 받을 수 있는 복을 받았다는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여러분이 성찬의 복에 눈을 뜨면 무서울 것이 없습니다. 어떤 일이 여러분 눈 앞에 있다 하더라도 하나님이 친히 여러분을 사랑하시는 아버지시고 언제나 하나님 아버지께 나갈 수 있습니다. 그러면 괜찮습니다. 하나님이 여러분을 지키시고 인도하실 것입니다.      
우리에게 주어진 가장 큰 복은 십자가 때문에 누리는 기도의 복입니다.
우리는 언제나 완악하고 음란하고 이기적이지만, 언제나 하나님 보좌 앞에 나아갈 정결함을 누립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누립니다. 십자가 때문에! 


이제 통성으로 기도하시겠습니다.
 “주님, 그렇습니다. 성찬을 받는 이 복 하나만으로도 충분합니다. 제가 하나님과 식탁을 같이할 수 있는 이 성찬의 복을 허락하셨다면 모든 것을 가진 것과 같습니다. 예수님 한 분이면 충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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