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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교회창립] 함께 지어져가는 교회 (엡 2:16~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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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께 지어져가는 교회 (엡 2:16~22)

교우 여러분, 오늘 유월 첫주일은 우리교회 창립 31주년 기념주일입니다. 우리교회 연혁에 보면 1977년 6월 1일을 창립일로 정하였는데 오늘이 바로 6월 1일입니다. 우리에게 이 교회를 허락하신 하나님께 감사하며, 교회의 생일을 축하하는 의미에서 우리 다함께 박수를 한 번 칩시다. 교회란 우리들이 믿는대로 그리스도의 피값으로 세워진 것입니다. 나 같은 죄인을 위하여 십자가에 죽으신 사랑과 구원의 역사가 이 교회를 통하여 오늘도 여전히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이런 교회의 하나님 자녀가 되었으니 엎드려 감사할 뿐입니다.

다음으로 교회는 성직자의 눈물로 세워지는 것입니다. 허허벌판과 같은 이곳에 교회를 시작하시고 터전을 닦으신 초대 목사인 서봉석 목사님과 이 교회를 창립하신 이들의 눈물을 기억하며 감사합니다. 물론 제 2대 목사로 지금까지 19년 동안 수고한 이 부족한 종을 위해서도 격려하시고 기도해 주시길 바랍니다.

세 번째로 교회는 성도들의 땀으로 커가는 것입니다. 우리교회가 이만큼 성장하기까지는 성도들의 땀 흘린 희생이 있었기에 이렇게 좋은 교회가 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지금까지 알게 모르게 교회를 위하여 묵묵히 땀 흘리며 눈물을 삼켰던 성도들을 생각하며 감사하고, 하나님의 갚으시는 큰 은혜와 복이 내리시기를 축원합니다. 아울러 앞으로도 이 교회 위에 하나님의 인도하심과 기적 같은 역사하심이 늘 함께하시기를 축원합니다. 

어떤 아이가 혼자 제 방에서 장난감벽돌을 가지고 놀고 있었습니다. 아버지가 아이의 방에 들어가 아이가 하고 있는 일을 유심히 들여다보았습니다. 아버지가 옆에 있는 것도 모르고 열심히 벽돌쌓기를 하고 있는 아이를 보고 “너 지금 뭘 하고 있니?”하고 물었더니 이 어린아이가 뒤돌아보면서 손가락을 입에 갖다댑니다. “쉿! 조용히 하세요 아빠, 지금 교회를 짓고 있어요.” 아버지는 깜짝 놀랐습니다. 늘 이 어린것의 손을 잡고 교회에 다니기는 했지만, 교회에 갔을 때마다 떠들어서 조용히 하라고 주의시킬 정도로 이 아이는 늘 말썽이었는데 이만큼이나 믿음이 생겨 있구나 싶은 것이 대견스러워서 한마디 더 물었습니다. 

“얘야, 교회에서는 왜 조용히 해야 되니?” 아이의 대답은 뜻밖이고 걸작이었습니다. “아빠도 참. 교회에서는 조용히해야지요. 사람들이 다 잠들었으니까요. 떠들면 모두들 깨잖아요.” 어린아이를 데리고 교회 나가는 것까지는 좋았는데 갔을 때마다 이 아버지는 잤거든요. 존 것이 아니라 잤습니다. 아이가 이걸 보아왔으니 그런 대답을 할 수밖에요. 교회는 가서 조용히 자는 곳이다, 그러니 떠들지 말아야 된다, 라고 생각해온 것입니다. 기막힌 이야기 아닙니까. 

문제는 내가 가진 교회관이 어떠냐입니다. 도대체 여러분은 교회를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교회를 어느 정도로 필요하다고 생각하십니까? 내 모든 생활 중에 교회가 차지하는 비중은 어느 만큼입니까? 이는 대단히 중요한 문제입니다. 

그리스도인의 신앙생활이라는 것은 세 가지의 고백에 따라 가늠된다고 생각합니다. 

먼저, 하나님께 대한 고백입니다. 

당신은 하나님을 누구라고 생각하는가, 하나님을 어떤 분으로 알고 믿는가, 하나님께 대하여 어떤 고백을 하고 있는가, 그것이 문제입니다. 

하나님은 창조주시오, 심판하시는 분이요, 죄인을 가차 없이 벌하시는 분이요, 아주 무서운, 폭군과 같은 분이시다 - 옛 유대사람들은 이렇게 알고, 하나님의 명령을 거역한다면 그대로 즉시 벌이 내린다고 믿었습니다. 거기서 한걸음 나아가서는, 이미 법을 어겼기 때문에 나는 구제받을 수 없다, 하고 아예 하나님의 백성 됨이나 율법 지키는 것을 포기하고 버려진 자로서 사는 그런 사람들도 많았습니다. 어차피 죄를 너무 많이 지었으니 나는 하나님 앞에 설 수 없다, 그러니 율법이고 뭐고, 축복이고 저주고 생각할 것 없이 되는 대로 살아버리고 말자. 하는, 그렇게 버려졌다는 존재의식을 가지고 사는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예수님 당시에도 그런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이에 비해서 예수님께서 보여주신 신관 즉 하나님께 대한 이해는 그렇지를 않습니다. 하나님은 좋으신 하나님이요 아버지 하나님이시다, 라고 가르치셨습니다. 그래 우리가 외우고 있는 주기도문에 ‘하나님’이라는 단어가 없습니다.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 - 라고 표현할 뿐입니다. 예수님께서 보여주신 하나님은 어디까지나 아버지 하나님이십니다. 사랑의 아버지입니다. 설사 진노가 있어도 그 진노 속에 사랑이 계시되어 있습니다. 그런 하나님으로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그 대표적인 예가 ‘탕자비유’입니다. 탕자의 아버지, 얼마나 좋은 아버지입니까. 아무리 생각해보아도 참으로 좋은 아버지입니다. 그 못된 아들이 집을 나가겠다고 할 때 유산을 나누어주는 아버지. 그 아들이 돌아올 것을 생각해서 기다리고 있는 아버지. 또 돌아왔을 때, 재산을 다 탕진하고 거지가 되어서 왔지마는 살아 왔다고 해서, 그것이 고마워서 잔치를 열고 기뻐하는 그 아버지. 이렇듯 좋은 아버지가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소개하시는 하나님 상입니다. 이 하나님을 믿는 사람, 하나님을 이렇게 믿는 사람은 그 하나님의 품에서, 그 하나님의 사랑 안에서 오늘도 행복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이렇게 내가 가진 신관이 나 자신의 운명을 결정하는 것입니다. 오늘도 이렇게 자비하신 아버지 하나님을 이 성전에서 만나시기를 바랍니다.


다음으로는 교회관입니다. 

교회가 무엇입니까. 긴 설명을 드리지는 못합니다. 그러나 결정적인 것을 잊지 마십시오. 교회는 친교기관이 아닙니다. 사람들이 만나서 서로 인사하고 악수하고 뭐하고 하자는 데가 아닙니다. 또한 봉사기관도 아닙니다. 봉사하지마는 봉사가 교회의 목적은 아닙니다. 또한 교회는 학문을 가르치고 지혜를 가르치고 생활철학을 가르치는 그런 학원이 아닙니다. 그런 지적인 기관이 아닙니다. 그리고 교회는 무슨 여흥기관이 아닙니다. 

요새는 이상한 모습으로 교회가 발전하면서 교회를 한낱 감정순화 하는 기관쯤으로 여기는 일이 많아졌습니다. 소리 지르고 손뼉치고... 요란하게 이렇게 해서 오락기관쯤으로, entertainment를 위한 기관쯤으로 몰고가는 것을 참 유감스럽게 생각합니다. 

교회는 그런 곳이 아닙니다. 교회는 내 아버지의 집이요 그리스도의 생명력이 계신 곳입니다. 예수님 열두 살 때 하신 말씀이 있지 않습니까. “내가 내 아버지 집에 있어야 될 줄을 알지 못하셨나이까(눅 2:49).” 너무나 좋은 말씀입니다. 열두 살 된 어린이 예수님께서도 성전을 생각할 때 ‘내 아버지의 집’이었습니다. 거기에 내가 하나님의 자녀로 있다, 아들로 여기에 있다, 하십니다. 그곳이 곧 교회입니다. 

하나님을 아버지로,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그리고 전통적인 상징적 표현에 따르면 교회를 어머니로, 신령한 어머니로 생각하는 그러한 고백 속에 나의 나됨이 있고 구원의 길이 있는 것입니다. 교회관은 대단히 중요합니다. 

교회는 결정적으로 그리스도의 몸입니다. 그리스도만이 영광을 받으시고 그리스도의 능력이 함께함으로 교회입니다. 물론 교회에 나오는 사람마다 여기에 와서 그리스도를 만나야 됩니다. 그것이 가장 중요한 핵심입니다. 결코 사람들이 모여서 친교하자는 데가 아닙니다. 

유명한 신학자 폴 틸리히는 교회의 필요성에 대해서 이렇게 피력하고 있습니다. ‘나는 교회를 떠나서 기독교를 생각할 수 없다. 비록 교회에 문제가 많다하더라도 기독교가 교회를 떠나서 존재할 수는 없다.’ 아주 못박아 말하고 그 이유를 설명합니다. 

첫째, 기독교는 사랑의 종교이기 때문에 교회 안에서 사랑을 주고 사랑을 받고 그리스도의 사랑을 체험할 수 있기 때문이다, 

둘째, 사람이 가질 궁극적 관심은 예배다, 하나님과의 만남에, 하나님께 예배하는 데에 궁극적 관심이 있어야 한다, 그 예배는 교회를 통해서 이루어지기 때문에 교회는 절대적으로 필요한 것이다, 

또한 교회에서 복음이 선포되고 있다, 복음이 선포되고 복음을 듣는 이것이 교회에서 이루어지는 일이므로 교회가 필요하다, 

넷째는 성경을 바로 해석해줌으로써 사람들로 하여금 바른 신앙에 서도록 지도하는 곳이 교회이기 때문에 교회가 중요하다- 라고 말합니다. 그렇습니다. 교회는 그리스도가 주인이시고, 교회는 그를 만나는 곳이어야 합니다. 

마지막으로 있어야 할 고백은 그 교회 속에 있는 성도의 역할에 대한 고백입니다. 오늘 본문에는 교회를 하나님과의 화평에서부터 설명해 나갑니다. 
14절에 보면 예수는 우리의 화평이시라고 말씀합니다. “우리의 화평이신지라”- ‘둘로 하나를 만드사 중간에 담을 허시고’ 하였습니다. 
15절에서는 예수께서 화평을 이루신다고 말씀하며, 
17절에 가서는 평안을 전하신다고 말씀하십니다. 친히 전하십니다. 

교회를 통하여 존재하시고, 교회를 통하여 역사하시고, 성령의 역사와 함께 주님 친히 화평을 이루시고 화평을 전하시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 그리스도의 몸 된 교회 안에 있는 우리교인은 누구인가, 이것입니다. 

오늘 본문 19절에 보면 우리 교인은 하나님의 권속이라고 말씀합니다. ‘권속’이라는 단어는 좀 어려운 한자어입니다. 그런데 이 번역된 헬라어 원문은 ‘오이케이오이’라고 하는 말인데, 이 단어에서 ‘오이코스’라는 말, ‘집’이라는 단어가 나왔습니다. 그 집의 한 식구가 된다는 것입니다. 이 집은 건물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가정을 말합니다. 가문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가정, 하나님의 가정의 한 식구, 한 멤버가 된다는 뜻입니다. 우리는 이 가정이라는 것을 말할 때 흔히 ‘끈끈한 정’을 이야기합니다마는 그것으로는 충분하지 않습니다. 끈끈한 것이 아니라 ‘영영 끊을 수 없는’ 관계입니다. 피로 맺어진 것이니까요. 내 자식이요 내 부모입니다. 이 관계는 어떤 것으로도 끊을 수 없는 관계입니다. 

바울도 그렇게 강력하게 말합니다. ‘아무것도 그 관계에서 끊을 수 없느니라’ 예수께서 우리를 위하여 십자가에 죽으심으로써 이루어진 관계입니다, 이것은, 절대로 끊을 수 없는 관계입니다. 이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그리스도를 주로 고백합니다. 그 주는 성현이 아닙니다. 선생이 아닙니다. 그리고 과거의 예수가 아닙니다, 십자가에 죽으시고 부활하시고 승천하시고, 그리고 재림하실 분입니다. 

우리는 living Christ를 믿습니다. 과거의 예수를 믿는 것이 아닙니다. 현재 살아계신 예수를 믿는 것입니다. 살아계신 그리스도의 생명력 안에서 우리는 하나님의 권속입니다. 구속함을 받은 권속, 하나의 식구가 되는 것입니다. 이것은 피로 맺어진 관계입니다. 그리스도와의 관계, 또 우리 성도들 간의 관계가 그렇습니다. 이것은 윤리 이전에 있는 큰 사랑이요 확실한 사랑의 실체입니다. 나아가서는 절대적 관계입니다. 전인적 관계요 공동 운명에 속한 관계요, 그리고 영원한 관계입니다. 그래서 교회를 일러서 흔히 종말론적 공동체라고 합니다. 

여러분이 세상에서 어떻게 살든지 가정이 어떻든 상관없습니다. 이 교회 안에서 우리는 한 식구가 되고 서로 교제하며 그리스도 안에 하나가 되어 살다가 이대로 하나님 나라로 옮겨갑니다. 이렇게 영원한, 종말론적 공동체가 교회인 것입니다. 

오늘 성경은 또 말씀합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나라의 시민이라고. 시민이라고 하는 것은 나라가 우리의 생명과 재산을 보호해줄 의무가 있는 것입니다. 

헌법 제 1조입니다. 나라가 우리의 생명과 재산을 보호해주고, 대신 우리는 이 나라에 시민으로 해야 할 의무가 있는 것을 의미하는 단어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생명과 재산을 보호해 주실 것이고, 그리고 그 하나님에게 우리의 충성과 의무를 다해야할 그런 관계에 있음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그런고로 우리가 왕되신 그리스도께 충성을 다하고 그 안에서 화평을 누리는 것입니다 

오늘 성경에 보면 또 다른 표현 성도라고 하고 있습니다. 거룩히 구별된 무리입니다. ‘성도’의 헬라말 ‘하기오스’ 는 구별되었다는 말입니다. 이 세상에 살면서도 구별되었습니다. 비록 속된 세상에 살지마는 거룩한 백성으로 살아갑니다. 비록 세상에 살지마는 하늘의 시민권을 가지고 사는 것이 그리스도인입니다. 영원한 약속을 보장받고 오늘을 살아가는 것이 그리스도인입니다. 거룩한 무리입니다. 깊이 생각하고 새겨야 합니다. 

성도 여러분, 우리는 이런 의미의 교회를 주신 것에 감사하며 성도의 역할을 잘 감당하시기를 축원합니다.


1924년에 있었던 일입니다. 제8회 올림픽경기가 파리에서 열렸습니다. 이 올림픽경기에 에릭 리들이라고 하는 영국청년이 100m경주의 선수로 나가게 됩니다. 그는 좋은 기록을 가지고 있어서 확실한 금메달 유망주로 모두 기대를 하고 있는데, 경기 일정이 주일날로 잡혔습니다. 에릭 리들은 신실한 그리스도인이었습니다. 주일날로 경기 일정이 잡히자 그는 올림픽경기를 포기 하겠다고 했습니다. 절대로 안나겠다고, 뛰지 않겠다고 단호히 거부하였습니다. 

이에 영국 국민들이 분노했습니다. 조국을 배신한 자다, 위선자다, 옹졸한 신앙인이다, 비겁한 자다… 뭐 있는대로 폭언을 하고 비난을 했습니다마는 이 청년은 당당했습니다. “주일을 범하면서까지 금메달을 위해서 뛸 마음은 없어요” 하였습니다. 그래서 그 주일날이 되자 교회나가서 종일토록 경건하게 하나님 앞에 예배하였더랍니다. 

그 주일이 지나자 다른 사람들이 그를 설득해서 400m경주에 좀 나가줄 수 없겠느냐고 제안했습니다. 주일날이 아니면 나가보겠다고 그는 대답했습니다. 그래서 100m경주자가 400m경주에 나가서 뛰게 되었습니다. 사실 이 일은 우리같은 사람들은 100m를 뛰나 400m를 뛰나 마찬가지이지만, 이런 사람들은 기술적으로 거의 불가능한, 100m경주자가 400m경주에 나가서 뛴다는 것은 불가능한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경기는 이러했습니다. 그는 처음부터 100m경주 하는 기세로 총알같이 뛰었습니다. 이렇게 하는 것을 보고 모두들 생각했습니다. ‘저 사람 200m 뛰고나면 아마 고꾸라질걸.’ 그랬는데 그는 그대로 줄기차게 뛰어서 마침내는 세계기록을 깨고 금메달을 따냈습니다. 금메달을 목에 걸었을 때 기자가 물어봅니다. 

“100m 선수로서 어떻게 400m를 뛸 수 있었습니까?” 그는 대답합니다. 
“200m는 내 힘으로 뛰고 나머지 200m는 하나님의 힘으로 뛰었습니다. 나는 ‘내가 100m 경주를 거부하고 하나님을 섬깁니다. 나머지 길은 주께서 인도하소서’하고 기도하였었고 그리고 오늘 뛰었는데 금메달을 딴 것입니다.” 

여러분, 어디서 들어본 듯한 이야기이지요. 오래전 저도 아주 감동있게 보았던 ‘불의 전차(Chariots of Fire)’란 영화스토리입니다. 물론 실화를 근거한 영화 였습니다. 주인공 에릭이 잘했느냐 못했느냐- 묻지 맙시다. 오직 그의 경건을 생각해 봅시다. 하나님과의 관계를 최우선으로 여기는 그의 삶의 자세 말입니다. 

여러분은 교회를 어느 정도로 중히 여기십니까? 어느 정도로 필요하다고 생각하십니까? 내 생애에 있어서 가장 중심되는 것이 교회요, 내가 마지막 의지 할 것이 교회입니다. 우리 교인들 중에서 여러가지 사정은 어렵지만 어떻게 하든 교회 주변에서 머물러 살면서 마지막까지 교회와 함께 살다가 죽을랍니다 하는 사람들을 봅니다. 나는 이런 교인들이 참 사랑스럽고, 자랑스럽습니다. 그 어떤 조건보다 교회를 우선으로 여기는 믿음. 여러분 중요한 것은 교회입니다. 마침내 의지할 곳은 교회밖에 없습니다. 

어떤 분들은 무슨 큰 계약이 걸려 있어도 꼭 주일날 해야 한다면 아니합니다. 포기하는 분도 있습니다. 멀리멀리 여행하다가도 주일 하루 지키기 위해서 달려오는 사람도 있습니다. 모두가 다 그러시라는 이야기는 아닙니다마는 그런 신앙은 특별한 것입니다. 거룩함입니다. 주일을 거룩히 지키고, 그 주일을 내가 섬기는 교회에서 거룩히 지키면서 나 자신이 거룩해지고, 내 생활이 거룩해지고, 내 존재가 거룩해지고, 내 운명이 거룩해지는 것이 성도입니다. 교회와 함께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그리스도와 사귀고, 그리스도를 만나고, 교회의 권속 된 행복을 즐깁니다. 여기에 참된 성도의 생활이 있는 것입니다. 

우리를 사랑하시는 하나님 아버지께서 이 땅에 우리 교회를 세우시고 우리들을 불러 모으셨습니다. 이 교회를 통하여 믿음의 훈련을 받고 거룩한 권속이 되어 하나님이 내리시는 은혜와 복을 누리기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이 교회를 통하여 하나님이 내리시는 놀라운 복을 대대로 받아 누리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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