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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내 손을 힘 있게 하옵소서 (느 6: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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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손을 힘 있게 하옵소서 (느 6:1~9)

  시편에 기록된 다윗의 시들을 읽어 보노라면 유독 악인에 대한 언급이 자주 나타납니다. 
  그 이유는 다윗 자신이 하나님 앞에서 어찌하든지 보다 의롭게 살아보려고 노력하면 할수록 악인의 방해도 그와 비례해서 더욱 극렬해짐을 피부로 느낄 수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자기를 넘어뜨리고 실족케 하려는 악인들의 악한 계교를 다윗은 흔히 '올무'라고 표현했습니다.
  그러면서 때로는 자기 앞길에 놓인 원수의 올무를 피하게 해 달라고 기도하기도 하며 때로는 그처럼 자기를 해하려는 원수의 올무에 빠지지 않고 벗어나게 됨을 감사드리기도 한 것입니다.

  예루살렘 성벽 재건이라는 막중한 과업을 수행해 나가고 있던 느헤미야는 일 시작할 때부터 반대자들의 조롱과 백성들의 사기 저하와 또한 비협조적인 이기주의자들 때문에 끝없는 고비들을 통과했어야만 했는데, '산 너머 또 산'이라는 말처럼 이 6장에 와서는 더 큰 난관이 그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것이 바로 느헤미야 한 사람을 걸고 넘어뜨리려 하는 원수들의 올무였습니다.
  하나님의 일의 선구자들이 어떤 큰일을 해 나가려고 할 때 예나 지금이나 끊임없이 사용되는 사탄의 방해공작의 대표적인 도구가 바로 이것입니다.

  이 악한 사탄은 때로는 정면에서 전면에 걸친 방해공작도 펼쳐오지만 어떤 때에는 각 신자 한 사람 한 사람을 걸어 넘어뜨림으로써 함께 충성하고 있는 교우들의 사기를 저하시키거나 혹은 특히 지도자 한 명을 집중 공략함으로써 그 하나님의 사업 전체를 순식간에 와해시키는 술책 또한 자주 이용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느헤미야는 과연 그러한 사단의 올무를 어떻게 피할 수 있었습니까?
  저와 여러분들이 이 '세계를 받은 교회' 안에서 쉴 새 없이 연이어 맡겨지는 막중한 '하나님의 일'들을 수행해 나갈 때 필연적으로 닥치게 되는 온갖 원수의 방해공작들을 과연 어떻게 넉넉히 이기고 우리의 사명을 깨끗이 완수할 수 있는지 그 요령들을 이 시간 함께 상고해 보고자 합니다.

  1. 악인의 유인작전에 넘어가지 않기 위해서는 맡은 사명에만 최우선으로 집중하는 '일에 빠진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바꾸어서 말하자면, 자기의 목적의식을 오로지 '하나님의 일'에만 두고 거기에 온 몸과 마음이 바쁜 사람은 올무에 걸릴 여지조차 없게 된다는 말입니다. 
  느헤미야가 원수들의 음모를 피했던 방법이 바로 그러한 것이었는데, 우선 본문 1절과 2절에 기록하기를 "1산발랏과 도비야와 아라비아 사람 게셈과 그 나머지 우리의 대적이 내가 성을 건축하여 그 퇴락한 곳을 남기지 아니하였다 함을 들었는데 내가 아직 성문에 문짝을 달지 못한 때라 2산발랏과 게셈이 내게 보내어 이르기를 오라 우리가 오노 평지 한 촌에서 서로 만나자 하니 실상은 나를 해코자 함이라"고 했습니다. 

  성벽 건축이 마무리 단계에 들어가자 느헤미야와 또한 그를 방해하던 원수들은 피차 더 긴장하게 되었습니다. 
  "그 퇴락한 곳을 남기지 아니하였다"는 말은 옛날 성벽 중에서 불에 타 소실되거나 무너졌던 부분들이 완전히 복구되어 이제 파손된 곳이 남지 않게 되었다는 뜻입니다.
  하지만 아직도 한 가지 일 즉 "성문에 문짝을 다는 일"이 남아 있었는데, 이것은 보기보다는 훨씬 더 중요한 일이었습니다. 
  왜냐하면 당시에는 적군으로부터 침공을 당할 때면 주로 성문이 그 주공격의 대상이 되었던 까닭에, 성문이 없는 성벽이란 아직은 아무 실제적인 방어력을 발휘할 수 없는 돌덩어리에 불과했기 때문이었습니다.
  물론 느헤미야가 그 사실을 모를 사람은 아니었고, 그런 까닭에 그는 하루라도 빨리 성문에 '문짝'을 달기 위해서 마지막 박차를 가하고 있던 중이었던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그의 원수들 또한 그 사실을 잘 인식하고 있었습니다. 
  예루살렘 성벽에 문짝이 아직 달리지 않은 그때가 그들로서는 마지막 기회나 다름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더욱 조급한 마음으로 느헤미야를 살해할 음모를 꾸미게 됩니다. 
  2절에 나오는 그들의 전갈은 말하자면 느헤미야에게 피차 평화조약을 체결하자는 제의 같은 것이었습니다. 
  "느헤미야 총독, 우리 서로 이렇게 으르렁대고 살 것이 아니라 어떻게 잘 지내봅시다. 피차 유익한 방법을 모색해 보아야 하지 않겠소.?"라고 미소를 던져 보이면서 그 회담 장소로서 "오노 평지의 한 촌"을 제의해 왔던 것입니다. 

  이 '오노 평지'란 유다와 사마리아의 접경지대로서 예루살렘에서 약 하루 걸리는 거리에 있었습니다. 
  행정구역으로 볼 때에 이곳은 느헤미야 총독의 관할지 북서쪽 경계로서 그의 세력이 미치는 한계점에 해당되었으며, 오히려 사마리아와 아스돗의 세력이 더 가깝다고 할 수 있는 지역이었습니다. 
  그래서 느헤미야는 그들이 제안하는 회담 장소를 듣고 즉각적으로 "아하, 이들이 그 외진 곳으로 날 유인해서 죽이려 하는구나."라고, 그들의 거짓 미소 뒤에 감추어진 음모를 알아챘던 것이었습니다.

  그렇다면 느헤미야는 그와 같은 원수의 유인작전에 어떻게 대응했습니까?
  3절과 4절에 "3내가 곧 저희에게 사자들을 보내어 이르기를 내가 이제 큰 역사를 하니 내려가지 못하겠노라 어찌하여 역사를 떠나 정지하게 하고 너희에게로 내려 가겠느냐 하매 4저희가 네번이나 이같이 내게 보내되 나는 여전히 대답하였더니"라고 기록했습니다. 

  느헤미야는 그 회담에 응할 수 없다고 거절할 때, "너희들이 날 죽이려 하니 내가 갈 수 없다."라고 하지는 않았습니다.
  물론 원수들의 의도가 느헤미야 자신에게는 너무나 뻔한 것이었지만, 겉으로는 평화회담하자면서 웃고 나오는 얼굴에 그렇게 대답할 수는 없는 일이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 대신 무어라고 말해 주었습니까?
  "내가 이제 큰 역사를 하니 내려가지 못하겠다"고 했습니다.
  여기 "큰 역사"란 자기가 대단한 일을 하고 있다는 자기 자랑의 뜻으로 한 말이 아니라, '매우 중요한 일'을 하고 있다는 뜻입니다.

  즉 "나는 지금 무척이나 중요한 일을 하고 있는 중이다. 어찌하든지 이 예루살렘 성벽의 문짝을 하루라도 빨리 달아야 하는데, 이 일 때문에 정말 눈코 뜰 새 없이 바쁜 몸이다. 그러니 어떻게 이런 중차대한 일을 중단하고 오노 평지까지 왕복 이틀을 허비할 수 있겠느냐? 미안하지만 안 되겠다."라고 잘라 말했던 것입니다.
  느헤미야의 거절을 듣고도 그 대적들은 포기하지 않고 무려 "네 번이나" 끈덕지게 졸라왔지만 느헤미야의 대답은 "여전히" 꼭 같았습니다. 

  어떻게 본다면 느헤미야가 그들의 제의를 잘 고려해 보고 모처럼 그쪽에서 먼저 청해 온 기회를 잘 활용할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위험이 있을 것 같으면 호위병을 충분히 거느리고 가서 그들과 담판할 수도 있었을 것이고, 어쨌든지 간에 피차 적대관계에 있는 것보다는 서로 평화적으로 공존할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하는 것도 괜찮다고 판단할 수도 있는 상황이었던 것입니다.
  하지만 느헤미야로서는 그런 일에 신경 쓰고 끌려 다니기보다는 지금 당장 성문에 문짝을 달아서 성벽 재건 공사를 마무리 짓는 것이 현실적으로 훨씬 더 중요했습니다.
  평화조약 체결도 한번 시도해 볼만한 일임에는 틀림없지만 그것보다는 지금 자기가 수행하고 있는 '하나님의 큰 역사'를 하루 빨리 완수해 내는 것이 가장 시급한 당면과제였던 것이었습니다. 

  그러므로 느헤미야의 대답은 결코 지어낸 변명이 아니었습니다. 
  그는 오직 사실 그대로 대답했던 것이었습니다. 
  느헤미야는 지금 예루살렘 성벽 재건이라는 이 대사의 완성을 바로 코앞에 두고서, 다른 부수적인 일 때문에 그의 마음이 산란해지기를 결코 원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이처럼 느헤미야는 하나님께서 자기에게 맡기신 '큰 역사' 이 한 가지에만 모든 최우선권을 두었고 바로 거기에만 자신의 모든 생각과 활동을 집중시키고 조금도 흐트러지지 않았습니다.
  '어찌하든지 모든 성문들마다 문짝들을 하루라도 빨리 달아야만 이 예루살렘 성이 안전해지고 이 성벽재건 공사가 비로소 완성될 수 있을 것이다.'라는 일념에만 사로잡혀서 불철주야 헌신하고 있던 느헤미야였던 까닭에 그의 원수들은 그 어떤 감언이설이나 유인작전의 올무로도 그를 넘어뜨릴 도리가 없었던 것이었습니다.

  오늘날 우리들의 신앙생활에도 이런 올무의 유혹과 방해는 늘 있기 마련입니다.
  이 복잡한 현대사회는 온갖 종류의 '유익해 보이는 회담'을 제의하면서 신자들을 '오노 평지'로 유인하려 합니다.
  가장 기본적인 문제로서, 주일성수에서부터 그러하지 않습니까?
  사실 주일에 '하고 싶은 일' 혹은 '해야만 할 것 같은 일'들이 얼마나 많이 생깁니까?
  그것들은 모두 다 나름대로 각기 중요하기도 하고 의미도 있어 보이고, 아니 필수적인 것처럼 여겨지는 일들 뿐 입니다.
  주일에 매상이 제일 잘 오르는 가게를 그날 닫는다는 것은 말도 안 될 어리석은 일처럼만 보이고, 오랜만의 주말연휴에 온 가족이 함께 단란한 시간을 보내는 것은 매주일의 예배에 참석하는 것보다 훨씬 더 중요한 것처럼 보이는 것입니다.
  사실 아예 '주일을 거룩하게 지키지 않겠다.'고 작정을 하고 주일 범하는 교인이 어디 있겠습니까?
  대부분의 경우가 다 '나름대로 중요한 일' 즉 이것도 생각해 보니 주일에 꼭 해야 할 일 같고 저것도 생각해 보니 주일 후로 미루면 안 될 일 같고 해서 일단 그런 것들을 먼저 다 하려다 보니까 자연히 주일 지키는 일이 뒷전으로 밀려나게 되는 것입니다. 

  하지만 그것이야말로 우리의 생활에서 '최우선권'을 어디에 두어야 하는지를 혼동하게 만드는 사단의 올무인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마땅히 있어야만 할 자리에 있지 아니하고 꼭 해야 할 일부터 하지 아니하고, 여기저기에 마음이 흩어지고 발걸음이 왔다 갔다 하고 있으니 곳곳에 널려 있는 사단의 올무에 걸려 넘어질 확률이 지극히 높아질 수밖에 없는 것이 당연하지 않겠습니까?

  우리는 일단 목적의식을 분명히 하고 목표설정을 똑바로 하고 신앙생활을 해야만 합니다.
  즉 자신의 모든 생활을 바로 '예수 목적'에 집중시키고 오직 '사명 목표'에만 모든 우선권을 부여하면서 살아야만 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지 아니하고 일단 '내 할 일'부터 먼저 하고 '내 쓸 일'부터 다 쓴 후에 남는 것 가지고 신앙생활하겠다는 식으로 나간다면, 하나님의 '큰 역사'는커녕 그 '자질구레한 일에 바쁜 인생'의 길목마다 도사리고 있는 시험과 유혹의 올무에 빠지지 않을 도리가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예배참석이라는 신자로서의 제일 기초적인 사명에부터 최우선을 두는 사람이 되어야 하며, 교회봉사와 헌금생활이라는 교인으로서의 기본에 불과한 사명 수행에 바쁘고 힘든 것이 아예 습관이 되어야만 합니다.
  그래서 사단이 어디를 찔러보아도 꿈쩍도 하지 않는 신앙의 기본기가 확실히 갖추어져야 하는 것입니다.
  특별히 직분자로서 맡겨주신 사명에는 자신의 '최고의 것과 전부의 것'을 총동원하여 '죽도록 충성'하는 자세에서 조금도 곁길로 나가지 말아야만 합니다.
  그러면 사단이 그 어떤 유인작전을 펼쳐 와도 조금도 흔들리지 않는 '믿음의 담력'이 절로 자라나게 되는 것입니다.
  이처럼 오직 하나님께서 내게 명하시고 맡기신 '하나님의 일에 푹 빠진 사명인'이 됨으로써, 할 수만 있다면 택하심을 입은 자들까지 유인하기 위하여 원수 사단이 쳐 놓고 있는 온갖 올무들을 넉넉히 피해 나가는 성도들 되시기를 바랍니다. 


  2. 악인의 유언비어에 휘말리지 않으려면 평소에도 늘 진실한 말만 하는 '믿을 수 있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나쁜 소문, 특히 한 개인을 집중적으로 인신공격하기 위하여 퍼뜨리는 사실무근의 헛소문 또한 사단이 즐겨 사용하는 올무입니다.
  느헤미야 역시 이런 원수의 유언비어 공격에 휘말리게 되는데, 5절부터 7절의 말씀에 "5산발랏이 다섯번째는 그 종자의 손에 봉하지 않은 편지를 들려내게 보내었는데 6그 글에 이르기를 이방 중에도 소문이 있고 가스무도 말하기를 네가 유다 사람들로 더불어 모반하려 하여 성을 건축한다 하나니 네가 그 말과 같이 왕이 되려 하는도다 7또 네가 선지자를 세워 예루살렘에서 너를 들어 선전하기를 유다에 왕이 있다 하게 하였으니 이 말이 왕에게 들릴지라 그런즉 너는 이제 오라 함께 의논하자 하였기로"라고 기록했습니다. 

  느헤미야가 그들이 던진 첫 번째 올무에 도통 걸려들지 않자 그 대적들은 이제 더 지독한 방법으로 느헤미야를 넘어뜨리려고 했습니다.
  그것은 곧 느헤미야에 관한 헛소문을 퍼뜨리는 것이었습니다.
  느헤미야가 그들의 제의를 네 번째 연속 거절하자 그 대적들은 "다섯 번째"에는 "봉하지 않은 편지"를 써서 "그 종자의 손"을 통해 느헤미야에게 보내어 왔습니다.
  당시의 편지는 보통 파피루스나 혹은 양피지에 써서 그것을 둘둘 말은 후에 끈 같은 것으로 묶어서 보내었습니다. 
  그리고 그 편지 내용을 수신자만이 볼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 그 두루마리를 점토나 밀랍 같은 것으로 봉인해서 만일 중간에서 누가 뜯어보았을 경우에는 표가 나도록 했습니다. 
  말하자면 오늘날 등기우편을 보낼 때 봉투의 이음매에 우체국 도장을 찍는 것과 같은 식이었던 것입니다.

  하지만 느헤미야가 받은 것은 "봉하지 않은 편지" 즉 애초부터 그러한 봉인 자체가 없이 부쳐진 것이었습니다. 
  즉 말하자면 봉투에 풀칠조차 하지 않고 발송된 편지였는데 오늘날에도 그런 우편물들이 있습니다.
  그런 우편물들은 그 내용을 수신자가 아닌 다른 어느 누가 보아도 아무 상관없다는 의미가 자동적으로 포함됩니다.
  그래서 무슨 책자를 보내거나 혹은 널리 알려지면 더 좋을 만한 무슨 광고지 따위를 보낼 때에는 구태여 봉투를 인봉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 느헤미야의 대적들이 '지어낸 소문'들로 가득 찬 편지를 보내면서 일부러 봉하지 않았던 의도는 지극히 뻔합니다.
  그것은 그 종자가 그 편지를 가지고 느헤미야에게 오는 도중에 이미 그 편지의 내용이 다른 사람들에게도 읽혀져서 그 거짓 소문이 모든 유다 백성들에게 더 널리 퍼지도록 하기 위함이었던 것입니다.

  그 편지의 첫머리는 "이방 중에도 소문이 있고 가스무도 말하기를"이라고 시작되고 있습니다.
  다시 말하자면 '듣자하니 이러이러한 말들이 있던데'라는 말입니다.
  오늘날에도 신문기사나 방송에서 소위 '믿을만한 소식통에 의하면'이라고 그 뉴스의 출처를 얼버무리는 표현들을 자주 듣습니다.
  하지만 이럴 때 그 '믿을만한 소식통'이라는 것은 사실상 '분명하게 확인되지도 않았고 또 확인할 수도 없는 뜬소문'이라는 말과 아무 차이가 없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금 우리나라에서는 이런 '듣자하니'라고 시작된 '유언비어'와 '믿을만한 소식통에 의하면'이라고 하면서 인터넷을 통해 확산되어 가는 '루머'에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쉽게 넘어가고 있습니까?
  소위 '광우병 괴담'으로 시작된 100퍼센트 거짓 루머가 결국 FTA라는 국가적 대사를 가로막게 만들고, 사람의 눈을 속이려고 일부러 동영상의 한 컷만을 잘라서 만든 사진 한 장 때문에 '경찰의 폭력 진압'이라는 악성 루머가 일파만파로 네티즌 사이에 퍼지면서 서울 한복판의 교통을 며칠 째 마비시키고 공권력이 조롱당하는 어처구니없는 일이 아직도 벌어지고 있는 것을 보면, 우리나라는 아직도 진정한 '민주주의'보다는 여전히 '선동(煽動)'이 판을 치는 '중우정치(衆愚政治)'에 머물러 있다는 탄식을 금할 길이 없는 것입니다. 

  산발랏 역시 바로 그러한 소위 '유비통신'의 특성을 이용하여 느헤미야에 대한 헛소문을 퍼뜨리고자 했습니다.
  그 헛소문의 내용은, 느헤미야가 유다 사람들과 더불어 "모반"을 일으키고 스스로 "왕이 되려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즉 느헤미야의 예루살렘 성벽 재건이 사실은 페르시아 왕을 반역하고자 꾀하는 일이라는 모함이었습니다.

  또한 바로 그런 계획을 이룰 목적으로 느헤미야는 이미 선지자들을 사주하여 "유다에 왕이 있다"고 선전까지 하고 있는데, "이 말이 왕에게 들릴지라"고 즉 이런 소문이 언젠가는 페르시아 왕에게까지 전해질 것이라고 위협을 가해 왔던 것이었습니다. 
  이런 모든 악의에 찬 거짓 소문들을 일부러 '봉하지 않은 편지'에 써서 느헤미야에게 보내었습니다.
  즉 사실은 느헤미야더러 받아 보고 읽으라는 편지가 아니라, 도중에 유다 백성들이 읽고 그 소문이 퍼져 그들로 하여금 느헤미야가 성벽 재건 공사를 하고 있는 진의를 의심하게 하려는, 실로 교묘한 올무를 걸어왔던 것이었습니다.

  사람이란, 저나 여러분이나 그 본성 자체가 실로 이상하게도, 다른 사람에 대해 나쁘게 말하는 것은 참 잘 믿어버리는 버릇이 있습니다.
  그것이 아무리 뜬소문이고 아무리 근거가 없는 말이라 할지라도, 그저 입에서 입으로 '듣자하니'라는 말로 전해진다 할지라도, 그 소문이 남에게 대하여 무언가 나쁘게 하는 말일 때에는 이상하게도 우리는 쉽게 믿고 잘 믿고 또 빨리 남에게 퍼뜨리는 공통된 악습이 있는 것입니다.
  바로 그런 공통된 습성 때문에 한국이나 미국이나 그 전혀 근거 없는 '설'들로만 가득 찬 주간지들이 그토록 잘 팔리는 것 아니겠습니까?
  하지만 그처럼 무심코 소문 듣고 무심코 소문 전하는 사람에게야 그저 흥미진진한 일인지 모르겠지만, 그 당사자가 받는 피해는 얼마나 극심한 것이겠습니까?
  그러면서도 기자와 방송인이라는 사람들이 소위 '아니면 말고'라는 기가 막힐 변명으로 무장을 하고서 '근거 없는 소문'만 가지고 기사를 써 내고 아예 '조작 보도'까지 하면서도 여전히 이 사회에서 버젓이 언론인 행세를 하고 있으니, 저로서는 정말 속에 불이 날 지경인 것입니다. 

  느헤미야에게 바로 그와 같은 치명적인 유언비어의 올무가 씌워졌을 때 그는 그것을 과연 어떻게 극복해 내었습니까?
  이어지는 8절에 "8내가 보내어 저에게 이르기를 너의 말한바 이런 일은 없는 일이요 네 마음에서 지어낸 것이라 하였나니"라고 기록했습니다. 

  자신에 대하여 그와 같이 악의에 가득 찬 헛소문을 퍼뜨리는 자들에 대한 느헤미야의 대답은 실로 간단명료했습니다. 
  "그런 일은 없는 일이다. 있다면 다 너희들이 지어낸 것이다."라고 한마디 하는 것으로 족했던 것입니다.
  그는 "내가 바사(페르시아) 임금과의 관계가 어떻고, 여기로 파견된 경위가 이러이러하고 지금까지 되어온 과정이 여차여차한데 이래도 내가 반역자란 말이냐?"라고 구차한 해명을 구구하게 늘어놓으려 하지 않았습니다. 
  "그런 일은 없는 일이다."라는 한마디 말 외에는 다른 사족을 붙일 필요조차 느끼지 않았던 것이었습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 예수님께서 "너희들이 하늘로도 땅으로도 네 머리털로도 맹세하지 말고 오직 너희 말은 예면 예고 아니면 아니라 하라"고 가르치신 말씀의 의미입니다.
  이것은 사람이 자기 말에 대해서 여기저기에 걸고 맹세하게 되는 이유는 평소에 자신의 말에 대해서 다른 사람으로부터 신용을 쌓아 두지 못했기 때문임을 지적하시는 것입니다. 
  하지만 평소부터 그 어느 누구 앞에서나 자기 말에 대한 신용을 지켜온 사람이라면 맹세고 무어고 할 필요가 전혀 없이 그저 예면 '예' 한 마디로, 아니면 '아니오'라는 한마디만 해도 그 말 듣는 사람으로 하여금 믿게 하는데 충분할 것이라는 말씀인 것입니다. 
  느헤미야가 바로 그러한 예를 보여 주는 것입니다. 

  참 안타까운 일이지만, 우리가 교회생활하면서도 그러한 개인적인 헛소문들 때문에 고통당할 때가 자주 생깁니다. 
  아무리 주님 앞에서는 정직하고 신실하게 살려고 노력하고 있어도, 역시 사탄이 시험하는 세상의 영역에 살고 있는 까닭에 우리는 이 '듣자하니'라는 소문 때문에 상처를 입을 때가 없지 않는 것입니다. 
  하지만 바로 그러한 경우를 당할 때, 그저 예면 예라고, 아니면 아니라고 한마디만으로 대답하고 끝낼 수 있는 성도님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저와 여러분이 평소부터 자신의 말에 신용을 지키고 살아간다면, 아무리 그럴듯한 헛소문이 떠돌아다닌다 할지라도 "아니오, 그런 일은 없는 일입니다."라는 말 한 마디만으로도 충분할 것입니다. 
  다른 무슨 변명이 소용 있겠습니까? 
  그 한 마디만 해도 여러분을 신용하는 사람은 믿고도 남을 것입니다. 
  반면에 어차피 여러분을 미워하는 사람이라면 백 마디 변명을 한다 해도 끝까지 믿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니 무엇 하러 쓸 데 없이 긴 말에 정력을 소비할 필요가 있겠습니까?
  평소에 성도 사이에 나누는 대화 한 마디에서부터 늘 진실한 말만 하는 '믿을 수 있는 사람'이 됨으로써 온갖 유언비어와 거짓 소문으로 우리를 옭아매려 하는 사단의 올무를 가볍게 벗어날 수 있는 성도들 되시기 바랍니다. 

  성도 여러분, 본문 제일 마지막 9절에서 느헤미야는 "9이는 저희가 다 우리를 두렵게 하고자 하여 말하기를 저희 손이 피곤하여 역사를 정지하고 이루지 못하리라 함이라 이제 내 손을 힘있게 하옵소서 하였노라"고 하나님께 기도를 드리고 있습니다.
  느헤미야는 그 대적들의 올무가 연이어 자기 머리 위로 떨어지고 있는 상황에서도 실로 그 얼마나 멋있고도 의연한 자세로 대처하고 있습니까?
  그는 이 모든 것이 어찌하든지 자기를 '두렵게 해서' 그 성벽 재건 공사를 완성하지 못하도록 하려는 사단의 시험이라는 사실을 정확히 간파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이제 내 손을 힘 있게 하옵소서"라고 하나님께 기도드렸던 것입니다.
  다시 말하자면 "하나님, 제가 이런 유혹과 시험 때문에 흔들려서야 되겠습니까? 제가 이런 낭설 하나 때문에 겁이 나서 정작 반드시 해 내어야 할 하나님의 '큰 역사'를 이제 '마지막 문짝'만 남겨 놓고서 못 마친 데서야 말이 되겠습니까? 그러니 저로 하여금 이런 올무를 넉넉히 이겨내고 주신 사명을 완수할 수 있도록 더욱 큰 용기와 능력을 더하여 주시옵소서."라는, 실로 꿋꿋한 기도를 드렸던 것이었습니다.

  신자가 하나님 바로 섬기려 하고 교회가 선한 일에 열심을 내면 낼수록 사탄도 절대로 가만히 있지 않습니다.
  반드시 온갖 방해공작의 올무들을 던지기 마련입니다.
  그것이 사탄의 본성이요 본업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오늘 본문의 말씀은 그런 사탄의 올무를 피할 수 있는 필승의 요령을 정확하게 우리에게 가르쳐 주고 있는 것입니다.

  무엇보다도 우리가 오직 주신 사명에 최우선을 두고 거기에만 집중하여 바쁘게 살면 미처 시험이나 유혹이 찾아들 여지가 없게 됩니다.
  영어에 'workaholic'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우리나라말로 하자면 '일벌레' 혹은 문자 그대로는 '일 중독자'라는 뜻입니다.
  자기 일에 대하여 마치 중독된 환자처럼 일하는 사람은 무슨 유흥 따위에 마음이 끌리거나 시간을 쓸 여유가 아예 없게 됩니다.
  마찬가지로 오직 '예수 목적'에 사로잡히고 '하나님께서 주신 사명'을 수행하는 일에 '미친' 사람은 사단의 유혹이 비집고 들어올 틈조차 아예 원천봉쇄되는 것입니다.

  헛소문을 통한 인신공격은 그것이 사실이 아니면서도 대개의 경우 치명적인 피해를 주기 마련입니다.
  최근에 우리나라에서 젊은 연예인들이 잇달아 자살을 한 것도 바로 그 고통을 이겨낼 수 없었기 때문이 아니었겠습니까?
  하지만 물론 우리 기독신자들은 그런 사단의 올무 때문에 자포자기하거나 쓰러져서는 아니 됩니다.
  그저 평소부터 자신의 말에 대하여 진실한 신용을 쌓아두는 것만이 그런 유언비어에 말려들게 되어도 그저 예면 '예' 아니면 '아니오'라는 한 마디로 넉넉히 빠져 나올 수 있는 유일한 대비책입니다.
  결국 거짓은 진실을 무너뜨릴 수는 없으며, 헛소문도 사람들 사이에서 신용 있는 성도에게는 통할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일은 좀 잘 하지만 진실하지 못한 교인이나, 사람은 착하지만 충성된 능력을 내지는 못하는 교인도 있습니다.
  그리고 이 둘 다 사단의 시험 앞에 취약한 존재가 될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깨달아야 합니다.
  조국 복음화와 세계 선교라는 하나님의 '큰 역사'를 맡아서 이제 '성문의 문짝'을 다는 마지막 사명 수행에 전력을 기울이고 있는 이 경향교회의 일원이 되어 있는 저와 여러분에게 오늘도 사단이 온갖 시험의 올무들로써 방해해 오고 있지만 오직 '충성된 사명인'과 '진실한 신앙인'의 자세로써 넉넉히 이겨냄으로써 주님을 섬기는 자신의 거룩한 손을 더욱 힘 있게 만드는 성도들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아멘. 
(석기현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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