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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고백 신앙 (롬 10:9~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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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백 신앙 (롬 10:9~13)
 
하나님께서 만드신 모든 피조물 가운데 유일하게 우리 사람만이 자기의 마음을 말로 표현할 수 있습니다. 마음에 있는 모든 생각을 말로 다른 사람에게 표현할 수 있는 자유를 허락하셨습니다. 물론 동물들도 자기표현의 소리를 발하기는 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단순 표현의 불과한 것이지 사람 같은 언어를 가지고 마음을 교환하지는 않습니다. 말을 할 수 있다는 점에서 인간은 하나님과 공통점이 있습니다. 

이 말이 매우 소중하다는 것은 성경이 증거해 주는데 그 첫째가 하나님 자신이 말씀이라고 하셨습니다. 말씀으로 세상을 만드셨다고 했고 지금도 하나님과 인간의 관계를 갖는 유일한 수단이 우리가 말을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기도를 열심히 드리고 있는데 내 마음 속에 있는 많은 생각을 하나님 앞에 말해서 전달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찬송가를 열심히 부르고 있는데 말에다 감정을 섞어서 하나님께 드리는 언어입니다.

 제가 지금 설교를 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생각을 언어로써 여러분에게 전달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우리나라 말에는 말 한마디를 잘하면 천 냥의 빚을 갚는다는 속담도 있고 말 한마디를 잘못하여 사람을 죽일 수도 있다는 말이 있는데 이것이 말이 가지고 있는 힘입니다. 입으로 말하는 것이 이만큼 중요합니다. 

우리 기독교에는 특별히 고백 신앙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오늘 성경 말씀에 “네가 만일 네 입으로 예수를 주로 시인하며” 말하란 말입니다. “사람이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고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에 이르느니라.” 말하면 구원이 주어진다는 뜻이고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 그래서 입으로 말하는 것은 이렇게 중요하다고 전하고 있습니다. 

혹시 여러분 가운데 “내가 결혼했는지 안했는지 잘 모르겠다.” 그런 사람 손들어보세요. 한분도 안계시죠? 구원은 그것과 똑같습니다. “내가 구원 받았는지 안 받았는지 잘 모르겠다.” 그런 게 아닙니다. 아주 확실한 겁니다. “나는 구원받았습니다.” 라고 입으로 분명하게 시인할 수 있는 사건인데 이 대답이 분명치 않으면 구원의 확신이 없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를 믿는 것인지 안 믿는 것인지 항상 분명치 아니한 그런 생활을 하게 됩니다. 그래서 오늘 이 성경 말씀에는 “네 입으로 말하라.” 예수 그리스도가 나의 구주시란 것을 내 입의 언어로 말을 하면 그것이 구원의 조건이 되는 그런 고백 신앙을 강조하고 있는 것입니다. 

내가 구원받은 사람인지 그렇지 않은 사람인지 자신의 마음을 체크해볼 수 있는 그런 순서가 여러 가지로 나왔는데 제가 말씀드릴 테니 자기 마음을 한번 진단해 보시기 바랍니다.

 “나는 하나님 앞에 죄인이라고 하는 슬픈 고백을 가져본 일이 있는가? 예수 그리스도가 나의 이 모든 죄를 다 씻어주셨다는 사죄의 은혜에 대해서 믿는가? 마지막 심판의 날에 나는 하나님의 나라에 영생을 얻게 될 것에 대한 확실한 믿음을 가지고 있는가?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아들로 우리의 구원자가 된다고 당신은 믿고 있는가?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믿는가? 사도신경이 자신의 마음에 조금도 의심 없이 고백되어지는가? 하나님은 나의 생의 마지막 순간까지 지켜 구원하실 것을 확신하는가? 기도를 드릴 때 이것은 하나님과의 대화라고 하는 간절한 느낌이 있는가? 설교를 들을 때 하나님의 은혜가 내 마음에 내림을 체험하는가? 다른 사람의 영혼을 불쌍히 여겨서 구원의 길로 인도할 마음을 가지고 있는가? 어느 때 인간관계에 원수가 생길 때가 있는데 그를 위해서 기도해본 일이 있는가? 나의 모든 소유는 다 주님의 것이기 때문에 어느 때 주님께 모두를 드릴 수 있는 각오가 되어 있는가? 내가 어떤 고난의 경우, 어떤 상황을 만나도 예수 믿는다고 입으로 말할 수 있는가? 예수를 믿는 기쁨이 이 세상에서 얻는 어떤 기쁨보다도 귀하다는 체험을 한 적이 있는가? 극심한 고난 속에서도 하나님의 은혜를 발견하는가? 내가 승리하고 성취한 모든 부분은 내 공로가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라고 믿는가?” 

그렇게 믿으시면 “아멘”하십시오. 

우리 목사들은 하는 일 가운데 하나가 지금 병원에서 하루, 이틀 아니면 한 시간, 두 시간 후에 세상 떠나실 그런 분들을 열심히 찾아갑니다. 사실 병원에서는 간호사나 의사 선생님도 싫어합니다. ‘목사들은 날마다 와서 저런 일을 하냐?’ 그러나 목사들은 심각합니다. 그 사람이 그 질병에서 자유함을 얻어서 건강이 회복되는 것보다도 더 급한 일이기 때문에 가는 것입니다. “영혼이 구원받느냐 못 받느냐?” 그래서 그 사경을 헤매는 어려운 인생의 고난스런 그런 장면 앞에서도 목사들은 말을 합니다. “예수 믿으십니까? 당신의 죄는 사함 받았다고 믿으십시오. 죽으면 천국 간다고 믿으십시오. 대답하십시오. 지금이라도 예수 이름으로 세례를 받으시겠습니까?” 대답하면 그 자리에서 세례주고 구원의 확신을 줍니다. 

그 작업이 쉬운 작업도 아니고 또 그 병원에서 반기는 것도 아닙니다. 그러나 지금까지 요청이 있을 때 우리 목회자들은 한 번도 거절한 적이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에게서는 그것이 인생의 가장 중요한 순간이기 때문에, 그리고 가장 중요한 일이기 때문에, 성경에 그렇게 하라고 해서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언어로 고백하는 신앙은 기독교에서 참으로 중요하게 생각합니다. 

마태복음 10장 32~33절을 보면 “누구든지 사람 앞에서 나를 시인하면 나도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 앞에서 저를 시인할 것이요 누구든지 사람 앞에서 나를 부인하면 나도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 앞에서 저를 부인하리라.” 말을 분명하게 하는 것이 얼마나 큰 영향이 있다는 것은 의학적으로도 판명이 됩니다. 우리 신경조직 가운데는 중추신경이라는 것이 있는데 이것이 사람의 모든 생각을 몸 전체에 전달하는 사역을 합니다. 

내가 무슨 말을 하느냐에 따라서 그 신경조직이 일을 합니다. “아! 피곤하다!” 말을 하면 신경조직은 어떻게 되느냐? “주인께서 피곤하다 하신다. 모두 다 피곤할 준비를 하라!” 그래서 금방 사람이 다운되어 버립니다. 사람이 그렇게 되어 있습니다. “아! 기분 좋다!” 라고 말하면 “주인이 기분 좋단다. 모두 기분 좋은 준비를 하라!” 받쳐줍니다. 생각하고 말하는 대로 우리 몸이 나를 도와주도록 그렇게 되어 있습니다. “내일 아침에 내가 새벽기도를 꼭 가야 되겠다.” 그러면 신경조직은 “내일 아침에 주인이 새벽 4시에 일어나야 된단다. 긴장하고 준비하라.” 그래서 도와줍니다. 그런데 “새벽에 가봐야 알지.” 그러면 “새벽까지 가봐야 안단다. 기다려라!” 그렇게 되어 있습니다. 말하고 생각하는 대로 사람이 됩니다. 

그래서 일본에서 베스트셀러 “뇌내혁명” 그의 책이 제일 많이 팔렸습니다. “생각하는 대로 된다. 그리고 말하는 대로 된다.” “헌금내기 아깝다.” 그러면 “모든 돈을 감춰라.” 말하는 대로 됩니다. 한국에 왜 그렇게 망하는 사람이 많은가? 엄마, 아빠가 자식들 보고 “망할 자식”이라고 하도 욕을 많이 해서 이 아이는 나는 언젠가는 망할 것이라는 그 신경조직이 컴퓨터에 입력이 되어 있습니다. 그러니까 남을 축복하는 말이 성경에 그렇게 많은 겁니다. 

여러분, 캘리포니아 로버트슐러 목사는 “생각의 가능성(Possibility Thinking)” 이 단어 하나 가지고 미국에서 제일 큰 목회를 했습니다. “생각하는 대로 된다. 네가 무슨 말을 하느냐? 말하는 대로 된다. 네 입술로 네 환경에 고난을 불러오지 말 것이며 나의 입술로 형제에게 실망을 주지 말지어다.” 성경에 보세요. 축복받은 사람은 축복받은 대로 다 되었습니다. 야곱이 12아들을 놓고 “너는 이렇게 되어라. 너는 이렇게 되어라.” 다 축복해주잖아요? 그대로 됐잖아요? 또 이삭이 야곱에게 축복했잖아요? 사실 야곱은 인간성이 좀 좋지 않습니다. 그런데도 아버지의 축복이 그대로 그에게 이루어졌잖아요? 야곱이 요셉을 축복하니 그대로 되었잖아요? 그래서 성경에 남을 향하여 축복의 말을 하라 했습니다. 특별히 성경에 주의 종들이 축복해 준 것은 다 그대로 되었습니다. 

아브라함에게 하나님이 약속하셨잖아요? “너는 복의 근원이 될 것이다. 네가 축복하는 사람은 축복을 받을 것이며” 이렇게 약속했잖아요? 반대도 있습니다. “너를 저주하는 자는 내가 저주할 것이니” 말하는 대로 되게 되어 있습니다. 저는 부정적인 생각을 가지고 있는 사람과 일을 안 합니다. 안됩니다. 여러분이 한번 주변에서 살펴보십시오. 항상 부정적 반응을 일으키고 부정적 말을 하는 사람 중에 성공하는 사람이 있습니까? 없습니다. 교회 안에서도 그런 사람은 항상 해를 끼치지 유익한 어떤 사건이 중심에 서지 못합니다. 그렇게 되어 있습니다. 사람 자체가 그렇게 생긴 겁니다. 그러니까 성경에서 그렇게 축복하는 말, 또 내가 축복을 받는 말 이런 것이 그렇게 중요한 겁니다. “네가 생각하고 입으로 말한 대로 될 것이다.”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면 왜 사람들이 그런 일에 인색한가? 입으로 인정하는 일에 인색한가? 이유가 있습니다. 앞으로 있을지도 모르는 불신앙의 상황을 미리 염려하기 때문에 그런 것입니다. 예를 들면, 내가 집사님인데 ‘집사라고 말했다가 혹시 내가 죄 짓게 되면 그때 더 하나님께 영광을 가릴 것이 아닌가?’ 미래의 나쁜 상황을 미리 걱정함으로써 부정적인 말을 하고 긍정적인 말을 안 하는 그런 경우가 많다는 것입니다. 저 같은 목사는 어디 가서든지 목사의 신분을 드러내야 합니다. 사람들 앞에서 공적으로 시인하지 않으면 ‘내가 목사라고 말했다가 실수하면 더 욕먹을 것 아닌가?’ 미래의 나쁜 상황을 미리 염려함으로 ‘그러면 목사라고 말을 하지 말아야지!’ 이렇게 하면 그 목사는 금방 어떤 시험에 빠집니다. 왜? 마음이 이미 그쪽으로 열려져 있습니다. 생각하는 대로 간다니까요. 

만약에 여러분들이 교회 집사님이고 교회에서 직분을 맡아 수고하고 그러는데 예수 안 믿는 친구들도 많이 있잖아요? 어쩌다가 파티가 벌어져서 신나게 노는데 ‘내가 교회 집사인 것을 감춰야 되겠다.’ 그러며 예수 안 믿는 척하고 그런 행동을 하면 그 사람은 끝없는 시험에 빠집니다. 그렇게 되어 있습니다. 내 입으로 내 신앙을 어떻게 시인하느냐에 따라서 그대로 되어 집니다. 

우리 교회에서 목회자들이 “로만칼라를 입고 다니자. 너무 티 나게 그렇게 하지 말고 그래도 공적으로 우리 교인들 앞에 나갈 때는 이렇게 입고 목회를 하자.” 결정했습니다. 그러니까 얼마나 편한지 모릅니다. 우리가 다 목사인줄 알잖아요? 어쩌다 이러고 은행에 갈 때도 있습니다. “목사님, 오셨습니까?” “네, 목사도 돈이 필요합니다.” 음식점에 들어가도 “어머! 목사님 오셨어요?” 이런 복장으로 미국 사람이나 서구 사람 만나면 틀림없이 그냥 지나가지 않습니다. “Hi! Father!” 꼭 말하고 지나갑니다. 그러면 그게 손해 본 겁니까? 내가 만날 수 있는 얘기하지 못한 모든 고난이나 시험을 미리 막아주는 방파제 역할을 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 하나님 믿는 사람들은 아주 분명하게, 오늘 본문에 보세요. “누구든지 저를 믿는 자는 부끄러움을 당하지 아니하리라.” 주를 시인하고 발표하는 사람은 부끄러울 것 같지만 부끄러움을 당하지 아니하고 감추는 사람은 오히려 부끄러운 시험에 빠져들게 됩니다. 하나님이 그렇게 인도하십니다. 

잠언 29장 25절에 “사람을 두려워하면 올무에 걸리게 된다. 여호와를 의지하는 자는 안전하리라.” 갈보리교회에서 집사되고 청지기된 것을 부끄러우면 하지 마세요. 나도 부끄럽습니다. 하나님은 더 부끄러우십니다. 내가 예수 믿는 사람이라고 하는 것을, 교회에서 집사라고 하는 것을, 나는 성가대원이라고 하는 것을 공적으로 내가 항상 발표하면, 그것을 숨기지 않으면 내가 만날 수 있는 많은 곤란하고 괴로운 사건을 미리 막아주는 그런 힘이 있도록 되어 있습니다. 

시편을 열어보세요. “너희는 소리 내어 여호와께 부르짖고 환란 날에 나를 부르라.” 이 말이 무슨 말입니까? “나는 하나님 믿는 사람이라는 것을 발표하라.” 그런 뜻입니다. 찬송가에 “만 입이 내게 있으면 그 입 다 가지고 내 구주 주신 은총을 늘 찬송하겠다.” 이러한 크리스천의 고백이 당신의 언어 가운데 존재하는가? 우리는 내가 예수 믿는 사람이라고 다른 사람에게 기회가 있을 때 빨리 말하는 것이 좋습니다. 또, 당신도 예수 믿으라고 말해야 합니다. 그게 우리에게 주어진 의무입니다. 

여러분, 마태복음에 베드로가 어떤 일을 당합니까? 울면서 통곡했다고 그랬습니다. 왜 멀쩡한 남자가 울면서 통곡합니까? 사람들 앞에서 주를 부인하고 나서 받은 시험입니다. “네가 예수와 함께 다니는 것 내가 봤어!” “무슨 소리야? 나 그 사람 몰라!” 세 번이나 부인했다가 추악해진 자신의 영적 모습을 보고 나가서 통곡하며 울지 않았습니까? 만일 그때 베드로가 “그렇다. 내가 예수의 제자다. 우리 예수가 도대체 무엇을 잘못해서 이렇게 고난을 당해야 되느냐? 예수가 행한 일은 메시아적 사역이었다. 나는 그를 따르는 제자다. 어쩔래?” 나서 봐요. 하나님이 기뻐서 베드로에게 더 큰 힘을 주셨을 겁니다. 모른다고 발뺌하고 부인하니까 통곡하며 우는 시험에 금방 빠져버렸잖아요? 

우리 사회에서도 가장 비겁하거나 존경받지 못하는 사람은 자기 신분을 될 수 있는 대로 감추는 사람입니다. 정체를 알 수 없는 사람은 간첩이나 사기꾼입니다. 하나님 믿고 사는 것이 얼마나 거룩한 일인데요? 만약 그것이 부끄러우면 직분 다 내어놓으세요. 여러분의 자녀들이 친구들 앞에서 아버지나 어머니를 자랑스럽게 “우리 아버지야! 우리 어머니야! 우리 아버지는 얼마나 우리 자녀들을 사랑하시고 얼마나 헌신적으로 우리 자녀들을 위해서 일하시는지 몰라! 우리 엄마는 어머니 중에 어머니다.” 이런 말을 할 때 어떠세요? 기분이 좋아서 그 자녀를 위해서 뭐든지 희생할 수 있는 마음을 가질 겁니다.

 그런데 객관성 평가를 볼 때 아버지가 사회적 위치도 그렇고 어머니가 그렇게 잘나지도 못하고 그렇단 말입니다. 그러면 “야! 저분 너의 아버지냐?” “아니야, 우리 아버지 아니야.” 그랬을 때 어떠하겠습니까? 하나님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래서 예수께서 “입으로 시인하라. 사람들 앞에서 시인하라.” 그러신 겁니다. “목사된 것을 부끄럽게 생각하면 목사 그만 두라! 집사된 것을 부끄럽게 생각하는 사람 그만 두라!” 어쩌다가 우리 청년들이 군대 간다고 기도 받으러 옵니다. “그래, 너는 이제 거룩한 일에 몸을 바치는 시간을 맞이했다. 

그런데 기도하고 군대 나가서 할 일이 있다. 처음부터 나는 크리스천이라고 밝혀라. 그리고 행동해라. 절대 손해 안날 것이다. 예수 안 믿는 척 하지 말라. 동료들 앞에서 나는 예수 믿기 때문에 예배드리러 가야 된다고 확실히 밝히고 주일날이면 예배 참석하고 당당하게 나가라. 다른 사람들 다 기도하고 밥 먹지 않아도 절대적으로 밥 먹을 때 기도하라. 그러면 너는 존경받을 것이다.” 

저는 경험이 있습니다. 대학원 야간 다녔거든요? 그런데 우리나라에 대학원이 한참 야간 붐이 불어서 옛날 학창 시절이 생각나는 기업인들이 많이 와서 공부했었잖아요? 저도 그때 전도사하면서 야간 대학원에 다녔습니다. 그런데 동기들이 모여서 자기소개를 하자고 했습니다. 어떤 사람은 청와대에 있는 사람입니다. ‘그런 큰 인물이 우리 반이 되었구나!’ 어떤 사람은 사회적 위치가 어마어마한 사람들이 동기가 되었습니다. 내 차례가 되었습니다. 
“네, 저는 양주군에 있는 퇴계원 교회라고 있는데 그곳 전도사입니다.” 
“그러시군요.” 
그 사람들은 사회적으로 쨍쨍한 사람들이 학창시절이 그리워서 다시 와서 공부를 한단 말입니다. 그러면 공부를 마치고 저녁 먹으러 갑니다. 굉장하고 요란한데 가서 저녁 먹을 때가 많습니다. 그러면 나한테도 와서 
“전도사님, 우리와 같이 가야지요. 동기이신데….”
“그래요. 같이 가요.” 나한테 그럽니다. 
“전도사님, 기도를 해주셔야지요.” 
“그래요. 기도 하지요.” 
그런데 요란하게 놀고 그런단 말입니다. 난 전도사라고 처음부터 밝혔으니 그러며 지나갔습니다. 

졸업할 때 쯤 됐는데 나한테 5~6명이 일대일 식사 대접하면서 
“전도사님, 존경합니다. 내가 아무개 교회 집사입니다.” ‘집사가 그렇게 요란했구나!’ 

또 어떤 사람은 “전도사님, 그 교회를 아십니까?” 
“아, 그럼요.” “내가 거기 집사입니다.” 모두 집사님들입니다. 

그런데 집사라고 말한 사람이 한 사람도 없습니다. 나한테만 이야기하는 겁니다. 어쩌다 자기 부인들 아프고 병원에 입원하면 자기 목사님들 다 계신데 나에게 “전도사님, 어렵지만 와서 기도 좀 해줘요. 전도사님 기도를 하나님이 들어주실 것 같아.” 그러면서 졸업할 때 쯤 다 나에게 와서 자기가 집사라고 밝히는데 그동안 공적으로는 한 번도 이야기 안했습니다. 그래서 내가 나중에 어느 식사 자리에서 “이 나쁜 집사들아, 집사면 처음부터 집사라고 말해야지 요란하게 놀고 나서 맨 나중에 나한테 그렇게 고해성사하면 되냐? 이제부터는 어디 가서 처음부터 집사라고 밝혀라! 그러면 하나님이 그 길로 가게 인도하실 것이다.” 내가 대학원 시절에 그런 적이 있습니다. 

우리들이 순교자를 존경합니다. 왜 존경합니까? 나는 예수 믿는다고 말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너는 죽는다.” 
“괜찮습니다." 
이게 주를 시인하는 거요. 예수 믿는 것이 부끄럽거나 집사된 것이 감춰야 할 사건이라면 그만 두세요. 가장 거룩한 일을 우리가 하면서 가장 자랑스럽게 생각해야 될 것을 하면서…. 바울이 뭐라고 그랬습니까? “나는 십자가 밖에는 자랑할 것이 없다.” 그러니까 하나님이 그에게 힘을 주어서 2000년 역사에 그 사람보다 더 크게 쓰임 받은 사람 없습니다. 말하는 대로 됩니다. 생각하는 대로 됩니다. 

저는 기독교 공동체에서 발간하는 책자가 많이 옵니다. 될 수 있는 대로 다 읽어 봅니다. 책에 “부끄러운 간증”이라고 누가 글을 썼는데 집사님이 썼습니다. 자기는 사업을 많이 하는 집사인데 이 거래처에 관계하는 많은 사람들과 늘 유흥업소에 많이 가야되는 괴로운 점이 있다고 하셨습니다. 어쩔 수 없이 그렇게 교제를 하고 그랬는데 어느 날 그날도 가서 술을 마시며 유흥업소에서 아가씨들과 재미나게 놀고 헤어지는데 자기 옆에 있던 아가씨가 
“아저씨, 이것 하나 드릴게요.” 
“이게 뭐냐?” 
“예수 믿으세요.” 전도지였습니다. 
“응?” 
“제가 좀 가정이 가난해서 할 수 없이 유흥업소에서 일을 해요. 저는 예수 믿는데요, 아저씨도 예수 믿으세요. 교회 나가세요. 아저씨, 혹시 교회 나가세요?” 
“응? 으응….” 
받아가지고 집에 와서 고민이 되는 겁니다. ‘그 아가씨는 나에게 자기가 크리스천이라고 말하고 나를 전도하기 위해서 전도지를 주었는데 나는 왜 그에게 집사라는 말을 안했는가? 집사가 부끄러운 것인가? 아! 오늘 죄 지었다. 부끄럽다.’ 그런 글이에요. 어느 상황, 어디에서나 “나는 예수 믿습니다. 주님의 제자 되었습니다.” 입으로 시인하세요. “사람이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고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에 이르느니라.” “나는 목사가 되었어! 나는 교회 집사요! 나는 교회에서 청지기 사명을 감당하는 사람이요.” 어디 가서나 말할 수 있는 힘을 가지라는 겁니다. “왜 가장 거룩한 일을 하면서 부끄러워하느냐? 사람 앞에서 나를 부인하면 나도 부인할 것이다.” 여러분, 모든 영광을 하나님께 돌립시다!

「 하나님 아버지, 감사합니다. 오늘 너희들 입으로 시인하라. 구원에 이르도록 너희 자신이 말하라. 고백 신앙을 가르치는 성경구절을 저희들이 생각하면서 하나님이 주신 하나님 자녀의 이 삶을 자랑스럽게 어떤 상황, 어디에서나 발표하고 살아갈 수 있는 능력 있는 주님의 제자들이 되게 하시옵소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
(이필재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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