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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미혹되지 말라 (살후 2: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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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혹되지 말라 (살후 2:1~4)

세상 만물이 시작할 때가 있고 끝날 때가 있습니다. 한해가 시작되는 것이 정월 초하루라면 한해가 끝나는 때는 12월 31일입니다. 이것은 아주 분명합니다. 누구도 부인할 수 없습니다. 학생들은 학교에 입학하면서 공부가 시작이 됩니다. 일반적으로는 졸업으로 공부가 끝납니다. 물론 그 중에는 중도에 학업을 그만두는 사람도 있기는 하지만 그래도 그 끝을 알 수가 있습니다. 

한데 인생은 시작은 알아도 언제가 끝나는 날일지 알지 못합니다. 죽음으로 끝난다는 것은 알지만 그 죽음의 날이 언제인지는 분명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이를 가리켜서 분명치 않다고 말합니다. 물론 어느 사람이든지 자기의 날이 언제 끝나게 될까에 대해 궁금해 합니다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끝나는 날을 알 수 있는 경우는 아주 드뭅니다. 그래서 불안해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우리 기독교인들의 가장 큰 관심사는 언제 주님이 다시 오실 것인가 일 것입니다. 그날이 언제인지 알 수만 있다면 참으로 주님 맞이하기가 쉬울 것 같은데 실제로는 아무도 모릅니다. 그것은 신랑을 기다리는 열 처녀가 또한 그랬습니다. 우리네처럼 어느 날 어느 시에 결혼식이 시작된다고 하면 기다리기가 쉬울 텐데 이스라엘의 경우는 한 주간의 어느 날이라는 것 외에는 정확하게 알려져 잇는 것이 없습니다. 

어느 때 신랑이 올지 모릅니다. 그래서 모든 준비를 갖추고 기다립니다. 하지만 다섯 처녀는 그 준비가 부족했습니다. 그래서 막상 신랑이 왔을 때는 기름이 떨어져서 뒤늦게 기름을 준비하려고 하다 보니 신랑을 맞을 수가 없었다고 했습니다. 주님이 오시는 날을 미리 알 수만 있다면 미리 놀고 싶은 것 다 놀고 하고 싶은 것 다 하고 그리고 나서 차분하게 준비를 할 수도 있을 것 같은데 그날과 그 때는 아무도 모른다고 했습니다. 그것은 오직 하나님의 계획 아래 있을 뿐입니다. 그래서 주님 오실 때 내 준비가 부족해서 다섯 처녀처럼 주님을 맞이하지 못하게 되는 것은 아닌가 싶어 불안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내 스스로도 나 자신을 믿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언제 내가 삐끗할지 모릅니다. 마음으로는 항상 밝게 웃으면서 세상을 살고 정말 주님 오실 날 자신 있게 웃으면서 주님을 맞이하고 싶은데 그게 막상 쉽지가 않습니다. 마치 시험을 앞두고 준비하는 학생이 충분히 준비해야겠다고 하면서도 그 시간들을 효과적으로 사용하기가 쉽지 않은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며칠만 힘껏 고생하면 된다는 것을 모르는 게 아닙니다. 근데 그 며칠을 지낸다고 하는 것이 얼마나 힘든지요. 그래서 조금만 쉬자 조금만 놀고 다시 하자고 하지만 그러다 보면 모든 것이 엉망이 되어버리고 말았던 그런 경험들이 우리들에게 있지를 않습니까? 내일이 시험입니다. 밤을 새워가면서라도 시험 준비를 해야 되는데 그날따라 얼마나 피곤하기만 하고 눈이 막 감기는데 그래서 생각합니다. 지금 잠시 눈을 붙이고 새벽같이 일어나서 다시 준비하자. 그런데 막상 새벽에 일어나려고 하니 몸이 말을 듣지 않습니다. 눈이 떠지지를 않습니다. 그러다 보니 새벽에 하겠다고 하던 계획은 어디로 가버리고 그만 시험 시간에 늦을까봐 허둥지둥 달려가던 때도 있습니다. 그래서 뒤늦게 후회합니다. 차라리 잠을 자지 말고 조금만 더 준비할 것을 아니 며칠만 더 빨리 준비하면 되었을 것을……. 하지만 이미 기차는 떠나 버린 다음입니다. 그래도 기차는 지금 못 타면 다음 차를 타도되지만 인생은 아닙니다. 다음이 결코 보장이 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주님이 언제쯤 오실까? 어떤 사람은 금방이라고 합니다. 어떤 사람은 아직 멀었다고 합니다. 하지만 누구의 말이 옳은지는 아무도 모릅니다. 단지 마지막 그날 주님이 오시는 그날은 마치 도적이 올 때처럼 그렇게 어느 날 갑자기가 될 것만은 분명합니다. 하지만 언제가 되던지 주님 앞에 설 수 있도록 준비하여야 한다는 것만은 누구도 부인할 수 없습니다. 그렇다면 주님을 맞이하기 위한 우리의 준비를 어떻게 해야 될까요? 


먼저 생각할 것은 주님이 다시 오시는 그날 우리 모두는 주님 앞에 서게 될 것이라는 것입니다. 

지금 온 나라가 광우병에 대한 염려로 시끌시끌합니다. 소고기만 먹었다 하면 금방 광우병에 걸려 미쳐버릴 것만 같은 두려움으로 가득합니다. 그런 것을 왜 수입하려고 하느냐고 합니다. 그런데 그렇게 따지고 들면 그보다 더 무서운 것은 AI 그러니까 조류독감입니다. 하지만 그래도 익혀만 먹으면 괜찮다고 합니다. 다행스러운 것은 아직까지 우리나라에서 조류독감에 걸린 사람이 아무도 없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우리네가 즐겨 먹는 김치가 조류독감을 막아주는 역할을 한다고 하는 연구 발표도 있기는 하지만 확실한 것은 아닙니다. 어쨌든 조심해서 문제될 것은 없습니다. 

그런데 사실은 소고기보다 닭고기보다 더 무서운 것은 수입 농산물들입니다. 거의 중국에서 들여옵니다. 그런데 중국산치고 믿고 먹을 수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습니다. 치명적인 농약들을 사용해서 농사지은 것들이 대부분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중국에서 생산되는 농산물을 수입하면 안 된다고 촛불집회를 하지는 않습니다. 

아이들이 즐겨 가지고 노는 장난감들은 또 어떠합니까? 어린이들에게 아주 치명적인 그런 재료를 가지고 만든 장난감들이 태반입니다. 그런데 그런 장난감을 수입하면 안 된다고 촛불집회 하는 것 보셨습니까? 그런데 이런 음식물이나 장난감보다 더 무서운 것은 사실 우리가 타고 다니는 자동차입니다. 광우병으로 죽은 사람이라야 전 세계적으로 몇 천 명에 불과합니다. 그것도 거의 다가 영국 사람들입니다. 다른 나라에서는 광우병에 걸려 죽은 사람이 거의 없습니다. 

하지만 자동차는 어떻습니까? 가뜩이나 지금 기름 값이 하늘 높은 줄 모르게 하루 다르게 뛰어 오르고 있어서 자동차를 계속해서 타야 되냐 말아야 되냐 하고 고민들을 하지만 보다 근본적인 문제는 자동차로 인해서 죽어가는 사람이 우리나라만 하더라도 매년 몇 천 명인지 모릅니다. 그러니까 이런 위험한 물건을 왜 만들어 파느냐 자동차를 다 없애 버리라고 하는 사람은 하나도 없습니다. 하지만 보다 근본적인 문제가 있습니다. 음식물들이나 자동차는 기껏해야 우리 목숨 하나 앗아가는 것으로 끝납니다. 그런데 죽음이 끝이 아니기 때문에 문제입니다. 

그 다음에 있게 될 심판의 날을 우리가 어떻게 견딜 수 있느냐 하는 것에 대해서는 거의 무지합니다. 주님이 다시 세상에 오시는 그날이 온 세상을 심판하실 바로 그날입니다. 그날에는 죽은 자나 살아있는 자 할 것 없이 다 다시 오시는 주님 앞에 서서 심판을 받게 될 것인데 그 심판 다음에 믿는 자는 영생으로 믿지 않는 자는 영벌로 갈라지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함께 사랑하며 살아가는 가족들 사이에도 마찬가지입니다. 한 부자가 죽음에 이르렀습니다. 그런데 자기가 간 곳이 너무도 비참합니다. 이럴 줄 알았더라면 내가 그렇게 살지는 않았을 텐데 하고 아무리 후회해도 때는 이미 늦었습니다. 그래서 이 세상에 남아 있는 자기 가족들만이라도 자기와 같이 비참한 곳으로 떨어지지 않게 되기를 간구해 보지만 더 이상 그 청은 받아들여지지를 않습니다. 이미 그럴 때가 지났다는 것입니다. 그게 마지막 날의 무서움입니다. 

그날에 주님께서 모든 무리를 양과 염소로 구분한다고 합니다. 양으로 구별된 사람들에게 주님이 말씀하십니다. 너희는 내가 주릴 때 먹을 것을 주었고 내가 목말라 할 때 마실 것을 주었으며 내가 헐벗었을 때 입을 것을 주었다. 우리가 언제 그렇게 했습니까 할 때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라고 주님 말씀합니다. 그래서 우리가 세상에 살아 있는 동안 선을 베풀며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에베소서 4장 28절은 말합니다. “도둑질을 하는 사람은 다시 도둑질을 하지 말고 수고를 하여 제 손으로 떳떳하게 벌이를 하십시오. 그리하여 오히려 궁핍한 사람에게 나누어 줄 것이 있도록 하십시오.” 이것이 무슨 뜻입니까? 우리가 다른 사람들에게 나누어주려고 하는 마음으로 땀 흘려 수고하게 되면 하나님께서 우리의 삶을 우리의 하는 일을 보장해 주신다는 것입니다. 바로 이런 수고를 아끼지 않는 사람들이 이 땅에서도 번성할 것이요 하나님 나라에서 함께 안식하게 될 것입니다. 

밧모 섬에서 주님이 다시 오실 것이라는 계시를 보았던 요한 사도가 뭐라고 고백합니까? 마라나타. 주님 어서 오시옵소서였습니다. 그 요한 사도의 고백처럼 우리는 지금 당장 주님이 다시 오신다는 그런 마음으로 오늘을 살아야 할 것입니다. 아니 지금 우리가 주님 앞에 서 있다는 마음으로 하루하루를 살아가야 합니다. 그것도 주님의 말씀처럼 보잘 것 없는 그런 사람까지도 돌보며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런 우리의 노력은 우리가 이런 사랑으로 하나가 되는 것으로 나타나야 합니다. 주님의 마지막 기도도 그랬고 바울 사도의 권면도 그렇듯이 우리는 하나가 되어야 합니다. 

기독교의 가장 큰 문제가 바로 배타성이라고 이야기하는 분들도 계십니다. 오직 믿음으로만 구원을 얻는다 그것도 예수님 한 분 외에는 우리를 구원하실 분이 없다고 하는 점에서는 아무리 누가 뭐라고 해도 우리는 결코 양보할 수가 없습니다. 그것은 분명히 주님이 우리들에게 그를 가르쳐 주셨기 때문입니다. 거기에 다른 구원은 없다고 했습니다. 한데 같은 믿는 사람들 사이에서도 이런 배타성을 보인다면 내 교회만 구원이 있고 내 교파만 구원이 있다고 하는 것은 도무지 받아들일 수도 없고 받아들여서도 안 됩니다. 그런데 이런 배타적인 모습이 같은 교회 안에서조차 있다고 하는 것입니다. 

나와 가까운 사람 나와 생각이 비슷한 사람끼리만 어울립니다. 다른 사람은 외면해 버립니다. 한데 그것은 아닙니다. 주님이 내가 비옵는 것은 아버지와 내가 하나이듯이 저들로 서로 하나가 되도록 하기 위해서라고 했는데 우리가 하나 되지 못한다면 어찌 주님 앞에 같이 설 수가 있겠습니까? 나는 저 사람과는 같이 할 수 없다고 한다면 주님 앞에 설 때 그 사람이 서 있는 반대편으로 나는 가야 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렇다면 내가 있을 수 있는 곳은 어디입니까? 내가 외면했던 그 사람이 주님 편에 있다면 나는 결국 주님에게서 버려지고 마는 것이 아니냐는 말입니다. 

마태복음 10장 40절로 42절에 보면 “너희를 영접하는 자는 나를 영접하는 것이요 나를 영접하는 자는 나를 보내신 이를 영접하는 것이니라 선지자의 이름으로 선지자를 영접하는 자는 선지자의 상을 받을 것이요 의인의 이름으로 의인을 영접하는 자는 의인의 상을 받을 것이요 또 누구든지 제자의 이름으로 이 작은 자 중 하나에게 냉수 한 그릇이라도 주는 자는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 사람이 결단코 상을 잃지 아니하리라 하시니라”라고 하셨는데 영접은커녕 외면하고 대적하고 있다면 그에게는 상은커녕 오히려 벌밖엔 없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양과 염소를 구별하면서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요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하지 아니한 것이 곧 내게 하지 아니한 것이라고 하신 주님의 말씀을 생각해보면 그 사람이야말로 버려질 수밖에 더 있겠습니까? 누구는 이런 저런 문제가 있어서 그렇다고 하겠습니까? 그럼 하나님 앞에서 온전할 수 있는 사람이 누가 있습니까? 과연 하늘 문을 누가 닫을 수가 있습니까? 하늘문은 오직 하나님 한분만이 닫을 수 있는 것인데 내가 그 문을 가로 막고 서서 나도 들어가지 않고 다른 사람도 들어가지 못하도록 막고 있다면 그 사람에게 주어지는 하나님의 진노를 어떻게 감당할 수가 있겠습니까? 그랬기에 왜 예수님은 세리와 같은 죄인과 함께 먹고 마시느냐고 하는 바리새인들을 향해서 주님이 오히려 세리와 창기가 먼저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것이라고 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제는 모든 사람을 품에 안으십시오. 그 누구라도 주님 앞에 있는 사람을 어떤 조건을 따져서 외면하지 마십시오. 또 그 누구도 대적하려고 하지 마십시오. 오히려 선지자는 선지자의 이름으로 제자는 제자의 이름으로 섬기십시오. 그 이름과 직분에 합당한 섬김이 우리들에게 있어야 하고 우리는 그 분수를 결코 넘어서지 않도록 하여야 할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 앞에 다 함께 서는 그날 우리 모두 함께 하나님 나라로 당당하게 들어갈 수 있기를 그것도 귀한 상급과 왕관을 받아 누리는 우리 모두가 될 수 있기를 축원합니다.


다음으로 그 누구로 인해서도 흔들리거나 미혹되지 않아야 합니다.

얼마 전 아프가니스탄에 봉사활동을 떠났다 피랍된 사람들로 인해서 온 나라가 시끄러웠던 적이 있습니다. 그때까지 숨죽이고 있던 사람들이 그것을 기회로 해서 기독교에 대한 비난의 화살을 퍼부어댔습니다. 심지어는 이 땅에서 모든 기독교인들을 다 말살해야 한다고까지 떠들어대는 사람들이 생겨났습니다. 물론 그들이 그렇게 비난하도록 하는 빌미를 제공한 것도 사실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우리의 신앙을 우리가 포기해야 할 이유도 없고 또 복음 전파를 멈추어야 할 것도 아닙니다. 그것이 바로 마지막 때의 한 모습이라고 주님께서도 분명하게 말씀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런 안티 기독교 운동보다 더 무서운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곧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 신앙에서 떠나도록 유혹하는 은밀한 세력입니다. 그들은 결코 안티 기독교인들처럼 드러내놓고 기독교를 대적하지 않습니다. 그들은 마치 예수님께 다가온 사탄처럼 은밀하게 부추기면서 믿음의 길에서 벗어나도록 그렇게 우리들을 미혹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한때 신앙촌으로 잘 알려진 박태선씨가 그런 역할을 했습니다. 한때는 통일교가 엄청나게 기독교인들을 흔들어댔습니다. 그런데 지금도 그런 유혹은 계속되고 있습니다. 신천지가 오늘날의 가장 어려운 세력입니다. 하지만 이런 이단들은 결코 두려운 존재가 아닙니다. 시간이 지나가면서 그 정체가 낱낱이 드러나고 있기 때문입니다. 

오히려 마지막 때가 가까울수록 더 우리를 흔들어놓는 세력은 바로 천주교입니다. 그들은 자기네가 정통이라고 합니다. 그들은 누구도 외면하지 않고 다 포용한다고 말합니다. 그러면서 은근슬쩍 예수만이 구세주인 것이 아니라고 은밀하게 가르치고 있습니다. 예수의 어머니이신 마리아 역시 우리를 구원할 구세주라고 합니다. 오히려 예수는 마리아 품에 안긴 어린아이일 뿐입니다. 아니 예수는 여전히 십자가에 매달린 채 죽어있는 존재일 뿐입니다. 그 예수를 품에 안고 있는 마리아야 말로 진짜 구세주라고 합니다. 그러면서 우리는 결코 교회끼리 다투지도 않는다고 합니다. 그리고 교황이야 말로 베드로의 정통성을 이어서 온 교회와 세상을 다스리는 존재요 교황무오설 다시 말해서 교황은 아무런 죄도 흠도 없는 존재라고 가르칩니다. 

한데 성경이 무어라고 가르칩니다. 천하에 의인이 있는가 하고 찾아봤더니 한 사람도 없다고 했습니다. 오히려 모든 사람이 다 죄 가운데 태어났으며 죄를 범하고 있다고 가르칩니다. 그러므로 여기에 속지 않도록 하여야 할 것입니다. 

또 하나 교회 안의 위험한 가르침이 있는데 그것은 결코 헌금을 강조해서는 안 된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곧 돈의 노예가 되는 길일뿐이라고 합니다. 하지만 성경은 뭐라고 말씀합니까? 오히려 하나님 앞에 예물을 가져오라고 가르치라는 것입니다. 내 앞에 빈손을 보이지 말라고도 합니다. 너희가 내 것을 도적질하고 있다고도 합니다. 그런데 그런 것은 어디까지나 율법일 뿐이라고 합니다. 과연 그럴까요? 아닙니다. 예수님께서는 나는 율법을 폐하기 위해서 온 것이 아니다. 오히려 율법을 온전케 하기 위해서 왔노라고 하셨고 어느 것 하나도 버리지 말고 다 지켜야 한다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왜 다른 것은 다 괜찮고 예물에 관해서만 그렇게 이야기를 합니까? 오히려 하나님 앞에 예물을 드리면 복 받는다고 하는 가르침이 잘못된 것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정말 그런 것입니까? 아닙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분명한 약속입니다.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것을 따르는 것이 어찌 미신입니까? 어찌 그것이 잘못된 가르침입니까? 아니요 그게 바로 가르치는 것입니다. 심지 않고서야 어찌 거둘 수가 있어요? 심어야 거두는 것입니다. 그게 성경이 말씀하는 진리입니다. 

어떤 사람은 그건 율법일 뿐이라고 하면서 외면하는데 예수님께서는 이것도 지키고 저것도 버리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오히려 예수님의 말씀은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께 드리라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사탄은 반대로 이야기합니다. 내게 있는 모든 것이 내 것이라는 것입니다. 내 것 가지고 왜 내 맘대로 쓸 권한이 없느냐고 합니다. 그럼 내 것을 가지고 하나님을 위해서 쓰면 안 되는 것입니까? 한데 자세히 살펴보면 내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주신 것입니다. 내게 재물 얻을 능을 하나님이 주셨기에 내 것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이 내게 있는 것이지 하나님이 허락하지 않으시면 내 목숨마저도 보장할 수가 없는데 어떻게 그게 내 것이 될 수가 있단 말입니까? 그래서 너희는 선한 청지기처럼 그렇게 섬기라고 하신 것입니다.

 청지기는 주인의 것을 대신 맡아서 관리하는 사람입니다. 그렇다면 주인의 뜻대로 해야 하는 것입니다. 바로가 모세에게 말합니다. 너희가 가서 하나님을 경배하되 소나 양은 다 두고 가라고 합니다. 그때 모세가 뭐라고 합니까? 빈손으로라도 하나님을 경배하자고 했나요? 아니요? 그럴 수 없다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신구약 성경 전체를 통해서 우리들에게 주신 그 어떤 말씀도 우리는 아니라고 해서는 안 됩니다. 일점일획이라도 더하거나 빼지 말라고 주님 말씀하셨으니 우리는 오직 주님의 말씀대로 따를 뿐입니다. 

기억하십시오. 우리의 생명의 날이 언제까지나 계속되는 것은 아닙니다. 그렇기에 아직 우리에게 생명이 있을 때 우리는 주님의 말씀을 따라 살아야 하는 것이요 그래서 주님이 오시는 그날 칭찬과 상급이 따르는 귀한 삶을 우리 모두가 살아갈 수 있기를 축원합니다.

어제 우리는 새로 집을 장만한 집사님 댁을 함께 방문하고 축하하며 하나님께 경배를 드렸습니다. 그런데 이 땅에서 우리가 잠시 살다가 집은 화려하고 좋은 집을 얻으려고 하면서 막상 영원한 하나님 나라에 우리가 들어가 살게 될 집은 전혀 준비조차 하지 못하고 있는 어리석은 자가 되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아니 하나님 나라는커녕 오히려 생명마저도 잃어버리는 사람이 우리 가운데 한 사람도 있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마지막 때가 가까울수록 우리를 미혹하여 넘어지게 하는 그런 일들이 여러 가지 모양으로 우리에게 다가와 우리를 흔들려고 할 터인데 여기에 흔들리는 자가 아니라 오히려 아무리 험한 세상이 이어진다고 해도 믿음 안에 굳게 허서 구원의 그날 영광의 그날 주님이 다시 오시는 그날을 바라보며 주님 앞의 상급을 바라며 오늘을 살아가는 하나님의 사람들 다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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