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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목자없는 양을 향한 아버지의 마음 (마 9:35~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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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자없는 양을 향한 아버지의 마음 (마 9:35~38)
 
모름지기 사람에게는 지식이 있어야 합니다.  사람에게 지식이 부족하면 미련해집니다.  그러나 이 지식이라는 것도 단순히 지식을 위한 지식은 이 시대의 또 다른 바리새인과 서기관을 만들뿐입니다.  지식만을 위한 지식은 종교인을 만들뿐입니다.  지식만을 위한 지식은 논쟁가를 만듭니다.  그래서 자신이 가진 그 지식으로 상대방을 끊임없이 정죄하고 판단합니다.  그러한 지식은 끊임없이 편당을 만들어서 공동체를 분열시킵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의 지식은 참된 진리에로 나아가야 됩니다.  진리에로 눈을 떠야 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인생에 있어서 성공이란 뛰어난 재능이나 학문을 갖는데 있는 것이 아니라 자신을 잘 다듬는데 있습니다.  믿음으로 다듬어만 지면 큰 그릇이 됩니다.  꿈과 비전을 가지고 잘 다듬으면 됩니다.
 
기억하십시오.  결국 인간은 자신에 의해 만들어지기도 하고 자신에 의해 파괴되기도 하는 법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믿음의 사람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자신을 꿈과 비전의 사람으로 새롭게 만들어가야 합니다.

옛 속담에 '모난 돌이 정 맞는다'는 말이 있습니다.  말과 행동에 모가 나면 미움을 받는다는 말입니다.  맞는 말입니다.  말과 행동을 부드럽게 하십시오.  말과 행동이 거치면 사람들로부터 미움을 받습니다.  말과 행동이 거치면 자신의 주변에 사람들이 모이지 않습니다.  그런 사람은 공동체로부터도 신뢰를 잃어버리고 말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믿음의 사람은 그 성품이 모가 나면 안됩니다.  그 성품이 온유하고 겸손해야 합니다.  그 성품이 부드러워야 합니다.

하나님의 진리를 깨달으면 깨달을수록 우리의 성품이 주님을 닮아야 됩니다.  우리가 믿음의 생활을 한다고 하면서도 그 성품이 변하지 않는다면 그는 지금 믿음의 생활을 잘 못하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사도 바울을 보십시오.  예수를 믿기 이전의 바울만큼 성품이 모난 사람이 또 있을까요?  예수를 믿기 이전의 바울은 자기 감정에 충실했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예수 믿는 사람을 잡아들이는데 누구보다 앞장섰습니다.  싸우고 분쟁하는 자리에는 언제나 바울인 사울이 있었습니다.  스데반을 돌로 쳐죽이는데 우두머리가 되어서 그 자리에 있었습니다.
 
그런 그가 다메섹에서 예수를 만난 이후로 그의 모난 성품이 변하기 시작합니다.  그도 예수를 믿고 나서 처음부터 그의 성품이 완전히 바뀐 것이 아닙니다.  예수를 믿고 나서도 그의 성품은 여전해서 바나바와 다투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점점 변해갑니다.  나중에 그는 이렇게 말합니다.
"내가 그리스도를 본 받는 것처럼…"
그는 그렇게 예수 그리스도를 본받아 갔습니다.  그리고 그는 가장 아름다운 사랑장을 쓰기 시작합니다.
 
♬"사랑은 언제나 오래 참고 / 사랑은 언제나 온유하며
사랑은 시기하지 않으며 / 자랑도 교만도 아니하며
사랑은 무례히 행치 않고 / 자기의 유익을 구치 않고
사랑은 성내지 아니하며 / 진리와 함께 기뻐하네"♬

모세는 어떠했습니까?  그는 성격이 불같은 사람이었습니다.  좋고 나쁜 것을 감출 줄 모르는 사람이었습니다.  자신의 불같은 성격 때문에 결국에는 사람을 죽이고 미디안 광야로 도망을 갑니다.  그가 미디안 광야로 도망을 갔다는 것은 갈 데까지 갔다는 것입니다.  그 한 번의 불같은 성질 때문에 말입니다.  그러나 그는 광야 40년의 세월 속에서 자신의 모난 성품을 바꾸어가기 시작합니다.  그의 변화된 이 성품을 바라보시고 하나님께서는 민수기 12장 3절에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이 사람 모세는 온유함이 지면의 모든 사람보다 더하더라."
표준새번역에서는 이렇게 말합니다.
"모세로 말하자면, 땅 위에 사는 모든 사람 가운데서 가장 겸손한 사람이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도 나름대로 모난 성품을 다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변해가야 합니다.  기억하십시오.  영의 문제는 결국 성품의 문제입니다.  우리가 예수를 믿고 영의 생활을 한다면 먼저 변해야 하는 것이 성품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성질대로 살지 말고,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변화된 성품으로 사십시오.  성령은 그 사람의 변화된 성품을 붙듭니다.  영적인 사람은 그 사람의 성품이 하나님의 능력에 붙잡혀 있습니다.  우리의 성품은 은사와 같은 것입니다.  은사는 개발해야 합니다.  자신의 성품도 예수 그리스도를 본 받아가려는 부단한 자기 노력이 있어야 합니다.  그래서 우리의 성품은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야 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성품을 자신의 감정에 붙잡히지 말고 하나님의 능력에 붙잡히시기를 바랍니다.  우리의 성품이 하나님의 능력에 붙잡히면 온유해집니다.  겸손해집니다.  그러면 우리의 성품이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낼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인생에서 정말 성공하기를 원하십니까?  예수님을 배우십시오.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온유하고 겸손하신 예수님의 성품을 닮으십시오.  우리의 성품이 예수님을 닮아 가면 우리 주위에는 사람이 몰려들 것입니다.  무너진 관계가 회복될 것입니다.  비전이 새로워질 것입니다.  내 안에 기쁨과 평안이 충만할 것입니다.

오늘 주님의 전을 찾아오신 사랑하는 여러분, 이 시간 성령의 충만함으로 자신을 개혁하십시오.  육신을 꾸미는 것도 개혁입니다.  지성의 세계를 위해 공부를 많이 하는 것도 개혁이고, 환경을 바꾸는 것도 개혁입니다.  그러나 그것보다 더 놀라운 개혁은 성령의 권능을 받아 자신의 성품을 바꾸는 것입니다.  성령으로 개혁된 사람은 열정이 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돈만 재산이 아닙니다.  활활 불타는 가슴도 재산입니다.  청년이 좋은 것은 저들에게 불타는 가슴이 있기 때문입니다.  불타는 열정의 사람은 무엇인가 했습니다.  열정은 그 사람의 개성을 만들고 더 큰 사랑을 이루게 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세상의 모든 기적은 열정이라는 열쇠로 열리고 있습니다.  우리는 열정적으로 말씀을 증거하는 목사님에게서 더 큰 은혜를 받게 됩니다.  사람이 좋은 말로만 은혜를 받는 것이 아닙니다.  말보다 더 중요한 것은 그 속에 나타난 경험된 진리를 증거하기 위해 애쓰는 노력과 땀과 그 모든 것들을 통하여 은혜를 받습니다.
 
열정이 있으면 얼굴 표정이 변합니다.  근심과 걱정으로 어둡고 답답하던 표정이 밝고 매력적이 됩니다.  무표정하던 얼굴이 활기차고 싱싱해집니다.  성령이 충만하고 열정이 있는 사람은 생기가 넘치고 평안합니다.  그런데 이 열정도 자신의 성품이 뒷받침이 될 때에만 비전으로 나아갈 수 있습니다.  자신의 성품이 뒷받침되지 못하면 이 열정은 자기 감정의 폭발과 인간 관계의 단절만 가져올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무엇보다도 사람을 귀하게 여기십시오.  성품이 온유하고 겸손한 사람은 자신에게 다가오는 사람, 자신과 관계하는 모든 사람을 소중하게 대합니다.  성공은 하나님이 직접 주시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사용하는 사람을 통해서 일어난다는 것을 명심하십시오.  사람을 우습게 여기는 사람은 절대로 성공하지 못합니다.  어린아이라 할지라도 그 한 영혼을 귀하게 여길 줄 모르는 사람에게는 결코 다른 영혼을 붙여주지 않습니다.  우리는 아주 작은 어린아이에게서도 신뢰를 받아야 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이 시간 예수님의 말씀을 들으십시오.

"누구든지 나를 믿는 이 작은 자 중 하나를 실족하게 하면 차라리 연자 맷돌이 그 목에 달려서 깊은 바다에 빠뜨려지는 것이 나으리라"

사랑하는 여러분, 한 사람을 소중히 하십시오.  지금 만나고 있는 사람을 붙들고 놓치지 마십시오.  무엇보다도 원수를 만들지 말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일을 하는데는 사실 한 사람의 원수도 너무 많습니다.  자기 성품이 변하고 개혁이 된 사람은 언제난 사람을 귀중히 여겼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의 성품은 한 영혼을 살리는 거룩한 도구가 되어야 합니다.  결코 내 모난 성품이 한 영혼을 실족하게 하는 일은 없어야 합니다.  잊지 마십시오.  우리가 해야 할 일 중에서 가장 중요한 일은 영혼을 구하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 36절에 보면 이 세상을 바라보시는 하나님 아버지의 아픈 마음이 그대로 전해져 옵니다.  그리고 이 말씀은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세우시고 그들을 세상에 파송하셔야만 하는 이유이기도 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선택하신 이유입니다.  오늘 저와 여러분이 은혜를 받고 세상으로 나가 복음 전도자로 살아가야 하는 삶의 목적이기도 합니다.  본문 36절을 다같이 읽도록 하겠습니다.

"무리를 보시고 불쌍히 여기시니 이는 그들이 목자 없는 양과 같이 고생하며 기진함이라"

여기에서 '불쌍히 여기다'라는 단어의 헬라어는 '스프랑크니조마이'라는 말입니다.  '불쌍히 여기다', '스프랑크니조마이'.  이 말은 신약성경에서도 오직 마태복음에 5번, 마가복음에 4번, 누가복음에 3번, 모두 12번 해서 유일하게 공관복음에만 나오는 말입니다.

여기에서 예수님께서 불쌍히 여기셨다는 말은 피상적이거나 스쳐지나가듯이 느끼는 슬픔 내지 동정과는 차원이 다릅니다.  가령, 길을 가다가 보면 아이들끼리 싸우는 광경을 보게 됩니다.  대체로 두들겨 맞는 쪽의 아이를 보면 어딘가 허술해 보이고 나약해 보입니다.  온 몸이 발길질 당하는 상황을 보면서 "누구집 아이인지 참 안됐다"라고 생각하면서 그냥 지나쳐버린다면 그것은 그저 스쳐 지나가듯이 느끼는 값싼 동정에 불과한 것이지 오늘 본문에서 예수님이 품으셨던 불쌍히 여기시는 그 마음이 아닙니다.

'불쌍히'라는 말은 히브리어로 '라카밈'인데, 이것은 하나님의 자궁을 의미합니다.  출산의 경험이 있는 여자 분들은 자궁이 움직인다는 것, 자궁이 뒤틀린다는 것의 고통을 잘 알 것입니다.  임신한 여인이 배를 움켜쥐고 울부짖으면서 출산을 해야만 살 수 있는 것처럼, 하나님께서 방황하는 무리들을 보시면서 불쌍하고 측은한 마음이 뱃속이 꿈틀대면서 애가 끓어오는데 그 아픔이 얼마나 극심하신지 하나님의 자궁이 움직인다는 표현 밖에는 달리 표현할 길이 없었던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하나님이신 예수님께서는 범죄한 우리 인간들을 향한 스프랑크니조마이 때문에 하늘 보좌를 버리시고 인간의 몸을 입고 이 땅에 오셨습니다.  예수님의 가슴속에는 스프랑크니조마이가 있었기 때문에 병든 자를 불쌍히 여기시고 그들을 고쳐주셨습니다.  스프랑크니조마이 때문에 예수님께서는 고난을 당하시고 십자가에 돌아가셨습니다.  그리고 우리를 구원하여 하나님의 자녀로 삼으신 것입니다.

데이비드 마틴 로이드 존스 박사는 이런 말을 했습니다.
"우리들은 각자의 위치와 기독교 신앙고백에 대하여 정직한지, 또는 진실된지를 가려내는 시금석이 있는데 바로 긍휼의 영을 품고 있는지 아니면 복수의 영을 품고 있는지에 의하여 가려진다"

사랑하는 여러분, 오늘 하나님의 백성된 우리들에게 가지기를 원하시는 마음이 바로 스프랑크니조마이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전지전능한 존재가 되기를 원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하나님의 초월적인 능력을 이 땅에 베풀기를 원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하나님의 영광을 누리기를 원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들에게 바로 이 스프랑크니조마이를 가지고 살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래서 성경 여러 곳에서 말씀합니다.
"서로 불쌍히 여기라"
 
남편은 아내를 불쌍히 여기는 것입니다.  아내는 남편을 불쌍히 여기는 것입니다.  부모는 자식을 불쌍히 여기는 것입니다.  자식은 부모를 불쌍히 여기는 것입니다.  목장 안에서 서로 가족들을 불쌍히 여길 때에 그들을 향하여 중보기도의 눈물이 쏟아지게 되는 것입니다.  셀 안에 그들의 아픔을 쏟아놓을 때에 그들의 아픔이 우리의 아픔으로 다가오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 속에 있는 불쌍히 여기는 마음이 일어났기 때문입니다.
 
목사는 성도님들을 불쌍히 여겨야 기도합니다.  성도님들도 저를 불쌍히 여기시기 바랍니다.  목회를 잘 해 보려고 애쓰는 게 안쓰럽지 않습니까?  서로 불쌍히 여기는 것입니다.
 
더더구나 우리가 품었던 태신자들, 6월 22일에 초청해야 할 우리의 귀빈들, 이 땅에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사람들을 바라보며 불쌍히 여기는 마음이 있어야 합니다.
 
누가 귀빈이라고 했더니 이렇게 말합니다.  '귀빈이란 아주 귀찮은 빈데'  아닙니다.  귀빈이란 창자가 끊어질 듯이 아파하는 아버지의 가슴앓이로 영혼을 사랑하는 아주 귀한 손님을 말합니다.

오늘 본문에서 예수님께서 아버지의 가슴앓이로 무리들을 바라보시면서 그들을 목자 없는 양과 같다고 하십니다.  본문에서 '목자 없는 양'이라고 할 때 이 말씀을 듣고 있던 팔레스타인 사람들은 금방 알아들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들에게 또 다른 설명이 필요 없었습니다.  그러나 오늘 우리들은 많은 양을 본 적이 없습니다.  목자가 되어 본 적도 없습니다.  그리고 목자 잃은 양이 어떤 상태인지 상상조차 되지 않습니다.  때문에 우리는 이천년 전 예수님 당시의 상황으로 돌아가서 양이라고 했을 때에 어떤 이미지를 가졌는지에 대해서 생각해볼 필요가 있습니다.

성경이 기록될 당시 팔레스타인에서 '양'이라고 하면 그것은 매우 약한 동물이란 이미지를 가지고 있습니다.  양은 자기 몸을 보호할 수 있는 무기도 하나 없습니다.  날카로운 사자의 이빨도 없습니다.  힘센 황소의 뿔도 없습니다.  말처럼 뒷발질도 할 줄 모릅니다.  독수리처럼 날카로운 발톱도 없습니다.  조그마한 비탈진 길도 혼자서는 올라가지를 못합니다.  뒤에서 목자가 밀어 주어야 됩니다.  어린 새끼 양은 아예 어깨에 메고 언덕을 올라가야 했습니다.

그 뿐만이 아닙니다.  양은 겁이 많은 동물입니다.  털이 많기 때문에 시냇물 소리만 들어도 냅다 도망을 갑니다.  시편 23편에 보면 우리를 잔잔한 물가로 인도하신다는 말씀은 이런 배경을 가지고 있는 말씀입니다.  그리고 양은 매우 어리석은 동물입니다.  매일 먹는 풀인데도 불구하고 이게 먹을 수 있는 풀인지 못 먹는 풀인지 구분할 줄 모릅니다.  독초와 목초를 구분할 줄도 모릅니다.  자기가 매일 다니던 길인데도 그 길을 못 찾아옵니다.
 
개는 눈을 가리고 멀리 갖다버려도 제 집을 찾아옵니다.  심지어 소도 자기 집을 찾아옵니다.  개미는 자기가 다니는 길 바깥에 갖다 놓아도 제 집을 찾아갑니다.  그런데 양이라는 동물은 자기가 매일 다니는 길인데도 불구하고 자기가 어디로 다니는지 알지 못합니다.  그냥 잃어버리게 되는 것입니다.

양은 보기에는 깨끗해 보입니다.  그러나 모든 가축 가운데 가장 지독한 냄새가 나는 어쩌면 가장 더러운 동물 중에 하나가 양이라고 합니다.  이것이 인간이라고 합니다.  인간은 사랑의 대상이지 신뢰의 대상이 아니라고 하는 것입니다.  멀리서 보면 깨끗해 보이지만 가까이 가서 보면 냄새가 납니다.  덮어두고 사랑하는 것입니다.  후벼파고 사랑할 수 없는 것입니다.  오 목사도 가까이 오면 냄새가 납니다.  저를 위해서 기도해 주시면 됩니다.  이것이 인간이라는 것입니다.

팔레스타인의 물은 급류입니다.  맹수는 많습니다.  산에는 온통 날카로운 가시투성이입니다.  길은 험악합니다.  목자가 없으면 양은 이 땅에 살아갈 길이 없습니다.

그런데 이 양이 목자를 잃어버렸다고 했습니다.  우리는 이 말씀을 이해하기 위해 다시 팔레스타인의 들판으로 나가보아야 합니다.  목자 한 사람이 많은 양떼를 이끌고 산으로 들로 갑니다.  짧으면 3개월 길면 6개월여 동안 이 산 저 산을 찾아다니며 양을 기릅니다.  그러다 보면 깊은 산 속에 갔다가 목자가 병이 들기도 하고 불의의 사고로 목자가 죽기도 합니다.  그러면 이 양들은 목자를 잃어버립니다.  맹수가 나타납니다.  도적떼가 나타납니다.
 
그러면 죽자 사자 도망가다가 언덕에 굴러 떨어져서 죽는 놈들, 도망가다가 가시덤불에 걸려서 온몸이 찢겨져서 피를 줄줄 흘리면서도 빠져 나오지 못해서 울부짖고 있는 놈들, 맹수가 덤비니까 앞뒤 보지 않고 지칠 때까지 도망갑니다.  더 이상 뛸 수도 없고 걸을 수도 없고 서 있을 수도 없어 뒤로 발랑 나자빠져서 네 다리를 하늘로 보고 바들바들 떨다 누가 일으켜 주지 않으면 그대로 내장이 꼬여서 죽습니다.  이것이 목자 없는 양의 모습입니다.

"목자 없는 양과 같이 고생하며 기진함이라."
여기에서 '고생한다'는 말은 헬라어 원문적으로 보면 몸이 갈기갈기 찢겨졌다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도망가다가 나뭇가지에 찢겨지고, 날카로운 바위에 걸려 찢겨지고, 가시덤불에 찢겨져서 피투성이가 되어 있는 상태를 가리켜서 '고생하며'라고 했습니다.

'기진함이라'는 말은 힘이 다 빠질 때까지 도망가서 발랑 나자빠져있는 상태를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이때 신속하게 목자가 달려가서 양을 일으켜 주지 않으면 양은 그 자리에서 내장이 꼬여서 죽습니다.  그래서 목자 없는 양이 고생하며 기진함이라고 기록하고 있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그렇다면 목자의 임무는 무엇이겠습니까?
안전한 길로 양들을 인도해 가는 것입니다.  이 풀은 못 먹는다.  독초와 목초를 구별해 주는 것입니다.  가파른 언덕길을 오를 때에는 뒤에서 밀어줍니다.  가시덤불을 피할 수 있도록 도와줍니다.  맹수들이 덤비면 그들을 보호해 줍니다.  풀을 뜯거나 그늘에 쉴 때에 피리를 불어서 편안하게 안내해 줍니다.  이것이 양들을 위한 목자의 임무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는 영원한 목자이신 예수님으로부터 이 땅에서의 목자로 위임을 받았습니다.  그래서 이 세상에 있는 내 주변의 사람들을 천국길로 안내해야 합니다.  그들에게 말씀을 먹이고 세상의 더러운 유혹과 세상의 가치관을 먹이지 않도록 해야 합니다.  험악한 이 세상을 혼자 살아갈 수 없을 때 그들을 도와주어야 합니다.  엉덩이를 밀어주어야 합니다.  가시덤불을 피할 수 있게 도와주듯이 이 세상은 유혹의 지뢰밭입니다.  전신만신 나를 찌르는 것밖에 없습니다.  그들을 지켜주어야 합니다.  우는 사자처럼 택한 자를 삼키려고 덤벼듭니다.  악한 것들로부터 우리를 서로 보호해 주어야 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목자 잃은 양'을 돌보는 일을 오늘 본문에서는 추수사역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천국이 가까이 왔느니라.  추수 때가 가까이 왔느니라.  너무나 오랫동안 로마의 압제에 시달렸습니다.  바리새인들이 만들어 놓은 율법에 시달렸습니다.  하나님 나라를 기다리며 메시야를 기다려왔습니다.  이제 충분히 그들의 마음이 무르익었습니다.  가서 거두기만 하면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셔서 너희를 구원한다는 이 소식을 전하는 것이 추수사역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예수님의 추수사역의 비전은 12제자를 선택하고 세우는 일입니다.  "추수할 일꾼을 보내어 주소서 하라."  기억하십시오.  우리 예수님께서는 '너희들을 잘 다스릴 왕을 보내어 주소서'라고 기도하라고 말하지 않았습니다.  힘있는 장군을 보내 달라고 기도하라고 말하지 않았습니다.  훌륭한 기업가를 보내 달라고 기도하라고 말하지 않았습니다.  정치가를 보내어 달라, 교육가를 보내어 달라고 말하지 않았습니다.
 
"추수할 일꾼을 보내어 주소서."  예수님의 비전은 12제자의 비전이었습니다.  예수님의 세계 구원 전략은 제자를 삼는 사역이었습니다.  예수님의 세계 경영 전략은 12제자를 세우는 일이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예수님의 이 비전에 동참하기를 원한다면, 우리가 이 땅에 태어난 목적을 바로 감당하기를 원한다면 예수님의 비전 안으로 들어가셔야 합니다.  제자 삼기를 원하시는 예수님의 비전 안으로 들어오십시오.  이 땅을 구원하고 열방을 구원하기를 원하시는 예수님의 비전을 여러분의 비전으로 가슴에 품으십시오.
 
그러기 위해서 우리는 목장 안으로 들어가 그들과 함께 영원한 하늘나라의 가족으로 서로 아파하며 위로해 주어야 합니다.  그러나 우리들 끼리만의 목장으로 머물러서는 안됩니다.  또 다른 사람에게 관심을 가지고 그 사람의 아픔을 내가 함께 느낄 수 있어야 합니다.  이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솔직히 그들의 문제를 듣고 함께 나눈다는 것은 대단히 고통스러운 일입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어서 또 다른 제자를 삼으며 그들과 함께 승리하는 삶을 살아가는 것이 우리를 향하신 아버지 하나님의 마음입니다.  우리가 그렇게 할 때에 함께 말씀을 나눈 자리에 성령의 임재가 나타나게 될 것입니다.  서로가 서로의 울타리가 되어서 서로가 서로를 불쌍히 여기며 지켜주게 될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를 향한 예수님의 비전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예수님의 이 비전 안으로 들어오십시오.  이 비전 안으로 들어오게 되면 나의 스승을 만나게 됩니다.  나의 목자를 만나게 됩니다.  교회의 비전 안에 들어오게 됩니다.  교회 목사님을 영적인 지도자로 목자로 인정하게 됩니다.
 
뿐만 아니라 영적인 스승을 모셨으면 이제는 나도 제자를 삼아야 합니다.  내 주변의 다만 몇 사람이라도 그들을 구원하여 그들에게 복음을 전하고 그들을 양육하고 그들을 도와주고 그들을 길러서 내가 목자가 되게 하는 것입니다.  어느덧 나도 모르게 믿음이 성장되는 것입니다.  그들의 문제를 위해서 기도하다 보면 내 문제는 어느새 해결되어 있는 것을 느끼게 됩니다.  이것이 이 시대와 우리를 향한 예수님의 디자인입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을 대기업 인재등용 프로그램에 정보를 입력해 보았습니다.  과연 이들이 앞으로 세계를 경영할만한 관리인이 될 수 있을 것인가?  예수님께 컴퓨터가 대답을 보내왔습니다.

"귀하가 계획하는 새 단체의 간부 사원으로는 모두 다 자격미달입니다.  학력이 너무 낮고 경험이 부족합니다.  그들은 공동체의 개념이 없고 협조 정신이 약하여 경영관리자로서 적합하지 않습니다.  시몬 베드로는 정서적으로 안정성이 결여되어 있고 성격이 너무 과격합니다.  안드레는 한마디로 무능력자입니다.  남을 지도할 사람이 못됩니다.  세베대의 아들 야고보와 요한 형제는 회사의 이익을 제쳐놓고 개인의 이익을 추구할 사람들입니다.  도마는 매사에 부정적인데다가 질문만 많고 추진력이 없습니다.  마태는 자기 이익을 위해서라면 무슨 짓이든 할 사람입니다.  알패오의 아들 야고보와 다대오, 이 두 사람은 사회 혁명을 노리는 과격한 불온사상에 감염되어 있어 귀하가 생각하는 온건한 집단에는 해로울 것입니다.
 
귀하가 추천한 12명 가운데 긍정적인 대답을 드릴 수 있는 사람은 단 한 사람 가롯 유다입니다.  그는 능력과 가능성이 있고 사회 지식도 풍부하며 똑똑한 경영자로서의 감각과 판단력이 뛰어납니다.  사교성이 있어 상류 권력층과 접촉할 수 있는 인물입니다.  강한 동기와 의욕에 가득찬 사람입니다.  따라서 본 경영 상담 회사는 유다 한 사람만 남기고 나머지 열한 사람은 다시 찾아보실 것을 권고하는 바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어떻습니까?  가롯 유다는 실패했습니다.  약하디 약한 존재, 무능하다고 판단할 수밖에 없는 존재, 버릴 수밖에 없는 존재, 그들을 모아 주님은 세계 경영의 위대한 계획을 시작하셨고 이루셨습니다.

혹여 여러분들 가운데 성격적으로 문제가 있다고 느끼시는 분들이 계십니까?  당신도 주님의 제자가 될 수 있습니다.  당신 자신을 무능하다고 생각하며 열등감에 사로잡히신 분들이 계십니까?  당신도 제자가 될 수 있습니다.
 
나는 다른 사람들을 대하는 태도에 문제가 많아서 늘 자학하며 살아오셨습니까?  당신도 예수 안에서 새로워질 수 있습니다.  당신의 사상이 극단적이십니까?  당신도 교회 안에서 비전의 사람으로 성장될 수 있습니다.  과거의 경력이 좋지 못하여 늘 가슴을 치며 살아오셨습니까?  이 땅을 변화시키고 열방을 다스리기를 원하시는 예수님의 비전에 당신도 쓰임 받을 수 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가 이 땅을 살아가는 동안에 다양한 이름을 가지고 살아갈 것입니다.  그러나 가장 영광스런 이름 두 가지가 있다고 한다면 하나는 성도라는 이름이고, 다른 하나는 제자라는 이름일 것입니다.  예수님의 피흘리심 때문에 내가 구원받아 하나님 나라의 백성인 성도가 되었습니다.  예수님께서 행하신 권세를 우리도 행하게 된 것입니다.  권세 있게 복음을 전하고 권세 있는 가르침, 권세를 나누며 이 땅에 살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만약 여러분에게 이 땅에서 살 시간이 1년 밖에 남지 않았다고 한다면 무슨 일을 하시다가 하나님 앞에 서시고 싶으십니까?  만약에 여러분에게 한 두 달이 남은 마지막 시간을 보내야 한다면 여러분은 이 땅에 무슨 일을 하시다가 하나님 앞에 서시겠습니까?  아니 백년이 남았다면 여러분은 무슨 일을 하시다가 하나님 앞에 부름 받아 서시겠습니까?
 
결론은 분명합니다.  주님이 행하셨던 삼중사역을 행하는 것입니다.  복음을 전파하는 일입니다.  내 주변에 구원받아야 할 사람들에게 예수님이 품으셨던 스프랑크니조마이의 마음으로 복음을 전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내 자녀들에게 천국복음과 천국의 가치를 가르치는 일입니다.  나아가서는 병든 자, 마음이 상한 자, 귀신에 시달리는 자를 치료하는 것입니다.  전하고, 가르치고, 치유하는 것, 이것이 우리의 남은 생애에 해야 할 사명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 모두는 양입니다.  약합니다.  어리석습니다.  예수 없는 우리의 삶은 목자 잃은 양과 같아서 이곳 저곳에서 찢겨지고 피흘렸지만 닦아줄 사람이 없었습니다.  허둥대며 인생을 달려왔습니다.  쓰러지고 넘어졌습니다.  그러나 일으켜 줄 사람이 없었습니다.  예수님이 찾아오셔서 우리의 선한 목자가 되어 주셨습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는 그 권세를 나에게, 당신에게, 우리들에게 위임하여 주셨습니다.  그래서 우리로 하여금 세상 속에서 권세 있는 제자로 살아가기를 원하십니다.  목자 없이 거리를 방황하는 이 땅의 수많은 불쌍한 영혼들을 아버지의 가슴앓이로 그들에게 복음을 전파하고 가르치며 상한 심령을 치유하기를 원하십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는 믿지 않는 이웃들을 바라보면서 목자 없는 양을 향하여 가슴앓이를 하시는 아버지의 마음을 품으셔야 합니다.  그리고 그들에게 천국 복음을 권세 있게 전해야 합니다.  천국 복음을 권세 있게 가르쳐야 합니다.  우리의 공동체를 권세 있는 하늘의 공동체로 바꾸어 드려야 합니다.
 
우리가 이웃을 더 잘 섬기고, 아픈 사람들을 치유하며, 우리 이후의 다음 세대에 꿈을 주기 위해서 한 영혼을 향하여 가슴앓이를 하시는 하나님 아버지의 마음으로 일어나셔야 합니다.  그래서 오늘 밤이라도 주님께서 나를 부르신다면 우리는 기쁨으로 영광스런 주님의 부르심 앞에 설 수 있는 충성된 제자가 다 되시기를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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