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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교회체육대회]목자의 품 안에서 놀이하라 (시 23: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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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자의 품 안에서 놀이하라 (시 23:1~6)

우리나라 사람이 공감하는 것 가운데 하나는 
함께 모여 놀 수 있는 건전한 놀이문화가 부족하다는 것입니다. 

명절 때에도 오랜만에 사람들이 모이면 뭐 하죠?
화투나 카드 등의 도박이나, 술 먹고, 노래하고, 춤추면서 놉니다. 
거기까지는 좋은데 종내는 싸움이나 타락으로 끝나는 경우가 많습니다. 
엄격하게 말하면 이것은 놀이가 아니라 노름이요, 싸움인 것입니다. 

그러나 실상 놀이라는 것은 대단히 긍정적인 것입니다. 
놀이는 우리에게 즐거움을 가져다주는 것이요, 기쁜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그 놀이를 잃어버렸습니다.   

본래 하나님은 우리에게 놀이를 주셨습니다. 
아름답게 창조된 에덴은 하나님과 인간사이의 진정한 놀이가 있던 곳입니다. 
인간은 하나님과 함께 거닐며 아름다운 과실을 따먹고, 
서로 사랑하는 아름다운 대화를 나누었습니다. 
그런데 오늘 우리들은 그 놀이를 잃어버렸습니다. 

왜 인간이 놀이를 잃어버리게 되었습니까? 그것은 죄 때문입니다. 
죄를 지은 인간에게 남은 것은 수고하고, 애통하며, 노동하는 것이었습니다. 
자기 아내에게 책임을 전가시키고, 자기 아우를 돌로 쳐 죽이게 되었습니다. 
그 이후 인간은 계속 세상을 싸움터로 만들고 있습니다.   

이제 우리들의 직장은 함께 도우며, 즐겁게 일하고, 보람을 찾는 자리가 아니라 
생존경쟁의 아수라장이 되고 말았습니다. 
학교는 인생을 배우고 진리를 탐구하는 곳이 아니라 
성적의 순위를 매기는 경쟁의 장소가 되고 말았습니다. 
진정한 친구는 없고, 경쟁상대만 남았습니다. 
여기서 인간은 평안도 없고 기쁨도 없이 고달프게 살고 있습니다. 
진정한 놀이의 회복이야말로 우리 모두가 행복해지는 길이며 하나님이 원하시는 일입니다

오늘 우리는 가족 한사랑 체육대회를 맞이해서 
‘놀이’에 대해서 생각하면서 함께 은혜를 나누도록 하겠습니다. 
  

1. 하나님은 인간을 놀이하는 존재로 창조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인간을 창조하실 때 행복하게 살도록 창조하셨습니다. 
인생을 즐겁게, 기쁘게 사는 것이 하나님의 뜻입니다. 
부모는 자녀들이 대자연의 숲속에서 즐겁게 뛰어 노는 모습을 보면서 행복을 느낍니다. 

하나님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즐겁고 기쁘게 보람 있게 사는 것을 원하시며, 그것이 하나님의 기쁨입니다.
하나님은 인간의 행복을 위하여 놀이를 주셨습니다. 
놀이에는 쉼, 안식, 자유와 평화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놀이는 단순히 흥청망청 먹고 마시고 ‘논다’는 말과 다릅니다. 
놀이는 노래한다는 말에서 유래되었습니다. 놀이는 즐거운 것입니다. 
  
하나님은 엿새 동안 세상을 창조하시고 제 칠 일에 안식하셨습니다. 
그리고 이날을 하나님께서 인간과 함께 놀이하는 날로 삼으셨습니다. 
그래서 안식일에는 하나님과 함께 노래하고, 쉬고, 안식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인간을 일하는 존재이기 이전에 놀이하는 존재로 만드신 것입니다. 

에덴동산은 경치가 좋은 자연세계를 가리키는 말이 아닙니다. 
하나님과 놀이하는 동산이요, 자유와 평화의 세계인 것입니다. 
에덴은 일하며, 노동하는 일터가 아닙니다. 
서로 사랑하며, 노래하며, 자유롭게 놀이하는 세계입니다.   
하나님과의 최대의 만남은 놀이하는 자로 만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품안에서 놀이하는 만남이 될 때 인격적인 관계가 됩니다. 

본문에서 다윗은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가 부족함이 없으리로다.”라고 노래했습니다. 

하나님은 목자이시며 우리는 그의 양입니다. 
양은 목자의 품안에서 놀이할 때 가장 행복합니다. 
목자는 우리를 푸른 초장으로, 맑은 시냇가로 인도해 줍니다. 
우리는 거기서 충분한 꼴을 먹으며, 물을 먹습니다. 
양은 염려하고 걱정할 것이 없습니다. 목자의 품안에서 놀이하면 되는 것입니다.  

목자의 품에서 떠날 때 우리는 놀이할 수 없습니다. 
그때는 두려움과 공포가 몰려오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목자의 품안에 있으면 우리는 얼마든지 놀이할 수 있습니다. 
목자가 양을 돌보기 때문입니다. 

다윗은 이렇게 노래를 불렀습니다. 
“내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다닐지라도 해를 두려워하지 않을 것은 
주께서 나와 함께 하심이라. 
주의 지팡이와 막대기가 나를 안위하시나이다.”
목자가 함께 할 때 양은 두려움 없이 놀이할 수 있는 것입니다. 
 

2. 구원은 놀이의 회복입니다. 

놀이를 잃어버린 데서 인간의 불행이 왔다면 
놀이를 회복하는데서 인간의 행복을 찾을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진정한 놀이를 하도록 오셨습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마11:28)

주님은 우리에게 쉬게 해 주시겠다고 했는데
여기서 쉬는 것은 휴식이 아닙니다. 
안식하는 것이요, 놀이한다는 뜻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의미 없이 시간을 보내는 것은 불행한 휴식입니다. 
예수님이 초청하신 쉼은 안식이요, 놀이를 말합니다. 

한 난쟁이가 있었는데 그는 거꾸로 서서 공을 굴리는 재주를 보여주며 
구경꾼들이 던져주는 돈으로 살아가고 있었습니다. 

한 수도사가 난쟁이를 불쌍히 여겨 수도원에 들어와 편히 살도록 해 주었습니다. 
그런데 수도원에 들어간 난쟁이는 점점 풀이 죽어갔습니다. 
그러다가 언젠가부터 그 난쟁이의 얼굴에 생기가 돌고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래서 가만히 난쟁이의 행동을 살펴보았습니다. 
난쟁이는 아침 일찍 일어나 교회당 안으로 들어가더니 
제단 앞 십자가 밑으로 나아가는 것이었습니다. 
난쟁이는 주머니에서 공을 꺼내 들고는 

“예수님 저는 아무 것도 주님께 드릴 것이 없습니다. 
제가 가진 것이라곤 이 공 굴리는 재주 밖에 없습니다. 
이 재주라도 주님께 보여드리겠습니다.” 하면서 
거꾸로 서서 다리로 공을 굴리는 것이었습니다. 

교회당 한 바퀴를 돌면서 재주를 다 부리고 제단 앞에 와서 땀을 닦고 있을 때,
수도사가 가만히 보니까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그 난쟁이에게 내려오셔서 
“네가 나에게 가장 훌륭한 선물을 주었다. 
너는 나를 가장 기쁘게 했다”라고 말씀하시는 것이었습니다. 
그 시간이후부터 난쟁이의 얼굴에는 생기가 넘쳤고 삶의 의욕이 생겨나게 되었습니다. 

이러한 놀이의 회복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인간구원입니다. 
풀이 죽어있는 자에게 생기가 돋게 하는 것입니다. 
무의미한 삶에 의미를 불어넣어 주시는 것입니다. 
하나님과의 놀이의 회복이요, 인간과 그리고 자연과의 놀이의 회복입니다. 
하나님과 놀이할 수 있는 세계가 천국이요, 구원의 완성입니다.   

율법아래 있는 자는 놀이를 할 수 없습니다.
율법아래 있는 자는 모든 것이 수고로운 일일 뿐입니다. 
마지못해 억지로 그 율법의 조항을 준수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은혜아래 있는 자는 놀이를 합니다. 
삶의 기쁨과 즐거움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넘치면 인간은 놀이를 하게 됩니다. 
삶이 고달픈 것이 아니라 즐겁고 신나는 것이 됩니다. 
부유하거나 가난하거나 상관이 없습니다. 
목자 되신 주님의 은혜 안에 있으면 진정한 놀이를 할 수 있고, 
그는 행복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은혜 안에 있으면 신앙생활이 무거운 짐이 아니라 놀이가 될 수 있습니다. 
그에게는 예배가 너무너무 즐겁습니다. 
기도하고, 찬송하는 일이 모두 즐거운 놀이가 됩니다. 
헌금하고, 전도하는 일도 놀이를 하듯이 즐겁게 하게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신앙생활을 하나의 놀이로 즐겁게 하고 계십니까? 
놀이터에 가듯이 교회에 가는 것이 즐겁고, 기대되고, 기다려지는 곳인지요?  

예수님께서 “공중에 나는 새를 보라. 들에 피어 있는 백합화를 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것은 새들의 놀이와 백합화의 자유로움을 보라는 것입니다. 
새들은 하늘을 날며 노래하고, 즐거운 놀이 속에서 먹이를 얻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탄식하면서 일합니다. 
양들은 목자의 돌봄 속에서 푸른 풀밭에서 놀이합니다.   

이제 우리의 직업도 놀이가 되어야 합니다. 
죄 가운데 있을 때는 직업이 먹고 살기 위한 수단이요, 수고로운 일이지만
은혜 아래 있을 때는 직업은 즐거운 놀이가 되는 것입니다. 
어린아이들은 장난감 즉 놀이감을 가지고 놀이할 때 즐거워합니다. 
이 놀이감이 확대된 것이 바로 우리의 직업입니다. 
자기 직업이 놀이감이 안 되면, 직업은 고통스러울 뿐입니다. 
보람과 즐거움을 맛보는 놀이가 될 때 거기에서 살맛을 느끼게 됩니다. 
놀맛이 나야 살맛이 나는 것입니다. 
공장에서 일하는 사람은 공장이 놀이마당이요, 직장을 놀이터로 만들어야 합니다. 
아이들을 가르치는 선생님은 아이들과 배움의 놀이를 해야 합니다.   

우리 아이가 유치원에 다닐 때 숙제를 ‘지혜놀이’라고 불렀던 것을 기억합니다.
숙제는 부담스러운 것입니다. 그러나 지혜놀이라고 하니까 아주 즐거운 것이 되었습니다. 
고기 잡는 어부는 바다와 놀고, 고기와 놀아야 합니다. 
농장에서 일하는 농부는 자연과 놀고, 식물과 놀아야 합니다. 
어머니는 아이를 키우고, 음식을 요리하는 것이 놀이가 되어야 합니다.   

예수님은 당신 자신의 삶을 하나의 놀이로 여겼습니다. 
가난한 자에게 빵을 먹였지만 예수님은 자선사업가라기 보다는 
가난한 자와 함께 놀이하신 것이었습니다. 
병든 자를 고쳤지만 병을 치료하는 의사라기보다는 
병든 자와 함께 놀이하신 분이셨습니다. 
예수님은 죄인들과 함께 친구가 되어 놀이를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섬기면서 사셨는데 그 섬김이 바로 주님의 놀이였습니다.   

또한 예수님은 세상에 오셔서 인생을 죄와 사망의 법에서 자유케 하시고 
놀이하며 사는 인생으로 재창조를 이루셨습니다. 
그러므로 놀이를 재창조(Recreation)라고도 합니다. 
 

3. 교회는 놀이하는 공동체입니다. 

이러한 놀이를 어떻게 이룰 수 있습니까?
제자들은 예수님과 3년을 지냈으나 신앙이 놀이가 될 수는 없었습니다. 
힘으로 안 되고 노력으로 안 되었습니다. 
제자들은 마가의 다락방에서 성령을 받고서야 놀이하는 존재가 되었습니다. 
초대교회 성도들은 성령의 새 술에 취했습니다. 
새 술에 취한 성도들은 찬송을 불렀고 즐거워했습니다. 
그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은총으로 죄와 사망의 법에서 해방을 얻었고,
자유인의 축제를 벌였습니다. 
성전이 놀이마당이었고, 가정이 놀이터였습니다. 

놀이공동체는 무엇입니까? 사랑으로 가득 찬 교회입니다. 
미운 사람과도 일 할 수는 있습니다. 그러나 놀이는 못합니다. 
서로 사랑할 때만 같이 놀 수 있습니다. 
그런데 초대교회는 마음을 같이하였습니다. 이 말은 서로 사랑했다는 말입니다.   

교회는 서로 사랑하며, 함께 살자고 모인 사람들의 공동체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 안에서 서로 이해하고, 용납하고, 함께 살자는 것입니다. 
교회를 그리스도 안에서 일터로 만들지 말고, 
놀이하는 자유인의 행복의 현장으로 만들어야 합니다. 
교회의 모든 섬김과 봉사가 힘들고 수고로운 짐이 아니라 즐거운 놀이가 되도록 하십시오.

일반적으로 교회는 구제대상을 찾습니다. 
그러나 이 세상에서 구제받아야 할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구제대상보다는 함께 놀아주는 놀이대상이 되어야 합니다. 
그들에게는 얼마간의 음식도 필요하지만 사랑과 관심이 더욱 필요합니다.   

어느 날 유명한 셰익스피어가 거리를 거닐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한 걸인이 무릎을 꿇고 구걸을 하고 있었습니다. 
셰익스피어는 그를 도우려고 했지만 마침 지갑에는 돈이 전혀 없었습니다. 
이때 그는 그 걸인의 손을 덥석 잡고는 
“미안합니다. 나는 당신을 돕고 싶으나 마침 지금 제게는 돈이 전혀 없군요.
다음에 만나면 반드시 도와 주리다.”

그러나 그 걸인은 “아닙니다. 오늘 당신은 나에게 가장 귀한 것을 주었습니다. 
나는 돈도 필요하지만 당신의 사랑이 더욱 필요합니다.”라고 대답했답니다.  

우리는 가난한 이웃에게 음식을 나누어 주는 일보다 
그들과 함께 놀이할 수 있는 친구가 되어주는 것이 더욱 중요합니다. 
그리스도의 형제인 그들을 사랑과 삶을 나누는 놀이대상으로 삼아야 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놀이는 함께 나누는 행복입니다. 
혼자 독점하려고 할 때 놀이는 없어지고 갈등만 심화됩니다. 
아이들이 놀이감으로 서로 잘 놀다가도 
한 아이가 ‘이건 내꺼야. 만지지마’ 자기의 놀이감을 독점하는 순간 놀이는 깨어집니다.
함께 나눌 때에만 우리는 참으로 놀이할 수 있음을 배워야 합니다. 
받은 은혜를 나누려 할 때 놀이는 축제로 변하게 되는 것입니다. 

살기 위해 먹는 양식은 혼자 먹어도 됩니다. 
일하기 위해 먹는 음식도 혼자 먹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놀이하기 위한 음식은 혼자 먹으면 안 됩니다. 
잔치 음식은 나누어 먹을수록 축제분위기가 고조됩니다. 
음식은 나누어 먹어야 맛이 납니다. 

주님은 당신을 생명의 떡이라고 하면서 당신을 서로 나누어 먹으라고 하셨습니다. 
그렇습니다. 주님은 우리 크리스천들만의 독점물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우리 모두의 주님이십니다. 
그러므로 주님의 생명을 함께 나누어야 합니다. 복음을 함께 나누어야 합니다. 

오늘날 사람들이 살맛이 없는 이유는 함께 나누려 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독점하고 있기에 놀이는 없어지고 그것을 빼앗기 위한 싸움이 시작되는 것입니다. 
삶의 맛은 공동으로 나누어 먹을 때 생깁니다. 
오늘 우리가족 한사랑 체육대회를 기점으로
교회 안에서 진정한 놀이를 회복하시는 여러분들이 되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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