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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가정의달] 그 집에 있는 교회 (골 4:1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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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집에 있는 교회 (골 4:10~17)

  조각가 문병권씨의 ‘내 영혼의 고백’ ‘갈보리’라는 작품이 있습니다. 
이태리 돌에 스텐레스로 제작한 세 개의 십자가를 세웠습니다. 적당한 크기의 이태리 돌을 갈보리 골다 언덕으로 보고 그 위에 예수님과 두 강도가 함께 진 세 개의 십자가를 세워 작품화하였습니다. 세 개 중 하나는 한쪽이 일그러진 미완성의 십자가로 세웠습니다.  마지막 십자가위에조차 끝까지 자신에게 정직하지 못하고 예수를 희롱하며 비난했던  한 강도 강도의 십자가입니다. 

  십자가는 우리 자신을 정직하게 보게 하는 작은 거울입니다. 교회가 십자가로 상징되는 이유는 여기에 있습니다. 

  십자가는 세 가지 사실을 보게 합니다. 
무엇보다 내 자신의 죄인 됨을 보게 합니다. 이런저런 이유로 우리는 우리자신의 정직한 모습 앞에 정직하게 서지 못합니다. 그러나 십자가 앞에서면 우리자신을 직시하게 합니다. 잘못 살아온 자신을 알게 합니다. 

십자가는 죄인을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마음을 공개합니다. 죄인을 위하여 당신의 독생자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은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사랑 속에서 열리는 인류의 위대한 미래까지 보게 합니다. 십자가는 우리의 죄로 두터운 휘장으로 굳게 닫혀졌던 벽을 열어보였습니다. 하나님의 무한한 사랑으로 예비해두신 은총의 세계를 보게 합니다. 
  십자가는 본래 인간이 생각할 수 있는 가장 흉악한 사형 틀입니다. 온갖 부정적인 이미지의 총산이었습니다. 죄악, 정죄, 증오, 분노, 절망, 고통, 어둠, 죽음······끝없는 부정의 이미지를 우리 예수님이 위대한 긍정으로 바꾸셨습니다. 예수님 안에서 십자가는 용서, 사랑, 긍휼, 생명, 희망, 밝음, 영광으로 다가옵니다. 그래서 오늘날의 크리스쳔들은 누구도 주저하지 않고 십자가를 사랑합니다. 자랑합니다. 증거 합니다. 이 십자가가 있는 집이 교회입니다.  

  오늘은 가정의 달 오월의 마지막 주일입니다. 이 시간은 사도바울이 증언한 골로새서의 마지막 부분의 말씀으로 함께 은혜를 받고자 합니다. 먼저 생각할 말씀은 4:15,16절입니다. 

“라오디게아에 있는 형제들과 눔바와 그 여자의 집에 있는 교회에 문안하고, 이 편지를 너희에게서 읽은 후에 라오디게아인의 교회에서도 읽게 하고, 또 라오디게아로서 오는 편지를 너희도 읽으라.” 

"Please give my greetings to our brothers and sisters at Laodicea, and Nympha and the church 
that meets in her house. 
After you have read this letter, pass it on to the church at Laodicea so they can read it, too. 
and you should read the letter I wrote to them."

이 말씀에서 우리의 마음을 붙드는 말이 있습니다. “눔바, 그녀의 집에 있는 교회”입니다. 눔바가 교회에 있다는 말이 아니라, 눔바의 집에 교회가 있다는 것입니다. 이런 뜻입니다. 처음 교회가 시작이 되던 때에는 거의 예외 없이 성도의 가정에서 만났습니다.(met in homes) 오늘 날의 교회형태의 건물은 3세기경부터 세워지기 시작했습니다. 

1900년 4월 15일에 시작된 우리교회도 그랬습니다. 제가 처음 목회를 시작했던 교회도 시골 가정집 사랑채에서 시작되었습니다. 전도할 때 이렇게 말했습니다. 
“박희 할머니 집에 있는 그 교회로 오시지요.” 
라오디게아교회도 골로새교회도 그렇게 시작되었습니다.  
이 말씀은 우리그리스도인의 가정이 교회가 될 수 있다는 사실을 일깨워줍니다.  
가정 사역전문기관인 ‘하이 페밀리’의 송길원 목사는 이런 슬로건을 내세웠습니다. “교회 같은 가정, 가정 같은 교회”
교회를 가정같이 따뜻하게 만들고, 가정을 교회처럼 거룩하게 만들자는 바램입니다.  
이 시간은 우리의 가정을 거룩한 교회로 만드는 길을 생각합니다. 

1. 무엇보다 우리가정에 십자가를 세워야 합니다.  

교회냐 아니냐를 분별하는 첫 번째 표식은 십자가입니다. 
십자가가 있으면 교회입니다. 
  이스라엘이 출애굽 하던 때의 일을 기억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애굽에서 노예생활을 하던 이스라엘을 먼저 거룩하게 구별합니다. 이 구별을 위하여 하나님은 마지막 한 가지 일을 명령하십니다. 양을 잡아 그 피를 이스라엘집의 문 인방과 문설주에 바르는 것입니다. 바로 이 양의 피가 그 날 밤 하나님의 백성과 애굽사람을 구별하는 표식이 되었습니다. 양의 피가 있는 집은 죽음의 사자가 뛰어넘었습니다. 이 피가 없는 집은 재물의 많고 적음과 지위고하를 막론하고 모든 장자와 짐승의 첫 새끼를 다 죽였습니다. 이 날 밤에 오직 하나 그것은 양의 피였습니다. 이 양의 피가 바로 십자가를 상징하는 것입니다.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이신 예수그리스도! 
그 분이 지신 십자가로 흘리신 피가 있는 집이 그리스도인의 집입니다. 
  
십자가 그 자체에 의미를 지나치게 두면 혹시 부적이나 우상화될까 염려합니다. 그래서 밖으로 십자가를 세워두는 것보다 내면적으로 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합니다. 그러나 사실은 이 두 가지가 다 중요합니다. 세상의 그 어떤 것도 처음부터 완전하게 내면화도기 성숙하게 되는 것은 없습니다. 누군가가 말했습니다. 
“콩은 깍지부터 생긴 다음, 알이 생기고, 알이  점점커지고 차츰 영글어갑니다.”
아직 껍질도 생기지 않았는데, 충실한 알맹이가 되기를 바란다면 너무 지나친 요구가 아닐까요? 
이런 의미에서 무엇보다 먼저 십자가를 세워야합니다. 우리가정에 십자가가 있어야합니다. 

  행복한 사람에게는 기쁨이 있습니다. 그런데 이 기쁨은 내면의 기쁨, 영적인 기쁨입니다. 그러나 중요한 사실은 그 내면의 기쁨은 반드시 얼굴에 표현된다는 것입니다. 어느 것이 먼저인가를 따질 필요가 없습니다. 먼저 웃어야 합니다. 
교회는 먼저 십자가를 걸어야합니다.  
  저는 언제어디서나 항상 성경책을 가지고 다닙니다. 
제 자신의 정체성을 확인하기 위해서입니다. 어떤 사람은 말합니다. 
“성경책을 가지고 다니면서 실제로 성경을 얼마나 읽느냐?”
“너무 형식주의적이 아니냐?” 
“꼭 그렇게 해야 목사답게 사는 것이냐?” 
나는 이 질문에 대하여 충분히 그렇다고 대답하기에는 부족합니다. 
그러나 나로서는 나를 가다듬고 반듯하게 목사로 살아가는데 성경책이 대단히 중요하다는 사실을 부인할 수 없습니다. 
먼저 십자가를 세우십시다. 
그래서 십자가가 있는 우리 집이 되게 합시다. 


2. 교회는 예배가 있습니다.   

교회는 예배공동체입니다. 기도가 있고 찬송이 있습니다. 감사가 있고 축복이 있습니다. 주님은 바울사도의 전도와 기도와 헌신으로 고린도교회를 세우게 하셨습니다. 주님은 이 고린도교회 성도들이 영적인 정체성을 분명히 하기를 원하셨습니다. 
 
고린도전서3:16, 17 말씀입니다. 
“너희가 하나님의 성전인 것과 하나님의 성령이 너희 안에 거하시는 것을 알지 못하느뇨? 누구든지 하나님의 성령을 더럽히면 하나님이 그 사람을 멸하시리라. 하나님의 성전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할지니라.”

고린도전서6:19,20말씀입니다. 
“너희 몸은 너희가 하나님께로부터 받은바 너희 가운데 계신 성령의 전인 줄을 알지 못하느냐? 너희는 너희의 것이 아니라. 값으로 산 것이 되었으니 그런즉 너희의 몸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 

  예수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영접한 성도는 내가 누구인지를 알아야합니다. 성도의 몸은 하나님의 성령이 함께 하시는 거룩한 성전입니다. 예수 믿는 내가 곧 교회라는 뜻입니다. 이런 뜻에서 그리스도인은 자기 몸에 십자가를 지니는 것이 자연스럽습니다.  

  교회에서 한해를 마무리하는 당회를 열고 있었습니다. 교회 안에 어떤 문제로 인하여 회의가 수월하게 진행되지 못하였습니다. 급기야 회의 중에 자신의 감정을 조율하지 못한 한 사람이 씩씩거리며 팔을 걷어붙이고 일어납니다. 분위기가 심상치 않습니다. 금방 무슨 일이 일어날 것만 같습니다. 회의를 진행하시는 목사님은 정회를 선언하였습니다. 그리고 말했습니다. 
“사랑하는 교우여러분, 이곳은 교회입니다. 주님의 성령님이 함께 하시는 성전입니다. 우리가 회의에 몰두하느라고 그만 깜빡 잊어버린듯합니다. 그러니 우리 모두 함께 하나님 앞에 우리자세를 가다듬고 기도합시다.” 
역시 교인은 교인이었습니다. 목사님의 제안에 모두가 숙연해져서 기도하고 회의는 그렇게 진행이 되었습니다. 
십자가가 있는 집, 교회에는 하나님이 함께 계십니다. 
그러므로 그곳에는 언제나 예배가 있습니다.  

  믿음이 좋은 집사님 부부가 있습니다. 15년 전 그 집 둘째가 태어나기 전에 큰 아들이 갑작스럽게 불의의 사고를 당했습니다. 의식은 있지만 스스로 몸을 가누지 못합니다. 지능의 성장도 거의 멈춘 채 지금까지 생명만 유지하고 있습니다. 젊은 부부에게 그 사건은 청천벽력 같은 일이었습니다. 이들 부부는 그 일로 인하여 하나님께 간절히 매어달리기 시작했습니다. 십 수 년이 지난 오늘도 여전히 기도하며 하나님께 나아갑니다. 이들 부부의 고백입니다.  

“우리 큰 아이가 아직 저렇게 누워있지만, 우리 가족이 모두 이렇게 밝고 평안할 수 있는 것은 하나님이 함께 하시기 때문입니다. 큰 아이의 문제로 저희들이 어찌할 바를 알지 못하고 절망하고 방황할 때, 하나님은 저희들을 버려두지 않으셨습니다. 이제 우리가족은 고백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 아버지시라고요. 그 끔찍한 사고 이후에 하나님은 우리 가족을 돌보시는 진짜 아버지가 되어 주셨습니다.”

이 집사님 부부의 집에는 기도와 찬송이 있고, 감사가 넘치는 예배가 있습니다.
교회입니다.   

      
3. 교회에는 사랑이 있습니다.  

그리스도안에서 모두는 하나님을 한 아버지로 섬기는 가족입니다. 형제자매는 예수 안에서 가장 좋은 것을 기억하며 교제합니다. 오늘 읽은 성경에서 우리는 놀라운 사실을 확인하게 됩니다.  
사도바울은 골로새교회에 이 편지를 보내며 구체적으로 사람들의 이름을 거명하며 문안합니다. 그리고 서로 문안하고 교제하라고 합니다. 그런데 이 편지 속에 있는 이름의 사람들을 소개하는 간단한 표현들이 우리를 감동시킵니다. 모두를 칭찬하고 격려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아리스다고’는 복음을 위하여 바울과 함께 감옥에 갇힌 사람입니다. ‘마가’는 바나바의 생질로서 처음 예루살렘교회가 그 집 다락방에서 시작되었고, 마가복음을 기록한 사람입니다. ‘유스도’라는 예수는 유대인 신자로서 하나님의 나라를 위하여 함께 역사하는 사람이며 바울에게는 큰 위로가 되었습니다. ‘에바브라’는 골로새교회를 위하여 기도를 많이 하여 성도들이 하나님의 듯 가운데 경고하게 서기를 격려하는 사람입니다. 여러 교회 교인들을 위하여 많이 수고한 사람입니다. 사랑 받는 의사 ‘누가’와 ‘데마’입니다. 

바울사도는 자신이 기억할 수 있는 모든 사람들을 칭찬합니다.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교회는 사랑의 공동체입니다. 진정한 가족은 그렇습니다. 약한 자를 돌봅니다. 비난하거나 정죄하기보다 위로하고, 격려하고, 돌보고 축복합니다. 단지 예수 안에서 믿음의 한 가족이 되었다는 이유에서입니다. 바울사도는 골로새교회에 보내는 편지의 마지막부분에서 이 사실을 잊지 않고 있습니다. 
“라오디게아에 있는 형제들과 눔바와 그 여자의 집에 있는 교회에 문안하라.”(15)

  지난 한 주간 동안 교회 안에서 참 많은 일들이 있었습니다. 매일 새벽 기도회가 있었습니다. 화요일새벽에는 노숙자들을 위한 사랑의 섬김이 있었습니다. 수요예배와 지방과 연회의 웨슬리연합집회가 있었습니다. 138개 속회가 가정마다에 모였습니다. 중보기도회원들의 기도모임이 있었습니다. 교회학교 중고등부 하늘다리 축제가 있었습니다. 그리고 55년 동안 이 교회에서 함께 믿음의 사람을 사셨던 김봉윤 권사님께서 88년의 생을 마감하시어, 장례가 있었습니다. 그리고 사랑하는 젊은이들의 결혼식도 있었습니다. 

  이런 일들이 있는 그곳에는 항상 따뜻한 마음을 가진 교우들이 함께 하였습니다. 내게 소중한 일이 있을 때에 함께 있어주는 사람들보다 더 고마운 일은 없습니다. 내가 힘들 때 위로와 격려의 말 한마디가 얼마나 큰 힘이 되는지 우리는 압니다. 
  남을 긍휼히 여기는 사랑이 세상을 새롭게 합니다. 우리는 지금 지구촌 곳곳에서 일어나고 있는 엄청난 고통을 듣고 있습니다.  

마얀마를 강타한 사이클론 ‘나르기스’로 인한 피해로 사망, 실종자가 13만 명이 넘고, 이재민이 수백만 명에 이를 것이라고 합니다. 
중국 쓰챤성의 대지진으로 사망 실종자의 수가 8만 명을 넘었습니다. 부상자도 30만 명에 이릅니다.
  
휴전선 너머 북한은 식량난과 결핵으로 크나큰 위기를 당면하고 있습니다. 650만 명이 식량난에 고통을 받고 있다고 세계식량계획이 발표한 바 있습니다. 그리고 100만 명의 결핵환자 중에 30만 명이 어린이와 청소년환자라고 합니다. 3만원이면 6개월분의 결핵약과 영양제를 구입하여 결핵어린이 한 명을 살릴 수 있다고 합니다.
바울사도는 세상의 모든 사람들의 평화를 기원하고 있지는 않습니다. 골로새교회가 라오디게아교회를 비롯한 주변의 성도들을 기억하게 하고 그들을 격려하고 아름다운 교제를 나눌 것을 당부합니다. 

  오늘 구원받은 우리그리스도인이 세상의 모든 문제를 다 해결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무너진 세상의 한 모퉁이를 수축하는 일은 우리가 할 수 있습니다. 

지난 주간에 읽은 ‘로버트 맥기’의 책 “The Search For Significance"을 읽었습니다. 우리말로는 ”내 안의 위대한 나“로 번역되었습니다. 저자는 말합니다. 구원받은 그리스도인들이 그리스도안에서 변화된 자신을 정확하게 인식하지 못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아직도 충분히 변화되지 못한 생활로 인하여 상당한 죄책감 속에 살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미 그리스도 안에서 변화되어진 자신의 정체성을 확인하도록 돕고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습니다. 성령님이 우리와 함께 하십니다. 우리는 기도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 속에서 위대한 일을 할 수 있습니다. 세계 최고가 될 수 없을지는 몰라도 내가 생각하는 나보다 훨씬 위대한 생애를 살 수 있습니다. 나와 함께 하시는 하나님 때문입니다. 

옛 자아를 벗어나지 못하는 습성 때문에 새로워지지 못하고 있습니다. 끈질기게 발목을 붙잡는 과거의 망령이 나를 뒷걸음질치게 만듭니다. 그러나 이제 선언하십시오. 
그리스도 안에서 나는 새로운 피조물이 되었다고 말입니다. 
그리고 세상을 한꺼번에 바꾸려고 생각하지 말고, 지금 내 앞에 있는 작은 일부터 새롭게 시작하십시오. 당신은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반드시 도와주십니다. 

당신의 삶에 십자가를 세우십시오. 
당신 몸에 예수의 흔적을 만드십시오. 그것이 십자가입니다. 십자가가 있는 곳이 교회입니다. 교회에는 하나님이 함께 하십니다. 하나님이 계시는 곳에는 예배가 있습니다. 그 곳에는 은혜와 사랑과 축복이 넘칩니다. 

  작은 시작이 큰 결과를 만듭니다. 
욥기8:7에는 “네 시작은 미약하였으나 네 나중은 심히 창대하리라” 하였습니다. 마태복음13장에서 “천국은 한 알의 겨자씨와 같다” 하였습니다. 그것이 땅에 심겨지면 큰 나무로 자라납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그렇게 세상에 임합니다. 하나님은 바벨론 왕 느부갓네살에게 이 꿈을 꾸게 하였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사람 다니엘을 통하여 이 꿈을 해석하게 하였습니다. 세상을 지배하는 어마어마한 우상의 세력들을 하나님이 무너뜨리시고 온 땅에 편만한 하나님의 나라를 세우실 것입니다. 

“사람의 손으로 아니하고 산에서 뜨인 돌이 철과 놋과 진흙과 은, 금을 부숴뜨린 것을 보았습니다.”(다니엘2:45)

사랑하는 여러분! 
여러분 가정에 세우는 십자가의 위력이 있습니다. 
여러분들의 몸에서 시작되는 십자가에 위력이 있습니다.
머뭇거리지 말고 십자가를 세우십시오.
 
여러분의 집에 있는 교회, 
여러분의 몸 안에 있는 교회에 성령이 강하게 역사하실 것입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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