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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복 있는 사람은 (시 1: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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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 있는 사람은 (시 1:1~6) 

1. 어느 돈 많고 하나님을 잘 섬기고 있다고 자처하는 유대 관리 하나가 있었습니다. 하루는 이 사람이 예수께 찾아와서 “선한 선생님, 제가 무엇을 해야 영원한 생명을 얻겠습니까?” 하고 물었습니다. 예수께서는 “왜 나를 선하다고 하느냐? 선한 분은 하나님 한 분뿐이시다.”고 대답하시고 그 사람의 질문에 이렇게 되물으셨습니다. “너는 간음하지 말라. 살인하지 말라. 도둑질하지 말라. 거짓 증언하지 말라. 네 부모를 공경하라고 한 계명들을 알고 있겠지?” 그러자 그는 “예, 이 모든 것을 어려서부터 다 지켜왔습니다.” 대답했습니다. 예수께서는 그 말을 들으시고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아직도 네게 한 가지 부족한 것이 있다. 너는 재산을 다 팔아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눠주어라. 그러면 네가 하늘에서 보물을 얻을 것이다. 그리고 와서 나를 따르라.” 그러나 그는 재물이 많았기 때문에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몹시 근심스러워하며 예수 그리스도를 떠나갔습니다. 

예수께서는 많은 돈 때문에 자신을 따르지 못하고 떠난 사람을 보시고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재산이 많은 사람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기가 정말 어렵다. 부자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 낙타가 바늘귀로 통과하는 것이 더 쉽다.” 그러자 사람들이 이 말씀을 듣고 “그렇다면 누가 구원받을 수 있겠습니까?”하고 묻자 예수께서는 “사람의 힘으로는 할 수 없지만 하나님께서는 다 하실 수 있다.” 고 대답하셨습니다. 

그때 베드로가 예수님께 “우리는 모든 것을 버리고 주님을 따랐습니다.” 하자 예수님은 그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분명히 말한다.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 집이나 아내나 형제나 부모나 자녀를 버린 사람은 이 세상에서 여러 갑절로 받고, 오는 세상에서는 영원한 생명을 얻을 것이다.”(눅18:18-30) 여기 돈 많은 유대 관리는 돈 복(財物福)과 관복(官福)은 잠시 누렸을지 모르지만 영원한 생명을 얻는 복은 받지 못했습니다. 이 사람은 ‘복 있는 사람’이 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졌지만 아쉽게도 그 기회를 버렸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어떠한 경우와 환경, 시험에도 오직 복의 근원이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만을 끝까지 따라가는 신앙생활로 잠시 있다가 사라질 세상의 복보다는 영원한 복을 누리는 진정한 “복 있는 사람”이 되시기 바랍니다. 

오늘 본문 1절, “복 있는 사람”에서 “복”은 
첫째로, 하나님을 믿고 하나님께 소망을 두고 사는 사람에게 주어지는 “복”을 말합니다. 

(시40:4) 여호와를 의지하고 교만한 자와 거짓에 치우치는 자를 돌아보지 아니하는 자는 복이 있도다. 
(시84:12) 만군의 여호와여 주께 의지하는 자는 복이 있나이다.
(시146:5) 야곱의 하나님을 자기의 도움으로 삼으며 여호와 자기 하나님에게 자기의 소망을 두는 자는 복이 있도다.
(잠16:20) 삼가 말씀에 주의하는 자는 좋은 것을 얻나니 여호와를 의지하는 자는 복이 있느니라.

둘째는,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사는 사람에게 주어진 복을 의미합니다. 

(시119:1) 행위가 온전하여 여호와의 율법을 따라 행하는 자들은 복이 있음이여.
(잠29:18) 묵시가 없으면 백성이 방자히 행하거니와 율법을 지키는 자는 복이 있느니라.
(잠16:20) 삼가 말씀에 주의하는 자는 좋은 것을 얻나니 여호와를 의지하는 자는 복이 있느니라.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항상 변치 않는 믿음으로 하나님께 소망을 두고 끝가지 하나님 말씀을 따라 사는 신앙생활로 “복 있는 사람”이 되시기 바랍니다.


2. 먼저, “복 있는 사람은” “악인의 꾀를 따르지 말아야” 합니다. 

여기 “악인”은 근본적으로 하나님을 섬기지 아니하는 사람을 나타내는 말입니다. 하나님께서 세상을 최후로 심판하실 때, 그 심판의 기준을 농부가 알곡과 가라지를 분별하듯이 ‘의인과 악인’으로 분별하고, ‘의인’은 ‘하나님을 섬기는 자’, ‘악인’은 ‘하나님을 섬기지 아니하는 자’로 구분하실 것입니다.

(말3:18 그 때에 너희가 돌아와서 의인과 악인을 분별하고 하나님을 섬기는 자와 섬기지 아니하는 자를 분별하리라

성경에서 말하는 ‘악인’의 생활 방식은 하나님을 등지고, 우상숭배하며, 거짓되고 교만하며, 원망불평을 일삼고 삽니다. 그러나 ‘의인’은 범사에 하나님을 의지하고, 정직하고 겸손하며 범사에 감사하며 삽니다. 

악인의 대표적인 사례를 구약성경 열왕기 상 12장을 통해 보겠습니다. 솔로몬의 우상숭배로 나라가 남과 북으로 분열되었습니다. 그 분열되는 과정은 이렇습니다. 솔로몬이 죽고 나서 백성들이 솔로몬의 아들 르호보암을 불러 자신들의 요구 조건을 들어주면 왕으로 섬기겠다고 말합니다. “당신의 아버지는 우리를 혹사시키고 우리에게 무거운 짐을 지워 주었습니다. 이제 당신은 이 짐을 가볍게 하여 우리 생활을 편하게 해 주십시오. 그러면 우리가 당신을 왕으로 모시겠습니다.” 이때 르호보암이 “갔다가 3일 후에 다시 오시오.” 하자 백성들은 일단 돌아갔습니다. 

그 후 르호보암 왕은 자기 아버지의 자문관으로 일하던 노인들을 불러 “이 백성들에게 어떻게 대답하면 좋겠소?” 하고 물었습니다. 그러자 그들은 “왕이 만일 겸손한 마음으로 이 백성을 다스리고 그들의 요구에 기꺼이 응하시면 그들은 왕을 언제나 충성스럽게 섬길 것입니다.” 하고 대답했습니다. 그러나 르호보암은 그 노인들의 조언을 무시하고 대신 자기와 함께 자란 그의 젊은 보좌관들에게 “그대들은 어떻게 생각하시오? 자기들의 짐을 가볍게 해 달라고 요구하는 이 백성들에게 내가 어떻게 대답했으면 좋겠소?” 하고 물었습니다. 그러자 그 젊은 보좌관들이 대답하였다. “왕은 그들에게 내 새끼손가락이 내 아버지의 허리보다 더 굵은 줄을 몰랐소? 내 아버지가 당신들에게 무거운 짐을 지웠다고 생각한다면 나는 그 짐을 더 무겁게 할 것이오. 내 아버지는 채찍으로 당신들을 다스렸지만 나는 전갈로 당신들을 다스리겠소. 하고 대답하십시오.” 

3일 후에 여로보암과 백성들이 르호보암을 찾아왔을 때 왕은 노인들의 조언을 무시하고 그들에게 포악한 말로 젊은 보좌관들이 일러 준 그대로 대답했습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왕이 자기들의 말을 듣지 않는 것을 보고 이렇게 외쳤습니다. “다윗과 그 집안을 타도하자! 이새의 아들에게서 무엇을 얻겠느냐? 자, 이스라엘 사람들아, 집으로 돌아가자! 르호보암아, 이제 너는 네 집안이나 다스려라!” 그리고 르호보암이 보낸 감독관 아도니람을 백성들이 돌로 쳐죽이자 르호보암은 급히 자기 수레를 타고 예루살렘으로 도망쳐 왔습니다. 그 후 북쪽 이스라엘 사람들은 계속 다윗의 집안을 배척했고 나라는 남과 북으로 분열되었습니다. 르호보암이 ‘악인의 꾀를 쫓은 것입니다.’ 악인의 꾀를 쫓은 결과 나라 민족이 분열되고 말았습니다. 

또 하나 ‘악인의 꾀’를 쫓다가 망한 사례가 있습니다. 다윗 왕은 사랑하는 압살롬의 반역으로 피난길에 오르게 되었습니다. 이 압살롬의 반역에는 다윗 왕정의 내막을 소상히 알고 있는 아히도벨이 가담하여 반란 거사에 실질적 역할을 수행했습니다. 다윗 왕은 피난 중 반란군에 아히도벨이 가담되었다는 소식을 듣게 되었습니다. 아히도벨은 다윗의 신하 중 당대 최고의 모략가였습니다. 그래서 압살롬을 비롯하여 반란군들은 아히도벨의 가담으로 자신들의 거사가 성공하는 것으로 믿었었습니다. 당시 아히도벨은 빼어난 모략가답게 멀고 먼 피난길에 지친 다윗 왕의 군대를 정예병 1만 2천명으로 지체없이 기습 공격하여 다윗을 죽여야만 완벽하게 반란 거사가 성공할 수 있다고 주장했습니다. 참으로 이같은 그의 모략은 탁월한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이때 압살롬 반란군에 함께 가담하고 있던 후새가 아히도벨과 정반대되는 모략을 제시합니다. 후새는 다윗 왕이 병법과 전술에 뛰어난 인물인 것과 다윗 왕의 군대가 아직 전투할 준비가 되어 있지 않은 상태인 것을 감안하여 시간을 두고 치밀하게 전투를 준비하자는 것이었습니다. 갑론을박 끝에 압살롬은 후새의 모략이 아히도벨의 모략보다 낫다고 결론짓고 아히도벨의 모략을 파기시키고 후새의 모략에 따르게 됩니다. 

결국 아히도벨은 자신의 모략이 시행되지 못하자 분명 거사가 실패할 것으로 믿고 자기 집으로 돌아가 스스로 목을 매어 자결하고 맙니다. 그리고 후새의 모략은 여지없이 실패로 돌아가고 압살롬 역시 도망하던 중 그 머리털이 상수리나무에 걸려 비참하게 죽임을 당합니다. 압살롬의 반란군이 깨끗하게 진압되었습니다.(삼하17-18장) 압살롬의 반란이 실패할 수밖에 없는 가장 중요한 이유가 있었습니다. 그것은 아히도벨의 모략, 꾀가 파기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아히도벨의 모략을 파하도록 만들었습니다. 사무엘하17:14을 보겠습니다.

(삼하17:14) 압살롬과 온 이스라엘 사람들이 이르되 아렉 사람 후새의 모략은 아히도벨의 모략보다 낫다 하니 이는 여호와께서 압살롬에게 화를 내리려하사 아히도벨의 좋은 모략을 파하기로 작정하셨음이더라  

이처럼 의인 다윗을 보호하시고 형통하게 하시고자 하나님께서는 반드시 ‘악인의 꾀’를 실패하도록 섭리하십니다. 하나님은 의인을 보호하시고 형통케 하시기 위해 악인뿐만 아니라 열방의 모든 도모(모략, 꾀)까지라도 폐하시는 분이십니다.

(시33:10-11) 여호와께서 세상 나라들이 계획한 것들을 좌절시키고 그들의 목적을 이루지 못하게 하시며 민족들의 사상을 무효하게 하시도다. 그러나 여호와의 계획은 변함이 없고 그의 목적은 어느 세대에나 한결 같다. 그러므로 여호와를 하나님으로 모신 나라가 복이 있고 하나님이 자기 백성으로 택하신 민족이 복이 있다! 

악인의 꾀, 악인의 모략과 계획은 결코 이루어지지 않고 폐하여져 패망하게 될 것이며, 오직 하나님의 뜻, 세상을 향한 의로우신 하나님의 목적과 계획만이 영원히 성취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악인의 꾀를 쫓는 자’는 결코 “복 있는 사람”이 될 수 없습니다.

(사46:9-11) 너희는 옛적 일을 기억하라. 나는 하나님이라. 나 외에 다른 이가 없느니라. 나는 하나님이라 나 같은 이가 없느니라. 내가 시초부터 종말을 알리며 아직 이루지 아니한 일을 옛적부터 보이고 이르기를 나의 뜻이 설 것이니 내가 나의 모든 기뻐하는 것을 이루리라 하였노라. 내가 동쪽에서 사나운 날짐승을 부르며 먼 나라에서 나의 뜻을 이룰 사람을 부를 것이라. 내가 말하였은즉 반드시 이룰 것이요 계획하였은즉 반드시 시행하리라. 

사람의 마음에는 많은 계획이 있어도 오직 여호와의 뜻만이 완전히 세워질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직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사는 사람만이 삶을 지혜롭게 하는 “복 있는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잠19:20-21)


3. 둘째로, “복 있는 사람은” 죄인의 길에 서지 말아야 합니다. 

“죄”란 표적에서 벗어나거나 길을 잃어버렸다는 의미입니다. 하나님께서 인생들에게 정하신 목적에서 벗어나 살거나 하나님께서 정하신 길(The Way)을 따라 살지 아니하는 것을 죄라고 말합니다. 하나님의 뜻을 따라, 하나님의 길을 가지 아니하고 자신의 길을 가는 사람, 자신의 뜻대로 사는 사람을 죄인이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예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마7:21)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다 천국에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 

예수께서 자신을 찾는 모친과 동생들을 두고 사람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마12:48-50) 누가 내 어머니이며 내 동생들이냐?” 그리고 제자들을 가리키시면서 “나의 어머니와 나의 동생들을 보라! 누구든지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하는 자가 내 형제요 자매요 어머니이니라.” 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께서 하신 이 말씀은 혈연관계를 부정하신 것이 아니라 혈연보다 하나님과의 관계, 하나님과의 영적 관계가 더 중요하다는 것을 깨우치는 말씀입니다. 혈연관계는 하나님 나라에까지 가는 영원한 관계가 아니고, 그야말로 ‘혈육’을 가지고 사는 이 세상에서만 그 관계 속에서 사는 것입니다. 하나님 나라는 혈과 육으로 가는 나라가 아닙니다. 하나님 나라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하나님의 자녀가 됨으로서만 갈 수 있는 곳입니다. 그리고 예수 믿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을지라도 하나님의 자녀로서 세상에 살지 아니하고 자기 뜻대로 산다면 하나님 나라에 결코 들어갈 수 없습니다. 

“복 있는 사람”은 ‘먼저 하나님의 나라와 그의 의,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사는 사람입니다. 하루는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고 물으셨을 때, 수제자 베드로가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고 대답했습니다. 예수께서는 베드로에게 “바요나 시몬아 네가 복이 있도다. 이를 네게 알게 한 이는 혈육이 아니요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시니라. 너는 베드로라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니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리라. 내가 천국 열쇠를 네게 주리니 네가 땅에서 무엇이든지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요 네가 땅에서 무엇이든지 풀면 하늘에서도 풀리리라.”(마16:15-19)는 말씀으로 크게 축복하셨습니다. 

그런데 조금 후에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자신이 십자가에 고난을 받아 죽임을 당하고 사흘만에 다시 살아나실 것을 말씀하셨습니다. 그러자 베드로가 예수님을 붙들고 “주님, 그럴 수 없습니다. 이런 일이 결코 일어나서는 안 됩니다.” 하고 말렸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돌이켜 베드로를 보시고 이렇게 말씀하시며 꾸짖으셨습니다. “사탄아, 썩 물러가거라! 너는 나를 넘어지게 하는 자이다. 네가 하나님의 일을 생각지 않고 사람의 일을 생각하고 있다.” 예수께서 십자가에 고난을 받고 죽임을 당해야 온 인류가 구원받게 된다는 하나님의 뜻을 말씀하셨을 때, 하나님의 뜻보다는 자기 뜻대로 하고자 예수님을 붙들고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고난을 막아서고자 했습니다. 이처럼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는 제자일지라도 하나님의 뜻보다 자신의 뜻을 앞세우면 “복 있는 사람”이 될 수 없습니다. 예수께서는 자신이 이 세상에 오신 목적을 이렇게 분명히 밝히셨습니다. 

(요6:38-39) 내가 하늘에서 내려온 것은 내 뜻을 행하려 함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을 행하려 함이니라.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은 내게 주신 자 중에 내가 하나도 잃어버리지 아니하고 마지막 날에 다시 살리는 이것이니라. 

그러므로 인류 구원을 위해 십자가에 죽으시고 다시 살아나신 예수 그리스도를 전하여 한 사람의 영혼을 구원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대로 사는 것이며 “복 있는 사람”인 것입니다. 죄인의 길은 반드시 망합니다. 오직 모든 인류의 길과 진리와 생명이 되시는 예수 믿고 사는 길만이 금세와 내세에 형통하는 길입니다. 부활 생명에 이르는 길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 밖에 없습니다. 예수만이 진리이며, 예수만이 생명입니다. 예수만이 진리의 길이며, 예수만이 생명의 길입니다. 이슬람교를 믿던 터키 사람이 성경과 예수교 서적을 읽다가 예수를 믿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그만 교사에게 들켜서 심문을 당하게 되었습니다. 그는 심문하는 교사에게 이렇게 물었습니다. “내게 질문이 있는데 대답해 주시겠습니까?” “어떤 질문인데?” “일전에 내가 어디를 가다 길을 잃었는데 옆을 보니 산 사람과 죽은 사람 두 명이 있었습니다. 내가 길을 물어 본다면 어떤 사람에게 물어봐야 되겠습니까?” “그야 물론 산 사람에게 물어야지.” “그런 줄 알면서 왜 당신은 죽은 사람에게 길을 물어 보라고 하십니까?” “아니 이 사람, 누가 죽은 사람보고 길을 물으라고 했나?” “당신들이 믿으라고 하는 마호메트는 죽은 사람이요, 내가 믿으려고 애쓰는 예수는 산 예수입니다. 어찌 죽은 마호메트를 의지하겠습니까? 길 되신 예수를 따라야 할 것이 뻔한 노릇인데 인도자를 찾아 가는 나를 왜 괴롭히십니까?” 그러자 교사는 아무 대답도 못하다가 한참 후에, “네 마음대로 하라.” 라고 신앙의 자유를 허락해 주었습니다. 

죽음에서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만이 생명에 이르는 참된 길입니다. 예수께서 말씀하십니다. “내가 곧 길이다.”(I am the Way) “길” 즉, the Way는 방법을 말하기도 합니다. 사랑하는 방법이 여기 있습니다.(the way how to love) 사는 방법이 여기 있습니다.(the way how to live) 성공하는 방법이 여기 있습니다.(the way how to success) 행복해지는 방법이 여기 있습니다.(the way how to be happy) 용서하는 방법이 여기 있습니다.(the way how to forgive) 예수가 바로 그 방법입니다. 십자가가 바로 그 방법입니다. “복 있는 사람”은 인류의 바른 길이 되시는 예수 믿고 하나님의 뜻대로 사는 사람입니다. 


4. 셋째로, “복 있는 사람”은 오만한 자들의 자리에 앉지 말아야 합니다. 

“오만한 자들”은 하나님과 하나님의 백성을 조롱하거나 경멸하는 자들을 말합니다. 골리앗을 자신과 싸우고자 나오는 다윗을 보고 이렇게 조롱하며 경멸합니다.
(삼상17:42-49) 그 블레셋 사람이 둘러보다가 다윗을 보고 업신여기니 이는 그가 젊고 붉고 용모가 아름다움이라. 블레셋 사람이 다윗에게 이르되 네가 나를 개로 여기고 막대기를 가지고 내게 나아왔느냐 하고 그의 신들의 이름으로 다윗을 저주하고 그 블레셋 사람이 또 다윗에게 이르되 내게로 오라 내가 네 살을 공중의 새들과 들짐승들에게 주리라 하는지라 

이러한 골리앗에 대해 다윗이 이렇게 외칩니다.
너는 칼과 창과 단창으로 내게 나아 오거니와 나는 만군의 여호와의 이름 곧 네가 모욕하는 이스라엘 군대의 하나님의 이름으로 네게 나아가노라. 오늘 여호와께서 너를 내 손에 넘기시리니 내가 너를 쳐서 네 목을 베고 블레셋 군대의 시체를 오늘 공중의 새와 땅의 들짐승에게 주어 온 땅으로 이스라엘에 하나님이 계신 줄 알게 하겠고 또 여호와의 구원하심이 칼과 창에 있지 아니함을 이 무리에게 알게 하리라 전쟁은 여호와께 속한 것인즉 그가 너희를 우리 손에 넘기시리라.(삼상17:45-49)

그리고 평소 양을 노리는 짐승을 쫓아내기 위해 물매를 뿌리던 대로 물매를 골리앗을 향해 뿌렸습니다. 그러자 물매를 떠난 돌은 골리앗의 이마에 정통으로 박혔고 골리앗은 숨도 못쉬고 고목나무 쓰러지듯 땅바닥에 쓰러지고 말았습니다. 곧장 다윗이 달려가 골리앗의 칼집에서 칼을 뽑아 그의 목을 베어 버렸습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자녀를 업신여겨 경멸하는 자들은 반드시 망합니다. 

지금부터 2700년전 경 히스기야 왕이 유다를 통치할 때, 앗수르 왕과 군대 장관 랍사게가 예루살렘을 침공하면서 유대 진영을 향해 이렇게 조롱하며 하나님을 경멸했습니다. “네가 무엇을 믿고 그처럼 대담해졌느냐? 너는 군사력과 전략을 가졌다고 하지만 그것은 빈말에 불과한 것이다. 네가 모든 우상을 철저히 타파하고 오직 하나님만을 섬기도록 종교를 개혁했다고 해서 너희 하나님이 과연 너희를 구원하리라고 믿느냐? 어림도 없다! 하나님께서 우리 앗수르 군대를 물리칠 것이라는 히스기야의 말을 믿지 말라. 세상 어느 나라의 신이 이 앗수르 왕의 손에서 그 백성을 구출한 적이 있느냐? 이 신들 중에 나라를 내 손에서 구해 준 자가 하나도 없는데 어째서 너희는 여호와가 예루살렘을 구할 수 있다고 생각하느냐?”(왕하18:17-35) 이러한 랍사게의 조롱과 경멸에 대해 히스기야 왕은 일언대꾸하지 아니하고 하나님 앞에 나아가 이렇게 기도합니다. 

“하나님 여호와여, 천지만물을 창조하신 주께서만 온 세상 나라를 다스리는 하나님이심을 믿습니다. 여호와여, 귀를 기울여 들으소서. 눈을 떠서 보소서. 산헤립이 살아 계신 하나님을 모독하고 하나님의 백성을 경멸하는 말을 들으소서. 우리 하나님 여호와여, 이제 우리를 앗수르 왕의 손에서 구해 주소서. 그러면 온 세상 나라들이 주 여호와만 하나님이신 것을 알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히스기야의 기도를 들으시고 이사야 선지자에게 이러한 응답을 보냈습니다. <앗수르 왕이 대하여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네가 누구를 꾸짖고 모독하였느냐? 너는 이스라엘의 거룩한 자를 향하여 큰소리 치고 잘난 척하였다. 또 나에 대한 너의 그 오만 방자한 태도에 대해서도 나는 다 들었다. 그러므로 내가 네 코에 갈고리를 꿰고 네 입에 재갈을 물려 네가 오던 길로 끌고 갈 것이다.’> 그리고 히스기야 왕에게 직접 이렇게 응답해주셨습니다. 

‘랍사게는 이 성으로 들어오지 못하고 화살 하나 쏘지 못할 것이다. 그리고 방패 든 군인들도 접근하지 못할 것이며 성 주변에 토성을 쌓지 못하고 오던 길로 되돌아갈 것이다. 이것은 나 여호와의 말이다. 내가 나의 명예와 내 종 다윗을 위해 이 성을 지키고 보호할 것이다.’ 

바로 그 날 밤 여호와의 천사가 앗수르군 진영으로 가서 185,000명을 단칼에 쳐죽였습니다. 사람들이 아침에 일어나 보니 모두 죽어 시체만 즐비하게 널려 있지 않겠습니까? 그러자 앗수르의 산헤립 왕은 철수하고 니느웨로 돌아가서 자기 아들의 칼에 죽임을 당하고 말았습니다.(왕하19:14-37) 

오만한 자들은 반드시 망합니다. 오만한 자들과 자리를 같이 하는 것은 패망하는 길로 가는 것입니다. 다윗은 하나님의 말씀이 담긴 언약궤를 세상 무엇보다 가장 소중히 여기는 신앙생활로 “복 있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 언약궤를 악용한 엘리 시대의 지도자들과 백성, 그리고 사울 왕은 패망을 당했습니다. 

하나님 말씀 안에 거할 때, 진정한 자유와 평안을 누리게 됩니다.(시19:7) 
하나님 말씀 안에 거할 때, 구원에 이르는 지혜와 삶을 복되게 하는 지혜를 누리게 됩니다.(딤후3:15) 
하나님 말씀 안에 거할 때, 마음에 기쁨을 누리게 되며 눈을 밝아져 바른 분별력으로 복 있는 삶을 누리게 합니다.(시19:8) 

“복 있는 사람”은 하나님의 뜻이 담긴 하나님의 말씀을 기뻐하고, 자신을 향한 하나님의 뜻을 바로 깨닫기 위해 주야로 묵상하며 기도하며 하나님 말씀을 통해 하나님의 은혜를 깊이 체험하며 사는 사람입니다. 이러한 사람은 하나님께서 인정하시며 시냇가에 심겨진 나무처럼 풍성한 열매를 맺으며 범사에 형통하게 될 것입니다. 악한 자들의 말을 듣지 않고 죄인들을 본받지 않으며 하나님을 조롱하는 자들과 어울리지 않고 오직 하나님의 말씀을 즐거워하며 그 말씀을 밤낮 묵상하는 “복 있는 사람들”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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