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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상식을 넘어선 가르침 (눅 14:1~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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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식을 넘어선 가르침 (눅 14:1-11) 

◈ D.L. 무디는 다음과 같은 말을 했습니다. 
세상에는 다른 사람을 위해 설교를 듣고 있는 사람들이 많다. 그런 사람들은 늘 입버릇처럼 
`이 설교는 누구 누구가 꼭 들어야 하는데... '라고 말한다.

요즘 교회에 출석하는 많은 사람들은 주로 다음과 같은 이유로 설교를 듣는다고 합니다. 
첫째로, 설교 말씀을 가지고 다른 사람을 판단하고 자기를 합리화시키기 위해서. 
둘째로, 자기 교회 목사님이 얼마나 지식이 많고, 말을 잘하는가 보기 위해서. 
이것은 어리석은 일입니다. 

어느 설교에서든지 적어도 한 번은 하나님께서 설교자의 말을 뚫고 사람들에게 직접 말씀하신다는 글귀를 어느 책에선가 읽은 일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설교 시간에 말씀을 통해 바로 여러분 자신에게 말씀하고 계십니다.

◉ 여러분이 설교 말씀을 듣는 목적은 무엇입니까 ?
이제 잠잠히 저는 주님을 기다립니다. 주님의 뜻을 따라 살 준비가 되었습니다. 
성령님, 제 귀를 열어주시고 저를 깨우쳐 주시기 바랍니다. 
사모하는 마음으로 말씀을 들으시기 바랍니다. 

오늘 본문 말씀은 예수님께서 안식일 날, 어느 바리새인의 초청을 받아서 그 집을 방문하게 되셨을 때에, 일어난 이야기입니다.
바리새인들은 바리새파 사람들을 의미합니다. 
유대인들에게 영향을 준 세 부류가 있습니다. 

① 에세네파입니다. 
이들은 독자적인 생활을 위해 엄격한 계율을 가지고 수도적인 공동 생활을 한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1세기 경에는 그 수가 4000명 정도 되었다고 합니다. 
그들은 제사장, 레위인, 성원, 초심자의 4계층으로 구분되어 있습니다. 
정치와의 타협을 거부하고 비판적인 태도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필로라는 사학자는 이들을 이렇게 설명합니다. 
결혼을 하지 않는 독신주의자이며 개인 재산을 인정하지 않고 공유했다. 
생활은 비교적 검소하고 의식적이고 율법적인 순결을 존중했다.
정치적으로 평화주의에 투철하며 이웃을 중상모략하거나 피해를 입히지 않으려고 항상 주의했다. 
대체로 금욕주의적이며 은둔적인 색채가 농후하다. 

② 사두개파입니다. 
사두개파는 교육받은 부유한 층의 사람들로 구성되었으며 그 수는 적었습니다. 
종교적인 종파도 아니었고 정치적인 당파도 아니었으며 철학 학파도 아니었지만 이 세가지의 특징을 함께 가졌습니다. 
큰 영향력을 끼치지는 못했지만 예수님 당시에는 바리새파의 뒤를 따르는 영향력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사두개인들은 대부분 산헤드린 회원이었으며 로마 정부와도 사이가 좋았습니다.
귀족, 대제사장들로 성전을 지배했습니다. 
자신들의 권력과 특권을 유지하기 위하여 헬라화하려는 경향이 있었으며, 과도하게 엄격한 종교를 반대했습니다. 구전되는 말씀을 거부하고 기록된 말씀만 중요하게 여겼습니다. 
그래서 사후의 보응사상을 믿지 않았고, 육체의 부활을 믿지 않았고, 천사와 영혼의 존재를 믿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을 반대하는 데 앞장섰습니다. 예수님을 죽이는데 바리새인들보다 더 앞장섰습니다.

③ 바리새파입니다. 
바리새인은 에세네파와 사두개파와 함께 유대의 3대 분파 중 가장 큰 영향력을 발휘했던 사람들입니다. 
이들은 율법을 가장 엄격하게 지키는 사람들이며, 일반 유대인들의 존경을 받았습니다. 
바리새인들 중에 대 율법학자나 지도자들이 많았고, 나중에 정통 유대주의의 뿌리가 되었습니다. 
초대 교회 역사학자였던 요세푸스에 의하면 예수님 당시에 바리새인들은 약 6천명 가량 되었다고 합니다. 
이들은 지나치게 외적인 의를 강조했습니다. 
세리와 죄인들과는 교제하지 않았습니다. 여러 면에서 예수님과 충돌했습니다. 


1. 안식일에 병자를 고치심.

그런데 바리새인의 지도자급 인물이 안식일에 예수님을 초대했고 예수님은 그의 집에 들어가셨습니다.
바리새인은 순수한 마음으로 예수님을 대접하기 위해서 초대한 것이 아닙니다. 
그는 예수님을 메시아로 인정할 수 없었습니다. 
오히려 바리새인들과 마찬가지로 이 사람도 예수님을 고소할 조건을 찾으려는 의도를 가지고 예수님을 초대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2절에 "주의 앞에 고창병 든 한 사람이 있는지라". 
예수님께서 안식일에 병 고치는 사역하는 것을 못마땅하게 여기는 바리새인들은 율법을 어기는 결정적인 증거를 확보하기 위해 병자를 예수님이 잘 보이는 곳에 앉혀 놓았습니다. 
그리고 숨어서 엿보고 있었습니다. 
인간의 중심을 보시는 예수님은 이런 바리새인의 생각을 다 알고 계셨습니다. 
먼저 예수님은 안식일에 병 고치는 것이 합당한 것인지 아닌지를 먼저 물으셨습니다. 
(눅 14:3) 『예수께서 대답하여 율법사들과 바리새인들에게 일러 가라사대 안식일에 병 고쳐 주는 것이 합당하냐 아니하냐』

이 질문은 바리새인의 속 마음을 드러내고/ 잘못된 종교적 전통을 지적하기 위한 것입니다. 

◈ 유대인들은 안식일에 일하지 않기 위하여 다음과 같은 39가지 금지 사항을 갖고 있다

1) 바느질 10) 반죽 11) 빵을 굽는 일 18) 두개의 고리를 만드는 일 
32) 두 글자를 쓰는 일 33) 두 글자를 쓰기 위해 두 글자를 지우는 일 
36) 불을 끄는 일 37) 불을 켜는 일 38) 망치질 
39) 물건을 한 곳에서 다른 곳으로 옮기는 일. 

탈무드는 이런 금지사항을 어기는 사람은 우상숭배자로 여겼습니다. 
에세네파들은 안식일을 바리새인이나 보통 유대인들보다 더 엄격하게 지켰습니다. 
그들은 안식일에는 500m 이상 움직여서는 안되었다 (당시의 랍비들은 1Km까지는 허용). 
마실 물을 길어다 항아리에 붓는 것, 무엇을 집에서 밖으로 내가거나 밖에서 집으로 들여오는 것, 닫힌 항아리를 여는 것, 새끼를 낳는 짐승을 도와주는 것, 집안 청소, 아이를 안아 주거나 업어 주는 것도 금했다. 

그러나 생명의 위협이 있는 경우에는 안식일 규례들을 범하는 것이 용납되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안식일에 손 마른 사람을 치유하셨던 것이 문제가 된 일이 있었습니다. 
안식일에 사람을 고쳐 주는 것은 원칙적으로 허락되지 않았습니다. 

다만 그 사람의 생명이 위험하거나 아니면 긴급한 치료를 요하는 경우에는 그를 치료할 수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경우에는 손 마른 사람이 생명의 위협을 느끼거나 긴급한 치료를 요하는 사람은 아니었습니다. 그는 다음날까지 기다렸다 치료를 받아도 괜찮은 사람이었다. 그러나 그를 안식일에 고쳐 주심으로 해서 예수님께서 바리새인들에게 비난을 받았던 것입니다. 
안식일 규정을 철저히 지키는 것은 바리새인들의 긍지요, 자부심이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이 질문에는 잠잠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① 안식일에 병을 고쳐서는 안 된다고 하면 
모세 율법에 그런 것이 있느냐고 반문하면 대답할 근거가 없습니다. 
모세 율법 어디에도 안식일에 병 고치지 말라는 구절이 없기 때문입니다. 

② 안식일에 병 고치는 것이 합당하다고 하면 
지금까지 자기들이 주장하던 유전이 잘못되었음을 인정하는 것이 되기 때문에 아무 대답도 못하고 잠잠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 사건은 예수님을 올무에 빠뜨리려고 했던 함정에 자기들이 빠지는 결과를 가져왔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고창병 든 불쌍한 사람을 고쳐주는 것에 이의를 제기할 사람은 아무도 없었습니다. 

◈ 고창병이란 의학 용어로서 과도한 수분이 몸에 축적되어 몸이 붓는 병입니다. 

이를 다른 말로 수종병(水腫炳, dropsy) 이라고 합니다. 
이 병은 특히 신장이 나쁠 경우가 많습니다. 이 병에 걸리면 얼굴을 위시한 신체가 붓고, 피부가 약해지는 참으로 고통스런 질병입니다. 간, 혈액, 심장에 나쁜 영향을 주어 목숨을 잃게 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당시 의학으로서는 이런 병은 불치의 병이었으며 병자는 심한 고통을 받아야 했습니다. 
예수께서는 이 고창병 환자를 불쌍히 여기셨습니다. 

4절에 "그 사람을 데려다가 고쳐 보내시고". 
예수님은 자연스럽게 그 병자를 고쳐주었습니다. 
이러한 일을 통해서 예수께서는 율법의 형식만을 고집하는 사람들에게 안식일의 진정한 의미를 보여 주었습니다. 

어떤 규칙 보다 생명을 살리는 것이 최우선적으로 행해져야 합니다.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은 종교 지도자들입니다. 이런 병든 자를 긍휼히 여기고 양 떼를 살펴야 하는 위치입니다.
율법에 메여 긍휼히 여기는 마음이 없었습니다. 오히려 그 불쌍한 사람을 예수님을 고소할 건수를 찾는 데 이용하고 있습니다. 이 불쌍한 환자는 사람들의 눈요기 꺼리가 되어 있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자기 아들이 물에 빠진 것처럼, 자기 양이 우물에 빠진 것과 같은 심정으로 건져 주셨습니다.
이 자비하신 주님이 저와 여러분이 믿는 주님이십니다.

안식일에 병 고쳐 주는 것이 합당하냐? 아니하냐?(3절)
물론 바리새인들과 율법사들은 안식일에 병을 고쳐 주는 것은 합당치 않다고 생각을 했습니다. 안식일에는 응급 처치만 해 주고 치료는 할 수 없다는 것이 지배적인 그들의 의견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이 질문을 하신 것은 그것이 과연 모세의 율법에 합당한가(lawful) 
아니한가(unlawful) 율법의 근본 정신에 입각한 것인가를 다시 한 번 생각해 보도록 촉구하신 것입니다. 그러나 저희는 잠잠했습니다.
그들은 스스로 율법의 권위자로 생각했지만 예수님의 물음에 대답을 하지 못했습니다.

바리새인들과 율법사들은 말은 하지 않았지만 예수님이 하시는 일을 속으로 판단하고 있었을 것입니다. 안식일에 병을 고치는 것을 보니 “역시 이단이다” 또, “율법을 어겼다”고 했을 것입니다. 

예수님의 이러한 가르침은 바리새인들의 상식을 초월한 가르침이었습니다. 
예수님의 가르침은 진리였습니다. 바리새인의 행동은 사람에게 보이기 위한 위선이었습니다. 
바리새인들은 예수님 앞에서 대답할 능력이 없어 잠잠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본문에서 우리는 두 가지 마음이 비교되고 있습니다. 
예수님을 대하는 바리새인들의 마음과 사람들을 대하는 예수님의 마음입니다. 
바리새인들의 관심은 다른 사람에게 보여지는 것이었습니다. 
다른 사람들에게 인정받기를 좋아했습니다. 거리에서 기도했습니다. 철저히 율법을 문자적으로 준수했습니다. 형식은 있었지만 아무 내용이 없었습니다. 그냥 사람들의 인정과 스스로의 만족이 전부였습니다. 
예수님의 관심은 하나님 앞에 보여지는 것이었습니다. 
바리새인들이 눈을 크게 뜨고 예수님의 모든 행동을 주시하고, 고소할 거리를 찾고 있습니다. 감시하는 눈이 있음에도 예수님께서는 사랑의 일을 계속하셨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을 의식하며 하나님 앞에서 사셨습니다. 

예수 믿는 성도의 모습은 세상 사람들의 상식으로는 이해하기 힘들 때가 있습니다. 
안 믿는 사람들은 세상 프로그램을 따라 움직입니다. 가치관, 생각, 마음도
그러나 믿음을 가진 성도는 성령 프로그램을 따라 움직입니다. 
세상의 프로그램으로는 성령 프로그램을 이해할 수 없습니다. 
그런데 우리 성도들의 가치관이 세상 사람의 가치관과 동일하다면 우리의 가치관을 점검해 보아야 합니다. 
예수님을 감시하던 눈이 있었듯이 우리들도 감시당할 것을 각오해야 합니다. 

운전을 하다보면 꼭 당하는 일이 있습니다. 
감시카메라에 찍혀서 딱지를 끊어야 하는 일입니다. 저도 원주에 오자마자 신고식을 했습니다. 그 후로는 항상 신경을 씁니다. 의식을 하며 운전을 해야 합니다. 

성도 여러분 우리가 이 땅에 살면서 끊임없이 의식해야 하는 것은 하나님의 눈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눈을 의식하며 살 때 우리는 두려울 것이 없습니다. 당당하게 됩니다. 
우리는 상식을 따라 사는 사람들이 아니라 예수님처럼 하나님 앞에서 진리를 따라 사는 사람들이라는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하나님 앞에서 날마다 성결한 성도가 되시기 바랍니다. 


2. 자기를 높이는 자는 낮아지고 자기를 낮추는 자는 높아지리라

고창 병자를 고치신 일은 식사 이전이었습니다. 그 후 곧 식사가 시작되어 손님들은 다투어 상좌를 택하였습니다. 이를 보시면서 예수께서는 낮은 자리를 택할 것을 교훈 하셨습니다.

◈ 당시 유대인들의 식탁은 U자 형으로 되어 있었습니다. 한 가운데가 상석입니다. 
그리고 양쪽 끝으로 갈수록 말석이 됩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보실 때 바리새인들은 서로 상석에 앉고자 했습니다. 
조금이라도 더 상석에 앉으려고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었습니다. 
이들은 주위 사람들을 의식했기 때문입니다. 
자기가 말석에 앉게 되면 사람들이 자기를 형편없는 사람으로 볼 것만 같았습니다. 
또, 자기가 상좌에 앉아 있어야 사람들이 자기를 우러러보며 존경할 것이라고 생각을 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비유의 교훈의 결론은 11절입니다. 
(눅 14:11) 『무릇 자기를 높이는 자는 낮아지고 자기를 낮추는 자는 높아지리라』

철학적으로 죄를 정의한다면 하나님을 떠나는 것, 하나님으로부터 소외되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이 죄의 근본은 교만입니다. 
교만은 하나님으로부터 떠난 상실감을 대신하기 위해 하나님의 자리에 자기를 올려놓는 것입니다. 그리고 자기를 절대화하는 것입니다. 
사람이 신이 되려고 하는 것은 인간을 가장 비 인간화시키는 죄가 됩니다. 

◈ 어느 남자가 유명해지고 싶어서 개미를 길렀다. 그리고 길들이기 시작했다.
개미를 춤을 추게 하는 훈련을 시키는 데 7년이 걸렸습니다. 
오랜 노력 끝에 드디어 개미가 춤을 추게 하는 데 성공했습니다.
이 사실을 알리고 신문에 내려고 신문사로 가다가 배가 고파서 식당에 들어갔습니다. 
음식을 시켜놓고 음식을 가져온 종업원에게 자랑을 하고 싶었습니다. 
성냥갑에 넣어온 개미를 내놓았습니다. 종업원에게 "이 개미 좀 보시오." 했더니, 
"손님 죄송합니다."하더니 엄지손가락으로 싹 문질러 버렸습니다. 7년 동안 공들인 것이 
순식간에 날아가 버렸다. 자기 자랑은 허망한 것입니다. 

◈ 예수님은 참 겸손하셨습니다. 
그는 하나님이십니다. 
그런데 스스로 하늘 보좌를 버리시고, 사람이 되어 오셨습니다. 낮아지셨습니다. 
마굿간에 나시고, 나사렛이라는 시골 동네에 사셨습니다. 또 낮아지셨습니다. 
가난한 사람, 손가락질 받는 죄인들, 소외된 사람들의 친구가 되심. 또 낮아지셨습니다. 
저주받은 십자가에서 흉악한 죄인처럼 돌아 가셨습니다. 또 낮아지셨습니다. 

높임 받아 마땅하신 분이 /영광 받아 마땅하신 분이/ 스스로 한 없이 낮아지셨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그를 살리시고 뛰어난 이름을 주시고 그 이름에 모든 무릎을 꿇게 하셨습니다. 모든 입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주라 시인하여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셨다. 

사람은 대부분 높아지기를 원하고, 높은 자리에 앉기를 좋아하고, 어느 곳에 초대를 받으면 상석에 앉고 싶어합니다. 이것은 옛날이나 지금이나 사람이 사는 곳은 다 마찬가지입니다.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네가 누구에게나 혼인잔치에 초청을 받거든 상석에 앉지 말라. 상석에 앉았다가, 더 높은 사람이 왔을 때 주인이 와서 죄송하지만 자리 좀 비켜주시겠습니까? 라고 하게 되면 얼마나 무안을 당하겠는가? 부끄러워하며 끝자리로 가게 될 것이지만, 아예 처음부터 끝자리에 앉으면 주인이 와서 벗이여 '올라 앉으라' 하여 상석에 앉게 되면, 그때 그 자리에 참여한 많은 사람들에게 영광을 받게 되어지고 더 이상 내려오지 않을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끝자리는 더 이상 내려갈 일은 없고 올라갈 일만 있는 자리입니다. 

성도는 겸손하게 살아야 합니다. 겸손한 성도가 되기 위해서는 

① 첫째, 남을 나보다 낫게 여겨야 합니다. 
남을 나보다 낫게 여기는 생활이 자기를 낮추는 생활입니다. 

② 둘째,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을 깊이 경험해야 합니다. 
우리는 자기를 낮추어야 한다는 사실을 압니다. 그러나 인간적인 의지와 노력으로는 한계가 있습니다. 겸손해지려고 하면 할수록 교만이 오뚝이처럼 살아납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자신이 얼마나 비천한 죄인인가를 깨닫고 하나님의 은혜를 덧입어야 
합니다. 
나를 구원하시기 위해서 하늘의 영광과 보좌를 버리시고 비천한 구유에까지 낮아지신 예수님을 내 마음에 영접해야 합니다. 십자가에 죽기까지 겸손히 죄인을 섬기신 예수님의 사랑을 경험해야 합니다. 
이런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를 경험한 사람은 사회적인 지위, 신분 고하를 가리지 않고 
겸손히 낮추며 섬길 수 있습니다. 

◈ 가수 김수희가 부른 '애모'라는 대중가요 가사 중에 
그대 앞에만 서면 왜 나는 작아지는가, 그대 등 뒤에 서면 내 눈은 젖어 드는데
세상의 사랑 때문에 그 사람 앞에서 한없이 작아지고 그 뒤에서 눈시울을 적시는 것입니다. 
그러나 진실한 그리스도인은 나를 사랑하시고 은혜를 주시는 주님 앞에 서면 작아지게 됩니다. 
이런 사람은 다른 사람 앞에서도 나를 낮추며 섬기며 살 수 있습니다. 

③ 셋째, 하나님께만 영광을 돌리고자 하는 소원만 간절할 때 자기를 낮출 수 있습니다.
우리가 자기의 영광을 구하는 마음이 있을 때 높은 자리를 탐하게 됩니다. 
사람들의 영광을 구할 때 내용도 없이 폼을 잡게 됩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고자 하는 소원이 간절할 때 상석에 앉는가 말석에 앉는가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상석에 앉는 것이 하나님께 영광 된다면 상석에 앉을 수 있고 또 말석에 앉는 것이 하나님께 더 영광이 된다면 말석에 앉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고자 하는 간절한 소원으로 살 때 상석을 탐하는 마음에서 자유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교만한 자를 대적하시고 물리치십니다. 그러나 겸손한 자에게는 은혜를 주고 때가 되면 높여 주십니다. 

◈ 슈바이쳐 박사는 훌륭한 업적도 많지만 겸손한 삶을 살았습니다. 이런 일화가 있습니다. 

『어느 해 그가 모금운동을 위해 고향에 돌아갔을 때였습니다. 
기차역에는 환영객들이 몰려나와 있었고, 사람들은 모두 1등칸으로 시선이 향해져 있었습니다. 
그런데 슈바이쳐는 3등 칸에서 걸어나오는 것이었습니다. 
환영객들은 '박사님 같으신 분이 왜 3등칸을 타고 오셨습니까' 라고 물었을 때 
그의 대답은 '이 열차에는 4등칸이 없어서 3등칸을 타고 왔습니다.』 

예수님의 겸손에 대한 가르침은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자녀들에게 주는 생활 규범입니다. 

성도 여러분! 높아지고 싶은 마음이 있으십니까? 
성경이 가르치는 방법을 따르시기 바랍니다. 
다른 사람을 깎아 내리면서 자신을 높이려는 태도는 옳지 않습니다. 
그것은 결국 자신을 비하시키는 것입니다. 하나님과 대적이 되고 죄가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자기가 자신을 높임으로서 자신을 높이려는 태도 또한 옳지 않습니다. 
내가 참으로 높아지는 것은 나를 낮출 때입니다. 

오늘 우리는 두 가지의 교훈을 생각해 보았습니다. 

첫째는 하나님을 의식하며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사람들을 의식하며 신앙 생활을 하는 바리새인들에게 하나님을 의식하며 사는 모습을 보여 주셨습니다. 

성도 여러분 
신앙의 형식도 중요하지만 내용이 더 중요합니다. 
바울은 표면적 유대인이 유대인이 아니요 이면적 유대인이 유대인이라고 했습니다. 
그리스도의 사랑을 이어받아 행하는 성도가 되기 바랍니다. 

두 번째는 겸손하라는 교훈입니다.
세상적인 방법으로는 높아질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방법 - 내가 낮아지는 것입니다. 
예수님처럼 낮아지시기 바랍니다. 때가되면 하나님께서 높여주실 것입니다. 

예수님은 상식을 초월하는 가르침을 주셨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 가르침이 진리인 줄 알고 있습니다. 믿음으로 순종하셔서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시는 성도가 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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