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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거듭남의 표적과 그 방법 (요 3:1~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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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듭남의 표적과 그 방법 (요 3:1~11)

이스라엘의 선생으로서 예수님을 찾아온 니고데모는 거듭나야 한다는 말씀을 들었다. 거듭나지 않으면 하나님 나라를 볼 수 없다는 말을 들었다. 거듭남이란 중생 또는 새로 태어남으로 불리운다. 다시 나야 한다는 주님의 말씀은 사람의 영적 문제를 생물학적으로 표현한 것이다. 칭의를 얻었다는 말은 죄인인 내가 의인이 된 법적인 표현이라면 다시 태어나는 거듭남은 영적인 면이 죽었기에 영적인 면에서 다시 살아났다는 표현이다.

사실 거듭나야 하는 것은 필수적인 명령이다. 거듭나지 않아도 되고 거듭나도 되는 선택 사항이 아니다. 누구든지 거듭나는 중생의 체험이 없이는 하나님의 사람, 영의 사람이 아니고 단순히 육체의 사람일 뿐이다. 육체의 사람은 하나님의 일을 모른다. 하나님의 사정은 영으로 나야 분변되기에 육의 사람에서 영의 사람으로 변화되어야 사정을 안다.

거듭났다고 해서 그가 완전한 상태가 되었다는 것이 아니다. 아이가 태어나더라도 처음은 다 불완전하고 미숙하다. 그래도 그를 사람이라고 부르듯이 거듭난 자도 영적으로, 도덕적으로 불완전하지만 하나님과 연결되어 있다. 그래서 다시 태어난 이라고 부르며 내적인 변화가 시작되었다고 말하는 것이다.
이제부터 우리는 거듭나야 함을 가르쳐야 하고 또 나 자신이 중생한 성도가 되어야 한다. 그것은 구원의 새 생명을 얻어 행복하게 살아야 하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나라를 맛보며 천상의 삶을 누려야 하고 이 땅에서 성결의 삶을 살아가야 하기 때문이다.

이렇게 소중한 거듭남에 대한 말씀은 오늘 본문에서만 강조하는 것이 아니다. 성경 곳곳에서 나타난다.
약1:18 “우리로 한 첫 열매가 되게 하시려고 자기의 뜻을 좇아 진리의 말씀으로 우리를 낳으셨느니라.”
고후5:17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

엡2:10 “우리는 그의 만드신 바라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선한 일을 위하여 지으심을 받은 자니...”
이러한 말씀들을 보면 거듭남이란 영적인 창조로써 새롭게 지음 받아 새로운 존재가 된 것을 뜻한다.

그러면 어떻게 거듭날 수 있는가?

요3:4 말씀에서 니고데모도 거듭남의 문제 앞에서 “어떻게 늙은 사람이 다시 날 수 있습니까? 두 번째 모태에 들어갔다가 어떻게 다시 나올 수 있습니까?” 하고 물었다. 거듭남에 대한 질문은 중요한 질문이다. 그때 주님의 대답은 요3:7 “거듭나야 하겠다는 말을 기이히 여기지 말라.”고 하였다. 이 중생의 말씀은 이상하고 낯선 명령이 아니라는 뜻이다. 그리고 요3:6에서 육으로 난 것은 육이요, 영으로 난 것은 영이라고 말하므로써 육의 사람으로 살던 내가 영의 사람으로 변화되는 것이 거듭남이라는 것을 언급하였다.
처녀는 아기를 나아 보기 전에는 산모의 고통을 모른다. 누에고치는 나방이 되어 하늘을 날기 전에는 하늘의 삶을 모른다. 어린이집에 다니는 아이가 만화 그림을 보고 신이 나 하지만 피카소의 명품 명화를 감상하지 못한다. 많은 사람이 천국의 영광을 모르고 땅의 것을 더 사랑한다. 하나님의 사랑보다 세상을 더 사랑한다. 겸손하기 보다 교만으로 행한다. 온유하지 못하고 혈기등등하다.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으로 살기보다 정욕적이요, 마귀적인 마음으로 살아간다. 이 모습이 육의 사람의 모습이요, 거듭나지 못한 증거이다.

거듭난 사람의 표식은 분명하다.

1. 믿음이 분명하다.
그리스도 예수를 믿어 하나님의 아들이 되었다는 믿음이 분명하다.
갈3:26 말씀에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의 아들이 되었으니...”
예전에 갖지 못한 아들에 대한 믿음이 있는가를 확인하라. 없으면 거듭나지 못한 것이다.

2. 소망이 분명하다.
벧전1:3 “찬송하리로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 하나님이 그 많으신 긍휼대로 예수 그리스도의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심으로 말미암아 우리를 거듭나게 하사 산 소망이 있게 하시며...”
거듭난 자는 산 소망이 있다. 소망이 있기에 찬송이 나온다. 

3. 사랑이 분명하다. 
롬5:5 “소망이 부끄럽게 아니함은 우리에게 주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마음에 부은 바 됨이니...”

거듭난 자는 사랑이 부어진 자다. 하나님의 사랑이 부어졌기에 소망도 분명한 소망이 되고 믿음도 분명한 믿음이 된다. ‘내가 사랑 받은 자다.’ 이 하나님의 사랑이 분명하면 거듭난 것이다. 그리고 사람을 대하여 인자하게 하고 긍휼이 여기고 민망히 여긴다면 거듭난 것이다. 그래서 믿음, 소망, 사랑 때문에 거듭난 사람은 점점 더 성숙해져 간다. 미숙하고 불완전한 성화의 시작이 거룩으로, 완전으로 장성해 간다. 

거듭남은 성화의 출발이다. 의인됨은 구원의 시작이라면 거듭남은 구원 받은 자로서 거룩한 성결의 시작이다.
교회사 속에서 루터의 종교 개혁 전통을 따르는 사람들은 믿음으로 인한 칭의, 법적인 선언을 중요시 여겼다. 그러나 루터의 신앙을 이어받은 교회가 다시 형식에 빠지게 되었다. 독일의 교회가 옛 가톨릭적 신앙ㅇ로 회귀하게 될 때 경건주의자들이 나타났다. 필립 슈페너, 요한 아른트는 칭의를 바탕으로 하면서 생물학적 거듭남의 삶을 강조하였다. 그 경건주의 신앙이 존 웨슬리에게 영향을 주었고 웨슬리 자신도 거듭나게 되는 체험을 하였다. 

거듭나는 중생의 회심은 정말 중요한 것이다. 어떻게 거듭나게 되는가? 그 대답이 요3:5이다.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물과 성령으로 나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느니라.”

주님이 일러주시는 거듭남의 방법은 이렇다.

첫째, 말씀으로 거듭난다.

요3:5에서 물과 성령이라 하셨는데, 물은 무엇일까요? 어거스틴은 세례를 뜻한다(히10:22)고 하였지만 이 물은 바로 말씀이다.

엡5:25 “이는 곧 물로 씻어 말씀으로 깨끗하게 하사 거룩하게 하시고...”라고 하였다.
겔36:25~27에도 “맑은 물로 너희에게 뿌려서 너희로 정결케 하되...”라고 하였다. 사람은 외형적인 물 세례로 거듭나는 것이라고 할 수 있지만 말씀으로 붓는 세례다. 말씀을 들을 때 거듭난다. 세세토록 있는 살아있는 말씀의 검이다.(엡6:17) 말씀은 좌우에 날선 어떤 검보다 예리하여 죄와 허물을 찌르고 쪼개어낸다. 

웨슬리는 1738년 5월 24일, 말씀을 듣다가 회심의 체험을 하였다. 조그만 집회소에서 윌리엄 홀랜드가 앞에 나가서 루터의 로마서 주석 서문을 읽을 때 그의 마음이 이상하게 뜨거워짐을 느꼈다. 그는 지금까지 북미 선교의 실패자로서 얼더스케이트를 거닐며 배회하다가 새로워지는 체험을 하였다. 그의 일기를 보면 “나는 그리스도, 오직 그리스도만이 나의 구주이심을 믿는 마음이 생겼다. 그리고 그가 내 죄, 나 자신의 죄를 가져 가시고 죄와 사망의 법에서 나를 구원하셨다는 확신을 얻었다.”고 고백한다. 그는 이제 아들의 믿음을 가지고 사는 하나님의 자녀로 태어난 것이다.
사람은 어느 순간에 말씀으로 거듭난다. 행10:44의 말씀을 보면 고넬료의 집에서 베드로가 말씀을 증거할 때 “성령이 말씀을 듣는 모든 사람에게 내려오시니...”라고 하였다. 말씀은 믿음이 생기게 하고 말씀은 사람을 변화시키는 것이다. 


둘째, 보혜사 성령으로 거듭난다.

성령은 진리의 영이다. 육체의 사람은 영의 사람으로 다시 탄생시키는 거듭남은 보혜사의 사역이다. 
고전12:3 “또 성령으로 아니하고는 누구든지 예수를 주시라 할 수 없느니라.”
성령이 역사하셔야 주님이 가르쳐 준 것이 생각난다. 보혜사(保惠師) 성령이라고 말하는 보(保)는 보호자 성령을 말한다. 혜(惠)는 은혜 주시는 성령을 말한다. 사(師)는 가르치고 인도하는 스승으로서의 성령을 말한다. 거듭나는 것은 나의 영리함 때문에 일어나는 것이 아니다. 오직 살리시는 성령님에 의해서 영의 사람으로 태어나는 것이다.
성령을 인정해야 한다. 성령을 외면하고 성령을 훼방해서는 안된다. 나를 거듭나게 하시는 성령을 비웃고는 용서 받을 길이 없다.

마12:31 “사람의 모든 죄와 훼방은 사하심을 얻되 성령을 훼방하는 것은 사하심을 얻지 못하겠고...”
마12:32 “또 누구든지 말로 인자를 거역하면 사하심을 얻되 누구든지 말로 성령을 거역하면 이 세상과 오는 세상에도 사하심을 얻지 못하리라.”
성령님의 말이 우리를 다시 태어나게 만드시는데 이 성령님을 거역한다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있는 길이 없는 것이다.


셋째, 바람처럼 순간적으로 거듭난다.

요3:6 “바람이 임의로 불매 내가 그 소리를 들어도 어디서 오며 어디로 가는지 알지 못하나니 성령으로 난 사람은 다 이와 같으니라.”
바람은 어디서 부는지 모른다. 바람은 보이지 않으나 분명히 있다. 바람은 내가 좌지우지 못한다. 성령의 역사도 바람 같아서 거듭남은 바로 보이지 않는 어느 순간의 역사이다. 
성령은 본래 바람이란 뜻이다. 영어로 Holy Spirit, 헬라어로 프뉴마, 히브리어로 르하흐란 성령은 바람이란 뜻이다. 거듭남은 바람처럼 임한다. 성령님이 어느 순간에 임재하심으로 바뀌는 것이다. 어제의 깡패가 오늘 회심하여 새 사람으로 빚어져 있다. 핍박하던 남편이 한 순간에 변하여 아내를 돕는 신앙인이 되어진다. 모두 바람 같은 성령의 역사다.

이것을 아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성령 체험이다. 거듭나게 하시는 영을 경험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진리를 알고 기독교를 알고 교회 생활을 알고 아는 것이 중요하지만 더 중요한 거듭남의 길은 바람 같은 성령의 사역을 체험하는 일이다. 

“오소서 이 시간, 우리 가운데 성령이 오셔서 완악한 육적 자아가 부서지고 거듭나게 하소서!”

거듭나는 변화의 체험이 제일 중요하다. 수년 간 교회를 다녔지만 거듭나지 못한 육적 크리스챤으로서 모조품, 유사품 성도가 되어서는 안된다. 99% 크리스챤도 진품이 아니다. 새롭게 거듭난 크리스챤, 영적 크리스챤으로서 정품, 명품, 순도 100% 크리스챤이 되기를 바란다. 

웨슬리가 거듭났을 때 그는 성결한 삶을 실천하며 그리스도를 닮으려 하였다. 그는 교단을 만들려 하지 않았고 진정한 신앙의 본질을 추구하였다. 거듭남은 우리를 진짜 크리스챤으로 걸어가게 한다. 우리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거듭남의 체험이며 거룩한 삶의 실천이다. OMC 성도들은 이제부터 참된 믿음, 소망, 사랑의 삶을 걷기를 축원한다. 그것이 이 나라와 이 지역을 새롭게 하는 성도의 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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