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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하나님은 우리의 피난처 (시 46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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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은 우리의 피난처 (시 46편)

성도 여러분, 한 주간도 안녕하셨습니까? 벌써 여름인가봅니다. 지난 밤에는 얼마나 땀을 흘리고 잤는지? 잠을 잔 것이 아니라 일을 하고 일어난 것 같이 온 몸이 아팠습니다. 오늘도 함께 모여 예배하는 우리의 심령에 하나님께서 주시는 은혜와 감동이 가득한 시간이기를 축원합니다. 

옛날 한 수도사가 올리브 나무를 심었습니다. 그리고 그는 이렇게 기도하였습니다. “이 연약한 나무의 뿌리에 물이 필요하오니 단비를 내려 주옵소서.” 하나님께서 그 기도를 들으시고 단비를 내려 주셨습니다. 그 수도사는 또 기도했습니다. “주여, 이 나무는 태양 빛이 필요합니다. 기도하오니 햇빛을 내려 주옵소서.” 검은 구름에 덮여 있던 해가 나왔습니다. 이번에 그는 또 이렇게 외쳤습니다. “주님, 이 나무가 단단해지기 위해 서리가 필요합니다.” 그 작은 나무에는 서리가 앉아 번쩍거리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웬걸 저녁에는 죽어 버렸습니다.

그 수도사는 동료 수도사의 방을 찾아가 그의 이러한 경험을 털어놓았습니다. 한참이나 얘기를 듣고 있던 친구 수도사가 말합니다. “나도 역시 작은 나무 한 그루를 심어 키우고 있습니다. 그런데 아주 잘 자랍니다. 나는 나무를 하나님께 맡깁니다. 그 나무를 만드신 하나님께 맡깁니다. 그분은 나무가 필요한 것과 그 때를 나보다 정확히 아시니까요. 그러므로 나는 내 방식이나 어떤 생각들에 얽매이지 않습니다. 다만 이렇게 기도하지요. ‘주여! 이 나무가 필요로 하는 것을 주시옵소서. 강풍이든, 햇볕이든, 또한 바람이든, 비나 서리이든 주님께서 때를 따라 주시옵소서. 주님께서는 이것을 만드셨고, 그리고 잘 아시나이다’ 라고 기도할 뿐입니다.” 어떻습니까?

여러분, 신앙생활이란 내 생각, 내 주장, 내 원함에 하나님을 끌어들이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과 원하심 앞에 내 생각과 주장을 맞추어 나가는 것입니다. 전적으로 하나님의 주권에 나를 맡기고 살아가는 것이 신앙생활입니다. 내가 이해되지 않는 문제가 있을 때에도, 원치 않는 환란 가운데서라도 전적으로 신뢰하며 나아가는 것입니다. 해가 보이지 않는 캄캄한 한밤중에도 새벽이 올 것을 기대하며 서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묻고 계십니다. 어려움과 고통의 자리에서도 나를 신뢰할 수 있겠느냐? 오늘 이 시간 말씀 안에서 믿음이 꽉 차서 ‘하나님은 나의 피난처 이십니다’고 고백하는 은혜의 시간이 되시기를 간절히 축원합니다.

오늘 본문 말씀은 “확신과 신뢰”라는 주제가 그 중심을 이루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다스리심과 통치하심을 확신하며 사는 하나님의 백성들이라면 이제 그들에게 요구되는 것은 한 가지, 신뢰입니다. 오늘의 이 시편은 성전에 올라가면서 고라자손이 불렀던 찬양에서 유래되는 말씀입니다. 그러나 성전에 대해서 특별한 언급이 없지만 하나님의 보호하시는 임재에 대한 강한 확신을 담고 있습니다. 1절에서 시인은 하나님을 가장 신뢰할 수 있는 분으로 강조하고 있습니다. 예배를 드리기 위해 성전에 오르는 예배자들은 그들의 삶의 자리가 힘들고 어렵지만 깊은 확신을 가지고 나아갈 때 염려와 두려움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습니다. 그들이 당하는 어려움을 묘사하면서 시인은 4중의 위협을 묘사하고 있습니다. 땅이 변하고, 산이 흔들리고, 바닷물이 솟아나고, 산이 요동하는 삶의 자리에 그들은 지금 서 있습니다(2-3절). 삶의 터전의 불안전성, 그것이 그들의 삶의 현주소입니다. 오늘 우리들의 삶을 비유적으로 표현하고 있다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런 인생에서 필요한 것은 확신입니다. 불평하고 원망할 수 있는 상황에서 원망하기보다는 오히려 두 손을 높이 들고 고백하며 나아가야 하는 것입니다. “나는 하나님을 신뢰합니다.” 오늘 시인은 지금 극한 어려움 가운데 있습니다. 곤고함과 탄식이 절로 터져 나오는 상황 가운데 있습니다. 그러한 자리에서 그는 확신을 가지고 노래합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피난처시요 힘이시니 환난 중에 만날 큰 도움이시라. 그러므로 땅이 변하든지 산이 흔들려 바다 가운데 빠지든지 바닷물이 흉용하고 뛰놀든지 그것이 넘침으로 산이 요동할지라도 우리는 두려워 아니하리로다.… 너희는 가만히 있어 내가 하나님 됨을 알지어다. 내가 열방과 세계 중에서 높임을 받으리라 하시도다. 만군의 여호와께서 우리와 함께 하시니 야곱의 하나님은 우리의 피난처시로다.” 

여러분, 뒤에는 애굽의 군대가 추격해 오고 앞에는 한발자국도 나아갈 수 없도록 홍해가 가로막고 있는데 가만히 서 있으라고 말씀하시다니 그것은 얼마나 미련한 방책입니까? 그러나 그것이 하나님의 방법이었습니다. 하나님의 방법이 답답하게 여겨졌던 사람들은 자신의 방법대로 하다가 지쳐 쓰러지지만 하나님을 신뢰하는 사람들은 손을 들고 하나님의 도우심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기다리고 있었으며, 하나님의 일하심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우리에게 왜 염려가 생기는가하면 문제가 있기 때문이다. 내 힘으로는 어찌할 수 없는 어떤 문제입니다. 그러나 똑같은 어려움의 환경에 서 있어도 어떤 사람은 믿음으로 견고히 서는 것을 보면 반드시 문제 때문만은 아닌 것 같습니다. ‘염려하다’라는 말의 헬라어는 ‘메림나오’인데, 이 단어는 마음이 나누어진다는 뜻입니다. 염려가 왜 생기는가? 마음이 나누어지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신뢰하면서 믿음으로 나아가야 할 사람의 마음이 나누어지기 때문에 염려가 생깁니다. 

믿음이 무엇입니까? 신뢰하는 것입니다. 맡기는 것입니다. 살다가 어떤 큰 문제가 있으면 어른들은 염려 때문에 잠을 이루지 못합니다. 그러나 아이들은 잠만 잘 잡니다. 아이들은 부모를 100퍼센트 믿고 맡겼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너희 염려를 주께 맡기라”고 합니다. 맡기는 것이 믿음입니다. 하나님을 신뢰하면 맡기게 됩니다. 그러므로 은혜 중에 은혜는 ‘잘 맡기는 은혜’입니다. 상황은 여전히 어렵지만 염려가 안 되는 것은 은혜가 아니면 불가능합니다. 걱정거리가 있어도 걱정이 안 되는 은혜, 문제가 있어도 잠을 푹 잘 수 있는 은혜 말입니다. 그러기 위해 필요한 것은 체질 변화입니다. 

염려하는 체질에서 잘 맡기는 체질로의 전환이 필요합니다. 저는 사우나에 가면 언제 보아도 은혜가 되는 문구가 있습니다. 여러분은 느끼신 일이 있으신지요? ‘귀중품은 주인에게 맡기십시오. 맡기지 않은 것은 책임지지 않습니다.’ 여러분! 믿음은 평안할 때도 필요하지만 어려울 때는 더욱 필요합니다. 시인은 지금 그 믿음의 힘을 활용하여 굳게 서 있습니다. 불안과 염려, 걱정을 떨쳐 버리고 믿음 가운데 견고히 서 있습니다. 그러한 그에게 주어진 명령은 무엇인가하면 “너희는 가만히 있으라.” 마음이 강퍅해지지 말고 부드러운 심령으로 하나님 앞에 맡기고 가만히 서 있으라는 것입니다.

노자의 스승이 나이가 들어 이제 제자들에게 마지막 교훈을 주고 있었습니다. 스승의 가르침을 경청하던 젊은 노자가 스승에게 물었습니다. “선생님, 선생님 곁에는 많은 제자들이 선생님을 존경하고 따릅니다. 선생님 곁에 있기만 해도 행복했습니다. 우리가 아픔이 있었지만 선생님을 만나면 아픔이 치유되었습니다. 우리 가운데 갈등이 있었지만 선생님과 대화를 하다 보면 모든 갈등이 해소되는 걸 느꼈습니다. 그 비법이 어디 있습니까?” 그 때 스승이 노자의 손을 끌어다가 입속에 집어넣었습니다. “얘야, 딱딱한 이가 있느냐?” “선생님 이가 하나도 없습니다.” “말랑말랑한 잇몸은 있느냐?” “예, 잇몸은 그대로 있습니다.” “말랑말랑한 혓바닥은 그대로냐?” “예, 그대로 있습니다.” “너도 그렇게 살아라! 남을 찌르며 딱딱하게 살지 말고 부드럽게 살아라. 부드럽게 사는 길이 이기는 길이다.”하였습니다.

가만히 서 있는다는 것은 부드러운 심령으로 자신을 하나님 앞에 세우는 모습을 의미한다. 부드러운 심령은 서게 되어 있습니다. 반면 하나님 앞에서 딱딱해지면 우리는 넘어집니다. 말씀 앞에서 강퍅해지면 넘어지게 되어 있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나의 계획이 너무 뚜렷하고, 나의 호불호가 뚜렷하고, 내가 기뻐하는 것이 너무 뚜렷하면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것을 놓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을 놓칠 수 있습니다. 문제 상황에 대한 하나님의 처방은 너무 간단합니다. “너희는 가만히 있으라. 그리고 너희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알라.” 이것이 하나님이 백성들에게 주신 명령이었습니다. 염려와 걱정에 대한 처방입니다. 

어렸을 적 시골에서 자란 사람이라면 누구나 갖고 있는 추억이 있습니다. 가을 추수가 가까워 오면 메뚜기를 잡으러 나갑니다. 작은 막대기로 벼를 휘저으면 메뚜기가 이리저리 뛰어 오릅니다. 그 때 두 손을 모아 덥석 잡으면 다 잡습니다. 신나게 메뚜기를 잡으면서 어린 마음에도 이 녀석들이 가만히 있으면 안 잡힐텐데 참 미련한 녀석들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꿩이란 놈은 얼마나 지혜가 있는지 바로 옆에 지나갈 때까지 가만히 엎드려 있습니다. 그리고 얼마나 빠른지 그 녀석을 맨손으로 잡는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합니다. 아무리 급해도 가만히 있어야 할 때는 가만히 있을 줄도 알아야 합니다. 물론 필요하면 민첩하게 움직이기도 하고요.

하나님은 말씀하십니다. “너희들 생각에 사로잡혀 걱정하고 염려하고 불안해하는데, 하나님이 어떻게 인도하고 계시는지, 부드러운 마음을 가지고 좀 서 있어 보아라. 하나님을 신뢰하면서 좀 조용히 있어봐라. 문제 앞에서 헤매지 말고 방황하지 말고, 하나님을 바라보면서 하나님을 신뢰하면서 좀 가만히 서 있어 봐라.” 이것이 하나님의 해법이었습니다. 

아무리 문제가 있어도 가만히 있으면 좋으련만, 하나님을 신뢰하면서 듬직하게 서 있으면 좋으련만, 환난을 당하면 사람들은 방황하고 걱정하고 염려하며 밤잠을 이루지 못합니다. 다른 한편으로 왜 어려운 상황 가운데서 가만히 있으라고 하시는가? 그러면 우리 편에서 아무런 노력도 필요가 없다는 말인가? 가만히 있으라고 하시는 뜻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하나님이 인도하신다는 뜻입니다. 광야에서, 홍해에서, 그들을 죽이려 달려드는 대적 앞에서 하나님이 가장 원하셨던 것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을 구체적으로 알고, 그분을 전심으로 신뢰하기를 원하셨습니다. 하나님이 무엇을 행하셨으며, 무엇을 행하고 계신지를 그들이 온 마음으로 알기를 원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구원하시는 하나님이셨고, 인도하고 계시는 하나님이셨습니다. 

그렇습니다. 다시 강조합니다. 하나님의 능력의 손이 너희를 인도하고 있으니 너희는 가만히 있으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이것은 믿음과 신뢰의 삶을 살 것을 요청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능력의 손이 그들을 지키시고, 보호하고 계심을 알지 못하면 방황하게 되지요. 이러한 사실이 출애굽기에서는 생생하게 표현되어 있습니다. 

출 13:21-22은 하나님의 인도하심과 보호하심을 이렇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여호와께서 그들 앞에 행하사 낮에는 구름 기둥으로 그들의 길을 인도하시고 밤에는 불기둥으로 그들에게 비취사 주야로 진행하게 하시니 낮에는 구름 기둥, 밤에는 불기둥이 백성 앞에서 떠나지 아니하니라.” 생생한 구원, 생생한 은혜, 생생한 인도하심입니다. 광야 교회는 구원받은 감격 속에서 영적 순례의 길을 떠나는데, 그 길을 하나님이 친히 인도해 가시는 행복한 교회였습니다. 하나님이 그들 앞서 행하고 계셨으며 나아갈 길을 보여 주고 계셨습니다. 낮에도 밤에도 그들을 인도하시며 지키고 계십니다. 고개만 들면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볼 수 있다고 한다면 그것이 얼마나 감격스러웠겠습니까? 아무리 힘들어도, 아무리 문제가 어려워도 날마다 하나님을 향해 고개를 들라는 말씀입니다. 날마다 고개를 들어 그분이 인도하시는 방향을 바라보면서 기가 막히는 웅덩이에 빠졌다 할지라도 광야 길에서 불기둥과 구름기둥으로 인도하고 계시는 주님을 믿고, 그분을 신뢰하면서 살라는 말씀입니다.

알프래드 테니슨의 시 가운데 “나 모래톱을 지날 때”라는 시가 있습이다. “해지고 저녁별 / 나를 부르는 소리! / 나 바다로 떠나갈 때 / 모래톱에 슬픈 울음 없기를/ 무한한 바다에서 온 것이 / 다시 제 고향으로 돌아갈 때 / 소리나 거품이 나기에는 너무나 충만한 / 잠든 듯 움직이는 조수만이 있기를 / 황혼 그리고 저녁 종소리 / 그 후에는 어둠/내가 배에 오를 때/이별의 슬픔이 없기를 / 시간과 공간의 한계로부터 / 물결이 나를 싣고 멀리 가더라도 / 나를 인도해 줄 분을 만나게 되기를 / 나 모래톱을 건널 때.” 

어려운 시라서 이해하기가 어려워 여러번 읽게 되었습니다. 어쩌면 테니슨은 가물가물 꺼져가는 노년에 이 시를 쓴 것 같습니다. 점점 기운은 쇠하고 호흡이 끊어져 모래톱을 지날 때 인도해 달라는 기도를 드리고 있습니다. 인생의 가장 곤고한 때에 인도하시는 하나님을 만날 수 있게 해달라는 간구의 마음이 서린 기도입니다. 

우리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젊은 날이 다 지나가고 우리의 인생이 다 끝난다 할지라도 인도해 주실 것입니다. 앞으로도 우리가 모래톱을 지날 때에라도 인도해 주시기를 간구하는 기도에 대해 주님은 약속하십니다. 하나님만을 섬기기로, 하나님만을 위해서 살기로, 주님만 바라보며 살기로 작정한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약속하십니다. “볼지어다. 세상 끝날까지 내가 너희와 함께 있으리라.” 우리의 형편이 어떠하여도 주님의 이 약속은 변치 않습니다. 이 약속 믿고 살아가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이제 말씀을 마무리 하겠습니다. 걱정과 염려를 떨쳐버리지 못하고 사는 우리들의 문제는 무엇입니까? 지식이 없어서 정보가 없어서 기술이 없어서 돈이 없어서도 아닙니다. 봉사를 안하나 헌금을 안하여서도 아닙니다. 

오늘 우리의 삶 가운데 진정으로 회복되어야 할 것이 있다면 그것은 하나님에 대한 흔들림이 없는 믿음과 그분을 끝까지 의지하는 신뢰의 마음입니다. “너희는 너희 하나님 여호와를 신뢰하라 그리하면 견고히 서리라”(대하 20:20). 오늘은 비록 홍해 앞에 서 있는 것처럼 답답함 가운데 서 있다 할지라도 하나님은 우리를 구원하여 하나님의 백성들로 세우셨으니 인도하시는 하나님을 믿고 신뢰하면서 나아갈 수 있기를 바랍니다. 이것이 이 백성들 앞에서 교회가 보여 주어야 할 모습입니다. 이것이 성도들이 보여주어야 할 참 모습입니다. 

우리에게 놀라운 능력과 은혜를 경험하게 하실 하나님을 오히려 찬양하며 나아갈 수 있어야 합니다. 오늘의 환경에 지배당하지 않고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믿으며, 구원의 하나님을 신뢰하면서 나아간다면, 살아계신 하나님, 도우시는 하나님, 사랑의 하나님, 능력의 하나님을 더 구체적으로 경험하는 복된 삶을 살게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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