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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보호하시고 인도하시는 하나님 (신 32:1~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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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호하시고 인도하시는 하나님 (신 32:1~15)

     이스라엘 백성이 출애굽할 때가 약 B.C 1446 년경이라면 
오늘 모세가 이스라엘 백성에게 마지막 노래를 지어 불러 줄 때가 
    약 B.C. 1406 년경으로 보고 있습니다. 

그러니 이스라엘 40년 광야생활이 거의 끝나갈 무렵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돌이켜 볼 때 
지나온 40년 광야생활 너무 너무 불편하여 하나님께 원망하고 불평했지만 
하나님은 오늘 모세를 통하여 
아니야, 내가 너희를 눈동자 같이 지켜 보호해 주었고 
독수리 새끼 훈련시키듯이 인도해 주었다고 합니다. 
내일교회 설립 32주년을 맞이하여 
자기 백성을 보호하시고 인도하시는 하나님에 대해 눈이 뜨여지기를 바랍니다.

모든 시대는 그 시대를 증거할 수 있는 노래를 가지고 있습니다. 
노래를 보면 그 시대 사람들의 삶과 사랑을 알 수 있습니다. 
성경에도 그 시대를 알 수 있는 노래가 나오는데 

         오늘 본문이 기록된 신명기 32장입니다. 
이 노래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증거로 불렀던 노래였습니다. 
노랫말을 읽어보면 당시 이스라엘의 삶을 알 수 있습니다. 
모세가 죽을 때가 되자 하나님께서 
  모세를 통하여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노래를 가르쳐 부르게 하였습니다. 

그 이유는 모세가 죽은 다음에 
   이스라엘 백성들이 들어가 살 땅에서 이방신을 섬기며 
   하나님을 잊어버리고 당신과 세운 언약을 어길 것이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래서 신31“19절에 
“이 노래를 기록하고 이스라엘 백성에게 가르쳐서 부르게 하여 
  그들에 대한 내 경고가 되게 하라`고 하신 것입니다. 
이 노래는 이스라엘에 대한 하나님의 선하심과 보호하심을 
   대단히 생생하고 상징적인 어조로 설명하고 있습니다.

모세의 노래 가사 중 먼저 강조 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1. 오늘 하나님 말씀의 교훈을 무엇으로 비유하며 왜 그렇게 비유합니까?(1-3절)

모세의 노래는 1절 [ 하늘이여 귀를 기울이라 내가 말하리라
                     땅은 내 입의 말을 들을찌어다 ]로 시작합니다.
먼저 하나님의 말씀의 중요성을 강조합니다.
먼저 하늘과 땅으로 하여금 귀를 기울이고 들어라는 것은 
하나님 말씀은 
영원불변하시고 천지가 귀를 기울일 만큼 중요한 말씀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모세는 하나님의 말씀을 비유하기를
      하늘과 땅 사이에 일어나는 자연적 현상 가운데서 비유하고 있습니다.
2절 [ 나의 교훈은 비처럼 내리고 내 말은 이슬처럼 맺히나니
     연한 풀 위의 가는 비 같고 채소 위의 단비 같도다 ]
이슬은 내릴 때 눈에 보이지는 않지만 팔레스틴 지역에서는 
      식물의 생명을 유지하는 원천으로서 하나님의 은혜를 상징합니다.
       그래서 이슬 같은 성령의 은혜라고 합니다. 
그리고 연한 풀 위의 가는 비는 
       역시 눈에 잘 보이지는 않지만 생명을 돋아나게 하는 
            하나님 말씀의 감화력을 상징합니다. 
그리고 채소 위의 단비는 하나님 말씀의 은혜의 풍성함을 상징합니다. 

지금도 우리가 영원불변하시고 귀중한 하나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인다면 
눈에 보이지는 않지만 
     하나님은 말씀의 은혜로 우리에게 영적인 생명력을 공급하시고
     우리의 마음을 감동 감화하셔서 
     우리의 삶에 풍성한 열매를 맺게 해 주실 줄 믿습니다. 
하나님 백성이 살길은 바로 이 길 밖에 없습니다.
말씀에 귀를 기울이면 살 길이 열릴 줄 믿습니다.
                     풍성한 삶을 안겨다 줄 줄 믿습니다. 

사55:2-3절에도
[ 너희는 귀를 기울이고 내게 나아와 들어라 그리하면 너희 영혼이 살리라 ]
[ 나를 청종하라 그리하면 너희가 좋은 것을 먹을 것이며 
      너희 마음이 기름진 것으로 즐거움을 얻으리라 ] 믿으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은 절대 자신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는 자에게 
         실망시키지 않으시는 분이십니다.  

이스라엘에게 말씀하시는 하나님은 어떤 하나님이십니까?


2. 이스라엘 하나님은 어떤 하나님이시며 이스라엘 백성은 어떻게 반응했습니까?(4-8절)

4절에 [ 그는 반석이시니 그가 하신 일이 완전하고
        그의 모든 길이 정의롭고 진실하고 거짓이 없으신 하나님이시니
        공의로우시고 바르시도다 ]
사막 지대를 배경으로 하고 있는 광야생활에서 
     쉽게 쌓였다가 쉽게 흩날리는 모래 산과는 달리 
     사막의 여행자에게는 온갖 위험으로부터 보호해주는 안전한 피난처는
     바로 반석 같은 큰 바위인 것입니다.

그래서 다윗은 시18:2절에서 
[ 여호와는 나의 반석이시오 나의 요새시오 나의 피할 바위시오 
나의 산성이시로다 ] 라고 고백합니다. 
모두 반석을 배경으로 하고 있습니다.
이스라엘 40년 광야생활 바로 오늘 우리가 살아가는 인생길입니다.

광야 같은 인생 길 
하룻밤 자고 나면 없어지는 모래 산과 같이 세상의 것은 다 변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반석으로서 절대 변하지 않으시는 분이십니다.
   절대로 자기에게 귀를 기울이는 자에게 실망시키지 않으시는 분이십니다. 
그 분은 하시는 모든 일이 완전하신 분이십니다.
   그 분의 신실성에는 원망할 아무런 이유가 없다는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는 성도들 되시기 바랍니다.

그런데 이러한 하나님의 변치 아니하심과 신실함에도 불구하고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을 실망시켰습니다. 

5-6절까지 보면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의 신실하심에 아랑곳없이 저들은 되려 하나님 앞에 악을 행하니 
하나님의 자녀가 아니요 흠이 있고 삐뚤어진 세대로다
시리아 번역에는 [ 하나님을 모독하는 자녀라 ] 고 번역하고 있습니다. 

출32:9절에는 패역하고 목이 곧은 백성이라고 합니다. 
왜 이렇게 하나님의 은혜를 모르는 어리석고 무식한 백성이 되었느냐? 
     그는 너를 얻으신 너의 아버지가 아니냐?
     너를 지으시고 너를 세우신 하나님이 아니냐?
그런데 왜 이렇게 우매무지한 백성이 되었느냐?

오늘 모세를 통한 이스라엘 백성을 향한 이 질책성 경고는 
     우리를 향한 꾸짖음이기도 합니다. 
왜 이 백성들이 이렇게 삐뚤어지고  우매무지한 백성이 되었느냐? 
하나님의 은혜를 깨닫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본래 하나님과 이스라엘 백성은 어떤 관계입니까?
9절 [ 여호와의 분깃은 자기 백성이라 야곱은 그가 택하신 기업이로다 ] 
이스라엘은 하나님께서 당신의 잣대로 재어서 따로 구분해 놓은 
           하나님의 택하신 기업이라는 것입니다.
           이 기업은 변할 수 없습니다. 
부모와 자식과의 관계가 변할 수 없듯이 
       하나님과 이스라엘 관계도 변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는 변함이 없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사실을 너희가 모르겠거든 
7절에 옛날을 기억하라 역대의 연대를 생각하라 
      네 아비에게 물어라 그가 네게 설명할 것이요
      네 어른들에게 물어라 그들이 네게 이르리라 ] 
어느 민족이고 고난의 세대가 살아있는 동안에는                  
     그 민족은 절대로 망하지 아니한다는 말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교육 방법은 부모를 통한 교육방법입니다.
그래서 유월절 절기를 지키라고 하면서 
출12:26절에  [ 후일에 너희 자녀가 묻기를 이 예식이 무슨 뜻이냐 하거든 
               이는 여호와의 유월절 제사라 ] 고 말하라.

뿐만 아니라 
요단강 건너 길갈에 열 두 돌의 기념비를 세워 놓고도
[ 후일에 너희 자손이 그 아비에게 묻기를 이 돌이 무슨 뜻이냐? ] 묻거든 
[ 여호와의 손이 능하심을 알게 하여 
           여호와를 영원토록 경외하게 하라 ] 고 합니다.
이와 같이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율법을 주실 때도 신6:4절이하
[ 너는 마음을 다하고 성품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라 ] 고 하면서
[ 네 자녀에게 부지런히 가르치며
  집에 앉아있을 때에든지, 길에 행할 때에든지,
 누웠을 때에든지, 일어날 때에든지 이 말씀을 가르치라 ] 고 합니다.

오늘 패역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네 부모에게 물어보라고 합니다.
어떻습니까? 우리는 자식에게 물려줄 신앙의 유산이 있습니까?
자식들에게 신앙적으로 할 말이 있습니까?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네 명의 신학자들이 모여 성경 중 어느 역본이 최고냐 논쟁이 벌어졌습니다.
지금도 흠정역이 아니면 
      성경을 하나님 말씀으로 여기지 않는 교파도 있습니다.

한 신학자가 [ 전통있는 K.J.V이 가장 훌륭하다 ] 고 주장했습니다. 
한 신학자는 [ A. Standard .V이 원문에 가장 충실하기 때문에 
             가장 훌륭하다 ] 고 했습니다.
한 신학자는 [ 현대적인 어휘를 사용한 Moffatt 번역이 가장 훌륭하다 ]
             고 했습니다.
그 때 침묵을 지키고 있던 네 번째 신학자가 하는 말이 
[ 난 우리 어머님의 번역이 이 세상에서 가장 훌륭하다고 생각하네
 나는 우리 어머니가 삶으로 들려주던 성경 말씀보다 더 설득력 있는
       번역본을 대해보지 못했다네 ]

그렇습니다. 
자녀들에게 신앙적 유산을 물려줄 수 있는 믿음의 부모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그 어떤 성경공부 제자훈련 보다
   그 부모가 삶으로 가르친 성경말씀보다 훌륭한 말씀은 없습니다.
그럼 왜 이스라엘 백성들이                                       
     흠이 있고 삐뚤어진 세대가 되고 우매무지한 백성들이 되어 
하나님의 은혜에 보답지 아니하고 패역하고 목이 곧은 백성이 되었습니까?
         하나님의 은혜와 계획을 알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을 어떻게 보호하시고 인도했습니까?


3. 광야생활 중에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어떻게 지켜주며 인도했습니까?(10- 11절)

이스라엘 백성들이 
물이 없다고 시험하고, 입맛이 없다고 원망하고, 길이 불편하다고 불평했지만 
하나님은 말씀하십니다. 10절에
[ 아니야~! 네가 너를 못된 짐승이 우글거리는 황무지와 광야 같은 세상에서 
 너를 눈동자 같이 보호하고 지켜주었다 ] 고 합니다. 
사람의 인체 중에 눈동자만이 내가 나를 보호하는 것보다 
                  자기가 더 잘 알아 보호합니다.

한 번 테스트 해 보세요. 
다른 감각기능은 다 보고 하고 지령을 받아 행동하지만 
맛보고 삼키지요, 냄새 맡아보고 들이킵니다. 
그러나 눈동자만큼은 
뭐가 씨익~! 하고 날아오면 자기가 먼저 눈 감아놓고 보고합니다. 
이와 같이 하나님은 내가 나를 보호하고 지키는 것보다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광야생활 가운데 
                  더 잘 알아 보호하고 지켜주신 줄 믿습니다.

한 예를 들면 신1:2절에 
[ 호렙산에서 세일 산을 지나 가데스 바네아에 까지 열하룻 길이더라 ] 
그러니 가나안가지 보름만 하면 갈 수 있는 가나안을 향한 여정을 
왜 하나님께서 그토록 40년 동안 방황하게 하셨나?
  물론 이스라엘의 불신앙 때문이기도 하지만 
  그러나 바로 질러가는 해변 길은 불레셋이 지키고 있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보호하시려는 배려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길 멀다고 불평하고 원망합니다.

성도 여러분 !
때로는 둘러 가는 길도 하나님이 예비하신 길인 줄 믿으시기 바랍니다.  
시간이 지나면 하나님의 기이한 인자가 
              내게 은혜로 다가올 날이 있을 줄 믿습니다. 
나는 불평하고 원망했지만 
     하나님은 아니야~! 내가 더 잘알아 지켜 주었어 하십니다.

저도 그래요,
제 생애에 가장 감사한 것은 전도사 시절에 결핵으로 고생했던 것, 
물론 당시는 지긋지긋했지만 
     돌이켜 보면 내가 병들지 아니했더라면 
            성령의 불체험은 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우리 하나님은 나보다 더 잘 알아 보호하시고 지켜주시는 하나님이십니다.

그렇게 때문에 사도 바울은 
빌4:6절 말씀에
[ 아무 것도 염려하지 말고 오직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 ] 
그리하면 모든 지각에 뛰어나신 하나님
        나 보다 더 잘 알아하시는 하나님의 평강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리라 ]     
                                                
그리고는 광야생활 중에 불편하다고 불평하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11절에 [ 아니야~! 
        내가 너희를 독수리가 새끼를 훈련시키듯이 훈련시켰다 ]고 합니다. 
독수리는 자기들이 거할 보금자리를 
        높은 산 바위틈에 자신만의 공법으로 튼튼하게 집을 짓습니다. 
독수리가 왜 보금자리를 만들까요? 
         그것은 생명을 담아내기 위해서입니다.  
독수리는 연실 부리로 자신의 집을 이리저리 찔러 보며 집이 안전한지, 
그리고 불안전하면 나무 가지를 물어다가 안전하게 보금자리를 수리합니다. 

그런데 자기 새끼들을 잘 키우던 독수리가 
       어느 날은 자기의 보금자리를 부리로, 
       그리고 날카로운 발로 뒤 흩어 놓습니다. 
그동안 안전하고 편안했던 보금자리가 
      일순간 불편하고 혼란스러운 보금자리가 되는 것입니다. 
왜 그랬을까요? 
어미 독수리는 보금자리를 어지럽힘으로써 현재에 안주하는 것이 아니라
    창공을 나는 독수리로 만들어 주기 위한 사랑의 행위였던 것입니다.  

우리는 살면서 왜 나에게 이런 고통을 주시나? 왜 나만 이럴까? 
지금 받는 이 고통이 너무 커서 하나님을 원망하고 불평할 때가 있습니다. 
마치 편안한 독수리의 보금자리를 어미 독수리가 어지럽혀 놓는 것처럼, 
편안했던 우리의 인생을 흔들어 놓고, 
         그 위기에 방치된 듯한 느낌을 받을 때가 있습니다. 
분명 우리의 보금자리는 하나님이 주신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그 보금자리를 어지럽힌다고 생각할 때가 있습니다. 
왜 그러실까요? 
그것은 우리의 신앙의 성장과 더 높은 차원의 삶을 살기를 원하시기 때문입니다. 
지금의 편안함을 넘어 더 나은 미래의 삶을 주시기 위한 과정입니다. 
그리고 독수리가 새끼가 어느 정도 자라면 독립시키기 위해서
절벽 둥지에서 아니면 새끼를 등에 태우고 높은 곳에서 떨어뜨려 버립니다.
그러면 새끼는 죽는다고 소리를 지르면 날개 짓을 하며 떨어지면 
       어미가 날개로 새끼를 받아 엎고는 반복하여 훈련합니다.
어미의 심정을 모르는 새끼는 죽는다고 비명을 지르지만 
       어미는 사정없이 훈련을 시키는 것입니다.
       왜? 새들 중에 왕이 될려고 하니깐,

나는 너무 어려워 너무 고통스러워 몸부림쳤지마는 
하나님은 아니야 내가 다 계획이 있어 신앙의 연단시킨거야, 믿으시기 바랍니다.
왜 독수리가 새끼를 훈련시킵니까?                              
  참새가 새끼 훈련시키는 것 봤습니까? 두더지가 새끼 훈련시키는 것 봤습니까? 
그러나 독수리는 새들 중에 왕이기 때문에 
       새끼를 훈련시켜야만 새들의 왕 독수리가 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을 왜 연단하고 훈련시켰습니까?


4. 왜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이렇게 지키시고 훈련했습니까?(13-14절)

13절 [ 여호와께서 그로 땅의 높은 곳을 타고 다니게 하시며 ] 
두더지 같이 땅 위에 기어 다닐 존재 같으면 훈련도 필요 없어요.
그러나 땅의 더 높은 곳을 타고 다니는 새들 중에 왕, 
       독수리가 되기 위해서는 남다른 훈련이 필요한 것입니다. 

여러분도 그런 귀한 경험을 놓치지 않기를 원합니다. 
혹시 여러분의 보금자리가 어지럽습니까?
    여러분의 삶이 시험 중에 있습니까? 
그러면 이제 보금자리를 벗어나야 할 때입니다. 
       그리고 지금은 쉬지 않고 날개 짓을 할 때입니다. 
비록 처음은 힘들고 날개 짓이 서툴러서 
     이리 부딪히고 저리 부딪히는 고통을 경험하게 될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참고 인내하면, 최선을 다하다 보면 
여러분은 이전의 보금자리보다 더 편한 창공이 여러분의 보금자리가 될 것이고, 
그 창공을 바람을 타고 떠다니는 독수리처럼 고귀한 삶을 사시게 될 것입니다.

땅의 더 높은 곳은 가나안 땅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성경에는 종종 가나안에서 애굽으로 갈 때는 내려간다는 말로 사용합니다.
이것은 가나안 땅을 하나님의 약속의 땅으로 높은 곳으로 여기는 

       히브리인의 관념에서 비롯된 말입니다.
타고 다니게 하신다는 말은 
     가나안 땅을 정복하여 자신의 소유로 삼을 것을 의미하는 말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가나안 땅의 주인공으로 삼아
     그곳에서 밭의 소산을 먹게 하시고
     반석에서 꿀을 굳은 반석에서 기름을 빨게 하시는
     하나님의 축복을 누리는 백성 삼기 위해서 
    남다른 훈련이 필요했던 것입니다. 

그리고 나아가 14절에 
    젖과 기름 그리고 포도즙의 붉은 술을 마시게 하기 위하여
    즉 최상의 삶의 기쁨을 상징하는 말입니다. 
하나님은 이렇게 다 계획이 있어 빼어난 민족 만드시려고 
   눈동자 같이 지켜 주시고 독수리 새끼 훈련시키듯이 훈련시켰지마는
   이스라엘은 그것도 모르고 불평하고 원망하다가 
   하나님을 실망시키는 패역한 족속이 되었던 것입니다. 

왜? 모세가 이와 같이 이스라엘 패역을 지적하면서
눈동자 같이 지켜 주시고 독수리 같이 훈련시키는 하나님 이야기합니까?
너희가 가나안 땅에 들어가거든 그러지 말라는 것입니다.


5.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 대한 경고의 메시지는 무엇입니까?(15절)

15절 [ 그러한데 여수륜이 살찌매 발로 찼도다 
       네가 살찌고 부대하고 윤택하매 자기를 지으신 하나님을 버리며
       자기를 구원하신 반석을 경홀히 여겼도다 ] 
여수륜은 이스라엘을 명예롭게 일컫는 시적 표현 내지 별명입니다. 
그 뜻은 하나님의 사랑을 받아 의롭게 된 이스라엘을 의미합니다.
신33:26절 이하에는 
[ 여수륜이여 하나님 같은 자 없도다 하시며
 이스라엘이여 너는 행복자로다 
             여호와의 구원을 너같이 얻은 백성이 누구뇨? ] 라고 합니다. 

이렇게 명예로운 이름이 본 절에서는 
하나님의 은혜를 경홀히 여기는 이스라엘을 꾸짖기 위하여
        풍자적으로 사용하고 있습니다. 
아무리 시대가 세상이 변해도 
하나님은 반석 되신 분이시기 때문에 그 분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면 
     이슬같이 가는 비 같이 단비같이 은혜로 풍성한 삶을 안겨다 주십니다.
그러나 삶이 편안하다고 하나님의 은혜를 경홀히 여기면 
결과는 신11:17절 말씀같이
[ 여호와께서 진노하사 비를 하늘을 닫아 비를 내리지 아니하여
 땅에 소산을 내지 않게 하시므로 너희가 여호와께서 주신 아름다운 땅에서
 속히 멸망할까 하노라 ]

19C 영국은 해지지 않는 나라 대영제국이었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그때의 영광에 비하면 
좀 심하게 표현하면 깡통 차게 생겼다고 할 만큼 기울어졌다고 합니다.
영국이 이렇게 기울어진 이유가운데 한가지가 
       인도의 간디를 들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인도인 뿐만아니라 세계인들에게는 위대한 간디였지만 
간디는 바로 영국을 무릎꿇게 했던 장본인입니다.

영국의 식민지가 뻗어나갈 때는 
       그래도 영국이 세계선교를 감당할 때였습니다.
하나님께서 요람에서 요람까지 라는 말이 나올 정도로
       영국을 세계의 중심으로 만들어 주었더니 
       영국이 하나님의 은혜를 경홀히 여기게 됩니다.
그때 간디가 비폭력 무저항의 기치아래 인도가 독립하고
     식민지 곳곳에서 독립운동이 일어납니다. 

그때 영국교회가 잠자고 있을 때                                  
인도의 간디는 기독교인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그의 자서전에서
[ 나는 매일 하루 세 번 이상 산상수훈을 읽지 않고 자 본적이 없다 ] 
고 고백합니다. 
기독교 국가가 기독교의 진리대로 살지 못하고 
      하나님의 은혜를 경홀히 여길 때 기독교가 붙들어야 할 진리를 
      반대편 세상 사람들이 들고일어나 
교회를 부끄럽게 한다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내일 교우 여러분
하나님 백성인 교회가 하나님 말씀에 귀를 기울이지 아니하고
하나님의 은혜를 경홀히 여긴다면 
세상이 들고일어나 교회를 부끄럽게 한다는 사실 꼭 명심하시기 바랍니다.
이것은 나라든 개인이든 마찬가지입니다. 

< 결론 >

지난 32년을 지나오면서 우리는 내 생각대로 되지 아니해서
   불평하고 뭔가 섞연찮아 하지만 
하나님은 아니야 내가 눈동자 같이 지켜 주었어
                내가 독수리 새끼 훈련시키듯이 훈련했어 하십니다.
앞으로 비전 30년을 내다보며 달려갈 때에
      여수룬이 기름지매 발로 차는 일이 없는 내일교회가 되시기 바랍니다.
(김성덕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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