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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내가 누구관대 하나님을 막겠느냐 (행 11:1~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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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누구관대 하나님을 막겠느냐 (행 11:1~18)

  "너 자신을 알라."는 유명한 말은 소크라테스의 명언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실제로는 소크라테스가 제일 먼저 했던 말은 아니고 당시 델포이 신전에 새겨져 있던 구절이었다고 합니다.
  하지만 소크라테스는 이 "너 자신을 알라."는 말의 뜻을 그 누구보다도 바로 깨닫고 있다고 스스로 자부했었습니다.
  그는 이 말을 '나는 내가 아무 것도 모른다는 것을 안다.'는 뜻으로 자신에게 적용했던 것이며, 그렇게 함으로써 그 당시 모든 진리를 통찰하고 있다고 자랑하던 소피스트들을 비판했던 것입니다.

  그런 점에서 볼 때, 소크라테스는 어떤 '절대적 진리' 앞에서 스스로를 겸손히 여길 줄 아는 사람이었다고 하겠습니다.
  그런 소크라테스의 말보다도 훨씬 더 근본적으로 자기라는 존재의 한계성과 절대적 존재의 무한한 권위를 바로 깨달은 한 일성이 오늘 본문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바로 사도 베드로의 말, "내가 누구관대 하나님을 능히 막겠느냐"라는 고백입니다.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에 대하여 나라는 인간이 무어라고 감히 나설 수 있겠느냐?'라는 뜻입니다. 
  이것은 사람이 자기 자신 속에 깊이 들어가서 찾아낸 말도 아니며 다른 사람 앞에서 자신의 모습을 비추어 보고 알게 된 사실도 아니었습니다.

  이 말은 사람이 하나님 앞에서, 그야말로 온 우주의 창조자이시며 인생과 역사의 '절대주권자'이신 여호와 앞에서 자신의 위치라는 것이 어떤 것인지를 오직 성령의 감동을 통하여 정확하게 깨닫게 된, 지극히 겸손하면서도 실로 놀라운 고백이었습니다.

  오늘은 우리 교단 산하의 모든 교회들이 함께 '선교주일'로 지키는 성일입니다.
  하나님께서 지금 바로 이 순간에도 행하고 계시는 가장 크고도 강력한 구령(救靈)의 역사를 우리 모두가 재확인하고 재결단하는 주일입니다.
  이 시간 "내가 누구관대 하나님을 능히 막겠느냐"는 말씀을 통하여 과연 저와 여러분이 이런 하나님의 선하고도 위대하신 뜻에 어떻게 겸허하게 순종하며 따라가야 할지를 함께 상고해 보고자 합니다. 

  1. 교회는 하나님께서 세계사 속에서 행하고 계시는 주권적인 구속사의 흐름을 깨달을 줄 알아야 합니다. 

  본문 1절부터 10절까지의 말씀에 "1유대에 있는 사도들과 형제들이 이방인들도 하나님 말씀을 받았다 함을 들었더니 2베드로가 예루살렘에 올라갔을 때에 할례자들이 힐난하여 3가로되 네가 무할례자의 집에 들어가 함께 먹었다 하니 4베드로가 저희에게 이 일을 차례로 설명하여 5가로되 내가 욥바성에서 기도할 때에 비몽사몽간에 환상을 보니 큰 보자기 같은 그릇을 네 귀를 매어 하늘로부터 내리워 내 앞에까지 드리우거늘 6이것을 주목하여 보니 땅에 네 발 가진 것과 들짐승과 기는 것과 공중에 나는 것들이 보이더라 7또 들으니 소리 있어 내게 이르되 베드로야 일어나 잡아 먹으라 하거늘 8내가 가로되 주여 그럴 수 없나이다 속되거나 깨끗지 아니한 물건은 언제든지 내 입에 들어간 일이 없나이다 하니 9또 하늘로부터 두 번째 소리 있어 내게 대답하되 하나님이 깨끗하게 하신 것을 네가 속되다 말라 하더라 10이런 일이 세 번 있은 후에 모든 것이 다시 하늘로 끌려 올라가더라"고 기록했습니다. 

  베드로가 로마군대 백부장 고넬료의 집을 전도한 후 예루살렘에 돌아왔을 때, 예루살렘교회에는 난리가 났습니다.
  "할례자들" 즉 골수 유대인으로 자처하는 교인들이 베드로를 향하여 "네가 무할례자의 집에 들어가 함께 먹었다"고 "힐난"하고 나섰던 것이었습니다.
  이들은 "이방인들도 하나님의 말씀을 받았다"는 정말 놀라운 뉴스를 듣게 되었으면서도 그것이 내포하고 있는 진짜 깊은 의미에는 전혀 관심도 없었습니다.
  오직 수석 사도 격인 베드로가 이방인의 집에 들어가서 음식을 함께 먹었다는 사실, 즉 유대인으로서는 금기에 해당되는 일을 저질렀다고 해서 완전히 벌집 쑤셔 놓은 집안처럼 되어 버렸던 것이었습니다.

  그런 예루살렘교회 교인들 앞에서 베드로는 그 모든 된 일을 "차례로 설명"해 주었습니다.
  그는 먼저 자기가 보았던 '보자기 환상'을 그들에게 전해 주었습니다.
  그 환상의 뜻은 앞서 10장에 나오는 대로 신약 시대에 와서는 이미 어떤 음식도 부정하다고 할 수 없으며 또한 어떤 타인도 자기보다 더 더럽다고 정죄할 수 없다는 사실을 깨우쳐 주시는 것이었습니다.

  사실 베드로 자신도 그 '보자기 환상'을 보기 전까지는 이방 민족에 대하여 다른 '할례자'들과 꼭 같은 고정관념에 사로잡혀 있었습니다.
  이방인들은 구원받을 수 없으며 따라서 교제해서도 아니 될 대상, 한 마디로 말해서 정상적인 사람 축에 끼일 수 없는 자들로 여기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실제로는 구약 성경에서도 하나님께서 이방인에게 구원의 문을 열어 놓으신 내용이 여러 번 나타납니다.

  대표적으로 말라기 1장 11절을 보면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해 뜨는 곳에서부터 해 지는 곳까지의 이방 민족 중에서 내 이름이 크게 될 것이라 각처에서 내 이름을 위하여 분향하며 깨끗한 제물을 드리리니 이는 내 이름이 이방 민족 중에서 크게 될 것임이니라"고 기록하고 있는 것입니다.

  또한 예수님 당신께서도 공생애를 통하여 이방인을 직접 전도하신 일이 여러 번 있었습니다.
  사마리아 사람들(요 4:1-42), 거라사인들(막 5:1-20), 또한 로마인들(눅 7:1-10)에게 친히 찾아가셔서 전도하셨고 제자들은 바로 옆에서 그것을 목격했던 것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베드로를 위시한 예루살렘교회 교인들은 그들이 이방 민족에 대하여 가지고 있던 선입견을 좀처럼 벗어버리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유대인들은 이방인에게 무언가 좋은 일이 생긴다는 자체를 싫어했으며 도무지 있을 수도 없고 생각조차 할 수 없는 일로만 여겼습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택하신 것은 구원의 복음을 바로 이 나라를 통하여 온 세상 만민에게 전파하기 위함이 목적이었지만, 유대인들은 이스라엘 민족만 구원해 주시는 것으로 오해했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해 뜨는 곳에서부터 해 지는 곳까지 이르는' 모든 나라 백성들을 통하여 예배를 받으시고 그 이름을 크게 높이고자 하신다고 성경 곳곳에 선포해 주셨는데도, 유대인들은 그런 말씀은 옆으로 제쳐 놓고 부정한 음식에 관한 규례를 제멋대로 확대 해석하여 이방인과 교제를 금지하는 법인 것처럼 지키고들 있었던 것입니다.
  이스라엘이라는 나라를 택하신 위대하신 뜻, 이방 민족을 사용하시는 깊으신 계획 - 이 모든 것들에 대하여 '할례자'들은 자신의 고정관념만 가지고서 감히 하나님을 막아서는 위치에 서 있었던 것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예나 지금이나 세상 나라들을 당신의 뜻대로 마음대로 사용하십니다.
  로마를 한 때에는 교회 핍박의 세력으로 쓰셨지만 한 때에는 기독교를 국교로 인정하고 보호하는 권력으로 사용하기도 하셨습니다.
  독일은 한때에는 종교개혁 운동의 근원지로 사용되었지만 2차 대전 중에는 히틀러의 광기어린 살인극의 본부가 되기도 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이런 깊은 뜻, 멀리 내다보시는 계획을 현재라는 제한된 시공 세계에서 결코 다 깨달을 수는 없습니다.
  왜 온 한국교회가 이처럼 간절히 기도해도 남북통일을 늦추시는지, 왜 지금 세계에서 최고로 우상숭배와 미신이 팽배해 있는 일본을 경제적으로는 저처럼 잘되게 해 주시는지, 지금 우리로서는 다 알 수 없는 것이 오히려 당연한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사람의 판단을 가지고 하나님께서 행하시는 역사에 대하여 왈가왈부해서는 결코 아니 됩니다.

  오늘날 자유민주국가의 국민들은 제 나라 대통령을 비판하는 데에 지극히 자유롭고 또 익숙한 백성들입니다.
  자기가 찍어 준 표를 받고 대통령이 되었고 자기가 내는 세금 가지고 월급 받고 있는 공무원이니 당연히 그럴 수 있습니다.
  아니 비판 정도가 아니라 욕하고 탄핵하고 때로는 아예 그 자리에서 끌어내릴 수도 있는 것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사람이 뽑아 세운 주권자가 결코 아니십니다.
  하나님은 스스로 사람을 창조하시고 나라를 세우신 아주 특별하신, 아니 유일하신 절대 주권자이십니다.
  "짐이 곧 국가다." - 세상 군주가 이런 말을 할 때에는 온 국민의 분노를 자아낼 건방진 소리가 될 뿐이지만, 하나님은 그 정도가 아니라 온 세상 나라와 백성 전체를 전적으로 소유하고 계시는 주권자이십니다.
  "해 뜨는 곳에서부터 해 지는 곳까지의 이방 민족 중에서 내 이름이 크게 될 것이라"는 말씀대로, 모든 나라와 민족들은 궁극적으로 오직 하나님께 영광이 돌려지도록 사용되어 왔고 사용되고야 말 것입니다.
  세상 나라들을 향한 하나님의 크신 뜻을 사람이 하찮은 '음식 규례' 즉 자기 자신의 법이나 도덕이나 양심을 가지고 이러니저러니 하고 함부로 판단하려 하는 것은, 실로 무례하기 짝이 없는 신성모독인 것을 우리는 다시 한 번 겸손히 깨달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 절대주권자 되신 하나님께서는 오늘도 이 세계사 속에서 당신의 구속사를 성취해 나가고 계십니다.
  아니 세계사 그 자체를 오직 당신의 구속사를 그 계획하신 그대로 한 치도 틀림없이 완성시키기 위하여 마음대로 사용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것은 사람이 결코 감히 막아설 수 없는 위대하고도 강력한 역사의 흐름입니다.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의 사건을 역사의 정점에서 일으키신 이후 바로 그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유대에서 사마리아로, 사마리아에서 로마로, 로마에서 전 유럽으로, 유럽에서 미국으로, 그리고 그 미국에서 이 대한민국으로, 지난 2천년 동안 계속 서쪽으로 돌리고 계시는 것이 너무나도 똑똑히 우리 눈에 보이고 있지 않습니까? 

  그렇다면 이제 세계사가 그 '끝날'을 향해 막바지로 치닫고 있는 이 시기에 우리가 서 있는 위치와 사명이 무엇인지는 조그만 눈뜨고 보아도 명약관화할 것입니다.
  이제 남아 있는 과정은 우리 대한민국 교회가 이 종말시대에 세계 선교의 새로운 사령부가 되어서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중국으로, 그리고 중동을 거쳐 다시 이스라엘에 이르기까지 전파하는 것이며, 이처럼 '이방인에게도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사명의 그 마지막 바통을 저와 여러분은 이미 우리 손에 넘겨받아 있는 것입니다.

  이런 하나님의 뜻을 깨달을 줄 모르고 여전히 자기중심의 고정관념에만 사로잡혀서 오히려 브레이크만 거는 '할례자'들이 되어서는 아니 됩니다.
  하나님께서 이 시대에 이 '지구촌' 전체를 어떻게 돌리고 계시는지를 감지할 줄 모르고 여전히 자기 교회만 생각하고 자기 교단만 생각하고 이 좁은 '한반도' 안에서만 '우물 안 개구리' 꼴로 꼼지락거리면서 앉아 있는 '속 좁고 통 작은' 교회가 된다면 그 얼마나 꼴불견이겠습니까?

  전 세계 역사를 마음대로 주장하셔서 당신의 위대하신 구속사를 진행시키고 계시는 하나님께서 그 계획표의 마지막 장을 우리 앞에 펼쳐 보여 주고 계시는 이때에 이런 강력한 구령 역사의 조류에 발맞추어 명실 공히 '세계를 받은 교회'의 선구자적인 비전을 더욱 높이 치켜드는 성도들 되시기 바랍니다.


  2. 신자는 택자를 구원하고자 하시는 하나님의 선하신 뜻에 편승해서 자기 인생을 쓸 줄 알아야 합니다. 

  11절 이하 18절에 "11마침 세 사람이 내 우거한 집 앞에 섰으니 가이사랴에서 내게로 보낸 사람이라 12성령이 내게 명하사 아무 의심 말고 함께 가라 하시매 이 여섯 형제도 나와 함께 가서 그 사람의 집에 들어가니 13그가 우리에게 말하기를 천사가 내 집에 서서 말하되 네가 사람을 욥바에 보내어 베드로라 하는 시몬을 청하라 14그가 너와 네 온 집의 구원 얻을 말씀을 네게 이르리라 함을 보았다 하거늘 15내가 말을 시작할 때에 성령이 저희에게 임하시기를 처음 우리에게 하신 것과 같이 하는지라 16내가 주의 말씀에 요한은 물로 세례 주었으나 너희는 성령으로 세례 받으리라 하신 것이 생각났노라 17그런즉 하나님이 우리가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을 때에 주신 것과 같은 선물을 저희에게도 주셨으니 내가 누구관대 하나님을 능히 막겠느냐 하더라 18저희가 이 말을 듣고 잠잠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 가로되 그러면 하나님께서 이방인에게도 생명 얻는 회개를 주셨도다 하니라"고 기록했습니다. 

  예루살렘교회 앞에서 자기가 받았던 '보자기 환상'을 간증해 준 후 이어서 사도 베드로는 고넬료의 집에 가서 일어난 일을 말해 주었습니다.
  그 고넬료 집에서 일어난 사건의 초점은 베드로가 고넬료와 그 집안사람들에게 "구원 얻을 말씀" 즉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할 때 "성령이 저희에게 임하셨다"는 사실에 있었습니다.
  여기 "내가 말을 시작할 때에"라는 말은 꼭 시간적으로 엄격히 따져서 하는 뜻이 아니라, 그저 베드로가 '말을 하고 있는 도중에'라는 뜻입니다.
  자기네들이 오순절 때 받았던 성령의 역사가 그 이방인 집안의 사람들 모두에게도 꼭 같이 일어나고 있음을 목격한 것은 사도 베드로로서는 잊지 못할, 정말 놀랍고도 감동스러운 장면이었습니다.

  그리고 그에게는 바로 그 순간 예수님의 말씀 "요한은 물로 세례를 주었으나 너희는 성령으로 세례 받으리라"는 말씀이 다시 "생각나게" 되었습니다. 
  성령을 통해 한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고 변화시키는 것은 오직 하나님께서만 행하실 수 있는 일이며, 사람으로서는 전혀 행할 수도, 관여할 수도, 아니 무슨 영향조차 줄 수 없는 일입니다.
  그래서 베드로는 그 성령이 바로 "우리가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을 때에 주신 것과 같은 선물"이라고 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자기네들도 성령을 통하여 예수 그리스도를 믿게 하셨고 이방인 백부장 역시 꼭 같은 성령을 통하여 예수 그리스도를 믿게 만드시는 것을 목격했다고 전해 준 것입니다.
  이 부인할 수 없는 증거 앞에서 그 모든 '할례자'들은 "잠잠해"지고 그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면서"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이방인에게도 생명 얻는 회개를 주셨도다"라고 인정하지 않을 수 없게 된 것이었습니다. 

  사실 당시 유대인들도 이방인들이 구원 얻을 수 있는 길이 전혀 없다고 생각했던 것은 아니었습니다.
  하지만 그것은 오직 그들이 유대교의 율법과 전통을 따름으로써만이, 즉 이방인이 유대인처럼 됨으로써만 가능하다고 생각했었습니다.
  다시 말해서 구원은 오직 이스라엘 백성에게만 주어진 까닭에 이스라엘인이 되어야만 구원받을 수 있다는 것이 그들의 논리였던 것입니다.

  하지만 그것은 큰 오해였습니다.
  구원은 오직 "구원 얻을 말씀" 즉 복음을 통하여 "하나님께서 생명 얻는 회개를 주심"으로써 가능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심판은 인간의 행위를 따라 시행되지만 구원은 하나님의 은혜에 의하여 믿음을 통하여 주어질 따름입니다.
  이것이 하나님께서 한 개인을 선택하시고 구원하시는 방법입니다.
  그리고 그 하나님의 선하신 뜻에 따른 '선택적 구원'에 대하여 그 어느 사람도 감히 그 앞에서 막아설 수 없는 것입니다.

  유대인들은 '하나님께서 누구(이방인)까지 구원해 주신다.'고 불만이었습니다.
  반면에 오늘날 현대인들은 '하나님께서 누구(불신자)는 구원해 주지 않으신다.'고 불만을 토하고 있습니다.
  정반대 현상 같지만 본질적으로는 같은 내용입니다.
  하나님께서 구원받을 사람을 당신께서 기뻐하시는 대로 선택하시고 그에게 성령 주셔서 복음을 믿고 회개하게 하시는 이 '불가항력적 구원'에 대하여 둘 다 꼭 같이 대어들고 있는 것입니다.

  정말이지 '사람이 누구관대' 감히 하나님을 막아 서려하는 짓이겠습니까?
  사람은 원래 다 죽게 되어 있었습니다.
  하나님이 죽이시는 것이 아니라 자기편에서 이미 죽어 마땅한 짓을 저질러 놓고 있는 것입니다.
  '선을 행하는 자가 하나도 없고 하나님을 찾는 자가 하나도 없는' 이 고질적으로 악한 본성으로 인하여 사람은 이미 다 받아 마땅한 사형선고가 내려져 있는 형편이었습니다.

  하나님의 구원은 그처럼 '당연히 죽어야 할 사람들 가운데서 살려 주시는 구원'일 뿐입니다.
  그것은 '토기장이가 그 만드는 그릇'에 대하여 가지고 있는 지극히 당연한 본질적인 권한에 속하는 일입니다.
  하나님의 선택적 구원은 창조주가 피조물에 대하여 가지고 있는 지극히 당연한 주권이요, 그 구원을 받게 된 자로서는 그저 감사할 것밖에 없는 너무나도 은혜로운 권리 행사인 것입니다.

  그런데도 그처럼 고마운 구원을 받은 사람이 어떻게 그런 구원자에게 불만을 가지거나 욕할 수 있겠습니까?
  불타는 빌딩에서 구사일생으로 구조 받은 사람이 자기를 살려 준 소방대원에게 그 빌딩 속에 있던 사람들을 다 살리지 못했다고 욕을 할 수 있겠습니까?
  죽을 확률 90퍼센트 이상 되는 난치병을 치료해 준 의사에게 '왜 나만 살려주고 다른 환자들은 죽게 만들었느냐?'라고 대어든다는 것이 어디 말이나 될 소리이겠습니까?
  원래 죽을 수밖에 없던 사람의 죽음에 대해서는 소방대원이나 의사에게 아무 책임이 있을 수 없으며, 오직 그처럼 '죽어 가던 사람'을 살려 준 것만이 그런 소방대원이나 의사에 의하여 살게 된 사람으로서는 그저 백번 감사해도 모자랄 고마운 일일 뿐인 것입니다. 

  꼭 마찬가지로 적어도 구원의 확신을 얻게 된 신자라면 똑바로 깨닫고 기억해야 할 것은 단 하나, 곧 하나님께서 '죽어 마땅하고, 죽어가고 있던' 나를 살려 주셨다는 이 한 가지 사실뿐입니다.
  그것도 '천에 하나, 만의 하나'라는 지극히 '제한된 택자'의 숫자에 넣어주신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 놀라운 은혜를 생각할 때마다 그저 감사하고 영광을 돌릴 수밖에 없는 것이 바로 진짜 구원 받은 신자의 남아 있는 전 생애가 될 수밖에 없는 것도 지극히 당연하지 않겠습니까?

  만약 구원하실 자를 하나님께서 친히 정하시는 것이 불만이라면 도대체 누가 그 권리를 대신 행사하겠다는 것입니까?
  교황이 결정하는 것이 더 은혜로울 것 같습니까?
  대통령이 정해 주면 훨씬 더 공정할 것 같습니까?
  아니면 먼저 교회에 들어온 교인들이 나중에 들어오는 교인들의 구원여부를 판결하는 투표권을 행사하면 아주 '민주적인' 결정이 될 것 같습니까?
  정말 건방지고 교만하기 짝이 없는 발상이 아닐 수 없습니다.
  오직 하나님께서 정하시는 일인 까닭에 그 어느 누구도 그 앞에서 감히 '막아설' 수 없는 공의로우신 결정이 됩니다.
  오직 하나님께서 당신의 기뻐하시는 뜻을 따라 선택하시는 까닭에 그 택정함을 입은 자로서는 '스스로 자랑할 것'이라고는 전혀 없고 그저 모든 '영광을 하나님께 돌릴' 수밖에 없는 구원이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런 하나님의 '주권적 선택'을 철저히 인정하고 믿는 신자만이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열심히 전도하게 됩니다.
  사람으로서는 누가 구원받게 될지 전혀 모르는 일이니까 그저 누구를 만나든지 간에 일단 '와 보라'고 전도하게 되는 것입니다.
  모든 예루살렘교회 교인들의 눈에는 전혀 구원 받을 것 같이 보이지 않던 '고넬료' 같은 이방인도 하나님께서 작정하시고 부르심으로써 곧 '생명 얻는 회개'를 하게 되었으니까, 오늘날 저와 여러분 역시 우리 스스로 '전도 성공의 가능성'을 미리 복잡하게 계산해 볼 필요는 전혀 없고 그 대신에 '나가면 있고 안 나가면 없다.'라는 간단한 계산만 하면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그 어떤 사람을 향해서든지 간에 '이 사람은 아무리 전도해 보았자 나만 헛고생이 될 것이 분명하다.'라고 지레짐작하는 것은 그 사람을 이미 택자로 정해 놓으셨을지도 모르는 하나님의 뜻을 '막아서는' 행위가 되고 맙니다.
  '나 같이 말도 잘 못하는 사람이 전도해 보았자 무슨 효과가 있겠나? 그저 내 얼굴만 창피하게 될 뿐이지.'라고 핑계 대는 것은 '전도의 미련한 것으로 택자를 부르시기를 기뻐하시는' 하나님의 위대한 섭리를 감히 '걸고넘어지려는' 건방지기 짝이 없는 자세인 것입니다.

  우리 각자의 인생은 남아 있는 '읽은 양'들의 마지막 한 마리까지 다 찾으려 하시는 '목자장'의 뜻에 편승하여 쓰일 때에만 그 최고의 가치를 발휘하게 됩니다.
  하나님께서 당신의 선하신 뜻을 따라 이미 구원하시기로 작정해 놓으신 택자들이 바로 내 주변에 아직도 많이 남아 있다는 사실을 깨닫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게 만드는 성령의 선물'을 바로 나 자신의 삶을 통해 그 '남은 자'들에게 나누어주고자 하시는 이 특권적인 소명에 기꺼이 순종하는 성도들 되시기 바랍니다.

  성도 여러분, 예루살렘교회 내에 처음으로 교리적인 혼란과 교인들끼리 의견 충돌이 일어났습니다.
  하지만 그처럼 시끄러워지려던 예루살렘교회는 "내가 무엇이관대 하나님을 능히 막겠느냐"는 이 부동의 진리 앞에서 즉각 조용해질 수밖에 없었으며 오히려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되었습니다.
  이방인이라 할지라도 택자는 반드시 구원하시겠다는 이 하나님의 뜻이 명백히 드러난 이상, 교회는 그 구속사의 흐름에 순응하고 신자는 그 구령의 명령에 복종할 따름이었던 것입니다.

  제가 요즘 가끔 자전거를 타고 한강 고수분지를 달립니다.
  그러다가 한 가지 알게 된 것은, 이 자전거라는 것이 맞바람을 거슬러 갈 때와 뒷바람을 등지고 갈 때에 극단적인 차이가 난다는 사실이었습니다.
  비록 가벼운 바람이라 해도 정면으로 불어오게 되면 자전거의 속도를 높이면 높일수록 기하급수적으로 비례해서 힘이 더 들게 되고, 반대로 바람이 부는 방향과 같은 쪽으로 달리게 될 때에는 페달을 그렇게 힘들게 밟지 않아도 쉽게 시속 30km 이상의 속도를 내게 되는 것이었습니다.
  바람의 흐름조차 그러하다면, 하물며 하나님의 뜻과 계획과 섭리와 역사라는 흐름의 힘은 어떠하겠습니까?
  하나님께서 행하고 계시는 구속사의 조류를 거부하는 교회는 그만큼 역사에서 뒤처지는 교회가 될 뿐이며, 하나님께서 명하시는 전도와 선교의 사명에 동조할 줄 모르는 교인은 그만큼 자기 인생에 손해를 자초할 뿐인 것입니다.

  세계사의 거대한 조류는 바로 '하나님의 구속사'입니다.
  '택자 구원'의 강력한 주체는 오직 하나님의 절대주권일 뿐입니다.
  교회는 마땅히 이런 영적 역사의 흐름을 탈 줄 알아야 세상의 다른 그 어떤 단체보다도 더 빨리 미래를 조명해 주는 빛이 될 수 있습니다.
  개인 신자 역시 이런 절대적인 구령 사명에 자신의 인생 방향과 목표를 같이 맞추어놓고 따라가야 축복을 받게 됩니다.

  사람이 누구관대 감히 하나님을 막을 수 있겠습니까?
  살아 계신 하나님께서 행하고 계시는 이 구속사의 도도한 흐름이 이미 종말을 향해 줄달음질 치고 있는 이때에 이런 불가항력적인 소명에 기꺼이 응답하여 '예루살렘에서 땅끝까지 이르는' 전도와 선교의 사명에 끝까지 충성을 다하는 성도들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아멘. 
(석기현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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