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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살리는 사람 (눅 23:42~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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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리는 사람 (눅 23:42~43)

예수의 이미지가 어떤 것인가요? 처음 오신 분들도 나름대로 전 이해가 있습니다. 확실치는 않아도 서양의 신이라든지, 좋은 선생이라든지 말입니다. 오래 다니신 분들은 어떻습니까? 예수가 누구입니까? 하나님의 아들, 구원자입니까? 지금 힘든 나에게 구체적으로 어떤 도움을 주시나요? 그냥 참고 착하게 살아 이겨나가라고 교훈만 주고 있나요?

십자가에서 죽어가고 있는 강도들을 봅시다. 십자가는 가장 잔인한 형틀입니다. 가장 악한 사람들을 가장 고통스럽게 죽입니다. 생사람을 벌거벗겨 손발에 못 박아 매달고 죽을 때까지 거기 둡니다. 그만큼 남에게 말할 수 없는 고통을 준 사람만 그렇게 본보기로 처형합니다. 거기 예수가 함께 매달립니다. 가장 저주스러운 곳까지 함께 한 것입니다.

고통 가운데서도 한 강도는 예수를 조롱합니다. “자신도 못 구하는 주제에 무슨 구세주냐.” 다른 강도는 예수를 알아보고 도움을 요청합니다. “너를 구원한다. 너는 오늘 낙원에 나와 함께 있으리라.” 아직 낙원은 아닙니다. 그러나 즉시 하나님의 생명이 부어집니다. 여전히 아픕니다. 그러나 아픔보다 강한 능력이 일어납니다. 참고이길 수 있습니다. 

여기서 보여지는 예수의 이미지가 무엇인가요? 정말 구원자이지요? 살립니다. 무엇보다도 격려자입니다. 말로만 그치는 게 아닙니다. 정말로 예수를 믿으면 실제적 능력이 부어집니다. 모든 것을 극복하는 영적 힘입니다. 그 힘을 자신에게 적용하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주위 사람들과 나누세요. 그렇게 우리는 예수처럼 존귀한 존재로 만들어집니다.

1. 격려 없으면 죽는다

부모는 자녀를 사랑합니다. 그러나 꼭 격려하지는 못해요. 어떤 초등학생이 길에서 슬피 웁니다. 왜 그러느냐 물었어요. 한참 만에 말합니다. 학용품 사려고 돈을 탔어요. 문방구에 가니까 받은 돈이 없어졌어요. “멍청한 것, 정신 어디다 둔 거야!” 아버지가 때립니다. 그 말에 아이는 상처 받고 나가 웁니다. 자녀와 5천원 비교하면 그럴 수 없지요.

아이가 백 점을 받았다고 달려옵니다. 그러면 엄마가 뭐라고 하나요? “백점 맞은 애가 전부 몇 명이냐?” 나이든 아들이 말합니다. “아빠, 취직시험에 붙었어요.” 그러면 말합니다. “더 잘해서 더 좋은 회사로 옮기도록 해라.” 어떤 여학생이 별안간 2등을 했답니다. 자신도 놀랐어요. 아버지에게 보고하니까 말합니다. “다음에는 일 등 하도록 해라.”

칭찬 한 번들을 자격이 없나요? 우리는 서로 간에 칭찬과 격려에 인색합니다. 앞의 여학생은 너무도 상처를 받습니다. 2등 한 것만 해도 기적입니다. 유지하는 것도 자신이 없는 데 일 등은. 그 애는 도저히 넘지 못할 산입니다. 그래서 일기에 씁니다. “이제 나는 절대로 공부하지 않으리라. 아빠가 싫어하는 일만 하리라. 나는 아빠에게 복수하리라.” 

격려는 더 잘해라. 더 좋은 회사가라. 더 노력해라가 아닙니다. 그 대사는 당사자가 마음속으로 하도록 해야 합니다. 백점 맞았다니 얼마나 감사합니까? “잘 했다. 멋있다.” 몇 달 놀다가 취직했다면 말해야지요. “네가 자랑스럽다.” 2등 했으면 춤 춰야지요. 잔치 해야지요. 그리고 말해야합니다. “훌륭하다. 네가 효자로구나.” 그게 격려입니다.

학벌에 열등감 가진 청년이 미모와 재력 갖춘 신부감 찾습니다. 수십 번 선 본 뒤 결혼합니다. 행복의 시작인가요? 몇 년 뒤에 과장으로 승진합니다. 부인은 말합니다. “그까짓 과장이 뭐 대단해요? 친구 남편들은 다 판검사에 박사도 많아요.” 집 팔고 유학가 박사됩니다. 그러나 교수가 되지 못합니다. 돈 다 날려 몇 년 강사하다가 자살로 끝납니다.

한 편 서울 한 동네를 청소하는 미화원이 있습니다. 자기 직업에 회의를 느낍니다. 매일이 지겹고 힘듭니다. 그만 두겠다 불평합니다. 언제부터인가 얼굴이 밝아집니다. 청소하며 노래도 부릅니다. 모두가 좋아하고요 진급도 합니다. 아내의 격려 때문이었답니다. “여보, 나는 당신이 정말 자랑스러워요. 당신의 노고로 세상이 이렇게 깨끗해지는군요.”

교회가 무엇인가요? 한 마디 격려 들으러 옵니다. 설교 통해 혼나는 게 아닙니다. 격려 듣습니다. 서로 간에 비판을 들으려는 게 아닙니다. 격려를 듣습니다. 교회가 늦게 오고 헌금 안 내고 전도 안 하면 혼내나요? 아닙니다. 여러분, 있는 그대로 아름답습니다. 하나님이 사랑하시니 나도 사랑합니다. 격려 들을 자격이 있고요 서로 격려할 힘도 있어요.

2. 예수는 격려이시다

강도를 격려하시는 예수께서 우리도 격려하십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사람들아, 너희들은 하나님의 사랑받는 존귀한 존재들이다. 내가 도와 줄테니까 내게로 와라. 아무 걱정하지 말아라. 어떤 문제이건 너희가 해결하고 극복할 수 있다.” 정말로 그렇습니다. 예수 앞에 와서 실망한 사람은 없습니다. 저는 위로자요, 상담자요, 돕는 분이십니다. 

그는 하나님의 아들이요, 천지의 창조주이십니다. 그러한 그가 우리에게 어떻게 하시나요? “너희는 나의 형제요 친구이다. 내가 포도나무면 너희는 가지다. 내 것을 모두 너희와 공유한다. 너희를 하나님의 자녀요 천국의 실소유자로 만들어준다. 그리고 항상 돕고 항상 보호하겠다. 그러니 아무 것도 두려워하지 말고 일어서라.” 놀라운 격려입니다.

자식을 기르면서 하나님의 격려를 깨닫습니다. 딸애가 대학 갔을 때입니다. 고등학교는 서부에서 잘 했습니다. 뉴욕 가면서 적응이 몹시 힘들었나 봅니다. 이 메일도 잘 안 쓰더니 방학 때 돈 번다고 집에도 안 옵니다. 그러더니 이상한 편지를 보냈습니다. 부모는 자신이 어떤 사람인지 모른다는 겁니다. 자기의 실제 모습을 알면 실망할 것이랍니다. 

얼마나 놀랐는지요. 무슨 사고가 났나했습니다. 전화를 했더니 성적표를 보냅니다. 첫 학기 과목 절반은 포기했습니다. 자신이 그 비싼 학비 값을 못했다고 생각한 모양입니다. 돈을 벌어서 갚겠다는 겁니다. 전화를 했습니다. “엄마 아빠는 네가 무슨 일을 했어도 끝까지 사랑한다. 돈이나 성적은 그 다음이다.” 그리고는 집으로 와서 쉬라고 했습니다.

얼마나 고마워하는지요. 다음 학기부터는 성적이 좋아지고 우등생이 됩니다. 격려가 이처럼 힘이 있음을 몰랐어요. 지금까지도 든든해합니다. “나의 부모는 영원히 나를 사랑하고 나의 후원자이다.” 누가복음에 나오는 탕자는 집에 품꾼으로 들어가겠다고 합니다. 그러나 아버지는 격려합니다. “잘못해도 너는 아들이다. 나는 너를 변함없이 사랑한다.”

가족을 향해서 할 말은 아주 간단합니다. 공부해라. 더 잘 해라. 그 정도로 되겠느냐. 더 노력해라. 아닙니다. 격려합시다. 잘했다. 사랑한다. 네가 자랑스럽다. 멋있다. 할 수 있다. 네 자체로 나는 행복하다. 이 말을 그대로 부부간에 친구 간에 교우들을 향해서도 사용할 수 있습니다. 잘 했어요. 멋있어요. 계셔서 감사합니다. 그 자체로 기쁩니다. 

신앙의 사람은 가능성을 봅니다. 어떤 사람도 가능성이 있습니다. 적어도 사람이라면 그렇습니다. 예수께서 그래서 세상에 오신 것입니다. 어떤 상황도 가능성이 있습니다. 신앙으로 보면 절망의 그늘에서도 빛이 보입니다. 격려합시다. 그러면 빛을 찾습니다. 스스로도 격려합시다. 그러면 어디선가 힘이 솟아납니다. 적어도 신자는 생명이 넘칩니다.

3. 격려는 모두를 세운다

어떻게 모두를 세우나요? 격려는 격려하는 사람을 크게 합니다. 그리고 격려 받는 사람을 일으켜줍니다. 할수록 잠재된 능력이 솟습니다. 그러기에 <칭찬은 고래도 춤추게 한다>는 것입니다. 3톤이나 되는 난폭한 범고래도 조련사가 격려하고 칭찬하면 매력적인 동물이 됩니다. 사람은 더욱 그렇습니다. 격려할 것을 찾는 습관이 모두를 살립니다. 

반면에 조목조목 지적하는 것은 죽입니다. 율법은 하라고 합니다. 복 받으려면 고치라 합니다. 하지만 할 힘이 없습니다. 복음은 그냥 오라고 합니다. 그냥 오면 된답니다. 예수가 받아 귀하게 여겨줍니다. 힘을 줍니다. 할 수 있게 합니다. 부부간에, 친구 간에 지적해서는 변화가 없어요. 격려하고 칭찬해야 합니다. 할 게 없다고요? 반드시 있습니다.

<내 인생을 바꾼 100가지 이야기>란 책에 나온 이야기입니다. 어느 중학생 반에서 일어난 일입니다. 마크라는 아이가 수업시간에 장난이 심합니다. 어느 지루한 금요일 오후, 수학을 가르치는 여선생님이 재미있는 과제를 냅니다. 그 반에 있는 아이들의 이름을 종이에 쓰고 그들의 가장 훌륭한 점들을 다 쓰라고 합니다. 한 시간 내내 썼습니다.

선생님은 받은 과제물을 집에 가져가 학생들 이름 밑에 다른 아이들이 쓴 내용을 정리했습니다. 월요일 아침에 돌려줍니다. 자기의 훌륭한 점을 남들이 평가한 내용을 보면서 아이들은 놀랍니다. 여기저기서 “정말?”하는 속삭임들이 들립니다. “아이들이 나의 이런 점을 좋아하는구나!” 교실 안은 자부심으로 충만합니다. 생동감이 계속 지속됩니다.

그렇게 몇 년이 흐릅니다. 마크가 베트남에서 전사했다는 통고가 옵니다. 곧 이어 그의 장례식이 있었습니다. 이제는 어른이 된 그 반 아이들이 모두 왔습니다. 나팔수는 음악을 연주하고 병사들은 도열해 총을 쏘았습니다. 그중 한 병사가 선생님에게 다가 왔습니다. 경례를 하며 묻습니다. “수학 선생님이십니까? 마크가 늘 선생님 이야기를 했습니다.”

마크는 무공훈장 받은 훌륭한 군인이었습니다. 임무를 완수하고 여러 사람 살리고 죽었답니다. 마크 어머니가 줍니다. 몇 년 전 선생님이 써주었던 그의 훌륭한 점입니다. 테이프로 붙이고 또 붙였습니다. 그것을 보고 한 반 친구들도 모두 같은 것을 꺼냅니다. 그래요. 그 격려의 글들이 그들을 훌륭하게 만들었던 것입니다. 단지 격려일 뿐이었는데. 

잘 못하는 데 어떻게 하냐고요? 게으르고 악하고 실력 없는데 어떻게 칭찬하느냐고요? 유대인 교사들은 성적표에 격려의 말을 쓴답니다. “이 학생은 이걸 못 합니다” 아닙니다. “여기까지 잘 합니다”입니다. “2학년인데도 백 단위 수를 못 합니다”가 아닙니다. “10단위 수를 잘 합니다. 노력하면 100단위 수도 잘합니다.” 잘하는 게 있다는 겁니다.

교회는 격려의 샘입니다. 우리는 남 이야기 좋게 하는 교회가 되기 원합니다. 그래야 모두 삽니다. 교회가 무엇인가요? 정체를 분명히 합시다. 우리는 살리는 사람입니다. 가는 곳마다 생기를 줍니다. 자신부터 격려합시다. “나는 하나님의 사랑 받는 사람이다. 하나님이 도우시니 무엇이든 한다. 그리고 모두를 격려하리라. 그래서 예수처럼 되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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