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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어찌 너를 놓겠느냐 (호 11:1~1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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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찌 너를 놓겠느냐 (호 11:1~11 )

에브라임이여 내가 어찌 너를 놓겠느냐 이스라엘이여 내가 어찌 너를 버리겠느냐 내가 어찌 너를 아드마 같이 놓겠느냐 어찌 너를 스보임같이 두겠느냐 내 마음이 내 속에서 돌이키어 나의 긍휼이 온전히 불붙는 하도다. (8)

어떤 사람이 집에서 기르던 개가 새끼를 낳아서 젖을 뗄 무렵 시장으로 팔러 나갔습니다. 강아지 몇 마리를 놓고 큰 글씨로 '강아지 팝니다'라고 써놓고 손님을 기다렸습니다. 이윽고 어린 소년 하나가 찾아와서 강아지들 앞에 쪼그리고 앉더니 값을 물었습니다. . 
"한 마리에 만 오천 원...."
주인의 말에 실망한 소년이 "주머니에 칠천 원 밖에 없는데... 그래도 강아지를 좀 보여주시겠어요?"
"아무렴, 보여 주고 말고."
털뭉치 같은 조그만 강아지 다섯 마리가 소년의 눈앞에 펼쳐졌습니다. 다섯 마리를 하나씩 살펴 가던 소년이 "이 강아지는 다리를 절름거리는군요. 이 강아지를 사고 싶어요, 모자라는 돈은 조금씩 갚아 드릴께요. 네?"

그러자 주인이 말했습니다. 
"그 걷지 못하는 강아지를 사려고? 그건 구색 맞추기로 보여준 거야... 평생 다리를 절텐데 어떻게 키우겠니?"
"이 강아지는 많은 사랑과 도움이 필요하겠지요. 그러니까 꼭 제가 샀으면 좋겠어요."
강아지 주인은 다리가 온전치 않은 강아지를 사려는 소년이 이해되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그 소년의 간청이 얼마나 간절한지 거절할 수가 없었습니다. 
"고맙습니다. 아저씨. 제가 나머지 돈을 꼭 갚을게요. 고맙습니다."

얼굴에 환한 웃음을 띄고 일어서 돌아 가는 소년의 팔에는 절름발이 강아지가 행복한듯 꼬옥 안겨 있었습니다. 
그때 소년의 걸음을 무심코 바라보던 주인은 순간 “아!” 하는 탄성을 질렀습니다. 걷지 못하는 강아지를 안은 그 소년도 한쪽 다리를 절고 있었던 것입니다. 

소년은 자신의 다리가 불편했기에 강아지의 아픔을 이해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더 보살펴주고 싶은 마음 때문에 온전한 강아지들을 제껴두고 다리가 불편한 강아지를 품에 안았습니다. 

오늘 저는 이 마음이 하나님의 마음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했습니다. 
누구보다 우리의 아픔을 이해해 해주시는 분, 나보다 나의 아픔을 더 잘아시는 그분이 바로 우리 구주 예수님이십니다. 그리고 예수님을 보내주신 하나님 아버지 이십니다. 우리의 연약을 아시기에 우리를 버리실 수 없으신 하나님의 사랑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본문 8절을 근거하여 “어찌 너를 놓겠느냐” 라고 제목을 붙였습니다. 놓는다는 말은 붙잡았던 손을 놓는 것을 의미합니다. 버린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어찌 놓겠느냐 했으니 어떤 경우에라도 버릴 수 없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에 관해서 호세아서는 남편과 아내의 관계로 묘사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2:19-20절에서 이미 하나님은 “내가 네게 장가들어 영원히 살되 의와 공변됨과 은총과 긍휼히 여김으로 네게 장가들며 진실함으로 네게 장가들리니 네가 여호와를 알리라”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구절을 새 번역 성경에 보면 다음과 같이 번역하고 있습니다.,
“그 때에 내가 너를 영원히 아내로 맞아들이고 너에게 정의와 공평으로 대하고 너에게 변함없는 사랑과 긍휼을 보여주고 너를 아내로 삼겠다. 내가 너에게 성실한 마음으로 너와 결혼하겠다. 그러면 너는 나 주를 바로 알 것이다. 

하나님의 변함없는 사랑을 나타내는 말씀입니다. 한번 사랑은 영원한 사랑이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그러나 이스라엘 사람들은 시시 때때로 변하였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의 약속을 받았지만 이스라엘은 그 마음을 우상에게로 향하여 하나님의 마음을 아프게 하였습니다. 8:3절에 보면 “이스라엘이 선을 싫어 버렸으니....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6:7절에 보면 그들은 “아담처럼 언약을 어기고 거기서 나를 반역하였느니라” 라고 했습니다. 
하나님과의 사랑의 약속을 어기고 패역하였다는 것입니다. 

또한 4:1절에 보면 “이 땅에는 진실도 없고 인애도 없고 하나님을 아는 지식도 없고 ... ” 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7:7절에서는 “그들 중에는 내게 부르짖는 자가 하나도 없도다” 라고 했습니다. 그 결과 10:1-2절에 보면 그들은 번영할수록 우상의 제단을 세우고 그것들을 아름답게 하였고 언제나 두 마음을 품었습니다. 그리고 10:13절에 보면 악을 밭 갈아 죄를 거두었고 거짓 열매를 먹었습니다. 

하나님은 이러한 백성들을 향해 진노하기도 하였고 심판을 경고하시기도 하였습니다. 10:2절에 보면 “저희가 두 마음을 품었으니 죄를 받을 것이라” 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10:8절에 보면 하나님의 심판의 날은 “저희가 산 더러 우리를 가리우라 작은 산 더러 우리 위에 무너지라” 할 정도로 무서운 진노가 있을 것이라고 선언하였습니다. 

이러한 하나님의 심판 선언은 어디까지나 하나님의 사랑에 기초한 것이었습니다. 
호세아 11장에서 그 심판이 오히려 하나님의 사랑에서 기초한 것임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호 11장은 이스라엘과 하나님과의 관계를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로 묘사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을 거역하여 심판을 받아 마땅한 이스라엘을 향하여 8절에서 이렇게 외치고 있습니다.
“에브라임이여 내가 어찌 너를 놓겠느냐 이스라엘이여 내가 어찌 너를 버리겠느냐 내가 어찌 너를 아드마 같이 놓겠느냐 어찌 너를 스보임같이 두겠느냐 내 마음이 내 속에서 돌이키어 나의 긍휼이 온전히 불붙는 하도다. 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회개하지 않는 이스라엘의 온갖 죄악에 엄중한 심판을 경고하시면 서도 “어찌 너를 놓겠느냐 어찌 너를 버리겠느냐” 라고 말씀하고 계신 것입니다. 죄를 짓고 아비를 떠난 불효자 같고 사랑을 배신하고 남편을 떠난 아내 같은 이스라엘을 버릴 수 없고 놓을 수 없다는 이 말씀은 차라리 하나님의 사랑의 절구라고 해고 과언이 아닙니다. 

이렇게 놓을 수 없고 버릴 수 없는 하나님의 사랑의 이유는 무엇일까요?

1. 이스라엘의 어렸을 적에 사랑하였기 때문입니다. (1-3)

1절의 말씀을 보면 “이스라엘이 어렸을 때에 내가 사랑하여 내 아들을 애굽에서 불러 냈거늘....” 이라고 했습니다. 
어렸을 때 사랑했다는 것입니다. 
어렸을 적이란 미성숙한 때를 말합니다. 미성숙한 그 때부터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사랑하였습니다. 그러니까 어떤 조건 때문에 사랑한 것이 아닙니다. 
그냥 어렸을 적에서부터 정이 들었고 사랑하였습니다. 이스라엘은 하나님께서 어릴 적에 취한 아내였습니다. 3절에 보면 하나님은 미성숙한 그들에게 걸음마를 가르쳤습니다. 그리고 그 팔로 안아 길렀습니다. 그리고 그들이 병들어 죽을 고비를 당할 때에 그들을 살려 주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그것을 알지 못한다고 탄식하고 있습니다. 

2. 인정의 끈과 사랑의 줄로 묶어서 업고 다니시기 때문입니다. 

4절을 보면 “내가 사람의 줄 곧 사랑의 줄로 그들을 이끌었고....” 라고 했습니다. 
이 말씀을 새 번역 성경에서 인용하면 뜻이 분명해집니다. “나는 인정의 끈과 사랑의 띠로 그들을 묶어서 업고 다녔으며 그들의 목에서 멍에를 벗기고 가슴을 헤쳐 젖을 물렸다.”
젖먹이를 키우는 어머니의 모습이 상상되지 않습니까? 

옛날 우리의 어머니들은 아이들을 키울 때에 등에 업고 키웠습니다. 요새처럼 유모차에 태운다든지 앞가슴에 달아매는 것도 없었습니다. 두툼한 포대기로 등에다가 들쳐 업고 들에 가서 밭도 매고 부엌에서 밥도 짓고 냇가에 가서 빨래도 하였습니다. 그러다가 아기가 배고프다고 울면 엄마는 아무데서나 앞가슴을 활짝 헤치고 젖가슴이 다 보여도 부끄러운 줄도 모르고 아이에게 젖을 물렸습니다. 이렇게 키운 아이들은 좋은 공부 못했어도 훌륭한 학교 안 나왔어도 적어도 부모님의 사랑을 아는 효자였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사랑이었습니다. 
인정의 끈과 사랑의 띠로 그들을 묵어서 업고 다녔습니다. 그들의 목에 고통의 줄이 드리워질 때는 하나님이 풀어주었고 배고플 때는 젖가슴을 풀어헤쳐 먹여주었습니다. 이렇게 키운 자식이기에 하나님은 그들은 놓을 수 없고 버릴 수 없는 것입니다. 

3. 하나님의 속에 있는 애정 때문입니다.

8절 마지막쯤에 “내 마음이 내 속에서 돌이키어 나의 긍휼이 온전히 불붙듯 하도다” 라는 말씀이 나옵니다. 여기서 하나님의 사랑의 절정을 보게 됩니다. 
이 구절은 쉽게 번역하면 이렇습니다. 
“너를 버리려 하여도 나의 마음이 허락지 않는 구나! 너를 불쌍히 여기는 애정이 나의 마음속에서 불길처럼 강하게 치솟아 오르는 구나. 아무리 화가 나도 화 나는 대로 할 수 없구나.”
즉 하나님이 가지고 계신 인간을 향한 애정 그 자체 때문에 버리려 해도 버릴 수 없다는 것입니다. 

실버스타인이라는 작가가 쓴 글 중에 “아낌없이 주는 나무” 소설이 있습니다. 내용은 다음과 같습니다.

옛날 한 그루 나무와 이 나무가 사랑하는 한 소년이 있었습니다. 소년은 매일 나무 주위에 떨어진 나뭇잎을 주워 왕관을 만들어 숲 속의 왕자 노릇을 하면서 나뭇가지에 매달려 놀기도 하고 열매를 따먹으며 즐거워했습니다.
소년이 나이가 들자 나무는 혼자 있는 때가 많았습니다.

어느 날 소년이 나무에게 말했습니다. “물건도 사고 신나게 놀고 싶은 데 돈이 없어.” 나무는 자신에게는 돈이 없고 열매를 따다가 팔아서 그 돈을 가지고 사고 싶은 것을 사라고 했습니다.
소년은 나무에 올라가 열매를 따 가지고 자기의 갈 길로 가 버렸습니다. 그리고는 오랫동안 소식이 없었습니다. 나무는 매우 슬펐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소년은 청년이 되어 나타났습니다. 그 나무는 너무나 반가워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얘, 가지에 매달려 즐겁게 놀아 보렴” 그러자 소년이 말했습니다. “나는 한가하게 놀 수 있는 시간이 없어. 결혼도 하고 집도 지어야 해.”
그러자 나무가 “그러면 나뭇가지를 베어 가서 집을 지어 행복하게 살아라.” 소년이 나뭇가지를 베어서 집으로 돌아가는 모습을 보며 나무는 오히려 행복했습니다. 
오랜 시간이 지난 후 소년은 중년이 되어 나타나 나무에게 말했습니다. “바다 건너 먼 곳으로 갈 배가 필요해” 그러자 나무가 “내 나무 둥지를 베어다가 배를 만들어.” 라고 말했습니다. 
소년은 톱으로 나무를 잘라서 어디론가 자져갔습니다. 중년이 된 소년의 뒷모습을 보며 나무는 흐뭇해했습니다. 오랫동안 그 소년은 나타나지 않았고 나무는 몹시 외로웠습니다.

오랜 후에 소년은 초라한 할아버지가 되어 나타났습니다.
나무는 매우 반가워하며 “이제는 더 줄 것이 없네. 그러나 잘려 나간 나무 밑동에 앉아서 쉬어라” 소년은 둥지 위에 앉아서 쉬었다고 합니다. 

최후까지 아낌없이 자신을 내어 주었던 이 나무는 아낌없이 자신의 독생자 외아들을 내어주신 하나님과 자신을 십자가에 내어 주신 주님의 모습이기도 합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우리의 영원한 안식처가 되기까지 생의 둥지를 잘라 내어 주셨습니다. 왜냐면 하나님 속에 있는 애정 때문입니다. 사랑하지 않고는 견딜 수 없는 애정 말입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아주 어린아이 같이 미성숙하고 불완전할 때부터 사랑해 주셨습니다.(1-3) 그리고 언제나 인정의 끈과 사랑의 줄로 묶어서 등에 업고 다니시는 분입니다. 하나님이 가지고 계신 애정 그 자체 때문에 우리를 놓아 버릴수가 없으신 것입니다. 자녀에게 걸음마를 가르치고 넘어졌을 때 팔로 안아 일으켜 주시고 치료해 주시는 자상한 아버지로 묘사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어떤 마음을 가져야 할까요?
하나님의 마음을 헤아리는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 자신이 죄를 짓고 고통당할 때 우리만 고통당한다고 생각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죄로 하나님께서 더욱 상처 받으신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즉 나의 죄가 하나님을 아프게 한다는 사실입니다. 어찌 자녀의 고통이 부모와 상관이 없는 고통이겠습니까? 
하나님의 고통을 헤아리는 성숙한 신자가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미숙할 때, 우리의 조건이 불완전할 때부터 사랑하였습니다. 그리고 하루도 쉼 없이 인정의 끈과 사랑의 띠로 묶어서 등에 업고 다니시고 계십니다. 그리고 끊임없는 하나님 자신이 가진 애정으로 보살피고 계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도 하나님을 온전히 사랑해야 합니다. 우리가 목숨을 바친다 해도 우리를 위해 바치신 희생적인 사랑을 갚을 수는 없지만 그래도 목숨이라도 드리겠다는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우리가 아무리 신앙 생활을 열심히 한다 해도 그것으로 하나님께 설수는 없습니다. 열심을 하면 할수록 스스로의 부족한 것을 더 발견하고 최선을 다하여 주님을 섬긴다 할지라도 오히려 우리의 정성이 충분치 않다는 사실을 깯닫게 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래도 최선을 다해야 합니다. 

6.25전쟁 중에 만삭이 된 어머니가 아기 낳을 곳을 찾아가던 중 그만 진통이 와서 어느 다리 밑에 겨우 자리를 잡아 아기를 분만하게 되었습니다. 
추운 겨울 아무도 도와 줄 사람이 없는 가운데 그 어머니는 모든 것을 혼자 처리하고는 아기가 춥지 않도록 자기 옷을 벗어서 아기를 감싸 주었습니다. 해산 직후 어머니는 추위에 그만 얼어 죽었습니다. 
얼마 후 미군 장교 한 사람이 차를 타고 가던 중 휘발유가 떨어져 그 다리 부근에서 부대에 연락을 취해 놓고 기다리다가 아기 울음 소리를 듣게 되었습니다. 그 곳에는 벌거벗은 채 얼어 죽은 어머니와, 어머니의 옷에 둘러싸인 아기가 울고 있었습니다. 그 미군 장교는 그 아기를 미국으로 데려가 자기의 양자로 삼아 훌륭한 성인으로 키웠습니다. 

그 아기가 성인이 된 후, 자기의 출생에 관련된 비밀을 키워준 양부로부터 들은 후에 어머니의 무덤을 찾아 한국에까지 나왔습니다. 그 아들은 어머니의 무덤 앞에서 자기 옷을 벗어 무덤 위를 덮으면서 울음을 터뜨렸습니다. 
“어머니! 얼마나 추우셨어요. 나를 살리기 위해 어머니는 그런 희생을 치르셨군요. 저는 어머니의 사랑을 생각하면서 벌거벗고 굶주린 사람들에게 예수님의 사랑을 전하겠습니다”
후일 이 청년은 자기를 살리기 위해 대신 얼어죽은 어머니를 생각하며 복음을 전하는 선교사로 헌신하였습니다. 

그렇습니다. 
주님이 나를 사랑하시고 나를 구원하시기 위해 그리고 오늘도 나를 축복하시기 위해 얼마나 애닳아 하시고 마음아파하시고 얼마나 애통해 하시는지 그 사랑의 깊이를 조금이라도 알아서 더욱 감사함으로 주님을 섬기는 삶이 되시기를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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