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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성령이 이끄는 삶 (행 8:26~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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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령이 이끄는 삶 (행 8:26~40)

1. 목적이 이끄는 삶?

미국을 대표하는 목회자 중의 한 사람인 '새들백 교회(Saddleback Church)‘의 릭 워렌(Rick Warren) 목사는 “우리는 우연히 태어난 존재가 아니다. 하나님은 우주를 만드시기 전부터 우리를 마음에 품으시고 당신의 목적을 위하여 우리를 계획하셨다”고 하면서, “삶의 목적”이 무엇인지를 바로 알고 그 목적대로 살아야 한다고 했습니다. 릭 워렌 목사는 <목적이 이끄는 교회>라는 책을 통해 교회의 존재 목적 다섯 가지를 제시하여 전 세계 그리스도인들의 관심을 끌었습니다. 교회는 “예배, 교제, 훈련, 사역, 전도”를 위해 존재한다고 했지요. 그 후 릭 워렌 목사는 <목적이 이끄는 삶>이라는 책을 통해 “성도의 존재 목적은 교회의 존재 목적과 같다”고 했습니다. 즉 성도가 이 세상을 살아가는 목적은 교회의 존재 목적과 마찬가지로, “하나님께 예배하기 위하여, 하나님의 가족으로서 성도 간의 거룩한 교제를 위해, 훈련을 통해 그리스도를 닮아가기 위해, 교회와 세상에서의 사역자로 살기 위해, 그리고 전도하기 위해서”라고 했습니다.

그런데요, 성도 여러분! 이 <목적이 이끄는 교회>, <목적이 이끄는 삶>, 그리고 “목적이 이끄는 40일 캠페인”이라는 특별새벽기도회 프로그램 등은 다소 문제를 가지고 있습니다. 이 “목적이 이끈다”는 말 자체가 그 문제를 그대로 보여주고 있습니다. “목적이 이끄는”이라는 말의 영문은 “The Purpose Driven Life”인데요, 바로 여기에 그들의 문제가 드러납니다. 이 말의 뜻은 “목적이 몰고 가는 삶”, 또는 “목적에 이끌리는 삶”입니다. 

왜 이 표현, 이 제목이 문제가 되느냐? 오늘날 많은 성공학자들은 성공하기 위하여 “목적” 혹은 “비전”을 분명히 하고, 그것을 향하여 달려가라고 권합니다. 그들은 “당신의 목적이 당신의 무의식과 사고와 행동을 지배하게 하라”고 말합니다. 그렇게 하면 성공한다면서, 어릴 때부터 “대통령”이라고 쓰인 머리띠를 하고 공부를 하여 대통령이 된 사람, 자신의 비전을 책상머리나 침대나 공부하는 책 페이지마다 적어두고서 그것을 향해 전력투구하여 그 목표를 이룬 사람을 예로 들면서, “당신도 그렇게 하라, 그러면 성공할 것이다”라고 말합니다. 

따라서 <목적이 이끄는 삶>, “The Purpose Driven Life”, 즉 목표를 분명히 하고 그 목표를 향해 나아가는 삶을 살라는 것은 세상의 성공학 강의를 교회로 끌어들인 것과 같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문제라는 것이죠. 그러므로 “목적이 이끄는 삶”이라는 것은 상당히 그럴 듯 해 보이지만, 굉장히 위험한 발상입니다. 

그렇다면 교회와 성도의 삶을 이끄는 것은 무엇이 되어야 합니까? 결론적으로 말하자면, 교회도, 성도 개개인의 삶도 “성령이 인도하시는 삶”, “성령이 주장하시는 삶”이 되어야 합니다. 바로 이것을 보여주는 것이 오늘 본문입니다.

2. 성령에 이끌린 사람

1) 삶의 주인은 누구인가?

오늘 본문인 사도행전 8장은 그 내용이나 중심인물 면에서 1장에서 7장까지와는 다소 차이가 납니다. 1장부터 7장까지는 베드로와 야고보 요한, 그리고 스데반 같은 대단한 인물들이 중심이 된 역사였습니다. 그리고 기록된 사건들 마다 “최초”, “최고”라는 수식어가 붙을만한 일들이었습니다. 오순절 성령 강림으로 말미암아, 12사도들이 중심이 된 예루살렘 교회는 핍박 가운데서도 상상을 초월하는 부흥을 경험했습니다. 그들이 한 번 전도할 때마다, 수 천 명의 사람들이 회개하여 주 예수를 믿는 일이 날마다 일어났고, 그 결과 예루살렘 교회의 교인 숫자가 1만 명을 넘어섰습니다. 이것은 당시 인구로 볼 때 상상이 안 되는 숫자였습니다. 뿐만 아니라, 병든 자들이 고침을 받고, 성도들이 재산을 팔거나 나누어 가난한 이들을 돌보았고, 평신도 지도자였던 스데반 집사 같은 분들도 사도들 못지않게 위대한 순교자의 삶을 살았습니다. 

그러나 8장부터는 그 모습이 달라집니다. 스데반의 죽음을 신호탄으로 하여 유대인들은 교회를 대대적으로 박해하기 시작했습니다. 이러한 엄청난 박해 앞에서 교회는 어떻게 대처했습니까? “스데반의 뒤를 이어 우리도 주 예수와 복음을 위하여 순교하자!”고 외치면서 유대주의자들에게 맞서 싸웠습니까? 그러지 않았습니다. 12 사도들 외에, 1만 명이 훨씬 넘는 교인들이 거의 대부분 산지사방으로 뿔뿔이 흩어졌습니다. 좀 비판적으로 본다면, 도망을 갔다는 말이 옳을 것입니다. 그렇게 해서 예루살렘 교회는 유대와 사마리아와 헬라 지역으로 흩어져 ‘기독교 디아스포라’가 되었습니다. 바로 이런 면에서 사도행전 8장 이후의 기록은 도망간 사람들의 역사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입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인간 편에서는 도망자들의 역사이지만, 또 다른 면으로 보면 살길을 찾아 뿔뿔이 흩어진 그들이 하나님의 손을 벗어나지 못했다는 점에서 8장 이후의 기록은 여전히 특별합니다. 즉 그들은 고난과 박해에 맞서기보다는 피하는 것을 택했지만, 하나님은 그들이 피해 간 그곳에서 그들로 하여금 예루살렘에서 일어났던 복음과 성령의 역사를 그대로 경험케 하시고, 예루살렘에서 담당했던 사역을 그대로 하게 만드셨습니다. 

즉 예루살렘의 박해를 피하여 간 그곳에서 그들은 예루살렘에서와 마찬가지로 말씀의 능력과, 성령님이 하시는 기적적인 일들, 그리고 이 모든 것들이 주 예수의 이름으로 일어나는 것을 경험했습니다. 이것을 통해 알 수 있는 것이 무엇입니까? 예루살렘 교회가 뿔뿔이 흩어졌다고 교회가 사라지거나, 교회가 할 일이 없어지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성도는 어디에 가도 여전히 하나님의 백성, 주님의 사람들, 복음의 증인들이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이것을 통해 알 수 있는 것은 교회의 주인, 성도의 삶을 이끄는 것은 자신들이나, 그들에게 핍박을 가한 사람들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교회와 성도를 이끄는 것은 바로 하나님이시라는 것, 사도행전 적으로 말하면, 성령 하나님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것은 여러분도 마찬가지입니다. 여러분의 삶의 주인은 바로 성령 하나님입니다. 이 성령님이 여러분의 삶을 이끌고 있다는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2) 도망자 빌립, 그러나 ‧‧‧

박해를 피하여 도망간 사람들, 그들은 비록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라” 하신 주님의 명령에 순종하여 그리로 간 것은 아니었지만, 주님은 그들이 간 그곳에서 그들로 증인의 삶을 살게 하셨습니다. 오늘 본문에 나오는 예루살렘 교회의 7집사 중 한 사람이었던 빌립의 경우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어떤 면에서 빌립은 비겁한 사람입니다. 스데반이랑 자기랑 다를 게 뭐가 있습니까? 자신과 함께 초대교회의 첫 직분자였던 스데반 집사가 영광스럽게 죽었고, 죽는 그 순간까지 예수님과 천국을 증거하다가 순교했다면, 빌립도 같은 집사로서 그와 비슷한 생각을 가질 만 했습니다. 또 ‘스데반의 죽음으로 교회와 성도들을 향한 박해가 일어나고 있으니 나는 끝까지 교회를 사수하겠다’든지, ‘12사도는 주님의 교회의 지도자들이요 기둥 같은 존재들이므로 그들이 표면에 드러나지 않고, 대신에 나머지 6집사들이 활동하면서 사도들을 보호하자’고 할 수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빌립은 도망을 갔습니다. 사도행전 21장 8절에 의하면, 빌립에게 딸이 넷이나 있는 것으로 보아 책임져야할 가족이 많았기 때문에, 또 스데반을 죽인 일로 흥분한 유대인들이 닥치는 대로 그리스도인들을 괴롭히고 죽일 테니까 ‘일단 소나기를 피하고 보자’는 뜻에서 그렇게 행동했을 수도 있습니다만, 아무튼 예루살렘을 떠나 사마리아로 갔습니다.

그런데, 성도 여러분! 왜 빌립은 하필 사마리아인들의 도시로 내려갔을까요? 사마리아인들과 유대인들은 서로 상종하지 않을 정도로 원수 같은 사이이니, 역시 유대인들에게 미움을 받는 예수교 신자인 자기를 봐주리라고 생각했을 수 있습니다. ‘적의 적은 친구’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아무리 유대인들이 교회의 지도자 중의 한 사람인 자기를 잡으려고 혈안이 되었을지라도 사마리아로는 절대로 오지 않을 것이라는 생각을 했을 것입니다. 사마리아, “사”자도 싫어하는 유대인, 사마리아인을 먼발치에서 보기만 해도 부정해 진다고 여긴 유대인들이니까, 그들이 올 리가 없는 사마리아로 가는 것은 정말 현명한 선택이라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바로 그 사마리아에서 빌립은 조용히 지낼 수가 없었습니다. 하나님의 능력이, 성령의 역사가 그를 강하게 사로잡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빌립은 먼저 입술로서 복음을 선포했습니다. 그는 유대인이라면 치를 떠는 사마리아의 마을에서 그리스도 예수에 대해 외치면서 전도했습니다. 그리고 빌립을 통하여 주님의 능력이, 성령의 역사가 나타났습니다. 빌립이 귀신들린 자에게 예수의 이름으로 명하자, 귀신들이 고함을 지르며 사람들에게서 빠져 나갔습니다. 또한 중풍병자와 앉은뱅이를 고쳤습니다. 이렇게 해서 예루살렘에서와 마찬가지로 사마리아에서도 예수님의 복음이 선포되었고, 그 결과 그 성에는 큰 기쁨이 일어났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이 빌립을 통하여 다시 한 번 인생이 하나님의 손에 있다는 것을 확인하게 됩니다. 제 아무리 주님의 시야에서 벗어나려고 하고, 사명을 벗어버리려고 해도 안 된다는 것이죠. 사마리아로 꼭꼭 숨어든 빌립을 사로잡으셔서 주 예수의 증인이 되게 하신 그 성령님께서 여러분의 인생도 그렇게 붙들고 있다는 것을 인정하시기 바랍니다. 여러분은 성령님을 피할 수 없습니다!

3) 성령의 인도로 공식적인 아프리카 최초 그리스도인 전도

빌립의 생애 가운데 오늘 본문은 아주 인상적인 사건들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26절에 보면, 사마리아에서 열심히 사역을 하고 있던 빌립에게 주의 사자가 나타나 말씀하십니다. 이것은 환상이 아니라 실제로 주님의 천사가 나타나 빌립에게 말한 것입니다. 주의 사자는 빌립에게 “가사로 내려가는 길까지 가라”고 했습니다. 가사는 예루살렘에서 남서쪽 72km 지점에 있는 도시입니다. 그리고 예루살렘에서 이 가사로 내려가는 길은 광야길 이었습니다.

주의 사자가 빌립으로 하여금 이 길로 가서 한 사람을 만나게 하셨는데요. 그는 에티오피아 사람으로서 그 나라의 고위 관리였습니다. 에티오피아는 애굽의 남쪽에 있는 나라로서, 나일 강 유역을 중심으로 형성된 피부색이 검은 흑인인 구스 족속(사 11:11)의 후예들의 나라였습니다. ‘간다게’는 여왕의 이름이 아니라 왕조를 나타내는 명칭으로서 로마의 ‘가이사’나 애굽의 ‘바로’와 같은 것입니다. 왕국의 국가 재산을 관리하는 내시가 예배하러 예루살렘에 왔다가 돌아가고 있었는데, 주의 사자는 빌립을 인도하여 바로 그 사람을 만나게 했습니다. 

에티오피아 내시는 광야 길을 가면서 그 털털거리는 마차 위에서 선지자 이사야의 글을 읽고 있었습니다. 그는 참으로 하나님의 은혜를 사모하는 사람이었기에, 그 바쁜 일상 중에도 만사를 제치고 예루살렘으로 예배하러 왔고, 달리는 마차 안에서도 가만있지를 못하고 성경을 읽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그가 구약의 결론이자 복음의 완성인 예수님을 알도록 빌립을 보내신 것입니다. 

내시는 선지자 이사야의 글을 옆에 있는 사람들이 들을 수 있을 정도로 큰 소리로 읽고 있었습니다. 그가 읽는 성경은 이사야 53장 7,8절로서 구약의 헬라어 번역인 칠십인역(LXX)이었습니다. 이 칠십인 역은 아주 어렵게 번역이 되었기 때문에 그것을 번역한 학자들조차도 이해하지 못한 부분이 많았다고 합니다. 따라서 이 본문을 읽고 있던 내시 역시 깨닫지 못해 아주 답답해하고 있었습니다. 그때에 빌립이 정말 기적적으로, 성령님의 특별한 능력으로, 달리고 있던 내시의 마차에 올라탄 것입니다. 그리고는 그가 읽었으나 깨닫지 못하고 있던 성경을 해석해 주면서, 이 본문으로부터 시작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했습니다. 

빌립이 전하는 복음을 들은 내시는 망설임 없이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겠다고 했습니다. 본문에는 없으나 우리는 여기에 생략된 말을 이렇게 추측해볼 수 있습니다. 빌립이 내시에게 물었습니다. “이 예수를 하나님의 아들 구주로 믿겠습니까?” 그러자 내시는 “예, 나사렛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 나의 구주이신 줄 믿습니다.” 그는 예수님을 구약성경이 말한 바로 그 메시야로, 하나님의 아들이자 자신의 구주로 고백했고, 자진하여 세례를 받겠다고 했습니다. 그리하여 그는 공식적인 아프리카 최초의 그리스도인이 되었습니다.

성도 여러분, 이 에티오피아 내시로 하여금 하나님과 말씀을 사모하게 하신 분, 그로 성경을 읽는 중에 빌립을 만나게 하사 구원의 복음을 듣게 하신 분이 누구입니까? 우리가 본 대로 이 내시를 사로잡고 있는 것도 하나님의 은혜요, 성령님입니다. 뿐만 아니라, 빌립으로 하여금 에티오피아 내시를 아프리카 최초의 기독교인으로 세우게 하신 분이 누구입니까? “땅 끝을 보리라”했던 사도 바울처럼, “아프리카 선교의 꿈”이 빌립에게도 있었습니까? 굳이 선교는 아니더라도 만나는 모든 사람에게 주님의 복음을 전하려는 굳은 결의가 빌립에게 있었습니까? 사실 빌립에게는 이런 것이 없었습니다. 다만 오늘 본문에 소개된 그대로, 주님의 천사가 나타나 빌립에게 말하고 빌립을 광야 길로 인도했을 뿐입니다. 이러한 전부, 즉 에티오피아 내시나 빌립의 모습을 통해서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이 무엇입니까? 넓게는 사도행전의 주체, 선교의 주체, 그리고 복음의 역사와 한 개인을 이끄시는 분, 교회와 성도 개개인을 붙들고서 당신의 목적으로 이끌어 가시는 분은 바로 하나님이심을 말하는 것입니다. 

4) “주의 영이 빌립을 이끌어 ‧‧‧”

오늘 본문은 마지막 부분에서 이 사실을 다시 한 번 더 확정적으로 말하고 있습니다. 38절에 “둘이 물에서 올라갈 새 주의 영이 빌립을 이끌어 간지라 내시는 혼연히 길을 가므로 그를 다시 보지 못하였다”고 되어 있습니다. 빌립이 에티오피아 내시를 만나러 이 광야길로 달려와 달리는 마차를 잡아서 올라타고서는 복음을 전한 일, 그리고 그 사역이 끝나자마자 다시 그를 이끌어 가시는 것 역시 주의 영이 하신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성령님이 빌립을 이끌어 갔다는 표현은 아주 흥미롭습니다. 왜냐하면, 이 말이 마치 독수리가 먹잇감을 채어가듯 ‘재빨리 어떤 것을 채어가는 모습’을 나타내기 때문입니다. 여기서는 하나님께서 빌립을 내시의 눈앞에서 금방 사라지도록 하셨다는 뜻입니다. 그리고 이 단어는 이 기적이 실제적인 시공간(視空間)에서 발생했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여러분, 이 장면은 마치 영화의 한 장면 같지 않습니까? 그것도 컴퓨터 그래픽으로 정교하게 꾸민 가상의 장면 같지요. 그러나 실제로 일어난 일입니다.

그러고 나서 빌립은 “아소도”에 나타났습니다. 빌립의 세 번째 선교지라고 할 수 있는 아소도는 가사에서 동북쪽으로 약 40km 떨어진 곳으로, 사무엘상 6장 17절에서 블레셋 성읍인 '아스돗'으로 언급된 곳입니다. 왜 이 지명이 나오느냐? 성령님은 놀라운 방법으로 빌립을 40km 떨어진 곳으로 이끌어 가셨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후 빌립의 선교 활동이 지중해 연안의 도시들을 두루 포함한다는 40절의 진술은 그곳의 기독교 공동체들이 빌립에 의해 시작된 것임을 암시하고 있습니다. 이는 바로 다음 장인 사도행전 9장에서 베드로가 룻다와 욥바를 방문하였을 때(9:32, 36), 그곳에 이미 기독교인이 있었다는 사실에서 잘 알 수 있습니다.

이러한 말씀들이 의도하는 바가 무엇입니까? 성령님께서 여러분의 삶을 인도하실 때, 성령님이 역사하실 때, 이와 같은 일들이 일어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성령님이 이끌어 가실 때 우리의 삶에는 우리 스스로 할 수 없는 놀라운 일들이 일어납니다. 그리고 그 결과는 너무나 엄청납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은 무엇에 이끌리는 삶을 사시겠습니까?

3. 성령이 이끌어 주는 삶 

말씀을 맺겠습니다. 자신이 하고 싶은 대로 하고 사는 사람이 있습니다. 하고 싶은 것은 어떤 희생과 대가를 치루더라도 하고, 하기 싫은 것은 죽인다고 해도 하지 않습니다. 돈에 이끌리는 사람도 있습니다. 돈만 된다면 무엇이든 하는 사람들이지요. 권력을 따라, 그것을 얻기 위하여 절치부심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사랑을 찾아, 사랑을 위해서라면 물불 가리지 않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러나 오늘 주님은 여러분들이 무엇에 이끌리며, 무엇을 따라 움직이며 행동하는 사람이 되라고 하십니까? 성령의 사람, 성령의 이끌림, 성령님의 인도하심을 따라 살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사는 것이 그렇게 사는 것일까요?

주님의 음성을 들으며 주님의 인도를 받고 싶어 했던 한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는 영국 국왕과 정부가 기독교에 대해서 핍박을 가할 때 잡혀서 감옥에 들어갔습니다. 독방에서 어떤 것도 볼 수 없고, 어떤 소리도 들리지 않을 때, 그때에야 비로소 그는 주님을 볼 수 있었고, 주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었습니다. 그가 바로 존 번연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성령님의 인도를 받으려면, 자신의 소리를 내지 않아야 합니다. 세상의 소리를 듣지 않아야 합니다. 자신의 욕심을 내려놓아야 합니다. 주님의 음성을 듣고 인도를 받기 위하여 말씀에 집중하고 기도하는 가운데 성령님과 주파수를 맞추어야 합니다. 그리고 말씀에 적극 순종해야 합니다. 그러는 가운데 성령님에게 이끌리는 이 놀랍고 풍성한 삶을 살아가는 여러분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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