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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사명자는 결코 죽지 않는다! (욘 1:1~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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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명자는 결코 죽지 않는다! (욘 1:1~17)
 
오늘 이 땅에는 수많은 어려움이 있습니다.  고난이 있고 고통이 있습니다.  그러나 좌절하지 말고 이 땅 위에 끝없는 하늘의 기쁨과 능력과 평화를 선포하는 예수 그리스도의 큰 능력을 힘입고 한 믿음으로 나가면 하나님께서 축복해 주실 줄 믿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모든 기쁨은 진리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만 얻을 수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오늘 우리는 모든 생명의 기쁨은 오직 한 인격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진리 안에서만 얻을 수 있음을 세상 가운데 선포할 수 있어야 합니다.
 
잊지 마십시오.  진리가 없으면 무너집니다.  예수가 없으면 무너집니다.  이 땅이 복을 받고, 가정이 복 받는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 없으면 무너집니다.  이 땅이 화목하고, 잘 사는 유일한 길은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만이 나와 내 가정을 살리고, 이 민족을 살릴 수 있습니다.

오늘 우리도 예수를 믿으면 자꾸 "하나님 뜻대로 살아라.  성령의 감화 감동으로 살아라"하는 많은 규범들이 있습니다.  그런데 이런 규범 속에서도 "내 인생을 내 멋대로 사는 길은 없을까?  내 생명의 주인은 나지"라고 하는 생각들이 있습니다.  "내 인생을 내 멋대로 산다.  내 인생은 나의 것이다.  그러므로 내 생명의 주인은 나다."  어쩌면 이런 생각들은 더 없이 멋있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인간은 끊임없이 하나님 없는 자신만의 삶을 살아가려고 합니다.  그래서 내 인생은 나의 것이라고 외치면서 탕자의 삶을 즐기려고 합니다.  그러나 이런 생각은 다 우둔하고 미련합니다.  기억하십시오.  내 생명의 주인은 내가 아닙니다.  어느 누구도 '내 생명의 주인은 나'라고 주장할 수 없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내 생명의 주인은 나'라고 외치며 아버지를 떠나갔던 탕자를 보십시오.  그는 아버지의 손길이 미치지 않은 더 좋은 것이 있는 줄 알았습니다.  이런 유혹은 우리들에게도 있습니다.  그래서 자기 것을 요구하며 자기 것만 챙기는 극단의 이기주의자가 됩니다.
 
그러나 기억하십시오.  죄란 것은 결코 적당히 짓고 그만 둘 수는 없습니다.  죄는 절대로 자제 능력이 없습니다.  죄의 속성에는 파괴능력이 있습니다.  죄의 속성에는 침전의 능력이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눈을 감으면 손이 감기고, 손이 감기면 발이 감겨서 점점 자신도 모르게 빠져 들어갑니다.
 
탕자는 자기 생각에 아버지의 집을 떠나서 먼 곳에 가면 귀한 일이 있을 줄 알았습니다.  그러나 굶주림과 극단의 고통과 괴로움이 몰려왔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궤도를 한번 벗어나고 나면 그 궤도를 다시 찾기가 힘듭니다.  밤마다 "내 인생이 어쩌다 이 꼴이 되었을까…" 극단으로 갑니다.  그런데 이것은 한 개인의 문제가 아니라 현대인의 문제요, 오늘 우리의 문제입니다.

탕자는 이제 마지막 남은 고난의 습지에서 돼지와 함께 자고 일어나는, 자기 몸 속의 고고한 인간성이니 하나님의 은혜니 하는 냄새는 모두 없어지고 점점 짐승의 냄새가 몸에 배었습니다.  이것이 오늘 현대를 사는 우리의 모습입니다.

그러나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가 탕자에게서 눈을 뜨고 보아야 할 것은 이렇게 고통 가운데 있던 그가 어느 날 내 영혼의 본 고향, 하나님 아버지의 품을 생각하기 시작했다는 것입니다.  "내가 그 분의 품에 돌아간다고 하면…"  그 마음 속에 갑자기 깨달음이 옵니다.  "이 모습이 내 모습이 아니다.  내 인생을 이렇게 마칠 수는 없다"  탕자는 드디어 높은 하늘, 하나님이 계신 곳을 바라보며 오랫동안 잃어버렸던 자기를 찾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인생을 살다보면 많은 고난과 고통은 여러 갈래, 여러 방법으로, 여러 형편에서 옵니다.  그러나 해결의 방법은 하나밖에 없습니다.  하나님의 손에 붙잡히면 됩니다.  권능의 손에 붙잡히면 됩니다.  탕자의 모진 고통은 아버지의 품에 돌아왔을 때 한 순간에 다 해결되었습니다.
 
한 어린아이가 길을 가면서 넘어지고 쓰러지다가도 아버지의 능하신 손을 잡기만 하면 그 시간부터 안전해집니다.  그렇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전능하신 아버지 하나님의 손을 붙잡으십시오.  아니 그분께 내 손을 내 미십시오.  더 이상 몸부림치지 말고 그분께 그냥 기대십시오.

사랑하는 여러분, 오늘 우리가 사는 사마리아 땅은 혼란과 혼돈과 문제투성이입니다.  이 사마리아 땅에 빌립이 복음을 증거하다가 힘이 너무 부족하여 예루살렘의 성령의 능력을 받은 제자들과 같이 나타났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그냥 그 성에 복음만 증거했습니다.  예수만 증거했습니다.  그랬더니 큰 진리의 성령의 능력들이 영혼마다 임하는데 그 사람들에게 기쁨이 왔습니다.  그 도성에 큰 기쁨이 왔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저는 나사렛 예수가 증거되는 영혼 속에는 말할 수 없는 놀라운 기쁨이 임하는 것을 믿습니다.  나사렛 예수가 증거되는 가정 속에 큰 기쁨이 임하는 것을 믿습니다.  사마리아 도성보다 더 혼탁하고, 소돔과 고모라보다 더 패역한 이 땅에 교회가 일어나고 믿는 이들이 일어나서 기쁨이 충만한 사마리아 도성과 같은 도성으로 만들 수 있는 길이 있습니다.  예수가 들어가면 됩니다.  주께서 들어가시면 됩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여러분, 이렇게 기도하십시오.

"하나님이여, 오늘 이 말씀을 듣는 모든 영혼 속에 위로부터 주시는 성령의 권능의 큰 기쁨을 가득 채워주시옵소서.
내 영혼에 기쁨을 채우시고, 내 가정, 이 땅, 이 나라에 큰 기쁨을 채워주시옵소서."

사랑하는 여러분, 선지자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전하는 사람입니다.  선지자의 기쁨이란 하나님의 말씀이 임할 때 일어나는 것입니다.  선지자에게 가장 고통은 하나님께서 말씀하지 않으실 때 말씀을 기다려야 하는 어둠의 시간입니다.
 
목사로서 가장 힘든 것은 전해야 할 말씀을 찾지 못할 때입니다.  주일 예배는 다가오는데 하나님께서 하시는 말씀을 듣지 못하고 묵묵히 기다려야 할 때, 이것은 참으로 견디기 힘든 고통이 아닐 수가 없습니다.  일반적으로 성도들은 우리 목사님은 설교가 쉽게 나오는 것으로 생각합니다.  그러나 다가오는 설교 앞에 말씀이 분명하게 떠오르지 않는 참담한 고통의 순간이 있을 때가 있습니다.

그런 점에서 본다면 오늘 본문의 요나 선지자는 행복한 선지자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임했기 때문입니다.  구체적으로 요나가 해야 할 일을 하나님께서 말씀해 주셨습니다.  니느웨로 가서 복음을 전하라는 것입니다.  전능하신 하나님의 말씀 앞에 선지자의 선택은 단 하나입니다.  그냥 순종하며 나아가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요나의 대답은 우리를 놀라게 합니다.  3절에 요나가 어떻게 반응합니까?
"그러나 요나가 여호와의 얼굴을 피하려고 일어나 다시스로 도망하려 하여"

도망하는 요나.  사랑하는 여러분, 여러분은 이해가 되십니까?  하나님께서 희미하게 명령하신 것이 아닙니다.  직접 요나에게 말씀하십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말씀을 전해야 하는 선지자가 어떻게 이렇게 반응할 수 있습니까?
 
"여호와의 낯을 피하려고 도망하니라."
성경에서 하나님의 낯을 피한다는 것은 하나님을 등지고 살아가는 인간의 모습을 보일 때 쓰는 표현입니다.  요나가 어느 정도로 타락한 선지자이기에 이렇게 반응한다는 말입니까?  정말 타락하여 전혀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못하는 선지자가 되어 버렸을까요?  요나의 반응을 이해하려면 요나가 누구인지, 그리고 니느웨가 어떤 곳인지를 알아야 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요나가 누구입니까?  열왕기하 14장 25절에 보면 요나를 가리켜서 하나님의 종이요, 선지자라고 했습니다.  그러니까 그는 하나님의 종으로서 선지자 역할을 한 사람입니다.  선지자가 하는 일은 하나님의 입처럼 하나님의 말씀을 대신 전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살아온 요나였습니다.  따라서 "여호와의 말씀이 요나에게 임하니라"는 표현은 조금도 이상한 말이 아닙니다.

그러나 요나는 여호와의 얼굴을 피해 도망하기로 결단합니다.  무엇이 문제입니까?  요나가 정말로 하나님을 피하고 싶어서였습니까?  해답은 하나님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에 있습니다.  무슨 말씀이었습니까?
"요나야, 니느웨에 가서 말씀을 전하라."

하나님께서 가서 전하라고 하신 니느웨는 앗시리아라는 나라의 수도입니다.  앗시리아는 당시 가장 강한 나라 가운데 하나요, 이스라엘을 끊임없이 괴롭혔던 적대국입니다.  그리고 이스라엘을 멸망시킨 나라입니다.
 
구약에 나훔이라는 소선지서가 있습니다.  나훔은 악한 나라 앗시리아의 수도 니느웨에 대하여 저주를 퍼붓는 예언을 담은 말씀입니다.  왜 니느웨를 이토록 저주합니까?
나훔 3장 1절에 보면 앗시리아 사람들의 잔학한 모습을 보여줍니다.
"화 있을진저 피의 성이여, 그 안에는 거짓이 가득하고 포악이 가득하며 탈취가 떠나지 아니하는도다.
 
왜 그렇습니까?
"마술에 능숙한 미모의 음녀가 많은 음행을 함이라.  그가 그의 음행으로 여러 나라를 미혹하고 그의 마술로 여러 족속을 미혹하느니라.  보라 내가 네게 말하노니 만군의 여호와의 말씀에 네 치마를 걷어 올려 네 얼굴에 이르게 하고 네 벌거벗은 것을 나라들에게 보이며 네 부끄러운 곳을 뭇 민족에게 보일 것이요."
 
앗시리아를 향해 불일 듯 타오르는 하나님의 분노가 보입니다.  앗시리아인들은 사람을 잔인하게 죽이고, 십자가형을 개발한 나라이기도 합니다.  전쟁에서 남자와 아이들을 죽이고 여인들을 겁탈하고 종으로 삼은 패역한 나라이기도 합니다.

요나가 가서 복음을 전해야 하는 곳은 바로 이 사악한 백성의 수도인 니느웨입니다.
"니느웨에 가서 복음을 전하라.  회개하라고 전하라."
 
요나는 하나님의 명령을 정확하게 이해했습니다.  무엇을 원하시는지 분명하게 알았습니다.  그러나 요나는 하나님의 말씀을 정면으로 거부했습니다.  하나님이 가라고 지시하는 니느웨는 동쪽에 있는 도시입니다.  그러나 요나는 서쪽 방향에 있는 다시스로 배를 탑니다.  하나님의 얼굴을 피해서 말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요나 선지자가 왜 하나님을 피해 도망하는 것입니까?  나름대로 몇 가지 이유가 있었을 것입니다.  아마도 요나는 그곳에서 말씀을 전하는 선교적 사명이 두려울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앗시리아의 수도인 니느웨의 사람들은 우상을 섬기고 무자비하기로 소문난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것은 마치 이슬람교도들이나 북한에서 복음을 전하는 것과 마찬가지라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순교를 각오해야 할지도 모릅니다.
 
더 중요한 이유는 4장에 가서 밝혀집니다.  3장에 보면 요나가 우여곡절 끝에 복음을 전합니다.  그리고 갑자기 이상한 일이 생겨났습니다.  니느웨 사람들이 금식하며 회개하기 시작합니다.  왕까지 회개하고 짐승들도 금식시키며 회개운동이 일어납니다.  민족의 철저한 회개 운동에 요나는 기뻐하는 것이 아니라 완전히 분노로 휩싸입니다.  4장 1절과 2절에 요나가 하나님께 불평합니다.  요나서 4장 1절과 2절을 찾아서 다같이 읽도록 하겠습니다.

"요나가 매우 싫어하고 성내며, 여호와께 기도하여 이르되, 여호와여 내가 고국에 있을 때에 이러하겠다고 말씀하지 아니하였나이까?  그러므로 내가 빨리 다시스로 도망하였사오니 주께서는 은혜로우시며 자비로우시며 노하기를 더디하시며 인애가 크시사 뜻을 돌이켜 재앙을 내리지 아니하시는 하나님이신 줄을 내가 알았음이니이다."

사랑하는 여러분, 요나가 왜 이렇게 분을 내고 있는 것입니까?  전도해서 위대한 열매가 나타났다면 당연히 감격해야 할 선지자가 아닙니까?  문제는 요나가 하나님을 잘 못 이해한 것에 있습니다.  요나는 그의 하나님을 이스라엘 민족만의 하나님으로 보았습니다.  다른 민족은 율법도 없이 살아가는 개와 돼지와 다를 바 없었습니다.  이런 이방인들은 하나님의 자녀가 될 기회를 주지 말아야 한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이스라엘만의 하나님으로 만들어 버린 요나.  그의 민족주의 인종주의가 우주적인 하나님을 지역적인 하나님으로 만들어 버린 것입니다.

요나는 도망합니다.  동쪽 니느웨를 떠나 서쪽 다시스로 도망하는 요나.  하나님의 말씀을 떠나 자신의 뜻대로 살아가는 요나.
 
사랑하는 여러분, 오늘 여러분의 삶은 어떠합니까?
말씀이 지시하는 곳으로 향하고 계십니까?
하나님이 원하시는 니느웨로 가고 있습니까, 아니면 나의 의지대로 다시스로 가고 있습니까?
민족적 한계에 갇혀 말씀 전하기를 거부하고 도망하는 요나의 모습이 오늘 우리의 모습은 아닐까요?
 
하나님을 알고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하나님을 사랑하지만 말씀을 전하는 데는 큰 관심 없이 살아가는 사람들.  하나님은 온 우주의 창조주요, 모든 사람을 사랑하시는 사랑의 하나님이라고 믿지만 선교하고 말씀을 전하는 것을 특별한 사람의 임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  이것이 누구에게 나타난 일입니까?  하나님을 모르는 사람이 아닙니다.  무슨 말입니까?  하나님을 알면서도 얼마든지 하나님께 불순종 할 수 있다는 말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의 문제는 하나님을 아는 것만으로는 안 됩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이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께 절대적으로 순종하는 삶이 있어야 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여러분들이 생각하는 니느웨는 무엇입니까?  저 사람만큼은 내가 예수님을 전하고 싶지 않아서 부담스럽게 여기는 사람이 있지 않습니까?  여러분의 가족 가운데 하나님의 사랑을 나누고 싶은 마음이 내키지 않는 사람은 없습니까?  주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니느웨로 가서 복음을 전하라."

니느웨로 가지 못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우리의 인생에 하나님의 뜻을 이루지 못하게 하는 요소가 무엇입니까?
자신의 생각에 갇혀 다른 사람을 보지 못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짐승들을 광주리에 담아 내리실 때에 베드로는 결단코 먹지 않겠다고 소리칩니다.  하나님이 정결하게 하셨다고 말해도 자신의 생각으로 먹지 않겠다고 소리치는 베드로와 같은 사람이 우리들 가운데 있지는 않습니까?  이런 사람들의 판단 근거는 성경의 말씀이 아니라 자신의 주관적인 신앙입니다.  그러나 기억하십시오.  이것은 신앙이 아닙니다.  신념일 뿐입니다.  신앙과 신념을 구분하십시오.  신앙은 성경에 근거하지만 신념은 자신의 생각에 근거합니다.

니느웨로 가지 못하는 이유 가운데는 '나만 믿으면 그만이다'는 절름발이 신앙도 있습니다.  하나님이 선택하신 사람들은 누구를 통해 구원하기로 되어 있으니 내 신앙이나 잘 지키면 된다는 사람이 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한 가지 기억하셔야 할 것이 있습니다.  주님을 사랑하면 반드시 주님을 전하게 되어 있습니다.  주님을 사랑하는 척도를 보려면 내 눈이 누구를 향하고 있는지를 보면 됩니다.  그렇다면 오늘 여러분의 눈은 누구를 향하고 있습니까?  여러분의 눈은 어디를 향해 있습니까?

사랑하는 여러분, 니느웨로 가라고 부탁하시는 분이 누구십니까?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 죽으신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우리가 부담스러워 하는 그 사람들을 위해서 예수님은 비참하게 죽으시고 그들의 죄를 용서하셨습니다.  예수님의 한없는 사랑으로 저와 여러분들도 구원의 감격을 누리고 있습니다.  어떤 상황에서 누구에게라도 주님의 사랑으로 니느웨를 말씀으로 정복하는 여러분의 삶이 되시기를 축복합니다.

요나를 보면 한 가지 이상한 것을 발견합니다.  왜 하나님께서 당장에 요나의 길을 막고 회개하게 하지 않으셨을까?  왜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백성들이 범죄 하는 것을 보시고 당장에 벌을 내려 멈추게 하지 않으실까?  오히려 상황은 정반대처럼 보입니다.
 
3절에 보면 도망하려고 욥바로 내려갔더니 마침 다시스로 가는 배를 만납니다.  마침 반대 방향으로 가는 배를 만난 요나.  죄를 지으려고 할 때 오히려 상황이 척척 풀려 가는 모습입니다.  이것이 문제입니다.  이웃을 돕거나 자신을 부인하고 사랑하려면 그렇게도 생각이 많고 넘어야 할 난관이 많습니다.  그렇지만 악을 행하려면 왜 그렇게도 척척 잘 풀리는 인생인지.  죄를 짓기 위해서는 주님을 묵상하지 않아도 됩니다.  절대로 기도하지 않아도 안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기억하십시오.  범죄한 우리의 본성은 하나님을 순종하도록 만든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대적하도록 만들어진 것입니다.  죄를 짓는 데는 노력할 필요가 없습니다.  우리의 본성은 죄를 짓는데 완벽합니다.  세상은 죄를 짓기에 충분한 환경을 제공하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하나님께서 우리를 즉시로 가로막지는 않으십니다.  하루에 텔레비전은 3시간을 보면서도 성경을 3분도 읽지 않을 때 하나님께서 우리의 눈을 멀게 하지 않습니다.  우리가 전화는 1시간을 하면서 기도를 10분도 하지 않아도 하나님께서 우리의 입을 당장에 벙어리로 만들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그냥 두십니다.  그러나 사랑하는 여러분, 이 때를 조심해야 합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그냥 두실 때, 이 때 조심하고 돌아와야 합니다.

주님께서 아무 말씀이 없으실 때, 기억하십시오.  그 때는 우리를 기다리십니다.  우리를 기계로 만들지 않으시고 하나씩 간섭하는 어린아이로 보시지 않고 우리를 믿으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계속해서 우리의 의지대로 살아갈 때 우리를 지켜보고 계시는 주님의 아픈 마음을 생각해 보십시오.  우리를 보시면서 마음 졸이시는 주님을 생각해 보십시오.
 
처음에 하나님이 관심 없어 보일 때, 그러나 양심에 이렇게 살아서는 안 되는데 할 때에 사랑하는 여러분, 그것이 바로 하나님이 말씀하시는 통로입니다.  상황을 통해 말씀하시기도 하십니다.  이 정도에서 들으셔야 합니다.  우리의 몸을 통해서라도 말씀하시면 그 때는 정말 큰 일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말씀하실 때에 기뻐하며 순종하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말씀을 읽거나 설교를 듣다가, 혹은 기도하거나 믿음의 형제와 말씀을 나누는 중에 무엇이든 하나님이 말씀하시면 즉각적으로 순종하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진정한 그리스도인에게는 순종 이외의 다른 길은 없습니다.  지금 순종하든지 다음에 순종하든지.  그러나 중요한 것은 지금  이 순간 하나님 앞에 나아가는 것이 행복의 시작입니다.

오늘 본문을 보십시오.  드디어 하나님께서 움직이시기 시작합니다.  패역한 선지자를 찾아오신 하나님께서는 큰 바람을 바다 위에 내리십니다.  여기에서 '큰 풍랑을 내리다' 는 원문의 의미는 '세게 집어 던졌다' 또는 '총알처럼 발사했다'는 의미입니다.  그러니까 자연스런 풍랑이 아니라 하나님이 직접 개입하신다는 말씀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기억하십시오.  하나님의 사람들은 하나님으로부터 도망할 수는 있어도 하나님으로부터 숨을 수는 없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떠날 수는 있어도 하나님의 관심에서 벗어날 수는 없습니다.

지금까지 경험하지 못한 거대한 폭풍에 사공들은 정신이 나갔습니다.  각기 자신의 신을 부르며 기도합니다.  죽은 신이 아무런 응답이 없자 이번에는 인간적인 모든 방법을 동원합니다.  물건을 바다에 던져 배를 가볍게 합니다.  그러나 풍랑은 더 크게 일어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하나님께서 내리신 문제는 하나님 앞에서 풀어야 합니다.  삶에서 생기는 문제 가운데 자연히 생기는 문제가 있고, 하나님이 특별히 주시는 문제가 있습니다.  과로해서 몸살이 나면 기도해서 낫는 것도 좋지만 쉬셔야 합니다.  그러나 특별히 하나님이 주시는 문제는 사람의 방법으로는 해결되지 않습니다.  하나님과 해결해야 합니다.  다른 것으로 해결하려 들면 시간과 물질과 힘만 낭비하게 될 것입니다.  결국 하나님에게서 멀어질 뿐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거센 풍랑을 만나 가진 것 다 버리고, 생명의 위협까지 느껴야 하는 이 절박한 순간에 요나는 무엇을 하고 있습니까?  본문 5절은 이렇게 말합니다.  "그러나 요나는 배 밑층에 내려가서 누워 깊이 잠이 든지라"
이것이 말이 됩니까?
불신자도 죄를 짓고는 편히 잠들 수 없는데 명색이 선지자요 하나님의 사람이 하나님을 거부하고 편히 잠이나 잘 수 있단 말입니까?

어쩌면 요나도 하나님을 벗어나 도망한다는 사실에 항구로부터 점점 멀어져 가는 배를 바라보면서 처음에는 고민을 했을 것입니다.  일반적으로 너무나 극심한 죄를 짓고 나면 그냥 잊고 싶은 것이 사람의 심리라고 합니다.  적당한 죄는 즉시로 회개하려고 하지만, 너무나 거대한 죄는 회개할 마음까지 잃어버리게 할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사랑하는 여러분, 죄란 내가 잊어버린다고 사라지는 것이 아닙니다.  죄라는 것은 반드시 용서를 받아야 할 일이지 잊혀져야 할 대상이 아닙니다.  하나님 앞에 버림받은 인생이라면 호흡하듯 죄를 짓고도 고민 없이 살아가지만 하나님이 사랑하시는 사람은 결국 죄 문제를 해결하도록 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그러므로 시편 139편 7절 이하에서 시편 기자는 이렇게 고백합니다.
"내가 주의 영을 떠나 어디로 가며 주의 앞에서 어디로 피하리이까?  내가 하늘에 올라갈지라도 거기 계시며 스올에 내 자리를 펼지라도 거기 계시니이다"
하늘을 지으신 하나님은 바다와 음부를 지으신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의 시야에서 벗어날 수 있는 땅은 한 치도 없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하나님 앞에서의 문제는 잊는다고 사라지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을 만나 해결하는 것이 유일한 해결책인 줄 믿으시기 바랍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 제대로 서 있지 못할 때 세상 사람들이 우리를 보고 무엇이라 합니까?  잠자는 요나에게 하는 선장의 말입니다.
"일어나서 네 하나님께 구하라.
혹시 하나님이 우리를 생각하사 망하지 않게 하시리라."

사랑하는 여러분, 아직도 하나님 앞에서 자신을 발견하지 못하는 요나가 보입니까?  폭풍을 일으키신 하나님께서 이번에는 어떻게 찾아오십니까?  사람들은 서로가 제비를 뽑습니다.  요나가 문제를 일으킨 장본인으로 밝혀졌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다시 한번 기억하십시오.  하나님으로부터 도망할 수는 있어도 숨을 곳은 없습니다.  우리의 불순종이 하나님의 끈질긴 사랑과 인내만 못합니다.  하나님의 길이 참으시는 인내 때문에 우리가 호흡하고 살아가는 것입니다.

폭풍우를 보내어도 정신차리지 못하고 잠만 자는 요나.  우상을 숭배하는 사람들로부터 하나님의 영광을 가리게 하는 요나.  제비까지 뽑도록 뒷짐 쥐고 앉아 있는 요나.  결국 제비를 통해 하나님이 찾아오게 만드는 요나.
 
사랑하는 여러분, 요나처럼 이렇게 둔하면 안됩니다.  한 마디 하면 척 알아들어야 합니다.  마른 하늘에 폭풍이 일어나면 깨달아야 합니다.  우상을 섬기는 사람들이 하나님의 이름으로 기도를 부탁할 때쯤이면 당연히 정신을 차려야 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어떤 방법이든 하나님이 우리를 찾아오실 때 그 때가 은혜의 때인 줄 믿으시기 바랍니다.  그 때가 돌이키고 일어나서 다신 한번 하나님 앞에 서야 할 때입니다.  요나가 하나님의 말씀을 버리고 도망하는 것은 근본적인 죄입니다.  그러나 더 심각한 것은 하나님이 찾아 오셔도 회개하지 않고 아무 일 없는 듯 살아가는 것이 더욱 큰 죄입니다.

영국 사회가 병들어 갈 때 신문사에서 가장 뛰어난 지성인이었던 체슬턴(Chesterton)에게 질문했습니다.
"무엇이 가장 큰 문제입니까?"
그의 대답은 한 마디였습니다.
"내가 문제요."
 
그렇습니다.  나의 문제로 여길 때 해결은 시작됩니다.  민족을 가슴에 품고 차라리 자신의 이름을 생명책에서 없앨지라도 민족을 살려달라고 절규하는 모세와 바울로부터 하나님의 역사는 시작됩니다.  역대하 7장 14절 이하에서 말씀합니다.
"내 이름으로 일컫는 내 백성이 그들의 악한 길에서 떠나 스스로 낮추고 기도하여 내 얼굴을 찾으면 내가 하늘에서 듣고 그들의 죄를 사하고 그들의 땅을 고칠지라. 이제 이 곳에서 하는 기도에 내가 눈을 들고 귀를 기울이리니"
 
그렇습니다, 여러분.  개인의 문제뿐만 아니라 민족의 문제인 땅의 문제까지 고치겠다는 하나님의 말씀을 믿으십시오.  그리고 하나님과의 문제는 하나님과 해결하십시오.  세상 그 어느 누구도, 세상 그 어떤 것으로도 하나님과의 문제를 해결할 수는 없습니다.

마침내 요나는 바다에 던져집니다.  요나를 던지자 바다는 곧 잠잠해 집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전해야 하는 사명자 요나는 그렇게 바다에 던져졌습니다.  사명자의 인생을 살아드리지 못하고 그렇게 죽어 갔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요나를 그렇게 버려 두지 않으셨습니다.  요나에게 말씀하신 하나님은 요나를 찾아오신 하나님이셨고 결국에는 죽음 가운데 그를 구원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거대한 바다에 던져진 요나.  끝없는 죽음으로 던져진 요나.  그러나 하나님은 그를 그냥 버리지 않았습니다.  큰 물고기 한 마리를 예비하시고 요나를 삼키게 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기억하십시오.  오늘 본문에서의 진정한 기적은 물고기가 요나를 삼키는 것이 아니라 물고기를 보내신 하나님이 요나를 살리신 것입니다.  죽어도 할 말이 없는 요나, 죽어 마땅한 요나.  그러나 하나님은 거대한 물고기를 보내셔서 요나를 삼키게 하셨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이 거대한 물고기를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유유히 바다를 유영하다가 하나님이 말씀하시니 정확한 시간에 정확한 장소에서 한 치의 틈도 없이 요나를 받아 삼키는 이 물고기.  우리가 순종하려면 이 정도는 해야 되지 않겠습니까?
 
물고기보다 못한 요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 요나를 세우시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당신의 생명의 말씀을 이 땅에 전하게 하시려고요.  이 땅에 죽은 영혼들을 살리시려고 하나님은 다시 요나를 찾아오십니다.  아직도 니느웨에 좌우를 분변하지 못하는 자가 12만 명이나 있기에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선지자 요나를 다시 세우십니다.  그러므로 기억하십시오.  사명자는 결코 죽지 않습니다.  나에게 하나님의 사명이 있는 한 결코 나는 죽지 않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는 요나를 보면서 "선지자가 어떻게 이럴 수 있단 말인가?" 라고 믿기 어려운 표정을 짓습니다.  마치 그런 표정 가운데 자신은 이 정도는 아니라는 느낌을 넌지시 보이면서 자신을 위안하려고 합니다.  주님께서 저에게도 직접 말씀만 해 주시면 이렇게 살지는 않을 것이라고 확신합니다.
 
그러나 여러분, 잠시 마음을 정돈하고 주님이 무엇이라 말씀하실는지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주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지 않을까요?
"내가 말씀을 다 주지 않았는가?  기록까지 해서 순간마다 읽을 수 있도록 다 주었는데.  말씀뿐 아니라 이제는 내가 아들을 보내지 않았는가?  아들을 눈으로 볼 수 있도록 세상에 보내고 그를 말씀을 통해 만나게 하지 않았는가?"

문제는 말씀하지 않는 하나님이 아니라 말씀을 듣지 않는 내가 문제입니다.  오늘도 말씀을 통해 나에게 다가오시는 주님을 사모하지 않는 것이 문제입니다.  지금도 잃어버린 영혼을 향해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기도하시는 성령님의 음성에 귀를 기울이지 못하는 나의 어두운 영이 문제입니다.  나를 찾아오실 때 주님의 얼굴빛을 피하는 나의 죄성이 문제일 뿐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말씀을 읽을 때마다 말씀하시는 하나님을 날마다 만나시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이 말씀하실 때 들을 수 있는 귀를 여시기를 바랍니다.  말씀하시면 즉시로 순종하시는 하나님의 사람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오주철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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