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

  • 목록
  • 아래로
  • 위로
  • 쓰기
  • 검색

설교 다른 복음은 없나니 (갈 1:6~10)

  • 잡초 잡초
  • 449
  • 0

첨부 1


다른 복음은 없나니 (갈 1:6~10) 
 
일반적으로 바울은 인사말을 한 후에 수신 교회의 성도들에게 있어서 칭찬할 점을 언급하여 격려하거나 하나님께 감사를 돌립니다. 하지만 갈라디아서는 모든 것을 생략하고 곧바로 주제로 돌진합니다. 

갈라디아 성도들을 향한 바울의 헬라어 첫 마디는 ‘다우마조’ 곧, “내가 이상히 여기노라”입니다. 기이할 정도의 놀라움과 함께 고통스런 슬픔을 표현하는 단어입니다. 갈라디아 성도들은 바울이 전한 십자가 복음을 기쁨으로 영접했을 것입니다. 눈물을 흘리며 감격하는 사람도 있었을 것이고, 일평생 주님을 위해 살겠노라 다짐하는 사람도 있었겠지요. 그랬던 그들이 갑자기 무엇에 홀리기라도 한 것처럼 이상하게 변했습니다. 오늘날도 마귀의 세력이 역사하면 기이할 정도로 신속하게 복음을 버리는 일들이 일어납니다. 우리의 마음에 고통스런 슬픔을 가져오는 그러한 일들이 오늘날에도 여전히 일어나고 있습니다.

“이처럼 속히”라는 말은 신속하다는 의미 외에도 너무 경솔하다는 의미가 있습니다. 바울이 전한 복음과는 다른 사상을 접한 갈라디아 교인들은 한 순간에 그들의 입장을 바꾸어버렸습니다. “떠나”다는 헬라어 ‘메타티데스데’는 탈영하거나 탈당할 때 사용했던 단어로서 ‘변절했다’는 뜻입니다. 충성의 대상을 바꾸었다는 의미지요. 바울이 판단할 때, 갈라디아 교인들은 불건전한 사상을 받아들인 게 아니라 기독교 진영을 완전히 이탈하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단지 종교적 취향을 바꾼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떠나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그리스도의 은혜에 대해 배은망덕한 태도를 취하고 있었습니다. 바울은 마치 담을 넘고 있는 탈영병들을 발견한 지휘관처럼, 그들이 당장 멈추고 즉시 돌아서도록 하려고 상당히 격렬한 언어들을 사용합니다.

“다른 복음은 없나니 다만 어떤 사람들이 너희를 요란케 하여 그리스도의 복음을 변하려 함이라”(7) 바울은 6절에서 ‘다른 복음’이라는 용어를 사용했지만, 오해하지 않도록 하기 위해 다른 복음이란 없다는 것을 분명히 밝힙니다. 헬라어 성경에는 ‘복음’이라는 단어조차 사용하지 않고 ‘다른’은 없다고 싹 무시했습니다. 복음은 유일한 것이며 그 명칭을 붙일 수 있는 것은 오직 “그리스도의 복음” 뿐입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들”이 그 복음을 “변하”게 하고 있었습니다. 변하게 한다는 말은 혁명이나 전복의 행위들을 뜻하는 정치적 배경을 가진 용어입니다. “요란케” 한다는 것 역시 정치적 배경을 가진 단어인데 선동하고 부추겨서 혼란과 소용돌이를 일으키는 것을 의미합니다. 

7절에서 “어떤 사람들”이란 유대주의적인 거짓 교사들을 지칭하는 것으로 보입니다. 그들이 돌아다니며 전했던 사상의 핵심은 사도행전 15장 1절에 잘 요약되어 있습니다. “어떤 사람들이 유대로부터 내려와서 형제들을 가르치되 너희가 모세의 법대로 할례를 받지 아니하면 능히 구원을 얻지 못하리라 하니.” 그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버리라고 말하지 않았습니다. 그들 역시 바울의 복음처럼 구원을 위해서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야 한다고 가르쳤습니다. 그런데 바울은 사도가 아니어서 중요한 것을 빼먹었다고 말했습니다. 예수님을 믿어도 모세의 법대로 할례를 받아야만 구원을 얻는다고 부추겼습니다. 그것이 복음이라고 설명했습니다. 갈라디아 교회에 침투한 거짓교사들은 그러한 꼬드김으로 바울이 가르친 “그리스도의 복음”을 완전히 뒤집어엎어버렸습니다. 거짓 복음으로 갈라디아 교회에 혼란과 소용돌이가 일어나게 했습니다.

구원이 ‘오직 그리스도’만으로 충분하냐 아니면 뭔가 덧붙어져야 하느냐의 문제는 오늘날도 여전히 있습니다. 어떤 이들은 예수님을 믿어도 안식일을 지켜야 구원을 얻는다고 말합니다. 어떤 이들은 유월절도 지켜야 구원을 얻는다고 말합니다. 어떤 이들은 전도를 일정 분량만큼 해야만 구원을 얻는다고 가르칩니다. 좀 더 교묘하게는 예수님을 믿어도 구원의 확신이 없으면 아직 구원을 얻은 것이 아니라고 혼란을 줍니다. 구원을 위해서 예수님을 믿어야 한다는 것을 부인하지는 않지만 뭔가 좀 더 해야 한다고 합니다. 그러한 가르침들은 그리스도의 은혜를 짓밟고 복음을 완전히 뒤집어엎는 가르침들입니다. ‘오직 그리스도’에서 ‘그리스도와 무엇’으로 조금 바꾼 것 같지만 사실은 본질을 바꾼 것입니다. 겉보기에 이단은 꼬리만 다른 것처럼 보일지라도 사실은 본질이 다릅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운명하시기 전에 ‘다 이루었다’고 선언하셨습니다. 예수님을 통해 구속역사는 성취되었습니다. 그리고 그분께서 완성하신 그 공로의 효력을 우리에게 값없이 은혜로 주셨습니다. 이 때문에 구원은 ‘오직 은혜’로 얻습니다. 그것이 “그리스도의 복음”입니다. 하지만 어떤 이단들은 예수께서 ‘못다 이루고’ 실패하신 분처럼 가르쳤습니다. 그래서 교주가 실패한 그것을 다시 이루기 위해서 왔다고 미혹했습니다. 다른 어떤 이단들은 좀 더 교묘하게 예수님은 ‘거의 이루었다’고 했습니다. 그 미완성의 부분을 인간이 보완해야만 한다고 했습니다. 그러한 이론들 중에는 예수께서 다 이루셨어도 우리가 그분을 영접하는 것, 곧 ‘믿는 행위’가 있어야 구원을 얻는다는 주장도 있습니다. 그렇게 가르침으로써 ‘오직 은혜’로 말미암는 구원을 ‘은혜와 행위’로, ‘오직 그리스도’를 ‘그리스도와 인간의 협력’으로 바꾸어버립니다.

마귀의 세력은 사람으로 도덕적인 부패에 떨어지게 하기도 하지만, 더 악질적으로는 그리스도의 복음을 훼손시키는 방법을 사용합니다. 도덕적 부패는 쉽게 간파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복음의 교묘한 훼손은 분별력이 없으면 신속하게 변질됩니다. 역사에 있어서 교회를 가장 심각하게 무너뜨렸던 것은 도덕적 부패가 아니라 복음을 훼손한 교리였습니다. 초대교회 때나 지금이나, 교회를 가장 심각하게 위협하는 것은 교회 밖에서 핍박하거나 조롱하는 세력이 아닙니다. 오히려 교회 안에 포진하고 있으면서 복음을 인간의 구미에 맞게 살짝 바꿔놓으려는 세력입니다. 이미 이단으로 판명된 단체보다 더 교회에 위협을 가하는 것은 정통처럼 받아들여지지만 복음을 왜곡한 교회 안의 세력들입니다.

교회 안에 침투한 반 복음적인 사상의 유포자들에 대해서 바울은 어떤 자세를 취합니까? 8절을 보십시오. “그러나 우리나 혹 하늘로부터 온 천사라도 우리가 너희에게 전한 복음 외에 다른 복음을 전하면 저주를 받을지어다” 바울은 저주를 선언합니다. “저주를 받을지어다”는 말씀은 ‘하나님의 진노의 심판에 따라 진멸시키다’는 뜻을 지닌 히브리어 ‘하람’과 유사합니다. 하람은 철저하게 진멸하고 전멸시키는 의미입니다. 무시무시할 정도로 강력한 단어이지요. 하지만 바울의 저주 선언은 복음을 훼손한 자들에 대한 감정적 분노가 아닙니다. 단지 원칙을 선언한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그 저주의 범위에 당시 거짓 교사들뿐만 아니라 “우리”와 “하늘로부터 온 천사”까지도 기꺼이 포함시킵니다.

바울은 이러한 원칙에 근거해서 자신이 이전과 다른 말을 하고 있는 것이 아님을 밝힙니다. “우리가 전에 말하였거니와 내가 지금 다시 말하노니 만일 누구든지 너희의 받은 것 외에 다른 복음을 전하면 저주를 받을지어다”(9). 바울은 “다른 복음을 전하면 저주를 받을지어다”라는 선언이 “누구든지”에게나 해당하고 있음을 다시 한 번 쇄기를 박듯이 말합니다.

지난 강의에서 우리는 ‘사도’가 전했기 때문에 그가 전한 메시지가 중요하다는 것을 생각했었습니다. ‘누가’ 말했느냐에 따라 권위가 달라지기 때문에 바울은 자신의 사도권을 옹호하기 위해 힘썼습니다. 성도 역시 ‘그리스도’께서 말씀하셨기에 그분의 모든 말씀을 중히 여기는 사람입니다. ‘그리스도’께서 말씀하시고 행하신 것이라면 아무리 사소한 것일지라도 계시로서의 큰 의미가 있다고 받아들입니다. 그것은 성도로서 매우 합당한 태도입니다. 그런데 이제 그리스도의 복음은 완성되었습니다. 따라서 그 복음으로 존재가 평가되어야 하며, 어떤 존재에 의해서 복음이 평가되어서는 안 됩니다. 

“그리스도의 복음”이 주어진 상황에서는 누구든지 그가 전하는 ‘메시지의 내용’을 그리스도의 복음과 비교해보고 그 존재를 평가하는 것이 원칙입니다. ‘그리스도의 복음’이란 그리스도께서 계시하신 복음이면서 그리스도께서 핵심이며 본질인 복음입니다. 만일 메시지의 내용에 사도를 통해 전해진 ‘그리스도의 복음’ 외에 다른 어떤 것이 덧붙여지거나 제외되었다면 그는 ‘거짓 복음’을 전하는 자입니다. ‘거짓 복음’을 전했다면 그가 “누구든지” 저주를 받아 마땅합니다. 오늘날도 사도들을 통해 전해진 복음과 위배된다면, 그가 누구든지 그 메시지는 단호히 거부되어야 하고 그는 저주를 받아 마땅합니다.

바울은 이제 비방 받고 있는 한 가지 문제에 대해서 입장을 밝힙니다. 10절을 보십시오. “이제 내가 사람들에게 기쁨을 구하랴 내가 지금까지 사람의 기쁨을 구하는 것이었더면 그리스도의 종이 아니니라” 사람들을 기쁘게 함으로써 설득하는 것은 고대 사회에서 정치적 웅변과 선동 전략의 주요한 방법이었습니다. 갈라디아의 거짓 교사들은 바울이 이처럼 사람들을 기쁘게 하려는 사람이라고 비방했던 것 같습니다. 하지만 바울은 언제나 “그리스도의 종”으로서 행했습니다. 

할례 문제에 있어서 바울은 마치 사람들에게 기쁨을 구하기 위해 일관성 없이 행동한 것처럼 보일 수 있습니다. 디모데는 할례를 하게 했고 디도는 할례를 하지 못하게 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바울은 그리스도의 종으로서 일관된 원칙 하에서 행했습니다. 할례가 유대인들에게는 문화적 관습이기도 했기 때문에, 바울은 어머니가 유대인이었던 디모데에게 할례를 허용 했습니다. 하지만 이방인이었던 디도에게는 유대인의 관습인 할례를 억지로 받지 않도록 했습니다. 바울은 할례가 구원의 한 요소로 인식될 위험이 있을 때는 언제나 단호하게 반대했습니다. 바울은 언제나 ‘하나님의 영광’과 “그 이름”을 먼저 생각했고(롬 1:5), “복음을 위하여”(고전 9:23) 그리고 “서로 덕을 세우는”(롬 14:19) 일을 위하여 행했던 그리스도의 종이었습니다.

참된 신앙은 무조건 믿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복음을 명확히 분별하고 믿는 신앙입니다. ‘오직 성경’ ‘오직 은혜’ ‘오직 믿음’ ‘오직 그리스도’ ‘오직 하나님께 영광’이 사도를 통해 전해진 참 복음입니다. 거짓 복음들이 난무하는 세상에서 그리스도의 복음을 분명히 붙들 수 있기를 바랍니다.

이런 글도 찾아보세요!

공유

facebooktwitterpinterestbandkakao story
퍼머링크

댓글 0

권한이 없습니다. 로그인

신고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신고 하시겠습니까?

삭제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삭제하시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