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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새롭고도 급박한 관심사 (행 16:22~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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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롭고도 급박한 관심사 (행 16:22~34)
      
  저는 지난 주 중국에서 일어난 지진에 대한 TV보도를 보면서 한순간 신앙에 대해서 의심을 가졌습니다. 의심이 제 머리를 스치고 지나갔습니다. 지진 피해자들에게는 아비규환이 따로 없었다는 보도였습니다. 아비규환이라는 말은 지옥이라는 뜻입니다. 그렇다면 수많은 사람들이 지옥과 같은 재난을 만나서 죽었다는 얘기인데 그들이 저 세상에 가서도 예수님을 믿지 않는다는 이유로 지옥에 간다는 얘기일까, 이 땅에서 지옥 같은 환경에서 죽었는데 저 세상에서도 지옥에 가야된다면 하나님이 좀 너무하지 않는가 하는 생각이 제 머리를 스치고 지나갔습니다. 저도 그런 생각을 할 때가 있습니다. 여러분은 어떠십니까? 

  그러다가 며칠 후에 차를 타고 가다가 오디오 성경을 듣고 있었는데 ‘애굽에 있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고역으로 부르짖는 소리가 하나님에게 상달했다’라는 구절을 듣는 순간 깨달음을 얻었습니다. 평소에는 조용하고 침묵하는 것처럼 보이는 하나님이 사람들이 고통 중에 부르짖는 소리를 들으시고 응답하신다는 말씀으로 깨달았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오히려 이 지진과 같은 아비규환과 같은 재난 중에 부르짖는 사람들의 소리를 들으시고 그들을 권념하시는 하나님이시겠구나, 하나님이 그들 편이시겠구나 이런 생각을 하면서 저의 의심을 스스로 해결할 수 있었습니다. 누가 해줄 사람이 없으니 제가 스스로 해야지요. 도리가 없습니다. 

  사람이 하나님에 대하여 의심을 갖는 이유는 충분히 알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불충분하게 알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하나님에 대하여, 성경에 대하여, 인간의 삶과 경험에 대하여, 과학에 대하여, 고고학에 대하여, 역사에 대하여, 인류학에 대하여 불충분하게 알기 때문에 하나님을 의심하고 성경을 의심하는 것입니다. 오히려 충분하게 알면 성경을 신뢰할 수 있습니다. 과학에 대하여 충분히 알면 오히려 하나님을 신뢰합니다. 그러나 불충분하게 알고 보니까 부분적으로 알다 보니까 별의 별 의심을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경말씀에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 진리를 알아야 진리의 능력을 경험할 수 있지, 진리를 모르면 그 진리가 나에게 자유함을 주지 못하는 것입니다. 또 성경말씀에 ‘내 백성이 지식이 없으므로 망하는도다’ 했습니다. 

  성경에 대한 지식도 마찬가지에요. 성경을 부분적으로 알기 때문에 왜곡하는 것입니다. 마귀가 예수님을 시험할 때 예수님이 성경말씀을 인용했더니 마귀가 성경을 인용하면서 예수님을 시험하지 않았습니까? 그래서 시편 91편에 있는 말씀을 인용하면서 예수님에게 성전 꼭대기에서 뛰어내리라고 유혹한 것입니다. 

  교황 베네딕트가 이 구절을 해석할 때 마귀의 시험은 신학적으로 온다고 말했습니다. 신학적인 토론의 형태로써 마귀의 시험이 올 수 있다고 말했는데 마귀가 성경을 인용해서 사람을 유혹한다면 우리가 시험을 이기기 위해서는 마귀보다 성경을 더 잘 알아야 되지 않겠습니까. 그리고 우리의 성경적인 지식이 불충분하다면 오히려 시험에 들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오래전 영국의 학자인 C. S 루이스의 책을 읽는 중에 놀라운 구절을 읽은 기억이 있습니다. 그때까지 그런 글을 읽어본 적이 없었습니다. C. S 루이스가 그 책을 쓸 때 영국은 일차대전을 겪고 있었습니다. 많은 젊은이들이 100m의 땅을 확보하기 위하여 의미 없이 죽어갔습니다. 하루에 몇 만 명씩 죽는 일이 비일비재했습니다. 왜 하나님이 이런 일을 허락하실까? 이 문제에 대해서 C. S 루이스가 몇 구절을 적은 책이었습니다. C. S 루이스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죽음 앞에서 그 젊은 군인들이 평소에는 생각하지 않을 것을 생각하게 된다. 그게 바로 영혼에 대한 것이다. 영혼의 운명에 대해서 내가 죽은 다음에 어떻게 될까를 생각한다. 만일 전쟁이 없어서 이 젊은이들이 전쟁터에 나갈 일이 없었다면 그들은 인생과 젊음을 어떻게 즐길까 만을 생각했을 것이다. 그러나 전쟁이라는 재앙이 이 젊은이들을 죽음의 현실 앞에 끌고 나왔고 죽음의 현실 앞에서 이들은 영혼이라는 것을 생각할 수밖에 없고 영혼의 운명을 생각할 수밖에 없게 되었고 평화 시에는 도저히 하나님을 생각하지 않을 사람들이 하나님을 진지하게 생각하게 되기 때문에 결국 평화 시보다는 이런 환란 중에 천국 가는 사람들이 더 많아지게 된다.’ 

  이런 내용이었습니다. 저는 그 책을 읽기 전까지는 그런 말을 들어본 적이 없었습니다. 그런 식으로 생각을 해 본 적이 없었습니다. 제가 나름대로 예수님을 잘 믿는다고 생각했음에도 불구하고 그런 생각을 해 본적이 없습니다. 

  여러분, 하나님의 최고의 관심사가 어디에 있는지 아십니까? 하나님의 관심사는 우리의 영혼을 구원하는 데 있습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최고의 관심사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성경에 나타나는 이스라엘 민족의 역사, 교회의 역사를 구속사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인류의 역사 속에 나타나는 하나님의 구원의 섭리의 기록이라는 얘기입니다. 아마도 중국 정부의 최대 관심사는 올림픽을 성공적으로 치르는 것일 것입니다. 그리고 중국 인민들의 최고의 관심사는 주가가 올라가고 경제가 발전하고 돈을 벌고 잘 사는 것일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관심사는 올림픽도 아니고 돈 버는 것도 아니고 영혼을 구원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올림픽을 앞두고 재앙이 겹쳐서 일어나는 것입니다. 사실 올림픽은 하나님에게 별로 중요하지 않습니다. 아무렴 어떻습니까. 정부에게는 중요하지요. 그 국민들에게는 중요할지 모르지만 그러나 하나님의 관심사는 다른 데 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도 마찬가지 아니겠습니까. 중국 정부가 올림픽에 목을 매는 것처럼 우리도 뭔가 남들에게 잘 보이고, 우리의 체면과 또 우리의 명예와 이런 것을 생각하고, 염려하고, 잘 해야지, 성공적으로 해야지 라고 생각하는 일들이 다들 분명히 있을 것입니다. 그걸 무시하는 게 아니에요. 그것도 다 이유가 있고 좋은 뜻이 있지요. 그러나 구속사적인 관점에서 보면 올림픽이든 영광이든 명예든 이런 것은 잠시 있다가 지나가고 잊혀지면 그만입니다. 그것은 다 잊혀집니다. 

  과학자들이 과거 문명의 그 흔적을 찾을 때 무엇을 파헤쳐서 찾습니까? 흙을 파헤쳐서 옛날의 성터를 찾고 오늘 아침에도 인터넷 뉴스를 보니까 동대문 운동장 터에 조선시대의 건물 흔적이 있다고 했는데 그건 과거의 문명의 흔적이 흙 속에 묻혀 있다는 얘기입니다. 과거에는 큰 도시였을 수 있습니다. 과거의 영광스러운 문명의 흔적이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세월이 지나가면서, 세월도 수만 년 까지도 필요 없어요. 몇 백 년 만 지나가니까 그게 흙 속에 묻히고 아무도 기억하는 사람이 없습니다. 아무도 그것을 기억하지 못하고 잊혀진 존재가 돼 버리고 마는 것입니다. 

  이집트의 피라미드에 새겨진 상형문자를 다 보셨을 것입니다. 그림으로 된 눈동자 같은 글씨도 있고 주로 사람이 옆을 보고 있지요. 한 사람도 정면을 보고 있는 그림을 본 적이 없습니다. 그런데 그 상형문자를 이집트의 후손들이 읽지를 못했습니다. 자기 조상들이 기록한 글자를 후손들이 읽지를 못했어요. 그 글자에 대한 지식이 상실됐어요. 그래서 수천 년이 지난 후에 프랑스의 한 학자가 그것을 해독했습니다. 

  어떻게 보면 이집트의 후손이 아닌 다른 나라 사람이 그것을 해독했다는 것이 좀 부끄러운 일이지만 그러나 당시 상황은 이랬을 것이라고 추측됩니다. 그 상형문자를 처음 썼을 때 글을 읽을 줄 아는 사람이 극소수에 불과했고 대다수의 사람들은 문맹이었고 그리고 글을 읽을 줄 아는 몇 사람이 죽고 난 다음에는 더 이상 그 문명의 기록을 기억할 수 없게 됐다는 얘기입니다. 이것이 인간의 영광의 운명이에요. 그게 오래가지 못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정말로 중요한 것, 적어도 하나님의 관점에서 하나님은 우리의 삶을 보실 때 무엇을 중요하게 여기시느냐 그것을 우리가 깨닫지 못하면 우리 삶에 일어나는 일이든 나라와 인류의 역사에 일어나는 일에 대하여 결코 그 목적이든 이유를 깨닫지 못할 것이고 하나님의 손길을 발견하지 못할 것이고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을 깨달을 수가 없을 것입니다. 그것을 아는 것이 열쇠입니다. 

  평소에 신앙에 대해서 전혀 관심이 없고 또 관심이 있을 것 같지도 않은 사람이 어떻게 하면 신앙에 대해서 마음을 여느냐? 도저히 그런 일이 생길 것처럼 보이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그런 일이 생기는 것을 보지 않습니까. 그 대답이 뭔지 아세요? 죽음이라는 현실 앞에서는 그것이 반드시 본인의 죽음이 아니더라도 죽음이라는 그 현실 앞에서 오늘 본문에 나오는 이 빌립보 간수와 같습니다. 이 사람은 이방인이고 남자이고 평소에 죄수를 다루기 때문에 거친 남자입니다. 

 이런 사람이 어떻게 해서 바울과 실라 앞에 와서 떨면서 무릎을 꿇고 ‘선생이여’라고 높이면서 ‘내가 어떻게 하여야 구원을 받을 수 있으리이까’하고 묻게 되었느냐는 것입니다. 무엇이, 이 이방인 남자, 거친 사람, 평소에 신앙에 대해서 관심이 없을 사람이 두려워 떨면서 무릎을 꿇고 선생들이여 내가 어떻게 하여야 구원을 얻을 수 있습니까 라고 묻게 만들었습니까? 바로 죽음의 현실입니다. 본인이 자살을 하려고 했습니다. 지진이 일어나서 -제가 원래 지진이라는 단어가 있는 구절을 찾아서 설교하려고 한 게 아닌데 성경 구절을 정하다 보니까 지진이 나오더라고요.- 그런데  옥문이 다 열렸어요. 이 간수가 자다가 깨어보니까 옥문이 다 열려 있어요. 그래서 죄수들이 다 도망갔겠구나, 이 사실이 알려지면 나는 분명히 죽을 텐데 그럴 바에야 내 손에 죽자, 하고 칼을 꺼내서 자살을 하려고 하는데 바울이 그것을 보고 큰 소리로 ‘당신의 몸을 상하게 말라. 우리가 여기 있다!’ 얼마나 고맙습니까. 얼마나 고마워요. 

  만약 그때 바울이 얼씨구나 좋다 하고 도망갔다면 그 간수는 자살해서 죽었을 것입니다마는 바울은 남의 재앙을 이용해서 자기가 도망하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여기에 그의 인격이 있습니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사람들이 듣는 앞에서 찬송하고 기도하던 양반이 옥문이 열렸다고 얼씨구나 좋다고 도망가면 그 전까지 바울과 실라의 찬송과 기도를 듣던 사람들은 ‘캬~~ 예수쟁이들, 입으로만 믿지 행동으로는 우리와 조금도 나을 것이 없구나.’ 이렇게 시험에 들텐데 바울이 옥문이 열렸음에도 불구하고 도망가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그런 식으로 비겁하게 감옥을 나가는 게 아니고 당국의 사과를 받고 떳떳하게 나갈 수 있다는 사실을 알았기 때문에. 그 다음날 해 밝을 때까지만 기다리면 됩니다. 그런데 그걸 못기다리고 지진이 일어났다고 옥문이 열렸다고 몰래 도망갑니까. 그럼 본인은 좋겠지만 간수는 죽어야 됩니다. 그 사실을 바울이 알고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간수가 칼을 꺼내서 자살하려고 할 때 바울이 큰 소리로 뭐라고 말하느냐면 ‘네 몸을 상하지 말라’ 반드시 칼로 자기를 찔러야만 자기 몸을 상하게 하는 게 아닙니다. 

  사람들 중에는 자기 자신을 학대하는 사람들이 많아요. 자기를 은근히 미워하고 학대하는 사람이 많고 자기 몸을 상하게 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마약을 통해서라든가 자기 몸을 함부로 굴린다든가 이런 식으로 자기 몸을 스스로 상하게 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는데 우리의 몸은 성령의 전이에요. 우리의 몸은 우리의 것이 아니기 때문에 함부로 상하게 하면 안되고 귀중하게 여겨야 됩니다. 할렐루야! 

  그래서 이제 기독교의 미래는 어떻게 될 것이냐? 기독교의 미래라 함은 교회의 미래와도 연결이 되고 예수님의 복음의 미래와도 연결이 됩니다. 사회가 점점 더 세속화 되면서 사람들은 기독교에 대하여 관심을 점점 잃게 될 것일까? 

  제가 어느 다큐멘터리를 보니까 어느 미국사람이 문화의 변화에 대해서 논하면서 다음과 같은 주장을 하는 것을 들었습니다. ‘세상에 남아 있는 게 뭐가 있느냐. 가정도 무너졌고, 사회도 무너졌고 하나님도 죽었다. 남아 있는 것은 나밖에 없다. 이제 사람들은 나를 위해서 산다.’ 본인은 그 말이 새삼스러운 진리라고 생각하는지 모르지만 나 중심적으로 살려는 유혹은 인류의 역사만큼 깁니다. 

  에덴동산에서 뱀이 하와를 시험할 때 뭐라고 시험했느냐면 ‘네가 이 열매를 먹으면 눈이 밝아지고 하나님처럼 지혜로워져서 하나님처럼 된다.’ 이렇게 유혹했습니다. 나 중심적으로 살려고 한 그런 유혹은 처음부터 있었던 것입니다. 새로운 것이 아니에요. 인류는 처음부터 하나님으로부터 도망가려고 했어요. 하나님을 위하는 마음이 애초부터 사람에게 없었어요. 그러한 인간이 하나님을 생각하고 자기 구원에 진지하게 고민하게 만드는 것이 무엇이냐? 고난이라는 것이고 죽음이라는 현실입니다. 그 앞에서 사람이 자기가 평소에 생각하던 것들이 얼마나 별 볼일 없는 하찮은 것인가를 깨닫게 되고 영혼에 대해서 영혼의 미래에 대해서 생각할 수밖에 없고 그리고 결국은 하나님에게 부르짖을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 나오는 간수처럼 ‘내가 어떻게 하여야 구원을 얻을 수 있겠습니까’ 구원의 문제에 대해서 생각하게 됩니다. 그리고 그것도 두려움과 떨림, 절박함, 부르짖음으로. 이 간수는 아주 모범적인 사례입니다. 구원에 대해서 묻는 사람은 다 이런 식으로 나와야 됩니다. 두려움과 떨림, 또 부복함, 그 말은 자신을 낮춘다는 말입니다. 자신을 낮추면서 구원에 대해서 진지하게 묻는 것, 이것이 정상입니다. 이것이 바로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질문에 대하여 하나님은 아주 명백하고 분명한 대답을 제시하십니다. ‘주 예수를 믿으라 그리하면 너와 제 집이 구원을 얻으리라’ 할렐루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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