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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로마서 8:31절 이하의 주인공이 되려면 (롬 8: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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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서 8:31절 이하의 주인공이 되려면 (롬 8:30)

합수머리라는 단어를 아십니까?
두 개의 강물 줄기가 각기 흐르다가 어느 한 곳에서 합쳐져 같은 강으로 흐르는 부분을 지칭하는 단어입니다.

제가 파주에서 시무할 때 임진강과 한탄강이 합쳐지는 부분에서 남전도회 회원들과 낚시를 함께 즐겼던 추억이 있었는데 그 때 그 합수머리의 부분은 장관을 연출했던 기억이 있습니다.

어떤 신학자가 이런 말을 했습니다.
“성경전체에 흐르던 여러 갈래의 강물이 로마서 8장에 합수머리에서 하나로 합쳐져서 생명수를 이룸으로 하나님 어린 양의 보좌 앞에 깔린 수정처럼 맑게 흐르고 있다.” 

이 표현은 로마서 8장의 내용을 이주 시적으로 그러나 정말로 설득력이 있는 내용을 함축적으로 표현하고 있는 것 같아서 저 역시 동의하고 싶습니다.

어떤 신학자는 또 다른 표현으로 로마서 8장을 표현했습니다.
“우리가 성경을 한 보석 반지로 예를 들어 설명한다면 로마서는 그 반지의 가장 중앙이고 그 중에서도 로마서 8장은 가장 빛나는 부분일 것이다.”

또 어떤 사람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성경의 모든 부분이 불에 타 없어진다 하더라도 로마서 8장만 있으면 우리는 구원을 받는 데에 지장이 없을 것이다.”

일련의 이러한 표현은 아마도 로마서 8장의 중요성을 내포하는 표현들일 것입니다.

여러분의 담임목사도 이러한 로마서 8장의 중요성을 알기에 저는 지금 로마서 8장을 가지고 무려 6번째의 강해를 주일 낮 예배를 통해 우리 교우들과 함께 나누고 있습니다.

그런데 로마서 8장의 내용이 그렇게 아름답고 귀하지만 개인적으로 우리 교우들에게 강해 설교를 통해서는 말씀 드리기 쉽지 않은 부분이 있습니다.

그것이 바로 오늘 본문으로 읽은 단 한 절의 말씀입니다.
롬 8:30절입니다.

“또 미리 정하신 그들을 또한 부르시고 부르신 그들을 또한 의롭다 하시고 의롭다 하신 그들을 또한 영화롭게 하셨느니라”

왜 이 말씀이 저에게 개인적으로 곤혹스러운 말씀일까?
그것은 이 말씀이 우리 성결교회의 교리와는 아주 극단적으로 상반되는 구절이기 때문입니다.
다른 표현으로 말씀을 드리면 이 구절은 오랜 동안 '예정론'을 주장하고 있는 유럽의 개혁교회의 전통에 서 있는 장로교회의 교리적인 근간을 이루는 대표적인 구절이기 때문입니다.

이 구절에서 말하는 개혁교회의 입장을 단순화시키면 이렇습니다.
“하나님은 구원받을 수 있는 대상을 하나님의 주권으로 예정하셔서 그를 부르신다. 그리고 부르신 그를 의롭다고 인정하시고 그를 결국에는 견인하셔서 영화롭게 하심으로 최종적으로 구원해 주신다.” 

아주 전통적이고 고정관념화 된 예정론입니다.
구원을 받은 대상으로 예정된 자들에게는 열광적으로 아멘할 수 있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그 반대에 대하여서는 아무런 말이 없습니다.

대중 설교를 통하여 교리 설교를 하는 것은 위험한 일이고 또 짧은 설교 시간을 통하여 이것을 이해한다는 것은 불가능하기 때문에 이 구절에 대한 설교를 접을까 하다가 다음 주에 여러 교우들과 나누어야 하는 로마서 8:31절 이하의 말씀과는 뗄 래야 뗄 수 없는 직결되는 말씀이기에 용기를 갖고 교리적인 내용이 아닌 교훈적인 내용에 한정하여 말씀을 선포하려고 합니다.

본론)  

오늘 본문에서 바울은 구원의 단계를 4가지로 구분하였습니다.
오늘 본문 롬 8:30절을 다시 봅니다.
“또 미리 정하신 그들을 또한 부르시고 부르신 그들을 또한 의롭다 하시고 의롭다 하신 그들을 또한 영화롭게 하셨느니라”
  
본문 30절의 말씀대로 구원의 순서를 말한다면 아마도 이렇게 요약이 될 수 있을 것입니다.

① 예정입니다. (정하신 - Predestination)
② 소명입니다. (부르시고 - Calling)
③ 칭의입니다. (의롭다 하시고 - Justification)
④ 영화입니다. (영화롭게 하셨느니라 - Glorification)

저는 개인적으로 신학의 기초에 있어서 하나님의 절대예정을 믿는 사람이 아니기에 본문에 ‘미리 정하신’이라는 문맥에 있어서 하나님의 무조건적인 예정을 말하는 칼빈의 입장에 있지 않고 오히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는 조건을 전제한 알미니우스의 조건적인 구원을 믿는 사람이기에 통상적으로 이해하는 칼빈적인 무조건적인 예정을 인정하지 않습니다.  

여기에서 우리는 신학자들이 일반적으로 말하는 구원의 단계를 한 번 상식적으로 짚고 넘어갈 필요가 있다고 보아 소개를 하려고 합니다.

지금 말씀을 드리는 구원의 단계 역시 신학적으로 많은 논쟁의 거리가 있지만 복음주의 계통의 신학자들이 통상적으로 말하는 구원의 10단계는 일반적으로 이렇게 구분합니다.

개혁교회의 입장입니다.
① 예지 ② 예정 ③ 부르심 ④ 중생 ⑤ 회심 ⑥ 칭의 ⑦ 양자됨 ⑧ 성화 ⑨ 견인 ⑩ 영화

오늘 본문에서는 바울이 이 10단계의 구원의 사닥다리 중에서 4가지로 표현한 것이라고 이해를 하면 우리 교우들에게 이해의 폭이 넓어 질 것입니다.

이에 반하여 우리 성결교회가 따르고 있는 웨슬레안적인 입장도 다루어야 할 것 같습니다.
웨슬레는 구원의 단계를 성화의 단계로 나누었습니다.

① 관계적인 성화입니다. 
이 말은 거룩하신 하나님과 관계를 맺었기 때문에 믿음으로 죄인이 거룩해 지는 것을 말합니다. 이것을 우리는 신학적으로 ‘칭의’라고 합니다.

② 초기의 성화입니다.
초기의 성화를 가르쳐서 이른바 ‘중생’ 혹은 ‘양자됨’이라고 부릅니다.

사실은 의인과는 동전의 양면과도 같은 것인데 시간적ㅇ로 구분하여 이렇게 부르고 있습니다. 죄를 용서받은 자가 이제는 영적인 생활을 시작하는 단계라고 보면 좋을 것 같습니다.

③ 점진적인 성화입니다.
이미 구원을 받은 의인도 주 안에서 성장하는 과정을 거쳐야 합니다. 그래서 자라는 과정을 말 할 때 이것을 점진적인 성화라고 합니다.
이것은 개혁교회의 신학적인 입장에서 표현한다면 말 그대로 성회의 단계일 것입니다.

④ 온전한 성화입니다.
이 말은 이미 예수를 믿어 중생한 자가 두 번째의 하나님의 은총을 경험하여 죄를 짓지 않게 되는 은총의 단계를 말합니다.

개혁교회의 예정론자들은 이 땅에서의 온전한 성화를 인정하지 않았지만 웨슬레는 자신의 올더스케익의 체험을 근거로 하여 하나님이 주시는 두 번째의 은총을 경험한 자는 이웃을 사랑하고 죄와는 멀어지는 온전한 성화를 경험하게 된다고 주장했습니다. 그래서 이 단계를 기독자 완전이라는 단어로 사용하기도 합니다.
  
⑤ 영화의 단계입니다.
현세에서의 완전한 자라도 끝이 아니기에 계속해서 성장해야 합니다. 이렇게 계속하여 온전한 성화를 경험한 자가 성장하는 과정을 영화라고 부릅니다.

어찌 보면 영화의 단계는 구원의 초기적인 단계에 있어서의 방법론의 차이를 제외하고 장로교회나 성결교회 할 것 없이 함께 공유하는 은혜입니다. 

다시 말하면 영화의 단계는 구원을 받은 백성들의 최고의 단계라는 말입니다.
이상의 신학적인 설명이 어떻습니까?
재미 있습니까?
재미 없습니다.
왜냐하면 무슨 말인지 잘 모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저는 오늘 설교를 통하여 신학적인 구원의 단계를 말하는 그런 어려운 말 말고 단 한 가지에 집중하려고 합니다.
무엇입니까?
영화롭게 한다는 바울이 오늘 말한 본문의 마지막 단어입니다.   

구원의 단계 중에 맨 마지막 단계가 무엇입니까?
본문 30절의 마지막 분분에서 바울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영화롭게 하셨느니라”

그렇습니다.
영화롭게 되는 것입니다.  

바울은 성도가 구원을 받아 영화롭게 되는 것이 최종적인 구원의 단계임을 선포합니다.
이렇게 구원의 최종적인 단계가 영화임을 선포한 뒤에 로마서 8:31절을 어떻게 이어지고 있습니까?

롬 8:31절입니다.
“그런즉 이 일에 대하여 우리가 무슨 말 하리요 만일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시면 누가 우리를 대적하리요”

로마서 8:30-31절을 이어주는 접속사는 ‘그런즉’입니다.
헬라어 ‘ou’은 인과관계 접속사입니다.
다시 말하면 앞에서 말한 충분하고도 타당한 이유와 근거가 있기 때문에 이어지는 뒤의 내용이 설득력이 있음을 알려주는 접속사라는 것입니다.

풀어 해석합니다.
적어도 우리가 롬 8:31절 이하의 주인공이 되려면 반드시 로마서 8:30절을 경험해야 한다는 말이 되는 것입니다.

적용합니다.
사랑하는 지체 여러분!

하나님이 나를 위하시면 감히 누가 대적할 수 있겠습니까?의 담대한 믿음의 주인공으로 서려면 우리는 영화의 단계에 도달해야 한다는 말입니다.

적어도 우리 교우들이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으리요 환난이나 곤고나 박해나 기근이나 적신이나 위험이나 칼이랴”(중략) “높음이나 깊음이나 다른 어떤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고 자신 있게 고백하는 주인공으로 서려면 우리는 영화의 단계에 도달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영화롭게 되는 것이 과연 무엇인가에 주목해야 되지 않겠습니까?
본문에서 ‘영화’라고 번역된 헬라어는 'edoxasen’ 입니다.
‘에독사센’이라는 단어는 ‘거울로 얼굴을 본다. 얼굴을 닮으려고 한다.’등의 의미를 갖고 있습니다.
다시 말하면 적어도 하나님의 백성으로 구원을 받은 백성이라면 예수님의 얼굴을 닮으려고 해야 한다는 의미가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영화라는 것은 과연 무엇을 의미하는 것입니까?
* 영화롭게 된다는 것은 예수님의 흔적을 지닌 자가 되는 것입니다.  

흔적이라는 이야기를 하면 갈라디아서 6장을 말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갈 6:17절입니다.
“이 후로는 누구든지 나를 괴롭게 하지 말라 내가 내 몸에 예수의 흔적을 지니고 있노라”

바울이 갈라디아 교회에 이렇게 선언한 이유가 무엇입니까?
갈라디아 교회에 할례를 구원의 조건이라고 주장하는 거짓교사들이 창궐하여 갈라디아 교회에 복음의 기초를 뿌리 채 흔들고 있었습니다.

다른 지역에서 복음을 전하고 있던 바울에게 갈라디아 교회가 할례 문제로 여러 가지의 위기의 징조가 보이고 있다는 것이 보고되었습니다.
이런 위기를 극복하도록 복음의 순수성을 변호하기 위하여 보낸 편지가 갈라디아서인데 그는 이 편지를 통해서 할례의 무용론을 주장하였습니다.
할례주의자들에게 현혹되지 말고 오직 원색적인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으로 위기를 극복할 것을 주문하였습니다.

바울의 이 편지의 말미인 갈라디아서 6장에서 자신의 복음의 기초를 분명히 밝히고 있습니다.
바울이 무엇이라고 고백하고 있습니까?

갈 2:20절입니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그는 또 고백합니다.

갈 3:26-27절입니다.
“너희가 다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의 아들이 되었으니 누구든지 그리스도와 합하기 위하여 세례를 받은 자는 그리스도로 옷 입었느니라”

갈라디아서의 마지막 결론의 장인 6장에서 그의 고백은 압권입니다.

갈 6:14절입니다.
“그러나 내게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 결코 자랑할 것이 없으니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세상이 나를 대하여 십자가에 못 박히고 내가 또한 세상을 대하여 그러하니라”

갈 6:17절입니다.
“이 후로는 누구든지 나를 괴롭게 하지 말라 내가 내 몸에 예수의 흔적을 지니고 있노라”  

그래서 많은 신학자들이 바울의 이 고백이 담겨져 있는 갈라디아서는 로마서를 주석한 것이라고 말하는 것을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일 것입니다.
갈라디아서는 로마서가 나오기 훨씬 전의 작품이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이 고백을 드리는 예수님의 흔적을 가졌던 자였기에 로마서 8:31절의 승리의 구절의 주인공이 되기 위해서는 반드시 영화의 단계에 이르러야 함을 전제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지난 주에 우리 교우들이 영적으로 중보해 주시고 기도해 주셔서 마하나임 축구 선교단의 제주 본선을 무사히 마치고 응원단의 제주 투어까지 잘 마무리하고 돌아왔습니다.
이번에 제주 선교 100주년 그리고 성결교회 제주 선교 57주년을 기념하기 위하여 전국성결교회 대항 축구 대회 본선을 제주제일교회에서 유치하게 된 것입니다.
주최를 한 제주제일교회와 2개 제주 직할지방회의 교회들을 포함하여 총 19개 팀이 자웅을 가렸습니다.

경기 당일 경기가 치러진 제주 효돈 구장에서 아주 기이한 현상이 벌어졌습니다.
효돈 구장이 공원에 위치해 있었기에 대형 화장실이 두 개가 설치되어 있었습니다.
그 곳에는 분명히 성결인들이 모여 있는 장소인데 화장실에 들어가는 순간 가득 차 있는 담배연기로 숨을 쉴 수가 없었습니다.
그 이유는 쉽게 알 수 있었습니다.

이번에 경기에 참여한 선수들 중에는 우리 교회처럼 태신자들이 많았기 때문입니다.
축구를 통하여 불신자들을 구원하려는 목적이 있었기에 그 곳에 참여한 선수들은 공수된 사람들도 있었고 충원된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태신자들이고 전도대상자들이기에 그 와중에도 인에 박혀 있는 담배를 참을 수 없어서 공중화장실을 이용하여 담배를 피운 것입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우리 교회 태신자들에게 엄하게 1박 2일 동안에 금지사항을 알려주었고 위상에 금이 가는 일들을 하지 말 것을 당부했기 때문에 우리 교회의 태신자들은 그 날 절제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태신자들에게 아주 절제된 그리스도인으로서의 모습을 견지하라고 요구하는 것은 문제가 있습니다.
또 그렇게 권면을 한 들 그들이 그것을 지키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그런데 예를 들겠습니다.
그들이 태신자의 위치에서 구원의 4단계를 거쳐 영화의 단계에 들어섰다고 합시다.
그렇다면 그들이 이제 나타내는 흔적은 화장실에 한 모금의 담배에 시름을 떨치는 그런 삶이 되어서는 안 되지 않겠습니까?

적어도 그들이 구원의 서클 안에서 하나님의 구속의 틀 안으로 들어왔다면 그래서 성도의 궁극적인 단계인 영화롭게 되는 단계에 들어섰다면 주님의 흔적을 남겨야 하지 않겠습니까?
적어도 내가 ‘에독사센’- 주님의 얼굴을 닮으려는 영화의 단계에 들어서야 로마서 8:31절 이하의 주인공들이 되지 않겠습니까?

몰로카이 섬의 성자로 지금도 우리 그리스도인들의 심금을 울리며 감동을 주는 성 다미엔은 몰로카이 섬의 원주민들을 구원하기 위하여 직접 나환자가 되지 않았습니까?

인도의 캘커타의 빈민굴에서 평생을 그들과 함께 한 테레사 수녀의 유일한 족함은 예수님 한 분이지 않았습니까?

우리는 지난 주간 참으로 사랑한 안수집사님을 하나님의 나라에 파송하는 장례를 마쳤습니다.
입관예배를 인도하고 입관을 지켜보았습니다.

장례 지도사들이 정성스레 임집사님의 시신을 염습했습니다.
수의를 입혔습니다.
그리고 관에 입관 한 후에 빈 공간을 국화꽃으로 단장했습니다.
하얀 국화로 시신을 덮었습니다.
그리고 얼굴 부위에 빨간 국화로 십자가의 성호를 만들었습니다.
그리고 관 뚜껑을 덮었습니다.
관 위에 ‘按手執事 임영식 之柩’라는 선임 장로님의 뛰어난 필채로 적은 명정이 덮여졌습니다.

그렇게 입관은 끝이 났습니다.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저는 장례를 집례하는 목사입니다.
당연히 영적인 의미를 찾아야 하는 목사입니다.

우리 주님께서 안수집사님을 영접하셨고 그를 자리에서 일어나 맞아주셨을 것을 확신하는데 주님이 안수집사님을 일어서서 영접하신 이유는 그의 관에 있는 국화꽃송이 때문이 아닙니다.
그의 잘 써진 명정 때문도 아닙니다.
그가 안수집사였기 때문도 아닙니다.

그를 주님의 품에 안으신 이유는 그가 이 땅을 사는 동안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대로 살려고 노력하며 영화의 단계의 서서 주님을 닮으려 한 믿음 때문인 것입니다.
그가 이 땅에서 54년의 삶을 영위하면서 주님의 흔적을 남겼기 때문입니다.

저는 확신합니다.
주님을 닮기 위하여 몸부림치며 주님의 흔적을 남긴 그 남김 때문에 우리 주님을 임영식집사님을 품에 안으신 것을 말입니다.

다음 주에 다시 살펴보겠지만 롬 8:35-36절에서 바울은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으리요 환난이나 곤고나 박해나 기근이나 적신이나 위험이나 칼이랴 기록된바 우리가 종일 주를 위하여 죽임을 당하게 되며 도살 당 할 양 같이 여김을 받았나이다 함과 같으니라”

우리에게 죽을 것 같은 고난이 엄습합니다.
우리에게 엄청난 고통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 가운데에서도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는 것은 우리들이 주님을 닮으려는 영화의 단계에 있기 때문입니다.

나는 우리 모든 지체들이 이 영화의 단계에 도달하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말씀을 맺겠습니다.

지난 주에 저에게 배달된 메일이 은혜여서 소개하고 설교를 맺겠습니다. 
크로스웨이 2기 사역자 중의 한 교우가 독후감을 써서 냈습니다.  

내용이 이렇습니다.
이 책을 처음 접하면서 약간의 두려움? 이 있었습니다. 
왜냐하면, 우선 책을 접하게 되면 그 책의 저자와 제목 그리고 책의 분량이 얼마가 되는지 궁금하여 마지막 페이지가 몇 페이지인지를 보게 되는 것이 인지상정이라 414 페이지라는 분량에 약간의 기가 죽어 책을 읽기도 전에 한숨 먼저 나오게 되더군요. 

하지만, 이재철 목사님의 책은 “새신자반”에 이어 두 번째 읽는 것이라 다소 안도의 마음으로 책을 펼쳤습니다. 
역시 새신자반에서 받은 감동의 여파가 아직도 남아 성숙자반의 내용으로 다시 한 번 감동을 주었습니다. 

책을 읽어 가면서 단락마다 제가 주님을 믿으면서 얼마나 주님에 대하여 너무 알지 못한 것에 대하여 회개하고, 저를 다시 한 번 질책하는 소중한 시간을 가졌습니다. 

“믿음”에 대하여는 제가 믿고 있는 주님을 제 마음 속에 더욱더 소중하게 간직하는 시간을 가졌고, “복”에 대하여는 제가 가진 능력이나 소유하는 모든 것이 얼마나 허망한 것인지 다시 한 번 느낀 반면, 주님을 전적으로 신뢰하는 마음을 더 갖게 되었고, 무엇보다 “사랑”에 대하여는 제 자신이 사랑에 대하여 너무 일관적인 생각을 가지고 있었던 것은 아닌지 다시 한 번 느끼게 되는 소중한 시간이 되었습니다.

너무 가깝다고 생각하는 가족이나 친지, 이웃, 직장동료에게 제가 그리스도인으로써 과연 주님이 저를 사랑하여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신 그 사랑에 얼마나 가깝도록 사랑했는지, 사랑하고 있는지~.

믿지 않는 사람에게 주님을 믿으세요 라고 전도하면서 제 자신이 주님을 얼마나 사랑하고 있는지, 주님의 사랑을 제 자신이 진정으로 실천하고 있었는지 돌이켜 봅니다. 

이 책을 읽었다고 해서 주님의 사랑의 실천과 주님을 향한 믿음이 전보다 갑자기 바뀌거나 배가 되었다는 것은 아닙니다. 

다만, 이 책을 읽으면서 제 자신이 회개와 반성을 거듭하는 귀중한 시간이었다는 것은 부인할 수 없을 것입니다. 
이 책을 읽은 후의 감동의 내용을 글로 다 표현 할 수는 없지만, 글로 표현하기보다는 주님의 말씀과 사랑을 실천하는 그리스도인이 되리라 다시 한 번 다짐하며 주님께 기도드립니다.

영화롭게 되는 것이 무엇입니까?
주님을 사랑하는 마음이 성장하는 것입니다.
주님을 닮으려는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의 흔적을 남기려는 것입니다.

주님의 형상을 닮기 위하여 어떤 때는 깨지고도 하고, 넘어지기도 하고, 일어설 수 있는 기력조차 없음도 경험하고, 좌절하기도 하는 것을 경험하기도 해야 합니다.

그러나 그 과정 중에 주님이 없이는 절대로 안 되는 것이구나 하는 것을 느끼며 성숙하는 것이 바로 영화의 과정으로 가는 선한 길입니다.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로마서 8:31절 이하의 주인공이 되는 것은 영화의 단계를 경험할 때만 가능합니다.
우리 모두 롬 8:31절 이하의 주인공이 되어 보지 않으시렵니까?
우리들의 삶의 현장에서 주 예수 그리스도의 흔적을 남기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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