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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거절 당한 천국 (마 22:1~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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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절 당한 천국 (마 22:1~14)

I. 거절감

인생은 꼭 한번 주어졌다고 하여 "일생"이라고 합니다. 하나님은 한번 주어진 우리의 인생이 하나님이 계획하신 아름다운 목적대로 성공하고 또 우리가 행복하게 살기를 원하십니다. 그러나 사단은 우리 인생이 하나님의 계획을 이루지 못하도록 실패하고 불행한 삶을 살도록 유혹합니다. 사단이 우리를 유혹하는 전략가운데 하나가 우리로 하여금 상처를 경험하게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상처 속에 갇혀 살도록 하는 것입니다. 

인간이 경험하는 상처 가운데 가장 흔한 상처가 거절감입니다. 또 가장 독한 상처가 거절감입니다. 우리는 자라면서 부모님, 선생님, 친구들로부터 거절을 경험합니다. 거절감을 경험하면 열등감에 사로잡혀 살게 되고 사람들과의 관계가 건강하지 못하며 사역을 감당하더라도 건강하게 사역을 감당하기가 힘이 듭니다. 또 내가 다른 사람을 거절하게 됩니다. 내가 축복의 통로가 아니라 저주의 통로, 상처의 통로가 되어 살아갈 수가 있습니다. 행복해야 될 가정 생활, 교회 생활, 직장 생활이 늘 불행하고 불만으로 가득차고 불안하게 되는 것입니다. 

거절감은 아랫사람이 윗사람으로부터 받는 것만은 아닙니다. 부모들도 자식으로부터 거절을 경험하고 선생님들도 제자들로부터 거절을 경험합니다. 사장들로 사원들로부터 거절을 경험합니다. 

심지어 오늘 본문에 보면 하나님도 우리 인간들로부터 거절을 경험하셨습니다. 예수님도 거절을 경험합니다. 성령님은 수도 없이 거역을 당하고 거절을 경험합니다. 그래서 성경은 하나님을 거절하지 말라, 성령을 거역하지 말라고 말씀합니다. 

어떻게 하면 거절감의 상처로부터 자유하는 삶을 살 수 있을까요?
거절감의 상처는 세월이 흐른다고 저절로 치료되지 않습니다. 세월이 약이겠지요. 기다린다고 치료되는 것이 아니라고 하는 것입니다. 치료하겠다는 의지를 가져야 되고 나는 치료받은 건강한 사람이다 선언해야 됩니다. 또 내가 상처를 받은 것만큼 언제나 나도 상처를 줄 수 있고 또 주었다는 것도 인정해야 합니다. 어떤 거절보다 행여 내가 하나님, 예수님, 성령님을 거역하지나 않았는지 되돌아볼 필요가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 보면 어떤 임금이 아들의 혼인잔치를 배설하고 손님을 청했습니다. 청함받은 사람들로부터 이 왕은 한결같이 거절을 경험합니다. 심지어 심부름 보낸 종들이 모욕을 당하고 죽임을 당하기까지 했습니다. 이것은 일종의 선전포고이지요. 혼인잔치에 청함을 받았다면 상당히 가까운 사람들이었을 텐데 어찌 이런 일이 일어났는지 모르겠습니다. 거절당한 임금이 노하여 살인자들을 진멸하고 온 동네를 불살라 버립니다. 임금은 사환들을 다시 보내 악한 자나 선한 자나 만나는 대로 모두 데려다 잔치집을 채우게 됩니다. 그들 가운데 예복을 입지 않는 자들은 손발을 묶고 저 바깥 어두운데 쫓겨나 슬피울게 만듭니다. 택한 받은 자들만 이 잔치를 맛보게 됩니다. 여기까지가 대략 오늘 본문의 내용입니다. 

참 희한한 잔치 모습입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은 이것이 천국이라고 얘기합니다. 여러분은 이 이야기가 이해가 되십니까? 이게 천국이야기라면 천국을 거절했다가 천국으로부터 거절당한 인간의 이야기들이지요. 메시야를 거절했다가 영원한 지옥으로 쫓겨난 사람들의 이야기입니다. 이건 보통 심각한 문제가 아닙니다. 그러므로 이 잔치는 보통 잔치가 아닙니다. 오늘 아침 말씀은 우리가 함께 경성하여 귀를 기울여 들어야 될 필요가 있습니다. 


II. 왕의 마음

오늘 본문을 시작하는 22장 1절 "예수께서 다시 비유"로 말씀하셨다고 했는데 여기 "다시"란 말이 무슨 말일까요? 바로 앞 21장 마지막에 보면 "거절당한 포도원 주인" 이야기가 나옵니다. 이 이야기를 시작하는 33절 "한 비유를 들으라" 고 되어 있습니다. 여기 한 비유와 오늘 본문의 "다시 비유로" 라는 말이 연결되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21장 "포도원 주인 비유"와 22장 "잔치집 왕의 비유"는 한 쌍을 이루는 비유라고 할 수 있습니다. 

여기서 혼인잔치를 배설했다가 거절당한 임금은 하나님입니다. 혼인잔치의 신랑은 예수님입니다. 당시 혼인잔치는 일차 하객들에게 잔치 사실과 일자를 알려줍니다. 그리고 잔치가 모두 준비되면 다시 하객들을 초청하게 됩니다. "천국은 잔치를 베푼 임금과 같으니" - 얼른 생각하면 "천국은 잔치와 같으니" 그럴 것 같은데 "천국은 초청과 같으니" 그럴 것 같은데 "천국은 임금과 같으니" 그랬습니다. 임금이 천국이라는 것입니다. 천국은 왕의 마음이라는 것입니다. 어떤 왕의 마음일까요? 천국은 왕이 준비한 잔치에 초청받은 모든 사람들이 와서 즐기기를 기다리는 왕의 마음과 같다는 것입니다. 

이 잔치에 일차로 초대된 사람들은 이스라엘 사람들이었습니다. 왕은 그 이스라엘 사람들과 함께 왕의 잔치 메시야 왕국을 오랜 시간동안 준비했습니다. 하나님의 종들인 예언자들을 통해서 율법을 통해서 천국으로 초대했습니다. 이제 마지막에 그 아들을 보내 천국잔치를 알렸습니다.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왔다. "오소서" 하라. 성경에 "오소서" 라는 초청이 무려 1900번 이상 등장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성경은 초청의 역사, 우리 기독교는 초청의 역사라 할 수 있습니다. 


III. 천국을 거절한 사람들

천국을 거절한 사람들, 임금의 초대를 거절한 사람들을 보십시오.
5절-6절 "그들이 돌아보지 않고 한 사람은 자기 밭으로 한 사람은 자기 사업하러 가고 그 남은 자들은 종들을 잡아 모욕하고 죽이니" 

첫 번째 두 사람은 일과 사업 때문에 거절했습니다. 주색잡기에 빠져 못 온 것도 아닙니다. 발등에 떨어진 급한 일을 해야 하겠기에 오지 못한 것입니다. 급한 일에 쫓겨서 중요한 일을 잃어 버렸습니다. 일시적인 일에 쫓겨서 영원한 일을 상실했습니다. 눈에 보이는 일들에 매여서 보이지 않는 세계를 몰랐습니다. 세상일에 귀 기울이다가 하나님의 초청, 우리 예수님의 음성을 듣지 못했습니다. 차선의 일들에 사로잡혀서 최선의 삶을 잃어버렸습니다. 하나님 보다는 현실이 좋았고 영적인 세계 보다는 당장의 필요를 채워주는 물질이 전부인 것처럼 보여졌습니다. 취미와 여흥에 빠져서 신앙생활을 소홀히 했습니다. 

골프에 미친 목사님이 있었습니다. 골프를 배우다 보니 너무 너무 재미있더랍니다. 성경을 보더라도 전부 골프경으로 보이더랍니다. "골프는 나의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골프가 나를 푸른 풀밭 잔잔한 시내로 인도하시는도다. 골프공이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에 빠질지라도 내가 두려워하지 않는 것은 다양한 골프채가 내게 있음이로다." 끝나고 나면 트로피 상도 있고 저녁상도 준비되어 있습니다. 하나님께 기도했습니다. "하나님 천국에도 골프장이 있습니까? 천국에 골프장이 없으면 골프장 하나 건설해 주세요." 하나님의 즉각 응답이 왔습니다. "종아 염려하지 말아라. 기가막힌 골프장들이 있다. 한달 후에 베드로와 네가 부킹되어 있단다." 

스티븐 코비의 「성공하는 사람들의 일곱 가지 습관」에 보면 이 세상에서 성공하는 사람들을 보면 환경에 끌려 살아가는 사람들이 아니라 주도적으로 사는 사람들이더라는 것입니다. 이것 저것 허둥대며 살아가는 사람들이 아니라 비전에 집중하여 사는 사람들이라는 것입니다. 급한 일을 먼저 하는 사람들이 아니라 중요한 일이 무엇인지 그것을 먼저 할 줄 아는 사람들이었다는 것입니다.

본문 6절에 보면 냉혹하게 임금의 초청을 거절한 사람들보다 훨씬 폭력적인 제3의 사람들이 나옵니다. 그들은 심부름 온 사람들을 모욕하고 죽여 버렸습니다. 보통 결혼식이면 안가면 그만이지 심부름 온 종들을 죽일 것까지야 없지 않겠습니까? 여기에 깊은 의미가 있습니다. 핍박받고 있는 마태교회의 상황을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똑같은 상황을 기록하고 있는 "누가"는 거절하되 대단히 공손하게, 정중하게 거절하고 있습니다. 누가복음 14:18절 "나는 밭을 샀으매 아무래도 나가보아야 하겠으니 청컨대 나를 양해하도록 하라하고" 했습니다. 그다음 소를 산 사람도 정중히 양해해 달라고 합니다. 

그러나 지금 마태는 유대인들과 유대지도자들이 냉혈인간들처럼 잔혹하게 예수를 거절했고 교회를 핍박했는가를 부각시키고 있습니다. 또한 이들을 향한 하나님의 분노가 얼마나 정당한가를 설명하고 있습니다. AD 70년 로마의 디도장군이 예루살렘을 공격해서 모든 사람을 죽이고 성전을 불태우고 성을 무너뜨립니다. 돌위에 돌 하나 남지 않을만큼 철저히 진멸하는 것을 볼수 있습니다. 이 사건을 마태는 지금 언급하고 있는 것입니다. 


IV. 천국잔치는 중단되지 않는다

당시 중동지역에서 임금의 초청에 흔쾌히 응답하는 것은 백성의 당연한 의무요 예의였습니다. 구태여 중동이 아니라 할지라도 이것은 당연한 일이었겠지요. 만약 임금의 초청을 거절했다면 이는 임금에 대해 적대감을 가진 사람으로 받아들였습니다. 이는 잔치의 주인공인 왕자가 축하받을 자격도 가치도 없다는 뜻으로 이해되어졌습니다. 이는 자신이 이 결혼에 동의할 수 없음이요 더 이상 임금에게 충성할 마음도 없음을 공개적으로 선언하는 일이었습니다. 

얼음집을 짓고 사는 에스키모에게 복음을 전하러 갔던 선교사님이 있었습니다. 잘 사는 문명국에서 온 줄 알고 한 추장이 선교사를 초청해서 저녁에 거대한 파티를 열어주었습니다. 추운 지방이었으니 밤에는 움직일 수가 없습니다. 잠자리에 들게 되었는데 추장의 부인들 가운데 한 예쁜 부인이 침실로 찾아들더랍니다. 에스키모 사람들은 자신의 부인을 손님에게 내어주는 것이 손님에 대한 정당한 예의로 여겨졌던 것입니다. 이것을 거절했다가 선교사님은 죽을 고비를 넘깁니다. 말은 통하지 않지요. 침실로 찾아든 부인을 거절한 것은 추장에게 적대감을 가진 사람으로 받아들여졌습니다. 너희 부족은 더러워서 상대할 수 없다는 태도로 받아들여졌던 것입니다. 

음행을 거절한 것이 아니라 존재를 거절한 것으로 부족과 추장을 거절한 것으로 받아들여졌던 것입니다. 이처럼 잘못된 풍습을 거절했다가도 죽을뻔 했습니다. 더구나 지금 유대인들은 하나님의 초청을 거절하고 있는 것입니다. 구약에 하나님은 언제나 그들의 신랑으로 묘사되어졌습니다. 신랑을 거역하고 음행의 자리에 빠져든 것입니다. 그토록 오랫동안 기다려온 메시야를 거절하고 있는 것입니다. 

"내가 오찬을 준비하되 나의 소와 살진 짐승을 잡고 모든 것을 갖추었으니 혼인잔치에 오소서."(4절) 하나님은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 박고 천국 구원잔치를 준비했습니다. 이것을 거절한 것은 왕의 마음을 아프게 한 정도가 아닙니다. 예의가 없다는 차원 정도가 아닙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배신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거부한 것입니다. 예수님을 배신하고 성령을 거역한 것입니다. 

여러분 기억하십시오. 
먼저 초청받은 자들이 이 초청을 거절했다고 해서 하나님 나라 잔치가 취소되는 것 아닙니다. 천국잔치가 중단되는 것도 아니고 포기되어지는 것도 아닙니다. 그 누가 거절하고 핍박하고 방해해도 천국 구원잔치는 영원히 계속될 것입니다. 

임금의 강력한 의지를 보십시오. 이어지는 본문 9절과 10절입니다. 
"네거리 길에 가서 사람들을 만나는 대로 혼인잔치에 청하여 오라한대 종들이 길에 나가 악한 자나 선한 자나 만나는 대로 모두 데려오니 혼인잔치에 손님이 가득한 지라" 

동일한 사건을 기록하고 있는 누가복음 14장 21절 "빨리 시내의 거리와 골목으로 나가서 가난한 자들과 몸 불편한 자들과 맹인들과 저는 자들을 데려오라" 이어지는 23절 "강권하여 데려다가 내 집을 채워라" 여기 "강권하여 데려다가" 이 말은 영어 성경에는 팔을 비틀어서라도 데려오라는 뜻을 가진 말을 사용하고 있습니다. 임금은 팔을 비틀어서라도 당신의 백성을 찾아서 잔치집을 채우겠다는 강력한 의지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것이 임금의 마음이요 아버지의 마음이라는 것입니다. 

"천국은 왕과 같으니" 왕의 마음이 천국이라는 것입니다. 천국은 유대인의 왕국이 아닙니다. 모든 민족의 경계를 뛰어넘습니다. 천국은 건강한 자들의 왕국이 아닙니다. 약한 자들과 병든 자들도 거기 들어갑니다. 천국은 많이 배운 자들의 왕국이 아닙니다. 못 배운 자도 거기 들어갑니다. 「낫 놓고 ㄱ자를 모르고, 공차면서 ㅇ자를 모르고, 지게지고 A자를 몰라도 예수 믿으면 거기 들어갑니다. 」"천국은 우리 같은 이방인들로 가득한지라""천국은 나 같은 죄인들로 가득한지라" 마음씨 착한 사람만 가는 곳이 아닙니다. 악한 자도 데려오라. 그도 회개하고 예수님 영접하면 천국 간다. 

간음현장에서 붙잡힌 여인도 용서받았습니다. 평생 강도짓을 하고 살았던 오른편 강도도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 주님의 왕국에 들어갔습니다. 세리 삭개오도 그 나라에 들어갔습니다. "나는 잃어버린 자를 찾아 구원하기 위해서 왔다" 이 세상 어디에서도 용납받지 못하고 용서받지 못하고 세상 모두가 당신에게 돌을 던지고 있습니까? 그래도 주님 앞에 돌아오십시오. 회개하십시오. 그리고 예수님을 영접하십시오. 그분의 초청을 거절하지 아니하면 당신도 그 나라에 들어갈 수가 있습니다. 

예수 앞에 나오면 모든 죄 사하고 주의 품에 안기어 편히 쉬리라 
우리 주만 믿으면 모두 구원 얻으며 영생복락 면류관 확실히 받겠네


V. 예복 입고 오너라

왕의 천국잔치에 참여하는 사람의 마지막 자격 한 가지가 11절로 13절에 나옵니다. 물론 그 나라 왕국의 잔치에 참여했으면 감사함으로 신랑을 칭찬하며 잔치집에서 마음껏 즐기며 살아야겠지요. 

탈무드에 보면 두 가지 거짓말을 해도 괜찮다. 할수록 좋다는 거짓말 두 가지가 있습니다. 첫째, 남이 일단 산 물건을 가지고 왈가왈부하지 말아라. 무조건 참 좋다고 이야기 하라. 둘째, 혼인 잔치집에 가서 신랑 신부가 아무리 못생겨도 못생겼다고 정직하게 말하지 말아라. 참 잘생겼다고 참 예쁘다고 천생배필이라고 얘기해라. 이 거짓말은 할수록 좋다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은 왕이 준비한 예복을 입고 들어가는 것이 마지막 이 잔치에 참여할 수 있는 자격으로 나타나고 있습니다. 이 예복을 입지 않은 사람에게 왕은 말합니다. "친구여 어찌하여 예복을 입지 않고 여기 들어 왔느냐... 그 손발을 묶어 바깥 어두운데 내 던지라 거기서 슬프 울며 이를 갈게 되리라" 

여기 "친구여" 이 말은 좋은 의미로서 친구가 아닙니다. 
"친구여" (eJtai're 헤타이레) - 이 말은 마태복음에서 언제나 불순종하는 자들, 위선적인 거짓제자들을 지칭할 때 쓰여지는 말이었습니다. 어찌하여 - 마태복음에 14번 나타나는 의문부사로서 주로 놀라움을 표현하는 단어로 등장합니다. 중국에 이 큰 지진이 났을 때에 너무 놀라서 우째 이런 일이 이런 이야기입니다.

"슬피 울며 이른 간다"는 표현은 마태복음에서 늘 최후 심판에서 버림받은 상황을 표현할 때 쓰여지는 문장입니다. 무슨 말일까요? 이 말은 예복을 입지 않은 것이 대단히 심각한 문제라는 뜻입니다. 천국에 들어가고 못 들어가는 중요한 자격이 되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왕을 알현하려는 한 사람이 왕이 준비한 예복은 거절하고 자기 옷에 먼지나 좀 털고 옷 매무새나 바로 하면 될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교회에 들어와서도 마음가짐이나 좀 반듯하게 하고 행동이나 좀 깨끗하게 하고 착한 일이나 세상에서 하지 않던 것 한 두가지 하면 천국 들어가는 것으로 생각했던 모양입니다. 

"예복"이 무엇일까요? 

1) 지금 왕의 잔치집에 들어온 이 사람들은 이스라엘을 대신하여 들어온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렇다면 유대인들이 실패한 그것이 예복일 것입니다. 어떤 주경학자들은 예복을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이요 그리스도라 믿는 믿음"이라고 합니다. 또 다른 성경학자들은 성경 전체의 조화속에서 특히 사도바울 신학과 마태 신학의 조화라는 차원에서 예복을 "칭의" - 믿음으로 의롭다함을 받는 것이라고 이해했습니다. 

2) 어떤 사람들은 예복은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이요 메시야라고 믿는 고백의 차원에 머물러서는 안된다. "신앙의 열매" "크리스챤다운 삶의 열매"가 있어야 하는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내가 예수를 믿었으면 예수 믿은 정당한 열매가 있어야 된다. 그것을 예복이라고 마태는 해석했다는 것입니다. 

적어도 본문이나 마태신학 안에서 본다면 옳은 해석입니다. 교회안에 들어와 신앙생활을 한다고 하지만 입술로만 주여 주여~ 말하고 전혀 삶이 바뀌지 않는 사람을 예복을 입지 않은 사람이라고 얘기한 것입니다. 회개하지 않은 사람, 가치관이나 태도가 바뀌지 않는 위선자들을 향하여 "예복을 입지 않은 자"라고 얘기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 예복을 종합적인 성경 전체의 안목으로 바라볼 필요가 있습니다. 

3) 옷이 무엇일까요? 욥기서 29:14절, 시편132:9절에 보면 "의의 옷"이라 얘기했습니다. 이사야 61:10절 "구원의 옷" 로마서 13:14, 갈3:27 "그리스도로 옷 입었다"라는 말입니다. 이제 왕의 나라에 들어왔으면 저 세상 나라에서 자랑하고 입고 다니던 내 옷을 벗어 던져야 합니다. 세상에서 자랑하던 옷을 부끄럽게 여기고 배설물로 여겨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의의 옷, 보혈의 옷으로 갈아입어야 합니다. 그 옷을 입은 자는 그 나라 백성으로서의 언어를 말하며 살아야 됩니다. 천국의 가치관을 가지고 살아야 됩니다. 천국 인생으로서의 목적을 가지고 천국 열매를 맺으며 살게 되는 것입니다. 


VI. 맺으며

말씀을 맺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내가 받은 거절 상처에 묶여 살지 마십시요. 자칫 하나님의 은혜, 하나님이 준비해 놓으신 영광마저 거절하게 될까 두렵습니다. 내가 천국을 거절하고 하나님을 거절했다고 그 천국이 거절당하겠습니까? 내가 하나님을 거절했다고 하나님이 없어지는 것입니까? 결국 나만 불쌍하게 버림받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천국잔치 은혜의 잔치에 우리가 주인공이 되기를 원하십니다. 기쁨으로 참여하여 마음껏 즐기기를 원하십니다. 이것이 아버지의 마음이요 이것이 천국의 마음입니다. 예배의 자리에 올때 마다 예배의 주인공이 되십시오. 말씀을 들을때 마다 이 말씀을 즐기는 주인공이 되십시오. 이 교회를 통하여 부어지는 축복이 여러분을 향한 축복임을 믿으십시오. 이것이 천국의 마음입니다. 이것이 임금의 마음입니다. 

인간이 천국을 거절했다고 천국 잔치가 포기되어질까요? 중단되어질까요? 천국은 영원히 계속됩니다. 그곳은 잘난 사람도 못난 사람도 들어갑니다. 선한 사람도 악한 사람도 초청에 응하고 예복을 입으면 들어가는 곳입니다. 우리 모두 함께 부름받은 왕국입니다. 바로 나 같은 죄인을 위해서 준비된 곳입니다. 이제 그 나라에 들어갈 때 내 자랑하던 옷, 내가 지어 만든 의의 옷 모두 벗어던지고 예수님께서 친히 피흘려 지으신 예복을 입고 들어가는 것입니다. 예수의 피로 지은 옷 입은 자만 들어오너라. 성령의 은혜로 맺은 열매만 안고 들어오너라. 그 영원한 나라가 너를 위하여 준비되었다 말씀하십니다. 
(류영모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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