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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평생의 도우미 (요14:16~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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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생의 도우미(요14:16~20)

아프리카 속담에 이런 말이 있다고 합니다. “길을 갈 때 빨리 가려면 혼자 가고, 멀리 가려면 함께 가라!” 정말 그렇죠. 잠시 길을 갈 때는 혼자서 후다닥 다녀오면 됩니다. 그러나 긴 여행길에는 동행자가 있어야 합니다. 혼자 가면 외롭고 위험하기 때문입니다. 

우리 인생이 꼭 그렇습니다. 인생은 긴 여행길과 같아서 혼자 가기에는 너무 외롭습니다. 그리고 너무 위험합니다. 그러므로 인생길에 동행해 줄 사람이 긴요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우리에게 가족을 주시고 친구를 주신 것입니다. 만일 우리 인생길에 동행해 줄 가족이나 친구가 없다면 한 마디로 고립무원(孤立無援)입니다. 그런 점에서 세상에서 가장 불쌍한 사람은 고아라고 말합니다. 

그런데 정말 불쌍한 사람은 그냥 고아가 아닙니다. 영적 고아입니다. 하나님 없이 살아가는 사람입니다. 하나님은 외롭고 위험한 인생을 위해 무엇보다 당신 자신이 친히 동행해 주십니다. 그런데 이런 사실을 모르는 채 영적으로 혼자 살아가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슬픈 일입니다. 

감사하게도 저와 여러분은 하나님의 선택을 받고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우리 인생길에 동행해 주시는 축복을 받고 살아갑니다. 성도된 자의 축복 가운데 가장 큰 것이 바로 이게 아닌가 생각합니다. 오늘 성경을 보면 하나님께서 당신의 영인 성령을 보내주셨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게 바로 ‘성령 강림’입니다. 지난 주일이 금년도 성령강림절이었는데, 어버이주일과 겹쳐서 성령에 관한 말씀을 못 드렸습니다. 이 시간 성령 강림이 얼마나 귀한 축복인지 되새겨 보는 기회를 가지려고 합니다. 아무쪼록 오늘 말씀을 통해 우리 가운데 오신 성령을 다시 한 번 영접하고 날마다 동행함으로 승리하는 복된 인생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오늘 본문은 예수님이 육신을 입고 이 세상에 계실 때, 특히 십자가를 지시기 바로 전날 밤 최후의 만찬 석 상에서 주신 말씀입니다. 흔히 ‘다락방 설교’라고 부르는 말씀 중 일부입니다. 예수님은 지금까지 3년가량 함께 지내셨습니다. 그런데 이제 그들과 헤어질 때가 다가옵니다. 이를 감지한 제자들이 불안해합니다. 


[1] 고아 같은 인생 : 하나님을 떠난 죄인

이와 같이 불안해하는 제자들에게 예수님께서 뭐라고 말씀하십니까? 이제 곧 예수님께서 그들을 떠나지만 영원히 떠나는 것은 아니라고 말씀합니다. 본문 18절을 봅니다. “내가 너희를 고아와 같이 버려두지 아니하고 너희에게로 오리라” 제자들은 혹시 고아 신세가 되는 게 아닌지 염려했지만, 예수님은 절대 그런 일이 없을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아담 이후 모든 인간은 하나님을 떠난 죄인입니다. 그리고 그 죄값으로 영적인 고아가 되었습니다. 창세기 3장을 보면 그 기록이 나옵니다. 선악과를 따먹고 하나님을 배반하고 범죄한 후 그들에게 어떤 일이 벌어집니까? 저주 받고 에덴동산에서 추방됩니다.(창3:16~24) 노동의 수고, 해산의 고통, 마침내 죽음입니다. 이 모든 저주는 하나님으로부터 쫓겨남으로부터 시작됩니다. 인생의 모든 외로움과 두려움은 하나님을 떠남으로 시작된 원초적 본능입니다. 

이 고아 같은 인생에게 예수님이 찾아오신 것입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을 만나 동행하면서 인생에 큰 기쁨을 얻었습니다. 그런데 이제 십자가를 지신다니 얼마나 불안합니까? 하지만 예수님은 당신이 떠나는 것은 잠시일 뿐 다시 오신다고 했습니다. 그게 무슨 말입니까? 재림은 훨씬 나중에 오시는 겁니다. 곧 오신다는 것은 ‘성령 강림’을 의미합니다. 


[2] 보혜사 : 예수 그리스도, 성령

여기서 우리는 삼위일체 하나님을 봅니다. 삼위일체(三位一體 Trinity)는 성부(聖父), 성자(聖子), 성령(聖靈)으로 모두 동일하십니다. 하나이시며 삼위이신 하나님이십니다. 아주 신비로운 일이죠. 인간 세계, 피조물의 세계에서는 이런 일이 있을 수 없죠.

예수님은 16절에서 구체적인 말씀을 해 주십니다. “내가 아버지께 구하겠으니 그가 또 다른 보혜사를 너희에게 주사 영원토록 너희와 함께 있게 하시리니” 이 구절에서 ‘보혜사’는 헬라어 원어로 ‘파라클레토스’(paravklhto")입니다. 이 단어는 ‘곁에’(para)라는 단어와 ‘부르다’(kalew)라는 단어의 수동형 합성어입니다. 그러니까 보혜사란 ‘곁으로 부름 받은 자’라는 뜻입니다. 즉 성부와 성자 예수님이 성령을 우리 곁으로 보내서 우리를 도와주도록 하신다는 말씀입니다. 

우리 말 성경이 번역을 참 잘했습니다. 보혜사! 일반 사전에 나오지 않는 조어입니다. 

보혜사(保惠師)는 지킬 ‘보'(保)’, 은혜 ‘혜’(惠), 스승 ‘사’(師)입니다. 영어 성경을 보면 역본에 따라 Helper(조력자), Counselor(상담자), Comforter(위로자), Advocate(대언자) 등으로 번역하고 있는데 이 모든 단어를 합쳐놓은 것과 같은 풍성한 의미를 가지는 게 보혜사라는 번역입니다.

그런데 놓치지 말아야 할 중요한 사실이 있습니다. 보혜사라는 말 앞에 ‘또 다른’이란 말이 붙어 있습니다. 이 말은 완전히 다른(different) 게 아니라, 동일한 다른 하나(another)를 의미합니다. 그러니까 무슨 말입니까? 예수님도 보혜사이신데, 성령도 보혜사라는 말씀입니다. 결국 성령은 예수님과 동일한 하나님이며 예수님의 대리자라는 겁니다. 예수님께서 지난 3년간 제자들 곁에서 동고동락하면서 도와주셨는데, 그 역할을 성령이 오셔서 대신 해 주실 거란 말씀입니다. 

19절을 보시죠. “조금 있으면 세상은 다시 나를 보지 못할 것이로되 너희는 나를 보리니 이는 내가 살아 있고 너희도 살아 있겠음이라” 예수님은 십자가에 달려 죽었고, 사흘 만에 부활하신 후에는 승천하셔서 하나님 보좌 우편에 계십니다. 그러므로 제자들은 재림하실 때까지 예수님을 육신으로 다시 볼 수 없습니다. 그런데 다시 온다고 하셨습니다. 성령으로 오신다는 겁니다. 그런 점에서 제자들이 예수님을 볼 수 있다는 겁니다. 오늘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예수님을 육신으로 보는 게 아니죠. 성령을 통해 예수님을 만나고 예수님을 봅니다. 그리고 성령 안에서 예수님과 영적 관계를 맺습니다. 

20절을 봅니다. “그 날에는 내가 아버지 안에, 너희가 내 안에, 내가 너희 안에 있는 것을 너희가 알리라” ‘그 날’이란 성령 강림의 날을 가리킵니다. 성령이 오시면 이렇게 된다는 겁니다. 삼위일체 하나님과 영적으로 하나가 됩니다. 이를 가리켜 신비로운 연합(Mystical Union)이라 부릅니다.

이런 예를 생각해 보면 이해가 되실 겁니다. 아주 적절한 예일지 모르지만 아버지와 아들이 꽉 껴안고 있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아들 안에 아버지가, 아버지 안에 아들이 있는 겁니다. 또 바닷물 속에 큰 드럼통을 넣는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드럼통이 바닷물 안에, 바닷물이 드럼통 안에 있는 겁니다. 성령은 무한하신 영이므로 내 안에 계시시고 하고 나를 품어 주시기도 합니다. 예수님도 마찬가지 성령을 통해 내 안에 오시고, 나를 품어주시기도 합니다.

여러분, 예수님이 부활 후 승천하면서 마지막에 남기신 말씀을 기억하시죠. 마28:20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이 말씀은 육신적으로 이해하려고 하면 황당합니다. 어떻게 하늘로 올라가면서 계속 함께 있겠다고 말씀하실 수 있습니까? 말이 안 됩니다. 예를 들어 공항에서 떠나는 사람이 배웅 나온 사람에게 손을 흔들며 출국장으로 들어가면서 “내가 너와 계속 함께 있을께~ ”라고 말한다면 머리가 이상해진 것이겠죠. 예수님은 말씀은 육신적으로 이해하면 곤란하고 영적으로 이해해야 됩니다. 다락방에서 하셨던 성령 강림의 약속을 재확인한 것으로 보면 됩니다. 성령 강림 후 예수님이 성령을 통해 함께 해 주시겠다는 말씀입니다. 

따라서 이 모든 말씀을 한 마디로 표현하면 이렇습니다. 성령은 보혜사로서 영원토록 곁에서 도와주시는 분 즉 ‘평생의 도우미’입니다. 그것도 우리 각자에게 ‘전속 도우미’입니다. 무한하신 성령이시기에 우리가 모여 있을 때도 함께 해 주시지만, 각자가 흩어져 있을 때도 각각에게 함께해 주실 수 있습니다. 


[3] 보혜사 성령이 하시는 일 : 구원, 인도, 보호, 권능, 중보 

그러면 보혜사 성령이 우리 곁에 오셔서 하시는 일은 구체적으로 어떤 것들인가요? 여러 가지가 있습니다. 그 내용을 살펴보기 전에 먼저 짚고 넘어갈 사항이 있습니다. 성령이 아무에게나 보혜사로 되어 주시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본문 17절을 보시죠. “저는 진리의 영이라 세상은 능히 그를 받지 못하나니 이는 그를 보지도 못하고 알지도 못함이라 그러나 너희는 그를 아나니 그는 너희와 함께 거하심이요 또 너희 속에 계시겠음이라” 세상은 성령을 받지 못합니다. 제자들, 그리고 성도들만 가능합니다. 예수님을 믿음으로 영접하지 않으면 불가능합니다. 성령으로 받기는커녕 영적으로 깜깜해서 알지도 못하고 느끼지도 못합니다. 사도행정 2장 보면 오순절 성령강림 후 베드로가 복음을 전하자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외쳤던 무리들이 양심의 가책을 받고 어떻게 하면 좋겠느냐고 묻습니다. 그때 베드로가 한 말이 행2:38에 나옵니다. “베드로가 가로되 너희가 회개하여 각각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고 죄 사함을 얻으라 그리하면 성령을 선물로 받으리니” 회개하고 죄 사함 받은 성도만이 성령을 받는다는 겁니다. 

그래서 고전3:16에서는 이렇게 말씀합니다. “너희가 하나님의 성전인 것과 하나님의 성령이 너희 안에 거하시는 것을 알지 못 하느뇨” 이를 가리켜 ‘성령의 내주’(內住 Indwelling, Residence)라고 부릅니다. 예수 믿는 성도라면 예외 없이 이렇게 됩니다.

그러면 이제 구체적으로 성령이 우리 가운데 오셔서 평생의 도우미로 어떤 일을 해 주시는지 몇 가지만 살펴봅니다. 

① 구원 :

무엇보다 성령은 우리에게 오셔서 구원의 역사를 이루어 주십니다. 내가 예수 믿으면 죄 사함 받고 하나님의 자녀가 됩니다. 그런데 그 믿음이 어떻게 생기나요? 내가 학습을 통해서? 아닙니다. 성령이 오셔서 죄를 깨닫게 해 주시고, 십자가 복음도 깨닫게 해 주시는 겁니다. 그래서 고전12:3은 뭐라고 말씀합니까? “성령으로 아니 하고는 누구든지 예수를 주시라 할 수 없느니라” 또한 롬8:15~16 보면 뭐라고 말씀합니까? “15 양자의 영을 받았으므로 우리가 아빠 아버지라 부르짖느니라 16 성령이 친히 우리 영과 더불어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인 것을 증언하시나니” 그러니까 내가 하나님 아버지라고 부르는 것도 내가 스스로 하는 게 아니라 성령이 가르쳐 주시고 그렇게 하도록 해 주시는 겁니다. 그래서 믿음을 하나님의 선물이라 말합니다.

② 인도 : 

성령은 우리의 인생길을 인도해 주시는 분입니다. 요14:26 “보혜사 곧 아버지께서 내 이름으로 보내실 성령 그가 너희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시고 내가 너희에게 말한 모든 것을 생각나게 하리라” 요16:13 “그러하나 진리의 성령이 오시면 그가 너희를 모든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시리니 그가 스스로 말하지 않고 오직 듣는 것을 말하며 장래 일을 너희에게 알리시리라” 무슨 말씀입니까? 성령이 오셔서 우리에게 성경의 진리를 가르쳐 준다는 겁니다. 그리고 인생길을 인도해 주십니다. 성령의 도우심이 없으면 성경을 읽어도 검은 것은 글씨, 흰 것은 종이입니다. 처음 교회에 나오는 분들은 혹시 설교가 귀에 들어오지 않을지도 모릅니다. 왜 그런가요? 한국말로 설교하는데 ... 성령의 도우심을 받지 못하며 그럴 수밖에 없습니다. 

이러한 성령의 도우심을 가리켜 고전2:10은 무라고 말씀합니까? “오직 하나님이 성령으로 이것을 우리에게 보이셨으니 성령은 모든 것 곧 하나님의 깊은 것까지도 통달하시느니라” 성령은 하나님이므로 하나님의 깊은 뜻을 다 압니다. 그래서 우리가 성경을 읽을 때, 들을 때, 공부할 때 가르쳐 줍니다. 이를 가리켜 성령의 조명(照明 Illumination)이라 부릅니다.

어느 여집사님이 시어머니를 모시고 교회에 갔습니다. 시어머님이 교회에 간 바로 그 날 설교가 희한하게 자신을 두고 이야기하는 것 같더랍니다. 집에 와서 며느리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얘, 너 혹시 교회 가서 우리 집 이야기 다 했지?” 며느리는 그게 아니고 성령이 가르치신 것이라고 설명해 드렸습니다. 평소에 좋은 관계니까 그렇지 오해하기 딱 쉬웠습니다. 성령의 조명을 쉽게 풀어서 설명해 드리자 신기해하면서 계속 교회에 따라 나섰습니다. 그러다 결국 예수 믿고 구원 받았다는 이야기입니다. 이게 바로 성령의 인도입니다. 

성령의 인도는 나 자신의 생각보다 더 큽니다. 내가 생각대로 인생을 사는 것보다 성령의 인도를 따라 사는 게 훨씬 더 유익합니다. 흔히 바울을 가리켜 세계 복음화의 주역이라 말합니다. 틀린 말은 아니지만 정확히 말하면 그 모든 것을 이루신 분은 성령이십니다. 바울은 소아시아(현재의 터키 지역)에서 맴돌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성령이 자꾸 길을 막습니다. 고민하며 기도하던 바울이 환상을 보게 되는데, 마게도냐 사람이 나타나 빨리 와서 도와 달라고 손짓을 합니다. 그 환상을 보고 바울이 비로소 유럽으로 건너갑니다.(행16:6~10) 그래서 서구의 복음화, 더 나아가 세계의 복음화가 이루어진 것입니다. 오늘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성령의 인도를 받으면 내 생각보다 크신 하나님의 뜻을 이룰 수 있습니다.

③ 보호 :

성령은 우리를 보호해 주십니다. 다윗의 고백을 보십시오! 시23:4 “내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다닐지라도 해를 두려워하지 않을 것은 주께서 나와 함께 하심이라 주의 지팡이와 막대기가 나를 안위하시나이다” 이 구절은 성령을 통해 보호하심을 그림처럼 보여주는 말씀입니다. 아무리 어려운 상황 속에 처해도 성령이 우리 곁에 동행해 주시면서 보호해 주십니다. 구약 이스라엘의 광야 생활 중에 구름기둥과 불기둥으로 이스라엘을 인도하신 하나님이 또한 보호하셨음을 알 수 있습니다.(출14:19~25 홍해 건널 때)

오늘 우리 성도들에게는 아예 몸 안에 성령을 내주하게 하심으로 항상 성령의 인도와 보호를 받게 하시니 얼마나 감사합니까! 옛날 우리 부모님들이 군대 갈 때 아들 팬티 속에 호주머니를 만들어 그 속에 만원짜리 몇 장을 비상금으로 넣어줍니다. 요즘은 군대가 많이 좋아졌지만 옛날에는 배고플까봐 PX에 가서 단팥빵이라도 사 먹으라고 비상금을 주신 겁니다. 그런데 우리자녀들을 위해 더 좋은 것은 성령님과 동행하는 신앙입니다. 우리 자신을 위해서나 자녀들을 위해서나 성령의 보호하심이 꼭 필요합니다. 

④ 중보 : 

성령은 하나님 앞에 우리를 중보해 주십니다. 롬8:26 “이와 같이 성령도 우리 연약함을 도우시나니 우리가 마땅히 기도할 바를 알지 못하나 오직 성령이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하여 친히 간구하시느니라” 때로는 우리가 너무 답답해서 기도가 안 나올 때가 있습니다. 그럴 때 성령님이 우리를 대신해서 기도해 주십니다. 

월남전 당시의 이야기입니다. 참전한 아들을 위해 기도하는 어머니가 있었습니다. 현지 상황도 모르고 너무 불안해서 뭐라고 기도해야 할지 몰랐습니다. 그래서 목사님에게 상담했더니 기도가 잘 안 될 때는 “성령님, 알아서 기도해 주세요!” 이렇게 부탁하라는 겁니다. 그래서 아들을 위해 기도하다 답답하면 그렇게 기도했다고 합니다. 마침내 아들이 무사 귀국하게 되었습니다. 아들이 사선을 넘은 이야기를 해 줍니다. 어느 날 베트콩과 치열한 전투 중 포탄이 날아와서 급히 피하려고 했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제 자리에 빨리 엎드려!” 하는 소리와 함께 누군가 자기를 내리 누르더랍니다. 그 순간 피하려고 했던 바로 그 지점에 포탄이 떨어져 터지더랍니다. 주위를 둘러봐도 아무도 없는데 이상하다 싶었는데 어머니의 이야기를 들으니 성령님이 도와주신 것이 분명하다고 고백했습니다. 

그러므로 눈앞이 캄캄하면 기왕 안 보이는 것 기도하세요! 뭐라고 기도할 줄 모르겠으면 성령님께 부탁하세요! 알아서 기도해 주시라고! 그러면 하나님께서 최선의 방법으로 우리를 도와주실 줄로 믿습니다.

⑤ 권능 : 

성령은 우리에게 권능을 주십니다. 세상에 살다 보면 우리가 할 수 있는 일보다 할 수 없는 일들이 더 많습니다. 그럴 때 우리에게 권능이 필요합니다. 슥4:6 “이는 힘으로 되지 아니하며 능력으로 되지 아니하고 오직 나의 영으로 되느니라” 인간의 힘이나 능력으로는 곤란하고 오직 성령의 능력으로 된다는 말씀입니다. 권능이란 말(행1:8 참조)은 헬라어로 ‘뒤나미스’(duvnami")인데, 여기서 ‘다이너마이트’라는 단어가 유래했습니다. 그 정도로 성령의 권능이 강력하다는 겁니다. 

그러므로 성도 된 우리에게 보혜사 성령 평생의 도우미가 계시는 한 절망은 없습니다! 소망이 있습니다! 이 사실을 믿고 늘 성령을 의지하며 승리하시기 바랍니다.


[4] 보혜사 성령과 동행하는 비결 : 성령충만 

그러면 어떻게 하면 우리가 성령과 동행하고 의지하며 계속 승리할 수 있을까요? 한 마디로 성령 충만 하면 됩니다. 성도는 모두 성령을 받은 자입니다. 그런데 때때로 성령이 나와 함께 계시지 않는 것 같은 느낌이 있습니다. 왜 그런가요? 성령의 내주는 영속적, 성령 충만은 단속적입니다. 마치 이런 겁니다. 전기 배선 완료되면 언제라도 전기를 사용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플러그가 빠져 있으면 일시적으로 정전되고 전기의 힘을 전혀 사용할 수 없습니다. 이처럼 성령이 내주하시지만, 성령의 권능을 전혀 힘입지 못하고 있는 상태를 가리켜 성령 소멸이라 부릅니다. 성령 충만의 반대말입니다. 우리는 성령 소멸이 아니라 성령 충만 상태를 유지해야 합니다.

우리가 다음의 몇 가지 원칙을 지킨다면 성령 충만의 상태를 유지할 수 있을 겁니다.

① 세상에 취하지 말 것 : 

엡5:18 “술 취하지 말라 이는 방탕한 것이니 오직 성령으로 충만함을 받으라” 세상의 죄와 헛된 풍조에 취하면 안 됩니다. 마음의 관심 방향이 중요합니다. 무엇을 의식하느냐가 중요합니다. 세상을 의식하지 말고 성령을 의식하시기 하시기 바랍니다. 

② 말씀을 품을 것 :

에베소서와 골로새서를 가리켜 흔히 쌍둥이 서신이라 부릅니다. 그만큼 유사한 내용으로 되어 있습니다. 엡5:18과 내용이 같은 골3:16을 보면 흥미로운 사실이 발견됩니다. 골3:16 “그리스도의 말씀이 너희 속에 풍성히 거하여 ... ” 그러니까 성령 충만이란 말 대신 말씀 충만을 언급합니다. 그러니까 말씀 충만이 곧 성령 충만이라는 겁니다. 성령은 말씀과 더불어 역사합니다. 그래서 이런 말이 있습니다. “성령은 말씀의 수레바퀴를 타고 다닌다.”(마르틴 루터) 말씀이 없으면 잘못된 영에 미혹될 수 있고 왜곡된 신비주의에 빠질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늘 말씀 충만하심으로 성령 충만하시기 바랍니다. 

③ 깨어 기도할 것 :

이미 성령 받았지만, 성령 충만을 달라고 기도해야 합니다. 눅11:13 “너희가 악할지라도 좋은 것을 자식에게 줄줄 알거든 하물며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 구하는 자에게 성령을 주시지 않겠느냐” 이미 성령을 받았지만 성령 충만하지 못할 때 기도하면 성령 충만을 회복시켜 주십니다. 주님이 가장 기뻐하시는 기도가 비로 성령을 구하는 기도입니다. 

여러분! 우리 인생은 외롭고, 험한 여행길과 같습니다. 가족이나 친구가 있으면 좋습니다! 그러나 한계가 있습니다. 그들도 연약하기에 항상 함께 해 줄 수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에게 하나님이 주신 평생 도우미가 있습니다. 1년 12달, 365일, 하루 24시간, 분초마다 동행해 주시는 보혜사 성령이십니다! 성령님은 우리 인생에 평생 도우미, 전속 도우미로 역사해 주십니다. 부디 성령을 늘 환영하고, 의식하고, 따라감으로 승리하는 인생 되시기 바랍니다. (홍문수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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