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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청년주일] 청년보다 더 청년이신 하나님 (사 40:27~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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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년보다 더 청년이신 하나님 (사 40:27~31) 
 
40대는 불혹의 나이이지만 힘들고 어려운 때입니다. 

  우리는 40대가 되면 흔히 불혹의 나이가 되었다고 말합니다. 불혹(不惑)이란 세상 모든 것을 바라봄에 있어서 미혹됨이 많이 사라졌다는 뜻입니다. 이제는 웬만한 유혹이 찾아와도 자기 자신을 통제할 수 있게 되었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실상 자신을 바라보면 그렇지 않다는 자괴감도 드는 나이가 40대입니다. 이제 40대는 사회적으로나 경제적으로 세상적인 지위와 명예를 어느 정도 누리는 시기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막상 40대가 된 사람들에게 물어보면 가장 힘들고 어려운 시기라고 고백합니다. 보통 사람들은 스스로 낮추고 움츠리며 사는 고개 숙인 남자들이 40대라고 말합니다. 어떤 사람의 고백입니다. 

  “나는 내가 아닙니다. 집에서는 직장 일을 걱정하고 직장에서는 가족을 염려하고 어느 하나 내 마음대로 할 수 없는 엉거주춤, 어정쩡, 유야무야한 모습, 마이너스 통장은 한계로 치닫고 월급날은 저만큼 먼데 돈 쓸 곳은 늘어만 갑니다. 포장마차 속에서 한 잔 술을 걸치다가 뒤 호주머니 카드만 많은 지갑 속의 없는 돈을 헤아리는 내 모습을 봅니다.” 

  자기 스스로 자조 섞인 말을 하는 40대의 모습입니다. 40세가 된 어떤 사람이 있었습니다. 아내가 남편에게 말했습니다. “여보, 당신이 벌써 불혹의 나이 40이 되었네! 당신은 이제 불혹이야!” 그랬더니 남편이 그 말을 듣고 혀를 차며 바꿔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불혹이라는 것이 부록이라는 말이야? 내가 부록? 별책 부록이겠지! 쯧쯧쯧! 나도 이제는 많이 늙었군!” 

40대가 되면 젊음이 지나가고 노년에 들어선다고 생각합니다. 

  40대가 되면 마음속에 젊음이 지나갔다는 아쉬움이 생깁니다. 이제 노년으로 가는 길목에 들어섰다는 아쉬움과 아픔이 스쳐지나갑니다. 40대가 되면 사람의 육체는 어떻게 될까요? 허준이 쓴 동의보감에 40세 불혹의 나이를 이렇게 말합니다. “40세가 되면 오장육부(五臟六腑)와 십이경맥(十二經脈)이 모두 왕성하다가 정지하고, 피부가 거칠어지고 사색이 없어지며 수염과 머리털이 희기 시작하고, 기혈(氣血)은 보통 정도이기 때문에 앉기를 좋아한다.” 

  30대는 벌떡 일어나 돌아다니다가 40대가 넘어가기 시작하면 앉을 의자만 찾는 것이 피할 수 없는 육체의 모습입니다. 정신적으로 40대는 자기주장이 강해지는 시기입니다. 40대에 자기 얼굴에 책임을 지라는 것은 이제는 변하지 않겠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지금까지는 성장했고, 좋은 것이 있으면 받아들일 준비가 되었는데 40세가 되어서는 내 생각을 고정관념으로 붙잡고 있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40대, 50대는 인생에 있어서 가장 위험한 때입니다. 왜냐하면 도약을 포기하는 시기, 모험을 거절하는 시기이기 때문입니다. 왠지 두렵고, 새로운 것을 하기에는 겁이 나는 시기입니다. 그래서 누군가 나를 비판하면 30대까지는 너그럽게 봐주는데 40대가 되어 비난을 받으면 참지를 못합니다. 수용성이 사라집니다. 지금까지 자신이 준비하며 쌓아왔던 모든 것이 최고라고 생각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면서도 내 생각이 신앙의 본질처럼 다른 어떤 것도 감히 간섭받을 수 없는 것이라고 강력히 주장하는 시기입니다. 이렇게 진취적인 모습과 젊음을 상실한 모습이 40대입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젊음을 잃은 모습을 안타까워하십니다. 

  본문에 하나님의 외로움이 묻어나옵니다. 하나님께서 사랑하시는 이스라엘 백성들, 내 아들이라고 불렀던 이스라엘에게 하나님이 탄식하실 정도로 젊음과 청년성이 사라졌습니다. 애굽 땅에서 불러내었을 때 벌떡 일어서서 그 곳을 떠났던 진취성, 광야에서 40년 동안 고된 훈련의 시간도 마다하지 않고 주님과 더불어 동행했던 젊음이 이스라엘 백성들에게서 사라졌습니다. 바벨론 포로라는 민족적인 재앙을 경험하면서 자포자기했습니다. “이제 모험을 안 할래요. 도전을 안 할래요. 이제는 새 것이 싫어요. 더 이상 하나님 앞에 기쁨과 감사로 나올 수가 없어요.” 

  입으로 내뱉는 말은 부정적인 불평과 불만의 이야기들로 가득합니다. 하나님의 기대가 사라지고 있습니다. 신앙까지도 무너진 것처럼 말하는 모습을 하나님께서 보시면서 말씀하십니다. “너희들의 젊음은 다 어디로 갔느냐? 너희들의 도전의식은 다 어디로 갔느냐? 너희들의 모험정신은 다 어디로 갔느냐? 그렇게 존귀했던 애굽 땅에서 일어나서 나와 함께 걸어갔던 능력들은 다 어디로 사라졌는가?”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아주 외롭고 고독하게 바라보고 계십니다. “너희들은 어찌하여 나의 깊은 생각과 교훈을 잃어버리고 있는가?” 청년다움을 상실한 이스라엘 백성들을 보면서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생각과 뜻을 헤아려 보라고 말씀하십니다. 

“오직 여호와를 앙망하는 자는 새 힘을 얻으리니 독수리가 날개치며 올라감 같을 것이요 달음박질하여도 곤비하지 아니하겠고 걸어가도 피곤하지 아니하리로다” (이사야 40:31) 

  이것은 곧 이런 말씀입니다. “얘들아, 이제 그만 주저 않아 있고 다시 청년성을 회복할래? 이제 그만 시름하고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볼래? 그리고 나와 함께 걸어가 볼래? 나와 함께 달음박질 해볼래? 나와 같이 독수리가 날개치며 올라감같이 하늘을 향해서 비상해보지 않을래?”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을 향해서 용기를 주십니다. 다시 새 힘을 주시고 설레는 마음으로 하나님과 더불어 동행하는 삶을 살라고 축복해주십니다.

젊음을 추구하고 싶지만 불평과 의심의 세력이 방해합니다.  

  주저앉아 낙심하던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 말씀을 들으면서 하나님을 신뢰하지 않은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자신들을 버렸다고 생각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자신들에게 관심을 갖지 않고 아예 멀리 떠나가셨다고 생각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을 외면하셨다고 투덜대고 있습니다. 그래서 죽음 앞에서 힘없는 노인처럼 되었습니다. 청년성은 사라지고 체념과 탄식과 신음만이 가득하다고 불평합니다. 불평의 내용은 이런 것입니다. “왜 우리가 당하는 고통 속에서 하나님은 가만히 계셨나요? 왜 내 발자국을 따라오지 않으시고 돌아보지 않으셨나요? 왜 하나님은 침묵하고 계셨나요? 비참한 일을 당했을 때 하나님은 왜 나를 돌보지 않으셨나요?” 

  하나님의 신실하심에 대해서 의심하며 불신하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하나님은 거꾸로 말씀합니다. “너희들이 나를 버렸을 때도 나는 너희를 버리지 않았다. 너희들이 나를 쳐다보지 않을 때도 나는 너희를 지켜보면서 이끌었다. 그런데 너희들은 왜 의심하고 불신하면서 나를 떠나갔느냐?” 

  우리는 예수님을 믿으면서도 우리 안에 주신 청년성을 잃어버립니다. 언제 우리의 청년성을 잃어버릴까요? 바로 우리의 믿음이 의심으로 바뀌었을 때 그렇습니다. 의심이라는 것은 본래 다 나쁜 것은 아닙니다. 긍정적인 의심, 호기심을 가진 의심, 창의적인 사고를 만들어내는 의심이 있습니다. 질문을 통해 삶이 풍요로워지는 의심은 축복입니다. 

  모세가 그러했습니다. 늘 다니며 보던 떨기나무에 불이 붙었는데 사라지지 않았습니다. ‘이게 웬일인가? 무슨 일이 일어나는가? 저런 이상한 일도 있는가?’하면서 의심을 가지고 나갈 때 거기에서 하나님을 만나게 됩니다. 모세가 하나님의 사람으로 지도자가 되는 계시의 사건을 경험한 것은 축복이었습니다. 그러나 잘못된 의심, 불만을 지닌 의심이 있습니다. 남을 비웃기 위한 불만, 낡은 사고에 붙잡혀 있는 불만이 있습니다. 상대방을 향한 비관적인 상상력을 발휘하는 불만이 있습니다. 그때는 의심하는 자부터 무너지게 됩니다. 

  이스라엘의 초대 왕 사울은 큰 사람이었습니다. 훌륭한 인물로 사람들의 존경을 받았습니다. 그런데 다윗을 바라보면서 의심의 눈초리를 갖게 되었습니다. 다윗이 무슨 말을 하고 어떤 행동을 하는지 불신의 눈으로 바라보며 다윗을 몰아내려고 했습니다. 그 순간의 의심은 사울 왕을 무너지고 망하게 했습니다.     

  질문은 소중한 것입니다. 인간에게 질문이 있어야 발전하고 성숙할 수 있습니다. 질문을 통해 하나님이 주시는 창조역사의 창조성을 개발합니다. 그러나 불평과 불만을 통해 남을 무너뜨리는 의심만 하게 되면 그것은 나부터 파괴당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말씀합니다. “네가 의심하느냐? 나는 숨겨져 있다고 생각하느냐? 나는 너희들에게 관심이 없다고 생각하느냐? 어미는 자기 배에서 낳은 어린아이를 잊을지라도 나는 너희를 잊어버리지 않는다. 너희들이 나를 포기했지만 나는 너희를 포기한 적이 없다. 너희들은 투정을 부리고 푸념하며 불평하지만 나는 너희를 사랑으로 지켜보고 있다. 나는 하늘과 땅을 만든 창조주다.” 

도전과 모험정신의 상실은 젊음을 잃어버리게 합니다. 

  우리의 젊음을 잃어버리게 하는 두 번째는 도전하는 용기, 모험하려는 정신이 사라진 것입니다. 모든 것을 귀찮아합니다. 꼭 해야 하는 일을 귀찮아하기 시작하면 젊음이 사라집니다. 청년성이 사라집니다. 귀찮아지기 시작하면 인생 전체가 피곤해집니다. 낙담하고 도전 의식이 사라지며 안전주의로 머물게 됩니다. 그러면 과거가 좋다고 생각합니다. 과거에는 좋았다고 생각하며 추억만 되새길 때는 청년성이 사라집니다. 미래가 앞에 놓여 있어도 그것을 바라볼 수 없습니다. 나는 내가 아니라는 40대가 또 이렇게 고백합니다. 

“나는 내가 아닙니다. 나는 나를 내 마음대로 할 수가 없는 40대 직장인입니다. 월급 받고 산다는 죄목으로 마음에도 없는 상사의 비유를 맞추며 목구멍까지 올라오는 말도 삼킵니다. 정의에 분노하는 젊은이를 감싸 안지도 못하고 그냥 그렇게 고개 끄덕이다가 고래싸움에 내 작은 새우등 떠질까봐 염려하여 목소리 낮추고 움츠리고 사는 고개 숙인 40대 남자, 나는 내가 아닙니다.”  

  우리들에게도 고개가 저절로 숙여지는 아픔이 있고 심장이 터지고 상해서 잠 못 자는 삶이 있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우리의 고개를 다시 세워주시는 분이 계십니다. 우리의 상처 난 심장을 고쳐주시는 분이 계십니다. 우리에게 다시 도전의식을 불러주시는 분이 계십니다. 생명의 기쁨을 심어주시는 분이 계십니다. 바로 우리 하나님이십니다. 

도전과 모험을 하신 하나님께서 청년성을 회복하라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을 인간적으로 표현하면 도전과 모험을 즐거워하시는 분입니다. 하나님은 창조 이래로 지금까지 모험을 하고 계십니다. 하나님은 인간을 하나님 형상으로 만드셨습니다. 그리고 세상을 다스리는 권리를 인간에게 위임하셨습니다. 인간이 타락할 가능성을 아시면서도 자유를 주셨습니다.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알게 하는 것만을 제외하고는 모든 것에 자유를 주셨습니다. “하나님이 창조주인 것을 꼭 기억해라. 그러나 다른 것은 다 자유를 주겠다.” 
  하나님은 인간이 얼마나 타락하는지 모든 것을 보고 겪으면서도 인간의 자유를 완전히 빼앗지 않으셨습니다. 

왜 하나님께서는 인간의 자유를 빼앗지 않으셨을까요? 
왜 하나님께서는 인간을 인형처럼 만들지 않으셨을까요? 
왜 하나님께서는 인간을 노예처럼 만들지 않으셨을까요? 
왜 하나님께서는 인간의 자유를 보장해주려고 하셨을까요? 

  하나님께서는 인간이 자유롭게 예배드리며 자발적으로 하나님과 사귀고 자원하는 마음으로 하나님과 교제하기를 원하셨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주신 축복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인간이 참된 자유를 누리지 않자 예수 그리스도를 직접 보내시기로 마음먹었습니다. 이것 또한 하나님의 모험이었습니다. 

  하나님은 인간의 몸으로 오셔서 고난 받으셨습니다. 십자가에 달리셨기에 세상 사람들은 그를 비웃었습니다. 그러나 다시 부활하셨습니다. 그리고 지금도 우리를 초청하십니다. 하나님은 강제로 하지 않으십니다. 우리가 자원하는 마음으로 하나님 앞에 나오기를 원하시고 지금도 우리를 향해 말씀하십니다. “내가 고통 받으며 예수를 통해서 이렇게까지 사랑했는데 아직도 모르겠느냐? 나는 너를 내 마음에서부터 사랑하고 너를 섬기기를 원한다.”

  우리는 지금도 하나님의 사랑을 나누고 자유자로 하나님의 사랑을 누립니다. 하나님은 그런 사람을 통해서 말씀하십니다. “내가 너희에게 힘을 주겠다. 내가 너희의 청년성을 회복해주겠다. 네가 나와 함께 도전하고 나와 함께 모험해보자.” 

  우리의 인생은 모험으로 가득 차있습니다. 인생은 신비와 생명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이런 인생으로 초청해주셨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이런 인생을 살아갈 이스라엘 백성에게 말씀하시면서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에게 동일하게 말씀해주십니다. 이 말씀을 우리 자신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아들일 수 있기를 바랍니다.

“너는 알지 못하였느냐 듣지 못하였느냐 영원하신 하나님 여호와, 땅 끝까지 창조하신 이는 피곤하지 않으시며 곤비하지 않으시며 명철이 한이 없으시며 피곤한 자에게는 능력을 주시며 무능한 자에게는 힘을 더하시나니 소년이라도 피곤하며 곤비하며 장정이라도 넘어지며 쓰러지되 오직 여호와를 앙망하는 자는 새 힘을 얻으리니 독수리가 날개치며 올라감 같을 것이요 달음박질하여도 곤비하지 아니하겠고 걸어가도 피곤하지 아니하리로다” (이사야 40:28-31)

  소년이 피곤하고 곤비할지라도, 장정이 가다가 넘어지고 쓰러질지라도 여호와를 앙망하는 자는 결코 피곤하여 넘어지며 곤비하지 않을 것이라고 주님께서 말씀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주저앉아 있지 말고 일어나라고 말씀하십니다. 멈춰 있지 말고 일어나 함께 걸어가고 달음박질하자고 하십니다. 함께 독수리가 날개치며 올라감같이 창공을 향해서 비상해보자고 권하십니다. 

청년이신 하나님을 바라보며 용기를 가집시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우리가 다시 신앙 안에서 젊음을 찾는 비결이 무엇일까요? 첫째, 우리의 생명이시고 청춘이신 하나님을 바라보는 일입니다. 하나님은 청춘이십니다. 우리는 청춘이신 하나님과 더불어 가야합니다. 언젠가 우리는 무너집니다. 그러나 영원히 청년이신 하나님 앞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보며 기도하고 하나님과 더불어 동행할 때 우리들은 주님 앞에 서는 그날까지 청년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와 함께 모험하기를 원하십니다. 내 몸이 하나님의 몸이 되기를 원하십니다. 내 도전이 하나님의 도전이 되고, 내가 가진 생명의 사건이 하나님의 사건이 되기를 원하십니다. 우리를 주저앉게 하는 것으로부터 하나님의 말씀으로 박차고 일어납시다. 다시 주님의 손을 붙잡고 걸어갑시다. 주님과 함께 뜀박질을 해야 합니다. 주님께서 주시는 꿈과 비전으로 독수리의 날개치며 올라감같이 하늘을 향해서 날아올라야 합니다. 

  또한 이제는 교회가 육체적으로 젊은 청년들을 소중하게 생각해 주어야 합니다. 젊은 청년들은 때로 젊기 때문에 반항도 합니다. 방황도 하고 저항도 합니다. 그러나 주님 안에서 그들을 붙잡아야 합니다. 그들의 방황과 반항을 때로 넉넉하게 보셔야 합니다. 청년들은 때로 의욕이 너무 앞서기도 합니다. 그 의욕 때문에 받는 고통과 고뇌가 승화될 수 있도록 기도해주어야 합니다. 그들의 꿈과 비전을 우리가 후원해주어야 할 책임이 있습니다. 우리 교회는 젊은 청년들이 풍성하게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서 자라나게 해 주어야 합니다. 

  기독교인은 청년입니다. 우리는 청년의 종교를 가지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청년이십니다. 하나님이 생명을 가르쳐주십니다. 주님 앞에서 청년의 기쁨을 가지고 나아가는 복된 사람이 되기를 원합니다. 


기도

하나님 아버지 감사합니다. 주님과 더불어 청년의 모험과 도전을 하기 원합니다. 나이가 많든 적든 우리의 삶의 여건이 어떠하든 주님과 함께 손을 붙잡고 동행하며 청년이 되게 하옵소서. 다시는 의심하고 불평하며 주저앉지 않겠습니다. 주님과 함께 일어나 걸어가게 하시고 뛰게 하시며 하나님이 주시는 약속을 향하여 날아오를 수 있도록 축복하여 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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