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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이혼의 문제 (마 5:31~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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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혼의 문제 (마 5:31~32)

(31) 또 일렀으되 누구든지 아내를 버리거든 이혼 증서를 줄 것이라 하였으나 (32)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누구든지 음행한 연고없이 아내를 버리면 이는 저로 간음하게 함이요 또 누구든지 버린 여자에게 장가드는 자도 간음함이니라

오늘 읽은 주님의 말씀을 쉽게 받아들이기 어려운 시대가 되었습니다. 그만큼 이혼이 많아졌기 때문입니다. 지난 2007년 한 해 통계를 보니 결혼한 쌍이 약 35만 4천 건인데 이혼은 12만 4천 건에 이릅니다. 대략 3쌍이 결혼하면 그 중 한 쌍이 이혼하는 비율입니다. 미국은 이미 50%에 육박하고 있습니다. 

이런 이혼 문제에 대해서 가톨릭과 기독교는 보수적인 태도를 취하고 있습니다. 가톨릭에서는 아예 이혼을 허락하지 않습니다. 로마 교회법 1141조에는 이렇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성립되고 완결된 혼인은 사망 이외에는 어떠한 인간권력으로나 어떠한 이유로도 해소될 수 없다.” 그래서 가톨릭에서는 간통죄나 중대한 학대가 발생할 경우에도 별거를 권장할 뿐, 이혼을 허용하지는 않습니다. 보수적 신앙인들이 중요한 신앙기준으로 여기는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에서는 오늘 예수님의 말씀처럼 음행의 경우에 한해서만 이혼을 허용합니다.   “간음의 경우에 있어서 순결한 편에서 이혼소송을 제기하고, 이혼 후에는 죄를 범한 쪽이 죽은 것처럼 간주하여 다른 사람과 결혼하는 것이 합법적이다”(24장 5조)

우리나라에서 한 해 12만 4천 쌍이나 이혼하는 데 그 이혼 사유는 다음과 같습니다. 가장 많은 부분이 성격 차이입니다. 46.8%로 전체의 절반에 가깝습니다. 경제문제가 13.6%, 가족간 불화가 8.0%, 배우자 부정 7.8%, 정신, 육체적 학대 4.8% 등이었습니다. 성격차라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모르겠지만 가톨릭 기준으로 하면 한 해에 12만 4천쌍이니까 약 25만 명이 중죄를 저지르는 것입니다. 기독교 기준으로 하면 배우자 부정 약 8%을 제외한다면 약 23만 정도가 매년 죄를 짓고 있습니다. 이혼 통계가 이 정도니 그냥 참고 사는 사람들까지 합하면 수많은 사람이 성경이 정하는 죄 가운데 살고 있다 할 것입니다. 통계를 보니 20년 이상 동거한 부부의 이혼 비율이 20%에 달하고 있다는 것은 이러한 점을 잘 보여주고 있다 할 것입니다. 아마 자녀들을 출가시키고 나면 이혼 서류를 접수시킬 것이라고 벼르고 있는 부부들도 많을 것입니다.

하나님이 짝지어 주신 것

이혼은 이제 우리 삶의 중요한 문제가 되었습니다. 오늘 예수님의 말씀을 통해서 우리 자신의 결혼과 이혼에 대한 태도를 분명하게 정하는 시간이 되기를 바랍니다. 오늘 읽은 말씀의 내용은 마태복음 19장 3절에서 10절에 자세히 설명되어 있습니다. 31절 32절은 19잘 말씀의 요약이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19장 3절에 보면 어떤 바리새인들이 아무 연고를 물론 하고 아내를 버리는 것이 옳은지 예수님을 시험하기 위해서 질문을 했습니다. 이에 대해서 예수님은 단호하게 이혼은 안 된다고 선언하십니다. 4절에서 6절입니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사람을 지으신 이가 본래 저희를 남자와 여자로 만드시고 말씀하시기를 이러므로 사람이 그 부모를 떠나서 아내에게 합하여 그 둘이 한 몸이 될지니라 하신 것을 읽지 못하였느냐 이러한즉 이제 둘이 아니요 한 몸이니 그러므로 하나님이 짝지어 주신 것을 사람이 나누지 못할지니라”

주님께서 이혼을 반대하시는 이유는 두 가지입니다. 하나는 창조의 질서입니다. 하나님은 본래 사람을 만들 때 한 남자와 한 여자로 만드셨고, 이들이 부모를 떠나 결혼하여 한 몸을 이루는 것이 하나님의 창조질서라고 말씀합니다. 창조의 육 일째 만들어진 것은 인간이 아니라 가정입니다. 한 남자와 한 여자입니다. 그래서 창조의 완성은 한 남자와 한 여자가 만나 가정을 만들면서 이루어집니다. 하나님은 가정이란 곳에서 인간의 행복을 맛보며 살게 하셨습니다. 

창세기 2장에서 아담의 모습을 보면 인간에게 행복이 어디에서 나오는지를 잘 보여줍니다. 아담은 에덴 동산이라는 물질적 풍요의 세계 속에 살았지만 만족이 없었습니다. 에덴 동산을 지키며 짐승들의 이름을 지어주는 노동을 하였지만 노동이 그에게 행복을 가져다주지 않습니다. 이 모습을 보면서 내린 하나님의 결론은 “사람의 독처하는 것이 좋지 못하니 내가 그를 위하여 돕는 배필을 지으리라”(창2:18)였습니다. 그래서 하와를 만들어 데려오니 아담이 이렇게 노래합니다.  “이는 내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라”(창2:23) 이는 ‘너는 내게 가장 소중한 존재야’, ‘너는 내 목숨하고도 바꿀 수 없어’라는 고백과 같습니다. 여러분 우리의 행복은 가정에 있습니다. 남자들은 가정 외의 다른 여자, 노동, 명예 등에서 행복을 찾으려 하지만 여기에 행복이 없습니다. 여자들은 자녀나 다른 상상의 세계에서 행복을 찾으려 하지만 행복은 가정에 있습니다. 

둘째는 결혼의 권위가 하나님으로부터 오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결혼은 “하나님이 짝지어 주신 것”(마19:6)이라고 분명히 규정합니다. 이 말씀의 의미가 무엇입니까? 결혼은 실상 남녀가 눈이 맞아서 서로의 의지로 결정하고 하는 것 아닙니까? 그러나 주님은 명백히 그렇지 않다고 말씀하십니다. 우리 만남을 엮어 준 것은 바로 하나님이십니다. 

창세기 2장에서 아담이 하와를 만나는 과정이 그렇습니다. 하나님은 아담이 깊이 잠들게 한 후 갈빗대를 취하여 하와를 만들었습니다. 그리고 그 여자를 아담에게로 이끌어 왔다고 말씀합니다. 여러분 이 이야기는 무슨 신화 같은 이야기가 아니고 여러분의 이야기입니다. 두 사람이 만나 서로가 부부가 되기까지는 하나님의 보이지 않는 인도하심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순전히 내 의지와 내 감정으로만 결정한 일이 아닙니다. 그래서 “우리 만남은 우연이 아니야 그것은 운명이었어.” 이 노래 가사가 맞습니다. 세상에서 만나는 모든 만남 중에 부부의 만남이 가장 소중한데 어찌 하나님의 인도하심이 없겠습니까?

불교에서는 부부의 인연을 맺으려면 전생에 8천겁의 선연이 있어야 가능할 만큼 대단한 인연이라고 합니다. 1 겁이라는 것은 100년마다 선녀가 하늘에서 내려와 사방 15km가 되는 큰 바위에 옷깃을 살짝 스치는데 그 바위가 다 닳을 정도의 세월이라고 합니다. 겁나죠? 그런데 이런 오백 겁의 인연이 있어야 옷깃이 한번 스치고, 일천 겁의 인연은 같은 나라에 태어나게 하고, 삼천 겁이면 하룻밤을 함께 묵게 되고, 오천 겁이면 한동네에 살게 하며, 칠천 겁이면 한집에 태어나 살게 하고, 팔천 겁이 되어야 부부의 연이 맺어 진다고 합니다. 부부의 만남이 보통 인연이 아님을 이렇게 비유하고 있습니다. 현대인들은 이런 만남의 신비를 너무 가볍게 대합니다. 얼마나 소중한 만남인데 이것을 가볍게 풀어버리거나 밥먹듯이 헤어질 수 있겠습니까? 

현대 사회의 비극은 결혼 문제에 있어서 하나님을 제외시킨다는 점입니다. 자기들 끼리 좋아서 했다고 생각하니 자기들이 싫으면 쉽게 헤어지고 맙니다. 결혼이 일생일대의 중요한 일이며 하나님의 중요 관심사라 생각한다면 그렇게 가볍게 배우자를 선택하지 않을 것입니다. 결혼이 가벼워지고 이혼이 많아지는 데는 이처럼 불신앙의 태도가 담겨 있습니다. 하나님에 대해서 심각히 고려하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결혼은 사랑의 열매일 뿐만 아니라 사명이요 직분입니다. 하나님은 결혼이라는 제도를 통해서 자신의 뜻을 성취하십니다. 가정은 사회가 운영되고 유지되는 가장 기초단위입니다. 하나님은 생육하고 번성하는 축복을 결혼이라는 두 사람의 만남에 주셨습니다. 우리는 가정을 통해서 자녀를 낳고 자녀를 교육합니다. 가정을 통해서 남녀는 서로를 돕고 그래서 인생의 진정한 행복을 맛봅니다. 그런 점에서 가정을 사명이요 직분이라 말씀한 것입니다. 처음 남녀가 만날 때는 사사로운 정으로 만났을지 모르지만, 결혼하는 그 순간부터 하나님께서는 그 가정을 책임지시며 그 가정에 권위를 부여하십니다. 그래서 가톨릭에서는 결혼을 세례나 성만찬과 같은 거룩한 성사 중 하나로 인정합니다. 

나찌 시대의 저항 신학자 본 훼퍼가 옥중에서 결혼식을 주례한 적이 있습니다. 그 주례사가 『옥중서신』에 이렇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당신들의 사랑은 당신들만의 것이며 개인적인 것입니다. 그러나 결혼은 초개인적인 어떤 것이며 하나의 신분, 하나의 직분인 것입니다. 사랑은 당신들로부터 오고 결혼은 위로부터 다시 말하면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인간보다 높고 보다 신성하듯이 결혼의 권리와 그 약속은 사랑의 신성이나 권리나 약속보다도 훨씬 더 높은 것입니다. 당신들의 사랑이 결혼을 유지하는 것이 아니라 결혼이 당신들의 사랑을 유지해 나가는 것입니다.” 여러분 이처럼 결혼의 신성함과 의무에 대해서 생각해 본 적이 있습니까? 자신의 감정만을 중시하고 하나님을 가볍게 대하니까 우리 가정이 흔들리는 것입니다.

이혼 증서의 문제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시자 마태복음 19장 7절에서 바리새인들이 이렇게 다시 묻습니다. “그러하면 어찌하여 모세는 이혼 증서를 주어서 내어 버리라 명하였나이까” 이는 오늘 본문에서 주님께서도 언급하셨던 말씀으로 신명기 24장 1절에 나와 있는 말씀입니다. 이에 대해서 주님은 8절에서 “모세가 너희 마음의 완악함을 인하여 아내 내어 버림을 허락하였거니와 본래는 그렇지 아니하니라”고 단호하게 말씀합니다. 원래 하나님의 뜻은 이혼하지 않고 사는 것이었는데 너희 마음이 완악해서 부분적으로 허용해주었다는 뜻입니다.

이혼 증서 제도는 사실 여자를 보호하기 위해서 만들어졌습니다. 남자들이 자기 아내와 살기 싫으면 여러 가지 핑계와 거짓 누명을 씌워 여자를 좇아냅니다. 이렇게 되면 남자는 마음대로 다시 결혼할 수 있지만 여자는 평생 낙인이 찍힌 채 결혼도 못하고 살아야 합니다. 이런 일이 비일비재하자 하나님은 모세를 통하여 그러면 이혼 증서라는 것을 써주게 합니다. 그러면 남자도 거짓 증거를 만들지 않을 것이요, 이혼 증서를 써야하기 때문에 함부로 이혼을 할 수 없습니다. 또 이혼증서를 가진 여자는 다시 재혼할 수 있게 됩니다. 그런데 이 이혼증서는 자기가 싫다고 마음대로 쓸 수는 없고 신명기 24장 1절에서는 “수치스러운 일이 그에게 발견되거든”이라는 조건을 달고 있습니다.

예수님 당시에 이 ‘수치스러운 일’이 무엇이냐를 두고 랍비들 간에 논쟁이 벌어졌습니다. 이중 율법을 엄격하게 해석했던 샴마이 학파는 예수님의 말씀처럼 ‘음행’만이 유일하게 수치스러운 일이라고 해석했습니다. 반면에 율법을 보다 자유롭게 해석했던 힐렐 학파는 수치스러운 일로 여자가 음식을 태우거나, 여자가 지나치게 수다스럽다든지, 여자가 무례하고 다투기를 잘 하며, 심지어 자기 아내보다 다른 여자가 더 매력적일 경우도 여기에 해당한다고 하였습니다. 여러분은 어떤 학파가 옳은 것 같습니까? 아마 대부분의 남자들은 힐렐 학파를 지지하고 여자들은 샴마이 학파를 지지했을 것입니다. 힐렐 학파처럼 해석하면 남자들 편한 대로 이혼증서를 써줄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뜻은 한 남자와 한 여자가 만나 평생을 사는 것입니다. 그런데 왜 하나님은 이혼증서를 써주라고 하였느냐? 주님은 너희가 완악해서 그렇다고 말씀하십니다. 완악하다는 것은 무엇입니까? 완악하다는 것은 마음이 굳고 굳어져 단단하다는 뜻입니다. 하나님 말씀이 도무지 들어가지 못할 정도로 단단합니다. 이것이 당시의 시대상이었습니다. 권력을 가진 남자들은 여러 아내나 여자를 거느리고 자기 육체의 욕망대로 살고 싶은 것입니다. 그러다 보니 죽어나는 것은 여자들이지요. 주님은 그래서 차선책으로 이혼증서 제도를 모세를 통해서 허락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들처럼 완고한 분이 아니십니다. 우리의 형편과 연약함을 아시고 때로는 채찍으로 때리시기도 하시지만 때로는 우리 수준에 맞추어 낮추시기도 하십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 예수님은 이런 하나님의 마음을 우리에게 분명하게 드러내고 계십니다. 

음행한 연고 없이

그런데 이 말씀을 전하시면서도 예수님 또한 예외조항을 달아두십니다. 산상수훈 말씀들은 예외 없이 엄격합니다. 형제에게 성내거나 욕하거나 미련한 자라 하는 자도 살인에 준하는 형벌을 받게 되리라고 말씀합니다. 마음속에 음욕을 품는 자마다 간음한 자라고 말씀합니다. 그렇지만 이혼과 관련해서는 유일한 예외 조항이 붙습니다. “음행한 연고없이” 라는 구절입니다. 음행과 관련된 경우에는 이혼이 가능하다는 것입니다. 저는 이 예외조항이 인간의 연약함을 아시는 하나님의 사랑이라 생각합니다. 음행한 연고라면 직접적으로는 배우자의 외도를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을 좀 더 넓은 의미로 해석하면 도무지 결혼 생활이 유지되지 못할 경우라고 해석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정말 어떤 부부 같은 경우에는 이혼을 권하고 싶은 부부도 있습니다. 두 사람이 너무 싫어하여 원수처럼 대할 때입니다. 한쪽의 무능력이나 폭력, 악한 습관으로 그 배우자가 견딜 수 없는 고통을 당할 때입니다. 아마 요한 웨슬리의 경우일 것입니다. 요한 웨슬리는 감리교를 창시하고 영국 부흥운동을 이끈 경건한 사람이었지만 그의 결혼 생활은 극히 불행했습니다. 

요한 웨슬리의 부인은 성경 욥기에 나오는 욥의 아내와, 소크라테스의 아내 크산티페와 함께 3대 악처에 손꼽힐 정도의 여자였습니다. 요한 웨슬리는 47세라는 늦은 나이에 그 아내 몰리와 결혼을 했습니다. 그동안 요한 웨슬리 주위에는 많은 여인들도 있었고 결혼할 기회가 있었지만 웨슬리는 결정적인 순간에 미적미적하며 우유부단한 모습을 보였습니다. 그 모습에 실망하여 여자들이 떠나갔습니다. 그러다 나이도 들어가고 또 실연의 아픔 속에 웨슬리는 어느 날 충동적으로 결혼을 하고 말았습니다. 구혼하고 15일만에 결혼을 했는데 그 형제들과 상의하지도 않고 결혼을 했으니까요. 몰리라는 여자는 아이 넷을 둔 과부였습니다.

그러나 요한웨슬리는 한 가정의 가장이 되기에는 부족한 사람이었습니다. 매일 설교 서너 번씩 해야 했으며(평생 총 42,000회의 설교), 부흥 집회를 위해서 오랫동안 집을 비우기 일쑤였습니다. 또 다른 여자들에게는 친절하게 대했지만 자기 아내에게는 그렇지 못했습니다. 이런 남편에 대해서 몰리는 화가 나서 결혼한 지 1년 갓 넘어서 부부싸움하다 그 머리채를 잡아 뽑기도 하였습니다. 

요한 웨슬리는 독선적인 성격이 강했고, 그 아내 몰리는 극단적인 감정의 소유자였습니다. 요한 웨슬리는 자기 아내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10가지 불평을 늘어놓기도 했는데 그 내용은 이렇습니다. 자신의 사무실에서 몰리가 도적질하는 것, 편지를 훔쳐보는 것, 중상모략, 차를 대접하기 위해 친구도 초대할 수 없는 자신의 처지, 집에 들어오면 포로 같은 느낌, 귀에 거슬리는 상소리들 등이었습니다. 이들의 결혼 생활에 대해 한 작가(스탠리 아이링)는 “거창한 이름뿐인 부적절한 결혼, 여러 번 헤어져 지냈으나 1776년(마지막으로 헤어진 때, 요한 웨슬리의 나이 73세)까지는 끝나지 않은 결혼, 1년 내내 계속되는 싸움, 싸움, 싸움” 

사실 웨슬리는 사랑 없이 결혼을 했습니다. 그는 거침없이 자기 아내를 향하여 “내가 진 십자가”라고 말하거나 “만약 당신이 천년을 산다고 해도 당신이 끼친 해악을 원상복구할 수 없을 것이요”라는 악담도 퍼부었습니다. 이 둘은 수차례 별거와 재회를 반복했습니다. 나중에 자신의 결혼생활을 회고하며 웨슬리는 이렇게 표현했습니다. “만약 나의 부인이 훌륭한 아내였더라면 자신은 하나님께서 부르신 그 위대한 사역에 충성을 다하지 못했을 것이다” 물론 이것도 일면의 사실이지만 두 사람의 사랑은 실패하고 말았습니다. “요한 웨슬리와 그 아내 몰리”(『복음주의자의 아내들』, 두란노)에 대해서 글을 썼던 윌리암 피터슨은 요한웨슬리를 이렇게 평가합니다. “요한 웨슬리는 그의 일과 결혼한 까닭에 하나님께서 주신 결혼에 신실하지 못한 중죄를 저질렀다. 때때로 하나님의 종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과 하나님의 일을 사랑하는 것을 구별하지 못하는 실수를 범하기 쉽다”

이런 경우 이 둘은 이혼을 하지 않았기에 하나님의 직무에 형식적으로나마 충실했다 할 것입니다. 그러나 대부분의 가정생활에서 불행했으며, 서로를 미워했으며, 오랜 세월 별거해야 했습니다. 웨슬리야 자기 일이 있다지만 한 여자의 인생은 어떻게 되었습니까? 요즘 같으면 당장 이혼하자고 나설 것이며 실제 주변에는 목회자이면서도 이혼한 분도 많습니다. 이런 가정들이 저에게 상담한다면 저는 어떻게 답변해줄까요? 

이런 경우라면 주님께서 말씀하신 ‘음행한 연고 외에’ 라는 예외 조항에 해당한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이미 결혼 관계는 파괴되었습니다. 그냥 성경에서 금지하고, 또 다른 사람들의 이목이 두려워 단지 그 형식적인 끈만 놓지 않고 있을 뿐입니다. 이혼이 하나님 앞에서 죄지만 사랑 없는 결혼 생활을 하고, 서로가 자신을 불행한 존재로 여기며, 서로를 미워하며 살아야 하는 더 큰 악에 비한다면 오히려 작은 악이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또 인간이 짓는 죄가 이혼의 죄 뿐입니까? 도적질과 거짓, 우상숭배 등 십계명에서 금하고 있는 불의한 죄들이 많은 데 꼭 결혼에 대해서만 이렇게 엄격한 자대를 들이대야 하는 것은 문제가 아닙니까? 그렇다고 해서 제가 이혼을 찬성하는 것은 아닙니다. 인간이 살다보면 연약해서 어쩔 수 없는 선택을 해야 할 경우도 있다는 것입니다. 본인들도 좋아서 그렇게 결정하는 것은 아닐 것입니다. 정말 도무지 견딜 수 없어서 그렇게 하는 것 아니겠습니까? 

우리 주님은 우리 연약함을 아시고 어쩌면 조그만 탈출구를 열어주셨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하나님의 원래 뜻은 아닙니다. 평생을 지옥처럼 사느니 차라리 죄를 지을망정 서로 해어져 다시 행복을 찾기를 바라는 하나님의 사랑이라 할 것입니다. 주님은 우리의 어떤 죄에 대해서도 용서하시기를 원하십니다. 간음하다 현장에서 잡혀 예수님 앞에 끌려온 여인을 향하여 주님은 돌로 치지 않으셨습니다.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아니하노니 가서 다시는 죄를 범치 말라”(요8:11) 주님은 용서하셨는데 어떤 때는 사람들이 더 가혹하게 할 때도 있습니다.

대신 저는 이혼할 때 결혼할 때처럼 이혼식도 했으면 좋겠습니다. 제 막연한 생각이 아니라 실제 미국 감리교에서는 이혼예식 모범이 있습니다. 이 이혼예식에는 부부가 함께 참여할 수도 있고 개별적으로 참여할 수도 있습니다. 그 기도문의 일부를 읽어드리겠습니다.

“무궁한 사랑과 끝없는 이해로 우리를 돌보시는 하나님. 우리를 치료하는 주님의 성령을 이 형제에게 부어 주십시오. 이 형제가 자신의 결혼생활의 실패를 반성하면서, 새로운 출발을 하고자 합니다. 이 형제가 입은 상처와 당하고 있는 슬픔을 치료해 주십시오. 쓰라린 과거를 다 등 뒤로 던져 버릴 수 있는 능력을 허락해 주십시오. ...... 이 형제가 자신의 내면을 들여다보고 있습니다. 결혼생활을 파멸로 이끈 자신의 결점과 다른 사람들에게 상처를 준 자신의 결점을, 하나하나 발견하고 있습니다. 지난날의 잘못을 용서하여 주십시오. 새로운 삶을 살아갈 수 있도록 능력을 주십시오. 이 형제에게 주신 자녀를 보살펴 주십시오. 우리가 그 자녀들의 상처를 치유할 수 있도록 도와주시기 바랍니다. 이 형제의 부모들과 친구들이 입었을 상처를 위하여 기도합니다. 그들의 상처를 어루만져 주시고 낫게 하여 주십시오. 새로운 현실을 받아들일 수 있게 하여 주십시오. 이 모든 말씀을 우리를 과거의 속박에서 해방시켜 주시고 만물을 새롭게 하시는 우리의 구세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좀 괴로울 수도 있겠지만 이 과정을 통해서 우리는 다시 한 번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만남과 가정의 소중함과 신성함을 새롭게 할 수 있지 않겠습니까? 이런 과정을 통하여 자신의 과오를 용납하고 공식적으로 용서받을 수 있는 계기가 되지 않겠습니까?

우리 인생에서 결혼처럼 소중한 만남도 없습니다. 소중한 만큼 신중하게 결정해야 할 것이며, 결혼한 이후에는 그 결혼을 유지하도록 우리 최선을 다하여야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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