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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부부주일] 행복한 부부 (엡 5:22~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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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한 부부 (엡 5:22~25)

사이가 좋지 않은 부부의 대화를 소개합니다. 아내가 남편에게 말했습니다. “엄마 충고를 새겨들었어야 했어! 당신하고 결혼하지 말았어야 했는데...”, “장모님이 우리 결혼을 반대 하셨단 말이야?”, “그럼, 결사적으로 반대 하셨지...”, “와~ 장모님이 그렇게 훌륭한 분인 걸 미처 모르고 있었군..!”

얼마나 불행한 결혼생활입니까? 부부는 이 세상을 살면서 가장 오랫동안 동행하는 사람이기에 부부이며 친구이며 애인이 되어야 합니다. 서로 원수처럼 살아야 한다면 고달픈 인생이 되는 것입니다. 
돌아오는 5월 21일은 부부의 날입니다. 가정의 달 5월 21일을 부부의 날로 정한 것은 둘이 하나가 되었다는 의미입니다. 오늘은 [행복한 부부]라는 제목으로 행복한 부부가 되기 위해서 필요한 몇 가지를 말씀드리도록 하겠습니다. 

1. 부부는 하나님이 짝 지워 주신 줄 믿어야 행복합니다.  

과거의 우리나라 가정생활을 돌아보면 지금보다 더 많은 문제들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대부분 이혼하지 않고 살았습니다. 그 이유는 예전에는 부부를 ‘천정배필(天定配匹)’이라고 했습니다. ‘하늘이 정해준 배우자’라는 말입니다. 또 ‘천생연분(天生緣分)’이라고도 말했는데 그 뜻은 ‘하늘이 맺어준 연분’이라는 말입니다. 부부는 하늘이 맺어준 배필이요, 연분이라는 사상이 있었기 때문에 미우나 고우나 팔자거니 여기면서 참고 견디었던 것입니다. 성경 마19:6에 보면 예수님은 “하나님이 짝 지워 주신 것을 사람이 나누지 못할지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오가다 만나서 결혼을 했어도 그 속에 하나님의 섭리가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짝 지워주신 부부가 나뉜다면 서로의 완전함을 깨게 되고 상대에게 상처를 주고 자신도 상처를 입게 되는 것입니다. 창 2:24에 보면 하나님께서 아담과 하와의 결혼식 주례사를 통해서 “남자가 부모를 떠나 그의 아내와 합하여 둘이 함 몸을 이룰지로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여기서 남편과 아내가 합한다고 할 때 ‘합하여’라는 단어는 종이 두 장을 풀로 완전히 붙인다는 뜻이 있습니다. 

여러분! 생각해보세요. 종이에 풀칠을 해서 두 장의 종이가 쫙 달라붙었는데 그 종이를 떼어내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찢어지고 쪼개지고 엉망진창이 됩니다. 그런 것처럼 부부가 어떠한 이유에서든 이혼을 한다면 서로에게 큰 상처가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붙여 놓으셨으면 우리는 영원히 붙어 있어야 되는 줄 알고 살아야합니다. “둘이 한 몸을 이룰지로다”에서 ‘이룬다’는 말은 둘이 함께 엮어진다는 뜻입니다. 마치 옷감의 씨줄과 날줄이 서로 역어져서 옷감을 만들 듯이 부부는 그렇게 하나가 된다는 말입니다. 씨줄 없이 옷감이 될 수 없고 날줄 없이도 옷감이 될 수 없습니다. 상대가 있기에 내가 있고 내가 있기에 상대가 있는 것입니다. 

이혼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이혼한 사람을 무조건 비난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인간사에는 피치 못할 일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나님도 이혼을 금하셨지만 예외조항을 두셨던 것입니다. 신 24:1절에 이런 말씀이 나옵니다. 사람이 아내를 취하여 데려온 후에 수치 되는 일이 아내에게 있음을 발견하고 남자가 아내를 기뻐하지 아니하면 이혼증서를 써서 그 손에 들려 내보낼 것을 말씀합니다. 또 고전 7:15에서는 신앙적인 갈등이 있을 때 상대가 갈라지자고 하면 갈라지라고 말씀합니다. 가정생활은 혼자 잘한다고 잘되는 것이 아닙니다. “손바닥도 마주쳐야 소리가 난다”고 하지 않습니까? 내가 아무리 잘해도 상대가 막 나가면 안 되는 것입니다. 

우리 주변에 보면 그 사람은 괜찮은 사람인데 배우자 때문에 어쩔 수 없이 갈라서는 사람도 있습니다. 예를 들어서 배우자가 바람을 피우는 경우입니다. 또 어떤 사람은 가족들에게 폭력을 사용해서 가족들의 목숨까지 위험에 빠뜨리는 사람도 있습니다. 신앙생활 하는 것을 이해하지 못하고 적극적으로 핍박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 외에도 도저히 가정생활을 계속할 수 없는 경우가 있습니다. 이런 경우 성경은 이혼을 적극적으로 권장하는 것은 아니지만 허용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청년들은 부부를 하나님께서 짝 지워주시기 때문에 좋은 배우자를 만나기 위해서 하나님께 기도해야 합니다. 기도할 때는 구체적으로 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우리의 기도에 반드시 응답하시는 분이기 때문입니다. 제 아내는 청년시절에 신랑감을 위한 몇 가지 기도제목이 있었습니다. 그 기도의 제목을 가지고 열심히 기도했는데 결혼을 하고보니 자신이 구한대로 하나님께서 그대로 응답해주셨다고 간증합니다. 

아내가 결혼을 하고 생각해보니 청년시절 배우자를 위한 기도제목 중에 몇 가지 아쉬운 것 있습니다. 아내는 기도할 때마다 “돈은 없어도 좋사오니”라는 말을 하면서 기도했다고 합니다. 그런데 제가 결혼할 때 정말 돈이 없었습니다. 또 하나는 키를 놓고 기도를 하지 않았습니다. 아마 제 아내가 “하나님 제 배우자의 키는 180cm는 되어야 합니다”라고 기도했다는 저의 키가 180cm가 되었을 텐데 말입니다. 그러므로 제가 키가 작은 것은 제 아내가 기도를 잘못했기 때문입니다. 
기도하고 결혼하십시오. 결혼을 하셨으면 상대를 하나님이 주신 줄 알고 행복한 가정을 만들도록 노력하십시오.


2. 부부가 같은 비전을 가져야 행복합니다. 

바라보는 방향이 다르면 가는 방향도 다른 것입니다. 서로 다른 방향을 바라보면서 함께 간다면 서로 힘들게 됩니다. 부부는 함께 멍에를 맨 것입니다. 서로 다른 방향을 바라보고 자신이 원하는 방향으로 가려고 한다면 약한 사람이 강한 사람에게 끌려갈 수밖에 없습니다. 그렇게 되면 서로 피곤한 인생이 되는 것입니다.  

부부가 바라보는 비전은 신앙 안에서 하나님이 주신 방향이어야 합니다. 즉 두 사람이 함께 하나님이 주신 사명을 바라봐야 합니다. 아담의 사명은 에덴동산을 관리하는 일이었습니다. 하나님은 그 사명을 잘 감당하도록 동역자인 하와를 주신 것입니다. 성경은 하와를 돕는 배필이라고 합니다. 그러므로 결혼의 목적은 고독과 음란을 이기기 위한 것도 되겠지만, 가장 중요한 것은 하나님이 주신 사명을 감당하기 위하여 동역자가 되는 데 있는 것입니다. 

어떤 부부는 이것을 깨닫고 사명을 위해서 충성합니다. 이런 가정은 하나님 보시기에 심히 좋은 가정입니다. 부부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합심한다면 다윗을 생각하사 유다 멸망시키기를 기뻐하지 않으셨던 하나님께서 후손들을 책임지실 것입니다. 

두 사람 중 한 사람은 하나님이 주신 비전을 향해서 달려가는데 상대는 비전은 둘째 치고 신앙생활까지 못하게 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대부분 여자는 믿음으로 사는데 남자가 믿음으로 못사는 경우가 많습니다. 이런 경우 믿음 없는 사람이 믿음 있는 사람에게 맞추어주는 것이 좋습니다. 진정한 신앙인은 약한 듯하지만 결코 이길 수 없는 존재입니다. 핍박을 받으면 받을수록 더 하나님 앞에 나아갑니다. 역사를 보면 신앙을 지키기 위해서 목숨까지 버린 사람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죽으면 죽었지 신앙을 버리지 않습니다. 차라리 믿음 없는 사람이 믿음이 좋은 배우자를 따라가는 것이 하나님 보시기에도 좋은 것이고 가정의 행복을 지키는 방법입니다. 

간혹 어떤 부부는 나쁜 일을 하는 데는 죽이 잘 맞습니다. 그런 가정은 행복할 것 같지만 불행해집니다. 그런 집은 사단이 주인이 되어서 설치게 됩니다. 사단은 도적놈입니다. 그 놈은 도적질 하고 죽이고 멸망시키는 짓을 합니다. 거기다가 하나님의 저주가 있기에 결코 축복된 가정이 될 수 없는 것입니다. 대표적인 부부가 아나니아와 삽비라입니다. 행5:1에 보면 “아나니아라 하는 사람이 그 아내 삽비라로 더불어 소유를 팔아”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여기에서 ‘더불어’라는 단어가 인상적입니다. 아나니아가 거짓을 행하려고 할 때 만약 그 아내가 “여보, 하나님 앞에서 진실합시다.”라는 충고를 했다면 상황은 얼마나 달라졌겠습니까? 그러나 그렇지 못했습니다. 두 사람은 마음이 하나가 되었습니다. 그들은 더불어 거짓을 행했습니다. 결국 두 사람 다 죽음을 당하게 되었습니다. 

부부는 믿음 안에서 서로를 세워야 합니다. 그리고 함께 하나님이 주신 비전을 향해서 힘을 모아야 하는 것입니다. 돈을 많이 벌고 세상에서 성공하는 것보다 하나님이 자기 부부에게 주신 사명을 알고 그 사명을 위해 사는 것이 진정한 행복인 것입니다. 

부부는 사명의 길을 함께 가며 서로에게 기댈 수 있어야 합니다. 상대를 통해서 안식을 얻을 수 있어야 한다는 말입니다. 탈무드에 보면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혼자 사는 어떤 거지가 길을 가는데 등이 가렵습니다. 마침 가려운 곳이 등골 깊숙한 곳이라 손이 닿지 않았습니다. 옆에는 대신 긁어 줄 사람도 없습니다. 그래서 바로 옆에 있는 랍비의 담장에 등을 대고 비볐습니다. 

그런데 그 광경을 본 집주인 랍비가 거지를 집으로 불러들였습니다. 영문을 모르고 불려 들어온 거지는 랍비의 배려로 목욕도 하고 옷과 좋은 음식을 제공받고는 상당액의 용돈까지 제공받았습니다. 그러자 그 소문이 나면서 어느 약삭빠른 거지 부부가 랍비의 집으로 가서 그 집 담장에 등을 비비기 시작했습니다. 아니나 다를까 그 광경을 본 랍비가 그들을 들어오도록 했습니다. 이에 거지 부부는 융숭한 대접을 받을 줄 알고 기뻐하며 들어갔습니다. 그런데 랍비가 하인들을 시켜 다짜고짜 매를 치게 합니다. 거지 부부가 억울해서 따졌습니다. 그러나 랍비가 말하길 “전에 그 사람은 대신 등을 긁어 줄 사람이 없었기에 내가 후대하였다. 그러나 너희는 부부이면서 담장에 등을 비비는 것은 옳지 못하다. 서로 등을 긁어 주면 될 것 아니냐?”라고 했습니다. 부부는 서로에게 힘이 되어주어야 행복합니다. 


3. 부부는 서로 이해해야 행복합니다. 

벧전3:7에 보면 “남편들아 이와 같이 지식을 따라 너희 아내와 동거하고”라고 했습니다. ‘지식을 따라’라는 말은 ‘아내가 어떠한 사람인지 이해를 하면서’라는 말입니다. ‘이해’란 영어로 ‘understanding’인데 이는 ‘남의 밑에 서 본다’는 말입니다. 남편은 아내, 아내는 남편 입장에 서보는 것입니다

감자먹다 싸운 부부이야기 아십니까? 어느 가정에서 감자를 쪘는데 아내가 감자와 설탕을 식탁에 놓았더니 설탕을 찍어서 먹었습니다. 남편이 그 모습을 보더니 “아니, 세상에 감자를 설탕 찍어먹는 사람이 어디 있어! 감자는 소금을 찍어 먹어야지”라고 소리를 질렀습니다. 그러자 아내가 “우리 집은 늘 설탕을 찍어먹었는데, 나는 감자를 소금에 찍어 먹는 사람 본 일이 없어요!”라며 대꾸했습니다. 그래서 부부는 감자를 먹다가 싸움을 하게 되었습니다. 해결이 안 되니 부부는 상담자를 찾아갔습니다. 그랬더니 상담자가 “간단하네요. 설탕과 소금 둘 다 같다 놓고 잡수세요”라고 말했습니다. 그리고 돌아가는 부부에게 “우리 집은 고추장 찍어 먹습니다”라고 말했다고 합니다. 이 부부의 싸움은 서로에 대한 이해 부족으로 인해서 발생한 싸움입니다. 상대의 자라온 배경과 내가 자라온 배경은 다릅니다. 서로를 이해할 수 있다면 대부분의 충돌은 피할 수 있습니다. 

부부는 20, 30년 동안 서로 다른 문화에서 자랐기 때문에 서로를 이해하는데 시간이 걸립니다. 가정 상담가 딘 마틴이 쓴 [좋은 결혼은 갑자기 이루어지지 않는다]라는 책에는 “당신은 좋은 남자를 만났다고 생각합니까?”라는 설문에 대한 통계가 소개되고 있습니다. 결혼 후 1년 째 되는 아내들은 98%가 “예”라고 대답을 합니다. 그런데 결혼 후 2년 정도 지나면 통계가 뚝 떨어져서 56%만 “예”라고 대답을 합니다. 더 나가서는 10년쯤 되면 이제는 권태기라 그런지, 단지 6%만 “예”라고 대답을 하고 있습니다. 

여러분 부부 중에 10년쯤 되는 분들이 있습니까? 그 때가 제일 위험한 고비입니다. 그런데 그 다음을 보십시오. 결혼 한지 20년이 지난 뒤에 “당신은 좋은 남자를 만났다고 생각합니까?”는 질문에 무려 95%가 “예”라고 대답을 하더랍니다. 이 통계를 제시하면서 딘 마틴은 말하기를 “부부가 상대를 이해하고 한 짝으로 안정감을 가지려면 20년은 걸린다. 20년 이전에 헤어지는 것은 조급한 결정이다”라고 했습니다. 처음에는 사랑의 콩깍지가 씌워서 상대를 좋은 사람으로 생각하다가 시간이 지나면서 상대의 이해 할 수 없는 부분을 발견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상대를 좋은 사람으로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한 20년 정도 함께 살다보니 상대를 이해하게 되고 상대를 이해하니 상대가 좋은 사람이라는 사실을 발견하게 되는 것입니다. 초창기에는 진짜 좋은 사람인 것을 발견한 것이 아닙니다. 그냥 콩깍지가 씌워서 그렇게 본 것입니다. 20년이 지난 후에는 진짜로 상대를 이해하고 상대의 좋은 점을 발견해서 좋은 사람이라고 대답한 것입니다. 

모든 부부가 다 그런 것은 아니지만, 일반적으로 하나님이 부부를 짝 지어주실 때에 대조적인 사람과 만나게 하시는 것 같습니다. 한 사람이 느긋하면 한 사람이 팔팔하고, 한 사람은 깔끔하고 한 사람은 좀 지저분하고, 한 사람은 열이 많아서 시원한 것이 좋고 한 사람은 손발이 차서 따뜻한 것이 좋습니다. 한 사람은 무슨 일이든지 철저히 하는데 한 사람은 어물쩍 해버립니다. 한 사람은 말이 많고 한 사람은 그저 듣기만 합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짝 지워 주신 조화입니다. 그런데 대부분 나와 다른 상대를 이해하지 못하고 이해하려고도 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다른 점을 공격합니다. 

갈보리교회 이필재 목사님은 자기 부부에 대해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저는 제 아내와 결혼한 지 어언 40년이 되어 갑니다. 저는 비교적 직선적인 성격이기 때문에 돌려가면서 말할 줄을 모릅니다. 그런데 제 아내는 절대로 직선적으로 말하는 적이 없고 쓱 돌려가면서 말합니다. 제가 그것을 잘 이해하지 못해서 고생을 많이 했습니다. 쉬운 예로 제 아내가 '당신 냉면 생각 없어?'하면 저는 냉면 생각이 없을 때는 '글쎄, 냉면 생각 없는데'라고 응답을 합니다. 그런데 그 때는 그것이 내게 묻는 것이 아니라, 제 아내가 냉면이 먹고 싶은 것을 간접적으로 표현한다는 사실을 얼마 전에야 알았습니다. 그것을 깨닫는 데 무려 36년이 걸렸습니다. 그러니 제 아내가 얼마나 답답했겠어요? 그래도 아내가 그것을 참고 또 참으면서 인격자가 된 것입니다. 사랑으로 참은 거예요. 그러나 사랑이 없으면 서로 다투다가 결국은 서로 헤어지는 비극을 초래하는 것입니다.”라고 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나의 배우자는 결코 나와 똑같지 않습니다. 서로 다른 배경에서 자라왔습니다. 적극적으로 상대를 이해하십시오. 그래야 서로를 위해줄 수 있고 서로 행복할 수 있습니다. 


4. 부부는 주님의 법칙대로 살아야 행복합니다. 

오늘 본문에서는 부부의 법칙을 말씀합니다. 아내들은 남편에게 복종해야 합니다. 마치 교회가 주님에게 복중하듯이 그렇게 수준 높은 복종을 요구합니다. 남편들은 아내 사랑해야 합니다. 마치 주님께서 교회를 사랑하시듯 그렇게 목숨 걸고 사랑해야 합니다. 

이 말씀을 잘 알고 있는 그리스도인들 가운데는 자신은 아내로서 혹은 남편으로서의 의무와 책임을 다하지 않으면서 권리만을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아내는 남편에게 복종하지 않으면서 남편에게는 사랑을 요구하고, 또 남편은 아내를 위하여 목숨을 건 사랑을 하지 못하면서 아내에게는 복종을 요구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1) 아내는 남편에게 복종해야 합니다. 

22에 보면 아내들은 남편에게 복종하라고 말씀합니다. 남편에게 복종하는데 그 수준이 주님께 하듯 하라고 말씀합니다. 
이 말씀의 의미는 남편이 주님과 똑 같다는 의미가 아니라 주님께 복종하듯이 남편에게도 그렇게 하라는 것입니다. 남편과 주님 중에서 누구에게 먼저 복종을 해야 합니까? 주님이 먼저입니다. 남편에게 하듯 주님에게 하라가 아니고 주님께 복종하듯 남편에게 하라는 것입니다. 이 순서가 바뀌면 신앙생활 자유롭게 할 수 없고, 가정생활에 행복이 있을 수 없습니다. 

많은 남편들이 주님보다 자신에게 먼저 복종할 것을 요구합니다. 그리고 아내들도 남편의 요구에 따라주는 경우를 흔히 볼 수 있습니다. 남편이 주일날 예배드리기 보다는 등산, 낚시, 무슨 모임에 가거나 가족끼리 놀려가자 하면서 엉뚱한 길로 나아갈 때 아내로서 어떻게 해야 합니까? 누구에게 복종해야 합니까? 주님께 복종해야합니다. 그렇게 하는 것이 남편을 위하는 길이요, 가족을 위하는 길이요, 하나님의 은혜와 축복을 받는 길입니다. 

주님의 뜻과 남편의 뜻 중에 먼저는 주님의 뜻입니다. 그러나 주님의 뜻과 어긋나는 일이 아닐 때는 아내는 자신의 고집대로 하지 말고 남편에게 복종해야 합니다. 
아내가 남편에게 복종해야 하는 이유를 23절에서는 주님께서 교회의 머리가 되시듯 남편은 아내의 머리이기 때문이라고 말씀합니다. 몸이 머리를 움직이는 것이 아니라 머리가 몸을 움직이게 하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교회도 머리이신 주님이 교회를 움직이시는 것이지 몸 된 교회가 머리이신 주님을 조정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남편과 아내도 마찬가지입니다. 남편은 아내의 머리입니다. 머리인 남편이 아내를 움직이는 것이 성경적인 가정생활입니다. 

하지만 요즘은 사회가 여권신장이 잘 되어서 그런지 여자들은 점점 강해지고 남자들은 점점 약해지는 것 같습니다. 가정에서도 남자가 여자에게 복종하는 시대가 된 것 같습니다.

제미 있는 이야기 하나 합시다. 저는 요즘만 그런지 알았더니 과거에도 그랬던 것 같습니다. 이런 유머가 있습니다. 조선 시대에 임금님이 신하들에게 “아내의 말을 잘 듣는 남자는 빨간 기 쪽에 서시고, 아내의 말을 안 듣는 남자는 노란 기 쪽에 서시오”라고 했더니 총 50명 중에서 빨간 기 쪽에 선 사람이 49명이었고 단 한 명만 노란 기 쪽에 섰답니다. 깜작 놀란 임금님이 그 신하에게 “어떻게 그대는 아내의 말을 안 듣는가?”라고 했더니 신하 왈 “오늘 아침 아내가 사람이 많이 모인 곳에는 절대 가지 말라고 해서 이곳에 섰습니다”라고 대답하자 임금님이 껄껄 웃었다고 합니다.

사라는 아브라함을 주라고 불렀습니다. 그 말은 “나는 당신의 종입니다”라는 뜻입니다. 종은 주인이 하자는 대로 하는 것입니다. 오늘부터 부인들은 남편에게 “예”만 잘 해보십시오. 진리에서 어긋나는 것이 아니라면 무조건 “예”라고 하십시오. 순종해서 큰 일 날이 아니라면 “예”라고 하십시오. 좀 귀찮은 일을 시켜도 “예”, 좀 맘에 안 드는 일을 시켜도 “예”라고 대답하시고 싱글벙글 웃으며 순종하십시오. 행복한 가정이 될 것입니다. 

  2) 남편은 아내를 사랑해야 합니다. 

주님께서 교회를 얼마나 사랑하셨습니까? 교회를 위하여 자신을 주셨습니다. 교회를 위하여 십자가에서 죽으실 만큼 교회를 사랑했습니다. 25절에서는 남편이 아내를 사랑하는데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사랑하신 정도로 사랑해야 한다고 말씀합니다. 

사회적으로도 꽤 이름이 알려진 장로님 부부에게 어느 분이 질문을 했습니다. “장로님 부부는 어떻게 화목을 이루고 사십니까?” 그 장로님이 대답합니다. “제가 마누라에게 쥐어 지내지요. 그래야 가정이 평안합니다. 힘없는 여자에게 이겨서 무엇 합니까?” 그러자 옆에 있던 장로님 부인 권사님이 “그러나 이 양반은 평소에는 그저 허허거리며 호인 같다가도 한번 고집을 부리면 누구의 말도 듣지 않아요”라고 말했습니다. 그 장로님은 평상시에는 아내의 말대로 다 해주다가 머리로서 이대로 갔다가는 가정이 위험하다 싶을 때는 단호한 모습을 보인 것 같습니다. 남편은 그래야 합니다. 평상시에는 아내를  사랑하기에 아내가 원하는 대로 다 해줄 수 있어야 합니다. 그렇지만 머리로서 중요한 일들에 대해서는 분명한 자세를 보여야 합니다. 그런데 많은 남자들이 이와 반대되는 모습을 보일 때가 있습니다. 그냥 넘어갈 수 있는 일, 아주 사소한 일에는 자존심을 세우고 대접을 받으려고 합니다. 그런데 정작 중요한 일은 책임감 있게 감당을 못합니다. 

여자와 남자의 차이점은 남자는 속사랑이 있어도 잘 표현하지 않고 여자는 표현되어야만 사랑으로 느낀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남편은 아내에게 사랑을 표현해야 하는 것입니다. 아담은 하와를 보자마자 “이는 내 뼈 중에 뼈요 살 중의 살이라”고 표현했습니다. 이 표현은 “당신 없는 세상은 물 없는 오아시스요”라는 표현과 비슷한 사랑의 고백입니다. 이렇게 사랑을 표현하는 것이 타락 전 인간의 모습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도 사랑을 표현해야 행복한 가정을 이룰 수 있는 것입니다. 

사랑은 표현해야 전달됩니다. 영국의 수상을 지낸 윈스턴 처칠 경은 아내에게 사랑을 잘 표현한 것 같습니다. 하루는 기자 한 사람이 질문을 던졌습니다. “만일 수상께서 다시 태어나신다면 그때는 어떠한 일을 하시겠습니까?” 아마도 그 질문은 이러한 뜻이었을 것입니다. “만일 수상께서 다시 태어난다 하더라도 정치인으로서의 삶을 또 사시겠습니까?” 그런데 뜻밖에도 처칠은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만일 내가 다시 태어난다고 할지라도 한 가지 사실만큼은 분명할 것입니다. 또다시 나는 내 아내의 남편이 될 것입니다.” 옆에서 그 말을 듣고 있던 처칠의 아내는 무척이나 행복했을 것입니다. 

솔로몬은 자기가 사랑했던 술람미 여인에게 그녀를 향한 자신의 사랑을 너무나 분명하게 표현했습니다. 아 2:2“여자들 중에 내 사랑은 가시나무 가운데 백합화 같구나”, 2:3에서는 “나의 사랑하는 자는 수풀 가운데 사과나무 같구나”라고 했습니다. 

남편은 오늘부터 아내에게 “여보! 사랑해”라고 말하십시오. 맘에 좀 들지 않아도 “당신이 최고야”, 아내가 좀 부족해도 “나는 당신만 있으면 돼!!”, “여보 사랑해!!”라고 적극적으로 사랑을 표현하셔서 정말 행복한 가정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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