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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성령강림] 불 멋지니안 (요 3:1~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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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 멋지니안 (요 3:1~16)

오늘이 오순절입니다. 오순절은 교회가 탄생한 날입니다. 오순절은 본래 구약 시대의 절기입니다. 칠칠절이라고도 부릅니다. 칠칠절은 유월절을 지내고 7 주 후에 찾아옵니다. 그러니까 49일 다음 날이란 뜻입니다. 오순절은 열흘이 5번 지나는 50일이라는 뜻입니다. 칠칠절은 보리 수확을 하나님께 감사드리는 날입니다. 그래서 첫 열매를 드린다고 초실절이라고도 부릅니다. 또 맥추절이라고도 부릅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예수님이 승천하신지 열흘이 지나 오순절이 되었을 때 약속한 성령님이 오셨습니다. 제자를 포함한 120명의 성도들이 마가의 다락방에 모여 기도하며 기다렸습니다. 그 때 하늘로부터 급하고 강한 바람 같은 소리가 들렸습니다. 실내였기 때문에 실제 바람이 분 것은 아닙니다. 저들이 앉아 있는 온 집에 그런 소리가 가득했습니다. 그러더니 불이 혀같이 갈라지는 것이 각 사람의 머리 위에 임했습니다. 그것이 바로 성령님의 강림이었습니다. 성령님은 각 사람에게 충만하게 임하셨습니다.

사람들은 방언을 말하기 시작했습니다. 그 방언은 각 지방에서 온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할 때 효과적이었습니다. 성령을 받은 성도들은 외국어를 하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이 방언을 통해 타문화권에 사는 사람들이 알아듣게 되었습니다.

이렇게 성령님이 오심으로 교회가 생겼습니다. 교회는 성도들이 모여 기도하고 예배하는 공동체입니다. 흩어지면 복음을 전했습니다. 교회에 모이는 이는 날로 늘어갔습니다. 사람들은 교회를 통해 구원의 복음을 들었습니다. 교회에 성령님의 능력이 나타났습니다. 초대교회는 많은 기적과 표적을 통해 복음을 힘 있게 전했습니다.

성령님은 교회를 빼놓고 이야기할 수 없습니다. 성령님은 교회를 위해 일하시고, 교회는 성령님에 의해 세워지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일찍이 성령님에 대해서 말씀하셨습니다. 사람들이 성령님에 대해 처음 들었을 때 잘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그 대표적인 사람이 본문에 나오는 니고데모입니다.

니고데모는 한 밤중에 예수님을 찾아왔습니다. 그는 바리새인이었고, 유대인의 관원이었습니다. 관원 중에서도 산헤드린 공의회 회원이었습니다. 산헤드린은 유대의 최고 의결 기관입니다. 지금의 국회와 같습니다. 그러니까 그는 최고위 상류층이었습니다. 또한 그는 하나님을 잘 섬기는 경건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런 사람이 왜 사람들의 눈을 피해 밤중에 예수님을 찾아 왔을까요?

그는 진리를 찾는 사람입니다. 그는 예수님에게 뭔가 비범한 진리가 있다고 여겼습니다. 사회적 신분과 학덕을 쌓은 그가 예수님을 랍비라고 부른 것이 놀랍습니다. 랍비는 회당에서 성경을 가르치는 어른입니다. 성경에 능통하고 덕망이 있는 어른을 회당을 이끄는 지도자로 세워 랍비라고 불렀습니다. 아무나 랍비가 되는 것이 아닙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어떤 회당으로부터도 랍비로 임명받은 적이 없습니다. 예수님은 공식적인 랍비가 아닙니다. 예수님은 율법도 체계적으로 배우지 않았습니다. 예수님과 니고데모는 신분 차이가 많이 났습니다. 예수님은 니고데모보다도 나이가 적습니다.

그런데도 니고데모가 랍비라는 존칭을 사용한 것은 파격적입니다. 그는 허깨비 같은 지위나 명예를 따지지 않았습니다. 마음으로 예수님을 존경했기에 예의를 갖춘 것입니다.
니고데모는 예수님을 하나님께로서 오신 선생인 줄 안다고 했습니다. 그것은 예수님이 행하신 표적들 때문입니다. 이런 표적들은 하나님이 함께 하지 않으시면 아무도 할 수 없는 것들입니다. 니고데모는 예수님이 하신 말씀들과 행하신 표적들을 비범하게 보았던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런 니고데모에게 하나님 나라를 보는 법을 가르쳐 주셨습니다.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를 볼 수 없느니라.‛

예수님의 이 가르침은 오히려 니고데모에게 혼란을 주었습니다. 거듭난다는 말을 문자적으로 받아들인 것입니다. 그래서 사람이 늙으면 어떻게 어머니 뱃속에 들어갔다가 다시 날 수 있겠냐고 반문했습니다.
예수님은 거듭나는 방법에 대해서 자세히 일러 주셨습니다. ‚진실로 진실로 내게 이르노니 사람이 물과 성령으로 나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느니라.‛

물은 세례를 말합니다. 세례에는 물세례 외에 성령 세례도 있습니다. 물세례를 죄를 씻는 예식입니다. 물세례는 조용하고 차분하게 이루어집니다. 성령 세례는 불세례라고 부릅니다. 성령 세례는 사람을 변화시킵니다. 성령님을 모시는 것입니다.

무당이 신 내림을 받으면 강신무가 됩니다. 귀신이 무당을 지배합니다. 귀신에게 자기 인격을 내어 주는 것입니다. 강신무는 귀신을 통해 신통력을 얻습니다. 하지만 귀신의 지배를 받아 인생이 고달파집니다.
성령님을 모시는 것도 이와 비슷합니다. 하지만 강신무와 결정적으로 다른 것이 있습니다. 성령님은 인격을 지배하지 않습니다. 성령님은 철저하게 인간의 자유 의지를 존중해 주십니다. 성령님을 모신 사람은 오직 순종을 통해 변화된 삶을 살게 됩니다. 매 순간순간 자기 뜻을 하나님의 뜻에 맞춰 순종함으로써 사는 것입니다. 불순종해도 성령님은 그 사람을 강제하지 않습니다. 그냥 순종할 때를 기다리십니다. 이 과정은 성령님을 모신 사람과 사랑의 관계를 통해서 이루어집니다.

무당이 신 내림을 받을 때 처음에는 거부합니다. 평범한 인생을 살고 싶어 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귀신이 집요하게 강제하면 버티다가 신 내림을 허락합니다. 귀신의 이런 강제는 계속됩니다.

그러나 성령님은 인격이십니다. 그래서 아주 고상하고 신사적이십니다. 성령님은 우리에게 먼저 한없는 은혜를 깨닫게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말할 수 없는 십자가의 은혜와 사랑을 깨닫게 되면 그는 인생 가운데 주님을 모시고 살겠다고 결단합니다. 주님을 영접합니다. 그 때 성령님도 동시에 임하십니다. 주님을 영접한 것은 곧 성령님을 모신 것입니다.

그 후로 그 사람은 그리스도인이 됩니다. 주님을 모시고 주님 뜻대로 살게 되는 것입니다. 그것이 변화된 삶입니다. 죄를 짓던 지난 삶을 돌이켜 정결한 새 삶을 사는 것입니다. 그것이 거듭나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예수님은 니고데모에게 너무나 귀한 말씀을 주셨습니다. 성경 전체에서 니고데모만큼 귀한 말씀을 받은 사람은 없습니다. 니고데모는 밤중에 주님을 찾았다가 생각지도 못한 귀한 말씀을 받았습니다.

여러분! 기독교 최고의 성경 구절이 무엇입니까? 바로 요한복음 3:16입니다. 이 말씀은 예수님이 대중에게 설교할 때 하신 말씀이 아닙니다. 바로 니고데모와 일대 일로 대화하시면서 주신 말씀입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예수님은 얼른 알아듣지 못하는 우둔한 니고데모를 포기하지 않으셨습니다. 차근차근 풀어 설명해 주셨습니다. 니고데모가 알아들을 때까지 주옥같은 말씀을 쏟아 부어 주셨습니다.
이날 밤 니고데모는 얼마나 행복했을까요? 니고데모가 바로 이런 가르침을 바라고 예수님을 찾아 온 것 아닙니까? 니고데모는 개인 교습으로 기독교 최고의 복음을 들었습니다.

‘니고데모’란 이름은 아주 좋은 이름입니다. ‘니고’라는 뜻은 탁월하다는 뜻입니다. ‘데모’는 사람이란 뜻입니다. 민주주의를 데모크라시라고 합니다. 사람들이란 뜻입니다. 니고데모는 탁월한 사람이란 뜻입니다.

그런데 예수님 앞에서 니고데모는 탁월하지 못했습니다. 10절을 보면 ‚너는 이스라엘 선생으로서 이러한 일을 알지 못하느냐‛ 하고 핀잔을 받기도 합니다. 사실 니고데모가 거듭난다는 말을 못 알아듣고 어른이 어머니 뱃속에 다시 들어갔다가 태어나는 것이냐고 우문을 하는 것을 보면, 그런 핀잔을 들을 만도 합니다.
그러나 니고데모가 처음부터 알아들었으면 요한복음 3:16 같은 말씀은 생략되었을지 모릅니다. 니고데모 덕분에 우리도 이 귀한 말씀을 성경을 통해 새기게 되었습니다.

이 니고데모가 그 후 어떻게 변화되었는지 아십니까?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돌아가셨을 때 장례를 치룬 사람이 바로 니고데모입니다. 니고데모는 몰약과 침향 백 근을 가지고 와서 주님의 시신에 발랐습니다. 값어치로 만도 삼십억 원이 넘는 돈입니다. 돈 뿐만이 아닙니다. 그는 십자가 처형이라는 살벌한 분위기에서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주님의 장례를 주관했습니다. 산헤드린에서 사형 판결을 내렸지만, 산헤드린 소속인 니고데모는 반대되는 행동을 했습니다. 이것은 지위뿐만 아니라 목숨까지 잃을지도 모를 위험한 일입니다. 하지만 니고데모는 변화되었기 때문에 예수님 편에 섰습니다. 그는 생명보다 귀한 주님을 모셨기 때문에 두려워하지 않았습니다. 니고데모는 성령의 사람이었습니다.

성령 세례를 불세례라고 부르는 까닭이 있습니다. 성령님을 모시면 심령이 불에 달군 것처럼 뜨거워지기 때문입니다. 가슴이 뜨거운 사람은 가만히 있지 않습니다. 뭔가를 합니다.

아이들은 심장이 빨리 뜁니다. 성인은 1분에 70~80회 뜁니다. 한 살 미만 아이는 1분에 150회 정도 뜁니다. 어른의 두 배로 뜁니다. 5~8세는 100회에서 105회 뜁니다. 그러니 개구쟁이 아이들이 가만히 있질 못합니다.

레슬링 올림픽 금메달리스트 심권호 씨가 아이들 따라 움직이다가 지쳐 쓰러지는 CF가 있었습니다. 아무리 힘이 장사라도 심장 빨리 뛰는 아이들을 못 따라 갑니다.

라오디게아교회는 예수님이 보실 때 토하여 내칠 것 같은 교회였습니다. 차지도 더웁지도 않은 미지근한 교회였기 때문입니다. 미지근하다는 것은 현실에 안주하고 새로운 일은 벌이지 않는 태도입니다. 차가우면 더운 쪽으로 움직입니다. 뜨거우면 찬 쪽으로 움직입니다.

신앙에는 보수와 진보가 있습니다. 보수는 전통을 지키고 안정되어 있습니다. 하지만 변화가 느리고 성장이 더딥니다. 반면 진보는 현재에 만족하지 않습니다. 현재를 깨고 새로운 것을 시도합니다. 실패 할 위험이 있습니다. 그래도 실패를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실패의 대가를 치르더라도 미래를 향해 나갑니다. 변화가 빠르고 성장합니다.

사람은 나이를 먹으면 보수적 경향으로 치우칩니다. 젊은이는 진보적입니다. 예수님은 보수일까요 진보일까요? 예수님은 진보에 가깝습니다. 그렇다고 전통을 무시하지 않으셨습니다. 옛 것 중에 좋은 것은 존중하셨습니다. 그러나 형식적이고 거추장스러운 것은 과감하게 치우셨습니다.

오늘 니고데모도 진보적인 사람입니다. 제도와 신분과 체면에 매이지 않았습니다. 그는 새로운 것에 도전한 사람입니다.
우리는 복음을 전할 사명을 받았습니다. 복음을 전하려면 언제나 새로운 미지의 세계를 향해 나아가야만 합니다. 거기에는 늘 위험이 도사리고 있습니다. 그래서 도전 정신이 필요합니다.

성령님은 정체되어 있는 교회에서 아무런 일도 하지 못하십니다. 심령이 뜨거운 불의 사람들을 통해서 일하십니다.

그러면 우리 교회는 성령님이 일하시도록 순종하는 교회일까요? 왕성하게 복음을 전하고 있습니까? 날마다 믿는 자의 수효가 늘고 있습니까? 전도하다 실패할 수 있습니다. 애써 전도했지만 효과가 나타나지 않을 수 있습니다. 그렇다고 포기합니까? 눈에 보이는 성과가 없으면 재미가 없지요. 맥이 빠집니다. 그래도 주저앉으면 안 됩니다.

우리 교회 교인들은 모두 성령님을 모십시다. 성령님이 내 안에 충만하게 임하시도록 자리를 내어 드리세요. 인간적이고 세상적인 기준을 버리고 성령님의 능력을 의지하겠다고 약속하십시오. 인격이신 성령님을 따라 변화되겠다고 다짐합시다.

성령님을 모시는 첫 번째는 일어서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앉아 있는 사람은 쓰지 못하십니다. 그래서 언제나 먼저 일으켜 세우십니다. 하나님의 첫 번째 명령은 ‘일어나라!‚입니다. 일어서야 성령님이 충만하게 임하십니다. 일어서야 현재의 자리를 박차고 앞으로 전진할 수 있습니다. 일어나야 일을 시작합니다. 가만히 있지 마세요. 모두 일어나세요. 일어나서 다음 명령을 기다려야 합니다.

‘로베레 장군’이라는 영화가 있습니다. 나치에 저항했던 사람들이 감옥에서 처형당합니다. 한 평범한 시민이 붙들려 왔습니다. 이 사람의 사형 순서가 되었습니다. 억울하니까 소리를 질렀습니다. ‚나는 저항운동에 참가한 적이 없습니다. 나는 소시민입니다. 왜 내가 죽어야 합니까?‛ 그때 옆에 묶여 있던 젊은이가 이 사나이를 향하여 말했습니다. ‚당신은 죽어 마땅합니다. 아무 일도 하지 않았다는 것, 그것이 잘못입니다. 전쟁은 5년이나 계속되었고, 수백만 명이 무참하게 죽었습니다. 조국은 멸망 직전에 놓여있습니다. 그런데 왜 당신은 아무 일도 하지 않았습니까?‛ 여러분 아무런 일을 하지 않은 것은 죄입니다.

성령님을 모시고 일어나면 그 다음 뭘 해야 할지 알려 주십니다. 성령님은 뭘 하려고 일어난 사람은 그냥놔 두지 않으십니다. 그런 사람을 놓치지 않으십니다. 그래서 반드시 뭘 해야 할지 계시해 주십니다.
여러분이 가장 잘 알고 있습니다. 지금 내가 일어나서 무슨 일을 해야 할지. 꼭 해야 만 할 일인데 방치하고 미뤄둔 일이 있습니다.
먼저 잘못된 습관과 태도를 바꿔야 합니다. 주님은 그것부터 고치라고 하실 것입니다. 그 걸림돌이 제거되어야 거룩한 일을 할 수 있습니다.

성령님의 비전은 교회입니다. 성령님은 교회를 세우는 일을 하십니다. 교회를 세우면 부흥케 하십니다. 교회는 구원을 위한 구조선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주님의 명령은 언제나 하나입니다. 복음을 전하라는 것입니다. 선교하라는 것입니다. 전도는 주님의 지상명령입니다. 쉬지 않고 끊임없이 복음을 전해야 합니다. 그래서 주님이 내리시는 모든 명령의 마지막 목표는 교회를 통한 영혼 구원입니다.

복음을 전하는 곳에 성령님은 충만 가득한 능력으로 임하십니다. 성령님의 충만한 능력을 체험하기 원하십니까? 복음을 전하십시오. 그 현장에 언제나 성령님의 충만한 능력이 임하실 것입니다.

주님을 기쁘시게 하면 그 기쁨은 우리에게 되돌아옵니다. 주님은 우리를 사랑하시기 때문에 그 기쁨을 함께 나누려고 하십니다. 그 되돌아오는 기쁨은 우리가 누리는 복과 은혜입니다. 열정이 가득한 뜨거운 성령의 사람이 되십시오. 성령님을 내 안에 모시겠다고 초청하십시오. 성령을 구하는 자에게 성령을 주신다고 하셨습니다. 성령님을 모시면 우리는 강건해집니다. 육체의 모든 질병은 더 이상 내게 붙어 있을 수 없게 됩니다. 씻은 듯이 그 질병이 떠나게 될 것입니다. 성령님을 모시면 항상 즐거움이 가득합니다. 행복합니다. 힘이 넘칩니다. 왕성하게 일합니다. 무엇보다도 영혼을 구하는 최고의 기쁨을 누리게 될 것입니다. 이 세상 즐거움과 비교할 수 없는 최상의 기쁨, 저 하늘의 기쁨을 누리게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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