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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청년주일] 세상의 변화를 주도하라 (삼상 17:1~3, 41~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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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의 변화를 주도하라 (삼상 17:1~3, 41~49)

오늘은 청년주일입니다. 연령으로는 18세부터 35세인 사람을 말합니다. 그러나 연령만으로는 청년을 설명하기에 부족합니다. 생물학적인 나이만 가지고 사람이 늙었다, 젊었다고 판단하기는 힘든 일입니다. 나이는 들었지만 젊은 사고를 가진 분이 있는가 하면 나이는 어리지만 생각이 늙은 사람도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젊었지만 늙은 사고를 가진 사람이 아니라 젊은 사고를 가진 젊은이가 참 젊은이인 것입니다. 그런데 건강한 청년의 연령대 사람들이 지닌 특징이 있습니다. 건강한 청년은 진취적이고 도전적이며 지치지 않습니다. 불의와 타협하지 않고 새로운 미래를 꿈꾸며 계획합니다. 어떤 목사님은 청년을 '현존하는 미래'라고 했습니다. 특히 청년의 미래는 오늘을 어떻게 사느냐에 따라 달라지기 때문입니다. 무엇보다 청년의 가장 큰 가치는 바로 이 시대의 '변화를 주도 할 힘'을 가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는 청년이면서 또한 가장 청년다운 특성을 가지고 있었던 다윗을 살펴보려고 합니다. 다윗은 암담했던 이스라엘 미래를 열었던 청년이었습니다. 이러한 청년 다윗의 특성은 골리앗과 싸운 싸움에서 가장 잘 나타납니다. 오늘 본문에 사울과 이스라엘 백성이 불레셋과 싸움을 하기 위해서 엘라 골짜기라는 곳에서 진을 치고 있었습니다. 부모님 심부름으로 형들에게 음식을 전해주러 갔던 청년 다윗 눈에 비친 '엘라 골짜기'는 죽음이 가득한 골짜기였습니다. '엘라 골짜기'라는 말의 뜻은 '상수리나무의 골짜기'란 의미로 당시 그 지역 내에는 나무가 무성한 곳이지만, 그것은 어쩌면 겉모습뿐이지, 그 속에는 언제 일어날지 모르는 죽음의 냄새가 짙게 깔린 곳입니다.

지금 '엘라 골짜기'에서 사울과 이스라엘 백성이, 맞은편에는 골리앗과 블레셋이 진치고 있었습니다. 이 골짜기에는 팽팽한 힘의 대결이 있었고, 40여 일간 공포와 두려움이 가득했었습니다. 거기에는 증오의 힘이 있었습니다. 두려움의 힘이 있었습니다. 불안과 죽음의 힘이 있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오늘 우리 역시 엘라 골짜기와 같은 순간을 살지는 않습니까? 남한과 북한의 대결을 보십시오. 사울이 이끄는 군대와 블레셋 군대가 맞서고 있는 것처럼 한반도에는 긴장감의 연속입니다. 사회에는 가진 자와 못 가진 자가 대립합니다. 많이 배운 자와 못 배운 자, 나이 많은 자와 어린 자가 갈등하는 현상은 마치 엘라 골짜기와 같습니다. 심지어 가정과 교회에도 이러한 긴장은 끊이질 않습니다.

며칠 전에 우리 초등학교 5학년 짜리 막둥이가 청와대에다 글을 썼다고 합니다. 그런데 좌불안석입니다. 써 놓고 겁이 났던지 누나에게 어떡하면 좋겠는가 하고 불안해합니다. 저도 그 사실을 알고 아이를 앉혀놓고, 왜 그러냐 하니까? 물어보니까 광우병 때문이었습니다. 광우병에 대한 염려를 지나치게 하다가 10년 후에 우리나라 국민이 다 죽을 것 같아서 대통령에 대해 안 좋은 글을 썼다고 합니다. 정말 기가 막힌 일이 아닙니까? 아버지인 나에게 글 하나를 제대로 안 쓰는 아이가 도대체 어떤 생각을 가졌기에 청와대 게시판에 글을 올릴 수가 있는가를 한 동안 생각을 해 보았습니다. 

지금 우리 사회는 실체 없는 광우병 바이러스에 감염되어 두려움과 공포의 대혼란을 경험하고 있습니다. 우리나라 역사상 한 명의 사상자도 발생시키지 않으면서 이처럼 순식간에 어린아이부터 어른에 이르기까지 전 국민을 떨게 만들고 심지어 지금 거리에서 촛불시위를 하는 학생이나 시민들을 보십시오. 우리 사회가 이토록 불안과 죽음의 공포에 한 순간에 흔들리는 것은 미래에 대한 불안과 염려 때문이 아닙니까?

1) 도전할 용기가 없는 사람들

오늘 본문을 보면 전쟁터에 나오긴 했지만, 한번도 싸워보지도 않은 채 두려움으로 도전할 마음조차 먹지도 못하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향해 사울은 경품을 내 걸었습니다. '저 골리앗을 이기는 사람에게는 내 딸을 주겠다.' 얼마나 궁여지책입니까? 누가 이 위기를 건져주면 내 딸을 주겠다고 합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어떻게 합니까? 24절을 보겠습니다. “이스라엘 모든 사람이 그 사람을 보고 심히 두려워하여 그 앞에서 도망하며” 그들이 골리앗 앞에서 어떻게 했습니까? 그들이 골리앗과 싸워보기나 했습니까? 아니면 골리앗을 향해 고함이나 한번 질러 보았습니까? 아닙니다. 그들은 단 한번도 골리앗과 싸워보려고 하지도 않은 채, 단지 거인 골리앗을 보고 심히 두려워했다고 했습니다. 거인을 보고 자기 자신들을 보니까 그들은 기가 죽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두려워 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들은 골리앗 앞에게 감히 도전하지 못하고 누군가가 해결해 주기만을 기다리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아무도 도전할 용기를 내지 않았습니다. 결국 주어진 기회를 놓치고 말았습니다.

여러분! 기회는 도전하는 사람에게 찾아온다는 사실을 아십니까? 도전하는 사람만이 승리의 기쁨을 맛볼 수 있다는 사실을 아십니까? 우리 주위에 보면 안 되는 이유만을 주야로 묵상하며 살아가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언뜻 보면 매우 신중한 사람처럼 보입니다만, 사실 그러한 사람은 비관주의자에 가깝습니다. 이러한 사람은 평생 동안 ‘안 되는 이유’만을 반복해서 말하며 살아갑니다. 그러나 기억하십시오. 실패를 두려워하는 자는 아무 것도 이룰 수 없습니다. 도전해서 실패 볼 수 있지만, 그 실패를 통해서 얻게 되는 배움이 성공의 디딤돌이 되는 줄로 믿습니다.

2) 비판하며 용기를 꺾는 사람들

블레셋의 거인 골리앗 앞에는 또 다른 부류가 있었습니다. 비판하는 사람들입니다. 사람의 요기를 팍팍 꺾어 놓는 사람들입니다. 28절을 보겠습니다. “장형 엘리압이 다윗의 사람들에게 하는 말을 들은지라 그가 다윗에게 노를 발하여 가로되 네가 어찌하여 이리로 내려왔느냐 들에 있는 몇 양을 뉘게 맡겼느냐 나는 네 교만과 네 마음의 완악함을 아노니 네가 전쟁을 구경하러 왔도다.” 큰 형 엘리압은 다윗을 가리켜 교만하고 마음이 완악하다고 심하게 비판했습니다. 한 마디로 말하면 다윗이 자신의 주제를 파악하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이처럼 우리 주위에 보면 자기는 아예 도전조차 하지 않으면서 큰 맘 먹고 도전하려고 하는 사람을 비판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자기는 아예 시도조차 하지 않으면서 시도하는 사람의 기를 여지없이 꺾어버리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특히 엘리압처럼 가까운 사람일수록 더욱 그런 경향이 있습니다. 아예 잘 알지 못하는 사람은 비판도 하지 않습니다. 아예 서로 교류가 없는 사람은 브레이크를 걸지 않습니다. 그런데 조금 그 사람에 대해서 안다든지, 약간 교류가 있는 사람이 오히려 낙심케 합니다. 그러나 명심하시기 바랍니다. 우리의 대적은 골리앗이지 엘리압이 아닙니다. 엘리압의 공격이 있을 때, 이기는 유일한 길은 참는 것입니다. 마귀는 할 수만 있으면 엘리압하고 싸우기를 원합니다. 엘리압하고 싸웠다면 이겨도 문제요, 저도 문제입니다.

만약 다윗이 엘리압을 이겼다면 도덕적인 비난을 면치 못할 것입니다. 아무리 형이 잘못했어도 형 때린 동생을 칭찬하는 문화는 없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혹시라도 졌다면 골리앗과의 싸움에는 나가보지도 못하고 온 힘을 다 쏟아 부어 탈진 상태가 되었을 것이고 그 게임은 뻔한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런데 현실을 살펴보면 많은 교회가 골리앗과는 싸움도 해 보지 못하고 밤낯으로 교회 안에 있는 엘리압과 싸움을 벌이느라고 탈진을 해 버립니다. 우리의 대적은 골리앗이지 엘리압이 아닙니다. 잘 싸우는 것도 중요하지만, 누구와 싸우는 가가 더 중요합니다.

3) 믿음으로 당당하게 도전하는 사람

지금 엘라 골짜기에서 다 들 두려움 속에 있는데 32절에서 다윗은 이렇게 고백합니다. "다윗이 사울에게 고하되 그를 인하여 사람이 낙담하지 말 것이라. 주의 종이 가서 저 블레셋 사람과 싸우리이다." 지금 누가 누구에게 말하고 있습니까? 어린 소년 다윗이 이스라엘 왕인 사울에게 말하는데, 그 내용이 정말 기가 막힌 내용입니다. '저 골리앗 때문에 낙담하지 마십시오. 내가 나가서 싸우겠습니다.' 사울 왕은 두려워서 떨고 있는데 반해, 어린 소년 다윗은 당당했습니다. 아무도 나서는 사람이 없는데, 다윗이 싸우겠다는 것입니다. 그러자 사울왕은 33절에서 무엇이라 이야기를 합니까? "사울이 다윗에게 이르되 네가 가서 저 블레셋 사람과 싸우기에 능치 못하리니 너는 소년이요 그는 어려서부터 용사임이니라." 사울 왕이 보기에 다윗은 아무래도 감이 아니었습니다. 저 무시무시한 골리앗에게 도전하는 것은 무리라고 생각했습니다.

보세요. 골리앗에게는 사람을 죽이기 위한 무장이 가득 했습니다. 신장은 283cm입니다. 머리에는 놋투구, 가슴에는 작은 철편들을 물고기 비늘모양으로 붙여 만든 갑옷이 있었습니다. 다리와 종아리는 놋쇠로 만들어진 갑옷이 싸고 있었고, 어깨에는 언제고 던져 찍을 수 있는 단창 통이 얹혀 있었습니다. 이 사람이 입고 있는 갑옷 무게만 57Kg이었고, 창 무게가 7Kg에 달했습니다. 골리앗은 상대방을 죽이기 위해 만반의 준비를 갖춘 모습이었습니다. 그러나 사울 왕은 어느 누구도 두려움 속에 떨고 있는 환경 가운데 이 청년 다윗이 당당하게 나서서 싸운다는데 뭐, 다른 방도가 없지 않습니까? 그래서 자기가 입고 있던 군복을 입히고 투구를 다윗의 머리에 씌워주고 갑옷을 입히고 자신의 칼을 주었지만, 전혀 맞지 않았요. 오히려 움직이는데 거추장스러웠고 결국 들판에서 양을 칠 때 사용하던 막대기 하나 들고 손에 돌멩이 몇 개를 쥐고 골리앗에게로 나아갈 때 마음에 어떤 생각을 했을까 상상해 보셨습니까?

사실 다윗은 골리앗이 누군지 몰랐습니다. 엘라 골짜기가 어떤 곳인지도 몰랐습니다. 사울 왕이 그에게 ‘너는 소년이다. 골리앗은 어릴 때부터 용사로 자란 사람이다.’고 설명해 줄 정도로 다윗은 잘 몰랐습니다. 어떻게 칼을 잡고 갑옷을 입어야 하는지 전쟁에 대해서 아는 것이라고는 하나도 없었습니다. 그러나 그가 분명히 아는 것이 하나 있었습니다. 지금 다윗의 눈에는 골리앗이 보인 것이 아니고 골리앗 너머에 계신 하나님을 보았던 것입니다. 그리고 다윗은 그때 골리앗의 칼을 본 것이 아니고 그 골리앗 너머의 하나님의 손에 들렸던 예리한 성령의 칼을 보았던 것입니다. 그러니까 사울과 군인들 모두가 골리앗을 보고 두려워하고 떨고 있는데 다윗이 혼자 나아갈 수 있었던 것입니다. 

여러분, 신앙이 무엇입니까? 신앙은 오늘의 현실을 넘어 역사 하는 하나님의 섭리를 보는 눈을 갖고 사는 것이 믿음이요, 신앙입니다. 성경에서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고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라고 했습니다. 진정한 신앙인이라면 저 골리앗 너머를 볼 수 있어야 합니다. 그 너머를 보지 못하면 일반인들과 똑 같은 모습을 보고 살아가게 됩니다. 일반인들이 보는 것은 현실뿐입니다. 현실만 보게 되면 그때 신앙은 아주 사치스러운 것이 되고 맙니다. 그리고 현실은 언제나 사람으로 하여금 낙심하게 하고 두렵게 하고 용기를 잃게 합니다. 모세가 눈앞에서 넘실거리는 홍해의 물결만 바라보았더라면 모세는 홍해를 건너지 못하고 그 자리에서 그냥 주저앉고 말았을 것입니다. 아브라함이 가도, 가도 끝이 없는 황무지 땅만 바라보았더라면 그도 실패하고 말았을 것입니다.

그런데 다윗은 그 너머를 보았습니다. "이 전쟁은 하나님께 속한 전쟁이다"라고 바라보는 섭리인식이 있었던 것입니다. 일반 사람들은 그런 손길을 보지 못합니다. 그러기에 문제 앞에서 절망하고 쩔쩔매고 낙심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신앙인은 그 배후에서 하나님이 역사 하시는 손길을 볼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런 믿음이 있으니까 다윗이 골리앗에게 나아갈 수 있었던 것입니다.

오늘 본문을 통해서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이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역사는 믿음으로 도전하는 사람들에게 나타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믿음으로 도전하는 자와 함께 하신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차원에서 볼 때, 저는 믿음으로 도전하는 사람이 '진정한 청년'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들은 어떤 자리 어떤 환경 속에서도 자기 주변을 살려나가고 세워나갑니다. 여러분, 골리앗이 ‘죽이기 위한 힘’을 갖고 있었다면 다윗은 ‘살리기 위한 힘’을 갖고 있었습니다. 우리는 누구나 힘을 소유하고 있습니다. 지성이라는 힘이 있고, 감성이라는 힘이 있습니다. 돈이 가진 힘이 있고, 위치가 가진 힘이 있습니다. 아버지, 어머니, 남편, 아내이기 때문에 부여되는 힘이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그 힘을 파괴하는데 많이 쓰고 있습니다. 남이 가진 꿈을 깨고, 사랑을 짓밟고, 생명을 죽이는데 내 언어와 내가 가진 위치와 지식, 돈을 얼마나 많이 사용하는지 알 수 없습니다. 하나님은 이런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미래를 맡기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생명을 살리고, 소망을 키우고, 기쁨을 주는 다윗 같은 청년에게 역사를 맡기십니다. 골리앗은 사람을 죽이고 공동체를 무너뜨리는 등 파괴하는 힘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파괴하는 힘은 하나님께 쓰임 받지 못합니다. 골리앗이 하고 있는 무장을 보십시오. 그는 한 순간에 하나님의 백성을 파괴할 수 있는 기세로 이스라엘 백성을 공포에 몰아 놓습니다. 그 힘 앞에 어느 누구도 감히 나서지 못하는 초라한 이스라엘 백성의 모습을 봅니다. 이것은 단지 그들의 문제일 뿐 아니라 오늘을 살고 있는 우리의 모습이기도 하지 않습니까?

사랑하는 여러분! 지금 우리의 현실을 생각해 보십시오. 현재 전 세계는 230여 개 나라가 있는데 그 중에서 석유를 매장하고 있는 국가가 104개 국가가 된다고 합니다. 꽤 많은 나라가 이 시대 최고의 자원을 가지고 있습니다. 요즘처럼 원유가격이 배럴 당 130달러에 근접한 시대에 석유자원을 가지고 있는 국가는 부국강병의 가장 좋은 패를 쥐고 있는 것 같습니다. 

그런 점에서 우리나라는 정말 불쌍할 정도입니다. 아무것도 가진 것이 없습니다. 이렇다 할 자원도 없고, 영토가 넓지도 않습니다. 그렇다고 뛰어난 인적자원이 있는 것도 아닙니다. 게다가 세계에서 유일하게 분단된 국가이며, 동시에 서로가 서로를 적대시하는 군사 분쟁 지역에서 천문학적인 전쟁 억제비용을 쏟아 붓고 있는 것이 지금 우리의 현실이 아닙니까? 심지어 우리의 미래를 측정하는 국가 신뢰도가 태국 보다 못한 후진국에 서 있습니다. 지금 우리의 청년들의 현실이 만만치가 않습니다. 마치 저들을 가로막는 거대한 골리앗들이 현실을 불안하게 만들고 있습니다. 미래에 대한 걱정도 이만 저만이 아닙니다. 눈만 감으면 미래가 걱정되고 장래가 캄캄하고 불안하고 막연합니다. 한때는 사오정이라고 하더니 또 38선이라고 하더니 오늘은 이구백이라고 합니다. '20대 90%가 백수'라는 말입니다.

그러다 보니 많은 젊은이들은 취업에 목숨을 겁니다. 그런데 문제는 자신의 인생을 걸만한 후회 없는 직장이 아니라 어떻게 하면 좀 더 편하고 안정적인 직장에 들어갈 수 있을까에 모든 에너지를 쏟아 붓는데 문제가 있습니다. 요즘 사회에는 ‘4시’가 되어야 출세한다는 말이 유행이다. 대박출세를 보장한다는 사법고시, 행정고시, 외무고시 그리고 공무원고시를 합하여 부르는 말입니다. 언제부턴가 은근슬쩍 공무원시험이 고시의 자리에까지 올라섰습니다. 그래서 한두 명 뽑는 공무원 시험에 1,000명 이상이 응시하는 기현상이 속출하고 있습니다. 뭐, 자기 비전이나 적성과는 상관없이 안정적 직장을 얻는 것이 유일한 목표가 되 버리고 말았습니다. 뭐, 좁은 땅덩이에서 한정된 자원을 가지고 수많은 사람들이 경쟁을 해야 하니 이해 못하는 바는 아닙니다.

'군들라 엥리슈'가 쓴 책에 보면 요즘 청년들의 가치관을 잘 반영해주는 대목이 있습니다. 잡 노마드(Job Nomade)라는 용어인데 이 뜻은 유목민들이 풀을 ?아 생존을 해 가는 이른바, 직업의 유랑자를 뜻합니다. 그 책에 보면 "그들에게는 집이 없다. 단지 노트북, 휴대폰, 여권만이 있을 뿐이다. 그들은 평생 한 직장, 한 지역 그리고 한 가지 업종에 매달려 살지 않는다. 그들은 승진 전쟁에 뛰어들지도 않고, 회사를 위해 목숨 바쳐 일하지도 않는다. 그들은 자신의 가치를 정확히 분석하고 자신의 노동력을 자유롭게 사용할 줄 아는 현대인이다." 어떻게 보면 매우 실용적인 이야기 일수 있습니다.

그러나 거기에는 자기만의 울타리는 있어도 공동체를 위하고 주변에 많은 사람을 위한 배려가 없는 자기만의 유익이 전부입니다. 그러나 이 시대의 내일을 상징하는 우리의 청년들이 오늘의 현실에 갇혀서 자기만의 유익을 위해 산다면 우리의 미래가 어디에 있겠습니까? 엘라 골짜기에서 믿는 자들을 조롱하는 거인 골리앗 앞에 숨소리 하나 제대로 내지 못하는 사울의 백성처럼 우리 역시 무기력하게 세상 앞에 무릎을 꿇고 말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다윗이 모두가 두려워하는 골리앗에게 도전한 이유가 있습니다. 무슨 이유인지 아십니까? 46-47절을 보겠습니다. "오늘 여호와께서 너를 내 손에 붙이시리니 내가 너를 쳐서 네 머리를 베고 블레셋 군대의 시체로 오늘날 공중의 새와 땅의 들짐승에게 주어 온 땅으로 이스라엘에 하나님이 계신 줄 알게 하겠고 또 여호와의 구원하심이 칼과 창에 있지 아니함을 이 무리로 알게 하리라. 전쟁은 여호와께 속한 것인즉 그가 너희를 우리 손에 붙이시리라." 다윗은 두 가지 이유 때문에 골리앗에게 도전했습니다. 첫째는 외부적인 이유 때문입니다. 블레셋을 향해서 하나님께서 살아계심을 알게 하겠다는 것입니다. 믿지 않는 사람들을 향해 하나님은 살아 계시고 역사 하시며 당신의 백성들을 돌보고 계신다는 사실을 증거 하겠다는 것입니다. 둘째로 내부적인 이유 때문입니다. 골리앗 앞에서 벌벌 떨고 있는 이스라엘 군대를 향해 모든 전쟁은 하나님께 속한 것임을 깨닫게 하고 싶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골리앗 앞에서 믿음이 부족하여 떨고 있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믿음으로 승리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 싶다는 것입니다. 다윗은 이 두 가지 이유 때문에 골리앗 앞에 섰습니다.

여러분! 오늘 우리에게 무엇이 문제입니까? 그것은 우리들이 너무 현실을 보고 계산하기에 바쁘다는 것입니다. 나타난 현실을 보고 계산을 해 보니까 골리앗의 키가 286㎝이고 갑옷 무게만도 58k이고 창날의 무게만도 7kg이라는 것만 보고 생각하고 살아갑니다. 그것을 보고 누가 그 앞으로 나가겠습니까? 그러니까 싸워 보지도 않고 넘어지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미래의 주신이십니다. 동시에 나의 인생의 생사화복의 주인이십니다. 그리고 그 하나님은 나의 암담한 현실 속에서도 함께 하셨습니다. 그 하나님을 절대로 과소평가하지 마십시오. 그리고 적을 과대평가 하지도 마십시오. 하나님을 믿고 다윗처럼 나아가면 골리앗은 작게 보일 것이고 사울처럼 현실만 보고 계산만 하다 보면 골리앗은 더욱 크게 보일 것입니다.

이제 우리 모두 엘라 골짜기에서 일어나십시다. 지금까지 잘못된 영에 사로 잡혀있었다면 '주여!! 나를 불쌍히 여겨주시옵소서' 하고 눈물로 회개하며 그 자리에서 일어나야 합니다. 또한 꿈이 없는 청년들은 이제 생각을 주님께 드리십시오. 내 인생의 선장이 예수님이심을 고백합니다. 나를 써 달라고 기도하십시오. 그 아름다운 삼손의 머리를 자른 것은 사탄입니다. 그러나 그의 머리를 사탄은 잘라 놓을 수는 있었지만, 다시 자라게 하는 것을 막을 수는 없었습니다.

이제 일어나서 세상을 변화시키는 일에 자신을 드리시기를 바랍니다. 우리가 세상을 변화시키지 못하는 이유는 세상과 충돌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내가 서 있는 그 자리에서 세상의 빛으로 세상과 충돌해야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성령의 능력의 옷을 입어야합니다. 슥4:6절의 말씀처럼 "이는 힘으로 되지 아니하며 능으로 되지 아니하고 오직 나의 신으로 되느니라 큰산아 네가 무엇이냐 네가 스룹바벨 앞에서 평지가 되리라 "고 말씀하신 것처럼 우리 믿음의 청년들이 가질 힘은 성령의 능력의 옷을 입어야합니다. 그 능력을 힘입고 성결과 아름다움으로 자신을 믿음으로 가꾸어야합니다. 시대를 변화시킬 능력을 길러야합니다.

오늘 여러분 손에 들려진 물맷돌은 세상의 모든 타락된 것을 무너뜨리며, 우리를 두렵게 하는 것들을 쓰러뜨리며 세상의 변화를 복음의 물줄기로 바꾸어 놓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믿음으로 사는 자에게 승리케 해주시는 줄로 믿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믿음으로 도전하는 자와 함께 해 주시는 줄로 믿습니다. 하나님의 역사는 믿음으로 도전하는 사람들에게 나타나는 줄로 믿습니다. 여러분! 현실에 안주해서 안 되는 것만을 앞세우지 말고 믿음으로 담대하게 골리앗에게 도전하십시오. 골리앗은 무너질 것입니다. 기도하십시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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