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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부부주일] 부부의 은혜 (창 2:18~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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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부의 은혜 (창 2:18~25)

  어떤 60대 부부가 행복하게 잘 살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두 사람에게는 다른 소원이 있었습니다.  아내의 소원은 죽기 전에 세계 일주를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소원을 빌었더니 하늘의 천서가 소원을 들어 주어 전 세계를 여행하게 되었습니다.  남편에게도 소원이 무엇이냐고 물으니, 남편은 눈치를 보며 나지막한 말로 30년 정도 젊은 여자와 한번 살고 싶다는 것이었습니다. 천사는 그 남편의 소원도 들어주었습니다. 그래서 남편을 90세의 노인으로 만들어 놓았다는 것입니다.   

 지어낸 이야기이지만, 부부가 평생을 살면서 은혜를 은혜로 아는 것이 얼마나 소중한가를 일깨워줍니다.  우리는 ‘은혜’라는 말을 자주 사용합니다.  한마디로 인생의 모든 것이 은혜라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특히 가정의 달에 가정을 통한 은혜가 너무도 큰 것을 알아야 합니다.  우리는 보통 부모의 은혜는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생각해 보면 자녀도 은혜입니다.  많은 부분에서 부모는 자녀 때문에 살 희망과 용기가 생기고, 자녀로 인해 부모가 더 많은 힘을 얻는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자녀의 은혜가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부모도 은혜이고, 자녀도 은혜이지만, 부부도 은혜라는 것입니다. 물론 결혼하지 않고 평생 혼자 사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것은 특별한 경우요, 하나님의 특별한 은혜입니다.  사도바울과 같이 평생 복음을 위해 사는 특별한 목적으로 혼자 사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러나 대부분은 결혼을 하여 부부로 삽니다.  바울조차도 모든 사람을 향해 결혼해야 할 것을 강조했습니다. 또한 우리 가운데는 결혼하여 살다가 홀로 된 사람도 많습니다.  그런 사람의 경우도 부부의 은혜와 행복을 맛보았을 것입니다. 그래서 오히려 많은 사람을 향해 부부로 사는 것이 은혜라는 것을 말하고 싶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왜 부부가 은혜일까요?  왜 하나님은 우리 인생에 때가 되면 결혼하여 남자와 여자가 한 평생 함께 사는 것을 원하실까요?  그 분명한 이유에 대하여 본문이 답을 줍니다.  오늘 그것을 함께 생각해 보려고 합니다.

 첫째, 외로움을 극복하기 때문입니다. 

 본문은 천지창조의 역사를 보여주는 말씀입니다. 창세기 1장에서 전체적으로 천지창조를 말씀하고, 이어서 2장에서는 자세하게 알려줍니다. 천지창조에서 핵심은 인간창조 입니다.  하나님은 천지를 창조하시고, 이어서 인간을 만드셨습니다. 하나님의 형상과 모양대로 하나님의 성품과 인격을 닮은 사람을 아름답게 빚으셨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걸작으로 만족하셨습니다. 그 만든 사람을 ‘아담’이라고 부르셨습니다. 아담을 만드신 이후 18절에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사람이 독처하는 것이 좋지 못하니 내가 그를 위하여 돕는 배필을 지으리라 하시니라” 하나님은 사람이 독처하는 것, 즉 혼자 사는 것이 좋지 않다고 여기셨습니다.  그래서 아담을 만드시고 이어서 하와를 창조하셨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창조원리요, 인간을 향한 하나님의 뜻입니다.  사람이 왜 결혼해서 살고, 왜 부부가 함께 해야 하는 것을 보여줍니다.  결혼이 하나님의 명령이요 뜻이고, 아울러 사람이 혼자 사는 것이 좋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사람은 함께 삽니다.  특히 부부로서 함께 삽니다.  부부가 함께 살면서 서로 쓸쓸하지 않게, 힘들지 않게합니다.  그래서 부부가 은혜라는 것입니다. 

 사람이 살면서 가장 견디기 힘든 것 중의 하나가 바로 외로움입니다. 우리가 종종 경험하며 삽니다.  외롭지 않을 때 우리는 힘을 내고, 용기를 갖고, 열심히 일하며 행복하게 삽니다.  그러나 외롭게 느껴질 때 우리는 병들고, 아프고, 힘들어 합니다.  현대인의 가장 무서운 병인 우울증도 외로움에서 시작되는 것입니다. 세상에 나만 홀로 있다는 외로움과 고독하다는 것을 깊이 느끼는 순간부터 사람은 육체와 마음이 병이 듭니다. 그래서 신앙도 어쩌면 외로움의 극복이라고 봅니다.  아무도 없는 것 같은 외로움의 때에도 결코 나는 혼자가 아니라는 것을 알게 하는 힘이 신앙 속에 있습니다. 믿음으로 사는 우리는 어떤 경우에도 혼자가 아닙니다.  다 떠나고, 다 없어도, 언제나 주님이 나와 함께 하시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그것을 아는 자들입니다. 그래서 외로움과 고독이 얼마나 힘들고 무섭고 지치게 하는지 압니다.

 보통 외국에 나가면 대부분의 사람들이 경험하는 향수병, Homesick라는 것이 있습니다. 한마디로 외로움에서 나오는 병입니다.  저와 가정이 12년 외국생활을 하면서 경험하기도 했습니다.  처음 1년 정말 참기가 매우 힘들었습니다.  한국에 한번만 갔다 오면 나을 것 같았지만, 여건이 쉽지 않았습니다.  그러다가 딸의 돌이 되었을 때 우리는 아이를 위해 아무것도 해 줄 수가 없음을 알았습니다.  정말 힘들었습니다.  그때 컵케이크에 촛불 하나 키고 기도하다가 얼마나 울었는지 모릅니다.  외로움이 참기 힘든 일입니다.

 부부가 은혜인 이유는 외로움과 고독을 극복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자녀도 없고, 아내나 남편도 없는 집에 들어가기가 싫을 때가 있습니다. 아무리 편안한 곳이라도 적막강산이요, 쓸쓸하게 느낀다면 가고 싶지 않은 것입니다.  편안 곳은 외롭지 않는 곳입니다. 

교회도 그렇습니다.  이렇게 사람이 많은데 교회에 나와 외롭고 쓸쓸하다고 느끼면 찾아오기 힘든 것입니다. 사람은 누구라도 혼자 있는 것을 무척 힘들게 느끼는 법입니다.  그래서 주변에 사람이 있는 것이 은혜요, 특히 부부가 은혜입니다. 남편과 아내를 통해, 믿음 생활하는 서로를 통해, 나와 동행하시는 주님을 통해 모든 외로움과 고독을 극복하시고 은혜 안에서 몸과 마음이 건강하게 살기를 바랍니다.


 둘째, 돕는 배필이기 때문입니다.

 계속되는 말씀을 보면 하나님은 아담을 만드시고 또 하와를 만드시는 중요한 이유를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내가 그를 위하여 돕는 배필을 지으리라” 하와가 창조된 중요한 이유는 바로 아담을 위한 돕는 배필이 필요했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부부의 소중한 은혜입니다.  남편이 아내를 돕고, 아내가 남편을 돕습니다.  바로 거기에 둘이 하나가 되고, 온전한 가정, 온전한 사람, 온전한 신앙이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종종 여기 하와가 그러니까 여자가 남자를 위해 돕는 배필이라는 것에 불만을 갖습니다.  마치 아담, 남자를 위한 종속적인 관계로 느껴지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돕는 배필은 결코 그런 의미가 아닙니다.  여기 돕는 베필이라는 말의 히브리어 단어는 ‘에제르’라는 말입니다.  구약성경에서 에제르는 여기에만 사용된 것이 아닙니다. 구약성경 전체에서 많이 반복되는 단어중의 하나입니다.  놀라운 것은 이 말은 ‘하나님이 사람을 돕는다’는 말에서도 사용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시편 121편에 “내가 산을 향하여 눈을 들리라 나의 도움이 어디서 올꼬 나의 도움이 천지를 지으신 여호와에게서로다”는 말씀이 있습니다.  거기서 말하는 도움도 ‘에제르’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도우실 때 결코 종속적의 의미에서 돕지 않습니다.  오히려 높은 위치에서 돕습니다. 실제로 누가 누구를 도우려면 자기가 약하든지, 부족하면 제대로 도울 수가 없습니다.  돕는 위치는 결코 종속이 아니라 어쩌면 실제로 더 강한 것을 봅니다. 이것이 여기서 말하는 돕는 배필입니다. 

그래서 이 말은 전쟁에서 응원군, 지원군의 의미로도 많이 말합니다. 전쟁을 할 때 앞에서 싸우는 군사도 중요하지만, 뒤에서 지원하는 후방군도 중요합니다.  이 둘의 적절한 조화를 통해 승리를 이루는 것입니다. 아무리 앞에서 잘 싸워도 지원이 없으면 이길 수 없습니다.  아무리 지원을 잘해도 앞에서 잘 싸우지 않으면 소용이 없습니다. 그래서 돕는 배필은 서로에게 너무도 중요한 것입니다. 이것이 부부의 신비요, 은혜요, 축복입니다.

남편이 아내를 돕고, 아내가 남편을 위한 돕는 배필이 됩니다.  바로 거기에서 부부는 힘을 얻고, 평생 행복한 가정과 삶을 이루는 것입니다.

 요즘 미국은 한참 11월에 있을 대통령 선거로 분주합니다. 공화당은 이미 후보가 정해졌지만, 민주당은 최초 흑인대통령을 꿈꾸는 오바마와 최초 여성대통령을 꿈꾸는 힐러리의 경선이 아직도 진행 중에 있습니다. 그러나 이제 오바마 쪽으로 거의 기울어지고 있습니다. 물론 오바마가 훌륭한 후보이지만 힐러리도 만만치가 않습니다.  힐러리는 이미 대통령을 지낸 클린턴의 부인이기도 합니다. 우리말로도 번역이 되어 인기를 끌었던 ‘여자라면 힐러리처럼’ 이란 책에 보면 이런 이야기가 나옵니다.

 “클린턴과 힐러리가 차를 타고 가다가 어떤 주유소에서 기름을 넣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알고 보니 그 주유소의 사장이 힐러리의 옛 남자친구였다는 것입니다. 기름을 넣고 나오면서 클린턴이 이렇게 얘기했습니다. 당신이 나와 결혼하지 않고 저 친구와 했다면 지금쯤 주유소 사장의 부인이 되어 있겠구만‘ 그 말을 들은 힐러리가 이렇게 대답을 했다고 합니다. ’무슨 말씀을, 내가 결혼했으면 그 사람은 지금쯤 미국의 대통령이 되었을거야..‘

 ‘스토미 오마샨’이란 사람이 쓴 책 가운데 ‘아내의 기도로 남편을 돕는다’는 책이 있습니다.  이 책은 사랑하는 남편을 돕는 기도안내서입니다.   남편의 일, 금전, 애정, 과거, 자아상이나 미래 등 다양한 주제를 정해 각각에 대한 설명과 실례를 싣고 그에 합당한 아내의 기도문을 수록하여 크리스천으로서 남편을 위해 가장 큰 도움이 바로 기도라는 것을 강조합니다.  물론 이 책에 이어 ‘남편의 기도로 아내를 돕는다’는 책도 나왔습니다. 

서로를 향한 기도와 협력으로 큰일을 이룹니다.  부부는 돕는 배필이 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은혜입니다. 남편을 위한 아내의 도움으로, 아내를 위한 남편의 기도로 큰 역사를 이루며 살아가시기를 바랍니다.


셋째, 자신을 알아가기 때문입니다. 

 왜 부부가 은혜입니까? 그것은 외로움을 극복하고, 돕는 배필이 되기 때문만이 아닙니다.  남편과 아내가 살면서 서로를 통해 자신을 알아갑니다. 마치 아내는 나의 거울이고, 남편도 역시 나를 들여다보는 거울입니다.  그렇게 자신을 보면서 성숙해져 갑니다. 

 본문에서 이것을 너무도 중요한 하나님의 뜻으로 알려줍니다. 본문에서 주목할 것은 하나님은 18절의 말씀을 선언하신 뒤 곧 바로 하와를 만들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하와를 만든 것은 21절에 나옵니다. 18절과 21절 사이에 뭔가의 사건이 있는 것을 봅니다.  그것이 무엇일까요? 하나님은 각종 들짐승과 새를 만드시고 그것을 아담에게로 이끌고 와서 아담에게 이름을 짓게 하였습니다.  아담은 자기 앞에 있는 동물들을 보면서 이름을 짓습니다.  호랑이, 사자, 토끼, 고양이, 독수리.. 이 모든 동물의 이름은 바로 아담이 지은 것입니다. 

왜 하나님이 아담에게 동물을 이끌고 왔을까요? 동물을 보면서 아담이 무엇을 느꼈을까요? 아담은 그 앞에 동물의 이름을 지으면서 기뻐하고 좋아했지만 동물들이 자기와 같지는 않은 것을 알았습니다.  동물은 동물일 뿐, 인격체가 아닙니다. 말도 통하지 않고, 소통도 되지 않습니다.  동물은 사람이 다스리고 통치할 대상이지, 인격을 나누는 대상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바로 이것을 먼저 아담에게 심어준 것입니다.  많은 동물이 아담 앞에 지나가면서 아담은 ‘동물은 아니구나’ 하는 것을 알게 하신 것입니다. 그런 것을 깨닫게 한 뒤에 21절에 와서 하나님은 아담을 깊이 잠들게 하셨고, 아담의 갈비뼈로 하와를 만드신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다시 동물을 아담에게 이끌어 오듯이, 하와를 아담에게 이끌어 왔습니다. 그제야 비로소 아담은 자기와 닮은, 자기와 같은 인격체요 거울인 사람인 것을 알았습니다. 그래서 아담이 이렇게 고백한 것입니다.  “이는 내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라, 이것을 남자에게서 취하였은즉 여자라 칭하리라” 하였습니다.  우리는 이 말을 하나님이 하신 것으로 생각합니다.  

그러나 이 말은 하나님이 아니라 아담이 한 말입니다.  이처럼 하나님은 아담으로 하여금 동물을 통해 자기와 다른 것을 알게 하셨고, 결국 하와를 보면서 자기와 같은 것을 깨닫게 하였습니다.  대화가 되고 말이 통하는 것을 알았습니다. 서로에게 거울이 되었습니다. 거울이 없던 시절, 아니 있더라도 나와 같은 존재를 통해 서로를 보게 하신 것입니다. 이것이 창조의 목적이요, 신비입니다.

 우리가 사람을 통해 나를 볼 수도 있겠지만, 특히 매일 나와 함께 먹고 자고 생활하는 남편과 아내를 통해 나를 봅니다. 왜냐하면 소통이 되기 때문이요, 나를 가장 잘 알기 때문입니다.  나의 부족을 알면서 하나님께 나아가고, 강점을 보면서 힘을 얻고, 약점을 보면서 개선해 나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부부로 살아야 비로소 온전한 사람, 성숙한 사람이 됩니다. 혼자 살면 자기를 잘 볼 수 없기에 성숙하는 속도가 느립니다. 그래서 일반적으로 혼자 살면 나이가 많아도 철이 늦게 듭니다.  하지만 결혼하면 아무리 나이가 어려도 성숙한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함께 사는 법, 소통하는 법, 조절하는 법을 배워 나를 다스리고 통제하는 힘을 갖게 되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선조들은 결혼하면 그때서야 비로소 머리의 상투를 틀고 어른대접을 해 주었습니다. 그래서 옛날에는 아무리 나이가 많아도 결혼하지 않으면 아직도 어린아이와 같았습니다. 하지만 아무리 나이가 어려도 결혼하여 아이를 낳고, 가정을 이루어 살면 그 때부터 어른으로 인정한 것입니다.  

 신앙의 목표는 나를 보는 힘입니다. 인생의 성숙한 결국 얼마나 나를 아느냐에 달려 있습니다. 우리가 어떻게 나를 알고, 나를 들여다보며 나의 모든 것을 알아 성공하고 승리하는 삶을 살 수 있겠습니까? 매일 나와 함께 사는 나와 동일한 인격체를 통해 나를 배우지 않으면 이보다 더 어디에서 나를 아는 통로가 되겠습니까? 우리의 가정은 바로 소통의 물꼬를 트는 현장이어야 합니다. 가정에서 사람을 알고, 나를 알아야 합니다.  부모와 자녀를 통해 나를 봅니다.  시어머니와 며느리, 형제와 자매를 통해 나를 들여다봅니다.  무엇보다도 매일 함께 사는 남편과 아내를 통해 나를 봅니다. 그래서 나를 알고, 사람을 알고, 인생을 알아, 성숙하고, 온전한 사람이 되어 갑니다. 그러니 이것이 은혜가 아니고 무엇입니까?  부부는 분명 은혜입니다. 

 5월 21일은 부부의 날입니다.  법으로 정한 날입니다.  매일 부부의 소중함을 깨닫고 살아야 하겠지만 가정의 달에, 특히 부부의 날을 맞이하면서 더욱 소중함을 깨달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부부는 분명 은혜입니다.  외로움을 이기고, 돕는 배필이기 때문입니다.  무엇보다도 소통을 통해 나를 보는 통로가 되기 때문입니다.  이 말씀을 마음에 새기고 부부의 소중함을 더욱 깨달아 이제 내 몸처럼 사랑하고, 깊이 존경하면서 살기를 축원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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