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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벼랑 끝에 선 인생 (왕하 4: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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벼랑 끝에 선 인생 (왕하 4:1~7)
 
어떤 한국 사람이 지옥에 갔습니다.  두려운 마음으로 둘러보았지만 지옥불이 보이지 않았습니다.  
그가 지옥의 사자에게 물었습니다.
"지옥에는 불구덩이가 있다고 들었는데요."
사자가 대답을 했습니다.
"너희 한국인들의 찜질방 때문에 지옥불이 더 이상 형벌로서의 의미가 없어졌어.
도대체 불구덩이에 던져 넣으면 '어. 시원하다.'라고 좋아하니 얼마나 답답한 노릇이야."
"그러면 한국 사람에게는 어떤 벌을 주나요?"
"너희 놈들을 벌주기 위해 새로운 도구를 도입했지."
사자는 흐뭇한 표정을 지으면서 체중계를 보여주었습니다.
"아니, 어떻게 이걸로 벌을 줘요?"
이 말에 사자가 이렇게 대답을 했습니다.
"니들은 여기에만 올라서면 비명을 지르고 머리를 쥐어뜯으며 괴로워하잖아!"

사랑하는 여러분, 혹여 우리들 가운데도 체중계에 올라가면 머리를 쥐어뜯으며 괴로워하는 분이 없기를 바랍니다.  외모에 인생을 걸지 마십시오.  하나님은 외모를 보시는 분이 아니라 우리의 중심을 보십니다.  속마음, 중심을 아름답게 하시기 바랍니다.

우리는 지금 그 어느 때보다도 좋은 음식을 먹고, 좋은 조건의 환경에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좋은 교통편의 시설을 이용하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 현대인들은 더 피곤합니다.  긴장과 과로와 피곤이라고 하는 것이 오늘 현대인들의 한 특징이 되었습니다.  많은 사람들은 더 크고 더 좋은 아파트에 살면 이 피곤이 없어질 줄 알았습니다.  더 많은 재물과 명예를 얻으면 이 긴장이 없어질 줄 알았습니다.  그런데 어떤 면에서는 더 피곤으로, 더 긴장으로, 더 억압으로 우리의 삶을 이끌어가고 있습니다.

"오호라, 나는 피곤한 사람이로다.  이 피곤한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

사랑하는 여러분, 오늘 이 땅의 사람들에게는 이 낙심과 피곤함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는 복음이 절대적으로 필요합니다.  사실 역사적으로 볼 때 지금처럼 수많은 신경 질환과 정신적인 우울증이 발생한 시대는 일찍이 없었습니다.  과거 그 어느 때보다 더 잘 먹고, 잘 입고, 잘 사는데도 불구하고 낙심과 피곤과 절망 속에서 허덕이고 있습니다.  모든 낙심과 피곤의 위기로부터의 구원, 이것은 오늘 이 시대의 모든 사람들에게 가장 시급한 구원의 문제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사탄이 인간에게 하는 일이 많이 있습니다.  먼저 분열을 일으킵니다.  유혹을 합니다.  기도를 막습니다.  찬양하는 입을 막아 버립니다.  성경도 보지 못하게 방해를 합니다.  그런데 무엇보다도 사탄은 우리 인간들의 마음 속에 낙심과 절망감을 불어넣습니다.  이 낙심과 절망감은 사람들을 무기력하게 만듭니다.  삶의 모든 열정을 빼앗아버립니다.  꿈과 비전을 빼앗아버립니다.  낙심과 절망은 결국 사람들과의 관계성까지도 파괴합니다.  더 나아가서는 하나님과의 관계성까지도 깨뜨립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에게 이런 곤경과 절망감, 낙심과 포기하고 싶은 유혹 등 절망적이고 어두운 경험으로부터 구출되는 길이 있다면 마땅히 그 길을 찾아야 합니다.  기억하십시오.  낙심은 생명의 소망을 빼앗아갑니다.  낙심은 사람을 무기력하게 만들고 맙니다.  낙심은 분별력마저 빼앗아갑니다.  그러나 이 낙심은 실패한 사람에게만 있는 것은 아닙니다.  탁월한 성공을 거둔 사람 속에도 낙심은 얼마든지 일어납니다.
 
모세를 보십시오.  그는 하나님께서 인정하시는 온유한 사람이었습니다.  가는 곳마다 하나님의 구원이 그와 함께 하며 하나님이 높이시는 인물이라는 인정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붙들고 쓰시는 모세에게도 낙심은 있었습니다.  낙심의 늪에 빠졌던 모세는 하나님 앞에서 이렇게 절규합니다.
"주께서 내게 이같이 행하실진대 구하옵나니, 내게 은혜를 베푸사 즉시 나를 죽여 내가 고난 당함을 내가 보지 않게 하옵소서"

엘리야는 또 어떠했습니까?  그는 갈멜산에서 850명의 이방 선지자들을 잡아 죽였던 능력 있는 선지자였습니다.  그러나 자기를 죽이겠다는 이세벨의 말에 낙심이 되어 광야로 도망을 갑니다.  그리고 그는 로뎀 나루 아래에 앉아서 이렇게 하나님께 하소연합니다.
"여호와여, 넉넉하오니 지금 내 생명을 거두시옵소서.  나는 내 조상들보다 낫지 못하나이다"
 
성경을 가만히 보십시오.  성경에는 소위 믿음의 사람들에게도 얼마든지 낙심한 모습을 볼 수가 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사람은 누구나 자신의 인내의 한계를 넘어서는 완전한 실패감에 사로잡힐 때가 있습니다.  그것이 삶의 환경에서 오거나, 자녀에게서 오거나, 형제 사이에서 오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것들은 결국 사람들로 하여금 무기력하게 만든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러분이 기억하셔야 할 것은 사탄의 제일 무서운 마지막 무기는 사람을 무기력하게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능력과 은혜는 삶의 모든 무기력을 벗어나게 합니다.  하나님의 능력은 무기력을 정복합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여러분, 이 시간 하나님의 능력을 덧입으십시오.  하나님의 능력을 받아서 삶의 모든 무기력을 떨쳐버리시기를 축복합니다.

성경에서 믿음의 사람이 낙심한 모습을 보면 우리가 그 낙심을 피해갈 수 있는 비결이 있습니다.  모세가 왜 낙심했습니까?  모세는 주변의 끝없는 불평과 불만 때문이었습니다.  그 낙심은 모세를 극도로 피곤하게 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생리적으로, 육체적으로 너무 지쳐 있으면 낙심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피차에 불평과 원망을 하지 말아야 합니다.
 
무엇보다도 불평하고 비판하는 사람들 속에 들어가지 마십시오.  불명과 비판과 논쟁 속에 있으면 낙심합니다.  말 많은 사람하고 있으면 낙심합니다.  문제 속에 있으면 낙심합니다.  환경만 바라보고 있으면 낙심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가 너무 낙심하면 마지막 삶의 에너지도 잃어버리고 맙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법이 모든 죄와 실망과 낙심으로부터 우리를 구원하시므로 낙심할 것이 없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자기 연민에 빠지지 마십시오.  자기 연민에 빠지면 결국에는 낙심하게 됩니다.  자기 연민은 우리의 중심을 하나님으로부터 자기에게로 옮겨 놓고 맙니다.  그렇게 하나님을 의지하고 열심히 기도하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던 사람도 자기 연민에 빠지면 인생의 중심을 하나님으로부터 자기에게로 옮겨놓습니다.
 
그러나 기억하십시오.  우리의 삶의 중심을 하나님께로 두면 능력이 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모든 생명에 전류 같은 하나님의 능력이 오는 것이 아닙니다.  그리스도의 생명의 전원에다 자신을 꽂아 놓아야 능력이 오고 빛이 오는 것입니다.

자기 연민이 왜 문제입니까?  이것은 '왜 나만 희생해야 하나?' '왜 내 가정만 이런 어려움을 당해야 하나?'라고 하는 이기주의를 낳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래서 자기 연민은 자기 분열을 낳습니다.  자기 혼돈을 낳습니다.  자기 착각을 낳습니다.  자기 합리화를 낳습니다.  자만심을 낳습니다.  결국 자기 연민은 모든 파괴를 가져오고 맙니다.  자기 연민에 빠지면 일시적인 영적 침체의 현상이 자기 낙심으로 몰고 갑니다.
 
그러므로 믿음의 사람은 영적 침체가 오지 않도록 끊임없이 자기 자신을 쳐서 다스려야 합니다.  계속해서 자신을 성령의 물줄기에 집어넣어야 됩니다.  계속해서 하나님의 강력한 영적인 돌풍에다 집어넣어야 됩니다.  하나님의 일에는 휴가도 없고 은퇴도 없습니다.  신앙이란 믿음 위에 믿음을 더하는 것입니다.  은혜 위에 은혜를 더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삶에 영적 침체가 일어나지 않도록 한결같이 깨어 있어야 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신앙이란 언제나 최악에서 최선을 만들어내는 작업입니다.  믿음만 있으면 최악의 상태가 최상의 상태가 됩니다.  기억하십시오.  우리에게 상황이 문제가 아니라, 믿음의 태도가 문제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상황에 짓눌리지 마십시오.  환경에 빠져서 아직도 일어나지 않는 미래의 일을 가지고 미리 낙심하고 절망하지 마십시오.  아십니까?  모든 사람들이 다 불가능하다고 할지라도 하나님께서 간섭하시고, 하나님께서 뜻하신다면 됩니다.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다"고 했습니다.  이 말씀을 믿는다면 결코 환경이 나를 짓누르지 못하게 하십시오.

사랑하는 여러분, 환경이 나빠서 불행한 것이 아니라 그 사람의 태도가 나빠서 불행한 것입니다.  우리가 상황을 바꿀 수 있는 것은 아니지만 강하고 담대한 믿음을 가지고 나가면 역사가 일어날 것입니다.
 
잊지 마십시오.  믿음의 자세가 모든 인생의 승패를 좌우합니다.  어떤 고통과 고난 가운데서도 자세가 흐트러지지 않으면 반드시 승리하게 될 것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환경의 지배를 받지만, 우리 믿음의 사람은 믿음의 지배를 받습니다.  믿음의 사람은 하나님의 큰 역사를 기다리며 절대로 포기하지 말고 믿음과 삶에 대한 열망을 붙들고 나가야 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이 시간 우리를 향해 주시는 주님의 말씀을 들으십시오.
"할 수 있거든이 무슨 말이냐?  믿는 자에게는 능히 하지 못할 일이 없느니라"

금실 좋기로 소문난 부부가 있었습니다.  온 동네가 다 부러워 할 정도로 잉꼬부부인 그들에게 하나님은 떡두꺼비 같은 두 아들도 선물로 주셨습니다.  두 아이들은 착하기도 하거니와 공부는 얼마나 잘 하는지, 둘 다 전교 1, 2등을 놓치는 법이 없었습니다.  그러니 자꾸 자꾸 욕심이 생겼습니다.  아이들을 최대한 잘 교육시켜서 공부로 성공하게 하고 싶었습니다.
 
학원에 보내고, 예능 교육도 시키고, 이것저것 뒷바라지하려니 봉급 생활로는 도저히 안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봉급생활을 접고, 오랫동안 생각했던 벤처기업을 해보기로 마음을 먹었습니다.  회사에 사표를 내고 여기저기서 2억원을 빌렸습니다.
 
그러나 벤처기업이라는 것이 쉬운 게 아니지 않습니까?  10개 중에 한 두개도 성공하기 어려운 게 벤처기업입니다.  이자에, 회사 운영에 돈은 계속 필요한데 회사가 생각만큼 잘 돌아가지 않으니 고민이 아닐 수 없었습니다.  밤늦게까지 일하며, 자금을 빌리느라고 동분서주하다가 스트레스와 과로 때문에 갑자기 쓰러져버리고 말았습니다.  곧 일어날 줄 알았는데 그 길로 다시는 일어나지 못했습니다.
 
남편만 바라보며 살던 전업주부가 졸지에 남편이 죽고 나니 두 아들과 살아갈 일이 막막했습니다.  설상가상으로 남편은 20억원이 넘는 빚을 남기고 갔습니다.  더군다나 채권자 가운데 한 명이 한달 내에 빚을 다 갚지 않으면 어린 두 아들을 섬으로 보내서 염전에서 일을 시키며 빚을 다 갚을 때까지 절대로 섬 밖으로 나오지 못하게 하겠다는 것입니다.  말하자면, 현대판 노예로 팔아버리겠다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만일 여러분이 이 부인이라면 어떻게 하겠습니까?
제가 지금까지 말씀을 드린 이 이야기는 오늘 본문에 나오는 이야기를 현대판으로 각색해 본 것입니다.

인생을 살다 보면 크고 작은 위기를 만나지 않는 아무도 사람은 없습니다.  과거에 그런 경험을 한 사람도 있고, 바로 오늘 지금 이 순간에 벼랑 끝에 서서 한 발짝만 움직이면 천길 낭떠러지로 떨어질 것 같은 아슬아슬한 지경에 있는 사람도 있을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비록 지금 당장에는 별문제 없이 잘 나가지만 언제, 어느 순간에 이 부인과 같은 일을 만날는지 예측할 수 없는 상황에 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여러분 같으면 어떻게 하겠습니까?  이런 경우에도 해결책이 있을까요?  사랑하는 여러분, 내 인생이 벼랑 끝에 서 있다고 생각될 때에 우리는 어떻게 해야만 할까요?

첫째로, 벼랑 끝에 서게 되면 하나님께로 나아와야 합니다.

오늘 본문을 보십시오.  본문에서 불행한 이 여인은 어떻게 벼랑 끝에서 탈출하게 되었습니까?  자신의 힘으로는 남편이 남겨 놓은 그 엄청난 빚을 도저히 갚을 수도 없었습니다.  그렇다고 두 아들을 종으로 팔려가지 않게 할 방도도 전혀 없었습니다.  아무리 생각해도 해결책이 없었던 이 여인이 취할 수 있는 행동이 무엇이었습니까?  선지자 엘리사에게 나와서 부르짖는 일이었습니다.  이것을 다른 말로 하면, 하나님께 찾아 왔다는 의미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오늘 본문에서의 과부와 같이 벼랑 끝에 섰을 때 사람들은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일반적으로 몇 가지 방법을 선택할 수가 있을 것입니다.  가장 먼저 생각할 수 있는 방법은 동반자살입니다.  "종으로 팔려 가서 한 평생 짐승같이 사는 것보다는 함께 죽는 것이 낫겠다"라고 생각을 하고는 어리석은 행동을 하는 것입니다.  또 한 가지 방법은 노숙자가 되는 것입니다.  길거리에서 거지로 인생을 허비하며 삽니다.  또 다른 방법은 자포자기입니다.  "될 대로 되라"고 하면서 술이나 마약에 자기를 완전히 내 던져 버리는 것입니다.  그래서 결국은 폐인이 되고 맙니다.

그러나 이런 것은 진정한 해결책이 아닙니다.  노숙자로 전락하거나 술에 자신을 맡김으로 무엇이 해결됩니까?  자살하면 문제가 해결되는 것입니까?  아닙니다.  이런 것은 절대로 해결책이 아닙니다.  단순히 책임 회피일 뿐입니다.  친척들한테 수억 원을 빌린 채 한 푼도 안 갚고 자살해 버리면 끝나는 겁니까?  나 때문에 친척들이 모두 다 파산지경에 이르게 됐는데 나만 죽으면 다 해결됩니까?
 
기억하십시오.  자살은 절대로 해결책이 아닙니다.  이것은 책임을 안 지겠다는 아주 비겁하고 비열한 생각입니다.  진짜 해결책은 재기해서 빚을 다 갚고 보란 듯이 성공하는 것입니다.  죽을 용기가 있으면 그 용기를 가지고 살아서 재기하는 데 사용해야 합니다.

무엇보다도 사랑하는 여러분, 사람이 절체절명의 위기의 순간을 맞을 때 그 위기를 해결할 수 있는 가장 좋은 방법은 전능하신 하나님 앞으로 나아가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인간의 노력이 끝나서 모든 것을 포기할 때 그 때 개입하시기를 원하십니다.  항복하고 전능자에게 가면, 하나님에게는 인생의 어떤 어려운 문제도 식은 죽 먹기입니다.

가령 어떤 고등학생이 어려운 수학문제를 못 풀어서 끙끙거릴 때 수학 교수에게 가져가면 식은 죽 먹기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실력 가지고는 아무리 머리를 짜내어도 풀 수 없는 인생의 어려운 문제를 쉽게 풀어주시는 분이십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여러분, 내 인생이 벼랑 끝에 서 있다고 생각이 될 때에 하나님 앞으로 나아가시기를 바랍니다.  그 분만이 내 인생의 문제를 풀어주시고 해결해 주실 유일한 구원자이십니다.

현재 살아 있는 기업인 가운데 가장 존경받는 기업인으로 꼽히는 미래산업의 정문술 전 회장님이 있습니다.  1938년생인 정회장은 중앙정보부에서 18년 동안 공무원으로 일하다가 전두환 신군부에 의해 퇴직 당해 졸지에 실업자가 되었습니다.
 
그는 "창업만이 살 길이다"라고 판단해서 반도체 생산설비 업체인 미래산업을 설립했습니다.  이후 사기와 제품의 상품화 실패 등으로 18억원의 부채를 안은 채 쫄딱 망한 적이 있었습니다.  빚을 갚을 능력은 없고 아무 것도 할 수 없고, 오직 절망뿐이었습니다.  이렇게 비참하게 살 바에야 어차피 죽을 목숨, 빨리 죽는 편이 낫다 싶어서 가족회의를 열었습니다.  한두 명 남아서 고생하면 뭐하냐 해서 가족이 다 함께 죽기로 결심했습니다.
 
그런데 당시 고등학교 2학년이었던 딸이 "죽더라도 교회에 한번 가보고 죽자, 목사님의 설교나 한번 듣고 죽자"고 간청을 했습니다.  이제 곧 죽을 사람들인데, 마지막 소원도 못 들어줄까 싶어서 가족이 몽땅 교회 예배에 참석했습니다.  그 날 마침 목사님의 설교가 욥의 고난에 대한 설교였습니다.
"고난은 정금 같이 단련하여 축복을 받게 하는 기회가 된다."

정회장은 이 말씀을 듣고 새로운 희망과 용기를 얻어 다시 일어나 그 동안 축적한 기술로 새롭게 일어섰습니다.  1999년 한해 순이익만 160억 원이었습니다.  2001년 현역에서 은퇴하고 전문경영인에게 경영권을 물려주고, 자식들에게는 회사 구경조차 시켜주지 않았다고 합니다.
 
은퇴 당시에 "국민을 먹여 살릴 기술과 인력을 양성해 달라"며 KAIST에 300억원을 기부했습니다.  KAIST에서는 정회장의 기부금으로 지상 11층, 지하 1층 (연건평 2,738평) 규모의 '정문술 빌딩'을 지어 준공식을 했습니다.

그러나 준공식날 정작 주인공인 정 전 회장은 참석하지 않았습니다.  "당연히 해야 할 일을 했는데 행사에 참석할 경우 과도하게 치켜세우는 일이 벌어질지 모른다"는 우려 때문이었습니다.  "휴대전화도 받지 않고 잠적해 버렸다"는 총장의 설명을 전해들은 참석자들은 일순간 숙연해졌다고 합니다.  그는 공사기간 중에는 아예 KAIST에 발길을 끊었고, 건물명을 '정문술 빌딩'이라는 이름을 지을 때도 펄쩍 뛰었다고 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오늘 여러분의 인생도 혹시 벼랑 끝에 아슬아슬하게 서 있지는 않습니까?  그렇다면 전능하신 하나님 앞으로 나아오십시오.  일단 교회에 온 것은 좋은 일입니다.  그것은 전능하신 하나님을 향해 한 발짝 다가 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교회에 오는 것만으로는 안 됩니다.  전능하신 하나님을 나의 아버지로 만나야 합니다.  그 분을 나의 아버지로 만난 후에 그 분에게 간절히 아뢰십시오.  종으로 끌려가는 아들을 구해내겠다는 절박한 심정으로 아뢰십시오.  불타는 집 속에서 잠자고 있는 나의 아기를 건져내야 되겠다는 간절한 심정으로 전능하신 하나님에게 아뢰십시오.  그러면 전능하신 하나님은 벼랑 끝에서 탈출할 수 길을 보여 줄 것입니다.

둘째로, 벼랑 끝에 서게 되면 내 손안에 가지고 있는 것에 주목해야 합니다.

본문의 이 과부는 엘리사 선지자에게 와서 딱한 사정을 다 털어놓았습니다.  그러자 엘리사 선지자가 물었습니다.  2절입니다.  "네 집에 무엇이 있느냐?"  찢어지게 가난한 집에 뭐 하나 변변한 게 있겠습니까?  '당연히 아무 것도 없지'라고 생각하다가, 다시 곰곰이 생각해 보니 달랑 기름 한 병이 있는 것이 생각났습니다.  그러나 기름 한 병 가지고 어떻게 세 식구가 먹고 살 수 있습니까?   더군다나 빚은 무슨 수로 갚습니까?  빚 때문에 종으로 끌려 갈 판인 두 아들은 어떻게 구합니까?  이런 상황 속에서 기름 한 병은 아무 것도 아닌 같이 보였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 기름 한 병이 과부와 두 아들을 살렸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벼랑 끝에서 안전지대로 옮기실 때 우리 손에 있는 것을 즐겨 사용하십니다.  하나님은 무에서도 유를 창조하시는 분이십니다.  아무 것도 없이 모든 것을 있게 하실 수 있는 분이십니다.  그러나 때로 우리에게 있는 작은 것을 사용하기 원하십니다.  그것이 사람들이 볼 때에 크게 보이느냐, 작게 보이느냐 하는 것은 결코 중요하지 않습니다.

다윗의 돌팔매, 이것은 사람들이 볼 때에는 분명히 보잘 것 없습니다.  이스라엘의 명장들도 벌벌 떠는 상황입니다.  그러나 물맷돌이 블레셋의 거인 골리앗을 한방에 쓰러뜨리는데 사용되었습니다.  풍전등화와 같은 이스라엘을 물맷돌 한 개가 구해냈습니다.
 
한 소년의 점심 한끼에 불과했던 5병2어는 분명히 아무 것도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주님의 손에 들리워졌을 때 굶주림에 허덕이는 남자 장정만 5,000명을 먹이는데 사용되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는 하나님께서 일하시는 방법에 주목해야 합니다.  마른 막대기와 같이 보잘 것 없는 지팡이라도 하나님께서는 홍해를 가르셨습니다.  그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아주 작은 것을 사용해서 큰 일을 이루기 원하십니다.
 
그렇기 때문에 모든 것을 다 잃어버리고, 앞이 캄캄하고 아무 것도 보이지 않는 순간에도 정신을 차리고 곰곰이 살펴보면 보이는 게 있습니다.  그것을 믿음으로 힘차게 붙잡으면 사는 길이 보입니다.  나한테 없는 것 때문에 탄식하고 앉아만 있으면 벼랑 끝에서 탈출하는 것이 아니라 천길 낭떠러지 아래로 떨어지고 말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혹여 지금 인생의 벼랑 끝에 서 있습니까?  지금 나에게 있는 것이 무엇인지 그것에 주목하십시오.  하나님은 그것을 가지고 큰 일을 이루실 수 있습니다.

앞에서 말했던 정문술 사장은 반도체 제조를 하다가 실패한 후에 하나님 앞에 나와서 새롭게 시작을 했습니다.  무엇을 할까 생각하다가 반도체 제조에는 실패했지만 그 때 개발한 기술을 사용해 '테스트용 핸들러'라고 하는 반도체 검사 장비를 만들어서 성공했다고 합니다.  자신의 손에 있던 것을 사용한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나에게 없는 것은 생각하지도 말아야 합니다.  나에게 없는 것을 생각하면 더 깊은 절망 속에 빠집니다.  그러나 나에게 있는 것을 잘 활용하면 조만간에 안전지대로 옮겨 갈 수 있습니다.  다 망한 뒤에 곰곰이 생각해 보니 나에게는 남다른 손재주가 있다는 것을 발견했다면, 손으로 할 수 있는 일을 하면 됩니다.  다 망한 뒤에 보니 나에게는 기계 만지는 취미가 있다는 것을 알았다면 기계와 연관된 일을 시작하면 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움추린 손을 펴 보십시오.  가진 것이 보이십니까?  그것을 빨리 발견해서 잘 활용하면 비록 지금은 벼랑 끝에 서 있을지라도 탈출하는 것은 그렇게 어렵지 않을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하나님은 우리가 믿음으로 살기를 바라십니다.  믿음으로 살아야 하는 이유는 우리와 세상 사람들에게 하나님이 살아 계신다는 것을 증명해 주기 위해서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하나님은 살아 계십니다.  영원히 살아 계십니다.  여러분은 이 사실을 믿으십니까?  그렇다면 여러분의 믿음으로 하나님의 살아 계심을 세상 사람들에게 보여주십시오.
 
여러분들이 벼랑 끝에서 믿음을 붙잡고 믿음으로 살아갈 때에 하나님의 살아 계심을 증명할 뿐만 아니라 여러분의 믿음이 자라는 것을 보게 될 것입니다.  믿음은 하나님께서 그의 자녀들에게 주신 선물입니다.  그러나 그 믿음을 사용하지 않는다면 아무런 소용이 없습니다.  작은 믿음이라도 사용할 때 우리의 믿음은 점점 자라게 될 것입니다.  점점 자라서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에까지 자라게 될 것입니다.
 
기억하십시오.  믿음은 몸을 단련시키는 것과도 같아서 훈련을 할 때 더욱 강해집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여러분, 인생의 벼랑 끝에서 자신의 믿음이 환경에 짓눌려 허우적거리는 나약한 믿음 없는 사람이 되지 마십시오.  그 환경을 박차고 일어나십시오.  일어나서 자신의 믿음을 반석 위에 굳건하게 세워 가는 축복의 기회로 만드시기를 축복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하나님께서는 왜 우리 인생을 벼랑 끝으로 내 모실까요?  순풍에 돛단배처럼 우리의 인생을 평탄하게 인도해 주시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그러나 기억하십시오.  우리 인생이 순풍에 돛단배와 같다면 그것은 온실 속의 잡초와 같을 것입니다.  온실 속의 잡초는 온실 속에 있을 때에는 잘 자랍니다.  그러나 온실 밖으로 나오는 순간 적응하지를 못해서 금방 말라버리고 죽어갑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인생이 그렇게 나약한 존재가 되기를 바라지 않습니다.
 
마치 독수리가 자기 새끼를 높은 절벽에서 밀쳐 떨어뜨리고, 또 떨어뜨리면서 공중의 강한 왕자로 키워가듯이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사랑하는 자녀들이 이 땅에서의 시련을 통하여 강한 믿음의 용사로 세우기를 바라십니다.

그러므로 성경은 우리들에게 말씀하십니다. 
"우리가 환난 중에도 즐거워하나니 이는 환난은 인내를, 인내는 연단을, 연단은 소망을 이루는 줄 앎이로다"
 
그렇습니다.  성경은 우리들에게 환난이 없다고 말하지 않았습니다.  뿐만 아니라 환난을 만났을 때 낙심하거나 절망하라고 말하지도 않았습니다.  성경은 우리들에게 환난이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환난을 만났을 때 즐거워하라고 했습니다.  왜냐하면 환난은 소망을 이루기 때문이라는 겁니다.
 
아십니까?  이 소망은 결코 우리를 부끄럽게 하지 않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내 인생이 벼랑 끝에 서 있는 그 순간에라도 믿음을 붙잡으십시오.  그리고 그 순간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말씀에 순종하는 법을 배우시기를 바랍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로렌 커닝햄'이 쓴 '벼랑 끝에 서는 용기'라는 책이 있습니다.  그 책에 보면, 그는 이런 말을 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믿음으로 살아갈 때에 하나님께서 행하실 기회를 드리고 기다려야 할 때도 있습니다.  그러면서 그는 우리의 믿음에 대해서 다음과 같은 아주 의미 있는 예화를 말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당신에게 나뭇가지 끝으로 나아가라고 하십니다.  나뭇가지 끝으로 갔을 때 '위이잉∼'하는 소리가 들려 뒤돌아보니, 사탄이 전기톱으로 당신이 서 있는 나뭇가지를 잘라냅니다.  성경이 말하는 믿음은, 가지 끝에 서서 톱질하던 사탄이 마침내 나무와 함께 쓰러지는 것을 지켜보는 것입니다.  하지만 당신은 여전히 나뭇가지 위에 선 채로 공중에 있습니다.  그것이 믿음입니다.  나무나 나뭇가지를 믿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과 그 말씀을 지키실 분을 믿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솔직히 우리는 지금까지 하나님을 믿고 신뢰하기보다는 나무와 나뭇가지를 더 믿어왔던 것이 사실입니다.  그래서 돈을 더 믿었습니다.  세상의 환경을 더 믿었습니다.  그러다가 이 환경이 흔들리고 무너지면 내 믿음도 흔들리고 무너졌던 것도 사실이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의 믿음이라는 것도 자신의 이성적인 판단과 상식을 벗어나지 않습니다.  절대로 가지 끝에 서려고 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기억하십시오.  이것은 믿음이 아닙니다.  믿음은 벼랑 끝에 서 있는 순간에라도 하나님을 절대적으로 신뢰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참된 믿음은 하나님 이외에 다른 어떤 것도 의지할 수 없음을 믿고 하나님이 신뢰할 만한 분임을 우리의 실제 삶 속에서 경험해 가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의 하나님은 사람이 아니시므로 결코 변개하지 않으십니다.  우리의 하나님은 절대적으로 신실하신 분이십니다.  그렇기 때문에 내 인생이 벼랑 끝에 서 있는 그 순간에라도 하나님이 신실하신 분이라는 확신하십시오.  그러면 우리의 믿음은 흔들리지 않습니다.  우리의 믿음은 환경을 이기는 살아있는 믿음으로 성장하게 될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벼랑 끝에 서는 경험, 그런 경험은 어느 누구도 원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내 인생이라고 내 마음대로 되는 것은 아닙니다.  어느 날 내 의지와는 상관없이 다가오는 인생의 위기를 만날 수 있습니다.  내 의지와는 상관없이 벼랑 끝으로 내 몰릴 때가 있습니다.
 
그럴 때에 당신은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하나님께로 나아오시기 바랍니다.
내 손에 가진 것을 발견해서 그것을 활용하십시오.
그래서 벼랑 끝에서 벗어나 안전지대에서 멋지게 재기할 수 있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오주철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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