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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나를 따라 오려거든 (마 16:24~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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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를 따라 오려거든 (마 16:24~25) 

브룩클린 태버너클 교회(Brooklyn Tabernacle Church)의 목사는 짐 심발라(Jim Cymbala)입니다. 1972년에 부임할 때 20명의 성도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버려진 사람들을 대상으로 예수의 사랑을 전하는 목회를 시작했습니다. 마약중독자, 알코올 중독자, 죄수, 매춘부, 집 없이 떠도는 사람들을 대상으로 복음을 전파하였습니다. 그 후 하나님께서 축복하셔서 만 명이 넘는 사람들이 변화되어 교회를 섬기고 있습니다. 심발라 목사는 뉴욕을 바꾸는 영향력 있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본래 심발라는 신학을 공부하지 않았습니다. 어릴 때 농구선수로 활약했습니다. 체육 특기생으로 대학을 갔습니다. 졸업 후 직장생활을 할 때입니다. 장인이 뉴욕의 조그만 교회에서 목회자로 섬기라고 권면합니다. "제가 어떻게 교회를 섬기겠습니까? 신학도 하지 않았고 운동하느라 책도 변변히 읽지 못했습니다." 그 때 장인이 들려준 한 마디의 말이 심장에 꽂혔습니다. "자격이 중요한 것이 아닐세. 하나님이 부르신다는 것이 중요하다네." 내가 누구인가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나를 부르시는 이가 누구인가가 중요합니다. 나를 부르시는 이는 창조주 하나님이십니다. 십자가를 지고 죽음에서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본문은 예수께서 공적 사역을 마감하시며 주신 말씀입니다. 제자들에게 묻습니다. "사람들이 나를 누구라 하느냐?" 제자들은 더러 세례 요한이라고, 혹은 엘리야라며, 어떤 사람들은 선지자 중의 한사람이라고 말한다며 대답합니다. 반응을 들으신 예수께서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 고 제자들에게 질문하십니다. 이 때 베드로는 "주는 그리스도이십니다" 라고 고백하였습니다. 예수께서는 이 고백을 들으신 후 앞으로 자신이 당할 죽음을 설명해 주셨습니다. 그러나 베드로는 그렇게 되지 않기를 구합니다. 예수로 인해 높아지기를 기대하였는데, 고난을 받고 죽으신다는 말에 그렇게 되지 말기를 간구한 것입니다. 이 때 예수께서 자신을 따르는 삶이 무엇인가를 가르쳐 주셨습니다. '따르라' 의 원어는 '아콜루테오' 인데 '동행하다' 라는 의미를 가집니다. 즉 예수를 따르라는 것은 예수와 동행하라는 뜻입니다. 

교회는 신앙고백을 중요시합니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신앙고백을 잘 했던 베드로에게 말씀하십니다. "아무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니라". 이것은 신앙고백이 전부가 아니란 뜻입니다. 단순히 따라다니지 말고 확실한 제자가 되라는 말씀입니다. 예수를 따르려면 확실하게 따라야 합니다. 많은 성도들이 신앙을 고백하지만, 예수와 함께 십자가를 지려 하지 않습니다. 예배를 드리고 말씀에 감격하여 눈물 흘리지만 자신의 평안과 소원성취를 위해 믿는 것일 뿐 진정 예수를 위해서 죽으려 하지 않습니다. 이러한 신앙은 결국에 자기도 구원할 수 없는 허망한 신앙이 되고 맙니다. 과연 예수를 따라 가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첫째로 자기를 부인해야

맥스웰 몰츠(Maxwell Maltz)의 '성공의 법칙' 이라는 책이 있습니다. 몰츠는 성형외과 의사입니다. 그는 마음의 성형 수술도 중요하다고 말합니다. 진정한 자아 혁명은 마음의 성형으로부터 시작해야 하는데 첫 번째가 자아 이미지부터 바꾸는 것입니다. 실패할 수밖에 없는 부정적 자아 이미지를 성공할 수밖에 없는 자아 이미지로 바꾸는 일입니다. 이것이 진정한 자아 혁명입니다. 신앙 생활에서 성공하려면 이제까지 지배하던 자아를 부인하고 그 자리에 예수를 올려야 합니다. 예수 믿는 것은 내 기분대로 사는 것이 아니라 내 안에 예수를 모시고 지배를 받으며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리할 때 자기 부인이 가능하게 됩니다. 자존심도 부인합니까? 이기적 욕심도 부인합니까? 과시하고 싶은 마음도 부인합니까? 미운 감정, 섭섭한 감정도 부인합니까? 예수를 따르려면 자기를 부인해야 합니다. 오직 예수만 나타내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기분과 감정과 자아를 부인해야 예수께서 우리의 삶을 통해 나타나십니다. 

본문 24절입니다. "아무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否認)하고". 여기의 '부인' 이란 원어는 '아파르네오마이' 입니다. '제것이 아니라고 부인하다' 라는 뜻입니다. 즉 자기 중심적인 삶을 살지 않는 다는 것입니다. 자신에 대하여 '아니오' 하고 그리스도께 대하여 '예' 하는 삶입니다. 그러므로 참된 제자가 되려면 자기를 부인하는 일로부터 시작해야 합니다. 자기를 비워야 합니다. 인생의 주인을 예수로 고백하고 인정해야 합니다. 모든 결정권을 주님께 드려야 합니다. 소유권이 주님께 있음을 인정해야 합니다. 주어진 생명도, 명예도, 재물도, 재능도, 건강도, 자녀도 모든 것이 하나님의 것임을 고백해야 합니다. 따라서 자기 부인은 신앙인에게 중요합니다. 자기부인은 신앙의 기본이기 때문입니다. 자기부인으로 출발되는 신앙이 되어야 어떤 경우에도 성공할 수 있습니다. 


둘째로 자기 십자가를 져야

빙점(氷點)으로 유명한 미우라 아야꼬(三浦綾子)의 수기를 보면 어떻게 예수를 믿게 되었는가, 예수 믿은 다음 어떻게 달라졌는지 잘 묘사되고 있습니다. 그녀가 예수를 처음 만난 당시의 상태는 사형선고를 받은 폐병 3기의 중환자였습니다. 절망의 수용소에서 날마다 피를 토하며 죽음을 기다리는 빙점(氷點)만 향해 달려가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다 어느 날 예수를 만나게 되었습니다. 빙점이라는 마지막 상황에서 예수를 만나고 나니 모든 것이 새롭게 보였고, 모든 것을 은혜로 받아들일 수 있게 되었습니다. 1982년도에 직장암 수술을 받고 1992년도에는 파킨슨병을 앓으면서도 감사하였습니다. 모든 것을 은혜로 여기고 살았습니다. 노년에 얻은 병도 하나님이 주신 십자가라고 믿는 은혜 속에서 살았습니다. 

히틀러가 독일을 지배하고 있을 때 독일 교회에 유행하는 말이 있었습니다. 바보들만 십자가를 지고 예수를 따른다는 것입니다. 히틀러가 독일 교회를 나치화 시키기 위해 내세운 정책은 게르만적 기독교입니다. 독일 목사들과 기독교 지도자들은 게르만 민족을 하나님 대신 우상으로 섬겼고 교회를 타락시켜 나가기 시작했습니다. 그 때 본회퍼와 칼 바르트는 기독교 양심을 지켰습니다. 결국 비밀경찰에 의해 처형을 당하고 말았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십자가를 피하지 않았습니다. 우리도 십자가를 피해서는 안됩니다. 참된 제자는 자기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좇아갑니다. 그리스도를 주로 모신 자들은 언제나 십자가를 지고 살아야 합니다. 초대교회의 역사나 종교개혁 당시 역사를 살펴보아도 신자들은 십자가를 피하지 아니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죽음의 지경까지도 나아간 것을 찾아 볼 수 있습니다. 

본문 24절입니다. "아무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 십자가를 지고". 신약에 '십자가' 라는 말이 47회 나옵니다. 십자가의 중요성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성서학자 바클레이(W. Barclay)는 십자가를 희생의 짐이라고 말합니다. 자기를 부인하는 것이 내적인 모습이라면 십자가를 지는 것은 외적인 것입니다. 누구나 나름대로의 십자가가 있습니다. 무거운 십자가를 지고 골고다 언덕을 오르셨던 예수께서 우리에게 물으십니다. "너는 어떤 십자가를 지고 왔느냐?" 바울은 갈라디아서 6장 17절에서 말합니다. "이 후로는 누구든지 나를 괴롭게 말라 내가 내 몸에 예수의 흔적을 가졌노라". 여러분은 무슨 흔적을 가지고 있습니까? 성도의 흔적은 십자가입니다. 자기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묵묵히 좇아가는 참된 성도가 되시기 바랍니다.


셋째로 자기 목숨을 버려야

짐 엘리엇(Jim Elliot)의 일기에 나오는 내용입니다. "하나님, 이 쓸모 없는 나무개피에 불을 붙여 주소서. 그리고 주를 위해 타게 하소서. 나의 삶을 소멸하소서. 나의 하나님이여, 이 몸은 주의 것입니다. 나는 오래 살기를 원치 않습니다. 오직 풍성한 삶을 살게 하소서. 당신과 같이, 주 예수님이시여". 

휘튼 대학을 수석으로 졸업한 짐 엘리엇(Jim Elliot)과 동료 4명은 식인종 아우카 족의 선교를 위해 떠났습니다. 아우카족이 사는 해변에 도착한 지 5일만에 죽임을 당하고 말았습니다. 이를 취재하던 기자들이 "왜 이런 낭비가 있어야 합니까?" 라고 물었을 때 짐 엘리엇의 아내 엘리자베스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말씀을 삼가 주세요. 낭비라니요. 남편의 죽음을 절대로 낭비가 아닙니다. 그는 온 생애를 바로 이 시간을 위해 살아왔던 사람입니다. 그는 자기 책임을 다하고 죽은 행복한 사람입니다." 그 일이 있은 후 죽은 선교사들의 아내들은 아우카 부족을 찾아가 여러 해 동안 헌신하며 복음을 전했습니다. 그녀의 아들은 지금도 아우카족과 함께 살고 있습니다. 주님을 위해 타올랐던 불은 식인종을 주님의 품으로 인도하는 생명의 불이 되었습니다. 

벤지(Geoff Benge)는 그들의 마지막 순간을 이렇게 기록합니다. "짐과 피트는 뒤를 돌아보았다. 손에 창을 든 아우카 전사들이 너에트와 에드와 로저를 향해 달려들고 있었다. 짐은 주머니에 든 권총에 손을 갖다 대었다. 저들을 쏘아야 할까? 그러나 짐은 이미 그 대답을 알고 있었다. 목숨을 잃는 한이 있어도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생명을 전해야 할 저들을 죽이지 않겠다고 약속했기 때문이었다. 짐 엘리엇과 동료들은 기꺼이 자신의 생명을 바쳤다. 그들의 희생은 헛되지 않아 지금까지 수 많은 그리스도인들의 가슴에 숭고한 선교의 불을 당겼다." 짐 엘리엇과 동료들은 자기의 목숨을 버림으로서 주를 따르는 모습을 몸소 우리에게 보여 주었습니다.

본문 25절입니다. "누구든지 나를 위하여 제 목숨을 잃으면 찾으리라." 예수께서는 제 목숨을 구원코자 하면 잃게 된다고 하십니다. 오히려 목숨을 잃는 것이 찾는 길이라고 역설적으로 말씀하십니다. '죽고자 하는 자는 살리라' 는 말은 적군의 고지를 향해 돌격하라고 부하들을 채근하는 소대장의 함성과 같습니다. 죽기를 각오하고 싸우는 병사는 살 확률이 그만큼 높은 것입니다. 그러나 본문의 말씀은 살 확률을 뜻하는 것이 아닙니다. 산다는 것을 확실히 보장하고 있습니다. 목숨은 하나뿐입니다. 하나뿐이니 더욱 소중합니다. 이같이 소중한 목숨을 주를 위해 바칠 때 진정으로 주를 따라가는 제자가 됩니다. 

지금처럼 예수 믿기 쉽고 편한 때가 어디에 있습니까? 이 때 바로 믿지 못하고 바로 따르지 못한다면 어려울 때 어떻게 예수를 따를 수 있습니까? 잘먹고 잘사는 것으로 족한다면 인생은 존재할 가치가 없습니다. 가슴에 십자가의 은혜가 충만하고, 성령의 불길이 타올라 복음을 전파할 때 존재의 의미를 가지게 됩니다. 날마다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자기 목숨을 버리면서 주님이 가신 그 길을 끝까지 따라가는 복된 성도들이 다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김광일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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