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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성령강림에 대한 반응 (행 2:5~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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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령 강림에 대한 반응 (행 2:5~13)

  「너는 내 것이라」는 책을 쓴 원종수 권사는 방언을 사모하였다. 성령 받는 것은 곧 방언이라고 가르쳐 준 여자 전도사의 말씀을 따라 방언을 하려고 하였다. 물론 훗날에 성령 받는 것은 곧 방언 받는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이 꼭 맞는 것은 아니라는 것을 알았지만 방언을 할 수 있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은 변함없는 생각이라고 하였다. 그는 서울대에 와서 간증을 할 때 아내를 구해도 방언할 줄 아는 자매를 신부감으로 구했다고 하였다.

  방언은 외국 언어라는 말이다. 오늘 마가의 다락방에 임한 성령의 역사는 방언의 역사였다. 그런데 행2:8을 보면 “우리가 우리 각 사람의 난 곳, 방언으로 듣게 되는 것이 어찜이뇨?”하면서 열 다섯 나라에서 온 이들이 다 알아듣는 방언을 하였다. 성령의 은사는 여러 가지가 있고 다양하지만 마가의 다락방에 첫 번째로 나타나는 은사가 방언이라는 점에서 방언은 성령이 임하셨음을 알리는 신호음이라고 봐야 할 것이다. 만약 성령의 은사 중에 지식의 말씀의 은사, 그리고 지혜의 말씀의 은사가 첫 번째 은사로 임했다면 성령의 임재함의 신호를 누가 분별할 수 있겠는가? 그래서 첫 번째 성령이 임했음을 누구나 확인할 수 있는 방언으로 나타난 것이다. 그러므로 방언은 첫 번째 표적이라는 점에서 관심을 가져야 한다. 방언의 유익이 무엇인지에 대해 알지 못한다 해도 방언은 성령이 오셨다는 성령 시대 그리고 교회 시대가 시작되었음을 알리는 사인이라는 점에서 귀하게 생각해야 한다.

교회는 주님이 머리되시고 주님이 세우셨다. 그러나 성령이 임함으로써 교회는 움직이기 시작했다. 교회가 생명이 있어 예수 그리스도의 주 되심을 만민에게 선포하는 선교 사역을 성령의 능력으로써 출발하였다. 마가의 다락방에 교회를 움직이는 엔진에 시동이 걸린 사건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 교회의 큰 역사를 위해서 성령의 강한 불길을 사모해야 한다.

특별히 오늘은 성령강림절이다. 이 교회력이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과 부활을 기리는 성탄절과 부활절기에 저금가는 중요한 절기다. 안타까운 것은 성령강림절을 소중히 여기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것은 우리가 우리의 힘으로 신앙 생활을 잘 할 수 있고 목회도 할 수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성령의 역사에 대해 무관심하고 만 것이다. 

오늘 본문을 보라. 120명의 사람들이 방언을 말하게 될 때 사람들의 반응은 모두 다 어쩔 줄 모르는 모습을 하고 있다. 다 다른 반응을 보인다. 성령에 대해 관심이 없는 우리의 모습과 다를 바가 없다. 이들은 어떻게 반응하고 있는가? 

첫째, 소동하며 다 놀라 기이히 여기는 반응이다. (행2:6~7)

행2:6의 말씀을 보면 예루살렘에 우거하던 많은 무리들은 방언을 듣자마자 소동하였다. 소동이라는 것은 혼돈에 빠졌다는 뜻이다. 저들은 이렇게 말을 하였다. “다 갈릴리 사람이 아니냐?”(행2:7)
갈릴리 사람이란 가난한 사람의 대명사다. 마치 강남 압구정동하면 잘 사는 사람의 대명사이듯 갈릴리는 약자의 도시이다. 또 갈릴리 사람이란 배우지 못한 사람의 대명사다. 큰 인물이 나올 수 없는 지역이어서 무식한 사람들이 모여 사는 지역의 대명사다. 갈릴리 사람이란 소외된 사람, 하층 마을을 가리키는 말의 대명사다. 그런데 가난하고 무식하고 하층민인 사람들이 천하 각국으로부터 온 사람들이 알아듣는 외국어를 할 수 있다는 것에 기이히 여길 수 밖에 없었다.

행2:9~11에 나오는 각 국의 나라는 예루살렘을 중심으로 동북쪽 나라인 바대, 메대, 엘람, 메소보다미아이다. 서쪽으로는 가바도기아, 본도다. 남쪽으로는 브루기아와 밤빌리아이며 북쪽으로는 애굽, 구레네, 리비아이다. 북서쪽으로는 로마의 유대인과 개종자들인 그레데인과 아라비아인들이다. 이들은 모두 다 자신들이 듣는 동시 통역어로 들려졌으니 어찌할 것인가?

행2:5을 보면 예루살렘에 와 있던 무리들은 경건한 유대인이라고 불리워지고 있다. 그러나 성령의 은사가 너무 놀라워서 그 경건의 눈으로 보아도 혼돈되어 소동하는 것이다. “이렇게 각 사람의 원어로 말할 수 있는 비결이 무엇인가?”하며 이해가 안되고 혼돈이 되며 이 모든 일이 상식이 아니어서 기이하게 보고 있던 것이다. “우리 각 사람의 난 곳 방언으로 듣게 되는 것이 어찜이뇨?”라고 묻기만 하였지 다음 말이 생각나지 않았던 것이다.

둘째, 놀라며 의혹하여 서로 수군거리는 반응이다. (행2:12)

행2:12을 보면 “다 놀라며 의혹하여 서로 가로되 이 어찐 일이냐”라고 하였다. 
의혹이란 의심한다는 뜻이다. 방언의 표적을 듣고 부인할 수도 없고 무시할 수도 없어서 놀라워하고 있지만 믿을 수 없었다는 말이다. 이는 영어로 ‘당황한다’는 말이다. 성령은 사실 받은 자가 아니고서는 이해가 안되는 현상이기에 당황으로 대할 수 밖에 없었다. 그리하여 저들의 말은 “이 어찌된 일이냐?”라고 하였던 것이다. 

의혹은 고통을 가져다 준다. 믿어지지는 않는데 인정하면 나 자신이 더욱 고통스러워지기에 깍아내리는 방법으로 나가게 된다. “이 어찌된 일이냐? 무식한 사람들이 방언하는 거야? 이 어찌된 일이냐? 분명히 들려지니...”, “미친 놈들이 떠들어대는 거야! 이 어찌된 일이냐 분명히 들려지니...”, “귀신의 장난이야! 이 어찌된 일이냐? 하나님의 큰 일이 들려지니...”

의심에 빠진 사람은 은혜를 왜곡시킨다. 그래서 성령을 받지 못한 내가 드러나지 않아도 되고 의혹하는 내가 현해지기 때문이다. 이런 의혹이 우리 신앙에 암처럼 놓여져 있다면 깨뜨려 달라고 기도하자.
금주에 성령강림절을 맞이하여 십자가에 배너를 건 것은 성령님을 더욱 높여드리고 성령님을 바라보며 초점을 맞추자는 의도에서 장식하였다. 의혹을 버리고 수근거림을 버리자.

셋째, 조롱하는 반응이다. (행2:13)

행2:13 “또 어떤 이들은 조롱하여 가로되 저희가 새 술이 취하였다 하더라.”
성령이 임하여 나타난 방언의 사건은 결국 조롱의 대상이 되었다. 하나님의 하시는 일이 사람의 기준으로 판단을 받고 업신여김을 받는 일이 되었다. 땅의 안목으로 판단하는 어떤 이들은 마가의 다락방의 분위기를 술 취함으로 표현하고 말았다. 술 취함, 그 말은 성령 받은 사람들을 모두 제 정신이 아니라고 우스개거리 정도로 단언한 것이다.

술 취한 사람의 언어는 달라진다. 행동도 달라진다. 술 취한 사람은 기분도 달라진다. 소극적이던 사람이 적극적으로 바뀌고 조용하던 사람이 좌중을 휘어잡으려 한다. 술 취한 사람은 분명코 다른 현상을 드러낸다. 성령 받은 사람을 조롱하는 이들은 새 술에 취한 것으로 표현하였다. 이것이 바로 육의 사람이 취할 수 있는 하나님의 사건에 대한 평가다. 땅의 사람이 하늘의 신령한 사건을 보는 이해다. 그래서 베드로는 행2:15에서 “때가 제삼시니 너희 생각과 같이 이 사람들이 취한 것이 아니라.”고 하였다.
삼시는 대낮이다. 술 취한 것이 아니다. 다만 방언의 현상은 요엘의 예언대로 된 하나님의 영을 받은 사건이라고 증거하였다.

하나님의 하시는 일에 대해 잘 알지 못하면 누구나 이 세 가지 반응의 유형에 속한다. 혼돈이 오도록 놀라든지, 의혹하여 수군거리든지, 술 취한 것으로 조롱하든지 한다.

행2:11을 보라. 방언과 함께 하나님의 큰 일이 들려지고 있었는데도 불구하고 그들은 어리석게도 반응한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이 예언되고 있음에도 다른 모습을 보이고 있는 것이다. 왜 그럴까? 그 이유는 유대인의 경건한 자들이 경건의 모양은 있으나 육에 속한 자들이기 때문이다. 기도하는 모임에 있다고 영의 사람이 아니다. 집회에 앉아 있다고 영의 사람이 아니다. 예수 믿은 경력이 오래 되었다고 영의 사람이 아니다.

고전2:14 “육에 속한 사람은 하나님의 성령의 일을 받지 아니하나니 저희에게는 미련하게 보임이요 또 깨닫지도 못하나니 이런 일은 영적으로라야 분별함이니라.”

이제 우리는 성령의 역사에 대하여 다른 반응을 보여야 한다. 성령의 일하심을 환영하고 기뻐하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그래서 성령의 사람으로, 영의 사람으로 섬기는 진품 명품 성도가 되어야 한다. 오늘 어리석게 반응하던 이 무리들을 보라. 저들이 소동하던 혼돈이 베드로의 말씀 앞에서 무너진다.

행2:37 “우리가 어찌할꼬...” 말씀 앞에서 가슴을 친다. 조롱하는 가슴, 의혹하는 가슴, 소동하는 가슴을 친다. 성령의 역사를 대하고 수근거린 가슴을 치며 회개한다. 그러고는 폐역한 세대에서 구원을 받으라는 베드로의 결론의 말씀 앞에 집중하고 세례를 받는다. 3,000명의 사람들이 영적 무지에서 깨어나 제자로 넘어온다.(행2:41) 유대교 탈출 역사가 시작된다. 성령의 불이 베드로의 입에서 권능 있게 옮겨 붙었다. 

우리도 예외가 아니다. 우리가 지금껏 어떻게 살아왔든지, 성령을 어떻게 외면했든지, 회개하고 성령의 일하심을 기대하자. 성령의 역사를 환영하고 성령의 기이함과 은사 주심을 체험하자. 오늘 이은경 집사님의 간증처럼 기이하고 놀라운 일을 성령님은 행하신다. 방언의 은사만이 아니라 병 고치는 은사도 나타내시며 능력 행함의 은사도 나타내 주신다. 

지금 마음을 바꾸라. 신앙은 마음을 드리는 사건이다. 성령님께 순전한 마음을 드리면 우리가 성령의 사람이 되고 세상을 향해 복음을 외치는 사람이 될 수 있다. 여러분의 가정이 마가의 다락방이 되어 거기서부터 성령과 함께 선교를 시작하기를 축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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