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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마음의 간음 (마 5:27~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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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의 간음 (마 5:27~30)

(27) 또 간음치 말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28)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여자를 보고 음욕을 품는 자마다 마음에 이미 간음하였느니라 (29) 만일 네 오른눈이 너로 실족케 하거든 빼어 내버리라 네 백체 중 하나가 없어지고 온 몸이 지옥에 던지우지 않는 것이 유익하며 (30) 또한 만일 네 오른손이 너로 실족케 하거든 찍어 내버리라 네 백체 중 하나가 없어지고 온 몸이 지옥에 던지우지 않는 것이 유익하니라 

음욕을 품는 자마다

간음치 말라는 말씀은 십계명의 일곱 번째 계명입니다. 간음은 가정을 가진 사람이 자기 배우자외의 다른 이성과 비정상적인 관계를 갖는 것입니다. 그런데 주님은 이 계명을 보다 엄격하게 해석합니다. 구약에서는 간음치 말라는 말을 들었지만 신약 시대를 살고 있는 너희에게 나는 말한다. 여자를 보고 마음으로 음욕을 품는 자마다 이미 간음하였다. 산상수훈 말씀을 지키기가 쉽지 않은 데 대표적으로는 바로 이 말씀 때문일 것입니다. 차라리 분노는 참을 수 있습니다. 형제에 대해서 욕하지 않고 성내지 않고 미련한 놈이라 인격을 무시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성욕은 다릅니다.

성욕이라는 것은 식욕과 마찬가지로 우리 몸 안에서 일어나는 자연스런 현상이기 때문입니다. 제어하기가 어렵습니다. 배가 고프면 밥을 먹어야 하듯이 성욕은 정기적으로 채워줘야 만족하기 때문입니다. 더구나 현대는 간음을 권하는 사회가 되었습니다. 농경 사회 같으면 부부가 같이 일을 하였지만 이제는 따로 떨어져 있는 시간이 많습니다. 직장에서 우리는 오히려 자기 아내나 남편보다도 더 많은 시간을 다른 이성과 지내야 합니다. 인터넷을 보면 쉽게 음란물에 노출이 됩니다. TV나 영상 매체들은 성적인 매력을 이용해 광고합니다. 요즘은 ‘섹시하다’는 말이 오히려 칭찬이 되었습니다. 우리는 음란 문화의 유혹을 피하기 어려운 시대를 살고 있습니다. 이런 때에 마음속의 간음을 문제 삼으면 죄를 짓지 않을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입니다.  

어떤 분이 죽어서 하나님 앞에 섰더니 하나님이 세 권의 책을 보여주더랍니다. 자기 죄를 기록한 책이었습니다. 한 권을 펼치니 평생 동안 자신이 행동으로 범했던 죄들이 듬성듬성 기록되어 있더랍니다. 다른 한 권을 펼치니 자신이 말로 범했던 죄들이 빽빽이 기록되어 있었습니다. 세 번째 책을 여니 빽빽한 정도가 아니라 아예 새까맣게 칠해져 있더랍니다. 이것이 무엇이냐고 물으니 하나님이 “이것은 네 마음이다”고 하더랍니다.

성 프란치스꼬는 인류 역사상 가장 주님은 닮은 사람으로 평가됩니다. 아씨시에 가면 프란체스꼬 수도원이 있는데 그 성당 뒤쪽에는 가시가 달리지 않은 장미가 자라고 있다고 합니다. 사연은 이렇습니다. 프란치스꼬는 성인이었지만 시시때때로 유혹하는 정욕을 이기기가 힘들었습니다. 어느 날은 성프란치스꼬가 그 정욕과 싸우기 위해 발가벗은 몸으로 이 장미꽃 정원을 뒹굴었다고 합니다. 프란치스꼬의 온 몸은 장미 가시가 박혀 망신창이가 되었습니다. 그때 이후로 이 장미 정원에서는 가시가 없는 장미가 지금껏 자라고 있다는 전설입니다. 

3세기에 기독교 최초로 애굽의 사막에서 고행을 하며 수도원 시대를 열었던 성 안토니라는 수도사가 있습니다. 성 안토니는 모든 것을 버리고 사막에서 35년을 살았는데 이 35년 내내 자기를 유혹하는 세력과 싸웠다고 합니다. 그의 기록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있습니다. “한쪽에서는 악한 생각을 일으키고 또 다른 쪽에서는 기도로 이것에 항거한다. 하나는 욕망의 불을 일으키고 다른 하나는 이것을 부끄럽게 여겨 기도와 신앙과 금식으로 자기를 방어한다. 어느 날 밤 악마는 여자의 모습으로 나타나 여자가 가지는 모든 행동을 취하여 안토니를 유혹하려고 하였다” 성자들이 당한 유혹이 이 정도니 음란 문화에 노출된 평범한 우리들이 당하는 유혹은 더 말할 것도 없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 주님께서 이렇게 가혹할 정도로 요구하시는 이유가 어디 있습니까? 우리를 괴롭게 하기 위해서입니까? 우리는 먼저 주님께서 마음속의 간음을 언급하신 이유에 대해서 말씀을 통해서 확인해야 할 것입니다. 우리가 읽은 말씀을 포함해서 5장의 여섯 가지 반제를 지배하고 있는 것은 5장 17절과 20절의 말씀입니다. “내가 율법이나 선지자나 폐하러 온 줄로 생각지 말라 폐하러 온 것이 아니요 완전케 하려 함이로다”,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의가 서기관과 바리새인보다 더 낫지 못하면 결단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 우리는 이 말씀을 ‘바리새인과 서기관보다 더 나은 의’라는 맥락에서 먼저 살펴보아야 합니다.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의 문제는 무엇이었습니까? 우리들도 그렇지만 그들은 항상 행동으로 나타난 죄만 문제 삼았다는 점입니다. 속은 온갖 악으로 가득 차 있으면서 또 실제로는 죄를 범했으면서도 사람들에게 드러나지 않았다는 이유에서 의로운 채 합니다. 주님은 그들의 마음속을 정확히 꿰뚫어보고 계셨습니다. 주님은 마태복음 15장 19절에서 다음과 같이 분명히 말씀하셨습니다. “마음에서 나오는 것은 악한 생각과 살인과 간음과 음란과 도적질과 거짓 증거와 훼방이니 이런 것들이 사람을 더럽게 하는 것이요” 이것은 바리새인의 마음을 예수님이 정확히 지적하신 것입니다.

그들은 마음속으로 온갖 추악한 생각을 다하면서도 겉으로 간음만 하지 않으면 된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바리새인들은 율법에 철저했기 때문에 실제로 간음을 행하지 않았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그런 대신 마음속으로는 온갖 악한 생각을 했습니다. 마음속에 있는 생각이란 것은 그냥 생각으로 그치지 않습니다. 반드시 행동으로 나타나게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그들이 남용한 것이 5장 31절의 ‘이혼증서’입니다. 이혼증서는 원래 여자를 보호하기 위해서 만들어진 제도였습니다. 남편이 자기 아내가 마음에 들지 않으면 여러 핑계를 대어 아내를 내쫓습니다. 그러면 여자는 다시 재혼도 할 수 없는 불쌍한 처지가 됩니다. 그래서 모세는 이혼증서를 써서 합법적으로 이혼할 수 있도록 해주었습니다. 이혼 증서에는 “이제 내가 그대에게 이혼 증서와 절연장 및 행위의 자유에 대한 각서를 주노니 그대가 원하는 자와 결혼해도 좋다”라고 씁니다(바클레이). 그런데 남자들이 이것을 악용하기 시작했습니다. 율법 때문에 간음은 할 수 없으니 이혼 증서를 써주어 아내를 쫓아낸 후 자기 마음에 드는 여자와 결혼하는 것입니다. 완악한 남자들이 그렇습니다. 법의 맹점을 이용해서 잘못을 합리화하는 것입니다.

이슬람 권의 남자들은 더 악한 길로 갔습니다. 그들은 여자들의 사회생활을 아예 막는 반인권적인 방향으로 나갔습니다. 아랍계 여자들은 차도르나 부르카라 하여 온 몸을 다 감싸고 다닙니다. 이유는 한 가지 입니다. 여자의 노출된 신체는 남자들에게 음란한 마음을 일으키기 때문에 천으로 감아서 노출이 되지 않도록 하고 집에만 가두어 놓은 것입니다. 눈으로 보지 않으면 간음은 줄어 들 것입니다. 그러나 이 때문에 여성들의 삶은 철저히 망가지고 맙니다. 완악한 인간들은 자기 마음속에 있는 음란함을 제거할 생각은 하지 않고 여자의 인권을 말살하는 길로 갔습니다. 그리고는 그들은 일부다처제를 만들어내어 자신들의 성욕을 합법적으로 채웠습니다. 마음속의 간음을 주님께서 문제 삼은 것은 이와 같은 남성들의 왜곡되고 이중적인 태도에 대한 비판이라 할 것입니다.

그렇지만 실제 주님께서 마음속의 간음을 문제 삼은 것은 타당하다 할 것입니다. 주님은 한 남자와 한 여자가 전적으로 헌신하기를 원하십니다. 몸뿐만 아니라 마음까지 함께 할 때 온전한 부부라 할 것입니다. 몸은 같이 있는데 마음은 딴 곳을 향하고 있다면 그것은 정상적인 사랑의 관계가 아니라 할 것입니다. 

우리 주님을 향한 사랑도 그렇습니다. 주님은 우리가 마음을 다하여 그분만을 섬기기를 원하십니다. 몸만 형식적으로 기독교라는 종교를 갖고 정기적으로 예배에만 참석하는 것을 원치 않습니다. 그 마음이 전적으로 우리 주님을 향하기를 원하십니다. 그 마음속은 세상의 것으로 가득 차 있고, 물질로 가득 차 있고, 세상의 즐거움과 영광으로만 가득 차 있다면 그것 또한 주님을 향해서 마음속으로 간음한 것과 같다 할 것입니다.

또한 한 인간이 단순한 성적 대상으로만 간주되는 것은 문제가 있습니다. 짐승들은 발정기 외에는 암수가 서로 사이좋게 지냅니다. 그런데 인간은 시도 때도 없이 성충동을 가지고 살아가는 존재가 되었습니다. 성의 일차적인 목적은 자녀를 생산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인간은 본래의 목적을 잃어버리고 쾌락의 것으로 바꾸었고, 여기를 넘어서 과도한 성도착증까지 발전합니다. 한국 사회에 만연한 성범죄는 정신적인 질병이라 할 것입니다. 우리는 순전한 마음으로 아름다움과 사랑과 우정의 눈으로 사람을 볼 수 없을까요? 

어느 두 스님이 길을 가고 있었습니다. 시냇물을 만났는데 어떤 한 여인이 물을 건너지 못해서 발을 동동 구르고 있었습니다. 그러자 스승된 스님이 그 여인을 업고 시냇물을 건넜습니다. 이를 지켜본 제자는 매우 의아해 했습니다. ‘어떻게 스님이 여인을 업을 수가 있단 말인가!’ 그래서 시냇물을 건너서 길을 한참 가다가 그 스승에게 물었습니다. “스승님 어떻게 속세를 떠난 중이 여인을 업을 수가 있습니까?” 그러자 그 스승이 이렇게 대답했다고 합니다. “난 아까 그 연인을 등에서 내려놓았거늘, 넌 어찌 아직까지 등에 업고 있는 게냐?” 우리가 이렇게 되어 버렸습니다. 성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하고 그것에 매여 사는 존재가 되었습니다. 순수한 사랑과 우정과 아름다움을 잃어버리고 성욕에 매인 부자유한 인생이 되었습니다.

빼어 내 버리라

주님은 이 마음속의 음욕과 싸우기 위해서는 결연한 각오가 필요하다고 말씀하십니다. 성 프란치스꼬가 맨 몸으로 장미 가시 위를 뒹굴었듯이 그런 결연한 각오가 있어야 합니다. 주님께서 그 예로 든 것이 바로 29절과 30절 말씀입니다. “만일 네 오른눈이 너로 실족케 하거든 빼어 내버리라 네 백체 중 하나가 없어지고 온 몸이 지옥에 던지우지 않는 것이 유익하며” 정욕의 유혹은 눈으로부터 들어옵니다. 보지 않는 것이 유혹을 피하는 길입니다. 그래서 참지 못하면 차라리 눈을 빼어 버리라는 무서운 경고의 말씀입니다. “또한 만일 네 오른손이 너로 실족케 하거든 찍어 내버리라 네 백체 중 하나가 없어지고 온 몸이 지옥에 던지우지 않는 것이 유익하니라” 손이 범죄 하게 만들죠. 그러면 그 손을 잘라내라는 말씀입니다. 차라리 불구자가 될지언정 그렇게 해서라도 하나님의 심판을 피하는 것이 낫다는 말씀입니다.

이 말씀은 과장법입니다. 실제 그렇게 하라는 것은 아닙니다. 이런 각오를 가지고 죄의 유혹을 이기라는 주님의 뜻입니다. 여러분이 만약 한쪽 눈을 빼고 한쪽 팔을 자른다고 해서 음욕이 일어나지 않을 것 같습니까? 아닙니다. 마음의 악이란 것은 너무나 집요해서 그렇게 해서도 다 뽑히지 않습니다. 노름에 빠진 어떤 사람의 이야기를 들어보지 못했습니까? 노름에 빠져 패가망신하고 이혼의 위기까지 몰렸던 사람이 다시는 도박을 하지 않겠다는 뜻에서 자기 한쪽 손을 잘랐습니다. 그 이후 한동안 노름을 하지 않더니 어느새 그 유혹을 참지 못하고 도박판으로 가서 남은 한 손으로 노름을 하더랍니다. 이 사람이 이번에는 정말 노름을 끊겠다는 뜻에서 나머지 손마저 잘랐습니다. 그러면 노름을 그쳤을까요? 아닙니다. 나중에 보니 도박판에 가서 발과 나머지 팔로 도박을 하고 있더랍니다. 초대교회에 오리겐이라는 신학자가 있습니다. 이 분은 주님은 따르는데 성욕이 방해가 된다하여 스스로 거세를 한 사람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성욕이 사라질까요?

그렇다면 주님의 기준으로 따진다면 우리는 다 심판 받을 수밖에 없는가? 우리는 다 지옥불에 빠질 수밖에 없는가? 아닙니다. 하나님 나라는 창기도 들어갈 수 있습니다. 마태복음 21장 31, 32절에서 주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예수께서 저희에게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세리들과 창기들이 너희보다 먼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리라 요한이 의의 도로 너희에게 왔거늘 너희는 저를 믿지 아니하였으되 세리와 창기는 믿었으며 너희는 이것을 보고도 종시 뉘우쳐 믿지 아니하였도다” 믿음으로 나갔을 때 창기도 구원을 받았듯이 믿음을 가지고 있으면서 창기보다는 덜 음란한 여러분도 천국에 들어갈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다른 사람들과 다른 점이 무엇인가? 우리 또한 마음의 간음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합니다. 그러나 차이가 있습니다. 그것을 즐기는 사람과 그것 때문에 괴로워하고 탄식하는 사람의 차이입니다. 그것을 문제로 인식하지 못하는 사람과 그것을 문제로 인식하는 사람의 차이입니다. 여러분이 후자의 사람이라면 여러분은 하나님의 사람입니다. 음란한 세상 문화 속에 살면서 음란의 씨를 받은 우리는 결코 완전히 깨끗할 수는 없습니다. 단지 그 불순함 때문에 애통하는 사람들, 주님은 우리가 그런 사람이 되기를 원하십니다. 

요한복음 9장에 보면 간음한 여자가 현장에서 잡혀와 예수님 앞에 끌려나왔습니다. 저는 그 말씀을 읽으면서 항상 의문인 게 같이 간음했던 남자는 어디로 갔냐는 것입니다. 여자만끌어다 놓고 사람들은 예수님의 판결을 요구합니다. 자신들은 평생에 그런 잘못 한 번 저질러보지 않은 사람마냥 그렇습니다. 그때 주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너희 중에 죄 없는 자가 먼저 돌로 치라”(요8:7) 그러자 어른으로부터 젊은이까지 하나씩 다 사라지고 예수와 그 여자만 남게 되었습니다. 주님은 그 여자를 향하여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아니하노니 가서 다시는 죄를 범치 말라”(요8:11) 우리를 향한 주님의 태도도 그렇습니다. 주님은 우리가 마음까지도 순결한 사람들이 되기를 바라십니다. 그러나 그것에 실패했다고 해서 우리를 심판하시지는 않습니다. 우리 연약함을 잘 알기 때문입니다. 신앙인들은 어쩌면 사도 바울과 같은 탄식을 하는 사람들입니다. “내 속 사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하되 내 지체 속에서 한 다른 법이 내 마음의 법과 싸워 내 지체 속에 있는 죄의 법 아래로 나를 사로잡아 오는 것을 보는도다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롬7:22-24) 죄의 법 중에 가장 강력한 적이 누구이겠습니까? 아마 성욕일 것입니다. 이 문제 때문에 대 사도 바울도 끊임없이 괴로워했습니다. 

주님께서 오른 눈과 오른 손 없이 천국에 들어가는 것이 낫다는 것은 그만큼 결연한 태도로 죄악과 싸우라는 뜻입니다. 우리 악이란 것은 마음에서 먼저 자랍니다. 마음에 일단 음란함이 자리 잡은 후에는 그때부터는 죄가 우리를 이끌고 갑니다. 그러니 이 죄가 우리 안에 자리 잡지 못하도록 사전에 막는 것이 필요합니다. 루터가 말했듯이 새가 우리 머리 위를 맴도는 것은 어쩔 수 없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우리 머리 위에 둥지를 틀도록 해서는 안 됩니다. 

음욕과의 싸움

그러면 이 음란함과 어떻게 싸울 것인가? 첫째는 가까이 하지 않는 것이 좋습니다. 우리는 연약합니다. 이 거대한 유혹과 맞서 싸울 수 없습니다. 기회를 주어서는 안 됩니다. 요셉의 태도가 좋습니다. 시위대장 보디발의 아내가 유혹하자 요셉은 이 죄가 하나님께 짓는 죄임을 분명히 합니다. “내가 어찌 이 큰 악을 행하여 하나님께 득죄하리이까”(창39:9) 그리고는 그 여자와 가까이 하지 않습니다. 성경은 “함께 있지도 아니 하였다”(창39:10)고  전합니다. 그 여자가 옷을 잡자 옷을 벗어버리고 달아났다고 합니다. 정욕의 문제는 아예 가까이 하지 않는 것이 상책입니다. 이상한 모임이나 술집, 좋지 않은 인터넷 사이트는 아예 가까이 하지 않는 것이 좋습니다. 사회적으로도 이런 음란문화들을 추방하도록 해야 합니다. 보지 않으면 확실히 성적 욕구는 줄어들게 되어 있습니다. 

둘째는 자기 몸을 게으르게 하지 않고 선한 일에 힘쓰는 것입니다. 유혹은 한가 할 때 그리고 혼자 있을 때 생깁니다. 그래서 공동체가 좋습니다. 하나님과 묵상하는 시간 외에는 함께 있는 것이 좋습니다. 그리고 건전한 여가 선용이나 건강한 일을 하는 것이 좋습니다. 다윗이 실패했던 때를 교훈으로 삼아야 합니다. 그가 우리야의 아내 밧세바와 불륜의 관계를 맺게 된 때가 언제였습니까? 한가할 때였습니다. 사무엘 하 11장 2절에서는 이렇게 전하고 있습니다. “저녁때에 다윗이 그 침상에서 일어나 왕궁 지붕 위에서 거닐다가 그 곳에서 보니 한 여인이 목욕을 하는데 심히 아름다와 보이는지라” 자기 군대는 암몬 자손과 싸우기 위해 전쟁터에 나갔는데 다윗은 저녁 늦게까지 낮잠을 잤습니다. 잠에서 일어나서 한가하게 지붕을 거닐다 밧세바의 목욕하는 모습을 보게 되었고 그 때문에 유혹에 넘어갔습니다. 우리 몸이 하나님의 일로 바쁘면 그만큼 성결한 생활을 할 수 있습니다.

셋째는 우리 마음의 욕구가 제대로 분출될 수 있도록 도랑을 만드는 것이 필요합니다. 사실 성이란 것은 프로이드가 인간 정신 발달을 좌우하면 모든 정신병의 근원으로 삼을 정도로 강력한 것입니다. 이것을 그냥 누르려고 하니 얼마나 힘이 듭니까? 제대로 된 방향으로 나가도록 유도해야 합니다. 그것이 바로 결혼이고 부부입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짝 지워 준 관계에 충실하여야 합니다. 잠언서 5장 15절 이하에서는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너는 네 우물에서 물을 마시며 네 샘에서 흐르는 물을 마시라 어찌하여 네 샘물을 집 밖으로 넘치게 하겠으며 네 도랑물을 거리로 흘러가게 하겠느냐 그 물로 네게만 있게 하고 타인으로 더불어 그것을 나누지 말라. 네 샘으로 복되게 하라 네가 젊어서 취한 아내를 즐거워하라” 

여기에서 물로 상징되고 있는 것은 성적인 것을 비유합니다. 우리는 자기 우물의 물로 만족하는 법을 배워야 합니다. 자기가 가지고 있는 우물은 시원하고 먹을 만큼 충분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자꾸 딴 우물을 기웃거립니다. 딴 우물을 먹으려하는 것 이것은 자기 우물에 대한 배신이요 불의입니다. 이 우물을 복되게 하고 즐겁게 하지 못하게 하는 것 또한 불의입니다. 서양 속담에 “담장 이쪽에 있는 잔디가 더 푸르지 않다. 담장 저쪽에 있는 잔디 또한 더 푸르지 않다. 당신이 물주는 곳은 잔디가 더 푸른 법이다.” 는 말이 있습니다. 우리는 자기 우물을 개발하고 거기에 만족하는 법을 배워야 합니다. 그래서 부부는 한 이불에서 자야하고 서로의 만족을 위해서 노력해야 합니다. 부부관계를 파괴하는 것은 그 사이에 심지어 자식이나 부모일지라도 끼어들어서는 안 됩니다. 직장이나 일이 부부관계를 파괴해서는 안 됩니다. 심지어 신앙이라 할지라도 그것이 부부관계를 파괴하도록 해서는 안 됩니다. 

성적인 유혹이 올 때는 그 이후의 결과에 대해서 생각해 보는 것이 필요합니다. 요즘 나오는 드라마들이 불륜에 대한 문제들을 많이 다루고 있습니다. 그래서 한국사회가 타락했다고들 말을 합니다. 그렇지만 그래도 저는 아직까지는 건강하다고 생각하는 것은 불륜을 행한 자들의 뒤끝이 좋지 않게 묘사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모든 관계가 파괴됩니다. 부부관계 자녀 관계, 동료관계, 그리고 본인은 양심의 가책과 허무함을 경험합니다. 

어떤 분은 자기의 도덕적 실수가 만들 결과들을 미리 예상해보는 것이 도움이 되었다고 합니다. 그 목록은 이렇습니다.  “특히 내가 성적인 유혹에 약해져 있다고 느낄 때마다, 나의 행동이 가져다 줄 수 있는 결과를 생각해보는 것이 도움이 되었다. 우선 나를 회복하시기를 원하시는 하나님은 마음 아파할 것이다. 진흙 속에서 하나님의 신성한 이름을 더럽히게 될 것이다. 어느 날 예수님을 심판대에서 만날 것이고, 죄에 대한 책임을 물을 것이다. 부도덕한 행위로 인해 그들의 사역을 손상시킨 사람들의 전철을 밟을 것이다. 내 아내의 존경과 신뢰를 잃을 것이다. 내 자녀들이 상처받을 것이다. 자녀들은 더 이상 나를 믿지 않을 것이다. 내 가족들은 부끄러워할 것이다. 나는 자존감을 잃게 될 것이다. 이를 회복하기 위해서는 수 년의 시간을 낭비해야 할 것이다. 그리스도인으로서 우리가 가져야 할 모범과 선행이 손상될 것이다. 그 외에도 너무나 많은 것들이 내게 닥칠 것이다.”

넷째, 우리는 말씀과 기도로 주님의 도우심을 구해야 합니다. 부부들은 서로를 통해서 정욕의 문제를 해결하지만 젊은이들은 어떻게 해야 할까요? 그런 점에서 한국 사회가 결혼이 자꾸 늦어지는 것은 문제입니다. 가장 에너지가 넘칠 때 그것을 통제당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공부다 취직이다 돈을 벌어야 한다는 이유에서 자꾸 지연되고 있습니다. 그래서 비정상적으로 대리만족 시켜주는 음란문화가 발달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런 유혹의 시대에서 승리하기 위해서는 말씀과 기도로 무장해야 합니다. 말씀이 힘이 됩니다. 말씀은 살았고 운동력이 있습니다. 우리 마음은 연약할지라도 강력한 말씀의 힘이 우리를 유혹으로부터 지켜줍니다. 말씀이란 것은 계속 묵상하다보면 그것이 내 안에 인격화되고 그러다 보면 우리는 유혹을 이겨낼 수 있습니다. 젊은이들은 시편 119편 9절 말씀을 묵상하는 것이 좋습니다. “청년이 무엇으로 그 행실을 깨끗케 하리이까 주의 말씀을 따라 삼갈 것이니이다”(시119:9) 37절 말씀도 좋습니다. “내 눈을 돌이켜 허탄한 것을 보지 말게 하시고 주의 도에 나를 소성케 하소서”(시119:37) 주님은 “무릇 지킬 만한 것보다 더욱 네 마음을 지키라 생명의 근원이 이에서 난다”(잠4:23)고 말씀하십니다.

성은 정상적으로 흘러가도록 해야 합니다. 세상에는 하나님을 향한 사랑과 인간간의 사랑과 우정, 순수한 아름다움 등 더 좋은 것이 많습니다. 우리가 이 좋은 것에 더욱 힘쓸수록 성으로부터 자유하게 되고 성은 제 역할에만 충실하게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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