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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포도원에 먼저 온 사람들 (마 19:30~ 마 2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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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도원에 먼저 온 사람들 (마 19:30~ 마 20:16)

I. 본문 이해

오늘 본문 포도원 농부 이야기는 마태복음에만 기록된 독특한 비유입니다. 
오늘 본문을 연극무대 위에 올려보십시다. 

옛날 유대나 로마 사회에서는 직업을 구하는 품꾼과 일꾼을 구하는 고용주가 만나는 시장이 있었습니다. 이 이야기의 무대는 여기 포도원 농장의 인력시장입니다. 이스라엘은 기후로 인해 과일이 자라기에 아주 좋은 곳입니다. 그래서 포도, 무화과, 석류, 감람나무 등이 많았습니다. 그 중에서도 포도나무는 참으로 풍성했습니다. 「시누헤의 이야기」라는 문헌에 보면 “이스라엘에는 포도나무가 무성하여 포도주가 물보다 많더라”고 했습니다. 

무대의 막이 오르면 인력 시장에 자신들을 써줄 농장 주인을 기다리는 허름한 차림의 사람들이 웅성 웅성 모여 있습니다. 어쩌다 고용주가 한사람 나타나면 많은 사람들이 그 앞에 건장한 자신의 체구를 드러내 보이기도 하고 아예 매달려서 나를 써 달라고 애원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마침 품위 있게 생긴 한 농장 주인이 나타납니다. 때는 이른 아침 6시 일꾼 몇을 골라 농장으로 갑니다. 품삯을 정하는데 한 데나리온 - 불경기에 그만하면 넉넉한 삯이었습니다.

제 2 막 : 
무대가 바뀌고 포도원 농장에서 땀을 흘려 일하는 사람들이 눈에 보입니다. 그러는 가운데 어디서 왔는지 또 다른 일꾼들이 아침 9시, 오전 12시, 오후 3시, 심지어 해가 다 저물 오후 5시에 어그정어그정 나타나 일하는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오후 6시 하루 일과가 끝나고 품삯을 받는 시간입니다. 얼마나 기다렸던 시간입니까? 허기진 배를 움켜쥐고 기다리는 자식들이 눈에 들어옵니다. 저녁식탁을 준비하고 기다리는 아내의 얼굴이 떠오릅니다.

제 3 막 - 드디어 품삯이 주어집니다.
제일 먼저 오후 5시에 온 사람에게 한 데나리온 즉 하루 품삯을 다 줍니다. 일찍 온 사람들의 얼굴에 잔뜩 기대감이 흐릅니다. ‘이것 봐라 우리에겐 한 데나리온 준다고 했는데 훨씬 많은 삯을 주겠구나’ 그런데 오전 일찍 온 사람들이나 오후 늦게 온 사람들이나 똑같이 한 데나리온 삯을 줍니다. 이곳 저곳에서 불평이 터져 나왔습니다. 아예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며 이건 불공평한 처사라고 항의하는 사람까지 있었습니다. 소위 임금 투쟁이 시작된 것입니다. 

이때 농장 주인이 나타나 알듯 모를 듯한 말 한마디를 남기고 무대 막이 내려집니다. 
“나중된 자로서 먼저 되고 먼저된 자로서 나중 되리라”
그래서 이 극의 제목은 ‘먼저 된 자가 나중 된다’ 입니다.

본문을 읽을 때 이런 의구심을 한번 가져봅니다.
주인이 좀 지혜롭게 가장 일찍 온 사람들에게 한 데나리온 주어 돌려보내고 그리고 낮에 온 사람들에게 또 한 데나리온 줘서 돌려보낸 뒤, 오후 가장 늦게 온 사람들에게 한 데나리온 주었다고 하면 모두가 감사할 수 있을 터인데 왜 긁어 부스럼을 내는지 모르겠습니다. 맨 나중에 온 사람들을 가장 먼저 불러서 한 데나리온 줍니다. 그들보다 일찍 온 사람들에게 잔뜩 기대감을 부풀려 놓고 그 다음사람들에게도 여전히 한 데나리온 씩을 주니 불평이 터져나올 수 밖에요. 

왜 이렇게 일을 처리했을까요? 마태복음 안에서 본문이 가지고 있는 복음적 위치가 있습니다. 지금 예수님의 관심은 유대의 폭을 뛰어넘어 모든 민족 - 이방인에게로 넓혀지고 있는 상황입니다. 여기서 예수님은 가르쳐 주고 싶은 복음적 교훈이 있었던 게지요. 오늘 본문의 초점은 먼저 온 사람들입니다. 제자들이 예수님을 따른다고 하면서도 유대종교의 선민의식, 공로주의를 벗어나지 못하는 신앙의 위험성을 경고하고자 했던 것입니다. 

오늘 본문 시작하는 마태 19:30 “그러나 먼저 된 자로서 나중 되고 나중 된 자로서 먼저 될 자가 많으니라” - 나중될 자가 많다고 말합니다. 이 말씀은 지난시간 「부자와 낙타」 이야기 비유의 마지막에 나오는 말입니다. 그리고 포도원 일꾼 비유가 나오고 그 비유 끝에 다시 “이와 같이 나중 된 자로서 먼저 되고 먼저 된 자로서 나중 되리라”(20:16) 는 말이 나옵니다.- 포도원 비유가 샌드위치처럼 끼어 있습니다. 나중 되리라. 나중 될 무서운 가능성을 경고하고 있습니다. 


II. 오후 5시에 선택된 우리

당시 이렇게 일을 시키는 포도원 주인은 없었습니다. 그래서 비유를 듣는 이들은 충격을 받았을 것입니다. 이 얘기를 듣는 제자들은 “이게 무슨 뜻이지?” 궁금증을 가질만도 했습니다. 그래서 이 불평에 동정하며 본문을 억지로 해석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먼저 온 사람들은 새참타령이나 하고 빈둥빈둥 놀면서 일을 했고, 나중 온 사람들은 죽을똥 살똥 일을 했기 때문에 일의 분량이 비슷했을 것이라고. 그러나 부질없는 해석입니다. 또 “오늘 데나리온은 구원을 말한다. 누구에게나 구원은 동일하게 한 데나이론이다”라고 주장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오늘 본문을 통해 주시고 싶은 예수님의 분명한 교훈이 있습니다. 우리가 오늘 본문을 이해하려고 하면 본문의 밑바닥에 흐르는 역사적인 배경을 알아야 합니다.

유대인들은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부름을 받는 그 시간부터 자기들만이 하나님의 선민이요 자기들만이 하나님 나라에 소중한 자리에 앉을 줄로 알았습니다. 그런데 예수란 분이 갑자기 나타나 가난한 자가 천국에 더 가깝다. 죄인들도 회개하면 천국에 들어갈 수 있다. 유대인들만 구원받는 것 아니다. 오히려 이방인들에게 더욱더 풍성한 구원이 흘러 넘치게 될 것이다. 먼저온 너희들이 나중되고 나중 온 이방인들이 먼저될 수 있다고 하니 그들에게 납득이 될 수 있겠습니까? 바로 이것이 오늘 본문 밑바닥에 흐르고 있는 배경입니다.

그러면 여기 포도원이 무엇입니까? 
하나님 나라 혹은 주님의 몸된 교회를 의미하고 있습니다. 포도원에 들어가 일하라 - 하나님 나라, 교회에 들어가 일하라는 말씀입니다. 천국을 준비하라는 것입니다. 종말을 준비하라는 것입니다. 영혼의 미래를 준비하라는 것입니다. 

한사람은 바구니를 들고 다른 한사람은 포도를 따서 담습니다. 한사람은 나뭇가지를 붙들고 한사람은 막대를 밑에 고여줍니다. 서로 협력하며 서로 세워주며 서로 돌봐주며 일하는 공동체 - 거기가 포도원 공동체입니다.

기독교 지난 2000년 역사만 돌이켜 보더라도 우리민족은 막다른 시점에서 부름받은 민족입니다. 오후 5시 해질 녘에 불려온 사람들입니다. 아무래도 역사의 해가 지고 있는 종말에 부름받은 사람들입니다. 포도원 주인되신 주님께서 우리민족에 찾아오신지는 겨우 120년 되었습니다. “어찌하여 종일 길거리에서 빈둥거리며 놀고만 있느냐? 한 시간이라도 좋으니 농장에 들어가 일을 하라” 말씀하셨습니다. 지난 5000년의 하나님을 모르고 살았던 잘못된 삶을 묻지 않겠다 말씀하십니다. 지난날 허송세월했던 흘러간 세월을 주님 묻지 않겠다 지금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제가 저 자신을 가만히 생각해 보니 해질녘 역사의 종착점에서 부름받아 구원받았구나. 세상에 기적이 많지만 내가 구원받았다는 기적보다도 더 큰 기적은 없구나.」 나 같은 죄인도 불러서 한 데나리온 주시겠다 말씀하십니다. 버림받아 마땅한 나도 하나님께서 자녀 삼으시고 영생을 주시고 구원을 주시고 천국을 주시겠다고 말씀하십니다. 울며 울며 감사할 수 밖에 없는 일 아닙니까?

우리는 죽을똥 살똥 일을 해도 일할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습니다. 해가 서산에 지고 있습니다. 교회가 무엇입니까? 천국 데나리온을 준비하는 곳입니다. 

포도원에서 일꾼들이 어떤 일을 했을까요?

첫째 가지를 쳐 주는 일입니다. 
소위 전지전정을 하는 것입니다. 열매 맺을 수 없는 나뭇가지들을 짤라 주어야 만이 열매를 맺을 수 있는 나뭇가지의 풍성한 열매를 맺을 수 있는 것입니다. 포도원에 들어오기 전까지 세상에서 보냈던 헛된 가치관들, 세상에 살아가던 시간과 물질과 하나님께서 내게 주신 삶의 자원들을 허비하고 살았던 모든 잘못된 가지들을 삶의 행태들을 잘라주는 것입니다. 그리고 주님께서 내게 주신 비전과 삶의 목적과 사명과 소명에 집중하여 살아가는 것입니다. 이것이 전지전정, 가지치기하는 것입니다. 

둘째 받침대 세우기입니다. 
열매 맺고 나면 가지가 힘을 잃어버려 쳐지는 가지가 있습니다. 열매 맺은 가지들이 햇빛을 받지 못하면 당도 높은 과일을 맺을 수 없습니다. 그래서 가지를 받쳐주는 것입니다. 주님을 만날 수 있도록 성령의 임재를 날마다 경험할 수 있도록, 하나님의 영광의 햇빛을 받을 수 있도록, 그래야 우리 삶이 주님을 닮아가는 영광스런 열매로, 맛난 열매로 맺혀져 갈 수 있는 것입니다. 

셋째 망대 만들기입니다.
도적이 와서 잘 익은 열매를 따갈 수 없도록, 못된 짐승들이 와서 포도원 농장을 해칠 수 없도록 포도원 망대를 세우는 일입니다. 마귀들이 우는 사자처럼 덤비며 택한 백성들을 삼키려 덤벼들고 있습니다. 못된 이단들이 교회를 어지럽히고 있습니다. 영적인 전쟁터에서 승리할 수 있도록 망대를 세워 이 교회, 주님의 몸된 공동체를 지켜 가는 것입니다. 

넷째 수확하기, 열매 따는 일입니다.
영혼을 구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내게 주신 비전의 열매를 따는 것입니다. 감사의 열매를 만들어 가는 것입니다. 은혜의 열매를 잘 영글고 그것을 따서 하나님 앞에 바칠 준비를 하는 것입니다. 

인간이 참 간사하고 사악합니다. 오늘 본문에 보면 먼저 온 사람들이 모두 불평을 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아침 6시에 와서 왠종일 일하고 오후 5시 느지막에 와서 똑같은 대우를 받는다고 생각할 때에 불평하는 것은 또 이해가 됩니다. 그런데 오후 3시 느지막에 온 사람까지 내가 오후 5시에 온 사람하고 같은 대접을 받아야 하느냐고 불평을 늘어놓습니다. 넋두리를 합니다. 막차 탄 나보다도 더 연약한 성도들, 나보다 못나 보이는 사람들, 그들 때문에 내 신앙이 불평으로 이어져야 하는 것입니까? 그들 때문에 내 행복이 깨어져야 하는 것입니까? 이게 사악한 인간의 태도라고 하는 것입니다. 모든 인간의 내면엔 선배의식이 있습니다. 


III. 채권자 의식

그러면 본문에서 포도원에 먼저온 사람들의 일하는 태도, 신앙생활의 자세에 있어서 잘못된 점이 무엇입니까? 그들이 무엇을 오해한 것이었습니까? 어떤 사람이 나중될 가능성이 있습니까? 이걸 알아야 나중 왔다가도 먼저될 수 있고 먼저온 축복을 잃지 않을 수가 있습니다.

첫째, 강해 설교가로 잘 알려진 제임스 보이스라는 사람은 “포도원에 먼저온 사람의 결정적인 잘못은 자신이 하나님 앞에서 마땅히 무엇인가 받을 자격이 있다고 생각하는 채권자 의식에 있다”고 단언했습니다.

여러분 기억하십시오. 하나님은 우리의 채무자가 아닙니다. 우리에게 무언가 빚을 졌기 때문에 우리에게 뭔가 갚아 주어야 할 분이 아니라고 하는 것입니다. 오히려 반대로 우리가 하나님 앞에 빚진자들 입니다.

본문 10절에 보면 “먼저온 자들이 와서 더 받을 줄 알았더니”라고 기록하고있습니다. 나는 더 받을 자격이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공로 의식, 채권자 의식 이것보다도 더 비신앙적인 비기독교적인 사고방식은 없습니다. 

이 공로 의식이 많으면 많을수록 내 공로가 무시되고 있다는 생각이 나를 괴롭히기 시작합니다. 교회생활 중 낙심의 가장 큰 원인이 바로 이 채권자 의식입니다. 자기가 어떤 일을 했다고 하는 자기 업적을 마음 속에 기록해 놓고서 “이런 업적을 세운 나를 무시하다니” - 자신의 공로만큼 인정받지 못한다고 생각할 때에 괴롭고 자신이 비참해 지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승리하는 삶을 살아가기 위해서 내가 무엇을 했다고 하는 공로 의식은 잊어버려야 합니다. 봉사의 기록을 남기지 말아야 합니다. 하나님이 다 알고 계십니다. 하나님의 기록만이 가장 정확하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 내가 나를 아무리 높이 높이 올려놓아도 하나님이 나를 인정하지 아니하면 그것은 아무 소용이 없는 것입니다. 성경에 보면 마지막 때에 주여~ 주여~ 하고 신앙생활하던 사람들 가운데 버림받는 얘기가 나옵니다. 주님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했습니다. 귀신을 좇아 냈습니다 하는 사람들 가운데 버림받는 장면이 마지막 때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토레이 박사가 호주 멜보른에서 집회를 인도하고 있을 때에 종이 쪽지가 한 장 올라 왔습니다. “박사님, 저는 이것은 참 옳다고 생각하는 아름다운 기도제목이 하나 있어서 오랫동안 기도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내 기도에 응답을 해 주지 않는 겁니다. 저는 3대째 장로교 신앙생활을 하고 있습니다. 나는 25년동안 주일학교 교사로 봉직했습니다. 20년동안 교회 장로로 충성을 다했습니다. 이런 내가 기도하는데 하나님은 왜 내 기도를 들어주시지 않는 것입니까? 이에 대한 당신의 대답이 도대체 무엇입니까?” 토레이 박사가 한마디로 대답했습니다. “당신이 그렇게 살았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당신에게 뭔가를 해 주어야 된다고 당신은 생각하고 있습니다. 당신은 지금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는 것이 아니고 당신 자신의 이름으로 기도하고 있습니다. 당신의 공로를 내 세워 기도하고 있습니다. 당신의 채권자 의식, 공로 의식을 버리기 전까지는 당신의 기도가 절대로 응답되지 아니할 것입니다” 라고 대답했습니다.

그렇습니다. 내가 할 수 있는 유일한 말은 나는 “무익한 종이로소이다” 이 말 밖에 없습니다. 주님 앞에 찾아나올 때마다 내가 할 수 있는 유일한 말 한마디 “주여 나를 불쌍히 여겨 주소서” 이 말 외에는 할 말이 없는 존재가 우리 모두 아닙니까?


IV. 흥정 의식(천국에서 임금투쟁하지 마라)

포도원에 먼저 온 사람의 이 채권자 의식은 금방 하나님과 뭔가를 흥정하려고 하는 흥정 의식으로 발전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둘째, 우리가 포도원 생활에서 버려야 할 태도, 자세 - 먼저 온 자들의 잘못은 바로 “흥정 의식”입니다. 임금투쟁 태도입니다. 

오늘 본문의 또 다른 배경이 오늘 본문 앞부분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부자와 낙타」 사건에서 부자청년이 근심하며 떠난 다음 베드로가 주님 앞에 찾아왔습니다. “우리는 주님을 섬기기 위해서 모든 것을 버렸습니다. 세상을 버렸습니다. 가족과 친지들을 버렸습니다. 주님 그런데 우리들에게 뭘 보상해 주시겠습니까?” 지금 베드로의 공로의식이 발전하여 주님과 흥정을 시도하고 있습니다. 

주님께서 대답하셨습니다. “보상이 있다. 그러나 먼저된 자로서 나중될 자가 많으니라”고 주님께서 대답해 주셨습니다. 보상을 안 주겠다는 것 아닙니다. 반드시 보상해 주십니다. 그러나 만일 우리가 단순히 어떤 보상만이 동기가 되어서 주님을 섬겼다면 이건 분명히 일하는 동기가 변질된 것입니다. 하나님은 시간의 선후를 묻지 아니하십니다. 일하는 동기가 맑고 깨끗하냐를 묻는 것입니다. 예배하는 이 시간에 진정한 감사가 있느냐 하는 것을 묻는 것입니다. 포도원에서 일할 때에 너희들 가슴속에 기쁨이 있느냐를 묻는 것입니다. 일의 분량이 문제되는 것이 아니라 일의 질을 우리에게 묻고 있는 것입니다. 포도원에서 일할 때 마다 감사와 기쁨을 잃고 나면 율법과 의무만 남게 됩니다. 예수님은 감사함으로, 기쁨으로, 자원하여 일하는 사람을 사랑합니다. 

본문의 품꾼이 어떤 사람들이었습니까? 그들은 당시 아주 낮은 계층의 사람들이었습니다. 품꾼이란 글자 그대로 하루 벌어서 하루 먹고 사는 사람들 아닙니까. 이들은 로마 식민지 지배를 받고 있던 사람들이었습니다. 자연적인 악조건속에서 살아가던 사람들이었습니다. 누군가 나를 고용해 주지 않는다고 하면, 누군가 내게 품삯을 주지 않는다고 하면, 나는 굶을 수 밖에 없는 처지에 있었습니다. 내 처자식도 굶을 수 밖에 없었습니다. 부름받지 못했다 하더라도 할 말이 없는 존재였습니다. 이런 나를 불러준 주인 앞에 감사할 수 밖에요. 불평이라니요. 자기존재의 위치를 망각한 처사 아니었습니까?

이것이 인간의 모습이더란 말입니다. 오늘밤 하나님이 나를 불러가셔도 어쩔 수 없는게 인간입니다. 하나님이 부르지 않으면 버림받을 수 밖에 없습니다. 하나님이 나를 불러 주셨다! 여기에 감사외에 또 다른 무슨 흥정이 필요했습니까?

주인의 얼굴만 봐도 감사하고 써주신 그분의 은혜만 생각해도 가슴이 벅차 오릅니다. 처음부터 불평하고 일터에 간 것은 아닙니다. 처음에는 감사했을 것입니다. 주인의 손을 붙들고 고맙다고 인사도 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일을 진행하는 가운데에 후배들이 생긴 겁니다. 나중에 온 사람들이 생긴 것입니다. 선배 의식이 나를 지배하기 시작한 것입니다. 오랫동안 예수 믿으신 분들은 이 흥정의식, 동기의 변질을 조심해야 합니다. 이시간 행여 그 옛날 감격과 눈물, 감사의 기쁨은 다 사라지고, 그토록 뜨거웠던 열정은 모두 식어지고 섭섭증, 서운함, 공로의식, 흥정의식만 남아 있지는 않습니까?

주님과 첫 사랑을 맺었을 때에는 무엇을 해도 감사하고 작은 일을 하면서도 주님의 은혜가 사무쳤습니다. 그러나 시간이 흘러 갈수록 동기는 변질되었습니다. 올바른 동기가 결핍되기 시작한 것입니다. 그래서 먼저 된 자가 나중되고 마는 것입니다. 기쁨이 불평으로 끝나버렸습니다. 감사가 원망으로 끝나버리는 실패인생을 살게되는 것입니다.


V. 비교 의식

셋째, 교회생활에서 옳지 못한 태도 즉, 포도원에 먼저온 사람의 오해는 이웃과의 비교 의식입니다.

지금 이 사람들을 낙담케 하는 원인이 무엇입니까? 아침 일찍 일꾼들을 함께 불러서 하루종일 똑같은 일을 시키고 똑같이 한 데나리온을 주었다면 아무런 문제가 없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뒤늦게 온 사람들이 자기들과 똑같이 대접을 받고 있다는데 대한 시기심, 비교 의식이 생겨 그들을 불행하게 만든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자신을 그대로 받아들이지 못하고 남과 비교하다가 불행에 빠지곤 합니다. 


한 학교 교실에 아주 잘 생겼는데 얼굴이 까맣게 생긴 아이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옆자리에 아주 예쁘고 하얀 얼굴을 가진 아이가 있습니다. 그런데 하얀 아이는 까만 얼굴이 예쁘다고 얘기하고, 까만 아이는 하얀 얼굴이 부럽다고 얘기를 했습니다. 그래서 까만 아이가 자꾸 하얀 아이를 찾아가서 어떻게 하면 얼굴이 희어질 수 있느냐고 물었지요. 그래서 나도 잘 모르겠는데 표백제로 한번 씻어보라고 얘기했습니다. 그래서 저녁에 잘 때마다 표백제로 얼굴을 닦고 잠을 잤는데 더 얼굴이 새까매지는 겁니다. 이게 웬일인가? 하고 표백제 광고를 보니 ‘흰옷은 더욱 희게 색깔 옷은 선명하게! 옥시크린~!’

왜 비교하다가 불행해 하십니까? 비교하지 마십시오. 비교급 인생을 살지 말고 최상급 인생을 사십시요. 나는 나처럼 하나님 앞에 살고 너는 너처럼 하나님 앞에서 최상급 인생으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나는 내가 받은 은혜가 있고 너는 네가 받은 은혜가 있는 것입니다. 

이 지구상에 60억 인구를 줄이고 또 줄여서 똑같은 비율로 줄여서 100명을 만들었다면 어떤 사람들이 지구에 살까? 스텐포드 의대에 “필립 하츠 박사”가 재미있는 생각해 보았습니다. 60억 인구를 100명으로 줄여서 다른 인종들, 또 다른 문화적인 배경들, 또 다른 교육수준이 있는 사람들을 한 마을에 불러모아 보았습니다.

57명은 아시아인, 21명은 유럽인, 14명은 미주인, 8명은 아프리카인이었습니다. 52명은 남자, 48명은 여자였습니다. 70명은 비기독교인 30명은 교회를 다녔습니다. 20명만 자기 집에서 살았고 80명은 적정수준이 미치지 못하는 주거환경에서 살아야 했습니다. 100명 가운데 70명은 글을 알지 못하는 문맹, 절반에 미치는 50명은 영양부족을 겪고 있었습니다. 1명은 앓고 있거나 암 등 병원에서 중병으로 고생하고 있었습니다. 100명 가운데 1명만이 대학교육을 받았습니다.

이런식으로 생각해 나가다 보면 내 집에 살고, 먹을 게 있고, 글을 읽을 수 있는 사람이라면 아주 선택받은 사람이었습니다. 만약에 전쟁의 위험, 감옥에서의 고독, 기아의 괴로움 등을 경험해 보지 않은 사람이 있다면 세계인구 500만명 중에 한 사람이 되는 겁니다. 만약 고통, 체포, 고문, 심지어 죽음의 공포없이 매주 교회를 다닌 사람이 있다고 하면 특별한 행운아입니다. 냉장고에 먹을 것이 있고 몸에 입을 옷이 있고 머리 위로는 지붕이 있는데 잠 잘 수 있는 사람이라면 이 세상 75%의 사람들보다 더 풍요로운 삶을 살고 있는 것입니다. 만약에 은행에 약간의 돈이 있어서 내 아이가 아플 때 병원에 입원시킬 수 있고 내 지갑속에 약간의 돈이 있어서 그걸 끄집어내 친구에게 식사를 대접할 수 있는 사람이라고 하면 지구상에선 상위 8%의 부자에 속합니다.

여러분이 지금 어떤 형편에 처해 있든지 그만하면 행복할 수 있습니다. 너는 행복자로다. 행복한 사람입니다. 비교하다 불행해 지는 대신 감사하며 행복해 하십시오. 오늘 본문의 일찍온 노동자들은 남들과 비교하다가 행복과 복음의 본질을 잃어버리고 말았습니다.

여러분 가슴속에 경쟁 의식, 비교 의식이 있습니까? 아니면 동업자 정신, 동력 의식이 여러분 가슴속에 있습니까? 오늘 교회 교인들의 가장 가슴 아픈 치부를 보여주는 단면이 아니겠습니까? 우리에게 가장 부족한 것이 있다고 하면 그것은 곧 “함께 일하는 정신” “서로 인정하는 정신”입니다. 포도원, 교회는 가족의 모임입니다.

내가 나를 어떤 관점에서 보느냐 여하에 따라서, 내가 이웃을 어떻게 보느냐 여하에 따라서, 나는 행복한 삶을 살 수도 있고 불행한 삶을 살아 갈 수도 있습니다.


VI. 늦게 온 그가 당신의 자녀라면?

저는 하늘이 제대로 보이지 않는 산골마을에서 태어나서 어린나이에 아버지를 여의었습니다. 가난한 집에서 살아야 했습니다. 고등학교 시절 내가 가입한 서클이 폭력 서클로 인정이 되어져서 고등학교를 4년 다녔습니다. 자퇴 한번, 퇴학 한번, 무기정학 한번, 3성 장군이올시다. 사관학교에 시험을 쳤다가 보기좋게 낙방했습니다. 누가 보아도 문제아였습니다. 희망을 가지고 살수 있는 아이가 아니었습니다. 세상을 반항하며 얼마든지 내 인생을 부정하며 살 수 있는 아이였습니다. 그러나 나는 교회 다니는 일을 잊지 않았고 성경책 읽는 것을 잊지 않았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내 인생을 긍정할 수 있는 아름다운 안경을 내게 주셨습니다. 인생의 고난은 불행이 아니라 다른 사람이 갖지 못한 나만의 자산으로 여기며 살았습니다. 단 한번도 내 인생을 비관해 본 적이 없습니다. 내 인생 부정적으로 해석해 본적이 없고 부정적으로 말해본 적이 없습니다. 다른 사람들이 보면 희망을 가질 수 없는 어려운 여건과 환경속에 던져졌지만 저는 희망의 끈을 놓아본 적이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내게 긍정의, 믿음의 안경을 주셨기 때문입니다. 

문제는 관점이었습니다. 내가 하나님을 볼 것이냐 문제를 볼 것이냐. 내게 은혜를 베풀어준 주님을 볼 것이냐 불평거리 이웃을 볼 것이냐 여하에 따라서 감사하는 삶을 살 수도 있고 얼마든지 불평하며 살 수도 있더라는 것이지요. 

한없이 감사할 수 있는 자리에서 비교하다가 불행으로 끝나버리고 마는 것입니다. 그들은 주인의 은혜를 바라보지 아니하고 옆에 있는 사람들 나중온 사람들을 바라보며 불평을 터뜨렸습니다. 나를 불러준 하나님 은혜에 대한 감격보다는 내 이웃을 바라보면서 내 이웃이 나와 같이 잘 사는 것을 용납하지 못했습니다. 같은 주인의 은혜를 받고 살면서도 나보다 더 연약한 처지에 있는 사람들이 주인께 사랑받는 것을 마음으로 기뻐해 주지 못하는 옹졸함, 왜소함이 우리의 가슴이더란 말이지요.

일찍온 사람들의 진정한 기쁨이 어디에 있어야 하는 것이었습니까? 내가 만약에 아침 일찍 부름받은 사람이라고 하면 어떻게 살아갈 때에 어떤 신앙과 어떤 관점을 가질 때에 내가 승리하는 삶, 행복한 삶을 살아갈 수 있는 것입니까? 저 사람은 한 데나리온 받는데에 나는 두 데나리온 받는데에 기쁨이 있어야 하는 것 아닙니다. 늦게 온 사람도 같이 한 데나리온 받는 것을 보고 할렐루야 찬송하는 기쁨이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나와 같이 똑같이 한 데나리온 받는 그 사람이 나와 아무런 상관이 없다고 느끼기 때문에 오늘 본문이 이해가 안되는 겁니다. 오히려 불평하고 넋두리하는 사람들에게 동정하는 마음이 생기는게 우리의 마음입니다. 포도원 공동체 속에서 가족 의식을 잃어버렸을 때 이런 악한 해석이 나오게 되는 것입니다. 오후 늦게 부름받은 그 사람이 내 자녀라고 생각해 보세요. 내 남편, 내 아내라고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본문은 간단히 이해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도대체 구원받을 수 없고 은혜 받을 수 없고 은혜받을 수 없는 자식이 하나 있는데 5시에 포도원에 불려왔습니다. 그 자식이 똑같이 한 데나리온을 받습니다. 그 어머니는 눈물 흘리며 감사했을 것입니다. 그 아버지는 할렐루야! 춤을 추며 감사했을 것입니다. 내가 덜 받는게 문제가 아니었습니다. 우리 목장 목원들이 누리는 은혜 때문에 내가 기뻐할 수 있다고 하면, 여러분은 지금 천국에 기쁨을 맛보고 있는 것입니다. 내 교회가 하나님 앞에 쓰임 받는 아름다운 모습을 바라보고 내가 행복할 수가 있다고 하면 여러분은 이미 천국의 행복을 소유한 사람입니다.

주님이 고안하신 교회는 가족이었습니다. 그런데 이땅에 많은 교회들이 교회를 조직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교회를 문화라고 생각했습니다. 심지어는 교회를 기업으로 생각하기 시작했습니다. 여기에는 학교, 기업, 조직속에서는 경쟁이 있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여기는 비교 의식이 있을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여기는 특권 의식이 있을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아니요. 교회는 조직이 아니요. 하나님과의 아름다운 관계입니다.

천국가족의 아름다운 관계를 얼마만큼 회복할 수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여기는 비교해도 좋은 자리가 아닙니다. 경쟁의식을 가져도 좋은 자리가 아닙니다. 양반 의식을 가져도 좋은 자리가 아닙니다. 교회는 포도원 공동체는 아름다운 천국 공동체입니다. 너의 기쁨이 나의 기쁨이 될 때에 천국의 기쁨을 소유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너의 아픔이 나의 아픔이 될 때에 너의 슬픔이 나의 눈물이 되어 흐를 수만 있다고 한다면 우리는 이미 천국을 경험하고 살아가는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여기에는 불평도 원망도 시기도 질투도 있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뒤늦게 불려온 내 가족이, 뒤늦게 불려온 우리 목원들이, 나와 똑같이 한 데나리온 - 구원받고 용서받고 천국을 경험하고 하나님의 자녀의 권세를 누리며 살아가게 될 때에 우리 포도원 공동체는 천국을 이루고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주께서 말씀하십니다.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으니 포도원으로 들어오너라. 종말을 준비하라. 구원을 준비하라. 말씀하십니다. 주님 오시는 그날, 교회의 문을 열었을 때에 여기에 아름다운 포도원 공동체, 가족 공동체, 생명 공동체, 천국 공동체를 이루는 복된 교회가 되기를 원합니다.

먹을 것이 없는 한 가정에서 포도원 농장 인력시장에 아버지 어머니 아들 딸이 함께 나가 주인께 쓰임 받기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포도원 농장의 주인이 나타나 이리저리 일꾼을 찾더니 아버지만 데리고 갑니다. 그래서 아들 딸 어머니는 하루종일 눈이 빠지게 자기를 써 줄 사람을 찾고 있습니다. 아버지는 농장에서 일 하면서도 두고 온 가족들을 생각하며 일이 손에 잡히지 않습니다. 가족이 한푼이라도 벌어야 하는데 오후 3시쯤 아내가 농장에 들어옵니다. 눈물이 핑 돌지요. 아내는 남편이 부지런히 일하는 모습을 보며 밭으로 가서 일을 시작합니다. 

이제 일할 시간이 한 시간밖에 남지 않았습니다. 아들 딸이 부름 받기는 영 글렀구나 생각하는데 오후 5시, 느지막이 아들 딸이 농장에 불려옵니다. 어머니의 눈에서는 눈시울이 뜨거워지고 아버지는 허리가 끊어지도록 땅을 파도 피곤한 줄을 모릅니다. 저만큼 일하는 아들 딸이 얼마나 자랑스러운지 저녁 6시가 되어서 품삯을 나누어 주는데 한시간 밖에 일하지 않은 아들 딸에게 자기가 하루종일 일한 분량인 한 데나리온을 주는 겁니다. 그리고 자기에게도 동일한 한 데나리온을 줍니다. 그때 왜 저 어린 철없는 것들에게 한 데나리온을 주느냐고 불평할 아버지가 어디 있겠습니까? 그것 보면서 땅 바닥에 주저앉아 어머니는 울게 되는 것이고 아버지는 감사해서 덩실덩실 춤을 추게 되는 것이지요. 

오늘 본문의 늦게 온 이 사람들이 가족이라고 생각하면 금방 본문은 이해가 되어 지는 것입니다. 모든 것이 내가 가져야 되고 나를 통해서 이루어져야 되고 나만이 잘 되어야 되고 거기서 우리는 불행해 지는 것이지요. 내 이웃, 목장가족이 나보다 더 잘 될 때에 행복할 수 없었습니까? 목장 가족의 형통한 삶을 보면서 나는 왜 하나님께 감사할 수 없었습니까? 포도원은 가족의 기쁨을 누리는 곳입니다. 보상을 기대하다가 불평하고 원망하는 곳이 포도원이 아니라고 하는 것입니다. 

내가 섬길 수 있는 연약한 지체들, 늦게 온 사람들이 있을 때에 나는 그들을 섬기며 감사할 수 있고 그들은 섬김 받으며 행복을 누릴 수 있는 곳 그곳이 천국 공동체라는 것이지요. 보상의 기쁨보다도 일하는 행복, 부름받은 감격 그곳이 천국이라는 것입니다. 약한 자도 쓰임받고 못난 자도 사랑받을 수 있는 곳 그곳이 천국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포도원에 와서 일해라. 거기는 불평도 없고 원망도 없는 천국의 공동체이니라. 이것을 깨닫지 못할 때에 먼저된 자가 나중되리라. (류영모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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