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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스승주일] 스승의 자리 (요 1:35~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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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승의 자리 (요 1:35~38)

오늘은 스승의 주일입니다. 스승의 가르침이 얼마나 귀하고 그 사랑과 수고를 조금이라도 헤아려 감사하고 그를 위해 기도하고 위로하고 협력하고 순종하겠다는 의미에서 이 스승의 주일을 지키는 것입니다. 사람이 사람답게 만들어지는 것은 그를 기르고 가르친 스승에 의해서 되어지지 않습니까? 

우리 인생에는 스승이 세분이 계십니다. 
첫째 부모님입니다. 낳아주시고 사랑으로 가르쳐주신 기장 아름다운 스승입니다. 
둘째는 학교 선생님인데 지식과 기술과 인격을 더 나아가 인생의 비전을 가르쳐주시는 스승입니다. 그리고 
셋째는 교회 선생님인데 영혼을 구원의 길로 인도하여 맑고 바르게 살게 한 신앙의 지도자로 목사와 전도사 그리고 교사가 스승입니다. 이런 소중한 분들을 통해 다음 세대들이 영향을 받는 것 사실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오늘 다시 스승의 주일을 통해 깊이 생각해야 할 것은 영적 스승인 예수를 깊이 알아야합니다. 모든 그리스도인은 하나님 아버지의 자녀로 살아갑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구주시고 참 스승이십니다. 마7:28-29절에 보면 "예수께서 이 말씀을 마치시매 무리들이 그 가르치심에 놀래니 이는 그 가르치시는 것이 권세 있는 자와 같고 저희 서기관들과 같지 아니함일러라" 고 당시 산상에서 말씀을 듣던 수많은 사람들은 예수님의 가르침에 충격을 받습니다. 그리고 그 말씀 앞에 그들의 살미 변화되기 시작합니다.

오늘 우리가 택한 본문은 스승으로서 자신의 제자를 가장 가치 있는 인물로 살아가게 하는 아마 성경에서 가장 아름다운 스승과 제자의 관계를 보여주는 사건이라 생각합니다. 우리는 본문을 통해서 비록 짧은 생을 살아갔지만, 오히려, 그 짧은 생애를 통하여 그가 가졌던 아름다운 비젼을 삶으로 보여주었고 수많은 하나님 사람들에게 구원받은 자녀들이 이 땅에서 살아야 하는 삶의 가장 소중한 가치가 무엇인가를 보여주는 한 사람을 만나게 됩니다. 그의 꿈은 자신은 쇠하여야 되지만, 내가 소개하는 그 분 예수님은 흥해야된다는 꿈이 있습니다.

우리가 아시는 대로, 하나님 나라는 말라기 선지자이후 400년 동안 하나님 음성이 단절된 어두움의 시기에 살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어두움을 뚫고 유대광야에서 하나님 말씀이 사가랴의 아들 세례요한에게 임했습니다. 이 유대광야 는 오늘날처럼 시설이 잘 갖추어진 도시가 아닙니다. 사람들이 왕래하는 번화가는 더더구나 아닙니다. 낮이면 뜨거운 뙤약볕이 내리쬐고 밤이면 추위를 피하기 위해 모닥불을 피워야하고, 맹수들이 울부짖는 소리가 들리는 고적한 광야였습니다. 하나님은 거기서 세례요한을 붙잡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요한의 멧세지는 마음상한 사람들의 심령을 위로해주거나 인생의 고통 속에서 낙심하고 좌절한 자들을 향하여 따뜻하게 해주는 말씀이 아니라 죄를 지적하고, 회개를 촉구하는 대단히 원색적인 설교였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말씀을 들으려고, 이 도시 저 도시에서 사람들이 몰려왔습니다. 그의 인기는 하루가 다르게 치솟고 있었습니다. 그러자 사람들은 마음속으로 저분이 우리가 지금까지 기다리던 메시야가 아닐까하는 생각을 하기 시작했습니다. 또한 그를 따르는 수많은 제자가 생겼습니다. 그러나 세례요한은 자신은 메시야가 아니며 다만 나는 선지자 이사야의 말씀대로 ‘주의 길을 곧게 하라고 광야에서 외치는 자의 사명을 받은 소리꾼'에 불과하다고 자신을 낮추며 오실 예수님에 대해 증거합니다. 누구나 인기가 절정에 오르고 사람들의 기대가 높아지면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자기 분수를 벗어나기 쉽습니다. 모두가 메시야로 보면 마치 그런 것처럼 행동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요한은 대중적인 유혹에 넘어가지 않고 자기 분수를 지키고 있었습니다. 그는 예수그리스도를 위해서 자기 자신의 명예를 완전히 주님께 드렸습니다. 오늘 본분을 보면 그는 그것으로도 부족해서 자기가 사랑하는 제자를 쫓아 살아가기를 원하는 제자들까지 전부 예수님에게 양보했습니다. 그리고 자신은 사람들의 주목을 받지 않는 조용한 곳으로 물러났습니다. 여기 35-37의 말씀을 함께 보십시오. “또 이?날 요한이 자기 제자 중 두 사람과 함께 섰다가 예수님의 다니심을 보고 말하되 보라 하나님 어린양이로다 두 제자가 그의 말을 듣고 예수를 좇거늘”

자 보십시오. 자신이 피가 터지도록 외쳤던 그 참 빛으로 오신 예수, 생명의 예수가 오시는 것을 보고, 자기를 따르는 제자들에게 주저 없이 그들의 등을 떠밀어 예수님에게 가게 합니다. 세례요한은 사람들이 예수님만 주목하기를 원했지, 자기 자신이 주목받는 것을 원치 않았어요, 그는 어떤 자리, 어떤 환경 앞에서도 “예수는 흥해야겠고 나는 쇠하여야 하리라”는 이 삶의 목표를 결코 잊지 않았습니다. 이 하나님이 주신 삶을 놓치지 않았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진정한 스승은 다른데 있지 않습니다. 제자의 길을 바른 길로 열어주는 역할을 해야합니다. 1976년도 한국인 최초이자 시각장애인으로 박사가 된 강영우 박사를 여러분께서도 잘 아실 겁니다. 박사님의 ‘아버지와 아들의 꿈’ 이라는 책에 장남 진석군이 하버드에 지원할 때 받은 질문과 그에 답한 글이 있습니다. 당신의 인생에 가장 영향을 준 사건이나 경험은 무엇입니까? 이에 대한 진석군의 글은 대학입시 관계자들에게 많은 감동을 주었다고 합니다. 그 글은 이렇게 기록되고 있습니다.

“내 어린 시절을 회상해 보면 육안이 없이도 볼 수 있는 세계를 보여주신 맹인 아버지를 가지게 된 것이 얼마나 다행한 일이었는가를 깨닫게 된다. 두 눈을 뜬 내가 두 눈을 보지 못하는 아버지의 안내자가 아니라 맹인인 아버지가 정안자인 내 인생의 안내자 역할을 하신다는 것을 알게 된 것이다. 이제 나도 성장하여 대학에 진학할 나이가 되어 많이 변했다.

그러나 그러한 세월 속에 변하지 않는 것이 있다. 그것은 아버지가 잠자리에서 읽어주신 이야기들이 내게 미친 영향이다. 아마도 그 영향은 영원할 것이다. 그로 인해 내 상상의 세계는 넓어졌고 창의력은 개발되었으며 비전은 선명해졌다. 또한 잊을 수 없는 교훈을 배웠다. 아버지로 인해 나는 세상을 긍정적으로 보고 도전하며 편견과 차별이 없는 사회건설에 기여할 의욕을 갖게 되었으며 누구나 나의 스승이 될 수 있다는 삶의 태도를 갖게 되었던 것이다.”

자! 다시 본문을 보면 사랑하는 스승의 등 떠밀려 예수님께로 간 세례요한의 두 제자에게 주님이 그들을 향해 말씀하십니다. 38절에 “무엇을 구하느냐”고 말씀하십니다. 참 퉁명스러운 이야기입니다. 그래, 너희들 참 어려운 결단을 했다든지 어떤 격려가 있어도 서운한 판인데 “무엇을 구하느냐”고 따지듯 물어보고 있습니다. 이 말은 '"인기를 한 몸에 받으며 명성이 자자한 너희 스승을 따를 것이지 무엇 때문에? 왜? 나를 따르냐'는 질문입니다. 

그러므로 “무엇을 구하느냐" 이 말은 꾸짖는 것이 아니라 동기를 묻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빵과 고기를 얻기 위해 예수님을 따랐습니다. 어떤 사람은 명예와 세상 소욕을 위해 또 병을 고치기 위해서 예수님을 따랐습니다. 그렇다면 너희들은 그 위대한 스승을 뒤로하고 왜 나를 따르려냐 하는 것 아닙니까 보십시오. 그 위대한 스승인 세례요한을 떠나 예수께로 발걸음을 옮겼던 그들은 무엇을 원했기기에 예수의 제자가 될려고 했습니까? 만약 말입니다. 이들이 출세를 원했다면 당시 유대사회에는 유명한 신학교가 두 군데 있었습니다. ⅰ)샴마이 학교 ⅱ)힐렐 신학교입니다. 여기에 입학하여 얼마든지 학문을 연구하면 그들은 세상사람들에게 존경받을 수도 있습니다. 그것은 그들이 모르는게 아닙니다. 여기 예수님께서 던지는 질문인 ‘무엇을 구하느냐’는 우리에게 참으로 중요한 질문이 아닐 수 없습니다.

당시에 예수님을 따르던 수많은 사람들 가운데는 요6:26에 말씀처럼 “.....너희가 나를 쫓는 것은 표적을 본 까닭이 아니요 떡을 먹고 배부른 까닭이로다”고 했습니다. 정말 주님이 가슴 아프게 생각했던 것은 죄와 허물로 죽었던 자신들을 살리기 위해 이 땅에 오신 구원자 예수님의 그 은혜를 알고, 그 은혜를 깨닫고 주님을 원치 않으십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은 자기를 따라오려는 제자들을 향해서 마16:24절에 “아무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라. 그렇기 때문에 ‘너희가 무엇을 구하느냐? 이 말은 정말 심각한 질문이 아닐 수 없습니다.

여러분! 주님은 머리 둘 곳조차 없는 분이십니다. 보잘것없는 미물도 깃들고 거할 처소가 있는데 말입니다. 태어날 때부터 짐승이 머물던 구유에서 나셨습니다. 또 당시에 고통과 상처로 얼룩진 가난한 동네, 소외된 것으로 알려진 나사렛출신입니다. 그의 이력서를 보면 내세울 만한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 요즘 보십시오. 새 정부에서 장관을 세우는데도 인터넷을 통해 국민이 원하는 사람을 뽑는다 하지만, 그 인물들 역시 화려한 경력이 있고 또 내면적으로 인맥을 따라 세우려는 것이 우리의 잣대가 아닙니까? 심지어 교회에서도 그 교회에 담임을 뽑는데 보통이 아닙니다.

우리 광진구에 속한 어느 교회는 후임자를 세우는데 외국에서 학위를 해야하고, 교수 출신이어야 하고, 뭐 조건이 까다로워요. 이런 분위기는 오늘뿐만 아니라 예수님 당시도 인맥이나 화려한 경력이 그들의 출세의 잣대였습니다. 그렇게 본다면 정말 예수님은 우리에게 도무지 매력이 없는 인물이요, 아무런 기대치를 걸만한 것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당신에게 다가온 세례요한의 제자들에게 예수님은 “무엇을 구하느냐”고 말씀하셨던 것입니다.

그 때 두 제자는 예수님의 물음에 대답합니다. “랍비여 어디 계시오니이까?” (38F)동문서답 같지 않습니까? '무엇을 원하느냐는데 '어디에 있느냐'고 묻습니다. 얼른 보면 말도 안 되는 것을 같습니다. “랍비여 어디 계시오니이까?” 이 말은 현대어 성경에 보면 "선생님 어디에 계십니까?"이는 바꾸어 말하면 ‘우리는 당신을 압니다. 그러니 선생님과 함께 있기를 원합니다. ’라는 고백입니다. 아마도 이들은 예수께 완전히 마음을 빼앗겻던 모양입니다. 그래서 그 마음 가운데 ‘내가 원하는 것은 주님과 동행하는 것입니다. ’주님과 함께 있고 싶습니다.‘하는 생각이 들었던 것 같습니다. 또'무엇을 원하느냐'는 질문에 ’주님계신 곳을 가르쳐 주십시오, 우리가 주님과 함께 교제하고 싶습니다.‘라고 하는 것이 바로 세례요한의 제자’심정이었습니다.

'무엇을 구하느냐'라는 질문에 '어디계시오니까?'라는 대답 속엔 그들의 마음이 향하고 있는 것은 ‘무엇’이란 어떤 '조건' 때문이 아니라 ‘본질’인 ‘주님’이었습니다. 그들의 구하였던 것은 어떤 축복이 아니라 축복을 베푸시는 바로 그 분이었습니다. 그들은 세례요한으로부터 예수가 누구인지에 대해 깊이 깨달았습니다. 29절에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 어린양이로다” 36절에도 “보라 하나님 어린양"이라고 그들에게 어떤 의미인지 잘 알고 있습니다. 이 어린양은 속죄의 제물로 드려지는 희생양입니다. 구약시대에 이스라엘 백성 앞에 나아갈 때 자신들은 속죄할 제물은 어린양을 가지고 나아갔습니다. 그 어린양은 장차 오실 구원자인 메시야를 예표하는 것입니다. 지금 자기들 앞에 계신 이 예수께서 바로 나와 우리와 세상의 모든 죄를 지시고 십자가에서 속죄의 죽임을 당하실 뿐이라는 사실을 세례요한은 그의 제자들에게 이야기했던 것입니다. ‘그 분이 바로 우리가 소망하던 메시야다, 참 진리며 참 빛이시다. 그분이 우리의 영생입시다’

그러므로 이 세례요한의 두 제자가 예수를 따르는 것은 세상 적인 출세를 위해서도 아니요 만사형통의 복을 누리기 위해서도 아니라 예수와 함께 고난에 동참하기 위해 주님을 따르겠다는 그 각오로 '어디 계시오니이까'하는 대답을 했던 것입니다. 이들이 주님을 따르는 것은 어린 양으로 이 땅에 오신 예수님께 내 인생을 맡기겠다는 것입니다. 묻습니다. 내가 구원받고 하나님 자녀로 살아가는 이 모든 것이 하나님 은혜이심을 믿으십니까? 그 은혜 앞에 내 인생이 내 삶이 여기까지 온 것이 사실이라면 이제 우리도 여기 자기 스승을 떠나 그가 외쳤던 생명의 주님 앞에 “어디 계시오니이까?”라는 고백이 우리에게도 있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넘어지고 실수하는 내 모습에도 불구하고 나를 끝까지 믿어 주시는 신실하신 하나님, 실망 어린 나를 품에 안으시고 나를 변화시키기 위해 십자가에 죽으시고 부활하신 예수님, 나의 강팍한 가슴에도 불구하고 내 안에 불꽃으로 임하셔서 내 함께 하시는 성령님, 이와 같은 주님의 은혜 때문에 내가 여기에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 아침 성도 여러분! 특히 교사 여러분!
한 사람을 구원하고 그들을 세우는 일에는 적당히가 없습니다. 산모가 눈물을 흘리고, 땀을 흘리고, 피까지 쏟아야 한 생명이 탄생되듯이, 한 생명을 교회에 나오도록 하고 구원받게 하기까지는 눈물의 기도가 있어야 하고, 땀흘리는 수고가 있어야 하고, 희생의 피까지 쏟는 정성을 들여야 하는 것입니다. 또한 한 사람을 세워 하나님의 선한 일꾼으로 세우는 그 일 역시 해산의 수고가 아니면 감당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제가 중학교 때 제가 살던 집 마당 한 구석에 닭장이 있었습니다. 날마다 보는 닭이지만, 하루가 다르게 커가는 녀석들의 모습이 대견해서 배추 잎사귀도 주워오고 아카시아 잎도 따다 주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아침, 닭을 들여다보는 순간 저는 소스라치게 놀랐습니다. 하얀 닭 한 마리가 피를 철철 흘리며 쓰러진 채 눈만 깜박거리고 있는 것이었습니다. 그 닭은 수탉이었는데 꽤 큰놈이었습니다. 닭장 안에 닭이 왜 옆구리가 그렇게 상했는지 잘 몰랐는데 나중에 안 사실은 닭장 속에 쥐가 들어가자고 있는 닭의 날개 속에 들어가서 살을 마구 물어뜯어서 파헤쳐 놓은 것입니다.

더 놀라운 사실은 쥐가 그렇게 물어뜯는 동안에 닭은 감각도 없었는지 가만히 앉아서 속수무책으로 당한 것입니다. 닭장에 쥐가 들어 올 만한 구멍을 모두 막아버리고 나서야 닭들이 더 이상 피해를 입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을 모르고 구원의 길이신 그리스도를 알려고도 하지 않는 버려진 영혼들의 상태도 이와 마찬가지가 아닙니까? 사람을 세우는 스승은 단지 자기에게 보내진 영혼들에게 고급지식을 나누어주기 위하여 존재하는 일꾼이 아닙니다. 스승은 자기에게 맡겨진 그 한 영혼이라도 결코 포기 할 수 없는 주님의 부르심을 받은 하나님의 대리자들입니다.

그러므로 스승의 자리는 해산의 수고의 과정이 없이는 그 제자들이 바로 설 수 없기에 야고보도 약3;1에 "내 형제들아 너희는 선생된 우리가 더 큰 심판을 받을 줄 알고 선생이 많이 되지 말라" 고 말씀하지 않았습니까? 선생하지 말라는 것이 아닙니다. 선생의 중요성을 강조한 이야기입니다. 교사는, 스승은 단지 강단에서 잘 포장된 지식 보따리를 풀어 장사하는 고급 기술자들이 아닙니다. 당신들이 사명감을 가지고 사람세우는 수고의 그 가치를 알고 감당한다면, 이 스승처럼 보람된 일이 또 어디 있겠습니까?

성도 여러분! 한 사람을 구원하고 그들을 세우는 일에는 적당히가 없습니다. 산모가 눈물을 흘리고, 땀을 흘리고, 피까지 쏟아야 한 생명이 탄생되듯이, 한 생명을 교회에 나오도록 하고 구원받게 하기까지는 눈물의 기도가 있어야 하고, 땀흘리는 수고가 있어야 하고, 희생의 피까지 쏟는 정성을 들여야 하는 것입니다. 또한 한 사람을 세워 하나님의 선한 일꾼으로 세우는 그 일 역시 해산의 수고가 아니면 감당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기 교사로 모인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사실 예수님께서도 이 세상에 계실 때 수많은 사람들로부터 미쳤다고 모함을 받을 만큼 '해산의 수고'를 하신 분입니다. 그리고 그 예수님의 말씀대로 살려고 하는 수많은 성도들도 지난 2000년 역사 속에서 수많은 사람들에게 미쳤다는 소리를 들었습니다. 그러나 돌이켜 생각해 보십시오. 도대체 누가 미친 것입니까? 영원한 생명을 발견하여 그 영생을 위해 한 번밖에 없는 인생을 투자한 사람이 미친 것입니까? 아니면, 잠깐 후면 사라져 버릴 명성을 위해 죽을지 살지도 모르면서 온갖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는 사람들, 채 10년도 가지 못하는 권력의 바람에 자신의 목숨을 다 걸어 놓고 사는 사람들, 자신의 목숨을 깍아 먹고 있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술과 담배를 끊지 못하는 사람들, 그런 사람들이 미친 것이 아닙니까?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결코 포기 할 수 없는 그 일에 내 인생을 드릴 때 세상이 뭐래도 그것이 주님의 기쁨이 된다면, 물러서지 마십시오. 특히 교회 학교 교사로 몸담고 있는 선생님 여러분! 여러분은 지금 소위 교회 3D 직종에 있습니다. 아이들 다루기 어렵고, 힘들죠. 때로는 변화 될 것 같지 않는 저들의 모습 앞에 괜한 고생하는 것은 아닌지 하는 후회감도 있을 것입니다.

지난주에 교회학교 선생님들이 아이들에게 줄 선물을 챙기느라 토요일 날 교회 나온 모습을 보고, 저런 사랑의 모습 앞에 우리 아이들이 오늘 스승의 날이라고 그 수고를 알고 꽃 한 송이라도 준비를 했는지 하는 생각을 해 보았습니다. 그러나 그런 것 따지면 못해요. 교사는 미쳐야 되요. 언젠가 또 하나의 열매가 내가 가르친 아이들 가운데 일어날 것을 기대하며 더 열정을 가지고 미쳐야 됩니다. 예수님도 그런 말을 들었습니다. 전부 거꾸로 살아가는 세상 한복판에서 똑바로 살아가려는 사람은 미쳤다는 소리를 듣는 것이 당연합니다. 그러므로 담대하십시오. 용기를 잃지 마십시오. 오직 바로만 미치도록 정신을 똑바로 차리십시오.

오늘은 스승의 날이자 또 성령 강림 주일이기도 합니다. 교회에서 가장 불쌍한 사람은 성령의 능력을 힘입지 못한 채 신앙생활하는 사람입니다. 어떤 이는 이런 사람을 가리켜 “노예선의 노예처럼 배를 젓고는 있지만, 자신의 최종 기항지가 어딘지도 모르는 선원과 같은 존재다. 그들은 천국의 감옥간수로 와서, 천국을 천국이라고 못 느끼고 매우 지루하게 사는 제일 불쌍한 사람이다”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오늘 성령강림주일을 맞아 우리 가운데 성령의 능력을 힘입지 못한 채 무미건조하고 무기력한 신앙에 끌려 다니는 사람이 없기를 바랍니다. 예수 믿는 사람들은 그야말로 예수님의 사랑에 미쳐야 하는 사람들입니다. 예수님의 영이신 성령에 취해야 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러지 않고서야 어떻게 물이 바다를 덮음 같이 여호와를 아는 지식을 통해 세상을 복음으로 역사하는 성령의 계절을 가져오리라고 생각하십니까?

사랑하는 여러분!
“어디 계십니까?” 이는 결코 헛된 호기심에서 나온 대답이 아닙니다. 이는 나의 인생을 나의 모든 것을 당신에게 맡기겠다는 말입니다. 이 고백은 한 위대한 스승의 가르침에서 나왔고 그 제자 역시 자신의 한 생을 예수님 앞에 죽어도 좋은 목숨으로 기꺼이 내드리는 삶을 살았던 것입니다. 이제 스승의 주일에 우리가 다짐을 해야할 것은 우리 모두가 분별력과 통찰력을 가져야합니다. 그래서 정말 하나님의 영적인 영향력을 주는 여러분 모두가 되시길 바랍니다. 비전을 줄 수 있는 사람이 되십시오. 여러분의 자녀에게 물질을 남겨주려고 생각하지 마십시오. 비전을 물려줘야 합니다. 그런 자녀는 결코 멸망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꿈을 물려주는 교회, 그리고 여러 성도 분들이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기도하십시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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