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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어버이주일] 효자둥이 요셉 (창 46:28~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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효자둥이 요셉 (창 46:28~34)

중국 일주 여행이 평생 소원인 100세의 노모(老母)를 인력거에 태우고 어머니의 마지막 소원을 위해 중국대륙을 종단한 78세의 아들이 있었습니다. 
그는 2000년부터 만 3년 동안 노모를 태운 삼륜차의 페달을 밟으며 중국 전역을 돈 왕이민(王二民)이라는 노인입니다. 중국에서는 노인의 대륙 횡단 효도관광을 21세기 최고의 효행으로 꼽았다고 합니다. 
사람들은 언제부터인가 정든 고향을 눈부신 도시생활과 맞바꾸고 물질만능의 만세소리가 더 높은 곳에 자랑스럽게 정착했습니다. 이른바 핵가족시대에 사는 현대인들에게 효(孝)의 의미가 퇴색되는 것은 어쩌면 자연스러운 현상인지도 모릅니다. 개발도상국에 있는 중국이라고 다를 리는 없을 것입니다.

중국대륙을 감동시킨 왕노인의 효행은 노모가 이미 세상을 떠났지만 그 여운은 전 중국에 숨결처럼 흐르고 있습니다. 
성경에 나타난 축복의 사람들은 효(孝)와 무관한 사람은 없습니다. 그렇다면 효는 축복과 절대무관하지 않다는 쉬운 결론을 얻을 수가 있습니다. 여기 요셉은 효자둥이입니다. 둥이라는 말은 명사 뒤에 붙어서 어떤 특징을 가지는 아이임을 나타내는 애칭입니다. 예컨대 늦둥이, 해방둥이처럼 말입니다. 야곱에게 있어서 요셉은 효자둥이라는 표현이 썩 잘 어울린다고 생각합니다. 

Ⅰ. 그는 유년기에 아버지의 품안에서 효자둥이었습니다. 

옛말에 품(bosom) 안에 있어야 자식(子息)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또 자식도 품 안에 들 때 자식이지 제가 낳은 자식도 시집 장가보내면 사촌된다는 옛말이 있습니다. 
이 말은 자식도 멀리 떨어져 있으면 자식 구실을 못하게 된다는 것을 이르는 말입니다. 본래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으되 아버지의 품(bosom) 속에 있는 독생하신 하나님이 나타내셨다고 했습니다(요 1:18). 예수님을 하나님과 동일 본체로 설명할 때 품(bosom)이상의 적절한 단어가 없습니다. 따라서 품은 동일한, 같은, 한 몸이란 뜻을 함의하고 있습니다. 

1) 야곱이 깊이 사랑하는 아들입니다. 
창세기 37장 3-4절에 『요셉은 노년에 얻은 아들이므로 이스라엘이 여러 아들보다 그를 깊이 사랑하여 위하여 채색옷을 지었더니 그 형들이 아비가 형제들보다 그를 사랑함을 보고 그를 미워하여 그에게 언사가 불평하였더라 』고 했습니다. 
요셉이 태어날 때 야곱의 나이는 91세였습니다. 이쯤되면 요셉은 참으로 야곱의 늦둥이 아들입니다. 애굽의 바로 앞에 왔을 때 야곱의 나이가 130세였습니다(창 47:9). 
당시 요셉은 30세의 나이로 애굽의 총리에 취임했습니다(창 41:46). 이 후 7년의 풍년(창 41:47)과 2년의 흉년을 겪었기 때문에 요셉의 나이는 39세가 되었습니다. 따라서 야곱의 나이 130세에 요셉의 나이 39세를 제하면 91세라는 계산이 나옵니다. 야곱은 요셉을 깊이 사랑했다고 했습니다. 야곱의 여러 아들들 중에 가장 신앙이 좋고 효성스러웠던 요셉을 아비 야곱이 특별히 사랑했습니다. 

야곱이 요셉을 이렇게 사랑하게 된 이유는 가장 사랑했던 아내 라헬에게서 늦게 본 아들이라는 이유가 있습니다(창 30:22-24). 더욱이 요셉의 생모 라헬마저 죽고 없었기 때문입니다(창 35:19-20). 
여기 『지었더니 』(웨아사)는 '만들다'라는 동사(아사, )에 와우( )가 있어 습관적이고 반복적인 의미를 나타내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아비 야곱이 요셉에게 채색 옷을 한번만 만들어 준 것이 아니고 요셉의 옷이 낡을 때마다 채색 옷을 계속해서 만들어 주었다는 말입니다. 이러한 사실들을 감안할 때 아비 야곱이 요셉을 향한 사랑이 여타 아들과는 비교도 안될 만큼 깊었습니다. 

2) 꿈(Vision)이 있는 아들입니다. 
창세기 37장 5-11절에 『요셉이 꿈을 꾸고 자기 형들에게 고하매… 우리가 밭에서 곡식을 묶더니 내 단은 일어서고 당신들의 단은 내 단을 둘러서서 절하더이다… 내가 또 꿈을 꾼즉 해와 달과 열 한 별이 내게 절하더이다 하니라 그가 그 꿈으로 부형에게 고하매 아비가 그를 꾸짖고 그에게 이르되 너의 꾼 꿈이 무엇이냐 나와 네 모와 네 형제들이 참으로 가서 땅에 엎드려 네게 절하겠느냐 그 형들은 시기하되 그 아비는 그 말을 마음에 두었더라 』라고 했습니다. 
비젼(꿈)이 있는 아들은 부모에게 기쁨을 주는 자식입니다. 왜냐하면 그 꿈이 하나님으로부터 계시성을 띠고 온 것이기 때문입니다. 요셉의 꿈 이야기를 듣고 형제들은 미워했으나 아비 야곱은 그 말을 마음에 두었다고 했습니다. 마음에 두었다는 것은 그 말을 지키었다는 말로 잊어버리지 아니하고 기대를 가지고 생각하고 있었다는 말입니다. 

다니엘 7장 28절에 『그 말이 이에 그친지라 나 다니엘은 중심이 번민하였으며 내 낯빛이 변하였으나 내가 이 일을 마음에 감추었느니라 』고 했습니다. 
누가복음 2장 51절에 『예수께서 한가지로 내려가사 나사렛에 이르러 순종하여 받드시더라 그 모친은 이 모든 말을 마음에 두니라 』고 했습니다. 
야곱 자신도 꿈에 의해 계시를 받은 적이 있었기 때문에 요셉의 꿈을 함부로 취급하지 아니했습니다(창 28:12; 31:11). 꿈에 대해서는 부전자전이요 부자간에 이심전심입니다. 

3) 순종하는 아들입니다.
창세기 37장 13절에 『이스라엘이 요셉에게 이르되 네 형들이 세겜에서 양을 치지 아니하느냐 너를 그들에게로 보내리라 요셉이 아비에게 대답하되 내가 그리하겠나이다 』라고 했습니다. 
요셉은 형들이 자기를 미워하고 있는 줄 알면서도 아비 야곱의 심부름에 순종했습니다. 자식의 말이 언제나 부모의 마음을 그윽하게 하는 말이 있다면 그것은 『내가 그리하겠나이다 』라는 순종의 말입니다. 
부모가 자식을 키우면서 이보다 더 흐뭇한 말이 어디 있습니까? 부모가 자식에게 무엇을 하자고 했을 때 혹은 무엇을 하지 말라고 했을 때 "내가 그리하겠나이다"라고 하는 자식은 효자입니다. 자식의 마음에서, 자식의 입에서, 자식의 표정에서 마침내 이것을 행동화 시키는 자식은 부모를 행복하게 합니다. 백 번, 천 번 들어도 싫중나지 아니하고 다시 듣고 싶은 말, "내가 그리하겠나이다"가 아니겠습니까? 

Ⅱ. 그는 장년기에 아버지 품 밖에서 효자둥이었습니다. 

1) 출세하여 애굽의 총리가 된 아들입니다. 
창세기 41장 40-45절에 『너는 내 집을 치리하라 내 백성이 다 네 명을 복종하리니 나는 너보다 높음이 보좌 뿐이니라 바로가 또 요셉에게 이르되 내가 너로 애굽 온 땅을 총리하게 하노라… 바로가 요셉에게 이르되 나는 바로라 애굽 온 땅에서 네 허락 없이는 수족을 놀릴 자가 없으리라 하고 그가 요셉의 이름을 사브낫바네아라 하고 또 온 제사장 보디베라의 딸 아스낫을 그에게 주어 아내를 삼게 하니라 요셉이 나가 애굽 온 땅을 순찰하니라 』고 했습니다. 
요셉은 아버지 심부름으로 형들에게 갔을 때 17세 어린 소년이었습니다. 그는 이복형들에게 잡혀서 애굽으로 팔려갔습니다. 

요셉의 이복형들은 요셉이 짐승에게 찢겨 죽었다고 아비 야곱에게 거짓말을 했습니다. 그리고 요셉의 옷에 수염소 피를 묻혀서 아비 야곱 앞에 내 놓았습니다. 야곱은 요셉의 옷을 눈으로 확인하고 자기 옷을 찢고 굵은 베로 허리를 묶고 오래도록 아들을 위하여 애통했습니다. 이때 야곱은 그 어떤 자식의 위로도 거절했습니다. 요셉은 바로의 신하 시위대장 보디발에게 팔렸습니다(창 37:28-36).
요셉은 우여곡절 끝에 바로 왕이 꾼 꿈을 해석하게 되었습니다. 그 꿈은 애굽 땅에 7년 풍년이 오고 그 다음에 7년 흉년이 온다는 징조였습니다. 이 일로 요셉은 일약 애굽의 총리가 되었습니다. 

2) 아비 야곱의 안부를 묻는 아들입니다. 
창세기 43장 27절에 『요셉이 그들의 안부를 물으며 가로되 너희 아버지 너희가 말하던 그 노인이 안녕하시냐 지금까지 생존하셨느냐 』라고 했습니다. 
요셉은 17세에 아버지를 떠나 20년을 애굽의 낯선 땅에서 사랑하고 사랑받던 아버지를 그리워하며 살았습니다. 요셉은 가나안 땅에 흉년이 들어 애굽 땅으로 곡식을 사러 온 형들을 보고 옛날에 꾸었던 꿈을 생각해 보았습니다(창 42:9). 두 번째 곡식을 사러 형들이 왔을 때 요셉은 애써 슬픔을 다스리며 아버지의 안부를 형들에게 물었습니다. 

3) 아버지가 보고 싶어 방성대곡 하는 아들입니다. 
창세기 45장 2-3절에 『요셉이 방성대곡하니 애굽 사람에게 들리며 바로의 궁중에 들리더라 요셉이 그 형들에게 이르되 나는 요셉이라 내 아버지께서 아직 살아 계시니이까 형들이 그 앞에서 놀라서 능히 대답하지 못하는지라 』고 했습니다. 
요셉은 늙은 아버지를 생각하며 아버지가 그리워 통곡했습니다. 마침내 요셉은 형들에게 자신의 정체를 공개했습니다(창 45:1-5). 형제들은 놀란 가운데서도 감격적인 만남을 가졌습니다(창 45:13-15). 여기 요셉처럼 아버지가 보고 싶어 울 수 있는 자식은 효자입니다. 
요셉의 형들이 왔다는 소식이 바로의 궁에 들릴 때 바로와 신복들도 기뻐했습니다. 바로는 요셉에게 네 형들에게 명하여 너희 아비와 너희 가족을 이끌고 애굽 땅으로 오면 애굽 땅의 아름다운 것을 주고 기름진 것을 먹을 것이라고 했습니다(창 45:17-20). 그리고 먹을 것과 많은 선물과 함께 아비를 태우고 올 수레를 보냈습니다. 

Ⅲ. 그는 자신의 품에 아버지를 품는 효자둥이었습니다. 

1) 아버지를 기쁘게 하는 아들입니다. 
창세기 45장 26-28절에 『고하여 가로되 요셉이 지금까지 살아 있어 애굽 땅 총리가 되었더이다 야곱이 그들을 믿지 아니하므로 기색하더니 그들이 또 요셉이 자기들에게 부탁한 모든 말로 그 아비에게 고하매 그 아비 야곱이 요셉의 자기를 태우려고 보낸 수레를 보고야 기운이 소생한지라 이스라엘이 가로되 족하도다 내 아들 요셉이 지금까지 살았으니 내가 죽기 전에 가서 그를 보리라 』고 했습니다. 
창세기 46장 30절에 『이스라엘이 요셉에게 이르되 네가 지금까지 살아 있고 내가 네 얼굴을 보았으니 지금 죽어도 가하도다 』라고 했습니다. 
자식이 성공했다는 소식을 접한 부모의 기쁨은 그 기쁨이 죽음과 맞바꾸어도 좋은 기쁨입니다. 

2) 아버지의 지위를 영화롭게 하는 아들입니다. 
창세기 47장 10절에 『야곱이 바로에게 축복하고 그 앞에서 나오니라 』고 했습니다. 
바로는 꿈을 해석하는 요셉을 처음 만나서 하나님이 말씀하시고 그 분이 살아계시다라는 뜻의 애굽어로 '사브낫바네아'로 이름을 지어 주었습니다(창 41:45). 
이러한 사실을 감안할 때 바로가 요셉의 아비가 되는 야곱의 축복을 받는 것은 바로 왕 자신에게도 큰 의미로 작용했을 것입니다. 

3) 아버지를 공궤하는 아들입니다. 
창세기 47장 12절에 『또 그 아비와 형들과 아비의 온 집에 그 식구를 따라 식물을 주어 공궤하였더라 』고 했습니다. 
애굽의 고센 땅에서 야곱의 족속들은 산업을 얻고 생육하여 번성했습니다(창 47:27). 야곱이 애굽 땅에서 17년을 살았으니 그의 수가 일백 사십 칠 세였습니다(창 47:28). 

4) 아비의 유언을 맹세코 실천하는 아들입니다. 
창세기 47장 29-31절에 『이스라엘의 죽을 기한이 가까우매 그가 그 아들 요셉을 불러 그에게 이르되… 애굽에 장사하지 않기를 맹세하고 내가 조상들과 함께 눕거든 너는 나를 애굽에서 메어다가 선영에 장사하라 요셉이 가로되 내가 아버지의 말씀대로 행하리이다… 내게 맹세하라 맹세하니 이스라엘이 침상 머리에서 경배하니라 』고 했습니다. 야곱의 유언은 어떤 경우에든지 애굽은 애굽이고 가나안 땅은 가나안 땅일 수밖에 없습니다. 부모의 유언을 들어 주는 자식은 효자입니다. 

5) 늙어 눈이 쇠한 아비의 권위를 끝까지 인정하는 아들입니다. 
창세기 48장 10절에 『이스라엘의 눈이 나이로 인하여 어두워서 보지 못하더라 요셉이 두 아들을 이끌어 아비 앞으로 나아가니 이스라엘이 그들에게 입 맞추고 그들을 안고 』라고 했습니다. 
요셉은 에브라임과 므낫세를 데리고 부친 앞에 나아갈 때 야곱이 축복하겠다고 했습니다. 요셉이 아비 무릎 사이에서 두 아들을 물리고 땅에 엎드려 절했습니다. 그리고 에브라임을 부친의 좌수로 향하게 하고 므낫세를 부친의 우수로 향하게 했습니다. 
이때 야곱이 손을 반대로 어긋맞게 얹었습니다(창 48:8
-14). 요셉이 부친의 갑작스런 행위에 대하여 기뻐하지 아니했습니다. 그러나 야곱이 손을 어긋맞게 손자들을 축복하는 이유를 설명할 때 요셉은 부친의 뜻대로 두 아들이 축복을 받도록 했습니다(창 48:17-22). 

6) 아비의 시체 앞에 마지막 정성을 다하는 아들입니다. 
창세기 50장 13절에 『그를 가나안 땅으로 메어다가 마므레 앞 막벨라 밭 굴에 장사하였으니 이는 아브라함이 헷 족속 에브론에게 밭과 함께 사서 소유 매장지를 삼은 곳이더라 』고 했습니다. 
부친의 유언에 따라 야곱의 시신을 가나안 땅으로 메어다가 마므레 앞 막벨라 굴 곧 선영에 장사 지냈습니다(창 50: 13-14).죽음의 경지를 지나 애굽의 총리가 되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요셉은 아버지의 품 안에 있을 때 효자둥이었습니다. 그는 순종하므로 아버지로부터 사랑을 받았습니다. 그는 원치 않은 일로 아버지 품을 떠나 타국에서 22년 세월이 지나는 동안 아버지 품 밖에서도 효자둥이었습니다. 요셉은 그의 부친이 원치 않은 환란을 당하여 죽음의 경지에 이르렀을 때 그가 받은 축복의 품으로 아비를 품는 효자가 되었습니다. 
요셉 자신이 부친의 품속에서 평안을 누렸듯이 요셉은 기력이 쇠하고 눈이 쇠한 부친과 그의 형제와 골육들을 품어 주는 가슴이 되었습니다. 
부모가 늙어 나이가 많으면 어린아이가 된다는 말이 있습니다. 효자는 성년이 되면 하나님으로부터 자기가 받은 축복의 가슴을 열고 어버이를 품을 수 있어야 합니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효(孝)라는 의미는 금세와 내세에 상벌을 연상케 하는데 익숙해져 있습니다. 까마귀는 자란 뒤에 어미에게 먹이를 물어다 준다고 합니다. 그래서 어버이의 은혜에 대한 자식의 지극한 효도를 가리켜 '반포지효'(反哺之孝)라는 말이 나왔습니다. 

나무는 고요하고자 하나 바람은 멎지 않고 
자식은 봉양하고자 하나 어버이는 기다려 주지 않는다.
(樹欲靜而風不止 子欲養親不得)의 준말로 '풍수지탄'(風樹之嘆)이란 말이 있습니다. 
이 말은 효도를 다하지 못한 채 어버이를 이별한 자식의 슬픔을 이르는 말입니다. 
효성이 지극했던 한백유(韓佰兪)는 어버이로부터 종아리를 맞고 아프지 않다 하여 어버이의 노쇠함을 탄식하는 말로 '백유읍장'(佰兪泣仗)이라고 했습니다. 
공자의 제자 '자로'가 가난하여 매일 쌀을 등짐으로 백리 밖까지 운반하면서 그 운임으로 양친을 봉양했다는 지극한 효성을 이르는 말로 '자로부미'(子路負米)라는 고사성어가 있습니다. 

효자는 날을 아낀다는 뜻으로 될 수 있는 한 오래 부모에게 효성을 다하여 섬기고자 하는 마음을 이르는 말로 '효자애일'(孝子愛日)이라는 고사성어가 있습니다. 
자식은 어릴 적 부모의 품 안에 있을 때도 효녀효자가 되어야 합니다. 성년이 되어 부모의 품 밖에 있을 때도 효자효녀가 되어야 합니다. 어버이가 이 세상에서 기력이 쇠할 때 자식은 자신이 받은 축복의 가슴을 열어 어버이를 품을 수 있는 효자가 되어야 합니다. 

어떤 정치인이 국회의원 선거에 공천을 받지 못한 측근들에게 무소속으로 출마해서 꼭 살아서 돌아오라고 한 말이 생각납니다. 부모의 품 안에서 모든 형제들보다 부모로부터 인정받아야 합니다. 부모의 품 밖에서 험한 세상으로부터 절대 살아남아야 합니다. 부모의 품 안에서 사랑받아야 합니다. 부모의 품 밖에서 축복을 받아야 합니다. 부모가 늙으면 어린아이 같은 부모를 자신이 받은 축복으로 봉양해야 합니다. 효자둥이라는 갸륵하고 아름다운 이름은 순종과 축복이 가져다주는 영광의 별칭입니다. -아 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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