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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가정의달] 축복하시는 하나님 (막 10:13~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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축복하시는 하나님 (막 10:13~16)

  가정의 달에 아주 특별한 책 한 권을 읽었습니다. 
대학에서 생명과학을 가르치는 김성호 교수가 쓴 “큰오색딱따구리의 육아일기” 입니다. 지리산자루에서 둥지를 짓고, 알을 낳고, 부화하고, 먹이를 물어다 먹이는 큰오색딱따구리의 번식 생태과정의 이야기입니다. 50일간 거의 매일 새벽 5시경부터 저녁 9시까지 밤낮 관찰하여 기록한 것입니다.  

  총 몸길이 27센치미터의 큰오색딱따구리의 부부는 후손번식을 위하여 새로운 집을 마련합니다. 고사목에 부리로 구멍을 파서 새 집을 만들 때는 수컷 새보다는 암컷 새가 더 열심입니다. 알을 낳아 알을 품을 때에는 가슴부분의 깃털을 뽑아 피부의 온기로 직접 부화를 시키는데, 암수 교대로 일을 합니다. 알이 부화되어 그 새끼가 자라는 동안에는 매일 저녁부터 다음 날 아침까지는 반드시 수컷이 둥지를 지킵니다. 새끼를 기를 때는 매일 약 60회 먹이를 물어다 주는데, 대략 15분마다 한번 먹이를 잡아가지고 오는데 아빠 새가 39번 정도를 담당합니다.  

  알을 품기 시작한 지 13일째 새끼가 부화하여, 어미 새들의 사랑과 정성의 돌봄 속에 27일이 지나자 엄마 새는 두 마리의 새끼들을 하루 간격으로 둥지에서 밖으로 유인하여 독립적인 삶을 영위하게 합니다.  
  김성호교수의 관찰 50일째 기록은 나의 눈시울을 적시게 하였습니다. 어제 첫째를 분가시킨 엄마 새는 입에 벌레를 잔뜩 물고 와서 둘째를 둥지에서 밖으로 유인합니다. 그렇게 독립의 삶을 시작합니다. 아빠 새는 둘째가 둥지를 떠났다는 사실을 전혀 알지 못하고 전과 같이 입에 먹이를 잔뜩 물고 둥지를 찾아옵니다. 그러나 둘째는 둥지 안에도, 바깥 어디에도, 어디에서도 보이질 않습니다. 아빠 새는 또 다시 둥지 안을 들여다보고, 주변을 샅샅이 헤매면서 둘째를 찾습니다.  

“부리에는 네 시간 전에 물고 왔던 먹이가 그대로 있습니다. 이제는 포기하는 모양입니다. 주위를 한번 찬찬히 둘러보더니 그렇게 홀연히 먼 북쪽 산을 향해 날아갑니다. 서쪽 산으로 노을이 유난히 곱게 물듭니다. 큰오색딱따구리 가족의 모습은 더 이상 보이지 않습니다.”

  오직 새로운 번식을 위하여 마련한 새 집에서 새끼를 키워 보낸 다음 어미도 새끼도 다시는 그 집으로 돌아오지 않습니다. 후손을 잇는 일을 위하여 여 그토록 치열한 사랑으로 책임을 다하는 어미 새는 자식 새에게 그 어떤 대가도  기대하지 않고 오직 스스로 자립할 수 있을 때까지 그 엄청난 사랑의 책임을 다한 모습 속에서 한 가지 진리를 알게 되었습니다. 

이 땅에 풍성한 생명을 이어가는 힘은 사랑입니다. 사랑은 생명을 탄생하게 하고, 성장시키고 성숙하게 합니다.

헬라어에서는 사랑이라는 말을 그 성격에 따라 달리 표현합니다. 이성간의 육체적인 사랑을 에로스, 부모의 자식에 대한 희생적인 사랑을 스톨게, 친구간의 우정을 담은 사랑을 휠리아, 조건 없는 완전한 하나님의 사랑을 아가페라고 부릅니다. 

김성호교수의 큰오색딱따구리의 육아일기를 읽으면서 생각했습니다. 사랑의 대상이 무엇이든지 사랑의 본질을 손상시키지만 않는다면, 사랑은 아름답고 거룩하고 위대합니다. 세상의 아름다움은 수고를 마다하지 않는 헌신적인 사랑의 열매입니다. 오늘 세상이 이처럼 아름다울 수 있는 것은 하나님의 사랑 때문입니다. 독생자까지 아낌없이 주신 그 사랑으로 저와 여러분들을 돌보십니다. 아직 우리 밖에 있는 사람들에게도 은혜를 베푸십니다.   

  가정의 달 오월입니다. 어린이주일에 어린이들을 축복하시는 예수님을 만납니다. 
어린아이들은 우리가정사의 중요 의사 결정에 직접 동참하거나, 자발적인 책임을 지는 일은 거의 없지만, 그 모든 과정에 항상 가장 중요한 존재로 고려되는 존재입니다. 아이들은 어떤 이유로도 사랑의 보살핌에서 소홀히 여겨져서는 안 됩니다. 그리고 아이들의 돌봄에는 많은 정성과 에너지가 필요합니다. 그러나 그 수고의 수고에는 그 아이로 말미암는 신비한 보상이 함께 있습니다.  

  지난 2월에 저희 집에 둘째 아이 결혼식이 있었습니다. 큰 딸아이가 손녀딸을 데리고 와서 11일간 함께 있다가 돌아갔습니다. 그동안 시댁 어른들에게 이상한 일이 일어났습니다. 매일 돌봐주시던 손녀가 없는 며칠은 아주 홀가분한 시간을 지냈습니다. 그런데 3,4일이 지나자 이 두 분에게 건강상의 문제가 생겼습니다. 혈압과 당의  수치가 조율되지 않아 병원처방을 받고 노력했는데도 아주 고생을 하셨습니다. 그러데 손녀가 돌아온 날로부터 모든 것들은 정상으로 돌아왔습니다. 이것이 사랑의 신비입니다.  
  
  예수님의 만져주심을 바라고 사람들이 어린아이들을 데리고 나왔습니다. 
내 생명보다 더 소중한 자녀들이 예수님의 축복을 받게 하는 일은 세상의 그 어떤 일보다 더 중요한 일입니다. 서로 자기의 자녀를 더 먼저 주님의 축복을 받게 하려고 앞 다투어 나왔을는지 모릅니다. 이 장면을 못마땅하게 여긴 제자들은 어른들을 꾸짖었습니다. 아이들 일로 예수님의 사역이 방해를 받는다고 생각한 것 같습니다.   

바로 그 때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화를 내시며 말씀하십니다. 
“어린 아이들이 내게 오는 것을 허락하고, 막지 말아라. 하나님의 나라는 이런 사람들의 것이다.····누구든지 하나님의 나라를 어린 아이와 같이 받들지 않는 자는 결단코 들어가지 못하리라.”
하나님의 나라는 이런 자의 것이다. 

하나님의 나라를 어린 아이처럼 받들어야 한다. 
주님의 이 말씀은 무슨 뜻일까요? 어린아이들의 개방적이고, 순진하며, 겸손한 성품을 가져야 천국에 들어갈 수 있다는 뜻으로 하신 말씀일까요? 

아닙니다. 여기서 우리가 알 수 있는 대단히 중요한 두 가지 사실이 있습니다.
하나는 예수님께 나아왔다는 데 있습니다. 
자기스스로의 의지이든 아니든 지금 예수님께 나아오고 있는 이들의 것입니다. 예수님은 길이요, 진리요, 생명입니다. 누구라도 예수그리스도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 갈 자가 없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모든 사람들을 초청하십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또 하나는 가난한 마음으로 주님을 신뢰하는 데 있습니다. 아이들은 나약합니다. 스스로 아무 것도 할 수 있는 것이 없습니다. 지금 어른들의 품에 안기어 주님께 나아오는 자들은 전적으로 의존되어져 있습니다. 아이들이 어른들에게 의존되어져 있듯 전적으로 신뢰하는 자들에게 천국은 선물로 주어집니다.  
“마음이 가난한 자들은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임이라.”(마태5:3)

누가복음18장 15-17까지 오늘 본문과 동일한 말씀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중요한 사실은 이 말씀의 전후에 기록된 말씀들에 있습니다.  

1)이 말씀의 앞에는 누가복음 18:9-14 바리세인과 세리의 기도를 말씀하십니다. 바리세인은 성전에 나와서 많은 자신의 의로운 일들을 말하고 있습니다. 저 세리처럼 인생을 함부로 살지 않고 십일조헌금도 철저히 드렸고 금식도 했다고 합니다. 그러나 뒤에 한 사람 세리는 얼굴을 들지 못한 채 기도합니다. “주님 저는 죄인입니다.” 예수님은 이 두 사람의 기도 중에 하나님은 세리의 기도를 들으셨다고 하셨습니다. 
 
2) 이 말씀 후의 누가복음18:18-30에는 한 부자관원의 이야기를 하십니다.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을 수 있습니까?” 하는 질문에 예수님은 대답하십니다. “먼저 소유를 다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나누어 주라. 그리하면 하늘에서 보화가 네게 있으리라. 그리고 와서 나를 좇으라.” 이 사람은 돌아가서 다시는 예수님께 오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이런 자의 것이라 하신 말씀의 뜻을 깨닫게 하는 부분입니다. 바리세인들은 자신들의 부분적인 율법의 옳은 행위가 천국의 적합한 조건이 될 것으로 생각하였습니다. 내가 무엇인가 올케 살았다는 것으로 천국 가는 경쟁이라도 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예수님은 어린아이처럼 모든 것 내려놓고 전적으로 십자가의 은혜를 의지하는 사람에게 천국은 선물로 주어지는 것이라고 가르칩니다. 
예수님은 가난한 마음으로 전적으로 어른들에게 의존되어진 채 예수님께 나아오고 있는 모습을 보시고 말씀하십니다. 

“누구든지 이 어린아이들처럼 천국을 받들지 않는 자는 천국에 들어갈 수 없다.” 
  
예수님은 데리고 나온 아이들 하나하나를 소중히 여기셨습니다. 
안아주십니다. 안수하여 주십니다. 축복하여 주십니다. 

1.안아주심은 용납하는 사랑입니다.  

축복의 시작은 안아주심으로부터 이루어집니다. 안아주는 것은 내가 너를 용납한다는 행동의 언어입니다. 내가 너를 인정한다는 행동입니다. 
세상은 인정받지 못할까봐 불안합니다. 
이명박 정부는 국민들의 절대적인 지지를 받으며 청와대에 입성하였습니다. 
그러나 지금 쇠고기 수입사건으로 국민적인 저항에 직면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구원의 의지를 탕자의 비유를 통하여 알게 하십니다. 
하나님의 용납하십니다. 모든 것을 탕진하고 난 다음 그 실패한 모습 그대로를 받아주십니다. 죄지은 모습 그대로! 
실패한 모습 그대로! 
지금 내 모습 그대로를 용납하시는 사랑입니다. 
전도하면 이렇게 말씀하시는 분이 계십니다. 
“죄를 많이 지어서 교회 못갑니다. 생활이 좀 정리되면 나가지요.”

이 말은 진실입니다. 누구도 자신의 삶을 정직하게 돌아보는 사람이라면 말입니다. 성전에 올라가 머리를 들지 못하고 “나는 죄인입니다.” 라고 기도하는 세리가 따로 있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 앞에 살아온 우리 자신의 모습입니다. 주님은 이런 우리의 삶의 현재를 받아주십니다. 나약하고 보잘 것 없는 어린아이를 안아주시듯 말입니다. 이 사랑의 용납하심에 우리의 구원이 있고 하나님의 축복이 있습니다. 
이런 의미에서 상대방을 진심으로 안아주는 행위인 “허거”는 참 좋습니다. 사랑하는 가족을 안아주십시오. 아이들을 안아주십시오. 아내를 남편을 안아주십시오. 안아줄 때는 많은 말이 필요하지 않습니다. 오직 한 마디가 필요합니다. 
“내가 너를 사랑한다.” 
용납받기 위하여 반드시 만회할 필요는 없습니다. 
염치가 있지, 어떻게 이 모양으로 나를 받아달라고 말할 수 있단 말인가! 이렇게 생각해서 원상복귀 하고난 다음에 돌아가겠다고 하면 영원히 돌아오지 못할지도 모릅니다. 현재의 모습 그대로 하나님은 받아주십니다. 예수님은 그렇게 어린 아이들을 안아주십니다. 영적으로 어린 아이 같은 저와 여러분들을 받아주십니다.  

2.안수하심은 내게 있는 것을 다 주는 사랑입니다.   

예수님은 어린 아이들을 안고 “저희 위에 안수하셨습니다.” 
안수는 단순히 용납하시는 행위에서 한걸음 더 나아가는 축복의 더 높은 단계의 행동입니다. 안수하는 것은 손을 상대방의 신체적인 일부에 갖다 얹는 것입니다. 일반적으로 손을 머리 위에 얹게 되는데 이것은 머리가 사람에게서 가장 고상한 부위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반드시 머리에만 하는 것은 아닙니다. 상대방의 아픈 환부에 손을 얹을 수도 있습니다. 안수하는 것은 어떤 능력이나 자질들을 그 사람에게로 전달하는 수단입니다.  
성경에는 많은 경우 안수를 하였습니다. 

구약성경 레위기16:21에는 제사장은 아셀 양(염소)에게 안수함으로써 백성들의 죄를 그 염소(양)에게 의식적으로 전가(轉嫁)시켰습니다. 속죄의식을 행하였습니다. 

창세기48장에는 야곱은 요셉의 아들들에게 안수함으로써 축복을 베풀었습니다.

민수기27:18-23에는 모세가 여호수아에게 안수함으로써 자기의 직임을 위임하는 장면을 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회당장  야이로의 딸을 살리실 그 위에 손을 얹으사 그를 일으키십니다.(마가복음5:23)

오늘 본문의 말씀에는 아이를 축복하실 때에 손을 얹어서 안수하셨습니다.(막10:16)
 
교회시대에는 환자를 치료하고 사람을 축복하는 일에 안수하였습니다.(행9:17) 
세례 후에 성령받기 하기위하여 안수하였습니다.(행8:14- 19:1-) 
교회의 직임을 맡는 사람들에게 안수하였습니다.(행6:6, 13:3)
특별한 성령의 은사를 받게 하기 위하여 안수하였습니다.(딤전4:14, 딤후1:6) 

믿음의 사람들이 다른 사람에게 안수하는 것은 거룩한 축복의 행위입니다. 기도할 때 그냥 할 수도 있지만 손을 잡고 하거나 환부에 손을 얹고 기도할 수 있습니다. 내게 있는 모든 것을 상대방에게 위임하는 축복입니다.  


3.축복은 하늘의 은혜를 빌어주는 사랑입니다. 

안아주는 것은 상대방을 있는 그대로 용납하여 주는 것입니다. 안수하여 주는 것은 내게 있는 것을 상대방에게 위임하여 주는 것입니다. 그러나 축복하는 것은 내게 없는 것까지 임하게 되기를 빌어주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의 복이 임하도록 기도하는 것입니다. 

내게 있는 것을 다 주는 사랑으로도 부족합니다. 
세상의 어느 부모도 자식에게 나만큼만 되라고 하지 않습니다. 나보다 더 큰 사람이 되기를 기대합니다. 그래서 있는 힘 다해서 공부시킵니다. 내 집을 줄여서라도 자식 살 집 마련하여 줍니다. 내가 희생해서라도 자식이 잘 된다면 기꺼이 희생하려고 합니다. 그렇게 내게 있는 것을 다주어도 부족함을 느끼는 것이 사랑입니다. 그래서 축복하며 기도합니다. 

세상의 일들이 내가 원하는 대로 내가 노력하는 대로 다 된다면 기도가 왜 필요합니까? 하나님의 도움심이 왜 필요합니까? 그렇다고 나는 아무 것도 하지 않고 가만히 누워서 감이 입으로 떨어지기를 기다리듯 요행을 바라라는 것이 아님을 여러분은 잘 아십니다. 세상은 그렇게 호락호락하지 않음을 알기에 하나님의 은혜를 있어야 합니다. 도우시는 하나님의 은혜가 절대적으로 필요합니다. 

세상은 천차만별합니다. 
“기는 사람이 있고, 기는 사람위에 걷는 사람 있습니다. 걷는 사람 위에 뛰는 사람, 뛰는 사람 위에 나는 사람이 있습니다.”
이 치열한 경쟁의 세상에서 승자가 된다는 것은 결코 쉽지 않습니다. 그리고 영원한 승자는 존재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나는 사람 위에 또 한 사람이 있습니다. 
“하나님과 함께 하는 사람입니다.”
바로 이일을 위하여 하나님의 축복이 있습니다.  
   
축복한다는 것은 “복되게 선언하다”는 뜻입니다.  
축복에 관한 성경의 가르침은 세 가지로 정리됩니다. 

하나님이 사람에게 축복하시는 두 가지 경우가 있습니다. 
하나는 영적인 축복입니다. 
하나님이 사람을 축복하셔서 하나님의 자녀가 되고 하늘의 신령한 은혜를 입어 누리는 것입니다.(행3:26, 엡1:3, 갈3:8,9)

다른 하나는 현재적인 축복입니다. 
하나님이 믿음의 사람 이삭을 축복하심으로, 농사를 지어 백배의 수확을 얻었고, 창대하고 왕성하여 마침내 거부가 되었습니다.(창26:12, 13, 대상4:10) 

예수님은 영적인 축복과 현세적인 축복을 동시에 말씀하셨습니다. 
마가복음10:29,30입니다. 
“예수께서 말씀하셨다. ‘내가 진정으로 너희에게 말한다. 나를 위하여 또 복음을 위하여 집이나, 형제나, 자매나, 어머니나, 아버지나 자녀나 논밭을 버린 사람은, 지금 이 세상에서는 박해도 받겠지만, 집과 형제와 자매와 어머니와 자녀와 논밭을 백배나 받을 것이고, 오는 세상에서는 영생을 받을 것이다.’ ”

그리고 세 번째는, 하나님의 축복을 받은 사람들이 하나님을 축복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베푸신 은혜를 인하여 하나님을 송축합니다. 이 하나님을 축복하는 것은 감사와 찬양으로 표현합니다.(시145:1,2) 느9:5, 눅1:64) 

예수님은 우리에게 축복의 사람이 되라 하십니다. 
“누구든지 너희가 복을 빌면 그 복이 그대로 임할 것이다. 그러나 만약 그 빈복을 그가 받기에 합당하지 않으면 그 복이 다시 너희에게로 돌아온다 하십니다. 심지어 내게 악한 일을 행한 사람에게까지 축복하라 하십니다. 그렇게 하는 것이 복을 유업으로 잇는 길이라 하십니다.(약3:9)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구원받은 하나님의 자녀들에게 축복의 권세가 주어져 있습니다. 

예수님의 축복하심을 본받으십시오.
먼저 안아주십시오.
안수하여 주십시오.
축복하여 주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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